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여러 싸움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이 싸움의 시간은 곧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시간이며,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는 거듭난 인간을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기 전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일이 이만큼 진전되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게 되면,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합니다. 이는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Meanwhile the Lord continually fights for him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nd by combats confirms him in truth and good. The time of combat is the time of the Lord’s working;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the regenerate man is called 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 Nor does he rest until love acts as principal; then the combat ceases. When the work has so far advanced that faith is conjoined with love, it is called “very good”; because the Lord then actuates him, as his likeness. At the end of the sixth day the evil spirits depart, and good spirits take their place, and the man is introduced into heaven, or into the celestial paradise; concerning which in the following chapter.

 

해설

AC.63은 창1:31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진행된 거듭남의 전투에서 실제로 누가 일하고 계셨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바로 앞 AC.62는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63은 그 과정의 이면에서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거듭남을 인간 자신의 영적 성취 과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 전투가 있고 그가 그 전투를 실제로 겪지만, 그를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고 그 전투들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이것은 AC.59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이 사람의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지만, 그것들을 선을 향해 기울이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을 매 순간, 심지어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신다면 사람은 즉시 멸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AC.63은 이제 그 흐름을 ‘전투의 시간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이라고 압축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시험과 전투를 겪는다는 것과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싸우신다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전투를 겪지만, 그 전투 가운데 그를 붙드시고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능력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 시간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 실패, 질병, 갈등을 곧바로 ‘지금 주님께서 특별한 영적 전투를 하고 계신 증거’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63의 문맥은 거듭남 가운데 악과 거짓에 맞서는 전투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모든 인생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만능 공식으로 확대하기보다, 거듭남의 전투 가운데 주님께서 사람을 버려 두지 않으시고 계속 일하신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에게는 싸움으로 경험되는 그 시간이 동시에 주님께서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 거듭난 인간을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손가락’이라는 단어 자체를 가지고 곧바로 ‘가장 미세하고 정교한 섭리’를 뜻한다고 별도의 상응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AC.63이 이 표현을 사용하는 문맥의 핵심은 ‘일’의 주체입니다. 거듭난 인간은 자기 손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낸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입니다. 거듭남이 인간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라는 앞 문장을 다시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으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기 전까지’ 쉬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많아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60-61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고,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은 이해에,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것은 의지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3은 그 사랑이 ‘주된 원리’로 작용할 때까지 주님께서 쉬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원문 자체가 이어서 ‘그때 전투가 그친다’고 하므로, 사랑이 주가 되는 것과 전투가 그치는 것이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사랑이 주가 되면 모든 선한 행동이 아무 노력 없이 자동으로 흘러나온다’거나 ‘그 뒤로는 내적 갈등이나 시험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확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3이 직접 말하는 것은 이 여섯째 날의 거듭남의 전투가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 그친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이후의 모든 영적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속되는지는 뒤의 설명을 더 따라가야 합니다.

 

일이 이만큼 진전되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AC.60의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60에서는 앞선 상태들이 ‘좋았더라’였던 것과 달리 이 상태가 ‘심히 좋았더라’인 이유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AC.63은 같은 사실을 다시 말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 더 덧붙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움직이신다’고 하면 마치 사람이 자기 의지와 자유를 잃고 주님께 조종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AC.63의 문맥에서 그런 뜻으로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앞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고 사랑이 주된 원리로 작용한다고 했고, 그 상태에서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즉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그 사람의 생명에서 주된 것이 된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와 정확히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는 별도의 큰 주제이므로, 이번 글에서는 ‘움직이신다’를 곧 강제나 조종이라고 이해하지 않는 정도로 충분하겠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모양’이라는 표현도 앞의 ‘하나님의 형상’과 연결됩니다. AC.62는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고, AC.63은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선해져서 주님 없이도 잘 살아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사람 안에서 점점 더 생명의 중심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여전히 ‘그를’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주님과 인간을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거듭난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매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AC.59에서 악한 영들이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어 그의 욕정을 자극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면, 처음 읽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러면 이제 악한 영들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다는 뜻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본문 이해에 직접 필요한 것이므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다만 메인에서는 원문이 말하는 사실을 그대로 붙들면 됩니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악한 영들은 여전히 똑같이 주변에 있지만 영향력만 약해진다’는 식으로 바꾸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후 영들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충분한 근거와 함께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즉시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이 마지막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도 여기서 너무 빨리 답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늘’이라는 말을 보자마자 사후에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는 뜻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무조건 ‘살아 있는 동안 마음속에 형성되는 천국 상태일 뿐’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 우선 이 표현이 창2의 일곱째 날과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의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은 앞 AC.62에서 우리가 일곱째 상태에 관한 질문을 서둘러 완성하지 않은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여섯째 날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AC.63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며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전투가 그칩니다.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대신하며, 사람은 하늘 또는 천적 낙원으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그 ‘천적 낙원’이 정확히 무엇이며 일곱째 상태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이제 다음 장이 설명할 몫입니다. AC가 스스로 ‘다음 장에서’라고 한 것을 우리가 이번 해설에서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AC.63의 중심은 인간이 얼마나 열심히 싸워 높은 상태에 도달했느냐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입니다. 주님이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십니다. 주님이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다음 상태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창1:31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주어 역시 ‘하나님’입니다. AC.60-63은 ‘심히 좋았더라’의 속뜻을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거듭남의 전투와 연결하여 밝혔지만, 그 모든 과정의 주체를 인간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AC.63은 여섯째 날의 마지막에서 바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강하게 밝혀 줍니다. 거듭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입니다.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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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AC.59에서는 악한 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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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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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창1, 말씀의 속뜻 :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과 천사들의 지각 (AC.64-66)

AC.64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는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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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창1:31, 여섯 날의 거듭남 :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사람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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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창1:31)

 

AC.60

이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하는 이유는, 앞선 상태들을 단지 ‘좋았더라’(good)라고만 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This state is called “very good,” 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 “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해설

AC.60은 창1:31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 가운데 특히 ‘심히 좋았더라’에 주목합니다. 앞선 창조의 날들에도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섯째 날에는 처음으로 ‘심히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여기에서만 ‘심히’라는 말이 더해지는지를 사람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에서 설명합니다.

 

AC.60의 대답은 매우 간결합니다.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것은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 자체입니다. AC는 이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왜 말씀에서 앞선 상태들은 ‘좋았더라’라고 하고 이 상태에서는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는지 그 속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설의 중심도 언제나 창1:31의 이 말씀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좋았더라’와 ‘심히 좋았더라’의 차이는 단순히 앞의 것들도 좋았지만 마지막 것은 조금 더 좋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AC.60은 그 차이를 신앙과 사랑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앞선 상태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아직 이렇게 ‘하나’를 이루는 상태로 설명되지 않았지만, 이제 여섯째 상태에서는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그렇다고 앞선 상태의 신앙이나 선과 진리가 살아 있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AC들에서도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선과 진리를 말했습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 이전의 상태를 ‘아직 죽어 있는 상태’, 여섯째 날을 ‘비로소 생명이 처음 생긴 상태’라고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0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하나가 됨’입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이 따로 있고 사랑에 속한 것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것들이 하나를 이룹니다. 이것이 ‘심히 좋았더라’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 표현이 조금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메인에서는 신앙과 사랑을 단순히 ‘머리와 가슴’, 또는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정도로만 축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다음 AC.61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영적’이라 하고,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60은 그 다음 설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을 열어 줍니다. 여기서는 우선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며, 이것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결혼’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붙들면 충분합니다.

 

‘결혼’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다’고 하지 않고,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하나 됨은 어느 한쪽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결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다만 이번 한 문장만 가지고 ‘결혼’의 전체 교리를 펼칠 필요는 없습니다. 선과 진리의 결혼, 천상의 결혼, 의지와 이해의 결합 등은 AC 전체에서 계속 깊어지는 주제입니다. AC.60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결혼이다’라는 직접적인 설명까지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또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곧바로 서로 경쟁하는 높고 낮은 두 단계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문장에서는 둘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즉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둘의 분리가 아니라 결합입니다.

 

그렇다고 ‘영적’과 ‘천적’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혼이라는 표현 자체가 둘의 구별을 전제로 합니다. 서로 다른 것이면서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영적이고 무엇이 천적인지는 바로 다음 AC.61이 설명하므로, 여기에서 미리 지나치게 세분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실제로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도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그가 아는 것과 그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그가 참된 것을 알고 그것을 사랑하며,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룬다’는 말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AC.60의 문장을 독자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예이지, 이 한 가지 예가 ‘결혼’의 전체 뜻을 정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사랑’을 단순한 감정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이 신앙에 속한 것들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믿는 내용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낀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의지와 삶에 깊이 관계됩니다. 다만 이 부분 역시 이어지는 AC들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을 단순히 교리 내용을 많이 아는 것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은 진리와 이해에 관계하지만, AC.60에서 말하는 상태는 그것들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을 서로 독립된 두 종교적 능력처럼 생각하기보다, 하나의 생명 안에서 결합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창1:31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라는 말씀도 해설의 중심을 다시 주님께 돌려놓습니다. 이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고 ‘이제 나는 충분히 거듭났고 심히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심히 좋았더라’를 인간의 영적 자기평가 기준으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나는 여섯째 날 인간인가?’라고 자신의 영적 등급을 판정하는 것이 이 말씀의 목적은 아닙니다. AC는 창조의 날들을 통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 자기 영적 수준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 현재의 여섯째 상태를 ‘거듭남의 최종 완성’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창1의 여섯째 날이 매우 높은 상태이고 ‘심히 좋았더라’고 불리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2에는 일곱째 날이 이어지고, AC.62부터는 일곱째 날과 천적 인간의 상태가 설명됩니다.

 

따라서 AC.60의 ‘심히 좋았더라’를 가볍게 낮출 필요도 없지만, 뒤에 이어지는 일곱째 날의 몫까지 여기에 미리 가져와 ‘모든 거듭남의 최종 완성’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글이 말하는 만큼만 충분히 말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왜 앞선 상태들은 ‘좋았더라’이고 이번에는 ‘심히 좋았더라’일까요? AC.60의 답은 끝까지 단순합니다.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거듭남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사람에게 진리가 있고 신앙이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룹니다.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를 이루는 상태를 말씀은 ‘심히 좋았더라’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창1:31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라고 합니다. 창조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처럼, 속뜻에서 진행되는 거듭남 역시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새로운 창조가 아닙니다.

 

그래서 AC.60을 읽을 때 가장 마지막에 남아야 할 말도 인간의 성취보다 말씀의 선언이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AC.60은 바로 이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 안에,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고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밝힙니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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