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창1:28)

 

AC.55

태고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 곧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결혼이라 했기 때문에, 그 결혼에서 생겨나는 선의 모든 것은 ‘생육’(fruitfulness)이라 했고, 진리의 모든 것은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표현들이 사용되는데요, 예를 들어 에스겔입니다. As the most ancient people called the conjunction of the understanding and the will, or of faith and love, a marriage, everything of good produced from that marriage they called “fruitfulness,” and everything of truth, “multiplications.” Hence they are so called in the prophets, as for instance in Ezekiel: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겔36:11, 12)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multiply and be fruitful,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and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yea,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even my people Israel (Ezek. 36:11–12).

 

여기서 ‘사람’(man)은 이스라엘이라 하는 영적 인간을 뜻하고, ‘전 지위’(ancient times)는 태고교회를, ‘처음’(beginnings)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이 본문에서 진리에 속한 ‘수가 많음’(multiplication)이 먼저 언급되고, 선에 속한 ‘번성’(fruitfulness, 앞에서는 multiplications을 ‘번성’으로 번역, 서로 다른 영어를 같은 한글 단어로 번역한 바람에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이 그다음에 언급되는 이유는,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 이제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By “man” is here meant the spiritual man who is called Israel; by “ancient times,”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The reason why “multiplication,” which is of truth, is first mentioned, and “fruitfulness,” which is of good, afterwards, is that the passage treats of one who is to become regenerated, and not of one who is already regenerated.

 

[2]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거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결혼한 땅’(a married land)이라 하십니다. 이사야입니다. When the understanding is united with the will, or faith with love, the man is called by the Lord “a married land,” as in Isaiah: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사62:4) Thy land shall be no more termed waste, but thou shalt be called Hephzibah [my delight is in her], and thy land Beulah [married], for Jehovah delighteth in thee, and thy land shall be married (Isa. 62:4).

 

이 결합에서 나오는 진리의 열매들을 ‘아들’(sons)이라 하고, 선의 열매들을 ‘딸’(daughters)이라 하는데, 이는 말씀 전반에서 매우 자주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The fruits thence issuing, which are of truth, are called “sons,” and those which are of good are called “daughters,” and this very frequently in the Word.

 

[3] 땅이 ‘가득 차게 된다’(replenished)는 것은 진리와 선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하실 때, 곧 그에게 역사하실 때, 선과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The earth is “replenished,” or filled, when there are many truths and goods; for when the Lord blesses and speaks to man, that is, works upon him, there is an immense increase of good and truth, as the Lord says in Matthew: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13:31, 32)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which indeed is the least of all seeds, but when it is grown, it is the greatest among herbs, and becometh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heavens come and build their nests in the branches thereof (Matt. 13:31–32).

 

‘겨자씨 한 알’(grain of mustard seed)은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 전의 선을 뜻하는데, 그것이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다’(the least of all seeds)고들 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가 하는 선을 자기한테서 난 거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한테서 나는 건 실상 악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거듭남의 상태 중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선이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가장 작은 선, 보잘것없어 보이는 선일지라도 말입니다. A “grain of mustard seed” is man’s good before he becomes spiritual, which is “the least of all seeds,” because he thinks that he does good of himself, and what is of himself is nothing but evil. But as he is in a state of regeneration, there is something of good in him, but it is the least of all.

 

[4] 마침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것은 크게 자라 ‘풀’(herb)이 되고,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tree)가 됩니다. 그리고 이 나무의 가지에 ‘공중의 새들’(birds of the heavens), 곧 진리들, 지적인 것들이 깃드는데(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이 가지들은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입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일 때, 그리고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에는 전투 상태에 있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는 말씀이 덧붙여집니다. At length as faith is joined with love it grows larger, and becomes an “herb”; and lastly, when the conjunction is completed, it becomes a “tree,” and then the “birds of the heavens” (in this passage also denoting truths, or things intellectual) “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which are memory-knowledges. When man is spiritual, as well as during the time of his becoming spiritual, he is in a state of combat, and therefore it is said, “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해설

AC.55는 앞의 AC.54에서 설명한 ‘결혼’에서 무엇이 나오는지를 다룹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은 영적 인간 안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했고,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AC.55에서는 그 결혼을 이해와 의지의 결합, 또는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라고 다시 말하면서, 그 결합에서 산출되는 선과 진리를 창1:28의 ‘생육하고 번성하라’와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의 사람들이 이 결혼에서 생겨나는 선에 속한 모든 것을 ‘생육’(fruitfulness)이라 하고,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번성’ 또는 ‘증가’(multiplications)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육 = 질, 번성 = 양’과 같은 일반적인 구별이 아닙니다. AC.55가 직접 제시하는 대응은 선과 진리입니다. 결혼에서 선이 산출되는 것을 생육이라 하고, 진리가 산출되는 것을 번성이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3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에서도 ‘생육하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적용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5는 갑자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미 제시된 생육과 번성의 의미를 이제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혼’과 연결하여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결혼에서 선과 진리가 나온다’는 표현도 자연적인 출산을 그대로 영적인 과정에 옮겨 놓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결혼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결합에서 산출되는 것들도 결혼에서 생겨나는 열매의 언어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결합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산출하는 살아 있는 결합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보여 주기 위해 먼저 겔36:11-12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사람’은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영적 인간을 뜻하고, ‘전 지위’는 태고교회를, ‘처음’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리고 특히 ‘증가’(multiplication)가 먼저 나오고 ‘생육’(fruitfulness)이 뒤에 나오는 순서에 주목합니다.

 

왜 진리에 속한 증가가 먼저이고 선에 속한 생육이 뒤에 나올까요? AC.55의 답은 분명합니다. 이 구절이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AC.52-53에서도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사랑에 속한 것이 뒤따른다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도 그 질서와 연결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거듭남의 모든 초기 단계에서는 반드시 지식의 양이 먼저 늘어나고 나중에 선이 들어온다’는 세밀한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55가 직접 밝히는 것은 겔36의 이 문맥에서 진리에 속한 증가가 먼저 언급되는 이유입니다. 말씀의 순서에 의미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한 문장을 모든 사람의 거듭남에 대한 획일적인 시간표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사62:4에서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거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사람을 주님께서 ‘결혼한 땅’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곧 ‘결혼한 땅’이라고 부르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땅은 언제나 인간을 뜻한다’고 고정적으로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5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상태가 말씀에서 ‘결혼한 땅’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앞의 AC.54에서 시작된 ‘결혼’이라는 주제를 이어 줍니다.

 

그 결합에서 나오는 열매들 가운데 진리에 속한 것은 ‘아들’, 선에 속한 것은 ‘딸’이라고 한다는 설명도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말씀 전반에서 매우 자주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우선 AC.55가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아들 = 진리에 속한 열매’, ‘딸 = 선에 속한 열매’입니다. 이를 곧바로 현실의 남성과 여성의 성질에 대한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대목은 바로 앞 AC.54에서 교회가 선에 대한 애정 때문에 ‘딸’, ‘처녀’, ‘아내’라고 불린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말씀에서 가족과 결혼의 언어는 단순히 자연적인 혈연관계를 넘어 인간 안의 선과 진리 및 그 결합과 산출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다만 각각의 표현이 등장할 때에는 그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뜻한다고 설명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다음 창1:28의 ‘땅에 충만하라’가 설명됩니다. 땅이 ‘가득 차는 것’은 진리와 선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곧 그에게 역사하시는 것이며, 그때 선과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생육과 번성의 주체를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증가의 근원은 주님의 복과 역사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9 이후 계속 이어진 원리와도 일치합니다. 사람에게 참으로 살아 있는 선과 진리가 있다면 그것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AC.43에서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가진 것은 생육하고 번성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55에서는 같은 원리가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실 때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풍성해집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13:31-32의 겨자씨 비유를 인용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것은 AC.55가 겨자씨를 무엇이라고 해석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겨자씨 한 알’을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 전의 선’이라고 직접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바로 ‘처음 주어진 작은 진리’라고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 선이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일까요? 사람은 그때 자신이 선을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이 거듭남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어떤 선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가장 작은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대목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밖에 없다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선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선의 근원과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는 상태를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거듭남 가운데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그 안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앞의 AC.39에서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생각하도록 허용된다는 설명과 함께 읽으면 이해하기가 조금 쉬워집니다.

 

그 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함에 따라 그것이 자라 ‘풀’이 되고, 마지막으로 그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가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AC.55가 직접 제시한 진행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작은 선으로 표현된 겨자씨가 있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서 자라 풀이 되며, 그 결합이 완성될 때 나무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씨 = 진리’, ‘풀 =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진리’, ‘나무 = 완전히 안정된 영적 구조’라는 별도의 단계표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번 문맥에서 겨자씨는 스베덴보리가 명시적으로 ‘선’이라고 했습니다. ‘풀’에 대해서도 AC.55는 식물 자체의 성질을 하나하나 영적인 특징과 대응시키지 않습니다. 풀이 부드럽고 잘 흔들린다는 자연적 특징에서 겸손이나 유연성을 끌어내는 것은 흥미로운 묵상이 될 수는 있지만 AC.55의 해설로 제시할 근거는 없습니다.

 

나무가 되었을 때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새들이 진리들 또는 지적인 것들을 뜻하고, 가지들은 기억 지식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작은 선에서 시작된 것이 신앙과 사랑의 결합 가운데 성장하면서, 마침내 진리와 지적인 것들이 기억 지식이라는 가지에 깃들 수 있는 상태가 묘사됩니다.

 

이것을 보면 AC.55에서 지식과 기억 지식은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닙니다. 앞의 AC.40에서도 기억 지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살아 있게 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여기에서도 기억 지식은 나무의 ‘가지’가 되어 진리와 지적인 것들이 깃드는 자리가 됩니다. 문제는 지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생명과 결합하여 어떤 질서 안에 놓이는가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새로운 주제를 엽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일 때, 그리고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에는 전투 상태에 있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이 덧붙여진다.’ 여기서 창1:28의 ‘정복하라’와 ‘다스리라’가 거듭남의 전투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정복하고 다스린다’는 말을 자연계나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욕의 정당화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55의 속뜻에서는 영적 인간의 전투 상태와 관계됩니다. 다만 이 한 문장만으로 전투의 대상과 방식, 시험의 전체 구조를 세세하게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것은 영적 인간에게 전투가 있으며, 그 때문에 ‘정복하라’와 ‘다스리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이 전투를 단순히 ‘아직 천적 인간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싸움’이라고 정리하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AC.55의 직접 표현은 ‘영적 인간일 때’와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 전투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의 관계는 이후 AC가 더 설명하도록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AC.55 전체를 다시 보면 하나의 흐름이 보입니다. 먼저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라는 ‘결혼’이 있습니다. 그 결혼에서 선과 진리가 산출되어 ‘생육’과 ‘번성’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역사하실 때 그 선과 진리는 크게 증가하여 ‘땅에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 인간은 그 과정에서 전투를 겪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창1:28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속뜻에서 단순히 무엇인가가 많아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 안에서 선과 진리를 산출하고 풍성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풍성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성취가 아니라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말씀하실 때, 곧 사람 안에 역사하실 때 이루어지는 증가입니다.

 

 

 

AC.56, 창1:29,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AC.56-57)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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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 창1:27,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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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창1:22, 23)

 

AC.43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지니게 된 모든 것은 크게 열매 맺고 번성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육신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러합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be fruitful)라는 표현은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되고, ‘번성하다’(multiply)라는 표현은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됩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fruit) 안에는 ‘씨’(seed)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인해 그것은 크게 번성합니다.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blessing)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 이 모든 것이 축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Everything that has in itself life from the Lord fructifies and multiplies itself immensely; 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 To “be fruitful,” in the Word, is predicated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and to “multiply,” of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the “fruit” which is of love contains “seed,” by which it so greatly multiplies itself. The Lord’s “blessing” also in the Word signifies fruitfulness and multiplication, because they proceed from it.

 

해설

AC.43은 창조의 다섯째 날에 처음 나타난 살아 있는 것들이 왜 곧바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받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39-41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3은 그렇게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열매 맺고 번성한다’는 것입니다.

 

첫 문장이 이 글 전체의 중심입니다.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엄청나게 열매 맺고 번성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의 수가 많아진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열매 맺고 번성하는 것을 창1:22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매우 흥미로운 말을 하나 덧붙입니다. 이러한 열매 맺음과 번성은 사람이 육신 안에서 사는 동안에는 그다지 크게 나타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놀라울 정도’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또 왜 사후에는 그렇게 되는지를 AC.43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어지기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식으로 구체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다른 삶에서 훨씬 더 놀라운 열매 맺음과 번성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오히려 우리에게 중요한 주의를 줍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영적 성과의 크기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의 모든 가능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 역시 ‘지금 아무 변화가 없어 보여도 사후에는 자동으로 엄청나게 성장한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3의 주어는 분명히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입니다. 강조점은 인간 자신의 잠재력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다음 스베덴보리는 ‘열매 맺다’와 ‘번성하다’를 구별합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한다고 합니다. 창1:22의 두 동사가 단순히 같은 뜻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랑과 신앙이라는 서로 구별되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말씀에서 ‘열매’와 ‘번성’ 같은 표현을 만날 때에도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랑에 속한 ‘열매’ 안에 ‘씨’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씨로 말미암아 열매가 크게 번성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너무 멀리 나가 ‘씨는 언제나 정확히 무엇을 뜻한다’는 별도의 체계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43이 강조하는 것은 사랑에 속한 열매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다시 번성할 수 있는 씨를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의 열매 속에 씨가 들어 있어 다시 새로운 생명을 낳듯, 이 표현을 통해 사랑에 속한 것과 신앙에 속한 것의 열매 맺음과 번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AC.43은 ‘주님의 축복’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축복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22의 순서를 그대로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하고, 이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합니다. 곧 생육과 번성의 근원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복’이라고 하면 건강, 형통, 보호, 물질적 풍요 등을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 AC.43은 여기서 그러한 모든 의미를 포괄적으로 정의하려는 글은 아닙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복은 언제나 외적인 복과 관계없고 오직 내적 성장만을 뜻한다’고 일반화해서도 안 됩니다. 이 글이 분명히 밝히는 것은 창1:22의 문맥에서 주님의 축복이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이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 안에서 열매 맺고 번성하게 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축복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3은 앞의 몇 글을 아름답게 마무리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살아난다고 했고, AC.40에서는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이 살아 있는 물고기와 새로 나타났으며,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실제로 생명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AC.42에서는 그 기억 지식의 개별적인 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들까지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43에서는 그렇게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들이 ‘열매 맺고 번성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중심은 ‘나는 얼마나 많은 영적 열매를 만들어 냈는가?’라는 자기 평가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열매 맺음과 번성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의 성질이며, 그것이 가능한 것 자체가 주님의 축복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고 증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에 속한 열매를 맺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번성하게 합니다. 창조의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것들을 만드시고 곧바로 복을 주신 장면은 바로 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AC.44, 창1:24-25,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A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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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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