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4:15)

 

AC.392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sacrilege) 됨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By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is signified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해설

AC.392에서 드디어 창4장의 가장 수수께끼 같은 장면 가운데 하나인 가인의 가 등장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속뜻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예상되는 것은 가인의 완전한 제거입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고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 된다는 것과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여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다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보존승인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참된 신앙으로 인정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여러 번호에서 그 신앙의 상태는 이미 충분히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두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소멸시킨 신앙입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AC.392의 보존은 교리가 옳으니 보호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보존하십니까? AC.392는 아직 그 이유 전체를 풀어놓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단서를 줍니다.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 안에 완전히 소멸시켜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384가 중요해집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89에서는 악과 거짓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2에서는 그 완전한 소멸을 막기 위해 신앙이 보존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는 가인의 악을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보존의 표입니다. 주님께서는 잘못된 것을 잘못되지 않은 것으로 바꾸어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상태 속에서도 아직 보존되어야 할 것을 구별하여 지키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완전한 상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미 질서를 많이 무너뜨린 상태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선과 진리, 그리고 앞으로 회복의 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것을 보존하십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셨다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입니다. 즉 가인의 표는 단순히 몸에 어떤 표시를 새겼다는 문자적 이미지에 머물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주님께서 이 신앙을 다른 것들과 구별하여 함부로 파괴되지 않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구별하셨는지는 뒤의 번호들을 더 읽어야 충분히 밝혀지겠지만, 적어도 AC.392에서는 구별하여 보존함이라는 두 요소가 핵심입니다.

 

여기서 도 눈에 띕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는 아직 일곱의 상응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 일곱은 완전함을 뜻하므로 배의 복수는 완전한 형벌이다와 같은 식으로 미리 결론을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지는 번호에서 그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현재 AC.392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을 죽이는 ’, 곧 이처럼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일이 모독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모독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모독은 단순한 오류나 악과 같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과 관계된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침해하거나 더럽히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신앙이 이미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파괴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 안에서도 말씀에서 나온 진리의 지식이나 거룩한 것과 관련된 어떤 것이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AC.392만으로 그 구체적인 구조를 모두 확정하기보다, 이어지는 설명을 기다리면서 우선 분리된 신앙에도 함부로 폭력을 가해서는 되는 이유가 있다는 데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나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만한 원리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 안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신앙적 요소를 한꺼번에 부수는 것이 반드시 선한 일은 아닙니다. 오류는 오류로 분별해야 하지만, 그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진리나 선의 가능성까지 함께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것은 AC.392의 직접적인 역사적 의미라기보다 그 원리에서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적용입니다. 이번 본문의 직접적인 대상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고대의 교회 상태입니다.

 

앞의 AC.389-391을 거쳐 이번 번호에 도달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AC.389에서는 체어리티를 잃으면 사람이 주님과의 결합에서 분리되어 자기의 것에 맡겨지고, 그 결과 악과 거짓이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킨다고 했습니다. AC.390에서는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이 끊임없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고, AC.391에서는 악과 거짓 자체가 그 안에 형벌을 품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인은 결국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소멸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주님의 보존이 개입합니다.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표는 형벌보다 자비의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가인은 자신의 상태가 가져오는 결과를 겪습니다. 지면에서 쫓겨나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며,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결과가 무제한적으로 진행되어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와 그 선택의 결과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서도, 구원의 가능성을 위해 보존되어야 할 것을 지키십니다.

 

여기서 AC.384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는 표현을 곧바로 기술적인 의미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원문은 그곳에서 remains라는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리메인스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지금 확정해 버리기보다는,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으며, 생명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현재 본문에 더 충실합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이 보존을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신앙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가인의 오류는 신앙이 존재했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해결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와 올바른 관계를 이루도록 보존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선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4장의 가인 이야기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해서 이제 신앙은 나쁘고 체어리티만 남겨야 한다는 결론으로 갈 수 없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해답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결합과 질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가인은 그 질서를 뒤집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렇다고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십니다.

 

결국 AC.392에서 가인의 는 주님의 섭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내려갔지만, 주님께서는 그 잘못된 상태 안에서도 보존할 수 있는 것을 찾으시고 그것을 구별하여 지키십니다. 인간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시지는 않지만, 악 때문에 아직 남아 있는 모든 선과 진리까지 함께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말씀은 단순한 범죄자 보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심각하게 손상된 교회 상태 속에서도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시는 섭리를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목적은 가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생명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지키시고 마침내 선과 진리의 질서가 다시 이어질 길을 남겨 두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AC.393, 창4:15,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교회의 양심 - 신앙과 체어리티의 새로운 질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지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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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1, 창4:14,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 형벌을 품고 있습니다 - 악령들이 서로 두려워하는 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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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90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가운데 있는데, 이는 레위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Those who are in evil and falsity are in continual dread of being slain, as is thus described in Moses:

 

33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36너희 남은 자에게는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37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앞에 있음같이 서로 짓밟혀 넘어지리니 너희가 원수들을 맞설 힘이 없을 것이요 (26:33, 36-37) Your land shall be a desolation, and your cities a waste, and upon them that are left of you I will bring softness into their heart in the land of their enemies, and the sound of a driven leaf shall chase them, and they shall flee as fleeing from a sword, and they shall fall when none pursueth, and shall stumble everyone upon his brother, as it were before a sword, when none pursueth. (Lev. 26:33, 3637)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16땅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17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18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19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땅이 취한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같이 흔들리며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24:16-20) The treacherous deal treacherously, yea, in the treachery of the treacherous they deal treacherously.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he who fleeth from the noise of the fear shall fall into the pit, and he that cometh up out of the midst of the pit shall be taken in the snare; the transgression thereof shall be heavy upon it, and it shall fall, and not rise again. (Isa. 24:1620)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Jeremiah: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두려움을 사방에서 네게 오게 하리니 너희 사람이 앞으로 쫓겨 나갈 것이요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자가 없으리라 (49:5) Behold, I bring a dread upon thee, from all thy circuits shall ye be driven out every man toward his faces, and none shall gather up him that wandereth. (Jer. 49:5)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16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17 사람이 꾸짖은즉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30:16-17) We will flee upon the horse, therefore shall ye flee; and, we will ride upon the swift, therefore shall they that pursue you be rendered swift; one thousand shall flee at the rebuke of one, at the rebuke of five shall ye flee. (Isa. 30:1617)

 

말씀의 구절들과 밖의 여러 구절에서 거짓과 가운데 있는 자들은 도망하는 자들(fleeing), 그리고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자들(fear of being slain) 묘사됩니다. 그들은 자기를 보호해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모두 이웃을 미워하므로 서로 죽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In these and other passages of the Word, those who are in falsity and evil are described asfleeing,and as infear of being slain. They are afraid of everybody, because they have no one to protect them. All who are in evil and falsity hate their neighbor, so that they all desire to kill one another.

 

해설

AC.390은 바로 앞 AC.389에서 설명한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레위기, 이사야, 예레미야에서 사람들이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고, 작은 소리에도 놀라며, 두려움에서 달아나다가 함정에 빠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장면들을 가져옵니다. 이 인용들의 공통점은 실제로 누군가가 그들을 죽이려고 쫓아오는가보다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는 데 있습니다. 두려움의 근원이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26:33,36-37은 이 점을 특히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만 들어도 칼을 피해 달아나는 것처럼 도망하고, 심지어 쫓는 자가 없어도엎드러집니다. 실제 위험의 크기와 그들이 느끼는 공포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상태 자체가 사람 안에 불안을 만들기 때문에 외부의 작은 자극도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24:16-20에서도 같은 구조가 나타납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도망하지만 함정에 빠지고, 함정에서 올라오면 다시 올무에 걸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불운이 계속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안전을 확보하려 할수록 또 다른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영적 상태를 묘사합니다.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내적인 안전을 잃었기 때문에 장소를 바꾸거나 외적인 조건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두려움의 근본 원인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49:5두려움이 사방에서 온다는 표현도 같은 상태를 보여 줍니다. 사방이 모두 위협으로 느껴지고 각자가 흩어지지만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30:16-17에서는 빠른 것을 타고 도망하겠다고 하지만 오히려 쫓는 자들이 더 빨라지고, 한 사람의 꾸짖음에도 천 사람이 도망합니다. 자기 힘으로 위험에서 더 빨리 벗어나려 할수록 두려움도 함께 빨라지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장면을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의 표상으로 읽습니다.

 

그렇다면 왜 악과 거짓은 이러한 두려움을 만들어 냅니까? AC.389가 이미 그 근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스스로 빼앗아 버리면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하고, 주님과 분리되면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에 맡겨집니다. 그 상태에서는 생각이 거짓으로, 의지가 악으로 향합니다. 이제 AC.390은 그 상태가 인간관계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자기를 보호해 자가 아무도 없다고 느끼게 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보호해 자가 아무도 없다는 말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친구나 후원자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깊게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영적 보호와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동시에 이웃과도 결합시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단순히 자기에게 유익한가 해로운가에 따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관계의 중심에 자기 사랑이 놓이게 되고, 다른 사람도 경쟁자나 위협으로 보이기 쉬워집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마음으로 바라보므로 다른 사람도 자신을 그렇게 바라볼 것이라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모두 이웃을 미워하므로 서로 죽이고자 한다고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악한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연계에서 실제 살인을 계획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74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미움을 살인의 내적 뿌리와 연결합니다. 외적인 법, 명예, 손실에 대한 두려움, 사회적 규범 등의 제약 때문에 손으로 살인을 행하지 않을 수 있지만, 상대가 없어지기를 바라거나 그의 선을 파괴하려 하고 그의 불행을 기뻐하는 미움 속에는 영적인 의미에서 상대를 제거하려는 성질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90두려움도 모든 자연적인 두려움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보호 반응입니다. 질병이나 사고, 전쟁이나 범죄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악과 거짓 가운데 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것은 악과 거짓이 지배적인 원리가 되었을 때 생기는 영적인 두려움입니다. 실제로 쫓는 자가 없어도 모두를 적으로 느끼고, 자기 안의 미움과 불신 때문에 다른 사람도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도 새롭게 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을 저지른 가인이 이제 자신도 살해당할까 두려워하는 장면입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진 신앙이 악과 거짓에 의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생명마저 파괴될 것을 두려워하는 상태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이제 자신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체어리티를 파괴하는 원리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죽음의 위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번호의 목적은 악인은 항상 공포 속에 사니 그것이 벌이다라고 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과 거짓 자체가 왜 평안과 안전을 만들어 낼 수 없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악은 다른 사람과의 결합을 깨뜨리고, 거짓은 현실과 진리에 대한 시야를 왜곡합니다. 그 결과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 안에 갇히고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며 모든 것을 자기에게 대한 위협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악과 거짓의 형벌은 외부에서 임의로 덧붙여지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이미 파괴와 두려움의 결과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는 결합을 만듭니다. 이것이 모든 자연적 위험을 없애 주거나 신앙인이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인 중심에서는 차이가 생깁니다.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여 모든 사람을 잠재적 위협으로 바라보는 대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웃과의 관계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AC.389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킨다고 한 뒤 AC.390이 두려움을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조를 보여 줍니다.

 

이번에 인용된 네 성경 구절도 각각 독립적인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의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함’, 이사야의 두려움에서 도망하다 함정에 빠짐’, 예레미야의 사방에서 임하는 두려움’, 다시 이사야의 사람의 꾸짖음에도 사람이 도망함은 모두 하나의 상태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내적인 결합과 보호를 잃었기 때문에 외부 전체를 위협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네 인용은 하나의 증거 묶음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390은 가인의 두려움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설명합니다. 가인을 두렵게 만드는 가장 깊은 원인은 밖에서 그를 찾아다니는 어떤 적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진 그의 영적 상태입니다. 악과 거짓은 사람을 다른 사람과 분리하고, 그 분리는 불신과 두려움을 낳으며, 마침내 남아 있는 생명까지 파괴하려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다음 이야기는 예상 밖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가인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할 때 주님은 그를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를 주어 보존하십니다. 따라서 AC.390가인의 직전에서 인간의 두려움과 주님의 보존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마지막 준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391, 창4:14,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 형벌을 품고 있습니다 - 악령들이 서로 두려워하는 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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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9,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체어리티를 잃으면 왜 악과 거짓에 맡겨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그를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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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9

그를 만나는 자마다 그를 죽이리라(everyone finding him would slay him)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따라 나옵니다. 까닭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체어리티를 빼앗아 버릴 그는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합니다.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분리가 있고, 분리가 있는 곳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 자기의 (own) 맡겨집니다. 그러면 그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이고, 그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죽이는 ,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Thateveryone finding him would slay himsignifies that every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follows from what has been said. For the case is this. When a man deprives himself of charity, he separates himself from the Lord, since it is solely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that conjoin man with the Lord. Where there is no charity, there is disjunction, and where there is disjunction, man is left to himself or to his own; and then whatever he thinks is false, and whatever he wills is evil. These are the things that slay man, or cause him to have nothing of life remaining.

 

해설

AC.389는 창4:14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말이 왜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앞의 AC.385에서 그 의미를 먼저 제시했고, 이제 이번 번호에서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 논리는 매우 분명합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스스로 빼앗아 버리면 주님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고, 주님과 분리되면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에 맡겨지며, 그렇게 자기의 것에 맡겨지면 생각하는 것은 거짓이 되고 의지하는 것은 악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악과 거짓이 사람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합니다. 이것이 속뜻에서 죽임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사람이 스스로 체어리티를 빼앗아 버릴 라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체어리티를 거두어 가신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배척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저주’,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등을 해석하면서 계속 확인해 온 원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을 받아들이고 선을 거부함으로써 주님에게서 돌아섭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강한 말을 합니다.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다.이것은 체어리티를 단순히 신앙생활에 추가되는 좋은 행실 정도로 보는 관점과 전혀 다릅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생명의 결속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사랑이나 선행이 주님과의 결합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87에서 바로 확인했듯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를 사람이 받아들여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살아낼 때, 그 체어리티 안에서 사람은 주님과 결합됩니다.

 

따라서 오직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킨다는 말은 신앙이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가인 이야기 전체가 보여 준 것처럼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둘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진리는 선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도 결국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부정하는 것은 체어리티 없이도 신앙만으로 주님과 결합될 있다는 가인의 원리입니다.

 

이어지는 분리가 있는 곳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 자기의 것에 맡겨진다는 문장은 이번 번호의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이해와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 살아갈 때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만, 주님과의 결합을 거부하여 자기 자신에게 맡겨지면 인간의 고유한 것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 맡겨진다는 것은 인간이 참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의 것에 갇히는 상태입니다.

 

바로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이고, 그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과 의지가 함께 등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생각은 진리와 거짓의 측면에, 의지는 선과 악의 측면에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의 것만으로 살아가면 이해의 영역에서는 거짓이, 의지의 영역에서는 악이 나타납니다. 인간의 영적 생명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인간의 모든 자연적 사고와 의지를 무차별적으로 정죄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도 자기의 것에서 올라오는 악한 충동과 거짓된 생각이 있는 동시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들과 싸우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것은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의 것에 맡겨진 상태입니다. 즉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삼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것은 악과 거짓이지만,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의지하고 생각하며 행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AC.379의지가 실제 사람이다라는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선한 것을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악하게 산다면 실제로는 악을 의지하는 것이므로 거기에 신앙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89에서는 그 문제를 한 단계 더 근원적으로 설명합니다. 주님과의 결합을 잃고 자기의 것에 맡겨지면 의지는 악으로, 생각은 거짓으로 기울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변화는 단순히 생각의 내용을 바꾸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의지 안에 받아들이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살아가는 질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의 바로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도 중요합니다. 가인을 죽이는 것은 문자적으로 그를 찾아오는 어떤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악과 거짓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죽인다는 말의 의미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입니다. 따라서 영적 죽음은 단순히 어떤 형벌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곧 참된 생명에 속한 것이 사람 안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대목은 바로 앞 AC.384와 매우 중요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가인이 두려워하는 죽임은 무엇이겠습니까? 악과 거짓이 계속 지배하여 아직 남아 있는 생명에 속한 것마저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AC.389의 마지막 표현인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한다는 말은 AC.384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는 말과 정확히 긴장을 이룹니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죽음의 위험이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존이 필요합니다.

 

이제 가인의 가 왜 주어지는지에 대한 배경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잘못된 교리를 옳다고 인정하시기 때문에 그를 보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분명 잘못된 것이며, 그 결과 가인은 선과 진리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아직 생명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다면, 악과 거짓이 그것마저 완전히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보존의 섭리가 필요합니다. ‘가인의 는 바로 이 문제와 연결하여 읽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AC.389는 가인 이야기의 핵심 교리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고, 체어리티의 상실은 주님과의 분리를 가져오며, 그 분리는 사람을 자기의 것에 맡겨지게 합니다. 자기의 것만으로는 생각이 거짓으로, 의지가 악으로 향하고, 악과 거짓은 마침내 사람 안에서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체어리티를 충분히 실천하지 않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함으로써 신앙의 생명 자체를 그 근원이신 주님과의 결합에서 떼어 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반대 방향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자기의 것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도 주님에게서 오고 진리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며,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자기 것처럼 의지하고 생각하고 행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의 것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을 보면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가인의 길이 체어리티의 상실에서 자기의 , 그리고 악과 거짓과 죽음으로내려가는 길이라면, 거듭남의 길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체어리티와 신앙이 다시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을 이루는 길입니다.

 

 

 

AC.390, 창4:14,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왜 끊임없이 두려워하는가?’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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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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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8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된다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be a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means as before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해설

AC.388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된다는 것이 앞에서와 같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을 의미한다고 짧게 확인합니다. 여기서 앞에서와 같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이미 AC.380에서 처음 제시되었고, AC.382에서는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의 여러 구절을 통해 자세히 확증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같은 설명을 반복하지 않고 그 의미를 창4:14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바로 앞의 AC.386-387과 함께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AC.386에서는 지면에서 쫓겨나는 이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했고, AC.387에서는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88에서는 그 결과를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이라고 합니다. 즉 진리에서 분리되고 선에서 분리되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할 방향 자체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신앙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교리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체어리티를 잃으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무엇이 참된 진리이고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인 유리함입니다.

 

따라서 피하며 유리한다는 것은 단순한 방황이 아니라 영적 중심과 방향을 잃은 상태입니다. AC.382에서 물을 찾아 이 성읍에서 저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계속 진리를 찾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진리가 지향해야 할 선을 잃었기 때문에 어디에서 참된 만족을 얻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AC.388이 이 설명을 길게 반복하지 않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충분히 확증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결과를 전체 흐름 속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됨’, ‘사랑의 신앙의 선에서 분리됨’,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함은 서로 별개의 세 가지 형벌이 아닙니다. 하나의 영적 붕괴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는 연속된 상태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결과 신앙이 더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진리 모두를 잃고 방향 없이 유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의 핵심은 짧지만 분명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의 결합 안에서만 선과 진리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형태를 얻습니다. 이 둘의 결합이 깨어지면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영적으로는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유리함은 바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결국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AC.389,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체어리티를 잃으면 왜 악과 거짓에 맡겨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그를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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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7, 창4:14,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신앙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주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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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7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hid from thy faces)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얼굴(faces of Jehovah)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호와의 얼굴 자비이며,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의 얼굴(faces) 신앙의 선들을 의미합니다. That to behid from thy faces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faces of Jehovah. Theface of Jehovah,as before said, is mercy, from which proceed all the goods of the faith of love, and therefore the goods of faith are here signified by hisfaces.

 

해설

AC.387은 창4:14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리니라는 말을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이라고 해석하고, 그 근거를 여호와의 얼굴의 상응에서 찾습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를 의미하며,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얼굴이라는 한 상응어를 설명하는 짧은 문장이면서도,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주는 번호입니다.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표현에서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며, 얼굴을 사람에게 향하시거나 돌리시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이시며 자비이십니다. 따라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어느 순간 자비를 거두시고 가인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이 그 자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저주를 설명하면서 계속 지켜 온 원리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과 거짓으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섭니다. 태양은 계속 빛을 비추고 있지만 사람이 등을 돌리거나 문을 닫으면 어둠 가운데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이것은 이해를 위한 비유일 뿐이지만,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상태가 주님의 자비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그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라는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AC.387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여호와의 얼굴이 자비일 뿐 아니라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번 번호에서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참된 선의 근원을 사람 자신에게 두지 않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여호와의 얼굴, 곧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사람이 선을 의도하고 행한다고 해서 그 선의 최초 근원이 인간의 proprium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자기 삶에서 의지하고 행할 때 그것이 사람 안에서 신앙의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종교적인 위로가 사라졌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훨씬 깊게는 신앙에 생명을 주는 선의 근원과의 결합을 잃은 상태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두려 했으며,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표상된 체어리티의 소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체어리티를 제거한 결과는 신앙만 깨끗하게 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고, 결국 그 선의 근원이신 주님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랑의 신앙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신앙은 사랑과 독립하여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이 참된 신앙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신앙에 속한 이라는 표현은 신앙과 사랑을 두 개의 독립된 것으로 놓은 뒤 나중에 결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신앙 자체가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그 신앙 안에서 선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주장했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과 정반대입니다.

 

AC.386AC.387을 나란히 놓으면 창4:14의 두 표현도 아름답게 대응합니다. ‘지면에서 쫓겨남은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진리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선의 측면입니다. 결국 가인의 길은 진리만 잃는 것도 아니고 선만 잃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결과 선과 진리 모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어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되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는 설명은 바로 이 두 가지 분리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85-387의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고,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앙의 선에서 분리되자,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유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킬 위험에 놓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하나의 교리적 오류가 점차 인간의 영적 생명 전체를 흔드는 결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을 주님의 거절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바로 다음 전개가 그것을 더욱 분명히 보여 줍니다. 가인은 주님의 얼굴에서 숨겨졌다고 느끼고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만, 주님은 그를 완전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어 보존하십니다. 주님의 얼굴이 자비라는 AC.387의 선언은 이후 가인의 를 이해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인간이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어도 주님의 자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AC.384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이 남아 있었다고 한 것도 여기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 선의 근원이 가인 자신에게 있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가 모든 선의 근원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가인에게 아직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온 것이며, 주님께서는 악과 거짓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하도록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의 가인의 표를 단순한 형벌의 완화가 아니라 주님의 보존 섭리와 연결하여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AC.387의 중심은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는 짧은 선언에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단지 주님을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에서 흘러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반대로 그 얼굴에서 숨겨진다는 것은 주님의 자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그 자비에서 나오는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비극은 주님께서 자비를 거두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함으로써 그 자비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앙의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데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가인에게도 주님은 보존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것이 곧이어 나타날 가인의 를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준비가 됩니다.

 

 

 

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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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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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4:13)

 

AC.384

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라멕에 관하여 말한 것에서 분명합니다(4:19,23-24). Hence it appears that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 in Cain; but that all the good of charity afterwards perished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Lamech (verses 19, 2324).

 

19라멕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19, 23-24)

 

해설

AC.384는 바로 앞 AC.383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짧은 설명입니다. AC.383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는 말을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결론짓습니다. 이것은 가인을 선한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악 때문에 내적인 고통을 느끼고 어느 정도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안의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의 어떤 이라는 제한된 표현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선이 있었다고 일반적으로 말하지 않고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라고 합니다. 즉 악이 크게 지배하고 있었지만 선에 반응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AC.383에서 보았듯이 가인은 자기 상태 때문에 내적 고통을 느꼈고,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했습니다. 만일 선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그러한 내적 고통과 인정조차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작은 반응 가능성이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아직 남아 있던 선의 어떤 입니다.

 

이 점은 가인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가인은 ’, 아벨은 이라는 식으로 두 사람을 단순한 도덕적 인물 유형으로 나누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아닙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리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 상태가 매우 심각하게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선의 가능성이 한순간에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시작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며, 그 결과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어 가는 과정 가운데에서도 아직 선의 어떤 잔여가 남아 있었던 단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384의 후반부는 곧바로 더 어두운 방향을 예고합니다.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라멕에 관하여 말한 것에서 분명하다고 합니다. 즉 가인에게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이 계속 보존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후대로 내려가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마침내 라멕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체어리티의 선이 완전히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AC.384는 가인의 상태를 설명하는 동시에 창4 후반부의 라멕을 미리 바라보게 하는 연결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창4:19,23-24를 가리키는 것도 이 흐름 때문입니다. 4:19에서는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는 일이 나오고, 23-24절에서는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그리고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는 라멕의 말이 나옵니다. 이 구절들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번호에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므로 지금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84에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구절들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된후대의 상태를 보여 주는 근거로 미리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단순히 악한 개인들의 계보가 아닙니다. 하나의 영적 원리가 세대를 거치며 어디까지 진행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교리적 계보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구별이 있었고, 그 구별이 분리가 되었으며,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려고 했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단계에서는 자기 악에 대한 어떤 내적 고통과 인정이 가능할 만큼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 뒤 그 원리가 더욱 악화되어 라멕에 이르면 그것마저 소멸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구별했던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표현을 좀 더 세밀하게 읽게 합니다. 앞 번호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84에서는 다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두 진술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에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과 주도 원리로서 배척되고 소멸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상태에 속한 사람들 안에서 선에 속한 모든 흔적과 반응 가능성이 그 순간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원리의 소멸과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의 어떤 것을 구별하여 보고 있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가인의 를 이해할 때도 중요해질 것입니다. 만일 가인 안에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이미 완전히 소멸되어 아무것도 보존할 것이 없었다면, 왜 주님께서 가인을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AC.384는 아직 그 답을 본격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가인의 상태 안에 아직 보존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가인의 는 단순히 악인을 보호하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 아니라,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선의 어떤 을 곧바로 리메인스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remain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라고 말합니다. 더 넓은 AC의 가르침과 연결하여 리메인스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AC.384 자체가 이것을 전문적 의미의 리메인스라고 명시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원문이 말하는 만큼,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고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목회적으로도 이 짧은 번호에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사람의 상태가 크게 무너져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 안에 선에 반응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의 내면을 우리가 판정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가인조차 자기 악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사람의 외적인 상태만 보고 그의 내면에 남아 있는 모든 가능성을 우리가 판단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의 내면을 아시고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실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결국 AC.384는 가인의 이야기에 매우 중요한 미세한 차이를 넣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아직 선의 어떤 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악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하는 내적 고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계속 악화되면서 라멕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가인의 타락을 단번에 완성된 상태로 보지 않고 하나의 진행 과정으로 보게 하며, 동시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이후 가인의 와 연결하여 바라볼 준비를 하게 합니다.

 

 

 

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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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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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4:12)

 

AC.382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된다는 것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유리하는 (wandering) 피하여 달아나는 (fleeing away) 의미로부터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That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signifies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andering and fleeing away in the Word. As in Jeremiah:

 

13그의 선지자들 죄들과 제사장들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4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없도다 (4:13, 14) The prophets and priests wander blind in the streets, they have been polluted in blood; the things they cannot do they touch with garments, (Lam. 4:1314)

 

여기서 선지자들(prophets) 가르치는 자들을, 제사장들(priests) 그에 따라 사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하는 (wander blind in the streets)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where prophets are those who teach, and priests, those who live accordingly; to wander blind in the streets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2] 아모스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Amos:

 

7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부분은 비를 얻고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8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하게 마시지 못하였으나 (4:7, 8) A part of the field was rained upon, and the part of the field whereupon it rained not withered; so two or three cities shall wander unto one city to drink waters, and shall not be satisfied, (Amos 4:78)

 

여기서 비가 내린 밭의 부분(part of the field on which it rained)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고, 비가 내리지 않은 밭의 부분(part or piece of the field on which it did not rain)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합니다. 물을 마시려고 유리하는 (wander to drink the waters) 역시 진리를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by the part of the field on which it rained is signified the doctrine of faith from charity; and by the part or piece of the field on which it did not rain, the doctrine of faith without charity. To wander to drink the waters likewise denotes to seek after truth.

 

[3] 호세아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Hosea:

 

16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17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9:16, 17) Ephraim is smitten, their root is dried up, they shall bear no fruit; my God will cast them away, because they did not hearken unto him; and they shall be wanderers among the nations. (Hos. 9:16, 17)

 

여기서 에브라임(Ephraim) 진리에 대한 이해, 신앙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가 요셉의 장자였기 때문입니다. 말라 버린 뿌리(root which was dried up) 열매를 맺을 없는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떠도는 자들(wanderers among the nations)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Ephraim here denotes the understanding of truth, or faith, because he was the firstborn of Joseph; the root which was dried up denotes charity that cannot bear fruit; wanderers among the nations are those who do not know what is true and good.

 

[4]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Jeremiah:

 

28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공격을 받은 게달과 하솔 나라들에 대한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일어나 게달로 올라가서 동방 자손들을 황폐하게 하라, 30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솔 주민아 도망하라 멀리 가서 깊은 곳에 살라 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너를 모략과 너를 계책을 세웠음이라 (49:28, 30) Go ye up against Arabia, and devastate the sons of the east. Flee, wander ye exceedingly; the inhabitants of Hazor have 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for a habitation. (Jer. 49:28, 30)

 

아라비아(Arabia) 동방의 아들들(sons of the east) 천적인 부요함, 사랑에 속한 것들을 소유함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이 황폐해질 그들은 피하고(flee) 유리한다(wander), 선한 것을 전혀 행하지 않을 피하며 유리하는 자들(fugitives and wanderers) 된다고 말합니다. 하솔 주민들(inhabitants of Hazor), 영적인 부요함인 신앙에 속한 것들을 소유한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하는데, 이는 그들이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Arabia and the sons of the east, signify the possession of celestial riches, or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which, when vastated, are said to flee, and wander, that is, to be fugitives and wanderers, when they do nought of what is good. Of the inhabitants of Hazor, or those who possess spiritual riches, which are those of faith, it is said that they 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that is, they perish.

 

[5]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너의 관원들도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22:3) All thy foremost ones wander together, they are bound before the bow, they have fled from far, (Isa. 22:3)

 

이는 환상의 골짜기(valley of vision),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두고 말입니다. 이로부터 뒤의 절에서 그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고백하는 자를 피하며 유리하는 (fugitive and a wanderer), 선과 진리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라고 말한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speaking of the valley of vision, or the fantasy that faith is possible without charity. Hence appears the reason why it is said, in a subsequent verse (Isa. 22:14), that he who professes faith that is apart from charity is a fugitive and a wanderer, that is, knows nothing of good and truth.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2:14)

 

해설

AC.382AC.380에서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리한다는 것을 단순히 장소를 옮겨 다니는 것으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를 차례로 인용하면서 말씀에서 유리함피하여 달아남이 영적으로 방향을 잃은 상태, 특히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인용은 가인의 문제, 곧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결과와 연결됩니다.

 

첫 번째 인용인 애4:13-14에서는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을 가르치는 자들로, ‘제사장들을 그 가르침에 따라 사는 자들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가르침과 삶을 대표하는 두 부류가 모두 맹인처럼 거리를 방황한다는 것은 단순히 길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거리는 사람들이 오가는 길인데, 영적으로 방향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그 거리에서 방황한다는 이미지는 진리와 선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이것이 가인이 유리하는 가 된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두 번째 암4:7-8은 이번 번호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한 밭에는 비가 내리고 다른 밭에는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비가 내린 밭을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의 교리, 비가 내리지 않은 밭을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교리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신앙이 아주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후자는 비를 받지 못한 밭처럼 말라 버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물을 마시려고 이 성읍 저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합니다. 물은 여기서 그들이 찾고 있는 진리와 연결됩니다. 즉 체어리티를 잃은 신앙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계속 진리를 찾아 헤매며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은 AC.379-381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 줍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라고 했고, AC.380에서는 그런 신앙이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고 했으며, AC.381에서는 그 땅이 결실하지 못하는 이유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암4장의 물을 마시려고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사람들은 그 상태를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은 신앙은 지식을 계속 더할 수는 있어도 그 지식이 생명으로 이어지지 않으므로 참된 영적 만족에 이르지 못합니다.

 

세 번째 호9:16-17에서는 에브라임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브라임을 진리에 대한 이해, 신앙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이것은 앞의 땅이 효력을 내지 않는다는 설명과 거의 같은 구조입니다. 뿌리가 마르면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서 체어리티라는 생명이 사라지면 신앙도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떠도는 가 됩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남아 있다고 주장하지만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렘49장의 아라비아동방의 아들들은 조금 더 깊은 층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천적인 부요함’, 곧 사랑에 속한 것들을 소유한 상태와 연결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황폐해지면 피하고 유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선한 것을 전혀 행하지 않는 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상태가 단순한 지적 혼란이 아니라 삶의 선이 사라진 상태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선을 행하는 삶과 분리된 신앙은 결국 무엇이 선인지도 제대로 알 수 없게 됩니다. ‘하솔 주민들이 가진 영적인 부요함, 곧 신앙에 속한 것들 역시 결국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즉 멸망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영적 지식은 스스로 생명을 보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사22장의 환상의 골짜기는 이 모든 설명을 가인의 핵심 문제에 직접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가능하다는 환상이라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fantasy라는 말이 매우 강합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떼어 놓고도 그것이 여전히 살아 있는 신앙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교리가 걸어온 길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는 데서 시작하여 둘을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 위에 놓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신앙이 더 순수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피하며 유리하는상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역설이 드러납니다. 가인은 신앙을 지키려다가 신앙의 방향을 잃었습니다. 체어리티를 제거하면 진리만 더욱 순수하게 남을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분별할 능력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선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은 선이며, 신앙에 생명을 주는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목적을 잃은 진리는 지식으로는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살아 있는 진리로 기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물을 찾아 이리저리 다니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길을 걷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가 있으면 교리적 진리를 몰라도 된다는 반대 극단으로 가서도 안 됩니다. AC.382의 결론은 진리를 버리고 선만 붙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 분별하려면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진리는 체어리티를 필요로 합니다. 진리가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체어리티가 그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이 둘을 구별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한 데 있었습니다.

 

이번 번호의 여러 성경 인용을 하나씩 별개의 교리로 떼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다섯 인용을 가져온 목적은 하나입니다. 말씀에서 방황하고’, ‘유리하고’, ‘피하여 달아나는이미지들이 영적인 방향 상실과 연결되며, 그 방향 상실은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애가에서는 맹인처럼 방황하고, 아모스에서는 물을 찾아 유리하며, 호세아에서는 열매 없는 에브라임이 여러 나라 가운데 떠돌고, 예레미야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부요함을 잃은 자들이 피하고 유리하며, 이사야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라는 환상속에서 사람들이 도망합니다. 서로 다른 장면이지만 모두 하나의 영적 상태를 비춥니다.

 

따라서 창4:12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은 단순히 가인에게 내려진 외적인 유랑 형벌이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이 결국 자기 안에서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게 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교리가 맞이한 가장 깊은 비극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앙만을 높이려 했는데 결국 신앙 자체가 무엇이 참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버릴 때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으며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올바른 방향을 얻게 됩니다.

 

 

 

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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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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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4:12)

 

AC.381

땅을 가는 (till the ground)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방금 설명한 (ground)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그리고 땅이 효력을 내지 아니하는 (not yielding its strength) 결실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땅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것과 자체에서도 분명하며, 또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아무런 신앙도 고백하지 않는 것이라는, 앞에서 말한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That to till the ground means to cultivate this schism or heresy appears from the signification of ground, of which we have just now spoken; and that its not yielding its strength denotes its barrenness, is evident both from what was said concerning ground, and from the words themselves, as well as from this consideration, that those who profess faith without charity, profess no faith, as was said above.

 

해설

AC.381은 바로 앞 AC.380의 설명 가운데 처음 두 부분을 확증합니다. ‘땅을 가는 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이며, 그 땅이 효력을 내지 아니한다는 것은 그 분열이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새로운 상응을 길게 전개하지 않습니다. 대신 앞에서 이미 밝혀진 의 의미와 창4:12의 표현 자체, 그리고 AC.379에서 제시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는 원리를 함께 가져와 AC.380의 해석이 왜 성립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땅을 가는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이라는 해석은 의 의미에서 나옵니다. AC.377에서 사람 자신이 이며 또한 이라고 했고,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심어지느냐에 따라 그의 영적 성질이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문맥에서 그 땅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교리적 분열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땅을 계속 간다는 것은 그 분열을 계속 연구하고 확증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짓된 원리를 한 번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계속 생각하고 논증하고 가르치면서 더욱 견고한 체계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배양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경작하더라도 그 땅은 효력을 내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결실 없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은 땅이 효력을 내지 않는다는 표현 자체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땅의 힘은 씨를 받아 싹을 틔우고 열매를 내는 데 나타나는데, 이제 그 힘이 가인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속뜻에서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교리를 아무리 발전시켜도 거기에서는 참된 영적 생명의 열매가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결실 없음의 이유를 다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서 찾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아무런 신앙도 고백하지 않는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AC.379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다라는 설명을 압축하여 되풀이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땅이 결실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 임의로 그 땅의 생산력을 빼앗아 벌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신앙의 생명 자체를 이루는 체어리티를 신앙에서 떼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제거한 뒤에는 아무리 그 신앙을 경작해도 살아 있는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을 고백한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입으로 나는 신앙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문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profess에는 어떤 교리를 자기의 신앙 원리로 인정하고 주장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체어리티를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에서 떼어 내면서도 그것을 참된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것을 부정합니다. 체어리티가 빠진 신앙은 신앙의 한 종류가 아니라, 앞에서 말했듯이 신앙에 관한 지식만 남은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행위가 있어야 신앙의 부족분을 채워 완전해진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신앙에 외적으로 덧붙이는 공로적 행위가 아닙니다. AC.379에서 체어리티를 사랑과 자비라고 했고, 그것이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킨다고 했습니다. 또한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생각 안에 있을 때 그 생각 안에 신앙의 본질인 체어리티가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의 열매는 머리로 알고 있는 진리에 외적인 선행 몇 가지를 더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선을 의도하는 의지와 결합되어 실제 삶으로 나타날 때 생깁니다.

 

이렇게 보면 땅을 열심히 가는데도 열매가 없다는 이미지는 상당히 강력합니다. 사람은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자기 신앙의 논리를 세우고, 성경 구절을 모으고, 교리 체계를 정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매우 열심히 땅을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작업의 중심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가 제거되어 있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경작 자체가 생명의 열매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분리를 더 깊이 배양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이 경작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땅을 경작하고 있으며 무엇을 열매 맺으려 하느냐입니다.

 

이 점은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에게도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올바른 교리를 찾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말씀의 진리와 참된 교리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리의 목적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지식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가르치고 선으로 인도하며, 마침내 선과 결합되어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진리를 연구할수록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정죄하게 되고, 자기의 지적 우월성을 확인하며, 선한 쓰임보다 교리적 승리를 더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가 갈고 있는 이 어떤 땅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AC.381은 그래서 AC.379-380을 매우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면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지며,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단지 지식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AC.380에서는 그런 분열을 계속 배양해도 그 땅은 결실하지 못하고,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 유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81은 그 결실 없음의 이유를 다시 한 번 명시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외적인 형벌이 아니라 신앙에서 그 생명을 제거한 데 있습니다.

 

결국 AC.381의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날카롭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땅은 아무리 갈아도 참된 영적 결실을 내지 못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에 있으며,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가 인간의 의지와 삶 안에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은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진리가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삶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가인의 비극은 신앙을 지키려다가 체어리티를 제거한 데 있었고, 그 결과 남은 것은 더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 열매 맺지 못하는 땅이었습니다.

 

 

 

AC.382,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란 누구인가?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된 신앙’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2‘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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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0,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신앙’ (AC.38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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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4:12)

 

AC.380

땅을 가는 (till the ground)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이 다시는 네게 효력을 내지 아니할 것이요(it shall not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그것이 결실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된다는 것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till the ground signifies to cultivate this schism or heresy; it shall not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signifies that it is barren.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해설

AC.380은 창4: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의 속뜻을 세 부분으로 압축하여 제시합니다. 바로 앞 AC.377-379에서 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고, 그 분열로 말미암아 사람이 선에서 돌아서며, 체어리티가 소멸될 때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80에서는 그러한 분열을 계속 붙들고 발전시킬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보여 줍니다. 아무리 그 땅을 갈아도 결실이 없으며, 마침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한 채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먼저 땅을 간다는 것은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땅을 간다는 것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얻기 위해 토지를 경작하는 긍정적인 이미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의 의미는 언제나 문맥 안에서 결정됩니다. 여기서 은 이미 AC.377에서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을 간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배양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그 분열된 교리를 더욱 발전시키고 확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원리도 사람이 계속 생각하고 논증하고 뒷받침하면 점점 더 정교한 하나의 체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계가 정교해졌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참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가인의 진행 과정과도 잘 맞습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가 되었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AC.378에서는 그 분열이 입을 벌려’, 곧 하나의 이단적 교리로 가르쳐졌다고 했습니다. 이제 땅을 간다는 것은 그렇게 형성된 교리를 계속 배양하는 단계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의 중요한 경고가 있습니다. 거짓은 반드시 조잡한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출발점을 붙들고 오랫동안 연구하고 논증하면 매우 정교하고 일관성 있어 보이는 교리 체계도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살아 있는 결합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많이 경작해도 그 땅은 참된 영적 열매를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곧이어 땅이 다시는 네게 효력을 내지 아니할 것이요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간단히 그것이 결실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strength는 땅이 가지고 있는 생산력, 곧 열매를 내는 힘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교리를 아무리 발전시키고 확증해도 거기에서는 살아 있는 신앙의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앞의 AC.379에서 그 이유가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며, 우리를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체어리티, 곧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신앙에 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경작해도 그 지식 자체에서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나오는 생명이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결실이 없다는 것을 외적인 활동이나 종교적 성과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37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 없는 사람도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경건한 열심처럼 보이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외적으로는 설교도 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많은 종교 활동을 하며, 상당한 성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그러한 외적 성과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는 영적 결실입니다. 바로 그 결실을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스스로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AC.380에서 가장 중요한 결론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더 순수하게 보존하려고 체어리티와 구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완전히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배척하면 역설적으로 신앙 자체도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잃게 됩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선과 결합할 때 살아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라는 목적을 잃어버린 신앙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지식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무엇이 실제로 선이며 무엇이 실제로 진리인지에 관하여 방향을 잃고 피하며 유리하는상태가 됩니다.

 

이 점은 앞의 AC.379와 매우 깊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지옥의 무리들조차 신앙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진리에 관한 문장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이 참된 교리다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악한 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진리를 생명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선과 결합되지 않은 진리는 사람 안에서 방향을 잃습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를 제거하고 나면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한다는 상태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부족이라기보다 영적 분별의 상실에 가깝습니다.

 

피하는 유리하는 라는 두 표현 역시 지금 번호에서는 하나하나 별도의 상응으로 세분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전체 의미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AC.380은 둘을 합쳐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피하는 자는 이것, 유리하는 자는 저것이라고 미리 나누어 의미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뒤의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두 표현을 더 구체적으로 구별한다면 그때 따라가면 됩니다. 현재로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방향을 잃고 안정된 영적 토대를 갖지 못하는 상태 전체를 나타낸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매우 실제적인 경고가 됩니다. 신학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과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영적으로 분별하는 것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신앙의 정확성을 매우 강조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들을 자기 사랑이나 정죄나 지배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진리를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진리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땅을 열심히 갈고 있지만 그 땅이 효력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방향을 얻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듭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보호하며,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이 둘이 주님 안에서 결합될 때 사람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점점 더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 자신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함께 받아들일 때 생기는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유리함과 반대되는 상태는 단순히 교리적 확신이 강한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삶의 방향이 분명해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380은 가인의 분열이 어디에 도달하는지를 세 단계로 보여 줍니다. 먼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을 계속 경작합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는 영적인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를 버리고 신앙만을 지키려 했던 교리가 결국 신앙 자체의 방향까지 잃어버리는 역설입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제거함으로써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향하여 올바른 방향을 갖게 됩니다.

 

 

 

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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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9, 창4:1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1) AC.379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것’(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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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4:11)

 

AC.379

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cursed) 선에서 돌아서는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밝혔습니다(AC.245). 불의와 가증한 것들, 미움이 사람을 돌아서게 하여 오직 아래쪽만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 바라보게 하며, 그리하여 지옥에 속한 것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추방되고 소멸될 일어납니다. 그때에는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사랑과 자비이며,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결코 우리를 주님과 결합시키지 못합니다. 그러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에 불과하며, 지옥의 무리들조차도 그러한 지식을 가질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선한 사람들을 교활하게 속이며 자신을 빛의 천사들인 것처럼 가장할 있습니다. 또한 가장 악한 설교자들이 때때로 경건과 같은 열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곤 하지만,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보다 그들의 마음에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억 속에만 있는 신앙이나 거기에서 나온 생각만으로 어떤 유익이 있을 있다고 믿을 만큼 판단력이 약한 사람이 있을 있겠습니까? 누구나 자신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의 말이나 동의가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그것이 의지나 의도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은 바로 의지입니다. 의지가 실제 사람이며, 사람이 의지하지 않는 생각이나 말은 실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의지로부터 자신의 성질과 성향을 얻습니다. 의지가 그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선한 것을 생각한다면, 생각 안에는 신앙의 본질인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생각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선한 것을 생각한다고 말하면서도 악하게 산다면, 그는 악한 외에는 아무것도 의지할 없으며, 그러므로 거기에는 신앙이 없습니다. That these thing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what has gone before; and that to becursedis to be averse to good, has been already shown (n. 245). For iniquities and abominations, or hatreds, are what avert man, so that he looks downward only, that is,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thus to those which are of hell. This takes place when charity is banished and extinguished, for then the bond which connects the Lord with man is severed, since only charity, or love and mercy, are what conjoin us with him, and never faith without charity, for this is no faith, being mere knowledge, such as the infernal crew themselves may possess, and by which they can craftily deceive the good, and feign themselves angels of light; and as the most wicked preachers are sometimes wont to do, with a zeal like that of piety, although nothing is further from their hearts than that which proceeds from their lips. Can anyone be of judgment so weak as to believe that faith alone in the memory, or the thought thence derived, can be of any avail, when everybody knows from his own experience that no one esteems the words or assenting of another, no matter of what nature, when they do not come from the will or intention? It is this that makes them pleasing, and that conjoins one man with another. The will is the real man, and not the thought or speech which he does not will. A man acquires his nature and disposition from the will, because this affects him. But if anyone thinks what is good, the essence of faith, which is charity, is in the thought, because the will to do what is good is in it. But if he says that he thinks what is good, and yet lives wickedly, he cannot possibly will anything but what is evil, and there is therefore no faith.

 

해설

AC.379는 앞의 AC.378에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가 그 분열로 말미암아 가인이 돌아서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AC.245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선에서 돌아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저주를 주님께서 가인에게 악을 내려 보내시는 행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돌아서게 하는 것은 불의와 가증한 것들, 미움입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선에서 돌아서고, 마침내 아래쪽, 곧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 바라보게 되며 지옥에 속한 것들을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 때문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등지는 상태가 바로 여기서 말하는 저주의 내적 상태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언제 일어나는지를 곧바로 밝힙니다. ‘체어리티가 추방되고 소멸될 입니다. 이 한 문장이 가인 이야기 전체를 다시 묶어 줍니다.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어떤 교리 하나를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 소멸시켰습니다. 그 결과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집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 우리를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오직이라는 표현은 신앙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어야 하며,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더 이상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mere knowledge’, 곧 단지 지식일 뿐입니다. 사람이 주님에 관한 많은 교리를 알고, 말씀을 정확하게 인용하며, 신학적 논리를 능숙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심지어 지옥의 무리들조차 그러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사랑하고 의지하여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기억과 이해에 있을 수 있지만, 그 지식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사람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선한 사람들을 교활하게 속이고 자신을 빛의 천사들인 것처럼 가장할 있다는 대목도 바로 이 차이를 강조합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 자체는 악한 의지에 의해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돕기 위해 진리를 말할 수도 있지만, 사람을 지배하거나 속이거나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해 같은 진리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들리는 말만 보면 둘을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장 악한 설교자들도 때때로 경건해 보이는 열심을 가지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입술에서 나오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특정 설교자들을 의심하고 판단하라는 권고가 아니라, 외적인 종교 언어와 내적인 의지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경고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AC.379의 논증은 기억 속에만 있는 신앙으로 옮겨갑니다. 사람이 교리를 기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 구원에 어떤 효력이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느냐고 스베덴보리는 반문합니다. 그리고 아주 일상적인 인간관계를 예로 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이 그의 진정한 의지나 의도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말을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상대를 이용하려 한다면 그 말은 두 사람을 결합시키지 못합니다. 반대로 말이 서툴더라도 실제로 상대의 선을 원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것이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일상적인 원리를 사람과 주님의 관계에도 적용합니다.

 

그래서 이번 번호에서 가장 강한 문장 가운데 하나가 나옵니다.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이것은 생각과 이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의지와 이해는 인간 마음의 두 중요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원하는지가 그의 생명의 중심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의지하지 않는 것을 입으로 말하고 머리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사회적 체면 때문에 선한 말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앙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의지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 말과 생각은 아직 그 사람의 실제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의지로부터 자신의 성질과 성향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 대목을 사람에게 순간적으로 어떤 악한 의지가 느껴지면 그것이 사람의 영원한 본질이다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거듭남 중인 인간 안에는 서로 충돌하는 여러 애정과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악한 충동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며 선을 의도하고 행하려 한다면, 그 싸움 자체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의지가 실제 사람이라는 말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모든 충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자기 것으로 삼는 지배적인 의지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듭남의 싸움 자체를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더욱 세심하게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사람이 선한 것을 생각한다면, 생각 안에는 신앙의 본질인 체어리티가 있다고 합니다. 얼핏 읽으면 앞에서 생각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해놓고 이제는 선한 생각 안에 체어리티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유를 덧붙입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생각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즉 여기서 말하는 선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선에 관한 명제를 떠올리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생각 안에 실제로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들어 있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은 의지와 분리된 지식이 아니라 의지에서 생명을 받은 생각이며, 따라서 그 안에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이것은 AC.363에서 우리가 주목했던 willing what is good’, 선을 의도하는 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신앙의 생명은 단순히 무엇이 참인지 아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를 따라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을 만들어 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유롭게 의도하며 행합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신앙의 생각 안에 있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나는 선한 것을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실제 삶은 악하다면 문제가 전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사람은 실제로 악한 것 외에는 의지할 수 없으며, 따라서 거기에는 신앙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여기서도 한두 번의 실패나 거듭남 가운데 넘어지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선을 진심으로 의도하면서도 연약함 때문에 실패할 수 있고, 다시 회개하여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번 문맥에서 문제 되는 것은 입과 생각으로는 선과 진리를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악을 사랑하고 악한 삶을 지속적으로 선택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경우 입술의 신앙은 그의 생명이 아니며,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 신앙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79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단순히 신앙보다 선행이 중요하다는 도덕적 교훈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인간이 자기 공로를 쌓기 위해 행하는 외적인 선행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가 인간의 의지 안에 받아들여지고, 진리와 결합하여 실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그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믿을 것인가, 행할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진리가 의지와 안에서 사랑과 결합되어 살아 있는 신앙이 되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결국 AC.379에서 가인의 저주가 왜 그렇게 심각한지가 드러납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는 것은 단지 기독교적 덕목 하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주님을 결합시키는 결속을 끊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기억 속의 지식으로 남을 수 있고, 심지어 매우 정교한 신학과 경건한 말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을 의도하는 의지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의지가 실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입술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고백되는가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의도하며 살아가게 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AC.380,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신앙’ (AC.38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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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8, 창4:11,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선 가인’ (AC.378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AC.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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