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

‘동산’(garden)은 지성을 뜻하고, ‘에덴’(Eden)은 사랑을, ‘동쪽’(east)은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동쪽 에덴동산’(garden of Eden eastward)은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하는데, 이 지성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듭니다. By a “garden” is signified intelligence; by “Eden,” love; by the “east,” the Lord; consequently by the “garden of Eden eastward” is signified the intelligence of the celestial man, which flows in from the Lord through love.

 

해설

AC.98은 창2:8의 ‘동쪽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라는 말씀을 이루는 세 표현, 곧 ‘동산’, ‘에덴’, ‘동쪽’의 속뜻을 먼저 밝힙니다. ‘동산’은 지성을, ‘에덴’은 사랑을, ‘동쪽’은 주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하나로 모으면 ‘동쪽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지성의 근원과 질서입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그 사람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듭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은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되 사랑이 주된 것이 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AC.83). 따라서 여기서도 지성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앞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이 점은 앞의 AC.90-93에서 살펴본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며,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평온을 받아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을 산출합니다. 이제 ‘에덴동산’에서는 그 질서의 더 깊은 중심이 드러납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자기 자신의 지성을 독립적으로 세우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통하여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에덴동산’을 단순히 지성이 풍성한 상태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지성의 중심에는 ‘에덴’, 곧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의 근원에는 ‘동쪽’, 곧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에게서 사랑을 통하여 흘러드는 지성, 이것이 AC.98이 ‘동쪽 에덴동산’이라는 말씀 안에서 보여 주는 천적 인간의 질서입니다. (AC.98 해설)

 

 

 

AC.99, 창2:8, ‘영적 인간에게 뒤집혀 있던 생명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됨’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영적 인간에게서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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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7, 창2:7, '호흡과 숨이 생명을 뜻하는 이유, 태고교회의 퍼셉션'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생명을 ‘숨을 내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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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

생명을 ‘숨을 내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호흡은 그들의 후손들에게서 점차 변화하였습니다.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태고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다른 삶에 있는 사람들도 그러하지만,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wind)에 비유한 이유였습니다. 주님께서도 사람의 거듭남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요한복음에서 그렇게 하십니다.주1 The reason why life is described by “breathing” and by “breath” is also that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perceived states of love and of faith by states of respiration, which were successively changed in their posterity. Of this respiration nothing can as yet be said, because at this day such things are altogether unknown.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well acquainted with it, and so are those who are in the other life, but no longer anyone on this earth, and this was the reason why they likened spirit or life to “wind.” The Lord also does this when speak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in John:1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3:8) The wind bloweth where it listeth, and thou hearest the voice thereof, and knowest not whence it cometh, or whither it goeth; so is everyone that is born of the spirit (John 3:8).

 

시편에서도 이와 같습니다. So in David: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33:6) By the word of Jehovah were the heavens made, and all the army of them by the breath of his mouth (Ps. 33:6).

 

29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30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29, 30) Thou gatherest their breath, they expire, and return to their dust;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29–30).

 

‘숨’(breath)[spiraculum]이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는 것은 욥기에서도 분명합니다. That the “breath” [spiraculum] is used for the life of faith and of love, appears from Job: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욥32:8) He is the spirit in man, and the breath of Shaddai giveth them understanding (Job 32:8).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욥33:4) The spirit of God hath made me, and the breath of Shaddai hath given me life (Job 33:4).

 

주1, 원어에서는 ‘바람’(wind), ‘영’(spirit), ‘숨’(breath)이 모두 같은 단어로 표현됩니다. In the original languages, “wind,” “spirit,” and “breath” are all expressed by the same word. [Reviser]

 

해설

AC.97은 AC.96에 이어 왜 말씀에서 생명을 ‘숨을 내쉼’과 ‘숨’으로 묘사하는지를 설명합니다. AC.96에서는 콧구멍과 냄새가 퍼셉션과 연결되고,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분 좋은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다고 했습니다. AC.97은 여기에 또 하나의 이유를 덧붙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퍼셉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독자에게 매우 낯선 내용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를 인정하여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알려져 있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태고교회의 호흡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를 현대의 호흡법이나 신체 현상으로 재구성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AC.97이 직접 알려 주는 범위는 그들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 사이에 오늘날에는 잃어버린 어떤 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고대 사람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에 비유한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예로 요3:8을 듭니다.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말씀하시면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라고 하신 뒤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다’고 하십니다. AC.97에서는 바람과 영과 생명이 서로 무관한 표현들이 아니라, 거듭남과 생명을 설명하는 하나의 말씀의 언어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33:6과 시104:29-30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여호와의 ‘입 기운’으로 하늘의 만상이 이루어지고, 주께서 호흡을 거두시면 피조물은 먼지로 돌아가지만 주의 영을 보내시면 다시 창조되고 지면이 새롭게 됩니다. 특히 시104편의 ‘먼지’, ‘영’, ‘창조’, ‘지면을 새롭게 함’은 창2:7의 흙, 생명의 숨, 사람의 형성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생명의 근원은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마지막으로 욥32:8과 33:4는 ‘숨’이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가리킨다는 것을 직접 뒷받침합니다. 전능자의 숨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며, 전능자의 숨이 사람에게 생명을 줍니다. 따라서 AC.94에서 ‘생명의 숨’을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풀이한 것은 창2:7 한 구절만의 고립된 해석이 아니라 말씀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숨-영-생명-깨달음-창조’의 연결 속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AC.97의 핵심은 단순히 ‘숨은 생명을 뜻한다’는 대응 관계 하나에 있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퍼셉션되었고, 말씀에서도 바람과 숨과 영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거듭남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창2:7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말씀 전체의 생명 언어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97 해설)

 

심화

1. 태고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퍼셉션했는가?

 

AC.97 심화 1, 태고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퍼셉션했는가?

AC.97 심화1. 태고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퍼셉션했는가? AC.97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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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 창2:8, ‘동쪽 에덴동산,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 (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동산’(garden)은 지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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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창2:7, ‘콧구멍과 향기와 퍼셉션,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불어넣으심’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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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고대에는, 그리고 말씀에서는 ‘콧구멍’(nostrils)으로 냄새로 말미암아 기분 좋은 모든 것을 이해했으며, 이것은 퍼셉션을 뜻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번제와 주님 및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는 것들로부터 여호와께서 ‘안식의 향기를 맡으셨다’(smelled an odor of rest)고 거듭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분 좋은 것이므로, ‘그가 그의 콧구멍을 통하여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he breathed through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주님을 ‘우리 콧구멍의 숨’(breath of the nostrils)이라 합니다(애4:20). As to its being said that “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case is this: In ancient times, and in the Word, by “nostrils” was understood whatever was grateful in consequence of its odor, which signifies perception. On this account it is repeatedly written of Jehovah, that he “smelled an odor of rest” from the burnt offerings, and from those things which represented him and his kingdom; and as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are most grateful to him, it is said that “he breathed through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Hence the anointed of Jehovah, that is, of the Lord, is called the “breath of the nostrils” (Lam. 4: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애4:20)

 

또한 주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심’(breathing on his disciples)으로 같은 것을 뜻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And the Lord himself signified the same by “breathing on his disciples,” as written in John: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20:22)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ye the Holy Spirit (John 20:22).

 

해설

AC.96은 AC.94의 ‘그의 콧구멍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라는 표현에서 왜 하필 ‘콧구멍’과 ‘숨’이 사용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AC.94에서는 ‘생명의 숨’이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시는 것을 뜻한다고 했고, AC.95에서는 신앙의 생명이 겉 사람을 준비하며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96은 그 생명이 왜 콧구멍을 통하여 불어넣어지는 것으로 묘사되는지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고대와 말씀에서 ‘콧구멍’이 냄새로 말미암아 기분 좋은 것과 연결되며, 이것이 퍼셉션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코 = 퍼셉션’이라는 상응 공식을 하나 더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냄새를 맡아 어떤 것을 기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습과 퍼셉션 사이의 관계를 스베덴보리가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천적 인간의 퍼셉션은 앞에서도 계속 등장했으며, 이제 그것이 ‘콧구멍’이라는 말씀의 표현과 연결됩니다.

 

이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표현이 ‘안식의 향기’입니다. 번제와 주님 및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는 것들에 관하여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맡으셨다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물질적인 연기나 냄새 자체를 즐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AC.96은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분 좋은 것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향기는 그것이 표상하는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과 연결됩니다.

 

이 때문에 ‘생명의 숨’도 콧구멍을 통하여 불어넣으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AC.94에서 그 생명이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했는데, AC.96에서는 바로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분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콧구멍, 향기, 퍼셉션, 사랑과 신앙, 생명의 숨은 서로 떨어진 주제들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을 이룹니다.

 

애4:20의 ‘우리 콧구멍의 숨’과 요20:22의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 하신 말씀은 이 의미를 더욱 확증하기 위해 인용됩니다. 특히 요20:22에서는 숨을 내쉬는 행위와 성령을 받는 일이 직접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2:7의 ‘생명의 숨’ 역시 단순한 육체적 호흡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전달이라는 속뜻을 갖는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렇게 AC.94-96은 하나의 연속된 설명을 이룹니다. 주님께서 겉 사람을 형성하시고,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시며, 그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미쳐 그를 살아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AC.96은 이 생명이 퍼셉션과 사랑과 신앙의 질서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콧구멍’, ‘향기’, ‘숨’이라는 말씀의 표현들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AC.96 해설)

 

심화

1. 왜 ‘콧구멍’은 퍼셉션을 뜻하는가?

 

AC.96 심화 1, 왜 ‘콧구멍’은 퍼셉션을 뜻하는가?

AC.96 심화1. 왜 ‘콧구멍’은 퍼셉션을 뜻하는가? AC.96에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와 말씀에서 ‘콧구멍’으로 냄새로 말미암아 기분 좋은 모든 것을 이해했으며, 이것이 퍼셉션을 뜻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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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7, 창2:7, '호흡과 숨이 생명을 뜻하는 이유, 태고교회의 퍼셉션'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생명을 ‘숨을 내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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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5, 창2:7, ‘신앙의 생명은 준비하고, 사랑의 생명은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을 다룹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그의 신앙 또는 이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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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

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을 다룹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그의 신앙 또는 이해의 생명을, 이 절에서는 그의 사랑 또는 의지의 생명을 다룹니다. 지금까지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와 싸워 왔으며, 그러므로 그때의 겉 사람은 ‘사람’(man)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적 인간이 되면서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며, 신앙의 생명과 사랑의 생명으로 그렇게 되어 겉 사람도 ‘사람’(man)이 됩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하지만, 그를 ‘사람’(man)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입니다. The life of the external man is here treated of—the life of his faith or understanding in the two former verses, and the life of his love or will in this verse. Hitherto the external man has been unwilling to yield to and serve the internal, being engaged in a continual combat with him, and therefore the external man was not then “man.” Now, however, being made celestial, the external man begins to obey and serve the internal, and it also becomes “man,” being so rendered by the life of faith and the life of love. The life of faith prepares him, but it is the life of love which causes him to be “man.”

 

해설

AC.95는 AC.94에서 말한 ‘겉 사람이 생명을 얻음’을 더욱 세밀하게 설명합니다. 그 생명에는 신앙 또는 이해의 생명과 사랑 또는 의지의 생명이라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전자를 다루었고, 이제 이 절에서는 후자를 다룬다고 합니다. 따라서 창2의 이 부분은 단순히 겉 사람이 살아났다는 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어떤 질서로 생명을 얻는지를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 겉 사람이 ‘사람’이 아니었던 이유도 다시 분명해집니다. 겉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고 계속 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AC.91에서 처음 분명하게 설명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싸움이 여기서 ‘사람’이라는 표현과 직접 연결됩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올바른 질서 안에 있지 않을 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아직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서 관계가 달라집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며, 신앙의 생명과 사랑의 생명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따라서 AC.94의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겉 사람까지 이러한 생명 안에 들어왔다는 뜻이었습니다. 거듭남은 속 사람만 변화시키고 겉 사람을 남겨 두는 일이 아니라, 마침내 겉 사람까지 속 사람과 질서를 이루어 살아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AC.95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하나 더 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하지만,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하는 실제적이고 필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완성에서는 신앙이 독립적으로 주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하나를 이루며 사랑이 주된 것이 됩니다. 이것은 AC.83에서 이미 설명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는 질서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따라서 AC.95의 핵심은 신앙과 사랑 가운데 하나를 버리고 하나만 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생명이 준비하고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는 질서에 있습니다. 이해에 속한 것이 먼저 준비되고, 마침내 의지와 사랑에 속한 생명이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될 때 겉 사람도 속 사람과 함께 살아 있는 질서 안에 들어옵니다.

 

이렇게 AC.94와 AC.95를 함께 읽으면 ‘생명의 숨’이 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했는지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종교적 지식을 더해 주는 생명이 아니라 사람의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을 새롭게 하고, 마침내 그의 겉 사람까지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게 하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완성에서 주된 것은 사랑입니다. (AC.95 해설)

 

심화

1. 왜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할 뿐이고,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가?

 

AC.95 심화 1, 왜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할 뿐이고,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AC.95 심화1. 왜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할 뿐이고,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가? AC.95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하지만, 그를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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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창2:7, ‘콧구멍과 향기와 퍼셉션,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불어넣으심’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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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4, 창2:7,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 -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다’ (AC.94-9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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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창2:7)

 

AC.94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form man, dust from the ground)는 것은 그의 겉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5절에서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no man to till the ground)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breathe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는 것은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셨다는 뜻이며,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man became a living soul)는 것은 그의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form man, dust from the ground” is to form his external man, which before was not man; for it is said (verse 5) 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To “breathe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is to give him the life of faith and love; and by “man became a living soul” is signified that his external man also was made alive.

 

해설

AC.94는 창2:7의 세 표현을 차례로 해석하면서 천적 인간의 형성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첫째는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둘째는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 셋째는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을 각각 겉 사람의 형성,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받음, 그리고 마침내 겉 사람까지 살아 있게 됨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히 육체를 만들고 거기에 생물학적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의 속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의 겉 사람에까지 이르는 천적 인간의 형성을 묘사합니다.

 

먼저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겉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지면’은 앞의 AC.90과 직접 연결됩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있는 동안에는 그의 겉 사람이 ‘땅’이라 불리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지면’ 또는 ‘들’이라 불린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이 형성된다는 것은 이미 천적 인간의 문맥 안에서 겉 사람이 새롭게 형성되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앞 AC.89에서도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 곧 ‘하늘’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으므로, 이것은 겉 사람이 자기 힘으로 새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질서에 따라 겉 사람이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겉 사람이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상당히 강하게 말합니다. 그 근거가 창2:5의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전에 육체를 가진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속뜻에서 아직 겉 사람이 천적 질서 안에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참된 의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인간을 넘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 있는 인간이라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도록 형성되어 갈 때 비로소 그것도 ‘사람’이 됩니다.

 

다음으로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의 AC.76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AC.76에서도 천적 인간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고 했는데, AC.94는 이제 그 생명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생명의 숨’은 단순히 호흡이나 육체적 생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입니다. 앞서 AC.83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면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된다고 했던 흐름도 여기와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도’가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되지만 그 생명이 속 사람에만 머물러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AC.91에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며,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마치 비와 안개처럼 겉 사람을 적신다고 했습니다. AC.92에서는 그것을 ‘내적인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94에서는 그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이르러 겉 사람 ‘또한’ 살아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내려와 전체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살아 있음’도 자연적 생존과 구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살아 있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며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의미에서는 아직 참된 생명을 받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참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AC.94에서는 그것을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 생명이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까지 흘러들 때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삶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을 표현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AC.94는 AC.89 이후의 흐름을 매우 선명하게 완성합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되고(AC.89),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이 되어 속 사람의 질서 아래 놓이며(AC.90),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AC.91),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을 받아 선과 진리를 산출합니다(AC.92-93). 그리고 이제 ‘생명의 숨’, 곧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이르러 그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겉 사람까지 형성하시고 살리시는 거듭남의 완성을 묘사합니다. (AC.94)  

 

심화

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 심화 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 심화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에는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것은 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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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5, 창2:7, ‘신앙의 생명은 준비하고, 사랑의 생명은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을 다룹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그의 신앙 또는 이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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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창2:5-6, ‘평화의 언약과 복된 비 - 악과 거짓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천적 인간’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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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93

이와 같이 평화의 평온을 부여받고, 비로 새롭게 되며, 악하고 거짓된 것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주님께서는 에스겔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thus gifted with the tranquility of peace—refreshed by the rain—and delivered from the slavery of what is evil and false,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in Ezekiel:

 

25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31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겔34:25-27, 31) I will make with them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beast to cease out of the land, and they shall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and sleep in the woods; and I will make them and the places round about my hill a blessing; and I will cause the rain to come down in his season; rains of blessing shall they be. And the tree of the field shall yield its fruit, and the earth shall yield its increase, and they shall be upon their ground in confidence, and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when I have broken the reins of their yoke, and delivered them out of the hand of those that make them to serve them; and ye my flock, the flock of my pasture, ye are a man, and I am your God (Ezek. 34:25–27, 31).

 

그리고 이것이 ‘셋째 날’(third day)에 이루어지며, ‘셋째 날’은 말씀에서 ‘일곱째’(seventh)와 같은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호세아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And that this is effected on the “third day,” which in the Word signifies the same as the “seventh,” is thus declared in Hosea: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6:2, 3) After two days will he vivify us; 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 and we shall live before him and we shall know, and shall follow on to know Jehovah: his going forth is prepared as the dawn, and he shall come unto us as the rain, as the late rain watering the earth (Hos. 6:2–3).

 

그리고 이 상태가 ‘들의 성장’(growth of the field)에 비유된다는 것을 고대교회에 관하여 말씀하는 에스겔에서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And that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growth of the field” is declared by Ezekiel, when speaking of the ancient church: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겔16:7) I have caused thee to multiply as the growth of the field, and thou hast increased and hast grown up, and hast come to excellent ornaments (Ezek. 16:7).

 

또한 다음과 같은 것에도 비유됩니다. And it is also compared to: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사60:21) A shoot of the Lord’s planting, and a work of the hands of Jehovah God (Isa. 60:21).

 

해설

AC.93은 AC.90-92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여러 선지서의 말씀으로 확증합니다. 앞에서는 싸움이 그치면서 평화의 평온이 오고, 그 평온이 ‘비’와 ‘안개’로 나타나며,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생명이 흘러들어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에스겔, 호세아, 이사야의 말씀 안에서 평화와 비, 땅과 들의 성장, 생명과 주님의 손으로 하신 일이 서로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먼저 겔34의 ‘화평의 언약’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매우 풍성하게 보여 줍니다. 악한 짐승이 그치고, 사람이 평안히 거하며, 복된 비가 내리고,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냅니다. 또한 멍에가 꺾이고 종으로 삼던 자의 손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이것은 AC.93의 첫 문장이 말한 ‘악하고 거짓된 것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상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평화는 단순히 위험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열매를 맺는 상태입니다.

 

특히 ‘복된 소낙비’는 앞의 AC.90-92와 직접 연결됩니다. AC.91에서는 ‘비’와 ‘안개’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는 평화의 평온이라고 했고, AC.92에서는 그것이 단순한 싸움의 그침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에서 비가 내리자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고 땅이 소산을 내는 것은, 평화의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쳐 거기에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생명을 얻어 산출되는 앞의 설명을 성경 본문으로 보여 줍니다.

 

호6:2-3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상태가 ‘셋째 날’에 이루어지며,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셋째 날’이 ‘일곱째’와 같은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앞에서 일곱째 날은 싸움이 그치고 주님께서 쉬시는 천적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에서도 셋째 날에 사람이 살아나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살며, 주님의 나타나심은 새벽과 같고 비와 같이 임합니다. 따라서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은 숫자 자체가 같다는 뜻이 아니라, 이 문맥에서 생명과 완성 및 새로운 상태에 들어감을 함께 가리키는 말씀의 표현으로 제시됩니다.

 

호세아의 ‘새벽’은 AC.86에서 보류했던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안식일의 저녁’이라 하고, 천적 인간은 곧 설명할 ‘아침’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호세아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을 살리시고 일으키시는 것과 함께 그분의 나타나심이 ‘새벽빛’에 비유되고, 이어서 땅을 적시는 비가 나옵니다. 따라서 ‘아침’은 밤이라는 시간대가 끝나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나타나고 평화의 비가 내려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것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93은 ‘아침’의 상응을 독립적으로 정의하는 번호는 아니므로 그 이상의 세부 의미를 여기서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들의 성장’과 ‘여호와께서 심으신 가지’, ‘여호와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이라는 표현들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앞의 관목과 초목이 천적 인간의 겉 사람에서 산출되는 것이라는 설명과 연결되는 동시에, AC.88의 ‘새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의 일’이라는 원리도 다시 확인합니다. 사람이 생명을 얻고 자라며 열매 맺는 모든 과정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93에 인용된 여러 성경 구절은 서로 흩어진 증거 구절들이 아닙니다. ‘평화의 언약’, ‘복된 비’, ‘땅의 소산’, ‘셋째 날’, ‘새벽’, ‘들의 성장’, ‘주님의 심으심과 손으로 하신 일’이 모두 앞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줍니다. 싸움과 종살이가 그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이 겉 사람을 적시며, 그 생명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자라나는 상태가 바로 여기서 묘사되는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AC.93 해설)  

 

심화

1. 왜 ‘셋째 날’은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하는가?

 

AC.93 심화 1, 왜 ‘셋째 날’은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하는가?

AC.93 심화1. 왜 ‘셋째 날’은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하는가? AC.93에서 스베덴보리는 호6:2-3을 인용하면서 천적 인간의 이 상태가 ‘셋째 날’에 이루어지며, ‘셋째 날’은 말씀에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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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4, 창2:7, ‘흙으로 겉 사람을 형성하시고, 생명의 숨으로 그도 살아나게 하심’ (AC.94-9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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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창2:5-6, '평화는 싸움의 그침만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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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92

싸움이 그칠 때, 곧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은 불안이 그칠 때 겉 사람이 누리는 평화의 평온이 어떠한지는 평화의 상태를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이 상태는 너무나 즐거워서 즐거움에 관한 모든 관념을 뛰어넘습니다. 그것은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만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때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납니다. The nature of the tranquility of peace of the external man, on the cessation of combat, or of the unrest caused by cupidities and falsities, can be known only to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a state of peace. This state is so delightful that it surpasses every idea of delight: it is not only a cessation of combat, but is life proceeding from interior peace, and affecting the external man in such a manner as cannot be described; the truths of faith, and the goods of love, which derive their life from the delight of peace, are then born.

 

해설

AC.92는 앞에서 말한 ‘평화의 평온’이 단순히 싸움이 끝난 뒤의 고요함이 아님을 밝힙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아 싸움과 불안이 있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서 그 싸움이 그칩니다. 그러나 싸움이 없어졌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직 평화의 본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평온이 어떠한지는 실제로 평화의 상태를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평화는 너무나 즐거워서 즐거움에 관한 모든 관념을 뛰어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매우 기분 좋은 감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그 평화가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평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생명이 흘러나오는 상태입니다. 그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치는데, 그 방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설명은 AC.91의 ‘비’와 ‘안개’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거기서는 평화의 평온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단순한 편안함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은 단순히 싸움을 멈춘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새로운 것을 산출하게 됩니다.

 

그 결과 태어나는 것이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진리와 선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설명입니다. 진리와 선이 단지 사람의 기억 속에 있거나 지식으로 존재하는 것과, 실제 생명을 가진 상태는 같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치고, 그 평화의 즐거움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생명을 얻어 태어납니다.

 

따라서 AC.92의 평화는 싸움이 사라진 빈자리가 아닙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은 불안이 그친 자리에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 흘러들고, 그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쳐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을 살아 있게 합니다. AC.90의 ‘평화의 평온’, AC.91의 ‘비와 안개’, 그리고 AC.92의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은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천적 인간의 안식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생명으로 충만한 상태인지를 보여 줍니다. (AC.92 해설)

 

심화

1. 평화가 어떻게 ‘생명’일 수 있는가?

 

AC.92 심화 1, 평화가 어떻게 ‘생명’일 수 있는가?

AC.92 심화1. 평화가 어떻게 ‘생명’일 수 있는가? AC.92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의 평화에 관하여 매우 독특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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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창2:5-6, ‘평화의 언약과 복된 비, 셋째 날에 일으켜지는 천적 인간’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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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1, 창2:5-6,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길 때 싸움이 그친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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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91

그러나 사람이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 그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이 말씀들이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지는 도저히 퍼셉션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이 깊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며, 그러므로 싸움이 그치고 평온이 뒤따릅니다. (AC.87 참조) 이 평온을 ‘비’(rain)와 ‘안개’(mist)가 뜻합니다. 그것은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평온, 곧 평화에서 나오는 평온이 ‘들의 관목’(shrub of the field)과 ‘들의 초목’(herb of the field)이라 하는 것들을 산출합니다. 이것들은 구체적으로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rationalia et scientifica]입니다. But what these things involve cannot possibly be perceived unless it is known what man’s state is while from being spiritual he is becoming celestial, for they are deeply hidden. While he is spiritual, the external man is not yet willing to yield obedience to and serve the internal, and therefore there is a combat;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n the external man begins to obey and serve the internal, and therefore the combat ceases, and tranquility ensues (see n. 87). This tranquility is signified by “rain” and “mist,” for it is like a vapor with which the external man is watered and bedewed from the internal; and it is this tranquility, the offspring of peace, which produces what are called the “shrub of the field,” and the “herb of the field,” which, specifically, are things of the rational mind and of the memory [rationalia et scientifica] from a celestial spiritual origin.

 

해설

AC.91은 앞에서 계속 말해 온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그 결과 싸움이 그치며 평온이 뒤따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안식은 단순히 싸움이 없어졌다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간 상태입니다.

 

이 설명은 AC.87에서 말한 싸움의 종결을 인간 내부의 질서라는 측면에서 보충합니다. AC.87에서는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옴으로써 싸움이 그친다고 했습니다. AC.91에서는 같은 변화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저항하는 동안에는 싸움이 있지만,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면 싸움이 그치고 평온이 뒤따릅니다. 두 설명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천적 인간의 안식을 보여 줍니다.

 

이제 AC.90에서 ‘비’와 ‘안개’를 ‘싸움이 그칠 때의 평화의 평온’이라 한 이유도 밝혀집니다. 그 평온은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와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움직임의 방향입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은 AC.89에서 말했듯이 속 사람에서 시작하며, 여기서도 평온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으로 흘러나와 겉 사람을 적십니다. 따라서 ‘비’와 ‘안개’는 싸움이 끝난 뒤 단순히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으로 평화가 미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 평온은 또한 열매 없이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을 산출한다고 하며, 이것들을 구체적으로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라고 설명합니다. AC.90에서는 관목과 초목을 일반적으로 겉 사람이 산출하는 모든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에게도 이성과 기억지식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며, 이제 그것들이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게 됩니다.

 

이 점은 AC.75에서 개요로 제시했던 내용을 회수합니다. 거기서는 천적 인간의 기억지식과 이성이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의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91에서 왜 안개가 그것들을 적시는지, 그리고 그 관목과 초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이성과 기억지식 자체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원과 질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바로 서면서 겉 사람에 속한 이성과 기억지식도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 가운데 새로운 상태에 놓입니다.

 

그러므로 AC.91은 천적 인간의 안식과 평온을 인간 내부의 질서와 연결하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아직 저항하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므로 싸움이 그칩니다. 그리고 그때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시며, 거기에서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산출됩니다. 이것이 창2:5-6의 ‘비’, ‘안개’, ‘들의 관목’, ‘들의 초목’ 안에 깊이 감추어진 내용입니다. (AC.91 해설)  

 

심화

1.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AC.91 심화 1,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AC.91 심화1.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AC.91은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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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창2:5-6, '평화는 싸움의 그침만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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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0, 창2:5-6, ‘땅에서 지면과 들로, 싸움이 그친 뒤의 평화의 평온’ (AC.90-93)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there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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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창2:5, 6)

 

AC.90

‘들의 관목’(shrub of the field)과 ‘들의 초목’(herb of the field)은 일반적으로 그의 겉 사람이 산출하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겉 사람은 그가 영적 인간으로 머물러 있을 때에는 ‘땅’(earth)이라 하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지면’(ground), 그리고 ‘들’(field)이라고도 합니다. 곧이어 ‘안개’(mist)라 하는 ‘비’(rain)는 싸움이 그칠 때의 평화의 평온입니다. By the “shrub of the field” and the “herb of the field” are meant in general all that his external man produces. The external man is called “earth” while he remains spiritual, but “ground” and also “field” when he becomes celestial. “Rain,” which is soon after called “mist,” is the tranquility of peace when combat ceases.

 

해설

AC.90은 앞 번호에서 제기된 ‘땅’, ‘지면’, ‘들’의 차이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이 셋은 모두 겉 사람과 관계되지만 아무 때나 서로 바꾸어 쓰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이 아직 영적 인간으로 머물러 있을 때 그의 겉 사람을 ‘땅’이라 하고, 천적 인간이 되면 그 겉 사람을 ‘지면’, 또한 ‘들’이라 합니다. 따라서 창2에서 ‘지면’과 ‘들’이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기 시작했다는 AC.89의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이 점은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해서 겉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여전히 겉 사람이 있지만 그 상태가 달라집니다. AC.89에서는 영적 인간의 개혁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는 반면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천적 인간의 겉 사람에서 산출되는 것들을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라 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들은 자연계의 식물에 관한 묘사에 머무르지 않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 산출하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다만 AC.90은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을 아직 서로 구별하여 각각 무엇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 표현을 함께 묶어 ‘일반적으로 그의 겉 사람이 산출하는 모든 것’이라고만 합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관목에는 이것, 초목에는 저것이라는 식으로 별개의 의미를 미리 배정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해석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후에 그 차이를 직접 밝히는지를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앞의 ‘안식’에 관한 설명과 창2:5-6을 연결합니다. 곧이어 ‘안개’라 하는 ‘비’는 ‘싸움이 그칠 때의 평화의 평온’입니다. AC.84-88에서 천적 인간이 될 때 싸움이 그치고 주님의 안식이 시작된다고 설명했는데, 이제 그 상태가 ‘비’와 ‘안개’라는 말씀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마음이 조용한 심리 상태가 아니라, 앞서 계속 설명해 온 싸움의 종결과 연결된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렇게 AC.90은 창2의 새로운 어휘들이 우연히 바뀐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은 ‘땅’이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이며, 그 겉 사람이 산출하는 모든 것은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싸움이 그친 뒤의 ‘평화의 평온’은 ‘비’, 곧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안개’로 나타납니다. AC.89에서 시작된 천적 인간의 형성이 이제 창2의 세부 표현 하나하나를 통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AC.90 해설)  

 

심화

1. 왜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은 ‘땅’이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인가?

 

AC.90 심화 1, 왜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은 ‘땅’이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인

AC.90 심화1. 왜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은 ‘땅’이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인가? AC.90에서 스베덴보리는 같은 겉 사람을 두고도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머물러 있을 때에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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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1, 창2:5-6,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길 때 싸움이 그친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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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9, 창2:4, ‘하늘과 땅의 내력 -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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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창2:4)

 

AC.89

‘하늘과 땅의 내력’(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은 천적 인간의 형성을 뜻합니다. 여기서 그의 형성을 다룬다는 것은 뒤이어 나오는 모든 세부 사항에서 매우 분명합니다. 아직 초목이 자라지 않았고, 지면을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형성하셨고, 그 후에 모든 짐승과 하늘의 새를 만드셨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의 형성은 앞 장에서 이미 다루었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여기서는 다른 사람을 다룬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처음으로 주님을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이라 한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을 다루는 구절들에서는 주님을 단지 ‘하나님’(God)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이제는 ‘지면’(ground)과 ‘들’(field)을 말하지만, 앞에서는 오직 ‘땅’(earth)만을 말하였습니다. 이 절에서는 또한 ‘하늘’(heaven)을 먼저 ‘땅’(earth) 앞에 말하고, 그 뒤에는 ‘땅’(earth)을 ‘하늘’(heaven) 앞에 말합니다. 그 이유는 ‘땅’(earth)은 겉 사람을, ‘하늘’(heaven)은 속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의 경우에는 개혁이 ‘땅’(earth), 곧 겉 사람에서 시작하지만, 여기서 다루는 천적 인간의 경우에는 속 사람, 곧 ‘하늘’(heaven)에서 시작합니다.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are the formations of the celestial man. That his formation is here treated of is very evident from all the particulars which follow, as that no herb was as yet growing; 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s well as that Jehovah God formed man, and afterwards, that he made every beast and bird of the heavens, notwithstanding that the formation of these had been treated of in the foregoing chapter; from all which it is manifest that another man is here treated of. This however is still more evident from the fact that now for the first time the Lord is called “Jehovah God,” whereas in the preceding passages, which treat of the spiritual man, he is called simply “God”; and, further, that now “ground” and “field” are mentioned, while in the preceding passages only “earth” is mentioned. In this verse also “heaven” is first mentioned before “earth,” and afterwards “earth” before “heaven”; the reason of which is that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 and “heaven” the internal, and in the spiritual man reformation begins from “earth,” that is, from the external man, while in the celestial man, who is here treated of, it begins from the internal man, or from “heaven.”

 

해설

AC.89는 창2:4부터 왜 다시 사람과 땅과 동식물의 형성을 말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창1에서 이미 이러한 것들의 창조를 다루었는데도 창2에서는 아직 초목이 자라지 않았고 지면을 경작할 사람도 없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형성하시고 다시 짐승과 새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영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었고, 이제는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늘과 땅의 내력’도 천적 인간의 형성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이라는 표현은 역사적으로 또 하나의 별개의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상태가 달라졌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앞에서 ‘여섯째 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한다고 했고, 이제 창2:4 이하에서는 그 천적 인간의 형성을 더욱 자세히 다룹니다. 따라서 창1과 창2의 차이는 동일한 창조 이야기를 단순히 두 번 되풀이한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 서로 다른 상태의 인간을 다룬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전환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증거로 하나님의 호칭에 주목합니다. 영적 인간을 다루던 앞부분에서는 주님을 ‘하나님’이라 하였지만, 이제 천적 인간을 다루면서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라 합니다. AC.89은 이 호칭의 변화가 우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지만, 여기서는 아직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유를 미리 고정하여 설명하기보다, 우선 이 호칭의 변화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주제가 전환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지라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습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땅’뿐 아니라 이제 ‘지면’과 ‘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가 직접 지적하는 본문의 변화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들을 모두 같은 말처럼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AC.89은 여기서 ‘지면’과 ‘들’ 각각의 속뜻을 아직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 의미를 앞질러 정하지 않고 뒤의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절의 어순도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하늘과 땅’이라 하여 하늘이 먼저 나오고, 뒤에는 ‘땅과 하늘’이라 하여 순서가 바뀝니다. 스베덴보리는 ‘땅’이 겉 사람을, ‘하늘’이 속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하면서 이 순서의 변화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형성 질서의 차이를 보여 준다고 합니다. 영적 인간의 개혁은 ‘땅’, 곧 겉 사람에서 시작하지만, 천적 인간의 형성은 ‘하늘’, 곧 속 사람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89는 창1에서 창2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이미 다룬 사람과 피조물의 형성이 다시 등장하는 것,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호칭이 달라지는 것, ‘땅’뿐 아니라 ‘지면’과 ‘들’이 등장하는 것, 그리고 ‘하늘과 땅’의 순서가 달라지는 것 모두가 이제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영적 인간의 개혁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고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한다는 마지막 설명은, 두 상태의 차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AC.89 해설)

 

심화

1. 왜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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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9 심화1. 왜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뀌는가? AC.89에서 스베덴보리는 창2부터 나타나는 한 가지 중요한 변화를 지적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을 다루는 구절들에서는 주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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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0, 창2:5-6, ‘땅에서 지면과 들로, 싸움이 그친 뒤의 평화의 평온’ (AC.9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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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8, 창2:2-3, ‘새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의 일이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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