AC.408-410을 읽으면 매우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알면서 그것들을 인정하고 믿은 뒤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는 상태를 매우 위험하게 설명하는 한편, 그것들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모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진리를 배우지 않는 것이 안전한 것 아닐까요? 주님과 말씀에 관하여 적게 알수록 모독할 위험도 줄어든다면, 무지가 오히려 유리한 상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408의 요점은 ‘무지가좋은상태’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모독’이 단순한 무지나 불신앙과 같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거룩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자기 안에서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가 다시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는 방식의 모독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반면 사람이 진리를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신앙의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그 반대되는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면 서로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들이 그의 내면에서 뒤섞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위험하다고 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모르는사람’과 ‘알면서거부하는사람’ 사이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AC.410은 황폐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알면서도알려하지않고,보면서도보려하지않는’ 상태이며, 다른 하나는 무지 때문에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후자의 사람에게 진리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완성된 영적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진리를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이미 알고 보면서도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상태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교회가 때때로 이전 교회의 중심이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까? AC.408-410의 문맥에서는 이미 계시된 거룩한 것들을 알고도 계속 거부하고 뒤섞어 온 곳보다, 아직 그것들을 알지 못했던 곳에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민족이나 종교 집단 자체가 다른 집단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교회의 ‘상태’입니다. 어느 곳이든 진리를 알고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상태가 될 수 있고, 어느 곳이든 아직 알지 못했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된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복음을듣지않는것이더안전하다’거나 ‘진리를배우지않는것이영적으로유리하다’는 결론으로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거듭나게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문제는 진리를 ‘아는것’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인 뒤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가입니다.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위험 자체가 아니라 큰 선물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라는 부르심입니다. 위험은 빛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아들여 빛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어둠과 결합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408의 ‘새로운아침’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지를 보존하기 위해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빛을 주시기 위해 일으키십니다. 이전 상태에서는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여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 상태가 끝에 이르면 아직 그렇게 뒤섞이지 않은 곳에서 다시 진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는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출발 상태일 뿐입니다. 목적은 결국 진리를 알고, 인정하고, 믿으며, 그것을 체어리티의 삶과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목회적으로도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우리는 ‘모르면책임이적으니차라리모르는것이낫다’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빛을 주실 때 그 빛을 감사히 받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동시에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그가 아직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진리를 알고도 거부한다는 것은 같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AC.408-410은 주님께서 인간의 상태를 얼마나 세밀하게 구별하시며, 황폐 가운데서도 다시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하여 새로운 아침을 여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AC.408심화1)
같은이유로‘일곱’이라는수는어디에서나타나든거룩하거나침해해서는안되는것을나타냅니다.그러므로시편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For the same reason, wherever it occurs, the number seven is accounted holy or inviolable.Thus we read in David:
여기서‘해’(sun)는사랑을,‘달’(moon)은사랑에서나오는신앙을의미하며,그신앙은사랑과같이되어야합니다.사람의거듭남의기간들이일곱째,곧천적인간에이르기전에여섯으로구분되는것처럼,황폐화의기간들도천적인것이아무것도남지않게될때까지그렇게구분됩니다.이것은유대인들의여러포로생활과,마지막포로생활인바벨론포로로표상되었는데,이포로생활은일곱번의십년,곧칠십년동안계속되었습니다.또한땅이그안식년들동안쉬어야한다는말도여러번나옵니다.같은것이다니엘서의느부갓네살로표상됩니다. where the “sun” denotes love, and the “moon” faith from love, which should be as love.As the periods of man’s regeneration are distinguished into six, before the seventh arrives, that is, the celestial man, so also are the periods of his vastation, up to the time when nothing celestial remains.This was represented by the several captivities of the Jews, and by the last or Babylonish captivity, which lasted seven decades, or seventy years.It is also said several times that the earth should rest on its sabbaths.The same is represented by Nebuchadnezzar, in Daniel:
같은이유로형벌의엄중함과그가중됨도‘일곱’이라는수로표현되었습니다.레위기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For the same reason the severities and augmentations of punishment were expressed by the number seven; as in Moses:
이제신앙에폭력을가하는것은모독이었습니다.앞에서말한것처럼신앙은쓰임이있어야했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가인을죽이는자는누구든지벌을칠배나받으리라’(whosoevershouldslayCain,vengeanceshouldbetakenonhimsevenfold)고한것입니다. Now as it was a sacrilege to do violence to faith—since as has been said it was to be of service—it is said that “whosoevershouldslayCain,vengeanceshouldbetakenonhimsevenfold.”
해설
AC.395는 ‘가인을죽이는자는누구든지벌을칠배나받으리라’는 창4:15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 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는 두 상응에 있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고, ‘일곱’은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을죽이는자에게칠배의벌이있다’는 것은 단순히 가인을 해치면 일곱 배나 더 심한 형벌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존하신 신앙을 함부로 파괴하는 일이 거룩한 것을 침해하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일곱’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가장 먼저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1에서 인간의 거듭남은 여섯 날의 과정을 거쳐 일곱째 날의 천적 인간에 이릅니다. 그 일곱째 날에는 평화와 쉼과 안식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일곱이라는 수가 거룩한 이유는 단순히 고대 사람들이 숫자 7을 신비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가장 처음부터 그것이 거듭남의 완성과 천적 상태, 그리고 주님 안에서의 안식을 표상하는 수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유대교회의 여러 의식과 시간의 구분에도 일곱이 반복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메시아가 오기까지의 기간을 다루는 단9:24-25의 ‘이레들’을 들고, 창29:27-28에서 라반과 야곱이 칠 년을 한 ‘이레’라고 부른 것도 예로 듭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숫자 7을 현대적인 숫자 암호처럼 계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일곱이라는 수가 반복적으로 거룩한 질서와 완결된 기간을 표상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시119:164의 ‘하루일곱번씩주를찬양하나이다’도 같은 의미에서 인용됩니다. 이것을 반드시 문자적으로 하루에 정확히 일곱 차례만 찬양해야 한다는 규정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상태에서 온전히 주님을 찬양하는 의미로 읽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수는 단순한 산술적 수량을 넘어 영적 상태의 질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30:26은 이번 번호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달빛은햇빛같겠고햇빛은일곱배가되어일곱날의빛과같으리라’는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를 사랑으로, ‘달’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달이해와같이된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과 같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가인 이야기 전체와 정확히 맞닿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데 있었습니다. 참된 질서에서는 달이 해에서 빛을 받듯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사30:26의 인용은 단순히 ‘일곱이거룩하다’는 사실만 증명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이번 문맥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관계까지 다시 보여 줍니다. ‘해=사랑’, ‘달=사랑에서나오는신앙’이라는 상응은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된 신앙이 궁극적으로 회복되어야 할 방향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도 신앙이 영원히 사랑에서 분리된 채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사랑과 결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일곱’의 의미를 거듭남뿐 아니라 황폐화에도 적용합니다. 사람의 거듭남이 여섯 기간을 지나 일곱째의 천적 상태에 이르는 것처럼, 황폐화 역시 천적인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기간을 거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같은 ‘일곱’이 언제나 즐겁고 긍정적인 사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곱이 나타내는 것은 그 과정의 거룩한 질서 또는 완결된 상태이며, 문맥에 따라 거듭남의 완성과 황폐화의 완결 모두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여러 포로 생활과 칠십 년의 바벨론 포로가 이 맥락에서 언급됩니다. 칠십은 ‘일곱번의십년’으로서 황폐화의 기간을 표상합니다. 땅이 안식년 동안 쉬어야 한다는 말씀 역시 같은 일곱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안식과 황폐화가 표면적으로는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둘 다 어떤 영적 기간이 주님의 질서 아래 그 정해진 상태에 이르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일곱때’가 지나가는 단4장의 말씀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짐승의 마음으로 바뀌고 일곱 때를 지나는 것은 황폐화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계15장의 일곱 마지막 재앙, 계11장의 마흔두 달, 계5장의 일곱 인도 같은 계열에 놓입니다. 여기서도 숫자 자체를 산술적으로 해독하는 것보다, 일곱이라는 수가 말씀 안에서 거룩하고 침해할 수 없는 질서 및 어떤 상태의 충만한 기간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해석 원리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계11:2의 마흔두 달을 ‘여섯번의일곱’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창조의 여섯 날과도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숫자 계산 자체를 독립적인 예언 연대표로 발전시키는 것은 이번 본문의 목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모든 예를 드는 목적은 오직 ‘일곱’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레26장의 ‘칠배의징벌’이나 시79:12의 ‘칠배나갚으소서’처럼 형벌의 강화에도 일곱이 사용됩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이유 역시 일곱의 거룩함에서 찾습니다. 거룩한 것을 침해하는 일의 엄중함을 나타낼 때도 일곱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칠배’는 단순히 형량을 일곱 배로 계산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위가 거룩하고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제 다시 가인에게 돌아오면 AC.395의 논리가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이미 본래의 천국적 질서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AC.393-394에서 보았듯이 주님께서는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그 신앙을 보존하셨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뒤에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시는 새로운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이번 번호 마지막의 ‘since...itwastobeofservice’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신앙은 ‘쓰임이있어야했습니다.’ 여기서 신앙의 쓰임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상태를 영구히 유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지식이 훗날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신앙을 완전히 파괴하면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하시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까지 파괴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분리된 신앙임에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 ‘모독’이 됩니다. 이것은 잘못된 교리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의 오류는 이미 매우 분명하게 비판되었습니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오류를 바로잡는 것과 신앙 자체, 특히 주님께서 이후의 구원을 위해 보존하신 신앙의 지식까지 파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 점은 ‘가인의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보호하신 것은 가인이 옳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타락 속에서도 앞으로 쓰임이 있을 것을 보존하십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것은 악한 일이지만, 신앙에 속한 지식은 이후의 인간이 말씀을 듣고 배우며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오류의 승인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보존의 표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에 관한 매우 깊은 원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것이 현재 불완전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즉시 없애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안에 앞으로 선을 위해 쓰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더 나은 질서로 이끄십니다. 가인의 신앙도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으므로 참된 질서를 잃었지만, 신앙의 지식이라는 측면에서는 이후 인간이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AC.395의 ‘일곱’은 단순한 성경 숫자 공부의 주제가 아닙니다. 일곱이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왜 가인의 신앙이 함부로 파괴되어서는 안 되었는지를 밝혀 줍니다. 주님께서 구원을 위해 구별하여 보존하신 것에는 거룩한 쓰임이 있었고, 그 쓰임을 파괴하는 것은 모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칠배의벌’은 바로 그 거룩하고 침해해서는 안 되는 성격을 표현합니다.
결국 AC.395는 창1의 일곱째 날에서 창4의 가인의 표까지 하나의 긴 선을 연결합니다. 창1의 일곱째 날은 사랑과 신앙이 하나 된 천적 인간의 평화와 안식을 나타냈습니다. 창4에서는 그 결합이 깨어져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고 표를 주어 보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존의 거룩함을 다시 ‘일곱’이라는 수로 표현하셨습니다. 결국 처음의 목적도 마지막의 목적도 같습니다. 신앙이 홀로 남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 인간이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창4:15)
AC.392
‘가인을죽이는자는누구든지벌을칠배나받으리라’(vengeancebeingtakensevenfoldonanyonewhoslaysCain)는이처럼분리된신앙이라할지라도그것에폭력을가하는것은모독(sacrilege)이됨을의미합니다.‘여호와께서가인에게표를주사그를만나는모든사람에게서죽임을면하게하시니라’(JehovahsetamarkuponCain,lestanyfindinghimshouldsmitehim)는주님께서신앙을특별한방식으로구별하셔서그것이보존되게하셨음을의미합니다. By “vengeancebeingtakensevenfoldonanyonewhoslaysCain” is signified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JehovahsetamarkuponCain,lestanyfindinghimshouldsmitehim” 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해설
AC.392에서 드디어 창4장의 가장 수수께끼 같은 장면 가운데 하나인 ‘가인의표’가 등장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속뜻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예상되는 것은 가인의 완전한 제거입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을죽이는자는누구든지벌을칠배나받으리라’고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이처럼분리된신앙이라할지라도그것에폭력을가하는것은모독이된다’는 것과 ‘주님께서신앙을특별한방식으로구별하여그것이보존되게하셨다’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보존’과 ‘승인’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체어리티에서분리된신앙’을 참된 신앙으로 인정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여러 번호에서 그 신앙의 상태는 이미 충분히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두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소멸시킨 신앙입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AC.392의 보존은 ‘그교리가옳으니보호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보존하십니까? AC.392는 아직 그 이유 전체를 풀어놓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단서를 줍니다. ‘이처럼분리된신앙이라할지라도그것에폭력을가하는것은모독이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 안에 완전히 소멸시켜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384가 중요해집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아직선의어떤것이남아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89에서는 악과 거짓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그에게생명에속한것이아무것도남지않게하는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2에서는 그 완전한 소멸을 막기 위해 신앙이 보존됩니다.
따라서 ‘가인의표’는 가인의 악을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보존의 표입니다. 주님께서는 잘못된 것을 잘못되지 않은 것으로 바꾸어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상태 속에서도 아직 보존되어야 할 것을 구별하여 지키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완전한 상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미 질서를 많이 무너뜨린 상태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선과 진리, 그리고 앞으로 회복의 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것을 보존하십니다.
‘주님께서신앙을특별한방식으로구별하셨다’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distinguishedfaithinaparticularmanner’입니다. 즉 가인의 표는 단순히 몸에 어떤 표시를 새겼다는 문자적 이미지에 머물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주님께서 이 신앙을 다른 것들과 구별하여 함부로 파괴되지 않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구별하셨는지는 뒤의 번호들을 더 읽어야 충분히 밝혀지겠지만, 적어도 AC.392에서는 ‘구별하여보존함’이라는 두 요소가 핵심입니다.
여기서 ‘칠배’도 눈에 띕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는 아직 ‘일곱’의 상응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 ‘일곱은완전함을뜻하므로칠배의복수는완전한형벌이다’와 같은 식으로 미리 결론을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지는 번호에서 그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현재 AC.392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을죽이는것’, 곧 이처럼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일이 모독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모독’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모독은 단순한 오류나 악과 같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과 관계된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침해하거나 더럽히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신앙이 이미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파괴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 안에서도 말씀에서 나온 진리의 지식이나 거룩한 것과 관련된 어떤 것이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AC.392만으로 그 구체적인 구조를 모두 확정하기보다, 이어지는 설명을 기다리면서 우선 ‘분리된신앙에도함부로폭력을가해서는안되는이유가있다’는 데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나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만한 원리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 안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신앙적 요소를 한꺼번에 부수는 것이 반드시 선한 일은 아닙니다. 오류는 오류로 분별해야 하지만, 그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진리나 선의 가능성까지 함께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것은 AC.392의 직접적인 역사적 의미라기보다 그 원리에서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적용입니다. 이번 본문의 직접적인 대상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고대의 교회 상태입니다.
앞의 AC.389-391을 거쳐 이번 번호에 도달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AC.389에서는 체어리티를 잃으면 사람이 주님과의 결합에서 분리되어 자기의 것에 맡겨지고, 그 결과 악과 거짓이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킨다고 했습니다. AC.390에서는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이 끊임없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고, AC.391에서는 악과 거짓 자체가 그 안에 형벌을 품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인은 결국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소멸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주님의 보존이 개입합니다. ‘그를죽이지못하게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표는 형벌보다 자비의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가인은 자신의 상태가 가져오는 결과를 겪습니다. 지면에서 쫓겨나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며,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결과가 무제한적으로 진행되어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와 그 선택의 결과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서도, 구원의 가능성을 위해 보존되어야 할 것을 지키십니다.
여기서 AC.384의 ‘선의어떤것이남아있었다’는 표현을 곧바로 기술적인 의미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원문은 그곳에서 ‘remains’라는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가인의표는리메인스를보호하기위한것이다’라고 지금 확정해 버리기보다는, ‘아직선의어떤것이남아있었으며,생명에속한것이완전히소멸되지않도록보존이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현재 본문에 더 충실합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이 보존을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신앙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가인의 오류는 신앙이 존재했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해결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와 올바른 관계를 이루도록 보존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선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4장의 가인 이야기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해서 이제 ‘신앙은나쁘고체어리티만남겨야한다’는 결론으로 갈 수 없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해답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결합과 질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가인은 그 질서를 뒤집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렇다고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십니다.
결국 AC.392에서 ‘가인의표’는 주님의 섭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내려갔지만, 주님께서는 그 잘못된 상태 안에서도 보존할 수 있는 것을 찾으시고 그것을 구별하여 지키십니다. 인간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시지는 않지만, 악 때문에 아직 남아 있는 모든 선과 진리까지 함께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가인을죽이는자는누구든지벌을칠배나받으리라’와 ‘여호와께서가인에게표를주셨다’는 말씀은 단순한 범죄자 보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심각하게 손상된 교회 상태 속에서도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시는 섭리를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목적은 가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생명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지키시고 마침내 선과 진리의 질서가 다시 이어질 길을 남겨 두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AC.334의‘신앙과체어리티에속한모든것이소멸되고,그것들에폭력이가해졌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신앙과 체어리티는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그것들에게‘폭력’을 가할 수 있을까요?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육체적인 폭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훼손하고 왜곡하는 영적인 폭력을 뜻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이 없거나 체어리티가 부족한 상태보다 더 심각합니다.어떤 사람이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것과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자신의 악과 거짓에 맞추어 왜곡하는 것은 다릅니다.또한 체어리티를 충분히 행하지 못하는 것과 체어리티 자체를 자기 욕망에 방해되는 것으로 여기며 배척하는 것도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가인 계열의 처음을 보면 이 차이가 잘 드러납니다.가인의 처음 문제는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오히려 신앙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마침내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것이었습니다.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AC.330에서는 그것이 보존됩니다.
그러나 그 분리가 계속되면서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그 왜곡에서 여러 파생된 교리적 상태가 생겨났으며,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이제AC.334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폭력이가해졌다’고 합니다.단순한 상실에서 적극적인 훼손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이웃을사랑하라’는 말씀을 잘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 체어리티의 진리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 말씀을 잘 알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웃을 해치고,더 나아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을 비틀어‘이것이오히려주님의뜻이다’라고 한다면 상태가 달라집니다.이제 진리는 악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거꾸로 사용됩니다.
신앙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사람이 어떤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진리를 알면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짓에 봉사하게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말씀의 진리를 자기 권력과 명예,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다면 외적으로는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진리를 본래의 목적과 반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폭력’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질서의 전도입니다.본래 진리는 인간의 악을 드러내고 선으로 인도해야 합니다.그런데 인간의 악이 오히려 진리를 붙잡아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진리가 악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악이 진리를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같습니다.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로 인도하고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그러나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고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려 합니다.그 질서가 계속 뒤집히면 처음에는 분리였던 것이 나중에는 체어리티의 소멸과 신앙의 왜곡,그리고 마침내 선과 진리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진행될 수 있습니다.
창4:23의 라멕의 말은 바로 이러한 종말의 상태를 표상적으로 묘사합니다. ‘나의상처로말미암아내가사람을죽였고나의상함으로말미암아소년을죽였도다.’AC.334의 개요에서는 사람과 소년 각각의 세부 의미를 미리 모두 확정하기보다,이 말씀이 교회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파괴하는 상태와 관련된다는 큰 그림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를‘극도의모독’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모독은 단순히 거룩한 것을 모르는 상태가 아닙니다.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고,거룩하지 않은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는 데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집니다.주님으로부터 온 것이proprium을 섬기는 수단으로 뒤집히는 것입니다.
교회 차원에서도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체어리티가 약한 것과 체어리티를 신앙에 방해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다릅니다.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권력과 명예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왜곡하는 것도 다릅니다.특히 사람의 악을 드러내고 돌이키게 해야 할 말씀이 오히려 그 악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면 진리의 본래 기능이 뒤집힌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심화를 다른 교회나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저사람은진리에폭력을가한다’고 다른 사람의 내면을 쉽게 판정하기보다,먼저 내 안에서 진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나는 진리를 통하여 나 자신을 고치고 있는가,아니면 진리를 이용하여 나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특히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이것은 중요한 경고입니다.진리를 많이 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그 진리를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아르카나에 관한 지식을 통하여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 앞에서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다른사람보다깊이안다’는 우월감을 강화한다면 진리의 목적이 조금씩 뒤집히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개인적 적용을 곧바로AC.334가 말하는‘극도의모독’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AC.334는 라멕으로 표상되는 매우 깊은 종말의 상태를 말합니다.우리는 그 원리를 통하여 자기 안에서 같은 방향의 작은 시작을 미리 살피고 피할 수 있습니다.작은 자기 합리화 하나가 곧 라멕의 극단적 상태라는 뜻이 아니라,질서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분별하는 데 이 말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을 압축하면‘분리에서폭력으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갈라놓았습니다.그러나 그 분리를 계속 허용하면서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진리가 왜곡되었으며,마침내 신앙에 속한 것마저 사라지고 선과 진리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AC.334의 경고는 그래서 매우 실제적입니다.진리를 모르는 것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알고 있는 진리를 자기 악과 자기 사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주님께서 주신 진리는 우리의proprium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악에서 돌이켜 선으로 이끌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창4:23-24)
AC.334
이교회는신앙과체어리티에속한모든것이소멸되고,그것들에폭력이가해졌을때일어났으며,이는극도의모독이었습니다.(23-24절)That this church arose when everything of faith and charity was extinguished, and had violence done to it, which was in the highest degree sacrilegious, is described. (verses 23–24)
해설
AC.334는 바로 앞 AC.333의 ‘그때새로운교회가일어났다’는 말에서 ‘그때’가 어떤 때였는지를 밝혀 줍니다. AC.333에서는 아다와 씰라로 의미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그 교회의 천적인 것들은 야발, 영적인 것들은 유발, 자연적인 것들은 두발가인으로 의미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34는 이 새로운 교회가 이전 상태가 어느 정도 쇠퇴했을 때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져 극도의 모독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32와 직접 이어집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상태에는 처음에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기는 했어도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AC.330에서는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리된 상태가 계속 파생되고 변질되면서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속한것이아무것도남아있지않은’ 상태에 이릅니다. AC.334는 그 종말을 더욱 강한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에 폭력까지 가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폭력이가해졌다’는 말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가 부족해졌다는 뜻보다 훨씬 강합니다.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이미 알려진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훼손하고 왜곡하는 것은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AC.334가 말하는 폭력은 바로 후자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생명에 속한 것을 단순히 잃어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거슬러 파괴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극도의모독’이라고 부릅니다. 모독은 거룩한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와는 다릅니다. 거룩한 것에 속한 것을 알고 받아들였으면서도 그것을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거나 거룩하지 않은 목적에 사용하는 것이 훨씬 심각한 영적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AC.334는 아직 모독의 전체 교리를 상세히 설명하는 번호는 아니지만, 라멕으로 표상되는 종말이 단순한 무지나 결핍보다 훨씬 깊은 상태였다는 점은 분명히 보여 줍니다.
창4:23의 라멕의 말도 이 종말을 표상적으로 묘사합니다. ‘나의상처로말미암아내가사람을죽였고나의상함으로말미암아소년을죽였도다.’ AC.334의 개요 단계에서는 각 표현의 세부 상응을 미리 모두 풀기보다, 이 말씀이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 폭력을 가하는 극도의 상태를 묘사한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각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이후 해당 절의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하게 설명됩니다.
이어지는 ‘가인을위하여는벌이칠배일진대라멕을위하여는벌이칠십칠배이리로다’ 역시 가인에서 라멕으로 갈수록 상태가 얼마나 더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문맥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AC.334자체는 ‘칠십칠배’의 세부 상응을 설명하는 번호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라멕의 상태가 가인의 처음 상태보다 훨씬 더 깊은 종말에 이르렀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흐름을 보면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과정은 점진적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는 예배에 나타났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으며,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에서 여러 파생된 이단적 상태들이 생겨났고,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3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 폭력을 가하는 극도의 모독까지 묘사됩니다.
그런데 AC.334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종말 자체가 아니라 문장의 주어입니다. ‘이교회는…일어났다.’ 곧 바로 이러한 종말의 때에 AC.333에서 말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른 상태가 인간 편에서는 완전한 끝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섭리에서는 그것이 교회의 모든 가능성의 끝은 아닙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가 라멕의 타락이 개선되어 생긴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악이충분히발전하면선으로바뀐다’는 구조가 아닙니다. 라멕으로 표상되는 한 교리적, 교회적 상태가 종말에 이른 때,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전 상태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구별하면서도 둘이 같은 시점에 말씀 안에서 나란히 묘사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후 AC전체에서 반복해서 만나게 될 교회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라는 질서를 미리 보여 줍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선과 진리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서 주님의 뜻과 섭리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면서도 교회의 생명이 인류 가운데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섭리하십니다.
다만 이것을 ‘이전교회가타락하면주님께서곧바로다른조직이나교단을세우신다’는 식으로 외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핵심은 조직의 이름보다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실제로 결합되어 있는 교회적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교회가일어난다’는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서 다시 선과 진리가 결합될 수 있는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마련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AC.334는 그래서 매우 어두우면서 동시에 희망적인 글입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소멸시키고, 심지어 거룩한 것에 폭력을 가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종말이 주님의 섭리의 종말은 아닙니다. 바로 그 가장 어두운 때에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적 생명을 일으키실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AC.333과 AC.334를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질서가 보입니다. ‘새로운교회가일어났다’는 밝은 선언 뒤에는 이전 상태의 극심한 종말이 있었고, 그 종말 뒤에는 다시 주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에 끝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주님의 구원의 역사는 끝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