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18)

 

AC.404

이 모든 이름은 ‘가인’(Cain)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에 관하여는 이름들 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으므로, 그것들에 관하여 무엇인가 말하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그 이름들의 어원으로부터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랏’(Irad)은 그가 ‘성읍에서 내려온다’(descends from a city)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에녹’(Enoch)이라 불린 이단에서 내려왔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이름들도 이와 같습니다. All these names signify heresies derived from the first, which was called “Cain”; but as there is nothing extant respecting them, except the names, it is unnecessary to say anything about them. Something might be gathered from the derivations of the names; for example, “Irad” means that he “descends from a city,” thus from the heresy called “Enoch,” and so on.

 

해설

AC.404는 창4:18에 이어지는 가인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간결하게 밝혀 줍니다.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왔고, 에녹에게서 이라드가 나왔으며, 그 뒤로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이 이어집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한 가문의 족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이름이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 가인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세대가 이어지는 혈통이 아니라, 최초의 영적 분리가 계속 다른 형태로 파생되어 가는 하나의 교리적 계보로 읽힙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99-400과 직접 연결됩니다. AC.399에서는 가인이라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을 산출했고 그것이 에녹이라 불렸다고 했습니다. AC.400에서는 그 원리를 더욱 일반화하여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라고 했습니다. AC.404는 바로 그 말이 실제 가인의 계보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최초의 분리가 에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여러 이름으로 계속 파생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최초의 이단’이라는 표현은 가인의 본래 의미를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어떤 잘못된 교리 하나를 표상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상태를 표상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AC.398의 표현대로 하면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최초의 분리에서 이후의 여러 이단이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라드, 므후야엘, 므드사엘 등이 각각 정확히 어떤 교리를 주장했는지 알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스스로 멈춥니다. ‘그것들에 관하여는 이름들 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으므로, 그것들에 관하여 무엇인가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해석 태도를 보여 줍니다. 속뜻이 있다고 해서 본문이 제공하지 않는 세부 내용까지 자유롭게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이름의 의미에서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이라드’를 듭니다. 이라드라는 이름은 ‘성읍에서 내려온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속뜻에서는 앞의 ‘성읍’, 곧 에녹이라 불린 이단에서 파생되어 내려온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AC.401에서 에녹은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과 연결되었고, AC.402에서 성읍은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라드가 ‘성읍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앞서 형성된 에녹의 교리적·이단적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가 파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계보에는 상당히 일관된 흐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가인이라는 최초의 분리가 있습니다. 그 분리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이단이 산출됩니다. 에녹은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형성되는 상태와 관련되고, 그 이름을 따라 성읍이 세워지면서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하나의 형태를 갖춥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읍’에서 이라드가 내려옵니다. 하나의 분리된 신앙이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이 교리적인 전체를 이루며, 그 교리적 전체에서 다시 새로운 형태의 분리가 파생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AC.404에서 말하는 ‘계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앞의 상태가 뒤의 상태를 낳는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400에서 이미 말한 ‘잉태와 출생’의 원리와 같습니다. 하나의 교리적 전제가 받아들여지면 그 안에서 다음 결론이 나오고, 그 결론에서 다시 다른 결론이 나옵니다. 처음의 근본 원리가 계속 후속적인 형태들을 산출하면서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절제입니다. 그는 ‘다른 이름들도 이와 같다’고 말할 뿐, 각각의 이름에 대해 상세한 교리적 내용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이름의 어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뒷받침할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응을 다룰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상응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영적 의미를 붙이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 자체와 AC의 설명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403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들을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에 등장하는 이름들도 영적인 상태들의 연속을 역사적 족보의 형태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표상적 역사라고 해서 모든 이름의 세부 의미가 우리에게 자동으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속뜻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속뜻의 모든 세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AC.404는 한편으로는 매우 강하게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강하게 말하는 것은 ‘이 모든 이름은 가인이라는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은 ‘각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이름 외에는 자료가 없으므로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태도를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교리 이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잘못된 근본 원리는 여러 후속적인 오류를 낳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진리를 선한 삶에서 분리하며, 이해를 사랑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시키는 원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교리적 형태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역사 속의 모든 교리나 교파를 임의로 가인의 어느 후손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AC.404 자체가 그런 과도한 추정을 경계하게 합니다.

 

오히려 가인의 계보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더욱 유익합니다. 하나의 잘못된 원리를 받아들였을 때 그것이 어떤 후속적인 생각들을 낳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옳다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원리가 마음에 자리 잡으면, 거기서 상대를 판단하는 생각이 나오고, 그 판단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생기며, 마침내 사랑하지 않는 행동까지도 옳다고 설명하는 하나의 내적 ‘성읍’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의 분리가 그 자체에서 후손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에서는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잘못된 근본 원리가 발견되고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여 피할 때, 주님께서는 진리를 다시 선과 결합시키십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섬기게 되고, 이해는 자기 지성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가인의 계보를 읽는 목적은 단순히 옛 이단의 역사를 분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거나 무너지는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404는 가인의 후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상세히 해독하려 하기보다 그 계보 전체의 성격을 먼저 붙들게 합니다. 그들은 모두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나타냅니다. 이라드가 ‘성읍에서 내려온다’는 이름으로 에녹의 이단에서 파생된 상태를 보여 주듯, 뒤의 이름들도 같은 계보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세부 내용이 주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깊이 읽는 것과 말씀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AC.404는 바로 그 두 가지를 함께 가르쳐 주는 번호입니다. (AC.404 해설)

 

 

 

AC.405, 창4:19, ‘라멕에게서 신앙이 소멸하고 새 교회가 일어나다 - 아다와 씰라의 속뜻’ (AC.405-4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AC.405가인으로부터 순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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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3, 창4:17, ‘왜 창세기 초반은 역사 형식으로 기록되었는가? - 태고인들의 표상적 서술 방식’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3이제 우리는 ‘성읍’(city)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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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1

‘에녹’(Enoch)이라 불린 것은 그 모든 교리적 또는 이단적 가르침을 포함한 하나의 이단이었다는 사실은, 이 이름 자체에서도 어느 정도 분명합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instruction so begun or initiated)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That it was a heresy with all its doctrinal or heretical teaching that was called “Enoch” is in some measure evident from this name, which means the instruction so begun or initiated.

 

해설

AC.401은 앞의 AC.399-400에서 설명한 ‘에녹’의 의미를 그 이름 자체에서 다시 확인합니다. AC.399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했고 그것이 ‘에녹’이라 불렸으며, 가인이 쌓은 성읍은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400에서는 이것을 더 일반화하여 교회든 이단이든 서로 잉태하고 낳으면서 하나의 영적 계보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401은 왜 그 새로운 상태가 하필 ‘에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녹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번 에녹은 단순히 가인 다음에 등장한 또 하나의 이단이라는 의미만을 갖지 않습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이제 자기에게서 새로운 교리적 가르침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분리가 단순한 주장이나 태도로 머무르지 않고 가르칠 수 있는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99의 ‘성읍’과 AC.401의 ‘에녹’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에녹은 새롭게 산출된 분열 또는 이단이며, 성읍은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분열된 원리가 생겨나고, 그 원리가 가르침으로 형성되며, 그 가르침에서 여러 교리적인 것들이 조직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흐름입니다. AC.399에서 ‘교리 체계’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가 AC.401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이제 단순한 분열을 넘어 실제로 ‘가르침’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계보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처음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하나의 교리적 원리를 표상했습니다. AC.398에서는 그 결과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렇게 독립한 이해와 신앙은 자기 나름의 가르침을 만들어 내기 시작합니다. ‘에녹’은 바로 그 단계와 관련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르침’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가르침의 존재가 아니라 그 가르침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번 문맥에서 에녹의 가르침은 가인, 곧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산출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가르침 역시 그 최초의 분리라는 성격을 품고 있습니다. 교리가 정리되고 가르침이 체계화되었다고 해서 그 근원의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AC.400의 마지막 문장과 연결하면 그 위험이 더 잘 보입니다.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잘못된 원리였지만 그것이 가르침으로 형성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고, 그 가르침으로부터 다시 새로운 결론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분리가 다음 분리를 낳고, 그것이 다시 가르침과 교리를 낳으면서 계보가 이어집니다.

 

이것은 교리의 ‘근원’을 살피는 일이 왜 중요한지도 보여 줍니다. 어떤 가르침이 매우 논리적이고 정교하며 많은 성경 구절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참된 교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의 중심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가르치는지, 아니면 신앙을 삶과 사랑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 구원의 본질인 것처럼 만드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원리를 다른 교회나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이번 본문의 목적과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가인의 계보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편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어떤 잘못된 생각 하나가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홀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한 다른 생각들이 생기고,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자기 논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그 논리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가르칠 정도로 확신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가인에게서 에녹이 태어나고 성읍이 세워지는’ 과정은 인간 마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영적 과정입니다.

 

AC.401은 또한 같은 이름이 언제나 같은 상응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게 합니다. 창4의 가인 계열에도 에녹이 있고, 창5의 셋 계열에도 에녹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에녹’이라는 이름이 가르침의 시작과 관련된다는 사실만으로 두 에녹의 영적 질이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시작되었느냐는 그 가르침이 속한 계열과 문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점은 나중에 두 에녹을 비교할 때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가인 계열의 에녹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교리적 가르침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반면 셋 계열의 에녹에서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속한 것들이 수집되고 교리적인 형태로 보존되는 전혀 다른 기능이 나타납니다. 같은 ‘에녹’과 ‘가르침’이라는 요소가 있어도 그것이 어느 계열에서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전개하는가에 따라 영적 의미의 질은 달라집니다.

 

따라서 AC.401의 짧은 설명은 AC.399-400을 한 문장으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또 다른 분열인 에녹이 태어났고, 그 분열은 단순한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형성되었으며,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성읍으로 나타났습니다. ‘분리된 신앙’이 이제 ‘가르쳐지는 분리된 신앙’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결국 AC.401에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교리를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교리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진리를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 위에 가르침을 세우는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가인의 에녹은 하나의 분리가 가르침으로 형성되기 시작할 때 그것이 더 넓은 교리적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의 생명은 단지 올바른 문장과 정교한 체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뿌리를 두고 그것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AC.401 해설)

 

 

 

AC.402, 창4:17, ‘성읍은 왜 교리를 의미하는가? -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가인의 성읍까지’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가인이 ‘쌓은 성읍’(city that was built)이 그 이단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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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0, 창4:17,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 잉태와 출생과 계보의 속뜻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0‘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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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0

‘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는 이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또한 1절에서 사람과 그의 아내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고 한 것으로부터도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어지는 것들은 교회의 것이든 이단들의 것이든 이와 유사한 잉태와 출생들입니다. 그들은 이것들로 하나의 계보를 이루었는데, 이는 이러한 것들도 서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That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signifies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aid, as well as from what is stated in the first verse, that the man and Eve his wife produced Cain; so that the things which now follow are similar conceptions and births, whether of the church, or of heresies, whereof they formed a genealogy, for these are similarly related to each other. From one heresy that is conceived there are born a host of them.

 

해설

AC.400은 AC.399에서 제시한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속뜻을 확증하면서, 창세기의 족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는 가족사의 의미에 머물지 않고,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부터 이어지는 잉태와 출생과 계보가 교회와 이단들의 영적 관계를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그 근거로 스베덴보리는 창4:1로 다시 돌아갑니다. 거기서 ‘사람과 그의 아내 하와’가 가인을 낳았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잉태와 출생은 단순한 생물학적 출산을 넘어 교회 안에서 새로운 교리와 상태가 발생하는 것을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다시 에녹을 낳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교회의 어떤 상태에서 가인이 산출되었고, 이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에서 다시 에녹이라는 새로운 분열이 산출됩니다. 이것이 영적 계보입니다.

 

여기서 ‘잉태’와 ‘출생’을 구별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번호 자체는 둘의 세부 상응을 따로 정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하나의 영적 원리가 안에서 형성되고 그것이 다시 어떤 교리나 상태로 드러나는 과정을 ‘잉태와 출생’이라는 언어로 표현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계보에서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표현은 속뜻에서 단순히 시간적으로 다음 세대가 등장했다는 것보다, 앞의 상태에서 뒤의 상태가 어떻게 산출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관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교회의 것이든 이단들의 것이든’이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잉태와 출생이라는 상응이 악한 것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선하고 참된 새로운 상태가 생겨나는 것도 잉태와 출생으로 표현될 수 있고, 반대로 잘못된 원리에서 새로운 분열과 이단이 생겨나는 것도 같은 언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상응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잉태되고 무엇이 태어나는가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기계적인 일대일 암호표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출생은 언제나 이것 하나를 뜻한다’는 식으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루고 있는 주제와 계열을 보아야 합니다. 가인의 계보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최초의 원리가 계속 파생되고 있으므로 그 잉태와 출생은 분열과 이단의 발생을 나타냅니다. 다른 계보에서는 같은 출생의 언어가 새로운 교회의 발생이나 선하고 참된 것의 전승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관계 때문에 ‘계보’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계보는 이름들의 단순한 목록이 아닙니다. 앞의 것이 뒤의 것을 낳고, 뒤의 것은 다시 그다음 것을 낳는 인과적·영적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 계보를 읽을 때 각각의 이름을 서로 고립시켜 해석하기보다, ‘앞의 상태에서 무엇이 나왔으며 그것이 다시 무엇을 낳았는가?’라는 흐름을 계속 따라가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399의 ‘성읍’도 다시 의미가 생깁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에녹이라는 또 다른 분열이 나오고, 그 에녹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읍, 곧 그로부터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제 AC.400은 이것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이단적 원리가 형성되면 그것은 다시 새로운 결론과 교리를 산출하고, 그것들이 다시 다른 것을 산출하면서 하나의 계보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인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으로 이단들이 많이 생겼다는 관찰이 아닙니다. 하나의 잘못된 근본 원리가 받아들여지면 그 원리 안에 이미 여러 후속 결론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의 작은 분리가 그 자체의 논리를 따라 전개되면서 점차 여러 형태의 분리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가인의 경우 그 최초의 원리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 속하여 그것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오히려 체어리티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 최초의 분리가 받아들여지면 그 뒤에는 신앙의 본질, 선한 삶의 중요성, 이웃 사랑의 위치, 교리와 삶의 관계 등에 관한 여러 후속적인 왜곡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근본적인 분리가 여러 교리적 분리를 낳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오늘날 어떤 특정 교파나 교리적 차이를 곧바로 ‘가인의 이단 계보’에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제시하는 핵심은 다른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있지 않고,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가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서 계속 새로운 오류를 산출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 진리를 체어리티와 분리하거나, 아는 것을 사는 것보다 높이 두거나, 교리적 옳음을 이웃 사랑보다 앞세우는 원리가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의 이단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난다’는 말을 모든 교리적 발전이 나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 역시 잉태하고 낳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삶 속에서 새로운 이해와 쓰임을 낳는다면 그것 역시 영적 출생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무언가를 낳는다’는 데 있지 않고 무엇으로부터 무엇이 태어나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AC.398과도 매우 깊게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AC.399-400은 바로 그 뒤집힌 질서가 이제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중심이 되면, 자기 전제에서 계속 새로운 교리적 결론을 만들어 내며 그것들이 하나의 계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AC.393-398에서 보았듯이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분리 자체를 승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후의 인류가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보존된 신앙은 인간의 자유 안에 놓입니다. 그것을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시킬 수도 있고, 자기 지성과 proprium을 따라 또 다른 분열을 산출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가인의 계보는 후자의 전개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400은 앞으로 이어질 가인의 족보를 읽는 하나의 안내문과 같습니다. 이후 등장하는 이름들을 단순히 여러 사람의 세대로만 읽지 않고, 서로 관련된 교회적·교리적 상태들의 연속으로 읽어야 합니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것은 앞의 영적 상태가 뒤의 상태를 산출했다는 것이며, 그 연속적인 산출이 하나의 계보를 형성합니다.

 

결국 AC.400은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하나의 강력한 원리를 남깁니다.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작은 분리가 단지 한 가지 교리 문제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최초의 원리가 계속 새로운 생각과 판단과 교리를 낳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받아들여져 서로 결합될 때에도 거기에서 새로운 선과 진리의 열매들이 계속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많이 만들어 내느냐가 아니라, 그 모든 잉태와 출생의 처음에 어떤 사랑과 어떤 원리가 자리 잡고 있느냐입니다. (AC.400 해설)

 

 

 

AC.401, 창4:17, ‘에녹이라는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시작되고 형성되기 시작한 교리적 가르침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1‘에녹’(Enoch)이라 불린 것은 그 모든 교리적 또는 이단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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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9, 창4:17, ‘가인이 에녹을 낳고 성을 쌓다 - 분리된 신앙이 새로운 교리 체계를 낳다’ (AC.399-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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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창4:17)

 

AC.399

‘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는 이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하였고, 그것이 ‘에녹’(Enoch)이라 불렸음을 의미합니다. ‘그가 쌓은 성읍’(the city which he built)은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분열 또는 이단이 ‘에녹’(Enoch)이라 불렸기 때문에, ‘그 성읍의 이름을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 하였다’(the name of the city was called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고 한 것입니다. The words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signify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that was called “Enoch.” By “the city which he built” is signified all that was doctrinal and heretical therefrom, and because the schism or heresy was called “Enoch,” it is said that “the name of the city was called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해설

AC.399부터 가인 계열의 계보가 시작됩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고 성읍을 건설하여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에녹이라고 부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계보를 단순한 가족사의 기록으로 읽지 않습니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하나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듯이, 가인에게서 태어난 ‘에녹’은 그 분열이 자기 자신에게서 다시 산출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낳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하나의 교리적 원리가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그 상태에 머물지 않고 그 원리에서 다시 다른 결론과 교리를 산출합니다. 가인의 최초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도 그 자체로 신앙일 수 있다’는 원리가 일단 자리 잡으면, 거기에서 여러 후속적인 생각과 교리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파생을 계보의 ‘출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이단 뒤에 우연히 또 다른 이단이 나타났다는 뜻보다 더 깊습니다. 원문은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곧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것을 산출하였다’고 합니다. 새로운 분열은 이전 분열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던 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최초의 원리가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고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어 ‘성읍’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쌓은 성읍을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전입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분열된 원리였던 것이 이제 여러 교리적인 내용들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생각이나 주장 하나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가르침들이 형성되면서 하나의 체계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읍’은 분리된 신앙이 교리적으로 조직되고 정착된 상태를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399의 원문이 직접 ‘교리 체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문은 ‘all that was doctrinal and heretical therefrom’, 곧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읍 = 교리 체계’는 이 표현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한 말로 사용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직접 그렇게 정의했다고까지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여러 교리적·이단적 내용이 산출되고 그것들이 하나의 성읍으로 표상된다는 데 초점을 두면 충분합니다.

 

이것은 AC.397-398과도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 놋 땅에 거했으며,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과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AC.398에서는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9에서는 바로 그 이해와 신앙이 독립적으로 지배하는 상태에서 새로운 교리적 산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이해가 사랑과 선을 섬길 때에는 진리가 삶을 인도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나 이해가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 하면, 사람은 자신이 세운 전제에서 계속 새로운 논리와 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전제가 잘못되어 있어도 그 위에 매우 정교하고 일관된 체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정교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교리가 살아 있는 진리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것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교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문제는 교리가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어떤 근원에서 그 교리가 산출되었느냐에 있습니다. 선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진리의 교리는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에서 산출된 교리는 아무리 정교하게 조직되어도 그 최초의 분리를 계속 품을 수 있습니다. AC.399의 성읍은 바로 후자의 문맥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 성읍의 이름을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 하였다’는 표현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분열 또는 이단 자체가 에녹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그로부터 나온 교리적·이단적 전체도 에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그 성읍의 성격은 그것을 낳은 원리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읍을 구성하는 여러 교리가 아무리 많아져도 그 전체를 규정하는 것은 그것들의 근원이 된 ‘에녹’이라는 분열의 성격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 두어야 할 것이 ‘가인 계열의 에녹’과 훗날 창5에 등장하는 ‘셋 계열의 에녹’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번 AC.399의 에녹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파생된 분열 또는 이단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속한 것들을 모아 교리적인 형태로 보존한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성경에 같은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한 상응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두 에녹을 나중에 함께 보면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생깁니다. 가인 계열에서는 교리화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전개하고 굳히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반면, 셋 계열의 에녹에서는 쇠퇴해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보존하기 위한 교리화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생명에서 분리된 교리의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잃어 가는 생명의 지혜를 보존하기 위한 교리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창5의 해당 AC 번호에 이르렀을 때 충분히 다루는 편이 좋겠습니다.

 

AC.399는 또한 ‘가인의 표’가 왜 신앙의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그 신앙이 곧바로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존된 신앙은 여전히 인간의 자유 안에서 사용될 수 있었고, 가인의 계열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분열과 교리적 체계를 산출하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주님의 보존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강제적인 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필요했습니다. 앞의 AC.393-398에서 반복해서 보았듯이,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이해 능력과 신앙의 지식이 한편으로는 분리된 교리 체계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끄시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결정적인 것은 신앙의 지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사랑과 결합되고 무엇을 섬기느냐입니다.

 

따라서 AC.399는 가인의 후손들을 단순한 고대 족보로 읽기보다,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가 어떻게 자기에게서 또 다른 원리를 낳고, 그것이 다시 교리적인 것들을 형성하면서 발전하는지를 보여 주는 출발점입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분열이 또 다른 분열을 산출한 것이며, ‘성을 쌓았다’는 것은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결국 이번 번호가 던지는 질문은 ‘교리가 얼마나 정교한가?’보다 더 깊습니다. ‘그 교리는 어디에서 태어났는가?’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신앙인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는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에녹과 성읍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자기 나름의 후손을 낳고 교리를 만들며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의 생명은 교리의 규모나 논리적 정교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다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되어 있느냐에 있습니다. (AC.399 해설)

 

 

 

AC.400, 창4:17,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 잉태와 출생과 계보의 속뜻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0‘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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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8, 창4:16,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다 - 에덴 동쪽에 거한 가인의 속뜻’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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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이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땅’(ground)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땅’은 순수한 의미에서는 교회 또는 교회의 사람을 의미하며, 따라서 앞에서 보여 준 것처럼 교회가 고백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말의 의미는 반드시 다루는 주제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잘못 고백하는 자들, 곧 분열 또는 이단을 고백하는 자들도 역시 ‘땅’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driven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은 더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That to be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i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ground,” which, in the genuine sense, is the church, or the man of the church, and therefore whatever the church professes, as shown above. The meaning of a word necessarily varies with the subject treated of, and therefore even those who wrongly profess faith, that is who profess a schism or heresy, are also called “ground.” Here however to be “driven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o be no longer in the truth of the church.

 

해설

AC.386은 바로 앞 AC.385에서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이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 출발점은 ‘땅’의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땅’이 순수한 의미에서는 교회 또는 교회의 사람을 의미하며, 따라서 교회가 고백하고 가르치는 것들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장소에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교회의 진리가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더 이상 그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특히 주목할 문장은 ‘어떤 말의 의미는 반드시 다루는 주제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땅은 언제나 교회다’, ‘물은 언제나 진리다’, ‘빛은 언제나 신앙이다’라는 식으로 하나의 자연적 대상에 하나의 영적 의미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상응의 중심은 있지만, 실제 본문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그 단어가 놓여 있는 전체 문맥과 현재 다루고 있는 영적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바로 ‘땅’이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순수한 의미에서 ‘땅’을 교회 또는 교회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곳이며, 교회의 사람 역시 선과 진리가 심어지는 하나의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앞의 AC.377에서도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이라고 했습니다. 사람 안에 선들과 진리들이 심어지면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이 심어지면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땅이라는 상응의 중심에는 ‘무엇인가가 심어지고 받아들여지는 곳’이라는 개념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가인의 분열이나 이단도 ‘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바로 이번 번호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신앙을 잘못 고백하는 자들, 곧 분열 또는 이단을 고백하는 자들도 하나의 ‘땅’이라고 불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어떤 교리적 원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배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땅’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선한 교회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그 땅에 심어져 있으며, 어떤 교리가 그 사람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1에서 ‘땅을 간다’는 표현이 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었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일반적으로 땅을 가는 것은 좋은 씨를 심고 열매를 얻기 위한 긍정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문맥의 ‘땅’은 이미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을 간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열된 교리를 계속 배양하고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땅’과 ‘경작’이라는 이미지도 현재 다루는 주제가 무엇인가에 따라 속뜻의 성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상응의 의미가 문맥에 따라 아무렇게나 바뀐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만일 상응의 의미가 아무런 질서 없이 매번 달라진다면 말씀의 내적 의미를 객관적으로 읽을 수 없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런 임의성이 아닙니다. ‘땅’에는 여전히 교회, 교회의 사람, 그리고 그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는 교리와 같은 일관된 의미망이 있습니다. 다만 그 교회나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인지, 아니면 그것을 왜곡하여 분열과 이단을 받아들인 상태인지에 따라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응은 고정된 낱말사전도 아니지만 무제한적인 상징 놀이도 아닙니다. 말씀 전체의 의미망과 현재의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AC를 읽는 데 실제로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번호에서 ‘땅=교회’라고 배웠다고 해서 이후 모든 ‘땅’을 무조건 ‘교회’라는 한 단어로 바꾸어 읽으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처럼 ‘교회의 사람’, ‘교회가 고백하는 것’, 심지어 왜곡된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까지 그 의미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응어를 만날 때 ‘이 단어는 무엇을 뜻하는가?’만 묻기보다 ‘왜 바로 이 문맥에서 이 의미로 사용되는가?’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이제 이러한 원리를 현재 구절에 적용하면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다시 ‘여기서는’이라고 범위를 한정합니다. 여기서 그것은 ‘더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가인은 단순히 자신이 살던 토지에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교회의 진리 안에 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단이나 외적인 교회 조직에서 제명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교회는 사람 안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살아갈 때 그 사람 안에 교회가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는 여전히 교회에 속해 있고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며 교리를 고백하더라도,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진리를 삶에서 거부한다면 내적으로는 교회의 진리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가인의 추방은 바로 이러한 내적인 분리를 보여 줍니다.

 

또한 여기서도 주님께서 먼저 가인을 진리 밖으로 내던지셨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저주’가 선에서 돌아선 상태를 의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인은 자신이 받아들이고 확증한 분열 때문에 더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됩니다. 진리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면 진리의 생명을 잃고, 결국 무엇이 진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AC.382의 ‘피하며 유리함’과 이번 번호의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됨’은 같은 영적 쇠퇴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결국 AC.386은 짧은 번호이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가르칩니다. 하나는 가인의 ‘지면에서 쫓겨남’이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상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의 상응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원리입니다. 같은 단어라도 다루는 주제에 따라 의미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상응을 기계적인 일대일 대응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변화도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일관된 상응 질서와 현재의 문맥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AC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상응어의 뜻을 외우는 것만이 아니라, 그 상응이 지금 이 문맥에서 왜 그렇게 나타나는지를 함께 이해하는 것입니다.

 

 

 

AC.387, 창4:14,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신앙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주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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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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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AC.378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는 그 분열로 말미암아 그가 돌아서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 입을 벌려’(which hath opened its mouth)는 그 이단이 그들에게 가르쳤음을 의미합니다. ‘네 아우의 피들을 네 손에서 받아들였은즉’(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은 그것이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의미합니다.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signifies that through the schism he had become averte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signifies that the heresy taught them;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signifies that it did violence to charity, and extinguished it.

 

해설

AC.378은 창4:11의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바로 앞 AC.377에서 ‘땅’은 사람 안에 자리 잡은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이고, 그 안에 선과 진리가 심어지면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며 악과 거짓이 심어지면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78의 ‘땅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도 외적인 토지가 가인을 저주한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시킨 그 분열이 사람 안에 뿌리내림으로써 생긴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를 ‘그 분열로 말미암아 그가 돌아서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에게서 돌아섰느냐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여 그에게서 돌아서신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고 하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 소멸시킨 그 분열로 말미암아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말씀의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저주’를 선언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인간 자신의 악과 거짓이 그를 주님에게서 돌아서게 한 상태가 드러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저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는 질서에서 스스로 돌아선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서 ‘저주’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생명과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돌아서는 것 자체가 저주의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인간을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악과 거짓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생명과 선이 흘러오는 질서에 등을 돌립니다. 햇빛은 계속 비치지만 사람이 스스로 등을 돌리면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둠이 태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태양을 등진 상태에서 생긴 것처럼, 여기서 ‘저주’도 주님의 사랑이 반대로 변한 결과라기보다 가인의 분열이 가져온 영적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땅이 그 입을 벌렸다’는 것은 ‘그 이단이 그들에게 가르쳤음’을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땅이 입을 벌려 피를 받아들였다는 문자적 장면을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가르침의 이미지로 읽습니다. 바로 앞에서 땅은 사람 안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땅에 ‘입’이 있습니다. 입은 말하고 가르치는 기능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분열이 단순히 내면에 잠재된 생각으로 머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리로 표현되고 가르쳐졌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상태는 더 이상 개인적인 마음의 흔들림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원리가 교리로 형성되고 전달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 점은 AC.370의 마지막 문장 ‘그들의 교리는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와 직접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질서가 뒤바뀌었습니다. 이어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을 거부했고,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결국 완전히 배척했습니다. 이제 그 상태가 ‘땅이 입을 벌린다’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즉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가르침이 되어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악과 거짓이 개인의 내적 상태에서 교리로 조직되고 가르쳐질 때 그 영향은 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심어질 수 있습니다. AC.377에서 사람이 그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형성된다고 한 설명과도 바로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네 아우의 피들을 네 손에서 받아들였은즉’은 그 이단이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시 ‘피들’이 복수형으로 나타납니다. AC.374에서 이미 그 이유가 설명되었습니다. 사랑에서 모든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미움에서는 모든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피들’이라고 복수형으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아벨의 ‘피들’은 단지 체어리티라는 하나의 추상적 원리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함께 있어야 할 여러 선한 것들이 폭력을 당하고 소멸되는 상태를 포함합니다.

 

특히 ‘네 손에서’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AC.378 자체에서는 ‘손’의 상응을 별도로 풀지 않으므로 여기서 그 의미를 앞질러 자세히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본문 전체에서는 체어리티의 소멸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가인의 분열과 이단이 실제로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한 결과라는 점이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did violence to charity, and extinguished it’이라고 아주 강하게 표현합니다. 단순히 체어리티를 덜 중요하게 여긴 정도가 아니라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78의 세 표현은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을 보여 줍니다. 먼저 ‘땅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선 상태입니다. 그다음 ‘땅이 입을 벌린다’는 것은 그 분열이 이단적 교리가 되어 가르쳐지는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땅이 ‘아우의 피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교리가 실제로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그것을 소멸시킨 결과입니다. 분열이 내면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교리가 되고, 그 교리가 삶과 교회의 사랑을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단’ 역시 오늘날 특정 교파를 정죄하는 말로 성급하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이단이 무엇인지는 이미 문맥 안에서 분명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하고,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AC.378은 다른 사람의 교리를 ‘이단’이라고 판정하기 위한 도구이기 전에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게 합니다. 내가 붙드는 진리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신앙의 정확성을 주장하면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결국 AC.378의 ‘저주’는 주님께서 가인을 버리셨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는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선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분열은 입을 벌려 하나의 가르침이 되었으며, 마침내 아벨의 피들을 받아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주님은 계속 말씀하시고 가인을 부르시지만, 가인의 교리는 점점 더 주님의 질서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신앙이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자기가 서 있는 땅 자체를 분열의 땅으로 만들지만,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은 선과 진리가 함께 자라나는 주님의 밭이 됩니다.

 

 

 

AC.379, 창4:1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1) AC.379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것’(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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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7, 창4:10,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 - 무엇이 심어지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집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7여기서 ‘땅’(ground)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밭’(field)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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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7

여기서 ‘땅’(ground)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밭’(field)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밭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땅’은 분열을 의미합니다.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 안에 심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그런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들과 진리들로부터는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로부터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어떤 특정한 교리나 이단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다루고 있는 구절에서도 ‘땅’이라는 말은 사람 안에 있는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됩니다. That the “ground” here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therefore the “ground,” having the field in it, is a schism. Man himself is the “ground,” and also the “field,” because these things are inseminated in him, for man is man from what is inseminated in him, a good and true man from goods and truths, an evil and false man from evils and falsities. He who is in any particular doctrine or heresy is named from it,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the term “ground” is used to denote a schism or heresy in man.

 

해설

AC.377은 AC.373에서 짧게 제시했던 ‘땅(ground)은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설명합니다. 창4:10에서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부터’ 주님께 부르짖는다고 했습니다. 앞의 AC.374-376에서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그 ‘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피들이 부르짖어 올라오는 ‘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땅을 단순히 악이 벌어진 장소로 보지 않고 ‘분열 또는 이단’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가인이 표상하는 것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여 하나의 교리적 원리로 만든 상태라는 지금까지의 흐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첫 논리는 ‘밭’이 교리를 의미하므로 밭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땅’은 분열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368에서 ‘들’ 또는 ‘밭’이 교리를 의미한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밭은 씨가 뿌려지고 자라나는 곳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씨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며,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조직되는 교리적 영역이 밭으로 표상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밭을 품고 있는 더 근원적인 ‘땅’으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가인의 문맥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의 결합에서 갈라지고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으므로, 그 땅은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AC.377의 설명은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번 번호의 핵심 문장입니다. 교리는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명제들의 집합만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 또는 악과 거짓이 실제로 심어지고 자라는 장소는 사람 자신입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땅과 밭이 교회와 교리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것들이 인간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그의 생명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하고 사랑하고 의도하며, 마침내 삶으로 내보내는 살아 있는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사람은 자기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그런 사람이 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들과 진리들로부터는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로부터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많은 지식을 접하면 그 지식대로 자동적으로 사람이 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심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인간의 내면에 받아들여져 그의 생각과 의지와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알고 있는 것과 그 진리를 인정하고 사랑하여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거짓을 잠깐 듣거나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이 ‘거짓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확증하며 그에 따라 살아갈 때 그것이 점차 그의 영적 성질을 형성합니다.

 

이 점에서 ‘심어진 것’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자유와도 연결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생각과 감정이 곧바로 그 사람 자신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인간에게 제시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인정하며 의지와 행동으로 확증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AC.377을 ‘나쁜 생각이 한 번 들어오면 악한 사람이 된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람이 어떤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들고, 어떤 악과 거짓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여 굳히느냐에 따라 그의 내적 성질이 형성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땅’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돌아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아벨을 죽였다는 한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고, 이어 둘을 분리하며,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점차 하나의 교리가 되었고, 결국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거부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즉 하나의 거짓된 원리가 사람 안에 심어지고 확증되면서 그의 교리와 삶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피들이 부르짖는 ‘땅’은 단순한 흙이 아니라 그러한 분열이 자리 잡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인 ‘어떤 특정한 교리나 이단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된다’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받아들이고 확증하여 살아가는 교리적 성질에 따라 영적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래서 이 문맥에서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 또는 이단을 ‘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교단이나 종파에 붙이는 제도적 낙인으로 먼저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핵심은 살아 있는 전체 질서에서 어떤 진리를 떼어 내어 독립시키고, 그것을 다른 진리나 선과 대립시키며 절대화하는 영적·교리적 분열입니다.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신앙이 홀로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만든 것이 바로 그 분열입니다.

 

이 때문에 AC.377은 교리의 중요성을 매우 깊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교리는 단지 시험을 보기 위해 외우는 신학적 명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참되다고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그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다고 ‘올바른 교리만 머리로 정확히 알면 선한 사람이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고, 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가인의 문제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선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무시하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분별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땅’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함께 심어지고 결합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이다’라는 말은 말씀을 읽는 우리의 태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땅과 밭을 고대에 있었던 어떤 교회나 사람들의 상태로만 읽으면 우리는 그 말씀의 바깥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땅이고 밭이라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지금 내 안에는 무엇이 심어지고 있는가? 내가 반복하여 받아들이고 확증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내가 붙드는 신앙의 진리는 실제로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진리를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됩니다. 말씀의 속뜻은 이렇게 역사적 표상에서 현재 인간의 거듭남으로 들어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희망도 줍니다. 사람이 ‘땅’이라는 것은 악과 거짓만 심어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도 심어질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께서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인간에게 주시고 심으시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사람이라는 땅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들이 자라고 결합하도록 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나는 원래 어떤 땅인가?’라는 고정된 자기 규정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주님께서 내 안에 심으시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결국 AC.377에서 ‘땅’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 분열과 이단이 추상적인 교리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심어지고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 안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로부터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받아들이고 확증한 악과 거짓으로부터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가인의 ‘땅’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이 심어져 하나의 교리가 된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피들이 바로 그 땅에서부터 부르짖습니다.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가인의 교리와 분리된 삶 밖에서 우연히 생긴 사건이 아니라, 그 분열이 사람 안에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은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AC.378, 창4:11,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선 가인’ (AC.378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AC.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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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6, 창4:10,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이 드러내는 죄책’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6이로부터 ‘피들이 부르짖는 것’(crying of bloods)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따라 나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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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창4:10)

 

AC.373

‘네 아우의 피들의 소리’(voice of thy brother’s bloods)는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음을 의미하고, ‘피들이 부르짖는 것’(crying of bloods)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하며, ‘땅’(ground)은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합니다.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the “crying of bloods” is the accusation of guilt, and “ground”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해설

AC.373은 창4:10의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의 속뜻을 아주 압축적으로 제시합니다. 앞에서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이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속뜻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나아가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한다는 질서 자체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네 아우의 피들의 소리가 내게 부르짖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AC.373부터는 단순히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넘어, 그 소멸이 가져오는 죄책과 그 죄책이 드러나는 상태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먼저 ‘네 아우의 피들의 소리’는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벨은 계속해서 체어리티를 표상하므로 아벨의 피는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의 흔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분리하고 마침내 소멸시켰다는 것이며, 이제 흘려진 아벨의 피는 바로 그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나타냅니다. ‘폭력’이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가 저절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가인의 교리적 원리가 결국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피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침해되고 파괴된 결과를 보여 줍니다.

 

특히 원문이 ‘blood’가 아니라 ‘bloods’, 곧 복수형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AC.373 자체는 아직 왜 복수형인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피들의 소리’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의미한다고만 밝힙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복수형의 세부적인 상응을 미리 단정하여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번역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붙들고 있는 복수형을 보존하고, 그 의미가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계속 지켜 온 원칙과도 맞습니다. 현재 번호가 직접 말하는 범위는 분명히 말하되, 뒤의 설명을 앞당겨 과도하게 넣지는 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피들이 부르짖는 것’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르시다가 땅에 흘린 피의 소리를 듣고 범죄를 발견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르짖음’은 이미 행해진 악 자체가 그 악의 성질과 죄책을 드러내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했지만, 아벨의 피는 부르짖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행한 악을 부인하고 합리화하며 감추려 할 수 있지만, 영적 질서 안에서는 그 악이 실제로 무엇을 파괴했는지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피들의 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입니다.

 

여기서 ‘고발’이라는 말을 주님께서 인간의 죄를 찾아내어 처벌할 근거를 모으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큰 틀에서 주님은 인간을 파멸시키려는 분이 아니라 끊임없이 악에서 건져 선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 가운데 실제로 악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교리 안에 굳히면 그 악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습니다. 그 결과가 드러나는 것을 말씀은 마치 피가 소리를 내어 하나님께 고발하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따라서 ‘죄책의 고발’은 변덕스러운 신적 분노가 새롭게 일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악의 실상이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땅’(ground)은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ground’의 의미를 가인의 상태에 맞추어 읽어야 하는 대목입니다. 가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둘을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교리를 만든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땅’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단순히 한 사람의 개인적 감정이나 행동 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시킨 교리적 토대 안에서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AC.370의 마지막 문장 ‘그들의 교리는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여기서 ‘이단’이라는 표현 역시 오늘날의 교파적 의미로 성급하게 옮겨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73이 말하는 ‘heresy’는 이 문맥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살아 있는 결합에서 떨어져 나와 한 부분을 독립시키고 그것을 절대화하는 교리적 왜곡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정 교단이나 사람에게 곧바로 ‘가인의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이 번호의 목적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어떤 진리 하나를 전체 질서에서 떼어 내어 절대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신앙의 정확성을 강조하면서 그 신앙의 생명인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73은 이렇게 앞의 흐름을 세 단어로 압축합니다. ‘피들’, ‘부르짖음’, ‘땅’입니다.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그 ‘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을, ‘땅’은 그러한 폭력이 일어난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합니다. 앞에서는 가인의 교리가 ‘신앙이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아벨이 죽었습니다. 이제 그 결과가 사라지지 않고 ‘피들의 소리’가 되어 부르짖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는 있어도, 그렇게 함으로써 생긴 영적 파괴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결국 창4:10의 ‘네 아우의 핏소리가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에도 그 일이 주님 앞에서 감추어질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했지만 피들은 부르짖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교리와 논리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도 있지만,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여 사랑을 훼손한 결과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참된 신앙은 아벨의 피를 흘리는 신앙이 아니라 아벨을 ‘아우’로 인정하고 그의 ‘지키는 자’가 되는 신앙입니다. 곧 체어리티를 섬기고 보호하며, 그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얻는 신앙입니다.

 

 

 

AC.374, 창4:10, ‘왜 아벨의 피가 부르짖는가? - 미움은 체어리티에 가하는 폭력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4‘피들의 소리’(voice of bloods)가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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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2,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2‘지키는 자’(keeper)가 된다는 것은 섬기는 것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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