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6 심화
1.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56에는 비슷한 문장이 세 번 반복됩니다. 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천적 음식’이라고 하고,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영적 음식’이라고 합니다. 자연적 인간도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에 속하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삶과 일치한다’는 말이 조금 막연합니다.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 모두 내 삶과 일치한다는 뜻일까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면 자연적 인간이고, 말씀 읽기를 좋아하면 영적 인간이며,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면 천적 인간이라는 뜻일까요? 그렇게 단순하게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먼저 AC.56이 직접 말하는 것부터 붙들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의 인간이 자기 삶과 일치하는 것들로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치 때문에 그것들을 ‘음식’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쁨은 음식이라는 표현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삶’이라는 말도 단순히 하루 동안 무엇을 많이 하느냐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 때문에 하루 종일 숫자를 보고, 어떤 사람은 집안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설교를 준비합니다. 그런 외적인 활동 자체만으로 그 사람의 천적·영적·자연적 삶을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AC.56이 말하는 삶은 그 사람에게 속하며 그와 일치하는 생명의 성질과 관계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데 깊은 기쁨을 느낀다고 해봅시다. 이것은 영적인 기쁨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공부가 재미있다’는 감정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영적 인간이라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을 좋아하는 것 자체는 자연적 차원의 기억 지식에 대한 즐거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도우면서 기뻐한다고 해서 그 기쁨을 곧바로 천적 기쁨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칭찬받는 것이 좋아서 도울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느끼고 싶어서 도울 수도 있으며, 실제로 이웃의 선을 사랑하여 도울 수도 있습니다. 외적으로 같은 행동이라도 그것이 어떤 삶에서 나오는지는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할 때 기분이 좋은가?’만 묻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AC.56의 표현에서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그의 삶과 일치하는가?’입니다. 기쁨은 그 일치에서 나옵니다. 어떤 것이 그 사람의 생명과 어울리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음식이라는 비유와도 잘 맞습니다. 자연적인 음식도 몸이 받아들여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데 사용합니다. AC.56에서 영적인 것들을 ‘음식’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것들이 단순히 사람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과 일치하여 그에게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불편하게 느끼는 진리는 내 삶과 일치하지 않으니 나에게 음식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기 악을 드러내는 진리 앞에서 불편함과 저항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진리는 때때로 우리가 현재 사랑하고 있는 것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간적인 편안함이나 불편함을 AC.56의 ‘일치’와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특히 중요합니다. 현재 심화에서는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정직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으면 편안하고, 속이는 데 익숙한 사람은 불편해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해를 돕는 예로는 가능하지만 항상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정직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도 자기의 실제 부정직을 지적받으면 아플 수 있고, 부정직한 사람도 정직에 관한 아름다운 설교를 듣고 감동할 수 있습니다. 순간적인 감정과 삶의 실제 성질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AC.56의 ‘기뻐한다’를 심리 테스트처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말씀 읽기가 좋으니 영적 인간이다’, ‘나는 봉사가 즐거우니 천적 인간이다’, ‘나는 공부가 좋으니 자연적 인간이다’와 같은 판정은 이 글이 의도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우리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의미가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장기간에 걸쳐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삶의 양식으로 삼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반복해서 찾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받아들일 때 내 삶이 살아난다고 느끼는가, 무엇을 위해 시간과 마음을 사용하는가 하는 질문은 자기 삶의 방향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의 목적은 자기에게 ‘나는 영적 인간이다’, ‘나는 아직 자연적 인간이다’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으로 내 생명을 채우고 있는지를 주님 앞에서 살피는 데 있습니다.
자연적인 기쁨도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기뻐하고,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공부와 일에서 성취를 느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을 모두 버려야 영적 인간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56은 자연적인 것들을 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연적 인간의 음식이 자연적인 것들이며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뿐입니다.
따라서 천적·영적·자연적 기쁨을 서로 경쟁하는 세 종류의 감정처럼 볼 필요도 없습니다. 한 사람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여러 차원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AC.56이 각각의 인간에게 ‘그의 삶과 일치하는’ 음식이 있다고 구별한다는 점입니다.
앞의 AC.51-53에서 보았듯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도 단순히 초급자와 고급자의 차이로만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거듭나면 자연적인 기쁨 → 영적인 기쁨 → 천적인 기쁨 순으로 바뀐다’고 AC.56을 단계표로 만드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글에서 그런 시간 순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56의 문장을 그대로 기억하는 편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로 기뻐한다.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한다.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음식과 기쁨과 삶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 스베덴보리가 천국과 사후세계에서 사람의 사랑과 기쁨을 설명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참으로 사랑하는가와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가는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더 넓은 교리를 AC.56 한 문장 안에 모두 집어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AC.56에서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말은 단순히 ‘내 기분에 맞아서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그 사람에게 속한 삶의 성질과 어울리기 때문에 그것이 그의 기쁨이 되고, 그래서 그의 ‘음식’이라고 불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며 가장 좋은 질문은 ‘나는 천적 인간인가, 영적 인간인가, 자연적 인간인가?’가 아니라 어쩌면 이것일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내 삶의 음식으로 삼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 역시 자기 판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가 실제로 내 삶의 양식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한 질문이어야 할 것입니다.
AC.56, 창1:29, 영적 인간의 음식 : 무엇으로 기뻐하고 무엇을 양식으로 삼는가 (AC.56-57)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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