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5:4, AC.486-491 심화

1,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면 천사들은 변화와 영원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AC.488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선 말을 합니다. 천사들은 지상에서와 같은 시간을 알지 못하며, 날들과 해들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오직 ‘상태와 그 변화’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즉시 질문이 생깁니다. ‘시간이 없다면 천국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어떤 일이 먼저 일어나고 다른 일이 나중에 일어나는 순서도 없는가? 천사가 배우고 성장하고 상태가 변한다면 그것 자체가 결국 시간 아닌가? 그리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는 말을 ‘천국에는 변화나 연속성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HH) 154-161은 아예 한 장 전체의 제목을 ‘천국에서 천사들의 상태 변화’로 두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사랑과 신앙,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총명의 상태가 계속 변화합니다. 어떤 때에는 사랑과 지혜가 더 충만하고 밝은 상태에 있고, 어떤 때에는 상대적으로 덜 충만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모든 것이 한순간에 얼어붙어 있는 정지된 세계가 아닙니다. 천사들에게도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이어지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상의 시간과 무엇이 다를까요? HH.162-169는 ‘천국의 시간’을 따로 설명하면서 그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지상에서 우리의 시간은 해와 지구의 운동을 바탕으로 해, 달, 주, 날, 시간 등 일정한 단위로 측정됩니다. 그러나 천국의 해는 그런 방식으로 날과 해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몇 시’, ‘며칠 후’, ‘몇 년 전’이라는 자연적 시간의 관념으로 삶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지상의 시간에 해당하는 것은 ‘상태와 그 상태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없다’는 것은 ‘전후의 연속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연속성을 지상의 시계와 달력의 단위로 경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아주 희미하게나마 경험합니다. 즐겁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두 시간이 마치 몇 분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고통이나 불안 속에서 기다릴 때에는 몇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객관적인 시간은 같지만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시간의 길이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험을 시간의 근원이 상태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로 설명합니다(HH.168). 천국에서는 자연적 시간의 외적 척도가 사라지고 그 근원에 해당하는 상태와 그 변화가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에게도 ‘먼저’와 ‘나중’에 해당하는 질서는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시계의 숫자가 앞뒤로 배열되는 방식이 아니라 상태가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질서입니다. AC.4901도 영들과 천사들의 생명이 ‘시간 안에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사람처럼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생명의 상태들’로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는 표현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천국에는 지상과 같은 자연적 시간이 없으며, 그에 대응하는 상태의 연속과 변화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AC.488에서 왜 ‘날’과 ‘해’가 상태를 의미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날’, ‘해’, ‘오늘’, ‘내일’, ‘어제’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시간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러한 표현에서 그 시간에 상응하는 영적 상태를 지각합니다(HH.165-166). 아침과 봄은 사랑과 지혜가 새롭게 밝아지는 상태를, 저녁과 가을은 다른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말씀의 문자에 있는 시간 표현이 천국에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던 영적인 실재인 ‘상태’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HH.167은 천사들이 ‘영원’을 사람과 다르게 이해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흔히 영원을 ‘끝없이 계속되는 시간’으로 상상합니다. 지금부터 1억 년, 1조 년,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숫자를 붙여도 그것은 여전히 시간의 연장일 뿐입니다. 천사들은 영원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한한 상태’라는 관점에서 지각합니다.

 

AC.1382도 같은 점을 매우 인상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시간 속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조차 끝없는 시간으로 상상하기 쉽지만, 천사들에게는 수천 년조차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긴 시간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와 전혀 단절된 것으로 경험하지 않으며, 그들의 현재 안에는 주님의 영원과 무한에 대한 지각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의 영원한 생명은 ‘끝없이 오래 버텨야 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 새로운 사랑과 지혜의 상태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천사가 ‘영원’을 무한한 상태로 지각한다고 해서 천사가 무한한 존재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한과 영원은 본래 주님께 속합니다. 천사들은 유한한 피조물이며, 다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끝없이 받아들이면서 계속해서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영원은 천사가 어느 순간 완성되어 더 이상 아무 변화도 없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무한한 선과 진리를 유한한 존재로서 계속 받아들이며 더 깊은 사랑과 지혜로 나아가는 삶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창5의 ‘날들과 해들’로 돌아오면 AC.486-491의 의도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창5가 ‘팔백 년’, ‘구백삼십 년’과 같은 숫자를 기록할 때 속뜻의 중심은 단순히 지상의 달력으로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AC.487-488이 강조하는 것은 그 ‘날들과 해들’ 안에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지상의 독자는 시간을 읽지만, 천국은 그 시간 안에 담긴 상태를 읽습니다. 이것이 창5의 족보를 단순한 연대 기록을 넘어 교회의 내적 역사로 읽게 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결국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는 말은 천국이 변화 없는 정지 상태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천국에는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끊임없는 상태 변화가 있습니다. 다만 그 변화를 해와 달과 시계와 달력으로 재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는 ‘몇 년을 살았는가’를 먼저 묻지만 천국의 관점에서는 ‘어떤 상태를 지나왔으며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가 더 본질적인 질문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거듭남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꾸어 줍니다. 주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신앙생활을 ‘몇 년 했는가’가 아닙니다. 그 세월 동안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던 상태에서 얼마나 주님과 이웃을 향하는 상태로 옮겨졌는지가 중요합니다. 지상에서 우리는 날과 해를 지나지만, 주님은 그 날과 해 안에서 우리의 상태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창5의 ‘날들과 해들’은 단순히 오래된 사람들의 기이하게 긴 수명을 기록한 표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실제로 이루어 가시는 것은 ‘시간의 축적’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 곧 거듭남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486-491 심화 1)

 

 

 

창5:4, AC.491,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는 아들들과 딸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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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창2:23)

 

AC.156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은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뼈’(bone)는 생명을 덜 얻은 이 proprium을, ‘살’(flesh)은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합니다. 또한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하며, 다음 절에 언급된 것처럼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woman)라고 했던 proprium을 여기서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이제’(Now)는 상태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때 이렇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y the own of the external man; “bone,” this own not so much vivified, and “flesh,” the own that is vivified. Man, moreover,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from his being so coupled with the external man as is stated in the subsequent verse, the own which was before called “woman” is here denominated “wife.” “Now” signifies that it was thus effected at this time because the state was changed.

 

해설

AC.156은 창2:23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proprium의 의미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로 연결합니다. 먼저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은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뼈와 살은 같은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뼈’는 생명을 덜 얻은 proprium을, ‘살’은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서도 생명의 정도가 구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147-149의 설명과 직접 이어집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인간의 proprium을, 갈빗대 대신의 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149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이 그 자체로는 죽어 있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6에서는 같은 뼈와 살의 구별을 ‘겉 사람의 proprium’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제시합니다. 특히 이번에는 뼈를 ‘생명을 얻지 못한’ proprium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을 덜 얻은’ proprium이라고 한다는 점도 그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이 그 차이를 더 설명하지 않으므로 지금 단계에서 그 이유를 별도로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창2:23의 사람과 여자는 속뜻에서 단순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인물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현재 문맥에서 사람은 속 사람을,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것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AC.156은 이 proprium이 겉 사람의 proprium임을 명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각각 설명되던 ‘사람’, ‘여자’, ‘proprium’, ‘뼈와 살’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안에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앞에서 ‘여자’(woman)라고 했던 것이 여기서는 왜 ‘아내’(wife)라고 하는지가 처음으로 밝혀집니다. 그 이유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AC.151에서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여자’라고 하고 뒤에서는 ‘아내’라고 한다고만 했으며, 그 차이를 아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때 그 차이를 미리 정하지 않고 기다렸던 이유가 여기서 확인됩니다. AC.156에 이르러 스베덴보리 자신이 ‘아내’라는 표현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과 직접 연결합니다.

 

이 결합은 AC.155의 ‘천국의 결혼’과도 이어집니다. AC.155에서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주님의 ‘신부와 아내’라고 하면서, 그 가장 깊은 내용이 천국의 결혼을 바라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6에서는 현재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는 모습이 ‘사람’과 ‘아내’라는 표현을 통해 나타납니다. 다만 현재 번호는 이 결합과 AC.155의 천국의 결혼 사이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두 표현을 곧바로 완전히 동일한 하나의 교리로 펼치기보다 본문이 제시하는 연결만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Now)라는 한 단어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상태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때 이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창2:23의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에서 ‘이제’는 단순히 사건의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앞의 상태와 다른 새로운 상태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어지고, 그것이 속 사람과 결합하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2를 역사적 사건의 연속으로만 읽는 것과 상태의 변화로 읽는 것의 차이를 다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라는 시간 표현조차 현재 다루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가 달라졌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갈빗대에서 여자가 지어지고, 여자가 사람에게 이끌려 오고, 사람이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일련의 흐름은 속뜻에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고, 마침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156은 짧지만 앞의 여러 번호를 정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뼈와 살은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서 생명의 정도를 나타내고,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하며,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면서 아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로 이 결합으로 상태가 변화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중심은 개별 상응어를 따로 암기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속 사람과 결합하여 새로운 상태에 이르게 되는 전체 흐름을 보는 데 있습니다. (AC.156)

 

 

 

AC.157,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7‘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속 사람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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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5, 창2:22, ‘주님의 신부와 아내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5‘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a rib was built into a woman)는 말씀에는 누구도 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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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

‘날들’(days)이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1장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는 모든 시간을 ‘날들’이라 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인데, 이는 이 구절과 뒤이어 나오는 구절들(5, 8, 11, 14, 17, 20, 23, 27, 31절)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상태들도 일반적으로 ‘날들’에 의해 의미됩니다. 그리고 ‘해들’(years)이 덧붙여질 때에는 그 해들의 시기들에 의해 상태들의 어떠함이 의미되며, 따라서 특별한 상태들이 의미됩니다. 태고인들은 숫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들로 교회와 관련된 여러 가지 것들을 의미했습니다. 이를테면 ‘셋’, ‘일곱’, ‘열’, ‘열둘’과 같은 숫자들과, 이것들과 다른 숫자들을 조합하여 만든 많은 수들이 있었고, 그것들로 교회의 상태들을 묘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숫자들은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아르카나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상태를 헤아리고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말씀의 많은 곳, 특히 예언서들에도 나타납니다. 유대교회의 의식에도 시간과 측량에 관한 숫자들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희생 제사와 소제와 봉헌물과 그 밖의 것들에 관한 숫자들이 그러하며, 그것들은 적용되는 바에 따라 어디에서나 거룩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팔백’이라는 수와 다음 절의 ‘구백삼십’, 그리고 이어지는 여러 구절의 연수에 담겨 있는 것들, 곧 각 교회의 일반적인 상태에 적용된 그 교회의 상태 변화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습니다. 이 저작의 뒤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둘’까지의 단순한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줄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들의 의미를 알기 전에는 조합된 숫자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That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was shown in the first chapter, where the “days” of creation have no other signification. In the Word it is very usual to call all time “days,” as is manifestly the case in the present verse, and in those which follow (5, 8, 11, 14, 17, 20, 23, 27, 31); and therefore the states of the times in general are likewise signified by “days”; and when “years” are added, then by the seasons of the years are signified the qualities of the states, thus states in special.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heir numbers, by which they signified various things relating to the church, as the numbers “three,” “seven,” “ten,” “twelve,” and many that were compounded of these and others, whereby they described the states of the church; wherefore these numbers contain arcana which would require much time to explain. It was an account or reckoning of the states of the church. The same thing occurs in many parts of the Word, especially the prophetical.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lso there were numbers, both of times and measures, as for instance in regard to the sacrifices, meat offerings, oblations, and other things, which everywhere signify holy things, according to their application. The things here involved, therefore, in the number “eight hundred,” and in the next verse, in the number “nine hundred and thirty,” and in the numbers of years in the verses following—namely, the changes of state of their church as applied to their own general state—are too many to be recounted.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ake occasion to show what the simple numbers up to “twelve” signify, for until the signification of these is known, it would be impossible to apprehend the signification of the compound numbers.

 

해설

AC.487은 앞의 AC.482와 AC.486에서 제시한 원리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날들’은 교회의 상태를 일반적으로 나타내고, ‘해들’은 그 일반적인 상태 안에 들어 있는 특별한 상태와 그 어떠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5에 반복되는 ‘그의 모든 날은 몇 년이었다’는 표현은 속뜻에서 단순한 수명 계산이 아니라 한 교회가 존속하는 동안 겪은 전체적인 상태와 그 안의 여러 변화를 묘사하는 언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첫 근거로 창1의 창조의 ‘날들’을 듭니다. 창조의 여섯 날이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을 의미했던 것처럼, 창5의 날들도 단순히 24시간 단위의 날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창1과 창5가 서로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창1에서 한 사람 또는 교회가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상태들이 ‘날들’로 묘사되었다면, 창5에서는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이 거쳐 간 상태들이 다시 시간의 언어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AC.487은 여기서 숫자 자체의 의미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태고인들은 ‘셋’, ‘일곱’, ‘열’, ‘열둘’과 같은 단순한 숫자들로 교회에 속한 여러 상태를 표현했고, 이 숫자들을 서로 조합하여 더 복잡한 상태들도 나타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창5의 800이나 930과 같은 큰 숫자를 곧바로 하나의 간단한 상응으로 바꾸어 ‘800은 이것, 930은 저것’이라고 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여러 단순한 수가 결합된 숫자이며, 그 안에는 각 교회가 겪은 복합적인 상태 변화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기서 800과 930의 의미를 하나하나 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포함된 교회의 상태 변화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숫자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절제의 원칙을 보여 줍니다. 숫자에 속뜻이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숫자의 모든 의미를 곧바로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먼저 셋, 일곱, 열, 열둘과 같은 기본적인 숫자의 의미와 그것들이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알아야 조합된 숫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유대교회의 희생 제사와 소제와 봉헌물 등의 숫자를 함께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에서 숫자는 단순한 계산상의 장식물이 아니라,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과 문맥에 따라 거룩한 것들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제물의 수, 기간, 측량 등이 예배의 영적 실재를 표상했던 것처럼, 창5의 연수 역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의 내적 상태를 표현합니다. 숫자의 의미는 숫자만 떼어 내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에 적용되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특히 ‘그것은 교회의 상태를 헤아리고 기록한 것이었다’는 설명은 창5의 족보를 바라보는 관점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문자에서는 아담이 몇 살에 셋을 낳았고 이후 몇 년을 더 살았으며 모두 몇 세에 죽었는지를 계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한 교회가 어떤 상태에서 시작하여 어떤 변화들을 거쳤으며 그 전체적인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헤아리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5의 숫자들은 사람의 나이를 세는 계산표라기보다 교회의 상태를 기록하는 영적 언어인 셈입니다.

 

이 점은 앞의 AC.483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등의 이름들이 각각 서로 다른 교회를 나타내고 그 교회들이 주로 퍼셉션의 차이로 구별되었다면, 각 이름 옆에 기록된 연수는 그 서로 다른 교회들의 상태와 그 상태의 변화를 표현합니다. 따라서 창5에서는 ‘이름’과 ‘숫자’를 따로 떼어 읽을 수 없습니다. 이름은 어떤 교회인지를 보여 주고, 숫자는 그 교회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묘사합니다.

 

결국 AC.487은 창5의 기이하게 긴 수명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고대 사람들이 정말 800년, 900년을 살 수 있었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서 주님께서 왜 바로 그 숫자들을 사용하셨으며, 그것들을 통해 교회의 어떤 상태와 변화를 나타내셨는가가 핵심입니다. 아직 그 모든 숫자의 아르카나를 우리가 풀어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창5의 숫자들이 무의미한 장식도 아니고 단순한 연대 자료만도 아니라는 것, 그것들이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의 상태 변화를 담아내는 말씀의 정교한 언어라는 사실을 AC.487은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487 해설)

 

 

 

창5:4, AC.488, ‘천사들에게 시간은 상태와 그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날들’(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years)이 특별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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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6, '날들과 해들,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AC.486-491)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날들’(days)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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