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9 심화

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레9에는 같은 약속이 두 번 나옵니다. 6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고 말하고, 23절에서는 모든 제사가 끝난 뒤 실제로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났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여호와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영광’을 단순한 눈부신 광채로만 보지 않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5922(창45:13)는 여호와의 영광을 신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천국에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가 빛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이 ‘영광’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AC.10574(출33:18)는 더욱 깊이 들어갑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이며, 가장 참된 의미에서는 그 신적 빛 가운데 나타나시는 주님 자신과 관련됩니다. 또한 말씀과 교회와 예배의 속뜻, 곧 그 안에 있는 신적 실재가 ‘영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9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은 단순히 백성 앞에 굉장한 초자연적 빛이 나타났다는 데 의미가 머물지 않습니다. 표상적으로는 주님의 신적 진리가 교회와 예배 가운데 드러나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의 임재가 지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언제 나타나는지가 중요합니다. 레9 시작부터 즉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론의 속죄제와 번제가 있고, 백성의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가 있고, 아론의 축복이 있으며,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그 후에야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 순서는 주님의 임재를 인간이 의식으로 ‘불러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신적 질서에 따라 정결하게 되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쓰임 안으로 들어갈 때, 이미 항상 임재하시는 주님이 인간에게 ‘나타날 수 있는 상태’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태양은 계속 빛나지만 창문이 닫혀 있으면 방 안은 어둡습니다. 창문을 연다고 태양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회개와 정결과 예배가 주님의 임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인간이 주님의 임재를 받아들이고 지각할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레9의 영광은 거듭남의 아름다운 결과입니다. 진리를 단지 문자로 알고 있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보기 시작합니다. 예배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주님과 만나는 자리가 되고, 이웃을 섬기는 일이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흘러가는 쓰임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말씀 안의 ‘영광’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멀리 계시던 하나님이 갑자기 가까이 오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가 변화하면서 언제나 임재하시던 주님의 신적 진리와 사랑이 비로소 지각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말씀과 예배와 이웃 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SW.레9 심화 3)

 

 

 

SWC.레9 심화4, ‘왜 아론은 제사를 마친 뒤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했을까?’

SWC.레9 심화4. ‘왜 아론은 제사를 마친 뒤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했을까?’ 레9:22에서 아론은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모두 마친 뒤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제사장으로 위임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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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9 심화2, ‘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보다 자기 속죄제를 먼저 드려야 했을까?’

SWC.레9 심화2. ‘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보다 자기 속죄제를 먼저 드려야 했을까?’ 아론은 이미 레8에서 제사장으로 위임되었습니다. 물로 씻었고 거룩한 옷을 입었으며 관유를 받았고,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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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8 심화

3. ‘왜 피를 오른쪽 귀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에 발랐을까?’

 

레8:23-24는 제사장 위임식 가운데 가장 낯설면서도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모세는 위임식 숫양의 피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 오른쪽 엄지손가락,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왜 하필 이 세 곳이며, 왜 모두 오른쪽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원전이 놀라울 만큼 구체적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60(출29:20)은 위임식 숫양의 피가 주님의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세 곳에 발라지는 것은 같은 신적 진리가 서로 다른 층위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AC.10061(출29:20)은 오른쪽 귓부리를 해설합니다. 귀는 ‘지각’을 의미하며, 특히 오른쪽 귀는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지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른쪽이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관련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귀에 피가 발라지는 것은 먼저 주님의 진리를 듣고 그 진리를 속에서 지각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 다음은 오른손 엄지입니다. AC.10062(출29:20)는 엄지손가락이 선을 통한 진리의 능력, 곧 선에서 나오는 진리가 가진 힘과 그로부터 생기는 이해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손은 능력과 행동을 나타내며, 엄지는 손의 힘을 대표하는 끝부분입니다. 귀에서 받아들인 진리가 이제 이해와 능력, 그리고 행동의 영역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오른발 엄지입니다. AC.10063(출29:20)은 이것을 가장 바깥 천국에 해당하는 이해와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머리와 그 기관들이 가장 안쪽 천국에, 몸과 손이 중간 천국에, 발이 가장 바깥 천국에 상응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귀·손·발은 단순한 세 신체 부위가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완전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것을 인간의 거듭남에 적용하면 매우 실제적인 의미가 나타납니다. 진리는 먼저 귀로 ‘들려야’ 합니다. 그러나 들었다고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이해와 능력으로 내려와 손에서 행해져야 하고, 다시 가장 바깥 일상의 삶으로 내려와 발이 걷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안다’와 ‘말씀대로 산다’ 사이에는 귀에서 발까지의 거리가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감동하는 것은 귀의 단계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해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손의 단계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순간만이 아니라 돈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운전하고, 일하고, 가족과 살아가는 일상의 방향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발의 단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 곳 모두 ‘오른쪽’이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오른쪽은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연결됩니다. 단순히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선으로부터 진리를 듣고 이해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진리는 제사장의 귀와 손과 발을 거룩하게 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레8의 피는 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손을 지나 발까지 내려갑니다. 주님의 신적 진리는 우리의 가장 안쪽 지각에서 시작하여 이해와 행동을 지나 가장 바깥 일상의 삶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속 사람에서 받아들인 진리가 겉 사람의 삶까지 질서 있게 할 때 거듭남이 실제가 됩니다.

 

이것이 위임식의 본질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의 쓰임을 감당하는 사람은 진리를 잘 듣는 사람만도 아니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만도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듣고, 그 진리를 선에서 이해하며, 손으로 행하고, 발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른쪽 귀와 손과 발에 같은 피가 발라진 것은 한 사람 전체가 신적 진리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SWC.레8 심화 3)

 

 

 

SW.레8 심화4, ‘왜 제물을 제사장의 손에 올려놓고 흔들었을까?’

SW.레8 심화4. ‘왜 제물을 제사장의 손에 올려놓고 흔들었을까?’ 레8:25-28에서는 위임식의 뜻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숫양의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 무교병과 기름 섞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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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8 심화2, ‘왜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부었을까?’

SW.레8 심화2. ‘왜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부었을까?’ 레8:12에서 모세는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거룩하게 합니다. 기름을 손이나 옷에 조금 바른 것이 아니라 ‘머리에 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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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7 심화

4.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거듭 명하셨을까?’

 

레3의 마지막 말씀은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였습니다. 그런데 레7:22-27에서는 같은 명령이 훨씬 더 길고 강하게 반복됩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고, 어떤 피도 먹지 말라고 하며, 그것을 먹는 사람은 백성 가운데서 끊어진다고까지 합니다. 왜 기름과 피는 이처럼 특별하게 구별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직접적인 원전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5943(창45:18)은 레7:23-26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사의 기름과 그것을 불사르는 것이 천적 신성 자체, 곧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피 역시 제사의 핵심 상응입니다. 앞에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제사의 피를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기름과 피는 제사의 두 중심인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사랑의 선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그것을 먹으면 안 될까요? ‘먹는다’는 것이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는 원리를 함께 놓으면 매우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살아야 하지만 그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선과 진리는 인간에게 전달되고 인간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언제나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바로 여기서 가장 미묘하게 개입합니다. 악한 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보다 오히려 선한 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영적으로 더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다’, ‘내가 희생했다’, ‘내가 진리를 깨달았다’, ‘내가 사람을 변화시켰다’고 하면서 주님에게서 온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 규례는 선과 진리를 거부하라는 뜻과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충분히 받아 살아가되 ‘그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라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선은 인간 안에 있지만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진리도 인간의 이해 안에 있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이 구별이 지켜질 때 인간은 주님의 선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면서도 공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적 자유의 역설입니다. 천사들은 선을 자기 의지에서 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레7에서 기름과 피가 다시 한번 엄격하게 보호되는 것은 제사의 중심을 지키는 일입니다. 거듭남의 마지막까지 인간이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습니다. ‘선과 진리는 주님의 것이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기 삶으로 삼되 그 근원을 proprium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바로 그 인정 안에서 주님과 인간의 참된 화목과 결합이 지속됩니다. (SWC.레7 심화 4)

 

 

 

SW.레7 심화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SW.레7 심화5. ‘왜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렸을까?’ 레7:30-34에는 레위기의 상응을 읽는 재미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화목제물을 가져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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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SW.레7 심화3. ‘왜 화목제 고기는 셋째 날에는 가증한 것이 되었을까?’ 레7:17-18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화목제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으면 불살라야 하고, 만일 셋째 날에 그것을 먹으면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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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3 심화

3. ‘왜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 하셨을까?’

 

레위기 3장은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매우 강한 명령으로 끝납니다. 더구나 이것은 한 번의 제사에만 적용되는 임시 규정이 아니라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기름과 피를 특별히 먹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는 스베덴보리가 놀랄 만큼 직접적인 답을 줍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3(출29:22)은 제사와 번제에서 모든 피를 제단에 붓고 모든 기름을 제단 위에서 불살랐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피’는 신적 진리를, ‘기름’은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레3:17의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를 직접 인용합니다. 즉 레3 마지막 절의 의미를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피가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상응입니다. 주님의 피 역시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와 관계합니다. 기름은 신적 선, 곧 신적 사랑의 선과 관계합니다. 따라서 피와 기름은 제사의 수많은 요소 가운데서도 특별히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먹지 말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실제 음식 규정이었지만 그 안의 영적 의미는 훨씬 깊습니다. 신적 선과 신적 진리는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생각하고 원하고 행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생명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선을 행하고 나면 ‘내가 했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내가 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올바르게 살면 자신의 선함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과 봉사와 체어리티까지 자기 공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3은 말합니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선은 네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합니다. 선도 주님의 것이며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에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선을 행할 힘과 진리를 볼 수 있는 빛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니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내가 선을 행했으니 이것은 내 선이다’라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인간은 전력을 다해 선을 행하되 그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진리를 열심히 배우고 이해하되 그 빛의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그래서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다는 규정은 매우 깊은 겸손을 가르칩니다. 겸손은 ‘나는 아무 가치가 없다’고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겸손은 내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레3의 마지막 한 절이 장 전체를 닫는 완벽한 결론이 됩니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내장과 콩팥과 간 주변의 기름을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른 모든 과정이 결국 한 고백을 향합니다. ‘선은 주님의 것입니다.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인정 안에서 참된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선의 주인이 되려는 욕망과 진리의 주인이 되려는 교만을 내려놓을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내 안에서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 있습니다. 선을 행하되 그 선을 먹어 자기 공로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되 그 진리를 먹어 자기 지혜의 소유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를 받아 삶으로 살되 언제나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레3의 마지막 고백은 그래서 아주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내가 행한 선 가운데 참으로 선한 것은 주님에게서 왔고, 내가 깨달은 진리 가운데 참으로 진리인 것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주님과의 화목과 결합을 보존하는 깊은 겸손입니다. (SWC.레3 심화 3)

 

 

 

SW.5, 레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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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 심화 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SW.5 심화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레위기 3장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가장 낯선 부분은 아마 제물의 내장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대목일 것입니다. ‘내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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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3 심화

1. 화목제의 ‘화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무엇이 일어나는 것일까?

 

‘화목제’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사이가 나빠진 인간이 제물을 드려 하나님과 다시 사이좋게 되는 제사’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더 강하게 표현하면 인간의 죄 때문에 분노하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제사처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91(출24:5)은 이스라엘 백성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장면을 해설하면서, 이것이 ‘선으로부터, 그리고 선에서 나오는 진리로부터 드리는 주님에 대한 예배’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번제가 특별히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면, 제사는 선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화목제의 중심에도 선과 진리가 함께 있습니다.

 

레3의 의식 자체가 이것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제물의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지고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AC.10033(출29:22)은 피가 신적 진리를, 기름이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화목제의 중심에는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미워하시다가 제물을 보고 마음을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해야 하는 쪽은 인간입니다. 인간 안의 악과 거짓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그 결과 인간 스스로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인간에게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인간이 그 진리에 따라 악을 죄로 여겨 피하기 시작하면 주님께서 선을 심으실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가 선과 결합되면서 인간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화목’은 단순한 감정적 관계 회복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결합’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함으로써 인간이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목제에서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는 행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AC.10047(출29:16)은 피를 제단 둘레에 뿌리는 것이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거듭남 역시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를 ‘하나님의 분노를 달래는 제사’로만 읽으면 레3의 가장 깊은 아름다움을 놓칠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오히려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당신과 결합시키시는 거듭남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인간 안에서 악과 거짓이 물러가고, 주님의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그 선이 삶의 가장 바깥쪽까지 내려올 때 인간은 점점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결과가 ‘평화’입니다. 성경의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서로 싸우던 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는 상태와 깊이 관계합니다. 진리와 선이 하나가 되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의 방향을 향하며, 인간의 뜻이 점차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게 될 때 평화가 옵니다.

 

따라서 화목제는 ‘내가 무엇을 드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 것인가?’를 묻는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내 안에서 무엇을 바로잡으셔야 내가 다시 그분의 생명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가?’를 묻게 하는 제사입니다.

 

화목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에 의해 변화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진리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시며, 마침내 우리의 사랑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우리는 주님과의 결합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화목제의 깊은 중심입니다. (SWC.레3 심화 1)

 

 

 

SW.5 심화 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SW.5 심화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레위기 3장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가장 낯선 부분은 아마 제물의 내장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대목일 것입니다. ‘내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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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 레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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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4. ‘신적 진리’(Divine Truth)란 무엇인가?

 

AC.1 해설을 읽다가 ‘신적 진리’(Divine Truth)라는 표현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AC.1 원문 자체에는 ‘Divine Truth’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말씀의 내적인 것과 그 근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해설에 사용된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신학 용어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AC.1의 어떤 단어를 신적 진리라고 번역한 것인가?’가 아니라 ‘해설에서 말한 신적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진리’는 단순히 인간이 알고 있는 옳은 정보나 참된 명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수많은 사실과 진리를 알 수 있지만, ‘신적’이라는 말이 붙을 때에는 그 출처가 인간의 지식이나 추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적 진리는 말씀과도 깊이 연결되고, 인간에게 빛을 주며 선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역사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진리는 인간의 이해 속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신적 진리가 된다’고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신적 진리가 신적인 것은 인간에게 어떤 효과를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근원 자체가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신적 진리를 자신의 이해와 삶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이 점은 AC.1과도 잘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약의 외적 의식과 규례와 역사처럼 보이는 것들 안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것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주님과 주님의 천국과 교회 등에 관계한다고 선언합니다. 이때 말씀을 단순한 인간의 종교 문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 ‘신적 진리’라는 개념은 앞으로 매우 중요해집니다. 다만 AC.1 자체가 아직 그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그 의미를 미리 지나치게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AC.1과 관련하여 ‘신적 진리’를 기억할 때에는 우선 두 가지만 붙들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참인 정보’를 뜻하는 말이 아니며, 그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말씀과 주님, 선과 진리, 신적 유입에 관한 설명이 쌓이면 ‘신적 진리’라는 말의 깊이도 점차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AC.1 심화 4)

 

 

 

AC.1, 서문, ‘말씀 안에 담긴 하늘의 비밀들’

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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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심화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해설과 심화 2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원어에서는 층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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