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창4:8)

 

AC.366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고’(Cain spake to Abel)는 시간의 간격을 상징합니다. ‘가인’(Cain)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Abel)은 신앙의 형제인 체어리티를 상징하며, 이런 이유로 여기서는 아벨을 두 번이나 가인의 ‘아우’(brother)라고 부릅니다. ‘들’(field)은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는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상징합니다. “Cain spake to Abel” signifies an interval of time. “Cain,” as before stated, signifies faith separated from love; and “Abel” charity, the brother of faith, on which account he is here twice called his “brother.”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signifies that separated faith extinguished charity.

 

해설

AC.366에서 마침내 창4의 결정적인 사건, 곧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에 이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AC.338부터 이어진 설명을 따라왔다면, 이 사건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기 시작했고, 그 구별이 점차 분리가 되었으며, 분리된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나왔습니다. 이어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가인의 분노가 일어나고 안색이 변했으며,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주도권을 가지려 했습니다. 이제 그 과정의 마지막 단계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먼저 매우 흥미로운 것은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였고’(Cain spake to Abel)를 스베덴보리가 ‘시간의 간격’(an interval of time)이라고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개역개정 창4:8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라고 되어 있지만, 무엇을 말했는지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여기서 그 대화의 내용을 추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표현이 하나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흐름에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 즉시 도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346에서는 이미 ‘세월이 지난 후에’가 시간의 진행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59-365에서는 가인이 분노하고 안색이 변한 뒤에도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며, 선을 행하면 얼굴을 들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체어리티 역시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죽음은 최초의 작은 구별이 생긴 바로 그 순간 일어난 일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점차 멀어져 마침내 그것을 완전히 배척하기에 이른 결과입니다.

 

이 점은 영적으로도 중요합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어떤 악이 완성되는 과정 역시 대개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생각이나 애정으로 나타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확증하면서 점차 의지의 일부가 되며, 마침내 삶으로 굳어집니다. 물론 AC.366 자체가 이러한 거듭남의 심리적 단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가인의 상태가 시간의 진행을 거쳐 아벨을 소멸시키는 단계까지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음으로 스베덴보리는 다시 ‘가인’과 ‘아벨’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faith separated from love)이고, 아벨은 ‘신앙의 형제인 체어리티’(charity, the brother of faith)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표현은 ‘신앙의 형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때문에 이 절에서 아벨을 두 번이나 가인의 ‘아우’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61-365와 매우 깊이 연결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아벨은 가인의 적이 아니라 ‘아우’입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비로소 참된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의 적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본래 자기와 하나를 이루어야 할 ‘형제’를 제거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사건의 비극성이 있습니다.

 

더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신앙 자체도 결국 생명을 잃습니다. AC.365의 비유를 빌리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빛이 자기에게 생명을 주는 불꽃의 열을 제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빛은 잠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교리도 있고, 종교적 지식도 있고, 예배도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울의 빛’입니다. 체어리티라는 열이 사라졌으므로 그 안에서는 결국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AC.366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중요한 상응이 ‘들’(fiel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들은 교리에 속한 모든 것(whatever is of doctrine)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아무 곳에서나 일어난 것이 아니라 ‘들’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속뜻으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충돌이 바로 ‘교리에 속한 것들’ 가운데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앞의 AC.362를 떠올리게 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어떤 것을 붙잡아 그것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들을 부풀게 하자 모든 것이 자기 생각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나의 교리적 입장이 삶의 질서를 뒤집었습니다. 이제 AC.366에서는 바로 그 교리의 영역인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들’은 교리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교리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어떻게 세워져 있느냐입니다. 교리가 신앙을 체어리티와 결합시키고, 진리를 선으로 인도하며,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끈다면 그 교리는 생명을 섬깁니다. 그러나 교리가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무엇을 믿느냐’를 ‘어떻게 사느냐’와 떼어 놓으며,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들’에서 아벨이 죽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이야기는 교회의 역사에서도 반복될 수 있고,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어떤 교리적 문제를 붙들고 그것이 너무 중요해진 나머지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해 이웃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체어리티를 버린다면 외적으로는 ‘진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적으로는 가인이 아벨을 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가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진리의 올바른 질서가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특히 앞서 AC.362에서 살펴본 ‘이단’의 형성과 연결하면 더욱 선명합니다. 이단은 반드시 처음부터 완전한 거짓을 선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신앙 항목을 전체보다 앞세워 ‘주된 것’으로 만드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마침내 교리의 영역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들에서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넘어, 교리 안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배제하는 비극적인 교회적 상태를 묘사합니다.

 

여기서 ‘소멸시켰다’(extinguished)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체어리티가 약해졌다거나 뒤로 밀려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상태가 이제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AC.361에서는 체어리티가 아직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AC.364에서는 죄가 아직 ‘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AC.366에서는 그 문턱을 넘어섭니다. 체어리티를 지배하려던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제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59-366의 흐름은 매우 엄중합니다. 얼굴이 떨어졌을 때, 곧 안색이 변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문에 있을 때에도 경고하셨습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아직 돌아설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계속 자기의 주도권을 고집하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갑니다. 악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받아들이고 확증할수록 점차 자기 것이 되고 결국 삶의 질서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앞서 우리가 살펴본 ‘가인의 진행 과정’이 이제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 구별 자체가 곧 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그 자체로 어떤 것’으로 여기면서 사랑으로부터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체어리티 없는 행위가 나타났고,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나타났으며, 체어리티가 떠나자 분노와 내적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어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위에 서려고 했고, 자기 사랑과 환상으로 자신의 입장을 확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리의 ‘들’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구별 → 분리 → 죽은 행위 → 죽은 예배 → 분노와 내적 상태의 변화 → 체어리티에 대한 지배 → 체어리티의 소멸.’

 

이 흐름을 보면 왜 처음의 ‘구별’과 이후의 ‘분리’를 정확히 구별해야 하는지도 다시 분명해집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진리에 속하고, 체어리티는 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별된 것이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면서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눈의 빛과 몸의 열이 다르다고 해서 생명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창4의 속뜻을 매우 실제적인 질문으로 돌려놓습니다. ‘나는 가인인가, 아벨인가?’라고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끌고 있는지, 아니면 그 진리를 가지고 이웃을 판단하고 있는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교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더욱 살아 있게 하는지, 아니면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더욱 조심스럽게 다가옵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기존의 성경 해석과 다른 깊은 의미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가인의 위험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을 알고, 저 사람들은 모른다’는 자기 사랑이 들어오면, 매우 높은 진리조차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가지고 다른 교회나 다른 그리스도인을 낮추고 체어리티를 잃는다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바로 그 일을 우리 안에서 반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는 언제나 아벨을 살려야 합니다. 진리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무기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더욱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비추는 빛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는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둘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신앙은 더 이상 겨울의 빛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따뜻한 빛이 됩니다.

 

결국 AC.366에서 아벨의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의 장면을 넘어 ‘체어리티가 교회 안에서 소멸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떼어내고, 신앙을 사랑보다 높이며, 그 신앙을 자기 사랑으로 확증하는 작은 질서의 전도가 계속될 때, 마침내 일어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미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직 죄가 문에 있을 때, 아직 아벨이 살아 있을 때, 아직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고 있을 때, 돌아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66은 지금까지의 가인 이야기에 하나의 무거운 마침표를 찍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는 것은 결국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체어리티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 자신도 생명의 열을 잃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은 결국 자기 신앙의 생명까지 죽이는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AC.367, 창4:8,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입니다 - 장자권과 주도권의 속뜻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7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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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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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신앙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먼저 태고교회에도 신앙은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신앙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방식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서 있는 별개의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알았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한 것도 바로 이 뜻입니다.

 

그런데 AC.338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갑자기 신앙을 버렸거나 처음부터 거짓된 신앙을 만들어 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성립할 수 있는 하나의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8에서 ‘가인=신앙’이라고 한 말과 앞에서 ‘가인=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한 말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가인은 참된 것인 신앙을 붙들고 있지만, 그 신앙을 본래의 사랑의 질서에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세우는 교리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이 처음에는 완전히 정상적인 신앙이었다가 나중에 분리된 신앙으로 변했다’고 너무 선명하게 시간적 단계를 나누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338의 바로 이 시점에서 이미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는 분리의 성격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분리의 결과가 처음부터 모두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창4의 뒤를 따라가면 신앙이 점차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질을 드러낸다는 질서를 거부하며,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진행됩니다. 따라서 AC.338은 분리의 원리가 처음 드러나는 지점을 보여 주고, 후속 본문은 그 원리가 어디까지 발전하는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이 ‘구별’과 ‘분리’의 차이입니다. 신앙과 사랑을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신앙이고 무엇이 체어리티인지, 진리와 선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분명히 배우는 것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신앙을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는 것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전자는 이해를 위한 구별이지만 후자는 생명의 질서를 깨뜨리는 분리입니다.

 

부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 차이를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에게 배려와 존중과 신실함의 원칙은 사랑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그 원칙을 글로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사랑을 파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서로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이 원칙들만 정확히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원칙은 사랑을 섬기는 자리에서 벗어나 사랑을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원칙 자체가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참된 것이 본래의 관계에서 분리된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중요하다’, ‘교리는 정확해야 한다’, ‘진리와 거짓을 분별해야 한다’는 말 자체는 모두 옳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과 교리와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가인의 질서가 나타납니다.

 

이 때문에 가인의 문제는 매우 미묘합니다.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참된 것 하나를 전체의 질서에서 떼어 내어 그 자체로 높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단 역시 반드시 처음부터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를 지나치게 높이고 다른 선과 진리와의 살아 있는 결합을 끊을 때에도 왜곡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37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는 설명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는 것 자체를 가인의 상태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먼저 나타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채 독립적인 최종 목적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진리를 배우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 진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시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38의 핵심은 ‘가인은 신앙이다’와 ‘가인은 분리된 신앙이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의미하지만, 바로 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독립된 것으로 인정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창4의 뒤는 그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았고, 나중에는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338은 분리가 처음 드러나는 아주 중요한 지점입니다. 신앙 자체는 참된 것이지만, 그것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살아 있는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지만, 사랑에서 떨어져 자기 자신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신앙은 가인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의 신앙을 쉽게 ‘가인’이라고 판정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더 알수록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고, 악을 더 잘 보고 피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알수록 자기 옳음을 증명하고 다른 사람을 낮추며, 사랑보다 교리적 승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면 우리는 신앙이 그 생명의 자리에서 분리되기 시작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남을 정죄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입니다.

 

 

 

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 심화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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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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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에서 특별히 깊이 생각할 부분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그것을 주된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길의 마지막인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신앙을 높이려 했는데 오히려 신앙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역설은 선과 진리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선이 무엇인지 보여 주고 선으로 인도하며,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이 되게 합니다. 따라서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면 처음에는 여전히 진리의 지식과 형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 진리가 자기 목적을 잃게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 참된지를 알고 믿는 것은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무엇을 믿는가’ 자체만을 신앙의 본질로 만들면, 진리는 점차 삶과의 연결을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교리도 남아 있고 성경에 관한 지식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매우 강하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삶의 선을 향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proprium은 그 진리를 자기 생각과 욕망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랑과 목적이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진리 때문에 자기 생각을 고치기보다, 자기 생각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해석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더 이상 자신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가 됩니다. 신앙의 언어는 남아 있지만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생명은 점점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과정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중요하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더 나아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리고 그 분리가 계속되면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지키려 했던 신앙 자체마저 변질됩니다.

 

이것은 진리가 선에서 생명을 받는다는 스베덴보리의 기본 질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의 지식이 아무리 정확해도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 지식만으로는 살아 있는 신앙을 이루지 못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와의 결합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2를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말씀으로 사용하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아는 것이 사는 것보다 앞설 수 있고, 교리적 확신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더 잘 믿기 위해 배운 진리가 어느 순간 자신의 생각과 자기 의를 지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이 경고는 더욱 중요합니다. AC에 관한 지식이 많아지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속뜻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신앙의 생명이 깊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더 분명하게 보고,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해지며,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AC.325부터 AC.332까지 이어 보면 그 흐름은 분명합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이어 교리가 왜곡되고, 그 왜곡된 상태가 확장되어 여러 파생 교리를 낳고, 마지막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됩니다.

 

결국 라멕은 ‘신앙을 버린 사람’의 단순한 표상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높이고 신앙을 그 생명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 마침내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AC.332의 가장 무거운 질문은 ‘나는 신앙을 얼마나 강하게 붙들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내 신앙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AC.332 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심화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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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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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18)

 

AC.332

이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 역시 각각 그 이름들로 불렸으며, 그 마지막이 ‘라멕’(Lamech)인데,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18절) The heresies that sprang from this one are also called by their names, in the last of which, called Lamech, there was nothing of faith remaining. (verse 18)

 

해설

AC.332는 앞의 AC.331에서 말한 ‘이 이단의 확장’이 계속되어 마침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31에서 ‘에녹’은 가인으로 표상된 이단, 곧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더욱 확장된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이제 창4:18에는 에녹에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타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집안의 계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하나의 교리적, 교회적 상태에서 여러 파생된 상태들이 생겨나며 점차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AC.332가 먼저 말하는 것은 ‘이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입니다. 처음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였습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리가 한 번 일어나고 계속 유지되면 그것이 한 형태로만 머물지 않고 여러 파생된 교리적 상태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4의 ‘낳고, 낳고, 낳았다’는 계보의 언어는 속뜻에서 단순한 혈통의 계승만이 아니라 교리와 교회의 상태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는 영적 계승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특정 교단을 정죄하는 의미로 곧바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24부터의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면서 생겨난 교리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이단들이 생겨났다’는 말은 단순히 교파의 수가 늘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의 영적 분리에서 여러 변형된 교리적 상태들이 파생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점에서 창4의 계보는 하나의 점진적인 변질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 가인은 신앙 자체를 없앤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것을 주된 것으로 높이려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아직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AC.330에서 가인이 ‘표’를 받아 보존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했기 때문에 신앙 자체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소멸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존되었다고 해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 자체가 승인된 것은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계속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은 채 전개되면 그 상태 역시 점차 변질될 수 있습니다. AC.331의 에녹은 그 첫 확장이고, AC.332에서는 다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을 거쳐 라멕에 이릅니다. 각각의 이름은 앞의 상태에서 파생된 또 다른 교리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AC.332에서 가장 무거운 말이 나옵니다. ‘그 마지막이 라멕인데,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출발점은 신앙을 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정작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 계열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설입니다.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앞세워 신앙을 지키려 했지만, 신앙을 그 생명인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 마침내 신앙 자체의 성질도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단지 어떤 교리를 알고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진리가 되고, 신앙은 삶의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되어 있다면 처음에는 여전히 신앙의 지식과 형식을 유지할 수 있어도, 그 상태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말을 그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32는 가인에서 파생되어 라멕에 이른 특정한 교리적 계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당시 인류 전체에서 신앙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창4와 창5, 그리고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전체 흐름을 함께 보면 주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교회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과정이 계속 나타납니다.

 

이 점은 AC.330의 ‘가인의 표’와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가인 계열의 모든 후손이 반드시 끝까지 참된 신앙을 유지하도록 강제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신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과 결합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그것을 계속 왜곡하여 잃을 수도 있습니다. 라멕은 바로 후자의 길이 끝까지 진행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은 단순히 ‘한 이단이 여러 이단으로 갈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한 번 무너진 뒤 그 분리가 계속될 때 어떠한 영적 붕괴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고, 이어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이 계속 확대되자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높였던 신앙 자체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창4의 계보 전체를 단순한 절망의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특정한 한 계열의 성공이나 실패에 매이지 않습니다. 가인 계열이 라멕에서 신앙마저 잃는 상태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구원의 질서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의 말씀에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어떤 것들이 보존되고, 또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어떻게 준비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AC.332는 우리에게 매우 엄중하면서도 단순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신앙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 신앙을 많이 말하고 진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만으로 그 신앙이 살아 있다고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그 진리가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게 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결합될 때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자신만을 높이기 시작하면, 끝에는 체어리티뿐 아니라 신앙 자체까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이 라멕에 이른 가인 계열의 무거운 경고입니다.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 심화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에서 특별히 깊이 생각할 부분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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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 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심화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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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 심화 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

AC.332 심화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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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수 있는가?

 

AC.332 심화 4, ‘가인 계열’ 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AC.332 심화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수 있는가? 가인 계열을 따라 읽다 보면 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모습이 겹쳐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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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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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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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창4:17)

 

AC.331

이 이단의 확장을 ‘에녹’(Enoch)이라 합니다. (17절) The amplification of this heresy is called “Enoch.” (verse 17)

 

해설

AC.331은 매우 짧은 한 문장이지만, 창4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글입니다. 창4:17에는 ‘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가인의 아들 에녹의 출생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에녹’을 앞에서 ‘가인’이라 한 이단이 더 확장된 상태로 봅니다. 그래서 AC.331은 단순히 ‘에녹은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이후 어떻게 더 전개되는지를 보여 주는 첫 계보적 표지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이 이단’은 앞의 AC.324-325에서 이미 설명된 것입니다. AC.324에서는 창4에서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리들, 곧 이단들을 다룬다고 했고, AC.325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AC.331의 ‘이 이단의 확장’은 새로운 종류의 이단이 갑자기 등장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의 상태가 더 진행되고 전개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점은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생물학적 족보로만 읽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이러한 ‘낳음’과 계승이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이어지는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말씀은 속뜻에서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적 상태로부터 또 하나의 발전된 상태가 생겨났다는 식으로 읽게 됩니다.

 

다만 ‘확장’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이단 단체가 사람을 많이 모으고 조직을 넓혔다는 뜻으로 곧바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AC.331 자체는 그런 외적 조직 확대를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리적 상태의 전개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가 그대로 머물지 않고 더 펼쳐지고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 ‘에녹’으로 불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흐름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25에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AC.327에서는 그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가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AC.329에서 결국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AC.330에서는 그 결과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났지만,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 자체는 보존되었습니다. 이제 AC.331에서는 그 보존된 신앙이 당시의 분리된 상태 그대로 여러 형태로 더 전개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이 점에서 ‘보존’과 ‘승인’을 다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30에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의 상태 자체가 옳다고 인정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장차 체어리티를 다시 심는 통로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존된 신앙은 곧바로 본래의 질서로 회복된 것이 아니라, 창4의 이어지는 계보에서 여러 교리적 상태로 더 전개됩니다. 그 첫 번째가 에녹입니다.

 

따라서 AC.331의 ‘에녹’은 가인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 가인 안에 있던 원리가 한 단계 더 확장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것이 창4의 계보가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이후 등장하는 이름들도 각각 앞선 상태에서 파생된 또 다른 교리적 상태들을 나타내게 됩니다.

 

다만 여기서 ‘에녹’이라는 이름 자체가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창5에도 에녹이 등장하지만 그 에녹은 전혀 다른 문맥과 계열 안에서 설명됩니다. 말씀의 속뜻은 ‘에녹 = 언제나 이것’이라는 고정된 암호표를 적용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같은 이름이라도 그것이 놓인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이름이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1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는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확장되고 전개되었으며, 그 첫 상태를 ‘에녹’이라 합니다. 창4의 계보는 이제부터 바로 그 분리된 신앙이 이후 어떤 교리적 형태들로 발전해 가는지를 추적하게 합니다.

 

이 짧은 한 문장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때에도 하나의 경고를 줍니다. 어떤 잘못된 분리는 작은 생각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그것이 계속 유지되면 점차 설명과 논리를 얻고 하나의 확고한 체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교리가 얼마나 잘 정리되어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교리가 여전히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의 올바른 결합 안에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심화

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331 심화 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331 심화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매우 자연스러운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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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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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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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창4:8-9)

 

AC.329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것’(Cain slaying his brother Abel)으로 묘사됩니다. (8절) That charity was extinguished in those who separated faith, and set it before charity, is described by “Cain slaying his brother Abel.” (verses 8–9)

 

해설

AC.329는 매우 짧지만 창4의 속뜻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지점입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무엇을 나타내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단지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살해한 사건의 속뜻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른 교회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결과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AC.325부터 하나의 과정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었습니다.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와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가 서로 달라졌습니다.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그리고 AC.328에서는 그럼에도 체어리티가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으려 했고, 이제 AC.329에서 그 과정이 끝까지 진행되어 체어리티 자체가 소멸됩니다.

 

따라서 아벨의 죽음은 사랑과 신앙 사이의 단순한 의견 차이나 긴장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결합을 거부하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자기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로 인정하지 않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아벨이라는 사람이 체어리티를 표상하기 때문에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가인’이 단순히 신앙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신앙 자체가 체어리티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AC.325에서부터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나타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기를 원하며,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뒤 자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세우고, 더 나아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28과 AC.329의 연결은 매우 중요합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아벨은 가인을 죽이지 않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마침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되면,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결합과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소멸되었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에서 체어리티 자체가 완전히 없어졌다거나 주님께서 더 이상 체어리티를 주실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29가 말하는 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그 교회적 상태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당시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여 ‘그 시대의 모든 인간에게 체어리티가 사라졌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별은 이후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만일 이 시점에서 세상의 모든 선과 체어리티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면 이후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이나 셋과 에노스의 계열을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창4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특정한 교회적 계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 주며, 동시에 주님께서는 인간에게서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 섭리하십니다.

 

오늘의 교회와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아벨을 죽인다’는 것을 특정 교파나 특정 사람에게 붙여 ‘저 사람에게는 체어리티가 없다’고 판정하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믿는 것을 실제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올바른 교리를 고백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소멸은 반드시 사람이 모든 선행을 즉시 중단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외적으로는 종교적 활동과 도덕적인 행동이 계속될 수도 있습니다. 가인도 이미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교리가 삶의 선과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외적인 종교성은 남아 있으면서도 내적인 질서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의 심각성입니다.

 

특히 말씀과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사람에게 AC.329는 무거운 경고가 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 지식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고 오히려 자기 지성을 높이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수단이 된다면 진리의 목적이 뒤집힐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목적 역시 속뜻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보고 피하며, 주님께 받은 선을 실제 삶에서 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29의 한 문장은 창4 전체에서 매우 무겁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결말처럼 갑자기 등장하지 않습니다.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인 끝에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긴 과정의 결과입니다.

 

이제 창4의 문제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갑니다. 아벨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체어리티가 소멸된 신앙은 어떻게 되는가, 주님께서는 그러한 신앙을 완전히 없애시는가, 아니면 그 안에 아직 보존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가인은 심판을 받고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지만, 동시에 그에게 ‘표’가 주어집니다. 따라서 AC.329의 체어리티 소멸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그처럼 무너진 상태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새로운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심화

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AC.329 심화 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AC.329 심화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의 속뜻을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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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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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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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7 심화

1. 왜 ‘분리’가 결국 ‘악’이 되는가?

 

AC.327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분리한 것이 왜 결국 사람의 상태를 ‘악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교리적으로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곧 악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AC.327을 그렇게 개인에 대한 단순한 판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뒤 그 교회적 상태가 계속 진행되면서 어떤 결과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선과 진리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으로 인도하며,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이 되게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문제는 ‘구별’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는 구별되고 신앙과 체어리티도 구별됩니다. 서로 다른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구별이 ‘분리’로 변할 때입니다. 진리가 선과의 관계를 잃고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관계를 잃으면, 진리는 더 이상 자신이 존재하는 본래의 목적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상태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가지고 있고 제물도 드립니다. 외적으로는 매우 종교적인 상태가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관심의 중심이 점차 ‘이 진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서 ‘무엇이 옳은 교리인가?’, 더 나아가 ‘내가 옳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로 옮겨갈 위험이 생깁니다.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입니다. 그러나 선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진리는 인간의 proprium에 의해 자기 사랑이나 자기 우월성을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원래 진리는 사람 자신의 악을 비추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이끌어야 하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람의 사랑과 목적이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왜 가인의 분노가 AC.327에서 중요한지가 드러납니다.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이것이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분노가 일어납니다.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체어리티를 향한 적대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리가 악이 된다’는 말은 단순히 두 교리를 구별하여 설명하는 순간 악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자기 생명인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것을 자처하고, 그 상태가 계속되면서 삶과 애정의 질서까지 뒤집히는 것을 말합니다. AC.325의 분리가 AC.326에서는 예배의 분리로 나타났고, AC.327에서는 사람들의 상태 자체가 악해지는 데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경고가 있습니다. 말씀과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무엇이 참된지를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진리가 나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는 대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옳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진리의 목적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과 속뜻을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이 경고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생명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지식이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자신을 높이는 또 하나의 지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진리를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327의 ‘상태가 악해졌다’는 말은 매우 엄중합니다. 창4의 최초 살인은 어느 순간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보면 그 비극의 시작은 훨씬 앞에 있었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마침내 사람의 내적 상태까지 악하게 되었을 때 아벨을 죽이는 다음 단계가 준비됩니다.

 

결국 AC.327이 보여 주는 것은 ‘분리’의 위험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진리와 선은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선 안에서 목적을 이루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붙들 때 가장 깊이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 얼마나 정확한가?’만이 아니라 ‘이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랑과 어떤 삶으로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AC.327, 창4:5-6,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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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5-6)

 

AC.327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진 것은,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것’(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으로 묘사됩니다. (5-6절) That the state of those who were of separated faith became evil, is described by Cain’s “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 (verses 5–6)

 

해설

AC.327은 AC.325-326에서 시작된 흐름이 이제 사람의 상태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본래 사랑과 하나였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까지 나타났습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지만 그것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였습니다. 이제 AC.327에서는 그 결과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상태가 악해졌다’(became evil)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완전히 악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인은 본래 교회 안에 있던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자신의 생명인 사랑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지만,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고, 이제는 그 분리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 자체가 악해지는 단계로 진행됩니다.

 

이것은 창4의 타락이 한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부터 ‘아벨을 죽이자’는 상태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본래 함께 있어야 할 사랑과 신앙이 서로 떨어져 나가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가 계속되자 예배의 질이 달라졌고, 이제는 그 결과 애정과 내적 상태 자체가 악한 방향으로 변해 갑니다. 이후에는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악화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문자 그대로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대한 가인의 분노이지만, 속뜻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진 것이 이 분노를 통하여 묘사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의 성격이나 순간적인 감정 분석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떤 방향으로 변해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도 사랑과 구별되는 중요한 것이 아닌가?’라는 데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앙은 중요하며 진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된 신앙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체어리티는 더 이상 신앙과 함께 있어야 할 형제가 아니라 신앙의 독립적인 지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분노는 앞으로 일어날 아벨의 죽음과 연결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단지 체어리티 없이 존재하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밀어내며 결국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4의 살인은 속뜻에서 이러한 영적 과정의 마지막 결과를 보여 줍니다.

 

‘안색이 변하였다’는 표현도 가인의 상태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더욱 강하게 묘사합니다. 다만 AC.327에서는 아직 이 표현의 세부적인 상응을 풀어 주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분함’과 ‘안색의 변화’가 함께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음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설명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신앙 자체를 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AC.325부터 계속 지켜야 할 중요한 구별입니다. 문제는 신앙이 아니라 ‘분리된 신앙’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될 때 사람에게 생명을 주며,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나가면, 본래 선을 섬겨야 할 진리가 그 목적을 잃게 됩니다.

 

또한 창4:6에서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C.327은 이 질문의 속뜻을 아직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문자 자체에서도 주님께서 가인의 악해진 상태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이 부르심과 경고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AC.325-327을 함께 놓으면 창4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먼저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다음으로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 사람의 상태 자체가 악해집니다. 결국 아벨의 죽음은 갑자기 등장하는 비극이 아니라 앞에서부터 진행되어 온 분리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AC.327은 우리에게 ‘나는 화를 내는가?’라는 심리적인 질문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진리와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진리가 선과 함께 있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 있을 때 그것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분리되어 신앙이 스스로 서려고 할 때, 처음에는 작은 질서의 변화처럼 보였던 것이 결국 사람의 내적 상태 전체를 바꾸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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