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9
‘가인’(Cain)이라불린이단의경우도마찬가지였습니다.이이단은시간이흐르면서황폐해졌습니다.사랑을인정하기는했지만신앙을으뜸으로삼아사랑보다앞세웠기때문입니다.이이단에서파생된이단들은점차그것에서벗어났으며,가인으로부터순서상여섯번째인라멕은마침내신앙마저완전히부인했습니다.이때가되자새로운빛,곧아침이밝아왔고,여기서‘아다와씰라’(AdahandZillah)라불리는새교회가이루어졌습니다.이들은‘라멕의아내들’(wivesofLamech)이라불립니다.라멕에게는아무런신앙도없었지만이들이그의아내들이라불리는것은,역시아무런신앙도없었던유대인들의속교회와겉교회가말씀에서‘아내들’(wives)이라불리는것과같습니다.이들은야곱의두아내인레아와라헬로표상되는데,레아는겉교회를,라헬은속교회를표상합니다.이교회들은둘처럼보이지만실제로는하나일뿐입니다.속교회에서분리된겉교회,곧표상적교회는우상숭배적인것또는죽은것과같지만,속교회와겉교회가함께있을때하나의교회를,실로동일한하나의교회를이루기때문입니다.여기서아다와씰라도그러합니다.그러나야곱과그의후손들은라멕과마찬가지로아무런신앙도없었으므로,교회가그들에게머물수없었고불신앙이아니라무지가운데살고있던이방인들에게옮겨졌습니다.교회가황폐해졌으면서도자기들가운데진리들을가지고있는사람들에게머무는일은드물며,있다하더라도거의없습니다.오히려진리들에관하여전혀알지못하는사람들에게옮겨집니다.이들은앞의사람들보다신앙을훨씬더쉽게받아들이기때문입니다. The case was the same with the heresy called “Cain,” which in process of time was vastated, for although it acknowledged love, yet it made faith the chief and set it before love, and the heresies derived from this one gradually wandered from it, and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altogether denied even faith. When this time arrived, a new light, or morning, shone forth, and a new church was made which is here named “AdahandZillah,” who are called the “wivesofLamech.” They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although he possessed no faith, just as the internal and external church of the Jews, who also had no faith, are also in the Word called “wives,” being represented by Leah and Rachel, the two wives of Jacob—Leah representing the external church and Rachel the internal. These churches, although they appear like two, are yet only one; for the external or representative, separate from the internal, is but as something idolatrous, or dead, whereas the internal together with the external constitute a church, and even one and the same church, as Adah and Zillah do here. As however Jacob and his posterity, like Lamech, had no faith, the church could not remain with them, but was transferred to the gentiles, who lived not in infidelity but in ignorance. The church rarely, if ever, remains with those who when vastated have truths among them[apud se]but is transferred to those who know nothing at all of truths, for these embrace the faith much more easily than the former.
해설
AC.409는 가인의 계보에서 일어난 황폐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설명하면서, 교회의 속과 겉이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05에서는 라멕이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고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가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408에서는 이전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두 설명을 연결하여, 가인에게서 시작된 분리가 라멕에게서 신앙의 소멸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교회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가인이라 불린 이단이 처음부터 사랑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사랑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신앙을 으뜸으로 삼아 사랑보다 앞세웠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분리였습니다. 참된 질서에서는 신앙이 사랑에 속하고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하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은 그 질서를 뒤집어 신앙이 사랑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후 그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은 점차 최초의 상태에서 더 멀어졌고, 마침내 여섯 번째인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완전히 부인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처음 상태와 라멕의 마지막 상태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인은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웠습니다. 반면 라멕은 신앙마저 부인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는 처음부터 모든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데서 시작하여 그 분리가 점차 진행된 끝에 신앙 자체도 소멸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409는 이러한 진행을 ‘점차그것에서벗어났다’는 말로 압축합니다.
바로 그때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왔고 새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새 교회를 ‘아다와씰라’라고 부릅니다. AC.405에서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며,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 구별을 교회의 속과 겉이라는 관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새 교회는 내적인 것만을 가진 교회도 아니고 외적인 것만을 가진 교회도 아닙니다. 속과 겉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라멕에게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왜 새 교회를 나타내는 아다와 씰라가 하필 ‘라멕의아내들’이라고 불리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에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그의 해석에서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도 참된 신앙이 없었지만, 그들과 관련된 교회의 속과 겉은 말씀에서 아내들로 표상됩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가 라멕의 아내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만으로 라멕 자신에게 참된 신앙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교에서 레아는 겉 교회를, 라헬은 속 교회를 표상합니다. 겉 교회는 예배의 형식과 의식, 말씀의 외적인 표현과 생활의 자연적인 차원에 관계되고, 속 교회는 그 안에 있어야 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살아 있는 신앙에 관계됩니다. 물론 이번 번호가 레아와 라헬의 모든 상응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두 아내의 표상을 통하여 교회의 속과 겉이 구별되면서도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원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원리를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속 교회와 겉 교회는 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속과 겉은 서로 독립하여 따로 존재하는 두 교회가 아닙니다. 속 교회가 겉 교회에 생명을 주고, 겉 교회는 속 교회가 자연적인 삶 가운데 나타나는 형식이 됩니다. 따라서 둘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앞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설명할 때 확인한 원리와도 통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구별된다고 해서 서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듯, 교회의 속과 겉도 구별되지만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교회에서 분리된 겉 교회, 곧 표상적 교회는 ‘우상숭배적인것또는죽은것과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예배 형식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 형식이 속에 있는 사랑과 신앙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예배와 의식이 아무리 정교하고 말씀의 외적인 형식을 충실히 보존하더라도,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교회의 외적 표현이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속 교회와 겉 교회가 함께 있을 때에는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를 이룹니다.
이것이 아다와 씰라에게도 적용됩니다.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고,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서로 경쟁하는 두 교회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은 새 교회의 서로 다른 차원을 나타내며, 그 차원들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룹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는 어느 한쪽만을 참된 교회로 여기거나 다른 한쪽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새 교회는 내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함께 있어야 온전한 하나의 교회가 됩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왜 교회가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 머물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 옮겨졌는지를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야곱과 그의 후손들은 라멕과 마찬가지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교회가 그들에게 계속 머물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교회가 옮겨졌다는 것은 어떤 민족의 혈통이나 문화가 본질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적 상태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불신앙’과 ‘무지’의 구별에서 드러납니다. 이번 번호에서 불신앙은 단순히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미 진리들이 자기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반면 무지는 진리 자체를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미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황폐해진 사람들보다 신앙을 훨씬 더 쉽게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진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이미 진리를 알고도 거부하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앞의 AC.408에서 설명한 모독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고 믿으면서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빛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한 방식으로 거룩한 것을 모독한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길이 열려 있습니다. AC.409에서 교회가 무지 가운데 있던 이방인들에게 옮겨졌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영적 질서와 관련됩니다.
다만 이 설명을 오늘날 특정 종교나 민족에 속한 사람들의 실제 신앙 상태를 일괄적으로 판정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의 신학적 해석 안에서 교회의 황폐와 이전을 설명하는 원리입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인정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외적인 소속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진리를 많이 배웠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제 AC.405-409의 흐름을 함께 보면 라멕과 두 아내의 의미가 한층 선명해집니다. 가인에게서는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는 분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는 여러 이단을 낳으며 진행되었고,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부인되는 황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때 새로운 아침이 밝아 왔고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새 교회는 천적이고 영적인 내적 차원과 자연적인 외적 차원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결국 AC.409는 두 가지 질서를 함께 보여 줍니다. 하나는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는 분리가 계속될 때 결국 신앙마저 소멸할 수 있다는 황폐의 질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전 교회의 황폐 이후에도 새로운 빛이 비치고, 속과 겉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새 교회가 일어난다는 회복의 질서입니다. 이때 참된 교회의 본질은 외적인 형식만을 보존하는 데 있지 않고, 그 형식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살아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 내적·외적 질서가 함께 이루는 하나의 새 교회를 보여 줍니다. (AC.409해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더이상아무런신앙도남아있지않을만큼황폐해졌을때,그때비로소,그이전이아니라,교회는새롭게시작됩니다.곧새로운빛이비치기시작하는데,이것을말씀에서는‘아침’(morning)이라고부릅니다.교회가황폐해지기전에는새로운빛,곧‘아침’(morning)이밝아오지않는이유는신앙과체어리티에속한것들이모독적인것들과뒤섞여있기때문입니다.이러한상태가지속되는동안에는빛이나체어리티에속한어떤것도그안에스며들게할수없습니다.‘가라지’(tares)가모든‘좋은씨’(goodseed)를파괴하기때문입니다.그러나신앙이더이상남아있지않으면신앙을더이상모독할수도없습니다.사람들이자기들에게전해지는것을더이상믿지않기때문입니다.앞에서살펴본것처럼,인정하고믿지는않으면서단지알고있기만하는사람들은모독할수없습니다.오늘날의유대인들이그러합니다.그들은기독교인들가운데살기때문에기독교인들이주님을자신들이기다려왔고지금도계속기다리는메시아로인정한다는사실을알고있을것입니다.그러나그들은이것을인정하거나믿지않으므로모독할수없습니다.주님에관하여들은무슬림들(Mohammedans)과이방인들(gentiles)의경우도마찬가지입니다.유대교회가아무것도인정하거나믿지않게될때까지주님께서세상에오시지않은것도바로이러한이유때문입니다. When a church has been so vastated that there is no longer any faith, then and not before, it begins anew, that is, new light shines forth,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morning.” The reason why the new light or “morning” does not shine forth until the church is vastated, is that the things of faith and of charity have been commingled with things profane; and so long as they remain in this state it is impossible for anything of light or charity to be insinuated, since the “tares” destroy all the “goodseed.” But when there is no faith, faith can no longer be profaned, because men no longer believe what is declared unto them; and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but only know, cannot profane, as was observed above. This is the case with the Jews at the present day, who in consequence of living among Christians must be aware that the Lord is acknowledged by Christians to be the messiah whom they themselves have expected, and still continue to expect, but yet they cannot profane this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it. And it is the same with the Mohammedans and gentiles who have heard about the Lord. It was for this reason that the Lord did not come into the world until the Jewish church acknowledged and believed nothing.
해설
AC.408은 교회의 황폐와 새로운 시작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07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마침내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르지만, 그 가운데서도 교회의 어떤 핵심은 보존된다고 했습니다. 태고교회의 남은 부분이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었으며, 그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른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제 AC.408은 왜 이전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는지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더 이상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비로소 새롭게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하는 이 상태를 말씀의 ‘아침’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아침은 단순히 어둠이 끝난 다음의 시간대를 뜻하지 않습니다. 이전 교회의 황폐 이후에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아침은 교회의 영적 상태가 새로워지는 일과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전 교회가 완전히 황폐해지기 전에는 새로운 아침이 밝아 올 수 없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거짓된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고 믿으면서도 그것을 모독적인 것과 결합시키는 상태가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새로운 빛이나 체어리티를 그 안에 스며들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가라지’가 모든 ‘좋은씨’를 파괴한다고 말합니다. 가라지와 좋은 씨는 서로 다른 성격의 것들이 한곳에 뒤섞여 있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번 문맥에서 좋은 씨는 새롭게 받아들여질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관련되며, 가라지는 그것들을 파괴하는 모독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핵심은 교회 안에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인 상태에서는 새로운 영적 생명이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에는 그것을 더 이상 모독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더 이상 인정하거나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별은 ‘아는것’과 ‘인정하고믿는것’의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진리에 관하여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진리를 자기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알고 있을 뿐 인정하거나 믿지 않는 경우에는 이번 문맥에서 말하는 모독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모독은 단순한 무지나 불신앙과 구별됩니다. 거룩한 것에 관한 정보를 접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독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논지는 거룩한 것을 실제로 인정하고 믿는 상태와 그것을 모독적인 것에 결합시키는 상태 사이의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가 황폐해져 더 이상 신앙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상태도 지속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에 기독교인들 가운데 살던 유대인들을 예로 듭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신들은 그것을 인정하거나 믿지 않으므로 그 신앙을 모독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에 관하여 들은 무슬림들과 이방인들도 같은 원리의 예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려는 것은 특정 집단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어떤 진리를 외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인정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 대목의 ‘오늘날’은 AC가 집필되던 스베덴보리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또한 그가 유대인과 무슬림과 이방인을 예로 든 것은 그의 신학적 관점에서 모독의 조건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오늘날 해당 종교에 속한 모든 사람의 실제 신앙 상태에 대한 일반적인 사실 판단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사람마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인정하며, 실제로 무엇을 믿는지는 외적인 종교적 소속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유대교회가 아무것도 인정하거나 믿지 않게 될 때까지 세상에 오시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강림 시기를 교회의 황폐와 모독의 문제에 연결하는 그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전 교회가 거룩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새로운 빛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그 상태가 끝난 뒤에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당시 모든 유대인이 아무런 종교적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역사적 진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주님에 관한 참된 신앙이라는 자신의 신학적 기준으로 유대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AC.407과 AC.408을 함께 읽으면 교회의 황폐와 보존, 그리고 새로운 시작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이전 교회는 참된 신앙에서 떠나 황폐해집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 어떤 핵심이 남아 보존됩니다. 그리고 이전 교회의 황폐가 끝에 이르러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열릴 때,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아침’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황폐를 그 자체로 좋은 일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하는 것은 교회의 비극적인 상태입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상태에서도 교회의 남은 부분을 보존하시며,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인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때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십니다. 따라서 새로운 아침은 인간이 신앙을 잃었기 때문에 자동으로 찾아오는 결과가 아니라, 황폐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핵심을 보존하시고 새로운 빛을 주시는 주님의 섭리와 관련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거듭남을 생각할 때에도 조심스럽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신앙이 없다고 느끼거나 영적으로 메마른 시기를 겪는다고 해서 반드시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교회의 황폐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더 깊이 무너져야만 주님께서 새롭게 하신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408은 우선 교회 전체의 상태와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설명하는 번호입니다.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는 거룩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악과 결합시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러한 결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원리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결국 AC.408의 중심은 ‘황폐가끝나야아침이시작된다’는 말에만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런 질서가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면서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신앙이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모독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새로운 시작의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아침’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시작입니다. (AC.408해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
‘라멕’(Lamech)이황폐(vastation),곧신앙이더이상남아있지않음을의미한다는사실은뒤에나오는23절과24절로부터분명합니다.거기서는그가‘내상처를위하여사람을죽였고,내상함을위하여어린아이를죽였다’(slewamantohiswounding, andalittleonetohishurt)고말하기때문입니다.여기서‘사람’(man)은신앙을,‘어린아이’(littleone),곧‘어린자녀’(littlechild)는체어리티를의미합니다.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or that there was no faith,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verses (23–24), in which it is said that he “slewamantohiswounding,andalittleonetohishurt”;for there, by a “man” is meant faith, and by a “littleone” or “littlechild,”charity.
AC.406은 앞의 AC.405에서 라멕이 ‘황폐’, 곧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 근거를 밝혀 줍니다. 그 근거는 라멕의 이름 자체가 아니라 뒤에 나오는 창4:23-24의 라멕의 노래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노래에서 라멕이 ‘사람을죽였고어린아이를죽였다’고 한 말씀을 인용한 뒤,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황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계보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상태를 표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분리된 신앙이라도 아직 보존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AC.392-396에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은 그 신앙이 훗날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데 쓰일 수 있도록 구별하여 보존하시는 섭리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멕에 이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AC.405에서는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했고, 이번 번호에서는 그 이유를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내는 라멕의 노래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과 ‘어린아이’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별하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문맥에서 ‘사람’을 신앙으로, ‘어린아이’를 체어리티로 풀이합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을 죽였다는 표현은 단순히 같은 의미를 반복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가지가 모두 소멸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앞서 가인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지만,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른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신앙을, ‘어린아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체어리티를 뜻한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밝히는 것은 라멕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 표현들의 속뜻입니다. 같은 단어라도 말씀의 문맥과 그것이 다루는 영적 상태에 따라 구체적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해석은 창4:23-24의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죽였다’는 표현을 실제 살인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만 읽으면 스베덴보리가 밝히려는 영적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그는 앞의 AC.403에서 창세기 이 부분이 영적인 것들을 역사 형식 아래 배열한 표상적 서술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라멕의 노래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읽습니다.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를 죽였다는 것은 그 계열의 교회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게 된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다만 ‘상처’와 ‘상함’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이번 번호에서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라멕의 노래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뒤의 번호에서 살펴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대목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홀로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일은 단순히 신앙에 덧붙여야 할 한 가지 덕목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생명을 얻는 관계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라멕에게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는 설명은 이러한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를 앞의 AC.405와 함께 읽을 때에는 또 하나의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라멕은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지만, 그의 두 아내는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라멕에게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했다는 사실이 곧 모든 사람에게서 선과 진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서 이어진 교리적 계열의 황폐와 새 교회의 출현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교회의 황폐가 곧 주님의 모든 교회 역사의 종말은 아닌 것입니다.
결국 AC.406은 라멕의 의미를 뒤에 나오는 말씀으로 확인하는 번호입니다.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의미하며, 라멕이 이들을 죽였다는 말씀은 그 계열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가인에게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새 교회의 출현도 예고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라멕에게서 이전 교회의 황폐를 보면서도, 그 이후의 새로운 교회를 위한 주님의 섭리가 계속되고 있음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AC.406해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처음에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설령 그의 삶에 사랑이 부족하더라도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는 더 잘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적인 차원에서는 많은 진리를 알고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AC.379-381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앎’은 단순히 교리 내용을 기억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AC.37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하게 하는 ‘결속’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진리가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교리를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랑과 선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그 진리는 사람 안에서 생명을 얻지 못하고 기억과 이해성 안에 머물게 됩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것’과 진리가 자기 삶에서 ‘참인것을보는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에게서 진리의 목적은 선입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게 하고, 그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배우면서 실제로 선을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할 때, 그 진리는 점차 그의 의지와 삶에 결합됩니다. 그때 그는 단순히 ‘이것이옳다고배웠다’고 말하는 데서 더 나아가 왜 그것이 옳은지를 삶을 통해 알게 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배우면서도 그것을 자기 삶의 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리와 그의 실제 애정 사이에 틈이 생깁니다.
이것이 AC.380의 ‘땅이다시는그효력을네게주지아니할것이요’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가인은 계속 ‘땅’을 갈 수 있습니다. 곧 신앙에 관한 지식을 계속 연구하고 배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가 소멸한 상태에서는 그 땅이 더 이상 결실하지 않습니다. 지식은 늘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선한 삶이라는 열매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결과를 ‘피하며유리하는자’가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진리를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하나의 살아 있는 중심에서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 점은 ‘체어리티가있으면교리를몰라도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살아 있게 합니다. 눈이 있어야 길을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걸어야 목적지에 이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보는 것과 걷는 것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진 것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마침내 그것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게 한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없는신앙은신앙이아니다’라는 말은 교리적 정확성을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진리를 연구할수록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고,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고 그것을 버리며, 실제 쓰임의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 진리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진리를 연구할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만 많아지고 자기의 지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지식은 증가해도 그 지식이 자라야 할 ‘땅’은 점차 효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에 대한 영적인 분별은 지식의 양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을 행하려는 삶 안에서 진리는 서로 연결되고 질서를 얻습니다. 체어리티는 진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 있을 때 사람은 진리를 단지 기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체어리티를 잃은 가인이 마침내 ‘피하며유리하는자’가 되는 이유이며, 동시에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AC.381심화1)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18)
AC.404
이모든이름은‘가인’(Cain)이라불린최초의이단에서파생된이단들을의미합니다.그러나그것들에관하여는이름들외에는전해지는것이없으므로,그것들에관하여무엇인가말하는것은불필요합니다.그이름들의어원으로부터어느정도알수있는것이있을수있습니다.예를들어‘이랏’(Irad)은그가‘성읍에서내려온다’(descendsfromacity)는것을의미하며,따라서‘에녹’(Enoch)이라불린이단에서내려왔음을의미합니다.다른이름들도이와같습니다. All these names signify heresies derived from the first,which was called “Cain”;but as there is nothing extant respecting them,except the names,it is unnecessary to say anything about them. Something might be gathered from the derivations of the names;for example,“Irad” means that he “descendsfromacity,” thus from the heresy called “Enoch,” and so on.
해설
AC.404는 창4:18에 이어지는 가인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간결하게 밝혀 줍니다.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왔고, 에녹에게서 이라드가 나왔으며, 그 뒤로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이 이어집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한 가문의 족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이름이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 가인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세대가 이어지는 혈통이 아니라, 최초의 영적 분리가 계속 다른 형태로 파생되어 가는 하나의 교리적 계보로 읽힙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99-400과 직접 연결됩니다. AC.399에서는 가인이라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을 산출했고 그것이 에녹이라 불렸다고 했습니다. AC.400에서는 그 원리를 더욱 일반화하여 ‘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라고 했습니다. AC.404는 바로 그 말이 실제 가인의 계보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최초의 분리가 에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여러 이름으로 계속 파생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최초의이단’이라는 표현은 가인의 본래 의미를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어떤 잘못된 교리 하나를 표상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상태를 표상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AC.398의 표현대로 하면 ‘의지대신이해가,사랑대신신앙이지배하게된’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최초의 분리에서 이후의 여러 이단이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라드, 므후야엘, 므드사엘 등이 각각 정확히 어떤 교리를 주장했는지 알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스스로 멈춥니다. ‘그것들에관하여는이름들외에는전해지는것이없으므로,그것들에관하여무엇인가말하는것은불필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해석 태도를 보여 줍니다. 속뜻이 있다고 해서 본문이 제공하지 않는 세부 내용까지 자유롭게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이름의 의미에서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이라드’를 듭니다. 이라드라는 이름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속뜻에서는 앞의 ‘성읍’, 곧 에녹이라 불린 이단에서 파생되어 내려온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AC.401에서 에녹은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과 연결되었고, AC.402에서 성읍은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라드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것은 앞서 형성된 에녹의 교리적·이단적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가 파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계보에는 상당히 일관된 흐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가인이라는 최초의 분리가 있습니다. 그 분리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이단이 산출됩니다. 에녹은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형성되는 상태와 관련되고, 그 이름을 따라 성읍이 세워지면서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하나의 형태를 갖춥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읍’에서 이라드가 내려옵니다. 하나의 분리된 신앙이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이 교리적인 전체를 이루며, 그 교리적 전체에서 다시 새로운 형태의 분리가 파생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AC.404에서 말하는 ‘계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앞의 상태가 뒤의 상태를 낳는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400에서 이미 말한 ‘잉태와출생’의 원리와 같습니다. 하나의 교리적 전제가 받아들여지면 그 안에서 다음 결론이 나오고, 그 결론에서 다시 다른 결론이 나옵니다. 처음의 근본 원리가 계속 후속적인 형태들을 산출하면서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절제입니다. 그는 ‘다른이름들도이와같다’고 말할 뿐, 각각의 이름에 대해 상세한 교리적 내용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이름의 어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뒷받침할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응을 다룰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상응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영적 의미를 붙이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 자체와 AC의 설명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403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들을 ‘표상적유형들’아래 ‘역사형식’으로 배열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에 등장하는 이름들도 영적인 상태들의 연속을 역사적 족보의 형태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표상적 역사라고 해서 모든 이름의 세부 의미가 우리에게 자동으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속뜻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속뜻의 모든 세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AC.404는 한편으로는 매우 강하게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강하게 말하는 것은 ‘이모든이름은가인이라는최초의이단에서파생된이단들을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은 ‘각각이구체적으로무엇인지는이름외에는자료가없으므로자세히말하지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태도를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교리 이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잘못된 근본 원리는 여러 후속적인 오류를 낳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진리를 선한 삶에서 분리하며, 이해를 사랑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시키는 원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교리적 형태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역사 속의 모든 교리나 교파를 임의로 가인의 어느 후손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AC.404자체가 그런 과도한 추정을 경계하게 합니다.
오히려 가인의 계보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더욱 유익합니다. 하나의 잘못된 원리를 받아들였을 때 그것이 어떤 후속적인 생각들을 낳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옳다는것이사랑하는것보다중요하다’는 원리가 마음에 자리 잡으면, 거기서 상대를 판단하는 생각이 나오고, 그 판단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생기며, 마침내 사랑하지 않는 행동까지도 옳다고 설명하는 하나의 내적 ‘성읍’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의 분리가 그 자체에서 후손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에서는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잘못된 근본 원리가 발견되고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여 피할 때, 주님께서는 진리를 다시 선과 결합시키십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섬기게 되고, 이해는 자기 지성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가인의 계보를 읽는 목적은 단순히 옛 이단의 역사를 분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거나 무너지는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404는 가인의 후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상세히 해독하려 하기보다 그 계보 전체의 성격을 먼저 붙들게 합니다. 그들은 모두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나타냅니다. 이라드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이름으로 에녹의 이단에서 파생된 상태를 보여 주듯, 뒤의 이름들도 같은 계보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세부 내용이 주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깊이 읽는 것과 말씀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AC.404는 바로 그 두 가지를 함께 가르쳐 주는 번호입니다. (AC.404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7)
AC.402
가인이‘쌓은성읍’(citythatwasbuilt)이그이단에서나온교리적인것과이단적인것전체를의미한다는사실은말씀에서성읍의이름이나오는모든구절로부터분명합니다.그어느곳에서도성읍자체를의미하지않고,언제나어떤교리적인것또는이단적인것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천사들은성읍이무엇인지,또어떤성읍의이름이무엇인지전혀알지못합니다.앞에서보여준것처럼그들의관념은영적이고천적이기때문에성읍에대한어떤관념도가지고있지않으며가질수도없습니다.그들은오직성읍과그이름이무엇을의미하는지만퍼셉션합니다.따라서‘거룩한성’(holycity),곧‘거룩한예루살렘’(holyJerusalem)은일반적으로는주님의나라를,특별히는그나라가그안에있는각개인을의미합니다.‘성읍시온’(city)과‘시온산’(mountainofZion)도이와같은방식으로이해되는데,후자는신앙의천적인것을,전자는신앙의영적인것을의미합니다. That by the “citythatwasbuilt” is signified all the doctrinal and heretical teaching that came from that heresy,is evident from every passage of the Word in which the name of a city occurs;for in none of them does it ever mean a city,but always something doctrinal or else heretical. The angels are altogether ignorant of what a city is,and of the name of any city;since they neither have nor can have any idea of a city,in consequence of their ideas being spiritual and celestial,as was shown above. They perceive only what a city and its name signify. Thus by the “holycity,” which is also called the “holyJerusalem,” nothing else is meant than the kingdom of the Lord in general,or in each individual in particular in whom is that kingdom. The “city” and “mountainofZion” also are similarly understood;the latter denoting the celestial of faith,and the former its spiritual.
[2]천적인것과영적인것자체도‘성읍들’(cities),‘궁전들’(palaces),‘집들’(houses),‘성벽들’(walls),‘성벽의기초들’(foundationsofwalls),‘방벽들’(ramparts),‘성문들’(gates),‘빗장들’(bars),그리고그가운데있는‘성전’(temple)으로묘사됩니다.에스겔48장과The celestial and spiritual itself is also described by “cities,” “palaces,” “houses,” “walls,” “foundationsofwalls,” “ramparts,” “gates,” “bars,” and the “temple” in the midst;as in Ezekiel 48;
여기서‘진리의성읍’(cityoftruth),곧‘예루살렘’(Jerusalem)은신앙의영적인것들을의미하고,‘성산’(mountainofholiness),곧‘시온산’(ofZion)은신앙의천적인것들을의미합니다. where the “cityoftruth,” or “Jerusalem,” signifies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and the “mountainofholiness,” or “ofZion,”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3] 신앙의천적인것들과영적인것들이성읍으로표상되는것처럼,유다와이스라엘의성읍들은모든교리적인것들을의미합니다.이성읍들은각각그이름이언급될때어떤교리적인것에관한고유한의미를가지지만,그것이무엇인지는속뜻으로부터가아니면아무도알수없습니다.‘성읍들’(cities)이교리적인것들을의미하므로이단들도역시성읍들로의미되며,이경우각각의성읍은그이름에따라어떤특정한이단적견해를의미합니다.지금은다음말씀의구절들로부터일반적으로‘성읍’(city)이어떤교리적인것또는이단적인것을의미한다는사실만을보여주고자합니다. As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are represented by a city,so also are all doctrinal things signified by the cities of Judah and of Israel,each of which when named has its own specific signification of something doctrinal,but what that is no one can know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As doctrinal things are signified by “cities,” so also are heresies,and in this case every particular city,according to its name,signifies some particular heretical opinion. At present we shall only show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that in general a “city” signifies something doctrinal,or else heretical.
여기서는주님의강림때영적이고천적인것들에관한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다룹니다.또환상의골짜기,곧환상(fantasy)을다루는곳에서는, where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memory-knowledge of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So again,when treating of the valley of vision,that is,of fantasy:
예레미야에서는‘남방에있는자들’(inthesouth),곧진리의빛가운데있으면서그것을꺼버리는자들을말하면서, In Jeremiah,speaking of those who are “inthesouth,” that is,in the light of truth,and who extinguish it:
여기서‘성벽’(wall),‘방벽’(rampart),‘성문’(gates),‘빗장’(bars)이오직교리적인것들을의미한다는것은누구나볼수있습니다. where anyone may see that by a “wall,” a “rampart,” “gates,” and “bars,” doctrinal things only are meant.
여기서‘혼돈의성읍’(cityofemptiness)은교리의공허함을의미하며,‘거리들’(streets)은여기서도다른곳에서와마찬가지로성읍에속한것들,곧거짓들이나진리들을의미합니다.계시록에서는, where the “cityofemptiness” denotes emptinesses of doctrine;and “streets” signify here as elsewhere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city,whether falsities or truths. In John:
그여자가그러한성격의교회를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보여준바와같습니다. and that the woman denotes a church of that character has been shown before.
해설
AC.402는 가인이 에녹의 이름을 따라 세운 ‘성읍’이 왜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하는지를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하여 설명합니다. AC.399에서는 이 의미를 간단히 제시했지만, 이번 번호에서는 거룩한 예루살렘과 시온에서부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시편, 스가랴, 민수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많은 구절을 인용하여 ‘성읍’이라는 표상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많은 성경 인용에 압도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무엇 하나를 입증하기 위해 이 모든 구절을 모으고 있는지를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하나의 명제는 ‘성읍은교리적인것또는이단적인것을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말씀에서성읍은어느곳에서도성읍자체를의미하지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설명하는 그의 방식에서 나온 진술입니다. 문자적 의미에서 실제 예루살렘이나 시온이나 여러 성읍이 역사적 장소로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라기보다, 천사들이 받아들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그러한 자연적 장소가 영적인 실재를 표상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근거로 말씀의 문자적·역사적 의미가 무가치하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집중하는 것은 성읍의 ‘속뜻’입니다.
그는 이 점을 천사들의 관념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천사들은 성읍이 무엇인지 또는 어떤 성읍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그들의 관념은 영적이고 천적이기 때문에 자연계의 성읍에 관한 관념을 갖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퍼셉션하는 것은 그 성읍과 이름이 ‘무엇을의미하는가’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자연적 이미지가 말씀을 통하여 천국에 이를 때 천사들은 그 자연적 형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상응하는 영적·천적 실재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거룩한예루살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룩한 성, 곧 거룩한 예루살렘이 일반적으로는 ‘주님의나라’를 의미하고, 특별히는 그 나라가 그 안에 있는 각 개인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단지 인간 밖에 존재하는 천국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한 사람 안에 세워질 때 그 사람 안에도 주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예루살렘이라는 성읍은 주님의 나라가 교리와 진리의 질서 안에서 형성된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어 ‘시온산’과 ‘성읍시온’을 구별합니다. 산은 신앙의 ‘천적인것’을, 성읍은 신앙의 ‘영적인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은 사랑과 선에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영적인 것은 그 사랑과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신앙에 관련됩니다. 산이 높은 곳으로서 사랑의 천적 상태를 나타낸다면, 성읍은 그 안에 질서 있게 배치된 길과 집과 성벽과 문을 가진 구조로서 진리와 교리의 영적 질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2]에서는 성읍뿐 아니라 ‘궁전,집,성벽,성벽의기초,방벽,성문,빗장,성전’이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에스겔 48장과 계시록 21장의 거룩한 성이 대표적입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천국 건축물의 설계도가 아니라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지를 자연적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특히 성벽과 성문과 기초는 성읍을 이루고 보호하며 출입을 규정하는 요소들이므로 교리의 진리들과 그 질서에 관련된 표상으로 이해됩니다.
시편의 ‘하나님의성’, 에스겔의 ‘여호와께서거기계시다’, 이사야의 ‘여호와의성읍’, 스가랴의 ‘진리의성읍’도 모두 같은 논증에 사용됩니다. 특히 슥8:3에서 ‘예루살렘은진리의성읍’, ‘시온산은성산’이라고 한 구절은 스베덴보리의 구별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예루살렘, 곧 진리의 성읍을 ‘신앙의영적인것들’로 보고, 시온산을 ‘신앙의천적인것들’로 봅니다. 성읍이 진리와 교리의 질서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인 셈입니다.
그러나 성읍이 언제나 좋은 교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3]부터의 중요한 전환입니다. ‘성읍’이라는 상응은 교리적인 것을 나타내므로, 그 교리가 거짓과 악에서 나온 경우에는 이단적인 것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읍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상응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성읍인지, 어떤 문맥에 있는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각각의 성읍도 각기 다른 교리적인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속뜻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86에서 확인한 중요한 원리와도 통합니다. 상응은 기계적인 일대일 암호표가 아닙니다. ‘성읍=참된교리’라고 고정할 수도 없고 ‘성읍=거짓교리’라고 고정할 수도 없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성읍은 ‘교리적인것’을 나타내며, 그것의 영적 질은 그 성읍이 놓인 전체 문맥과 이름에 따라 결정됩니다. 거룩한 예루살렘은 주님의 나라와 참된 교리의 질서를 나타내지만, 가인의 에녹 성읍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나타냅니다.
[4]와 [5]의 수많은 인용은 바로 이 원리를 양쪽 방향에서 입증합니다. 애굽 땅의 다섯 성읍, 환상의 골짜기의 떠들썩한 성읍, 닫힌 남방의 성읍들, 시온의 성벽과 성문과 빗장, 견고한 성읍, 혼돈의 성읍, 계시록의 큰 성읍과 만국의 성읍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각각의 구절을 별개의 주제로 떼어 심화하기보다, 모두 ‘성읍과그구성요소들이교리적상태를표현한다’는 하나의 증거군으로 읽는 것이 이번 번호의 논지를 가장 잘 살립니다.
특히 사24:10의 ‘혼돈의성읍’은 이해하기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교리의공허함’이라고 풀이합니다. 실제 건물들이 비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리가 사라져 교리가 텅 빈 상태를 성읍의 황폐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의 ‘거리들’은 성읍에 속한 것, 곧 문맥에 따라 거짓이나 진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성읍이 전체적인 교리의 질서를 나타낸다면 그 안의 거리와 성벽과 문과 집들도 그 전체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것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계16장의 ‘큰성읍이세갈래로갈라지고만국의성읍들이무너졌다’는 말씀도 같은 방식으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단순히 어떤 거대한 도시가 물리적으로 세 부분으로 갈라지는 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적인 교회 상태와 그 교리적 구조의 붕괴를 나타낸다고 봅니다. 계17:18에서는 그 큰 성읍이 요한이 본 ‘여자’라고 설명되며, 스베덴보리는 그 여자가 그러한 성격의 교회를 의미한다고 연결합니다. 따라서 ‘성읍’과 ‘여자’와 ‘교회’가 서로 다른 자연적 표상을 통하여 하나의 영적 실재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 주게 됩니다.
이제 이 모든 설명을 다시 가인의 성읍으로 가져오면 AC.399-402의 흐름이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분열을 표상합니다. 그 가인에게서 에녹이라는 또 다른 분열이 태어났습니다. AC.401에서는 에녹이라는 이름이 ‘시작되거나형성되기시작한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에녹의 이름을 따라 성읍이 세워집니다. 즉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새로운 가르침을 낳고, 그 가르침에서 다시 여러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들이 형성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이성읍을쌓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뒤집힌 하나의 원리였습니다. 그 원리가 새로운 분열을 낳았고, 그 분열이 가르침이 되었으며, 이제 그 가르침이 하나의 교리적 세계를 형성합니다. 잘못된 영적 원리가 개인적인 생각의 수준을 넘어 전승되고 조직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교리체계’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예루살렘 역시 성읍입니다. 즉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질서 있게 결합되어 이루는 참된 교리도 성읍으로 표상됩니다. 문제는 성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성읍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진리가 질서를 이루면 거룩한 성읍이 될 수 있지만,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원리가 중심이 되면 가인의 성읍이 됩니다.
이 점은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교리는 필요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며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 인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AC.393-398에서 신앙이 ‘인류의쓰임을위하여’보존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교리가 많다는 것도, 교리가 체계적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 교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지, 그리고 사람을 실제 사랑과 선한 삶으로 이끄는지가 중요합니다.
AC.402가 보여 주는 가장 아름다운 대조는 결국 ‘가인의성읍’과 ‘거룩한예루살렘’입니다. 둘 다 성읍이며 둘 다 교리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형성된 교리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나라가 그 안에 이루어진 교리적·영적 질서입니다. 외적으로는 모두 ‘성읍’이지만 그 안에 거하는 사랑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성읍의 속뜻을 이해하는 핵심은 건물의 규모나 성벽의 견고함이 아니라 그 성읍을 이루는 진리들이 어떤 선과 결합되어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거룩한 성읍이 됩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조직될 때에는 아무리 견고한 성벽과 정교한 구조를 갖추더라도 가인의 성읍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AC.402가 수많은 말씀의 성읍들을 통하여 가인이 쌓은 한 성읍의 속뜻을 밝혀 주는 이유입니다. (AC.402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7)
AC.401
‘에녹’(Enoch)이라불린것은그모든교리적또는이단적가르침을포함한하나의이단이었다는사실은,이이름자체에서도어느정도분명합니다.‘에녹’이라는이름은그렇게시작되거나형성되기시작한가르침(instructionsobegunorinitiated)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That it was a heresy with all its doctrinal or heretical teaching that was called “Enoch” is in some measure evident from this name,which means the instruction so begun or initiated.
해설
AC.401은 앞의 AC.399-400에서 설명한 ‘에녹’의 의미를 그 이름 자체에서 다시 확인합니다. AC.399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했고 그것이 ‘에녹’이라 불렸으며, 가인이 쌓은 성읍은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400에서는 이것을 더 일반화하여 교회든 이단이든 서로 잉태하고 낳으면서 하나의 영적 계보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401은 왜 그 새로운 상태가 하필 ‘에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녹이라는 이름이 ‘그렇게시작되거나형성되기시작한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번 에녹은 단순히 가인 다음에 등장한 또 하나의 이단이라는 의미만을 갖지 않습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이제 자기에게서 새로운 교리적 가르침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분리가 단순한 주장이나 태도로 머무르지 않고 가르칠 수 있는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99의 ‘성읍’과 AC.401의 ‘에녹’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에녹은 새롭게 산출된 분열 또는 이단이며, 성읍은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분열된 원리가 생겨나고, 그 원리가 가르침으로 형성되며, 그 가르침에서 여러 교리적인 것들이 조직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흐름입니다. AC.399에서 ‘교리체계’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가 AC.401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이제 단순한 분열을 넘어 실제로 ‘가르침’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계보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처음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하나의 교리적 원리를 표상했습니다. AC.398에서는 그 결과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렇게 독립한 이해와 신앙은 자기 나름의 가르침을 만들어 내기 시작합니다. ‘에녹’은 바로 그 단계와 관련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르침’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가르침의 존재가 아니라 그 가르침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번 문맥에서 에녹의 가르침은 가인, 곧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산출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가르침 역시 그 최초의 분리라는 성격을 품고 있습니다. 교리가 정리되고 가르침이 체계화되었다고 해서 그 근원의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AC.400의 마지막 문장과 연결하면 그 위험이 더 잘 보입니다. ‘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처음에는 하나의 잘못된 원리였지만 그것이 가르침으로 형성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고, 그 가르침으로부터 다시 새로운 결론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분리가 다음 분리를 낳고, 그것이 다시 가르침과 교리를 낳으면서 계보가 이어집니다.
이것은 교리의 ‘근원’을 살피는 일이 왜 중요한지도 보여 줍니다. 어떤 가르침이 매우 논리적이고 정교하며 많은 성경 구절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참된 교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의 중심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가르치는지, 아니면 신앙을 삶과 사랑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 구원의 본질인 것처럼 만드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원리를 다른 교회나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이번 본문의 목적과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가인의 계보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편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어떤 잘못된 생각 하나가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홀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한 다른 생각들이 생기고,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자기 논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그 논리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가르칠 정도로 확신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가인에게서에녹이태어나고성읍이세워지는’과정은 인간 마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영적 과정입니다.
AC.401은 또한 같은 이름이 언제나 같은 상응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게 합니다. 창4의 가인 계열에도 에녹이 있고, 창5의 셋 계열에도 에녹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에녹’이라는 이름이 가르침의 시작과 관련된다는 사실만으로 두 에녹의 영적 질이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시작되었느냐는 그 가르침이 속한 계열과 문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점은 나중에 두 에녹을 비교할 때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가인 계열의 에녹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교리적 가르침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반면 셋 계열의 에녹에서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속한 것들이 수집되고 교리적인 형태로 보존되는 전혀 다른 기능이 나타납니다. 같은 ‘에녹’과 ‘가르침’이라는 요소가 있어도 그것이 어느 계열에서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전개하는가에 따라 영적 의미의 질은 달라집니다.
따라서 AC.401의 짧은 설명은 AC.399-400을 한 문장으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또 다른 분열인 에녹이 태어났고, 그 분열은 단순한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형성되었으며,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성읍으로 나타났습니다. ‘분리된신앙’이 이제 ‘가르쳐지는분리된신앙’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결국 AC.401에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교리를가지고있는가?’가 아니라 ‘그교리는무엇으로부터시작되었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진리를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 위에 가르침을 세우는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가인의 에녹은 하나의 분리가 가르침으로 형성되기 시작할 때 그것이 더 넓은 교리적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의 생명은 단지 올바른 문장과 정교한 체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뿌리를 두고 그것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AC.401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7)
AC.400
‘가인이그의아내와동침하매그가임신하여에녹을낳았다’(Cainknewhiswife, andsheconceived, andbareEnoch)는이분열또는이단이자기자신에게서또다른분열또는이단을산출하였음을의미합니다.이것은앞에서말한것으로부터분명하며,또한1절에서사람과그의아내하와가가인을낳았다고한것으로부터도분명합니다.그러므로이제이어지는것들은교회의것이든이단들의것이든이와유사한잉태와출생들입니다.그들은이것들로하나의계보를이루었는데,이는이러한것들도서로이와같은방식으로관련되어있기때문입니다.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That “Cainknewhiswife,andsheconceived,andbareEnoch” signifies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aid,as well as from what is stated in the first verse,that the man and Eve his wife produced Cain;so that the things which now follow are similar conceptions and births,whether of the church,or of heresies,whereof they formed a genealogy,for these are similarly related to each other. From one heresy that is conceived there are born a host of them.
해설
AC.400은 AC.399에서 제시한 ‘가인이에녹을낳았다’는 속뜻을 확증하면서, 창세기의 족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는 가족사의 의미에 머물지 않고,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부터 이어지는 잉태와 출생과 계보가 교회와 이단들의 영적 관계를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그 근거로 스베덴보리는 창4:1로 다시 돌아갑니다. 거기서 ‘사람과그의아내하와’가 가인을 낳았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잉태와 출생은 단순한 생물학적 출산을 넘어 교회 안에서 새로운 교리와 상태가 발생하는 것을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다시 에녹을 낳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교회의 어떤 상태에서 가인이 산출되었고, 이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에서 다시 에녹이라는 새로운 분열이 산출됩니다. 이것이 영적 계보입니다.
여기서 ‘잉태’와 ‘출생’을 구별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번호 자체는 둘의 세부 상응을 따로 정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하나의 영적 원리가 안에서 형성되고 그것이 다시 어떤 교리나 상태로 드러나는 과정을 ‘잉태와출생’이라는 언어로 표현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계보에서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표현은 속뜻에서 단순히 시간적으로 다음 세대가 등장했다는 것보다, 앞의 상태에서 뒤의 상태가 어떻게 산출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관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교회의것이든이단들의것이든’이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잉태와 출생이라는 상응이 악한 것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선하고 참된 새로운 상태가 생겨나는 것도 잉태와 출생으로 표현될 수 있고, 반대로 잘못된 원리에서 새로운 분열과 이단이 생겨나는 것도 같은 언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상응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잉태되고 무엇이 태어나는가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기계적인 일대일 암호표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출생은언제나이것하나를뜻한다’는 식으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루고 있는 주제와 계열을 보아야 합니다. 가인의 계보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최초의 원리가 계속 파생되고 있으므로 그 잉태와 출생은 분열과 이단의 발생을 나타냅니다. 다른 계보에서는 같은 출생의 언어가 새로운 교회의 발생이나 선하고 참된 것의 전승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관계 때문에 ‘계보’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계보는 이름들의 단순한 목록이 아닙니다. 앞의 것이 뒤의 것을 낳고, 뒤의 것은 다시 그다음 것을 낳는 인과적·영적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 계보를 읽을 때 각각의 이름을 서로 고립시켜 해석하기보다, ‘앞의상태에서무엇이나왔으며그것이다시무엇을낳았는가?’라는 흐름을 계속 따라가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399의 ‘성읍’도 다시 의미가 생깁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에녹이라는 또 다른 분열이 나오고, 그 에녹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읍, 곧 그로부터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제 AC.400은 이것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이단적 원리가 형성되면 그것은 다시 새로운 결론과 교리를 산출하고, 그것들이 다시 다른 것을 산출하면서 하나의 계보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인 ‘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으로 이단들이 많이 생겼다는 관찰이 아닙니다. 하나의 잘못된 근본 원리가 받아들여지면 그 원리 안에 이미 여러 후속 결론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의 작은 분리가 그 자체의 논리를 따라 전개되면서 점차 여러 형태의 분리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가인의 경우 그 최초의 원리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 속하여 그것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오히려 체어리티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 최초의 분리가 받아들여지면 그 뒤에는 신앙의 본질, 선한 삶의 중요성, 이웃 사랑의 위치, 교리와 삶의 관계 등에 관한 여러 후속적인 왜곡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근본적인 분리가 여러 교리적 분리를 낳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오늘날 어떤 특정 교파나 교리적 차이를 곧바로 ‘가인의이단계보’에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제시하는 핵심은 다른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있지 않고,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가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서 계속 새로운 오류를 산출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 진리를 체어리티와 분리하거나, 아는 것을 사는 것보다 높이 두거나, 교리적 옳음을 이웃 사랑보다 앞세우는 원리가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의이단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난다’는 말을 모든 교리적 발전이 나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 역시 잉태하고 낳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삶 속에서 새로운 이해와 쓰임을 낳는다면 그것 역시 영적 출생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무언가를낳는다’는 데 있지 않고 무엇으로부터 무엇이 태어나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AC.398과도 매우 깊게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AC.399-400은 바로 그 뒤집힌 질서가 이제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중심이 되면, 자기 전제에서 계속 새로운 교리적 결론을 만들어 내며 그것들이 하나의 계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AC.393-398에서 보았듯이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분리 자체를 승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후의 인류가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보존된 신앙은 인간의 자유 안에 놓입니다. 그것을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시킬 수도 있고, 자기 지성과 proprium을 따라 또 다른 분열을 산출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가인의 계보는 후자의 전개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400은 앞으로 이어질 가인의 족보를 읽는 하나의 안내문과 같습니다. 이후 등장하는 이름들을 단순히 여러 사람의 세대로만 읽지 않고, 서로 관련된 교회적·교리적 상태들의 연속으로 읽어야 합니다. ‘누가누구를낳았다’는 것은 앞의 영적 상태가 뒤의 상태를 산출했다는 것이며, 그 연속적인 산출이 하나의 계보를 형성합니다.
결국 AC.400은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하나의 강력한 원리를 남깁니다. ‘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작은 분리가 단지 한 가지 교리 문제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최초의 원리가 계속 새로운 생각과 판단과 교리를 낳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받아들여져 서로 결합될 때에도 거기에서 새로운 선과 진리의 열매들이 계속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많이 만들어 내느냐가 아니라, 그 모든 잉태와 출생의 처음에 어떤 사랑과 어떤 원리가 자리 잡고 있느냐입니다. (AC.400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창4:17)
AC.399
‘가인이그의아내와동침하매그가임신하여에녹을낳았다’(Cainknewhiswife, andsheconceivedandbareEnoch)는이분열또는이단이자기자신에게서또다른분열또는이단을산출하였고,그것이‘에녹’(Enoch)이라불렸음을의미합니다.‘그가쌓은성읍’(thecitywhichhebuilt)은거기서나온교리적인것과이단적인것전체를의미합니다.그리고그분열또는이단이‘에녹’(Enoch)이라불렸기때문에,‘그성읍의이름을그의아들의이름을따라에녹이라하였다’(thenameofthecitywascalledafterthenameofhisson,Enoch)고한것입니다. The words “Cainknewhiswife,andsheconceivedandbareEnoch” signify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that was called “Enoch.”By “thecitywhichhebuilt” is signified all that was doctrinal and heretical therefrom,and because the schism or heresy was called “Enoch,” it is said that “thenameofthecitywascalledafterthenameofhisson,Enoch.”
해설
AC.399부터 가인 계열의 계보가 시작됩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고 성읍을 건설하여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에녹이라고 부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계보를 단순한 가족사의 기록으로 읽지 않습니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하나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듯이, 가인에게서 태어난 ‘에녹’은 그 분열이 자기 자신에게서 다시 산출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낳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하나의 교리적 원리가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그 상태에 머물지 않고 그 원리에서 다시 다른 결론과 교리를 산출합니다. 가인의 최초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체어리티와분리되어도그자체로신앙일수있다’는 원리가 일단 자리 잡으면, 거기에서 여러 후속적인 생각과 교리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파생을 계보의 ‘출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에녹을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이단 뒤에 우연히 또 다른 이단이 나타났다는 뜻보다 더 깊습니다. 원문은 ‘producedanotherfromitself’, 곧 ‘자기자신에게서또다른것을산출하였다’고 합니다. 새로운 분열은 이전 분열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던 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최초의 원리가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고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어 ‘성읍’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쌓은 성읍을 ‘거기서나온교리적인것과이단적인것전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전입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분열된 원리였던 것이 이제 여러 교리적인 내용들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생각이나 주장 하나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가르침들이 형성되면서 하나의 체계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읍’은 분리된 신앙이 교리적으로 조직되고 정착된 상태를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399의 원문이 직접 ‘교리체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문은 ‘allthatwasdoctrinalandhereticaltherefrom’, 곧 ‘거기서나온교리적인것과이단적인것전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읍=교리체계’는 이 표현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한 말로 사용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직접 그렇게 정의했다고까지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여러 교리적·이단적 내용이 산출되고 그것들이 하나의 성읍으로 표상된다는 데 초점을 두면 충분합니다.
이것은 AC.397-398과도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 놋 땅에 거했으며,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과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AC.398에서는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9에서는 바로 그 이해와 신앙이 독립적으로 지배하는 상태에서 새로운 교리적 산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이해가 사랑과 선을 섬길 때에는 진리가 삶을 인도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나 이해가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 하면, 사람은 자신이 세운 전제에서 계속 새로운 논리와 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전제가 잘못되어 있어도 그 위에 매우 정교하고 일관된 체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정교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교리가 살아 있는 진리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것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교리’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문제는 교리가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어떤 근원에서 그 교리가 산출되었느냐에 있습니다. 선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진리의 교리는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에서 산출된 교리는 아무리 정교하게 조직되어도 그 최초의 분리를 계속 품을 수 있습니다. AC.399의 성읍은 바로 후자의 문맥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성읍의이름을그의아들의이름을따라에녹이라하였다’는 표현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분열 또는 이단 자체가 에녹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그로부터 나온 교리적·이단적 전체도 에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그 성읍의 성격은 그것을 낳은 원리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읍을 구성하는 여러 교리가 아무리 많아져도 그 전체를 규정하는 것은 그것들의 근원이 된 ‘에녹’이라는 분열의 성격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 두어야 할 것이 ‘가인계열의에녹’과 훗날 창5에 등장하는 ‘셋계열의에녹’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번 AC.399의 에녹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파생된 분열 또는 이단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속한 것들을 모아 교리적인 형태로 보존한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성경에 같은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한 상응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두 에녹을 나중에 함께 보면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생깁니다. 가인 계열에서는 교리화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전개하고 굳히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반면, 셋 계열의 에녹에서는 쇠퇴해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보존하기 위한 교리화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생명에서 분리된 교리의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잃어 가는 생명의 지혜를 보존하기 위한 교리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창5의 해당 AC번호에 이르렀을 때 충분히 다루는 편이 좋겠습니다.
AC.399는 또한 ‘가인의표’가 왜 신앙의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그 신앙이 곧바로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존된 신앙은 여전히 인간의 자유 안에서 사용될 수 있었고, 가인의 계열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분열과 교리적 체계를 산출하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주님의 보존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강제적인 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필요했습니다. 앞의 AC.393-398에서 반복해서 보았듯이,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이해 능력과 신앙의 지식이 한편으로는 분리된 교리 체계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끄시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결정적인 것은 신앙의 지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사랑과 결합되고 무엇을 섬기느냐입니다.
따라서 AC.399는 가인의 후손들을 단순한 고대 족보로 읽기보다,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가 어떻게 자기에게서 또 다른 원리를 낳고, 그것이 다시 교리적인 것들을 형성하면서 발전하는지를 보여 주는 출발점입니다. ‘가인이에녹을낳았다’는 것은 분열이 또 다른 분열을 산출한 것이며, ‘성을쌓았다’는 것은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결국 이번 번호가 던지는 질문은 ‘교리가얼마나정교한가?’보다 더 깊습니다. ‘그교리는어디에서태어났는가?’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신앙인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는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에녹과 성읍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자기 나름의 후손을 낳고 교리를 만들며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의 생명은 교리의 규모나 논리적 정교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다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되어 있느냐에 있습니다. (AC.399해설)
‘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가는것’(gooutfromthefacesofJehovah)이사랑의신앙에속한선에서분리되는것을의미한다는것은14절의해설에서볼수있습니다.‘놋땅에거하는것’(dwellinthelandofNod)이진리와선밖에있음을의미한다는것은‘놋’(Nod)이라는말의의미에서분명한데,그것은유리하며피하는자가되는것입니다.그리고‘유리하며피하는자’(wandererandfugitive)가되는것이진리와선을빼앗긴상태를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볼수있습니다.‘에덴동쪽’(towardtheeastofEden)이전에사랑이지배하던이해의마음(intellectualmind)가까이,그리고전에체어리티가지배하던합리적마음(rationalmind)가까이를의미한다는것은‘에덴동쪽’의의미에관하여앞에서말한것으로부터분명합니다.곧‘동쪽’(east)은주님을,‘에덴’(Eden)은사랑을의미합니다.태고교회사람들에게서는의지와이해로이루어진마음이하나였습니다.의지가모든것중의모든것이었기때문에이해는의지에속해있었습니다.이것은그들이의지에속한사랑과이해에속한신앙을구별하지않았기때문입니다.사랑이모든것중의모든것이었고신앙은사랑에속해있었기때문입니다.그러나‘가인’이라하는사람들에게서와같이신앙이사랑에서분리된후에는더이상의지가지배하지않았습니다.그리고그마음에서의지대신이해가,곧사랑대신신앙이지배하게되었으므로,그가‘에덴동쪽에거하였다’고한것입니다.방금말한것처럼신앙이구별되었기때문입니다.곧신앙에‘표가주어져’인류의쓰임을위하여보존되게하신것입니다. That to “gooutfromthefacesofJehovah”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may be seen in the explication of verse 14; that to “dwellinthelandof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Nod,” which is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and that to be “awandererandafugitive” is to be deprive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That “towardtheeastofEden” signifie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had previously reigned, and also near the rational mind, where charity had previously reig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of the signification of “theeastofEden,” namely, that “theeast” is the Lord, and “Eden” love.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mind, consisting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was one; for the will was the all in all, so that the understanding was of the will. This was because they made no distinction between love, which is of the will, and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because love was the all in all, and faith was of love. But after faith was separated from love, as was the case with those who were called “Cain,” no will reigned any longer, and as in that mind the understanding reigned instead of the will, or faith instead of love, it is said that he “dwelttowardtheeastofEden”; for as was just now observed, faith was distinguished, or “hadamarksetuponit,” that it might be preserved for the use of mankind.
해설
AC.398은 앞의 AC.397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변화가 인간 마음의 구조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 두 표현은 앞에서 이미 설명된 의미를 다시 확인합니다. ‘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가는것’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놋땅에거하는것’은 진리와 선 밖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의 중심은 세 번째 표현인 ‘에덴동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설명한 뒤, 가인에게서 그 주도권이 어떻게 뒤바뀌었는지를 밝힙니다.
먼저 ‘놋’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리하며피하는자’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앞의 AC.380, AC.382, AC.388에서 ‘피하며유리하는자’는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놋 땅에 거했다는 것은 단순히 에덴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했다는 지리적 진술에 머물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진리와 선의 살아 있는 질서 밖에 놓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에덴동쪽’은 그보다 훨씬 미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했다는 것을 ‘전에사랑이지배하던이해의마음가까이’이며 동시에 ‘전에체어리티가지배하던합리적마음가까이’라고 설명합니다. AC.397에서는 이해의 마음만 언급했는데, 이번 번호에서는 합리적 마음까지 덧붙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사랑-신앙’뿐 아니라 ‘의지-이해’라는 인간 마음의 구조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였다’는 것은 두 기능을 개념적으로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서로 대립하거나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의지가모든것중의모든것이었기때문에이해가의지에속해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의지가 중심이었고 이해는 그 의지의 질서 안에서 움직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시 사랑과 신앙의 관계에서 설명됩니다. 사랑은 의지에 속하고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그런데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두 가지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모든것중의모든것이었고신앙은사랑에속해있었기때문’입니다. 이것은 AC.393에서 ‘태고교회는사랑에속한신앙외에는어떠한신앙도인정하지않았으며심지어신앙을따로언급하려하지도않았다’고 한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질서는 ‘의지에서이해로’, 그리고 ‘사랑에서신앙으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 자신의 의지가 본래 선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사랑과 선의 근원도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의지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이해가 진리를 퍼셉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심은 인간의 의지 자체가 아니라 그 의지를 지배하던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입니다.
가인에게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이사랑에서분리된후에는더이상의지가지배하지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변화를 매우 대칭적인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의지대신이해가,곧사랑대신신앙이지배하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분리가 가져온 마음의 구조적 변화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단순히 ‘신앙을너무강조했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문제는 주도권의 역전입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고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서 이해가 독립적인 지배 위치에 올라섰습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 선 위에 서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체어리티를 판단하고 지배하려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62-363에서 설명한 가인의 교리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거기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는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398에서는 그 문제가 더 깊은 인간 마음의 차원에서 설명됩니다. ‘신앙과체어리티중무엇이먼저인가?’라는 교리적 논쟁의 배후에는 ‘이해와의지중무엇이지배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AC.393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AC.398의 ‘이해가지배하게되었다’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말은 서로 다른 차원을 말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이 ‘먼저온다’는 것은 배우고 거듭나는 순서에 관한 것이며, 신앙이 사랑보다 ‘지배해야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식은 먼저 올 수 있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차이를 놓치면 가인의 신앙과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신앙을 동일하게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이해가 의지 대신 지배하게 만든 상태입니다. 반면 주님께서 섭리하신 영적 교회의 질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더라도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는 질서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먼저온다’와 ‘신앙이지배한다’는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 구별 때문에 AC.398마지막의 ‘가인의표’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된 잘못된 질서를 승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와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구별되었고,곧신앙에표가주어져인류의쓰임을위하여보존되었다’고 다시 말합니다. 여기서 ‘fortheuseofmankind’, 곧 ‘인류의쓰임을위하여’라는 표현이 AC.395의 설명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왜 신앙을 보존해야 했습니까? AC.393에서 이미 답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에게는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는 길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이해와 신앙에 속한 지식이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서 다시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신앙은 잘못된 분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 안에서 앞으로 인류에게 쓰임이 될 수 있는 것을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이제 ‘에덴동쪽에거하였다’는 표현도 훨씬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에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며 신앙이 사랑에 속해 있던 본래의 천적 질서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는 ‘에덴동쪽’, 곧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과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분리는 일어났지만 이해와 신앙이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까이’라는 표현은 AC.397에 이어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가인의 상태가 선하고 정상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신앙이 앞으로 다시 선과 결합될 수 있는 쓰임을 위해 보존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랑과 신앙의 본래적 하나 됨은 깨어졌지만, 신앙 자체가 제거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은 이제 그 보존된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다른 길로 인도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AC.398은 태고교회에서 가인으로 넘어가는 변화와, 다시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질서가 가능해지는 배경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으며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가인에게서는 그 결합이 깨져 이해가 의지 대신, 신앙이 사랑 대신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없애지 않고 인류의 쓰임을 위해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결국 가인의 문제는 ‘이해가존재한다’거나 ‘신앙이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가 의지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 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그 뒤집힌 질서를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이해와 신앙을 보존하여 다시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이 진리와 선 밖의 ‘놋땅’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에덴동쪽’, 곧 전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마음 가까이에 거한다고 한 깊은 이유입니다. (AC.398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