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주님에의해,육체안에서살아있는동안에도영들과천사들과말할수있도록창조되었습니다.실제로태고시대에는그렇게하였습니다.사람은육체를입은영이므로그들과하나이기때문입니다.그러나시간이흐르면서사람들이육체적이고세상적인것들속에자신을너무깊이잠기게하여그밖의것에는거의아무관심도두지않게되었기때문에,그길은닫혔습니다.그러나사람이잠겨있는육체적인것들이물러나자마자그길은다시열리고,사람은영들가운데있으면서그들과공동의삶을살게됩니다. Man was so created by the Lord as to be able while living in the body to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as in fact was done in the most ancient times;for,being a spirit clothed with a body,he is one with them.But because in process of time men so immersed themselves in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s to care almost nothing for aught besides,the way was closed.Yet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the way is again opened,and he is among spirits,and in a common life with them.
해설
AC.68에서 스베덴보리는 육체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는 반론이 있을 것을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AC.69는 바로 그 문제에 대한 첫 번째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으며, 태고 시대에는 실제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로 그는 사람이 ‘육체를입은영’이며, 따라서 영들과 천사들과 하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영들과의 교류를 인간의 본래 창조 질서와 전혀 관계없는 예외적 현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길은 닫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속에 자신을 너무 깊이 잠기게 하여 그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 관심도 두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육체적이고세상적인것들’을 육체나 세상 자체가 악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이 문제 삼는 것은 사람이 그것들 속에 자신을 ‘잠기게’ 하여 그 밖의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즉 자연적 삶 자체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관심을 거의 전부 차지하게 된 상태가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류의 길이 닫힌 이유로 제시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특히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나자마자 그 길이 다시 열리고, 사람은 영들 가운데 있으면서 그들과 공동의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AC.69는 여기서 ‘육체적인것들이물러난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상태이며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금욕이나 육체의 억압, 세상생활의 포기 같은 실천법으로 곧바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번호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류가 인간의 영적 본성과 관계되며, 인간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속에 깊이 잠김으로 그 길이 닫혔다는 것입니다.
AC.69는 따라서 AC.68의 ‘저는보았고,들었고,느꼈기때문입니다’라는 증언에 하나의 배경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인간에게 전혀 불가능한 능력이 특별히 새로 생긴 것으로 설명하기보다, 본래 인간의 창조 질서에 속했으나 닫혀 있던 길이 다시 열린 것으로 설명합니다. 다만 왜 자신에게 그 길이 열렸는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이러한 교류가 열리는 것이 바람직한지까지 AC.69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번호에서는 그 이상의 내용을 앞당기지 않고,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설명의 범위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AC.69해설)
제가육체안에서살아있는동안에는영들과천사들과말하는것이결코가능하지않다고많은사람이말할것임을저는잘알고있습니다.또많은사람은이모든것이공상이라고할것이고,다른사람들은제가신빙성을얻기위해이런것들을이야기한다고할것이며,또다른사람들은그밖의여러반론을제기할것입니다.그러나저는이모든것에단념하지않습니다.저는보았고,들었고,느꼈기때문입니다. I am well aware that many will say that no one can possibly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so long as he lives in the body;and many will say that it is all fancy,others that I relate such things in order to gain credence,and others will make other objections.But by all this I am not deterred,for I have seen,I have heard,I have felt.
해설
AC.67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삶’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AC.68에서는 그러한 증언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육체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이며, 모든 것이 공상이라고 할 사람도 있고, 자신이 신빙성을 얻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고 의심할 사람도 있으며, 그 밖의 여러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증언이 쉽게 받아들여지리라고 기대하면서 이 기록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러한 반론들을 논증으로 반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들과 천사들과 대화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자신의 체험이 공상이 아니라는 철학적 논증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이 번호에서 그가 내놓는 것은 자신의 경험에 대한 증언입니다. ‘저는보았고,들었고,느꼈기때문입니다.’ 이것은 독자에게 아무 검토 없이 자신의 말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문장이 아니라, 예상되는 반론들을 자신도 알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이 경험했다고 하는 것을 밝히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겠다는 말입니다.
특히 ‘보았고,들었고,느꼈다’는 세 표현은 앞으로 이어질 기록의 성격을 다시 한번 보여 줍니다. AC.67에서 그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보았던것’을 밝히겠다고 했고, 여기서는 거기에 ‘느꼈다’를 더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자신의 기록을 단순한 사상이나 추론의 결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하는 경험의 증언으로 제시합니다. 이 단계에서 독자가 붙들어야 할 것은 그 증언을 미리 참이라고 증명하거나 거짓이라고 반박하는 일이 아니라,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어떤 성격의 증언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지를 정확히 읽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AC.68은 앞으로 이어지는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을 읽는 독자의 태도와도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론이 있을 것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먼저 적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반론들이 있음에도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밝히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후의 기록은 이 한 문장의 선언 위에서 읽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독자의 의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하는 경험을 증언하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AC.68해설)
AC.67을 처음 읽는 독자는 거의 즉시 한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들어 있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는 ‘다른삶의본성’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삶’은 무엇이며, 그 ‘본성’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AC.67은 아직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예고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뒤에 나올 내용을 모두 앞당겨 설명하기보다, 앞으로의 독서를 위해 필요한 정도만 먼저 짚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다른삶’은 이 세상의 육체적 삶과 구별되는 사후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삶은 단지 죽은 뒤에도 어딘가에서 존재한다는 막연한 관념이 아닙니다. AC.67에서 그는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었고 그 기간 동안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그가 말할 ‘다른삶’은 자신의 추측이나 철학적 사변으로 제시되는 세계가 아니라, 직접 듣고 보도록 허락되었다고 그 자신이 증언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AC.67은 단순히 ‘사후의삶이있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그 삶을 향하고 있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다른삶의본성’을 아는 것과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서로 연결됩니다. 말씀의 속뜻이 인간의 영적 생명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실재를 다루고 있다면, 그 실재가 어떠한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그 속뜻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삶의본성’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AC를 읽기 전에 영계에 관한 모든 지식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AC.67부터 이어지는 기록 자체가 독자에게 그 삶을 차례로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완성된 영계 지식을 요구한 뒤 속뜻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을 밝히는 과정에서 필요한 다른 삶의 본성도 함께 열어 보이려 합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지금부터 그가 밝히는 내용을 따라가면서 두 가지를 함께 배우게 됩니다. 다른 삶이 어떠한가를 알아 가는 동시에, 왜 그러한 지식이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지도 알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67뒤에 영계에 관한 기록이 이어지는 것은 창2의 해설과 무관한 이야기가 갑자기 끼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다고 직접 말합니다. 따라서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은 앞으로 말씀의 속뜻을 읽기 위해 독자의 시야를 넓혀 주는 역할을 합니다. 눈에 보이는 육체적 삶만이 인간 존재의 전부라는 전제에서 벗어나, 말씀의 속뜻이 향하고 있는 영적 삶의 실재를 함께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삶의본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AC.67한 번호에서 완전히 닫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서 시작되어 앞으로 계속 답을 얻게 되는 질문입니다. AC.67에서 우선 붙들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은 서로 떨어진 두 주제가 아니며,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그 삶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 가는 것이 속뜻의 아르카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다른삶’이 실제로 어떠한지는 이어지는 그의 증언을 따라가며 확인하게 됩니다. (AC.67심화1)
AC.67은 창2의 본문 해설에 들어가기 전에 스베덴보리가 왜 ‘다른삶’, 곧 사후의 삶에 관한 자신의 경험을 먼저 밝히려 하는지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하면서, 그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아르카나를 알기 위해 ‘다른삶의본성’을 알아야 한다고 한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바로 그 삶을 향하고 있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어지는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은 창2해설과 무관하게 삽입된 별도의 사후세계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으로 제시됩니다.
또한 이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앞으로 밝힐 내용을 추론이나 사변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고, 그 기간 동안 자신이 ‘듣고보았던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67은 이후 이어질 영계에 관한 기록의 성격을 미리 밝혀 주는 서문이기도 합니다. 독자는 앞으로 나오는 내용을 스베덴보리가 철학적으로 구성한 사후세계 이론이 아니라, 그 자신이 주님의 허락 아래 듣고 보았다고 증언하는 내용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그 증언의 진위를 여기서 별도로 논증한다는 뜻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자신의 기록을 어떤 성격의 것으로 제시하는지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67은 아직 ‘다른삶의본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한 뒤, 이제 자신이 여러 해 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에서 영계의 구조나 사후 인간의 상태를 미리 완성해서 설명하기보다,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의 본성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기록을 읽으면서 독자는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차례로 알게 되고, 동시에 그것이 왜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지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AC.67해설)
이 파일을 처음 열어 보시는 분은 아마 먼저 분량에 놀라실 것 같습니다. 창세기 1장 한 장을 다루는데 500쪽이 넘습니다. ‘천지창조한장을설명하는데무슨이야기가이렇게많을까?’ 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많은 분량을 계획했던 것은 아닙니다. 출발은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이하AC)를 처음부터 차례로 우리말로 옮기고,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을 붙여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AC.1부터 한 글씩 읽어 가면서 번역만으로는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질문들이 계속 생겼습니다. 어떤 질문은 짧은 해설만으로 충분했지만, 어떤 질문은 그 자리에서 조금 더 깊이 살펴보지 않으면 다음 글로 넘어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번역에 해설이 붙고, 해설에서 다시 질문이 생겨 심화가 붙으면서 지금의 분량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파일은 처음부터 한 권의 책으로 기획하여 집필한 결과물이라기보다, AC.1에서 AC.66까지 한 걸음씩 걸어가며 남긴 ‘읽기의기록’에 가깝습니다. 원문을 번역하다가 표현 하나에서 멈추기도 했고, 스베덴보리가 왜 이런 해석을 하는지 질문하기도 했으며, 처음 AC를 접하는 분이라면 어디에서 이해하기 어려울지를 생각하면서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시 검토해야 했고,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였던 설명을 AC전체의 문맥과 대조하면서 고치기도 했습니다. 이 파일에는 그런 과정까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자료의 기본 구성은 ‘번역,해설,심화’입니다. 먼저 ‘번역’은 영어 AC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우리말로 옮기려는 부분입니다. 그다음 ‘해설’은 단순히 번역문을 다시 풀어쓰는 것이 아니라, 그 AC가 앞뒤 글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창세기 본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처음 읽는 독자가 어디에서 ‘이게무슨뜻이지?’ 하고 멈출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설명한 부분입니다. ‘심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질문을 다룹니다. 본문을 이해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그렇다면이것은어떻게되는가?’라는 질문 가운데 해설 안에 모두 넣기에는 너무 큰 문제들을 따로 살펴본 것입니다.
그래서 심화까지 반드시 차례대로 모두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읽으시는 분이라면 먼저 AC본문의 번역과 해설을 따라가시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읽다가 특별히 궁금한 주제가 나오면 그때 관련 심화를 읽으셔도 됩니다. 반대로 이미 AC를 어느 정도 읽어 오신 분이라면 관심 있는 글 번호나 심화 주제를 찾아 들어가셔도 됩니다. 500쪽이 넘는다고 해서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번에 ‘완독해야하는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 한 장에서 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장을 읽는 방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을 펼치면 천지창조를 만납니다. 흑암 가운데 빛이 생기고, 물과 물 사이에 궁창이 놓이며, 뭍이 드러나고 식물이 자랍니다. 해와 달과 별이 나타나고, 물고기와 새와 짐승이 생기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읽는 말씀의 문자입니다.
그런데 AC는 그 문자 안에서 또 하나의 창조를 봅니다. ‘사람의거듭남’입니다. 아직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 안에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을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이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AC.6은 이것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힙니다. 여섯 날은 서로 무관한 여섯 가지 영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지나가는 ‘연속적인상태들’입니다. 처음에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 조금씩 주님에게서 오는 빛을 받고, 주님에게 속한 것과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이 구별되며, 선과 진리가 생겨나고, 마침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창세기 1장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빛이있으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자연계의 최초의 빛과 함께 ‘내안에는언제처음빛이비치기시작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궁창이 물과 물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사람안에서는무엇이구별되어야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땅에서 식물이 돋고 씨를 맺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서는 ‘진리가사람안에서어떻게선한삶의열매가되는가?’를 묻게 됩니다.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 짐승과 사람도 더 이상 서로 떨어져 있는 창조물의 목록으로만 보이지 않고, 한 사람 안에 영적 생명이 조금씩 형성되어 가는 긴 흐름 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창세기1장은천지창조에관한말씀이아니고인간의거듭남만을말한다는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자료는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는 문자에는 분명 천지와 빛과 물과 땅과 광명체와 생물과 사람의 창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AC가 밝히려고 하는 것은 그 문자를 없애고 다른 이야기를 대신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담긴 ‘속뜻’입니다. 이 자료에서도 이 점을 여러 차례 조심해서 구별했습니다. 창조의 말씀을 지우고 거듭남을 넣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말씀 안에서 인간의 새로운 창조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자료를 읽으실 때 처음부터 모든 ‘상응’을 외우려고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빛은이것,물은이것,나무는이것,새는이것’ 하는 식으로 대응표를 만들어 외우기 시작하면 오히려 창1전체의 생명 있는 흐름을 놓치기 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표현이 하나의 거듭남 안에서 어떻게 서로 이어지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이 이어지고, 둘째 날이 셋째 날을 준비하며, 그렇게 여섯째 날까지 진행됩니다. 실제 파일에서도 ‘창1의여섯날은속뜻에서여섯개의서로떨어진교훈이아니라하나의거듭남이진행되는여섯연속적상태’라는 점을 중요하게 붙들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창1을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조의 순서가 곧 거듭남의 질서로 읽히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기 안에 무엇이 어둠인지조차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빛이 비치고, 구별이 생기고, 무엇인가 싹트고, 진리가 자라고, 사랑과 신앙이 점차 생명의 중심으로 들어오며, 마침내 그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 전체가 달라져 갑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질서를 이루시는 ‘새창조’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계속해서 중심에 계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안에 빛을 만들고, 자기 힘으로 선을 생산하고, 마침내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읽어 갈수록 ‘내가한다’고 생각하던 것의 생명이 실제로 어디에서 오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거듭남의 시작도 주님에게서 오고, 선과 진리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며, 시험 가운데 사람을 붙드시고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응답하고 싸우고 살아가지만 그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과 능력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 점은 이 자료가 창1의 여섯 날을 읽으면서 계속 되돌아가는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이 자료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남의 ‘단계’를 정리하는 교과서는 아닙니다. 오히려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는지금몇째날에있는가?’라고 자기 영적 수준을 판정하려는 읽기를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여섯 날은 사람에게 영적 등급표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어떤 질서 가운데 새롭게 하시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실제 삶에서는 여러 상태가 복잡하게 경험될 수 있고, 이미 배운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다시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자료를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수준을 재는 잣대로 사용하기보다, 거듭남의 방향과 질서를 배우는 데 사용하시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이 파일에서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질문’입니다. AC를 처음 읽다 보면 정말 많은 질문이 생깁니다. ‘속사람과겉사람은무엇인가?’, ‘리메인스란무엇인가?’, ‘영적인간과천적인간은어떻게다른가?’, ‘왜같은짐승이어떤곳에서는선한것을뜻하고다른곳에서는악한것을뜻하는가?’, ‘형상과모양은무엇이다른가?’, ‘천상의결혼이란무엇인가?’, ‘왜주님께서는악과거짓을즉시없애지않으시는가?’, ‘천사들은말씀을어떻게지각하는가?’ 같은 질문들입니다.
이런 질문들을 가능하면 그냥 지나가지 않은 것이 이번 작업의 한 특징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질문에 곧바로 거대한 교리 체계를 가져와 답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이AC가지금말하는만큼만충분히말하고,다음글의몫은다음글에남겨두는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어떤 설명이 스베덴보리의 이 글에 직접 있는 것인지, 관련 AC들을 통해 충분히 뒷받침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설명이나 적용인지도 가능한 한 구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료는 처음 작성한 글을 그대로 모은 것만도 아닙니다. AC.1부터 AC.66까지 다시 검토하면서 번역과 해설, 심화 가운데 지나치게 나간 설명은 줄이고, 처음 읽는 분에게 꼭 필요한 설명은 오히려 보충했습니다. 성경 구절이나 다른 AC글 번호가 인용되었다고 해서 모두 별도의 심화로 남겨 두기보다, 그 인용이 왜 사용되었는지를 해설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소화했습니다. 반대로 본문을 읽은 독자가 정말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을 품을 만하고, 그 질문 자체로 독립적인 가치가 있는 경우에는 심화로 남겼습니다.
특히 성경과 AC의 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자료에서 AC는 성경을 대신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의 표현을 AC에 맞추어 고치는 것도 이 작업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말씀이 있고, AC는 그 말씀의 속뜻을 밝히고 설명하는 책이라는 순서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AC의 영어 인용과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의 표현이 다르더라도 의미상 문제가 없다면 익숙한 성경의 표현을 우선했고, 의미 차이가 실제로 중요할 때에는 성경을 AC의 문장에 맞추어 바꾸기보다 ‘개역개정은이렇게되어있지만스베덴보리는여기서이런표현을사용한다’고 차이를 밝히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파일 마지막 AC.66의 삼상2:3심화는 바로 그런 문제를 실제 사례로 다룹니다.
AC.64-66에 이르면 창1의 거듭남 이야기는 다시 ‘말씀’ 자체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그것이 말씀의 ‘가장참된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우리가 읽는 나라와 성읍과 강과 사람의 이름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하고, 자신이 말씀을 읽을 때 그 내적 의미가 얼마나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되는지를 ‘영광’이라는 표현과 함께 전합니다. 마지막 AC.66에서는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성경의 모든 부분을 똑같은 방식으로 기계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안내도 남깁니다. 특히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을 구별하는 설명은 앞으로 창세기를 계속 읽어 갈 때 매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그러므로 AC.1-66은 창세기 1장의 마지막 절에서 끝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 부분을 다 읽고 나면 오히려 창세기 2장을 읽을 준비가 됩니다. 여섯째 날까지 진행된 거듭남이 그다음에는 어떤 상태로 들어가는지, ‘일곱째날’의 안식은 무엇인지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파일은 하나의 완결된 창1작업인 동시에 앞으로 계속될 긴 AC읽기의 첫걸음이기도 합니다.
이 자료를 처음 읽으시는 분께 한 가지를 권하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응 하나하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심화까지 모두 읽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대신 한 가지 질문을 마음에 품고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한사람을어떻게새롭게창조하시는가?’
그 질문을 가지고 읽다 보면 ‘빛이있으라’가 조금 달리 들릴 수 있습니다. 궁창이 나뉘고 땅이 드러나며 씨가 싹트는 모습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빛나고 생물이 살아 움직이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장면들이 먼 옛날의 창조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고, 지금도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이루고 계시는 새 창조의 질서와 연결되어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작업에는 ChatGPT가 함께했습니다. 번역을 비교하고, 문장을 다듬고, 앞뒤 AC의 문맥을 살피며, ‘처음읽는사람이라면여기에서무엇을궁금해할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자료를 ‘ChatGPT가AC를해석해준결과’라고 소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AC원문과 말씀 앞에서 계속 질문하고, 답을 다시 원문에 비추어 검토하며, 때로는 앞서 쓴 해설을 고치고 다시 쓰는 긴 협업의 결과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이 파일의 제목에도 ‘withChatGPT’라고 적었습니다. ‘byChatGPT’가 아니라 ‘withChatGPT’입니다. 이 작은 차이가 이번 작업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 자료는 제 손에서만 읽히는 작업 노트를 넘어, 처음 AC를 접하는 분들과도 나누어 보려 합니다. 어떤 분에게는 낯설고, 어떤 대목에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서둘러 받아들이거나 서둘러 거부하기보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천천히 따라가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AC자체에 머무르기보다, AC가 계속해서 가리키는 말씀으로 돌아가 보셨으면 합니다.
500쪽이 넘는 긴 여정이지만, 그 시작은 아주 짧은 한 말씀입니다.
‘빛이있으라.’
그리고 어쩌면 창세기 1장을 속뜻으로 읽는 긴 여정은 결국 이 한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에서 듣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빛을 주시고, 구별하시고, 생명을 싹트게 하시고, 사랑과 신앙을 자라게 하시며, 마침내 그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과정 말입니다.
이 자료가 그 놀라운 말씀의 여정을 조금 더 깊이 따라가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삼상2:3)Speak what is high!high!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1 Sam. 2:3).
AC.66을 읽다가 가장 먼저 멈추게 되는 곳 가운데 하나가 삼상2:3입니다.개역개정은‘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그런데AC의 영어 인용은‘높은것을말하라,높은것을!옛것이네입에서나오게하라’는 식입니다.단어 몇 개가 다른 정도가 아니라 명령의 방향 자체가 거의 반대로 보입니다.그렇다면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의 성경을AC영어에 맞추어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삼상2:3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금지를 나타내는 말이 있고,문맥 역시 한나가 교만과 오만을 경계하는 내용입니다.오늘날의 주요 영어 번역들도 대체로‘더이상그렇게교만하게말하지말라’, ‘오만한말이입에서나오지않게하라’는 방향으로 번역합니다.따라서 개역개정의‘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는 히브리어 본문과 일반적인 번역 전통에 잘 맞습니다.
그러므로AC의 영어 문장을 보고‘개역개정번역자들이아르카나를몰라서잘못번역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더구나AC의 영어 인용을‘문자적번역보다더깊은내적의미의번역’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AC.66자체는‘이구절의문자적의미는사실높은것을말하라는뜻이다’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단지 태고교회의 스타일을 설명하면서 현재 우리가 보는 것과 매우 다른 형태로 삼상2:3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칙 하나가 생깁니다.성경 본문과AC의 인용문이 현저하게 다를 때에는 두 문장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성경은 성경대로 정확하게 제시하고,AC가 어떤 형태로 그 말씀을 인용하는지도 그대로 보여 주며,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그래서 이번AC.66의 한국어 본문에서도 삼상2:3은 개역개정 그대로‘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바로 뒤의 영어 원문에는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인용형이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독자는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이처럼 다른 형태의 문장을 인용했을까요?그 정확한 문헌적 배경을 확인하지 않은 채‘스베덴보리가히브리어를영적으로다시번역했기때문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은 위험합니다.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당시의 성경 텍스트나 번역 전통,인용 관행을 문헌적으로 더 조사해야 할 문제입니다.현 단계에서 확실한 것은AC.66의 영어 인용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히브리어 본문에 따른 일반적인 번역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런 차이가AC.66전체의 설명을 무너뜨리는 것일까요?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스베덴보리가 이 인용을 사용하는 목적은 태고교회의 스타일이‘높은것’과‘옛것’에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따라서 이 특정 인용이 그의 설명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분명합니다.다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인용된 성경의 실제 문자와AC가 사용하는 인용형을 같은 것처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성경과AC의 관계를 다루는 데 중요한 사례가 됩니다.AC를 존중한다는 것이 성경을AC의 표현에 맞추어 다시 번역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성경의 문자적 본문을 먼저 존중하고,스베덴보리가 그 말씀을 어떤 방식으로 인용하고 사용하는지를 그 다음에 정확하게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의미 차이가 없다면 익숙한 성경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지만,이번 삼상2:3처럼 의미 차이가 너무 크다면 그 차이를 감추지 않고 설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 경우에는‘개역개정과AC가운데하나를선택해야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성경 번역에서는 개역개정의 문구를 유지합니다.동시에AC의 원문을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높은것을말하라’는 형태로 인용했다는 사실도 그대로 인정합니다.그리고 그 차이가 왜 생겼는지는 확인 가능한 문헌적 근거 이상으로 추측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례가 성경보다AC를 높이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번역에는보이지않는진짜뜻을AC만알고있다’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말씀의 속뜻을 밝힌다는AC의 역할과 말씀 자체의 권위가 뒤집힐 수 있습니다.AC.66역시 결국‘말씀의네가지스타일’을 설명하는 글입니다.중심은AC의 문장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가장 안전하게 처리하는 방법은 단순합니다.삼상2:3은 개역개정 그대로 읽습니다.AC가 그와 다른 형태로 인용한다는 사실은 숨기지 않습니다.그리고 그 차이를‘성경은낮은문자,AC는높은영적번역’이라는 구조로 만들지 않습니다.바로 이런 태도가 말씀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텍스트도 정직하게 읽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에는전반적으로네가지서로다른스타일이있습니다.첫째는태고교회의스타일입니다.그들의표현방식은이땅의것과세상의것을말할때,그것들이표상하는영적이고천적인것들을동시에생각하는것이었습니다.그래서그들은단지표상으로표현했을뿐아니라,그것들을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엮어더욱생명력있게하였는데,이런방식은그들에게더없이큰기쁨이었습니다.이런스타일을가리켜한나는예언가운데이렇게말했습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삼상2:3)Speak what is high!high!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1 Sam. 2:3).
창조와에덴동산등에관한이모든내용,곧아브람시대까지의기록을모세는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전해받았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둘째스타일은역사적스타일로,아브람이후의모세오경과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기,열왕기에나타납니다.이책들에서역사적사실들은문자적의미에나타난그대로입니다.그러나그모든것에는전체적으로도부분적으로도내적의미안에전혀다른것들이담겨있는데,이에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이어지는글들에서그순서대로설명하겠습니다. 셋째스타일은예언적스타일입니다.이스타일은태고교회에서그토록높이존중되던스타일에서생겨났습니다.그러나태고교회의스타일처럼연결된역사적형식은아니고단절되어있으며,내적의미없이는거의이해할수없습니다.그내적의미안에는가장깊은아르카나가담겨있고,그것들은아름답게연결된질서를따라이어지며,겉사람과속사람,교회의여러상태,하늘자체를다루고,가장깊은의미에서는주님을다룹니다. 넷째스타일은다윗의시편에나타나는스타일로,예언적스타일과일상적인언어사이에놓여있습니다.그안에서는왕으로서의다윗이라는인격아래,내적의미에서는주님을다룹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해설
AC.66은 창세기 1장에 대한 해설을 마친 자리에서 말씀의 문체와 속뜻의 관계를 한층 넓게 보여 주는 글입니다. 바로 앞 AC.64-65에서는 말씀에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66은 말씀 전체를 모두 똑같은 외적 형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 둘째는 역사적 스타일,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 넷째는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입니다. 네 스타일은 겉으로 나타나는 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AC.66의 관심은 결국 그 서로 다른 외적 형식 안에 어떻게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가에 있습니다.
첫째인 태고교회의 스타일은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 온 창세기 앞부분과 직접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말할 때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후대 사람이 자연물 하나를 보고 의도적으로 ‘이것은무엇을상징할까?’ 하고 해석한 것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외적인 것을 말하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함께 생각하는 표현 방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표상들을 단순히 하나씩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만들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한 이유를 그것들에 더 큰 생명력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하며, 그런 방식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조와 에덴동산을 비롯한 앞부분을 읽을 때, AC가 그것을 단순한 상징 목록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표상의 이야기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바로 이 문맥에서 한나의 삼상2:3이 인용되는데, 여기서는 잠시 주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읽는 개역개정은 ‘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라고 되어 있는 반면, AC의 영어 인용은 ‘높은것을말하라,높은것을!옛것이네입에서나오게하라’는 식으로 전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과 오늘날의 일반적인 번역은 개역개정과 마찬가지로 교만한 말을 금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AC의 영어 인용을 근거로 개역개정이 잘못되었다거나, AC가 그 구절의 ‘진짜번역’을 제공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어 본문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여 개역개정 문구를 그대로 두되, 스베덴보리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인용 형태가 우리가 읽는 성경 번역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와 AC.66의 논증에서 이 인용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시78:2-4의 ‘내가입을열어비유로말하며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을드러내려하니’라는 말씀이 인용됩니다. AC.66은 특별히 이러한 표상들을 다윗이 ‘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굳이 시편의 모든 세부 표현을 하나씩 새로운 상응으로 풀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인용의 역할은 첫째 스타일의 표상들이 ‘예로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바로 다음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 곧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78의 인용과 다음 문장은 함께 읽는 것이 좋습니다. ‘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이라는 표현과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표상적 전승이라는 설명이 서로 연결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라면 상당히 큰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스베덴보리는창세기1장부터아브람이전까지의내용을모세가직접계시받아처음기록한것이아니라,앞선세대에게서전해받은자료라고보는것인가?’ AC.66의 문장은 분명히 그렇다고 말합니다. ‘창조와에덴동산등에관한이모든내용,아브람시대까지의기록을모세는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전해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66이 직접 제시하는 상당히 중요한 주장입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그러므로창1-11은허구이다’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에서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이 문제는 AC의 창세기 앞부분 이해에 매우 중요하므로 별도 심화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범위를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로 명시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아주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역사적사실들은문자적의미에나타난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즉 이 둘째 스타일에서 스베덴보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이유로 외적 역사를 지우지 않습니다. 문자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내적 의미 안에 ‘전혀다른것들’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66의 둘째 스타일에서는 ‘역사인가상징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속뜻을 갖습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앞부분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에 대해서는 ‘사실들이문자그대로’라고 명시하는 반면, 그 이전 태고교회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 ‘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엮었다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문장을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66하나만 가지고 창1부터 창11까지 각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세세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첫째와 둘째 스타일을 서로 다르게 설명하며, 아브람 이후의 둘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문자적 역사성을 명시적으로 확인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스타일이 태고교회에서 매우 높이 존중되던 스타일에서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스타일처럼 연결된 역사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 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예언서는문자적으로아무뜻이없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scarcelyeverintelligibleexceptintheinternalsense’, 곧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하지만, 그 목적은 문자 자체를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그 단절된 표현들의 내적 의미 안에 깊은 아르카나와 아름답게 연결된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65에서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연속의질서’를 가진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무엇을 다루는지도 직접 열거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여러 상태, 하늘 자체를 다루며 ‘가장깊은의미에서는주님’을 다룹니다. 여기서 특히 마지막 표현은 앞으로 말씀의 속뜻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을 곧 ‘모든성경구절은무조건주님의지상생애에대한암호이다’라는 공식으로 바꿔서는 안 됩니다. AC.66은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여러 차원을 다루며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을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 구체적인 관계는 실제 예언서 인용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넷째는 다윗의 시편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의 중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왕으로서의다윗이라는인격아래에서내적의미로는주님을다룬다’고 합니다. 이 표현도 매우 중요합니다. 시편을 읽을 때 다윗의 역사적 인격과 개인적 언어를 곧 지워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 외적 형식 아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룬다는 것이 AC.66의 설명입니다. 따라서 시편의 ‘나’를 만날 때 곧바로 모든 문장을 독자의 개인 감정으로만 읽는 것도, 반대로 문자적 화자를 아무 의미 없다고 하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힌 것은 왕 다윗의 인격 아래 주님이 내적 의미에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보면 말씀의 속뜻이 언제나 똑같은 외적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스타일에서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자연적인 표상들을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습니다. 역사적 스타일에서는 실제 역사적 사실들 안에 전체와 세부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언적 스타일에서는 외적으로 단절되어 보이는 표현들 안에 깊은 아르카나가 아름다운 질서로 연결되고, 시편에서는 왕 다윗의 인격 아래 내적 의미로 주님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속뜻이있다’는 하나의 원칙만 붙들고 모든 성경 본문을 동일한 방법으로 기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AC.66은 보여 줍니다.
그러나 네 스타일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통일성도 있습니다. 모두 말씀이며, 외적으로 서로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안에는 문자에 다 드러나지 않는 내적 내용이 있습니다. 앞 AC.64에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의가장참된생명’이라고 했고, AC.65에서는 그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가 천사들에게 ‘영광’이라고 불렸습니다. AC.66은 이제 그 속뜻이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스타일 안에서 어떻게 담겨 있는지를 큰 윤곽으로 보여 줍니다.
또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낮은단계에서높은단계로발전한네계시수준’처럼 읽는 것입니다. AC.66은 그런 서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스타일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하며, 예언적 스타일은 그 스타일에서 생겨났고, 시편은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 언어 사이에 있다고 설명하지만, 이것을 ‘첫째가가장높고둘째는낮고셋째가다시높다’는 등급표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각각 말씀 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스타일입니다.
AC.66은 그래서 창세기 1장을 마치는 글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AC를 읽는 방법을 준비시키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첫째 스타일에 속하는 창조의 표상적 연속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 이후로 가면 둘째인 역사적 스타일을 만나게 되고, AC가 그 실제 역사 속의 모든 것에서 어떻게 내적 의미를 밝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예언서와 시편이 인용될 때도 그들의 서로 다른 스타일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에는속뜻이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든 본문을 똑같은 상징 해독법으로 읽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형식을 존중하면서 그 안의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성경과 AC의 순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먼저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도, 실제 역사의 스타일도, 예언의 스타일도, 시편의 스타일도 있습니다. AC는 그 차이를 없애거나 성경의 표현을 자기 체계에 맞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말씀 안에 어떤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따라서 AC.66이 가르치는 좋은 독법은 ‘문자를버리고속뜻으로가자’가 아니라, ‘말씀의외적형식을정확히읽으면서그안에주님께서두신더깊은뜻을따라가자’는 방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5를 읽으면 성경을 깊이 공부해 온 독자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천사들은 하늘에서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만을 이해한다면,우리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연구하고 단어 하나의 뜻과 문법을 세밀하게 살피는 일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AC.65에서 그런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이 글은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자연계의 인간에게 말씀의 문자를 연구하지 말라고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천사와 인간은 말씀을 동일한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우리에게 말씀은 실제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비롯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전해졌고,우리는 번역된 성경의 단어와 문장을 통하여 그것을 읽습니다.그러므로 원어와 문법과 문맥을 정확히 연구하는 일은 인간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분명히 유익합니다.
특히 번역에서는 원어 연구가 매우 중요합니다.같은 히브리어나 헬라어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뜻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고,번역 과정에서 한 언어의 뉘앙스를 다른 언어로 완전히 옮기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원어를 살피면 번역자가 왜 특정 표현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고,서로 다른 번역을 비교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따라서‘천사는글자를보지않으니인간도원어를연구할필요가없다’는 것은AC.65가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도 말씀의 특정 단어나 표현에 매우 세밀하게 주목합니다.AC를 읽다 보면 어떤 단어가 왜 사용되었는지,단수와 복수가 왜 달라지는지,같은 듯 보이는 표현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근거로 속뜻을 설명하는 경우를 계속 만나게 됩니다.이것만 보아도 말씀의 문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AC.65를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AC.65가 우리에게 주는 경계는 무엇일까요?원어 연구 자체가 곧 말씀의 속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히브리어 단어의 어근과 문법을 완벽하게 분석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천사들이 지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에 도달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AC.65의 사람들은 스베덴보리가 읽는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뜻하는 것을 지각했습니다.따라서 문자 연구와 내적 의미는 동일한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둘을 서로 적으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문자연구는낮은것이고속뜻만높은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말씀의 질서를 거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우리에게 속뜻은 말씀의 문자와 무관하게 떠오르는 별도의 영적 생각이 아닙니다. ‘말씀의속뜻’입니다.따라서 우리가 자연계에서 말씀을 읽는 출발점은 여전히 주어진 문자입니다.문자를 정확하게 읽는 일과 그 안에 있는 더 깊은 의미를 인정하는 일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기준이 생깁니다.원어 연구를 통해 개역개정의 익숙한 표현과 다른 원문의 뉘앙스를 발견했다고 해서 곧바로‘우리성경은틀렸고원어를아는내가진짜뜻을안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번역은 언제나 여러 요소를 고려한 결과이고,표현의 차이가 실제 의미 차이를 만드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반대로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특정 히브리어나 헬라어 표현의 차이에 실제로 의존한다면 그때는 그 차이를 숨기지 말고 독자에게 설명해야 합니다.원어는 말씀을 교정하기 위한 권위 경쟁의 도구라기보다,주어진 말씀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원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영적 수준을 비교해서도 안 됩니다.원어를 많이 안다고 해서 자동으로 말씀의 속뜻을 더 깊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원어를 모른다고 해서 말씀을 깊이 받을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AC.65는 그런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글이 아닙니다.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방식이 인간의 문자 이해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글입니다.
따라서 목회와 설교에서도 원어는 매우 유용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설교의 권위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헬라어로보면진짜뜻은이것입니다’라는 표현을 반복하면서 번역 성경을 읽는 회중이 마치 불완전한 말씀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정말 원어의 차이가 본문 이해에 중요할 때 그 이유를 차분히 설명하면 충분합니다.
반대로 원어 연구를 경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것은영적의미니까단어의정확한뜻은중요하지않다’고 한다면 독자의 주관적인 연상을 속뜻이라고 부르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말씀의 속뜻은 우리가 문자를 넘어 마음대로 만들어 내는 뜻이 아니라,스베덴보리의 주장에 따르면 주님께서 주신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뜻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문자 자체도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결국AC.65가 보여 주는 것은‘원어연구냐속뜻이냐’라는 선택이 아닙니다.인간에게는 말씀의 문자가 주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동시에 말씀은 그 문자적 의미로 다 소진되지 않으며,천사들에게는 그 안에서 뜻하는 내적 의미가 지각됩니다.원어 연구는 전자를 돕는 귀한 도구일 수 있지만 그 자체가 후자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장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원어 연구는 필요 없지 않습니다.오히려 말씀의 문자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원어를 안다는 것 자체가 말씀의 속뜻을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AC.65는 문자를 버리라고 하지 않고,우리가 읽는 그 문자 안에 천사들이‘영광’이라고 부를 만큼 아름답고 질서 있는 내적 의미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제가말씀을읽고있을때,어떤이들이하늘의첫입구뜰까지들려올라갔고,그곳에서저와대화를나누었습니다.그들은그곳에서는말씀속의어떤단어나글자도전혀이해할수없고,오직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만을이해할수있다고말했습니다.그리고그내적의미가너무도아름답고,연속의질서가너무도완전하며,그들을너무도깊이감동시켜서,그들은그것을‘영광’(glory)이라고불렀다고하였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해설
AC.65는 바로 앞 AC.64와 함께 읽어야 가장 잘 이해됩니다.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말씀의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65에서는 이제 그 설명을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 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첫입구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말씀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이해할 수 없었고, 오직 ‘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하며, 자신들을 너무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에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먼저 이 글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실제 영적 경험으로 제시하는 기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5는 비유를 만들어 ‘천사라면아마이렇게말씀을읽을것이다’라고 상상하는 글이 아닙니다. 저자는 자신이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실제로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들과 대화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해설할 때에는 한편으로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실제 경험으로 제시한다는 사실을 존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독자에게도 반드시 같은 경험이 일어나야 한다거나 우리가 그 영적 경험의 세부 구조를 본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설명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늘의첫입구뜰’이라는 표현도 그런 경우입니다. 처음 읽으면 ‘천국의어느층인가?첫째천국보다더낮은곳인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65는 여기서 천국의 지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 ‘비교적낮은단계의하늘영역’이라고 확정하기보다, 본문 그대로 ‘하늘의첫입구뜰’이라고 두고 이 경험의 핵심에 집중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들려 올라간 이들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 속의 ‘어떤단어나글자도전혀이해할수없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AC.64에서 천사들이 말씀의 문자와 역사적 이름을 지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던 설명과 직접 이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사에게는단어가전혀없고오직추상적인의미만있다’는 일반적인 언어 이론까지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65가 직접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읽고 있던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을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가장가까운내적의미’라는 표현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문자바로안쪽의영적의미이며그보다더깊은곳에는천적의미가있다’는 식으로 층위를 확정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과 뒤의 설명들을 함께 보면 말씀의 여러 의미에 관한 더 풍부한 교리가 나오지만, AC.65자체는 여기서 그 구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원문이 말하는 그대로 ‘가장가까운내적의미’라고 두고, 그 의미조차 천사들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게 지각되었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표현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초보 독자에게도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므로 별도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각한 내적 의미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연속의질서’입니다. 특히 ‘insuchorderofsequence’라는 표현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서로 관계없는 상징들의 모음처럼 지각된 것이 아니라 어떤 연속적인 질서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1을 읽으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빛에서 궁창으로, 식물에서 광명체로, 생물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설명은 각 단어의 뜻을 하나씩 풀어 놓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습니다. 다만 이 창1의 사례는 AC.65의 ‘연속의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예이지, 이 한 구절만으로 말씀의 모든 내적 의미가 어떤 구조로 연결되는지를 다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의미는 또한 그들을 깊이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도 먼저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AC.65는 그들이 왜 ‘glory’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에 관한 상응론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광은언제나신적진리가사랑과결합되어나타나는상태이므로여기서도정확히그것을뜻한다’고 이번 한 문장에 완성된 정의를 가져오기보다, 그들이 말씀의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완전한 연속의 질서에 깊이 감동되어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영광’을 단순히 ‘정말아름다웠다’ 정도의 감탄사로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이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한 것은 바로 ‘말씀의내적의미’였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문맥에서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천사적 지각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고 감동적인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말이 어떤 속뜻을 갖는지는 그 표현을 직접 해설하는 관련 AC에서 충분히 살펴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AC.65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제가말씀을읽고있을때’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에서 말씀을 읽고 있었고, 그와 대화한 이들은 하늘의 첫 입구 뜰에서 그 말씀의 단어나 글자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 장면은 AC.64에서 말한 인간의 문자와 천사적 지각 사이의 관계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사람이성경을읽을때마다반드시특정천사들이동시에그내적의미를읽는다’는 식으로 모든 세부 작동 방식을 AC.65하나에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는 동안 이러한 경험을 했다고 증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말씀의 문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으로도 이어집니다. ‘천사들은단어나글자를이해하지않는다니,그렇다면인간에게도단어와문법과원어는별로중요하지않은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은 AC.65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방식과 자연계의 인간이 말씀을 읽는 방식은 같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은 실제로 단어와 문장으로 주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 문자를 통해 말씀을 읽습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문자에서 떠난 의미를 지각한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문자를 소홀히 하라는 명령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말씀의 문자를 더욱 신중하게 대해야 할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바로 그 말씀 안에 천사들이 지각하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는 대신, 주님께서 말씀을 문자로 우리에게 주셨고 그 안에 더 깊은 의미를 두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원어 연구나 정확한 번역도 그 자체로 속뜻은 아니지만 말씀의 문자를 정확하게 읽기 위한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또 AC.65를 읽고 ‘나도천사들처럼말씀의내적의미를직접보고싶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 자체는 독자에게 그런 경험을 추구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가 경험한 영적 개방과 우리가 말씀을 읽다가 깊은 깨달음이나 감동을 얻는 일을 곧 같은 종류의 경험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깊이 감동받고 삶이 변화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을 곧 AC.65의 ‘하늘의첫입구뜰’에서 이루어진 경험과 동일시할 근거는 이번 글에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특별한 경험은 특별한 경험대로 존중하고, 우리의 말씀 읽기는 말씀 읽기대로 주님 앞에서 충실하게 이어 가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AC.65는 독자의 관심을 신비 체험 자체보다 ‘말씀’으로 돌립니다. 이 경험에서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거기서 만난 것이 말씀의 내적 의미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하며, 그들을 너무 깊이 감동시켜 ‘영광’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경험이 가리키는 중심도 결국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AC의 목적이 독자로 하여금 ‘나도스베덴보리처럼영계를보고싶다’는 데 머물게 한다면 중심이 옮겨진 것입니다. AC.65가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매일 읽을 수 있는 말씀 안에, 인간의 눈에는 문자로 보이지만 천사들에게는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되어 ‘영광’이라 불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AC가 중요하다면 바로 그 말씀의 깊이를 열어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도 말씀과 AC의 순서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었기 때문에 이 경험이 일어났고, 그들이 지각한 것도 말씀의 내적 의미였습니다. AC.65는 새로운 영적 체험을 말씀 위에 올려놓는 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내적 의미가 천사적 지각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언하는 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짧은 글은 AC.64의 설명을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말씀의 단어와 글자가 있고, 그 안에는 천사들이 지각하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는 그들에게 ‘영광’이라 불릴 만큼 깊은 것이었습니다.
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성경’이라는 말보다‘theWord’,곧‘말씀’이라는 표현을 매우 자주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경건한 표현일까요,아니면 스베덴보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용어일까요?
AC.64자체에서는 분명히‘theinternalsenseoftheWord’,곧‘말씀의속뜻’을 말합니다.그리고 그 속뜻을‘말씀의가장참된생명’이라고 합니다.이어서 천사들이‘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설명합니다.따라서 적어도 이번 문맥에서‘theWord’는 단순히 책의 일반 명칭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문자 안에 속뜻을 가지고 천사들에게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되는 신적 계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말‘성경’과‘말씀’은 실제 교회생활에서는 상당히 겹쳐 사용됩니다. ‘성경을읽는다’와‘말씀을읽는다’가 같은 행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러므로‘성경’이라는 말은 낮고‘말씀’이라는 말만 영적이라고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중요한 것은 한국어 단어 자체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스베덴보리가‘theWord’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로 가면‘말씀’의 범위에 관한 별도의 설명이 나오고,우리가 흔히‘성경66권’이라고 부르는 범위와 그의 엄밀한 의미의‘theWord’가 어떻게 관계되는가 하는 문제도 생깁니다.이것은 실제로 중요한 주제입니다.그러나AC.64한 문장만 가지고 그 전체 정경론을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속뜻이있는책에는주님의생명이있지만다른성경책에는주님의생명이없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그렇게 말하면 마치 성경 안에 신적인 책과 비신적인 책이 단순히 둘로 갈리고,후자는 영적으로 가치가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정경과 속뜻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는 관련 본문들을 직접 모아서 따로 다루어야 정확합니다.
이번AC.64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스베덴보리가 여기서‘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문자적 의미에서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천사들은 그 말씀을 문자와 이름으로 지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합니다.따라서‘theWord’는 이 글에서 속뜻과 천사의 지각을 함께 품고 있는 매우 중요한 용어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가AC를 읽는 태도에도 중요합니다. ‘말씀의속뜻’이라고 할 때 중심 명사는‘속뜻’만이 아니라‘말씀’입니다.속뜻이 말씀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입니다.아르카나 역시AC가 말씀 밖에서 새로 만들어 내는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밝혀진다고 주장하는 아르카나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theWord’를 우리말로‘말씀’이라고 옮기는 것은 자연스럽고 의미도 잘 살아납니다.한국 교회에서‘말씀’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을 가리키는 익숙하고 권위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다만 이것을 근거로 일상적인‘성경’이라는 표현을 피해야 한다거나 잘못된 표현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AC와 성경의 관계를 뒤집지 않는 것입니다.AC.64가‘말씀의속뜻’을 설명한다고 해서AC가 말씀보다 높은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스베덴보리의 주장은 자신이 말씀 밖에 새로운 계시 체계를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바로 그 말씀 안에 문자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왜성경이아니라말씀이라고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스베덴보리가‘theWord’라고 할 때 그는 단순한 종교 문헌의 명칭보다,주님에게서 온 계시이며 그 문자 안에 내적 의미를 가진 말씀이라는 성격을 강조합니다.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말씀’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 정확한 범위와 어떤 성경책들이 스베덴보리의 엄밀한 의미에서‘말씀’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관련 본문을 충분히 확인하여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독법에서는 한 가지를 더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마다AC를 높이기 위해 성경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오히려AC가 끊임없이 독자를 말씀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AC.64가 말하는 속뜻도,아르카나도,천사들의 지각도 모두‘말씀’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