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창4:26)

 

AC.336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Enosh), 곧 또 하나의 ‘사람’(man, homo)이라 하는데, 이것이 그 교회의 이름입니다. (26절) The charity implanted by faith is called “Enosh,” or another “man” [homo], which is the name of that church. (verse 26)

 

해설

AC.336은 바로 앞 AC.335와 한 문장처럼 이어서 읽어야 합니다. AC.335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의미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셋’입니다. 이제 AC.336에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셋’은 새로운 신앙이고,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이며, 동시에 그 상태로 형성된 교회의 이름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의 근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바로 앞 AC.335에서도 새로운 신앙이 ‘주님에 의해 주어졌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체어리티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원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데 사용하시는 하나의 질서와 수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셋, 아벨과 에노스의 대조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의미했지만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었고, 그 신앙은 결국 아벨로 의미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반면 셋 역시 신앙을 의미하지만,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집니다. 그래서 가인의 신앙은 아벨을 죽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지만, 셋의 신앙에서는 에노스가 나타납니다. 같은 ‘신앙’이라 하더라도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그 질이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대조를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거듭남 순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셋과 에노스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바로 다음 AC.33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천적 인간으로 설명하면서, 그들에게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 그 신앙은 사실상 퍼셉션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AC.336의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를 ‘먼저 진리를 배우고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기는 후대 영적 인간의 일반적인 거듭남 단계’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은 AC.336이 직접 말하는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그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했고, 그것이 그 교회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상태가 태고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는 이어지는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를 단순히 ‘체어리티’라고만 하지 않고 ‘또 하나의 사람’(another man, homo)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앞부분에서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이라는 뜻보다 더 깊은 교회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살아 있고 서로 결합되어 있을 때, 그 상태가 참된 의미의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에노스를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짐으로써 다시 교회라 할 수 있는 상태가 형성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무너졌지만, 셋과 에노스에서는 그 둘이 다시 교회 안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질서가 마련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에노스는 단순한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그 교회의 이름’이 됩니다.

 

다만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말을 곧바로 ‘최초의 태고교회와 똑같은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다시 형성되었음을 보여 주지만, 그 상태가 최초의 태고교회와 어느 점에서 같고 어느 점에서 달랐는지는 뒤의 상세 해설을 따라가며 살펴보아야 합니다. AC.336 한 문장만으로 그 차이를 모두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블로그 해설에는 최초의 태고교회는 사랑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가졌고, 에노스 교회는 셋으로 의미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대비가 들어 있습니다. 큰 방향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이것을 ‘최초의 퍼셉션은 이미 사라졌고 이제 신앙을 먼저 배우는 새로운 방식이 시작되었다’는 식으로 강하게 말하면 너무 앞서갑니다. 이어지는 AC.337은 여전히 태고교회의 참된 상태를 사랑에서 오는 퍼셉션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최초 상태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새로운 교회적 상태’라는 정도로 두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또한 AC.336의 마지막 표현인 ‘이것이 그 교회의 이름입니다’는 창세기 초기의 이름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에노스는 단순히 셋의 아들이라는 개인적 이름에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실제로 하나의 교회의 이름이라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창4의 계보에서 인물들의 이름은 교리적, 교회적 상태의 계승을 표상하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창4:25-26은 창4 전체의 긴 흐름을 매우 압축해서 마무리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분리된 신앙은 아벨로 의미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고, 그 분리는 여러 파생 상태를 거쳐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셋과 에노스는 바로 그 새로운 시작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노스’가 단순히 체어리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체어리티가 심어진 하나의 교회적 상태 전체의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될 수 있는 상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교회가 다시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참된 교회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가 주님 안에서 살아 있는 결합을 이룰 때 교회가 됩니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가인, 셋, 에노스의 역사적 표상과 개인의 거듭남을 곧바로 일대일 대응시키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그 속뜻에서 드러나는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가는지, 아니면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살아 있게 하시는 방향으로 가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특히 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많은 진리를 아는 것이 교회의 생명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시는 수단이 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될 때 ‘에노스’, 곧 ‘또 하나의 사람’이 나타난다는 AC.336의 짧은 말은 참된 교회와 참된 인간의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깊게 보여 줍니다.

 

심화

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 심화 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 심화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표현은 ‘another man [homo]’, 곧 ‘또 하나의 사람’일 것입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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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창4,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가인의 왜곡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된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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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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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새로운 교회가 이전 교회적 상태가 조금 쇠퇴했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져 극도의 모독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왜 새로운 교회는 이렇게 이전 상태의 가장 어두운 종말과 맞닿아 나타날까요?

 

먼저 이것을 주님께서 이전 교회를 일부러 타락시키신 뒤 새로운 교회를 세우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타락과 왜곡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거절하고 자신의 proprium을 따르는 데서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끊임없이 공급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까지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한 교회적 상태 안에 아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그것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보존하시고 이끄신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계속해서 선과 진리를 거부하고 왜곡하며,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 폭력까지 가하는 상태에 이르면 그 교회적 상태는 더 이상 본래의 교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이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난다’는 것은 실패한 상태를 강제로 수리하여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과는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마련하십니다. 인간의 한 상태가 끝나는 것과 주님의 구원의 섭리가 끝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 점에서 AC.330의 가인의 표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을 때, 그것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수 있도록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보존은 가인에서 이어지는 모든 상태가 반드시 올바르게 회복될 것이라는 보장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라멕에 이르러 그 계열은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고, AC.33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종말의 때에 아다와 씰라로 의미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특정한 한 교리적 계열의 성공에 매여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한 상태가 자유의 오용으로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구원의 길 자체까지 인간이 소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가 문자적으로 라멕의 아내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렇다면 새 교회가 라멕의 악에서 생겨난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초기의 가족과 계보는 속뜻에서 교회와 교리의 상태 관계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악이 변하여 새 교회가 되었다고 읽기보다, 라멕으로 표상되는 종말의 상태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이 말씀의 계보 안에서 함께 묘사된다고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새로운 교회가 홍수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와 같다는 뜻도 아닙니다.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교회는 아직 홍수 이전의 문맥 안에 있습니다. 노아의 교회는 이후 태고교회의 종말과 더 큰 거듭남 질서의 전환 속에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역사적 교회 시대를 가리킨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말씀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굳이 가장 어두운 종말과 함께 묘사할까요? 그것은 인간의 실패와 주님의 섭리를 동시에 보여 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선과 진리를 소멸시키고 모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도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가장 어두워져야 주님이 역사하신다’는 법칙을 만들자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역사하십니다. 오히려 인간이 그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한 상태가 끝에 이르렀을 때, 주님의 섭리가 그 종말 너머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우리가 뒤늦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34의 ‘가장 어두운 때’는 절망의 증거라기보다 인간의 종말이 주님의 종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이 모두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른 상태에서도 주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다시 선과 진리가 결합되고, 체어리티와 신앙이 살아 있는 교회적 상태가 일어날 수 있도록 계속 섭리하십니다.

 

이것이 AC.334가 교회의 종말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희망을 품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전 교회의 내적 생명은 끝날 수 있지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가장 깊은 어둠보다 주님의 구원의 뜻이 더 멀리 갑니다.

 

 

 

AC.334 심화 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 심화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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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르렀을 때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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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3-24)

 

AC.334

이 교회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을 때 일어났으며, 이는 극도의 모독이었습니다. (23-24절) That this church arose when everything of faith and charity was extinguished, and had violence done to it, which was in the highest degree sacrilegious, is described. (verses 23–24)

 

해설

AC.334는 바로 앞 AC.333의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말에서 ‘그때’가 어떤 때였는지를 밝혀 줍니다. AC.333에서는 아다와 씰라로 의미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그 교회의 천적인 것들은 야발, 영적인 것들은 유발, 자연적인 것들은 두발가인으로 의미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34는 이 새로운 교회가 이전 상태가 어느 정도 쇠퇴했을 때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져 극도의 모독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32와 직접 이어집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상태에는 처음에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기는 했어도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AC.330에서는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리된 상태가 계속 파생되고 변질되면서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릅니다. AC.334는 그 종말을 더욱 강한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에 폭력까지 가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폭력이 가해졌다’는 말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가 부족해졌다는 뜻보다 훨씬 강합니다.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이미 알려진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훼손하고 왜곡하는 것은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AC.334가 말하는 폭력은 바로 후자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생명에 속한 것을 단순히 잃어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거슬러 파괴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극도의 모독’이라고 부릅니다. 모독은 거룩한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와는 다릅니다. 거룩한 것에 속한 것을 알고 받아들였으면서도 그것을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거나 거룩하지 않은 목적에 사용하는 것이 훨씬 심각한 영적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AC.334는 아직 모독의 전체 교리를 상세히 설명하는 번호는 아니지만, 라멕으로 표상되는 종말이 단순한 무지나 결핍보다 훨씬 깊은 상태였다는 점은 분명히 보여 줍니다.

 

창4:23의 라멕의 말도 이 종말을 표상적으로 묘사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C.334의 개요 단계에서는 각 표현의 세부 상응을 미리 모두 풀기보다, 이 말씀이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 폭력을 가하는 극도의 상태를 묘사한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각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이후 해당 절의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하게 설명됩니다.

 

이어지는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역시 가인에서 라멕으로 갈수록 상태가 얼마나 더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문맥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AC.334 자체는 ‘칠십칠 배’의 세부 상응을 설명하는 번호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라멕의 상태가 가인의 처음 상태보다 훨씬 더 깊은 종말에 이르렀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흐름을 보면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과정은 점진적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는 예배에 나타났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으며,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에서 여러 파생된 이단적 상태들이 생겨났고,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3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 폭력을 가하는 극도의 모독까지 묘사됩니다.

 

그런데 AC.334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종말 자체가 아니라 문장의 주어입니다. ‘이 교회는 … 일어났다.’ 곧 바로 이러한 종말의 때에 AC.333에서 말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른 상태가 인간 편에서는 완전한 끝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섭리에서는 그것이 교회의 모든 가능성의 끝은 아닙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가 라멕의 타락이 개선되어 생긴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악이 충분히 발전하면 선으로 바뀐다’는 구조가 아닙니다. 라멕으로 표상되는 한 교리적, 교회적 상태가 종말에 이른 때,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전 상태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구별하면서도 둘이 같은 시점에 말씀 안에서 나란히 묘사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후 AC 전체에서 반복해서 만나게 될 교회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라는 질서를 미리 보여 줍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선과 진리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서 주님의 뜻과 섭리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면서도 교회의 생명이 인류 가운데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섭리하십니다.

 

다만 이것을 ‘이전 교회가 타락하면 주님께서 곧바로 다른 조직이나 교단을 세우신다’는 식으로 외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핵심은 조직의 이름보다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실제로 결합되어 있는 교회적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교회가 일어난다’는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서 다시 선과 진리가 결합될 수 있는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마련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AC.334는 그래서 매우 어두우면서 동시에 희망적인 글입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소멸시키고, 심지어 거룩한 것에 폭력을 가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종말이 주님의 섭리의 종말은 아닙니다. 바로 그 가장 어두운 때에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적 생명을 일으키실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AC.333과 AC.334를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질서가 보입니다.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밝은 선언 뒤에는 이전 상태의 극심한 종말이 있었고, 그 종말 뒤에는 다시 주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에 끝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주님의 구원의 역사는 끝나지 않습니다.

 

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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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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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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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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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다음 AC.333에서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한 교회적 상태에서 신앙마저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나타난다는 것이 모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한 교리적 계열이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과 ‘주님의 교회 전체가 끝났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332가 말하는 라멕의 상태는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그 교리적 계열의 마지막을 나타냅니다. 그 안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더 이상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주님께서 더 이상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일으키실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33은 바로 이 점을 보여 줍니다. 라멕으로 표상되는 한 상태가 종말에 이른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그 새로운 교회를 표상하고,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은 그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멕이 좋아져서 다시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가 끝난 자리에서 다른 교회적 상태가 새롭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한 교리적 계열의 성공 여부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어떤 상태가 자유의 오용과 왜곡 때문에 종말에 이를 수는 있지만, 주님의 구원의 질서가 그 상태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의 길을 막더라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다른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이 점에서 AC.330의 ‘가인의 표’와도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보존이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교리적 상태가 반드시 끝까지 살아 있는 신앙을 유지한다는 보장은 아니었습니다. 라멕에서 그 한 계열은 결국 신앙마저 잃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AC.333은 오히려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즉 주님의 섭리는 특정한 하나의 계열에만 매여 있지 않습니다. 한 상태가 종말에 이르더라도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 자체가 소멸되지 않도록 계속 역사하십니다.

 

여기서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는 아직 홍수 이전의 문맥 안에 있습니다. 반면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는 태고교회의 종말 이후 인간의 거듭남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더 큰 전환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어떤 곳에서 ‘새로운 교회’라고 말할 때마다 반드시 인류 역사의 새로운 대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앞의 상태와 구별되는 새로운 교회적 형성이 일어났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AC.333의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이 점은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시간표로 읽지 않는 데도 중요합니다. 라멕,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단순히 ‘나쁜 아버지와 좋은 자녀들’처럼 읽으면 속뜻의 구조를 놓치게 됩니다. 중심은 개별 인물의 도덕적 성격이 아니라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끝나고 새롭게 형성되는가에 있습니다.

 

AC.333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새로운 교회의 성격이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통하여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이 각각 교회의 천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종말 가운데서 새로 일어난 교회에도 다시 교회에 속한 여러 차원의 것들이 존재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태고교회 최초의 순수한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천적인 것’, ‘영적인 것’, ‘자연적인 것’이라는 말을 사용하더라도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는 이어지는 AC에서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AC.333은 우선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그 교회 안에 이러한 것들이 있었다는 큰 틀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라멕과 아다와 씰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말과 새 시작’입니다. 라멕은 한 교리적 계열의 끝을 나타내고, 아다와 씰라는 그 끝의 자리에서 새롭게 일어난 교회를 나타냅니다. 인간의 한 상태는 끝날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끝을 새로운 시작의 자리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 교회를 바라볼 때에도 중요합니다. 어떤 교회적 형식이나 제도가 쇠퇴한다고 해서 곧 주님의 교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외적인 조직이 계속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내적인 교회적 생명이 살아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실제로 결합되는 곳에서 새롭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33은 라멕의 종말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한 계열이 신앙에 속한 것까지 잃었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인간이 종말을 만들 수는 있어도 주님의 섭리 자체를 종말시키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AC.332에서 AC.333으로 넘어갈 때 가장 깊이 붙들어야 할 아르카나입니다.

 

 

 

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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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창4:19-22)

 

AC.333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는데,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가 이를 의미하며, 그들의 아들들인 ‘야발’(Jabal), ‘유발’(Jubal), ‘두발가인’(Tubal-Cain)으로 그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야발’은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유발’은 영적인 것들을, ‘두발가인’은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19-22절) A new church then arose, which is meant by “Adah and Zillah,” and is described by their sons “Jabal,” “Jubal,” and “Tubal Cain”; the celestial things of the church by “Jabal,” the spiritual by “Jubal,” and the natural by “Tubal-Cain.” (verses 19–22)

 

해설

AC.333은 가인 계열의 이야기를 읽다가 상당히 뜻밖의 전환을 만나는 글입니다. 바로 앞 AC.332에서는 가인으로부터 생겨난 여러 이단들이 계속 변질되어 오다가 마지막 ‘라멕’에 이르렀고,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인으로 표상된 그 교리적 계열은 완전히 종말에 이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AC.333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회를 ‘아다와 씰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먼저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의 계열이 원래의 태고교회 상태로 되돌아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라멕에 이른 그 교리적 상태는 이미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은 종말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한 교리적 계열이 종말에 이른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와 섭리까지 함께 종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종말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러한 새로운 교회를 표상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330-332와 함께 읽을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AC.330에서는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므로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AC.332에서는 가인으로부터 이어진 한 교리적 계열이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게 됩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AC.333은 오히려 바로 그 종말 가운데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새로운 교회가 ‘아다와 씰라’라는 두 여자로 표상된다는 점입니다. 말씀에서 여자는 교회를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AC.333의 단계에서는 아다와 씰라 각각의 세부적인 의미를 너무 앞서 정리하기보다, 우선 두 사람이 함께 ‘새로운 교회’를 의미한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교회의 보다 구체적인 상태와 당시의 상황은 이어지는 번호에서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또한 이 새로운 교회의 성격은 그들의 아들들인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통하여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야발은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유발은 ‘영적인 것들’을, 두발가인은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 새로운 교회 안에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 차원에 해당하는 것들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들’은 주님 사랑과 선에 관계된 것들, ‘영적인 것들’은 신앙과 진리에 관계된 것들, ‘자연적인 것들’은 그것들이 외적 삶과 형식 안에서 나타나는 차원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333 한 번호만으로 이 셋의 구체적인 성격이나 상호 관계를 모두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후 AC에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각각 무엇을 더 구체적으로 표상하는지가 자세히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33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라멕의 종말 뒤에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그 교회 안에 다시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나타났다’는 큰 구조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한 교리적 계열의 실패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 편에서는 한 상태가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새로운 시작을 마련하십니다.

 

여기서 ‘새로운 교회’라는 말을 곧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교회는 아직 창4의 홍수 이전 문맥 안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교회입니다.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는 태고교회의 종말 이후 인간의 거듭남 질서 자체가 달라지는 더 큰 전환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이라도 그 범위와 의미를 문맥에 따라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AC.333을 ‘라멕이라는 악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들들은 갑자기 좋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식으로 읽으면 속뜻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추적하는 것은 개별 인물의 도덕성보다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입니다. 라멕은 한 교리적 계열의 종말을 표상하고, 아다와 씰라는 그 종말 가운데 새롭게 일어난 교회를, 그들의 아들들은 그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을 표상합니다.

 

이 점에서 창4의 계보는 다시 한번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낳았다’는 말은 속뜻에서 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가 파생되고 전개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가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낳았다는 것은 그 새로운 교회 안에서 여러 교회적 요소들이 형성되고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333은 절망의 끝에서 시작되는 글입니다.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지만,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고, 그 안에서 다시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인간의 한 계열은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종말을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자리로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어떤 교회적 형식이나 한 시대의 신앙 구조가 쇠퇴한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와 구원의 역사가 끝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형식의 종말 가운데서도 보존할 것을 보존하시고 새롭게 일으킬 것을 일으키십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형식을 붙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어떤 선과 진리, 어떤 체어리티와 신앙의 질서를 새롭게 일으키고 계시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AC.333의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라멕의 종말’과 ‘아다와 씰라의 새로운 교회’가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의 종말이 곧 주님의 종말은 아닙니다. 인간 편에서 더 이어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AC.333 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AC.333 심화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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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르렀을 때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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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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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개요

 

AC.324

여기서는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 곧 이단들(heresies)을 다루며, 그 후에 ‘에노스’(Enosh)라 하는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진 것에 관하여 다룹니다. Doctrines separated from the church, or heresies, are here treated of; and a new church that was afterwards raised up, called “Enosh.”

 

해설

AC.324는 한 문장으로 된 짧은 글이지만 창4 전체의 속뜻을 여는 중요한 개요입니다. 겉으로 보면 창4는 가인과 아벨의 출생과 제물, 아벨의 죽음, 가인의 추방과 후손들, 라멕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마지막의 셋과 에노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을 단순히 최초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연대기로만 읽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점차 구별되고 마침내 분리되면서 여러 교리적, 교회적 상태가 생겨나는 과정과, 그 쇠퇴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을 다룹니다.

 

먼저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사랑과 신앙은 서로 독립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생명 안에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하였으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하면서 본래 함께 있던 것들이 점차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창4에서 가인은 이러한 과정 가운데 나타나는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하게 됩니다.

 

여기서 ‘heresies’를 ‘이단들’이라고 번역할 때에는 오늘날 한국 교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이단’이라는 말과 완전히 같은 의미로만 이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324의 관심은 어느 현대 교단이나 집단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래 교회의 하나 된 생명에서 어떤 교리가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것이 되는 현상입니다. 이후 설명에서 보게 되듯 가인의 문제도 신앙 자체가 악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마침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분리’와 ‘구별’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구별될 수 있으며 실제로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집니다. 그러나 구별된다고 해서 서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을 때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창4는 이 둘의 구별이 어떻게 분리로 변하고, 그 분리가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지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여 줍니다.

 

그리고 AC.324의 후반부는 이 장 전체를 읽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교회에서 여러 교리들이 분리되어 나오고 이전의 상태가 쇠퇴해 가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에노스’라 하는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집니다. 창4의 속뜻에는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분리와 쇠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교회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함께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창4:26의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은 바로 이 에노스와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와 똑같은 형태로 되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달라진 인간의 상태 가운데 새로운 교회적 형태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노스의 등장은 단순히 족보에 한 사람이 더 추가되었다는 의미를 넘어, 한 교회적 상태가 쇠퇴하는 가운데 또 다른 교회적 상태가 시작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점에서 AC.324는 창3의 마지막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창3 마지막에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나가게 되었지만 생명나무의 길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그 길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창4에서는 타락 이후의 인간과 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며, 그 가운데서도 주님과 인간의 연결이 어떻게 보존되어 가는지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창4를 읽을 때 가인 계열을 단순히 ‘나쁜 사람들의 족보’, 셋과 에노스를 ‘좋은 사람들의 족보’로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이름들은 말씀의 속뜻에서 교리와 교회의 여러 상태를 표상합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어떤 교리적 상태가 어떻게 발전하고 변질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의 끝에서 왜 새로운 교회인 에노스가 등장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324는 결국 창4 전체에 두 개의 큰 흐름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인간이 사랑과 신앙을 분리하고, 부분적인 것을 전체보다 앞세우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흐름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한 인간의 쇠퇴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새로운 교회를 일으켜 세우시는 흐름입니다. 앞으로 AC.325-337은 창4의 각 절을 먼저 개괄하면서 바로 이 두 흐름을 차례로 펼쳐 보이게 됩니다.

 

심화

1. 창4와 창5는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셋 계열

 

AC.324 심화 1, 창4와 창5는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셋 계열

AC.324 심화 1. 창4와 창5는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셋 계열좀 성급한 질문일 수 있지만, 그리고 이미 몇 차례 거듭 고민했던 질문이지만... 창4, 창5를 시간순으로 읽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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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창4:1-2, 가인과 아벨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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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3, 창4 앞, 사후의 삶을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사례를 이 장 끝에서 살펴봅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3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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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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