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9

‘가인’(Cain)이라 불린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이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해졌습니다. 사랑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신앙을 으뜸으로 삼아 사랑보다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이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은 점차 그것에서 벗어났으며,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은 마침내 신앙마저 완전히 부인했습니다. 이때가 되자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왔고, 여기서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라 불리는 새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라멕의 아내들’(wives of Lamech)이라 불립니다. 라멕에게는 아무런 신앙도 없었지만 이들이 그의 아내들이라 불리는 것은, 역시 아무런 신앙도 없었던 유대인들의 속 교회와 겉 교회가 말씀에서 ‘아내들’(wives)이라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야곱의 두 아내인 레아와 라헬로 표상되는데, 레아는 겉 교회를, 라헬은 속 교회를 표상합니다. 이 교회들은 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일 뿐입니다. 속 교회에서 분리된 겉 교회, 곧 표상적 교회는 우상 숭배적인 것 또는 죽은 것과 같지만, 속 교회와 겉 교회가 함께 있을 때 하나의 교회를, 실로 동일한 하나의 교회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야곱과 그의 후손들은 라멕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신앙도 없었으므로, 교회가 그들에게 머물 수 없었고 불신앙이 아니라 무지 가운데 살고 있던 이방인들에게 옮겨졌습니다. 교회가 황폐해졌으면서도 자기들 가운데 진리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머무는 일은 드물며, 있다 하더라도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들에 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옮겨집니다. 이들은 앞의 사람들보다 신앙을 훨씬 더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The case was the same with the heresy called “Cain,” which in process of time was vastated, for although it acknowledged love, yet it made faith the chief and set it before love, and the heresies derived from this one gradually wandered from it, and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altogether denied even faith. When this time arrived, a new light, or morning, shone forth, and a new church was made which is here named “Adah and Zillah,” who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They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although he possessed no faith, just as the internal and external church of the Jews, who also had no faith, are also in the Word called “wives,” being represented by Leah and Rachel, the two wives of Jacob—Leah representing the external church and Rachel the internal. These churches, although they appear like two, are yet only one; for the external or representative, separate from the internal, is but as something idolatrous, or dead, whereas the internal together with the external constitute a church, and even one and the same church, as Adah and Zillah do here. As however Jacob and his posterity, like Lamech, had no faith, the church could not remain with them, but was transferred to the gentiles, who lived not in infidelity but in ignorance. The church rarely, if ever, remains with those who when vastated have truths among them [apud se] but is transferred to those who know nothing at all of truths, for these embrace the faith much more easily than the former.

 

해설

AC.409는 가인의 계보에서 일어난 황폐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설명하면서, 교회의 속과 겉이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05에서는 라멕이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고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가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408에서는 이전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두 설명을 연결하여, 가인에게서 시작된 분리가 라멕에게서 신앙의 소멸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교회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가인이라 불린 이단이 처음부터 사랑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사랑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신앙을 으뜸으로 삼아 사랑보다 앞세웠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분리였습니다. 참된 질서에서는 신앙이 사랑에 속하고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하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은 그 질서를 뒤집어 신앙이 사랑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후 그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은 점차 최초의 상태에서 더 멀어졌고, 마침내 여섯 번째인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완전히 부인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처음 상태와 라멕의 마지막 상태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인은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웠습니다. 반면 라멕은 신앙마저 부인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는 처음부터 모든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데서 시작하여 그 분리가 점차 진행된 끝에 신앙 자체도 소멸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409는 이러한 진행을 ‘점차 그것에서 벗어났다’는 말로 압축합니다.

 

바로 그때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왔고 새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새 교회를 ‘아다와 씰라’라고 부릅니다. AC.405에서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며,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 구별을 교회의 속과 겉이라는 관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새 교회는 내적인 것만을 가진 교회도 아니고 외적인 것만을 가진 교회도 아닙니다. 속과 겉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라멕에게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왜 새 교회를 나타내는 아다와 씰라가 하필 ‘라멕의 아내들’이라고 불리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에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그의 해석에서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도 참된 신앙이 없었지만, 그들과 관련된 교회의 속과 겉은 말씀에서 아내들로 표상됩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가 라멕의 아내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만으로 라멕 자신에게 참된 신앙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교에서 레아는 겉 교회를, 라헬은 속 교회를 표상합니다. 겉 교회는 예배의 형식과 의식, 말씀의 외적인 표현과 생활의 자연적인 차원에 관계되고, 속 교회는 그 안에 있어야 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살아 있는 신앙에 관계됩니다. 물론 이번 번호가 레아와 라헬의 모든 상응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두 아내의 표상을 통하여 교회의 속과 겉이 구별되면서도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원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원리를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속 교회와 겉 교회는 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속과 겉은 서로 독립하여 따로 존재하는 두 교회가 아닙니다. 속 교회가 겉 교회에 생명을 주고, 겉 교회는 속 교회가 자연적인 삶 가운데 나타나는 형식이 됩니다. 따라서 둘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앞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설명할 때 확인한 원리와도 통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구별된다고 해서 서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듯, 교회의 속과 겉도 구별되지만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교회에서 분리된 겉 교회, 곧 표상적 교회는 ‘우상 숭배적인 것 또는 죽은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예배 형식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 형식이 속에 있는 사랑과 신앙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예배와 의식이 아무리 정교하고 말씀의 외적인 형식을 충실히 보존하더라도,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교회의 외적 표현이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속 교회와 겉 교회가 함께 있을 때에는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를 이룹니다.

 

이것이 아다와 씰라에게도 적용됩니다.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고,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서로 경쟁하는 두 교회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은 새 교회의 서로 다른 차원을 나타내며, 그 차원들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룹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는 어느 한쪽만을 참된 교회로 여기거나 다른 한쪽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새 교회는 내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함께 있어야 온전한 하나의 교회가 됩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왜 교회가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 머물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 옮겨졌는지를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야곱과 그의 후손들은 라멕과 마찬가지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교회가 그들에게 계속 머물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교회가 옮겨졌다는 것은 어떤 민족의 혈통이나 문화가 본질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적 상태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불신앙’과 ‘무지’의 구별에서 드러납니다. 이번 번호에서 불신앙은 단순히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미 진리들이 자기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반면 무지는 진리 자체를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미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황폐해진 사람들보다 신앙을 훨씬 더 쉽게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진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이미 진리를 알고도 거부하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앞의 AC.408에서 설명한 모독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고 믿으면서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빛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한 방식으로 거룩한 것을 모독한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길이 열려 있습니다. AC.409에서 교회가 무지 가운데 있던 이방인들에게 옮겨졌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영적 질서와 관련됩니다.

 

다만 이 설명을 오늘날 특정 종교나 민족에 속한 사람들의 실제 신앙 상태를 일괄적으로 판정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의 신학적 해석 안에서 교회의 황폐와 이전을 설명하는 원리입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인정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외적인 소속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진리를 많이 배웠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제 AC.405-409의 흐름을 함께 보면 라멕과 두 아내의 의미가 한층 선명해집니다. 가인에게서는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는 분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는 여러 이단을 낳으며 진행되었고,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부인되는 황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때 새로운 아침이 밝아 왔고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새 교회는 천적이고 영적인 내적 차원과 자연적인 외적 차원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결국 AC.409는 두 가지 질서를 함께 보여 줍니다. 하나는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는 분리가 계속될 때 결국 신앙마저 소멸할 수 있다는 황폐의 질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전 교회의 황폐 이후에도 새로운 빛이 비치고, 속과 겉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새 교회가 일어난다는 회복의 질서입니다. 이때 참된 교회의 본질은 외적인 형식만을 보존하는 데 있지 않고, 그 형식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살아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 내적·외적 질서가 함께 이루는 하나의 새 교회를 보여 줍니다. (AC.409 해설)

 

 

 

AC.410, 창4:19, ‘교회의 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 알면서 거부하는 상태와 아직 알지 못하는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0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거나,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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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8, 창4:19,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 아침이 밝는 이유 - 거룩한 것의 모독과 새로운 시작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 더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이전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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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AC.405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Lamech)은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됨으로써 초래된 황폐(vastation)를 의미합니다. 그의 ‘두 아내’(two wives)는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아다’(Adah)는 그 교회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씰라’(Zillah)는 그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By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from Cain, is signified vastation, in consequence of there being no longer any faith; by his “two wives” is signified the rise of a new church; by “Adah,” the mother of its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by “Zillah,” the mother of its natural things.

 

해설

AC.405는 가인에게서 시작된 교리적 분리가 어디에 이르렀으며, 그 이후 어떤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의 AC.399-404에서는 가인이라는 최초의 이단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이단이 나오고,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하는 성읍이 형성되며, 다시 여러 이단이 계보를 따라 파생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계보는 라멕에 이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이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됨으로써 초래된 황폐’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일이었지만, 그 분리가 이어진 끝에는 신앙 자체마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여기서 ‘황폐’(vastation)는 단순히 교회의 외적인 규모가 줄어들거나 제도가 무너지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히는 황폐의 원인은 ‘더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라멕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적 계열이 내적으로 어디까지 쇠퇴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 가인에게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도 보존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신앙이 훗날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데 쓰일 수 있도록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라멕에 이르면 그 계열에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일이 왜 심각한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은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 생명을 얻지 않습니다.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신앙에서 계속 밀어내면 처음에는 신앙만이라도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신앙 역시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라멕의 황폐는 바로 그 분리가 계보를 따라 진행된 결과를 보여 줍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라멕에게서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할 뿐, 그 이전의 각 후손에게서 신앙이 어떤 단계로 얼마나 감소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황폐를 말한 직후 그의 ‘두 아내’가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AC.405의 중요한 전환입니다. 가인의 계보에서 신앙이 소멸하는 것과 새 교회가 일어나는 것이 같은 짧은 번호 안에 함께 등장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두 아내를 단순히 황폐한 교회의 또 다른 특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에게서 이전 교회의 쇠퇴와 구별되는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봅니다.

 

두 아내 가운데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천적인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에, 영적인 것은 그 사랑과 선에 속한 진리와 신앙에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아다가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라는 말은 새 교회 안에서 이러한 내적인 것들이 산출되는 근원적 역할을 표상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아다라는 개인에게서 천적이고 영적인 생명이 독립적으로 나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아다는 새 교회의 이러한 것들이 출현하는 과정을 표상하는 이름입니다.

 

다른 아내인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자연적인 것은 인간의 겉 사람에 속하는 생각과 지식, 말과 행동, 일상적인 삶의 차원과 관계됩니다. 교회는 내적인 사랑과 신앙만을 추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연적인 삶 가운데 표현되고 실현되는 질서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가 각각 천적·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로 구별된다는 사실은 새 교회에 내적인 차원과 자연적인 차원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구별을 곧바로 ‘아다는 좋은 교회이고 씰라는 나쁜 교회’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사람 모두 새 교회의 출현과 관련된다고 말합니다. 아다는 그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며, 씰라는 그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입니다. 자연적인 것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자연적인 삶에까지 내려와 표현될 때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함께 질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후 아다와 씰라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러한 구별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새 교회의 출현을 말하면서도 그 교회의 구체적인 성격과 형성 과정을 아직 모두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AC.405는 라멕의 황폐, 두 아내를 통한 새 교회의 출현, 아다와 씰라가 각각 무엇의 어머니인지만 밝힙니다. 따라서 이 번호만으로 새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었는지, 이전 교회와 정확히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그 안의 모든 천적·영적·자연적 상태가 어떠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자녀들의 의미가 밝혀질 때 그 구체적인 모습도 차례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AC.405가 보여 주는 큰 흐름은 분명합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라멕에게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황폐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라멕의 두 아내를 통하여 새 교회의 출현을 알리고, 그 교회에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이 나타날 것을 예고합니다. 이전 교회의 소멸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 하나의 계보 안에서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이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그 분리를 계속 발전시켜 결국 신앙마저 잃는 상태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교회를 위한 역사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번 번호가 새 교회의 출현을 알려 준다는 사실과, 그 출현의 구체적인 과정이 무엇인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교회의 황폐 이후에도 새로운 것을 일으키시는 섭리의 방향을 볼 수 있지만, 아직 설명되지 않은 세부까지 앞질러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AC.405는 ‘라멕’과 ‘두 아내’를 함께 읽어야 하는 번호입니다. 라멕만 보면 가인에게서 시작된 분리의 비극적인 끝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다와 씰라까지 읽으면 그 끝에서 새 교회의 출현이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다는 그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며,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신앙의 황폐를 말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교회의 내적·외적 형성을 예고합니다. 인간의 실패가 마지막 말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주님의 섭리가 마지막까지 말씀의 흐름을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AC.405 해설)

 

 

 

AC.406, 창4:19, ‘라멕은 왜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는가? -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라멕’(Lamech)이 황폐(vastation), 곧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뒤에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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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4, 창4:18, ‘가인의 계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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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새로운 교회가 이전 교회적 상태가 조금 쇠퇴했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져 극도의 모독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왜 새로운 교회는 이렇게 이전 상태의 가장 어두운 종말과 맞닿아 나타날까요?

 

먼저 이것을 주님께서 이전 교회를 일부러 타락시키신 뒤 새로운 교회를 세우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타락과 왜곡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거절하고 자신의 proprium을 따르는 데서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끊임없이 공급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까지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한 교회적 상태 안에 아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그것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보존하시고 이끄신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계속해서 선과 진리를 거부하고 왜곡하며,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 폭력까지 가하는 상태에 이르면 그 교회적 상태는 더 이상 본래의 교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이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난다’는 것은 실패한 상태를 강제로 수리하여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과는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마련하십니다. 인간의 한 상태가 끝나는 것과 주님의 구원의 섭리가 끝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 점에서 AC.330의 가인의 표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을 때, 그것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수 있도록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보존은 가인에서 이어지는 모든 상태가 반드시 올바르게 회복될 것이라는 보장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라멕에 이르러 그 계열은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고, AC.33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종말의 때에 아다와 씰라로 의미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특정한 한 교리적 계열의 성공에 매여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한 상태가 자유의 오용으로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구원의 길 자체까지 인간이 소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가 문자적으로 라멕의 아내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렇다면 새 교회가 라멕의 악에서 생겨난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초기의 가족과 계보는 속뜻에서 교회와 교리의 상태 관계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악이 변하여 새 교회가 되었다고 읽기보다, 라멕으로 표상되는 종말의 상태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이 말씀의 계보 안에서 함께 묘사된다고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새로운 교회가 홍수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와 같다는 뜻도 아닙니다.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교회는 아직 홍수 이전의 문맥 안에 있습니다. 노아의 교회는 이후 태고교회의 종말과 더 큰 거듭남 질서의 전환 속에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역사적 교회 시대를 가리킨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말씀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굳이 가장 어두운 종말과 함께 묘사할까요? 그것은 인간의 실패와 주님의 섭리를 동시에 보여 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선과 진리를 소멸시키고 모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도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가장 어두워져야 주님이 역사하신다’는 법칙을 만들자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역사하십니다. 오히려 인간이 그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한 상태가 끝에 이르렀을 때, 주님의 섭리가 그 종말 너머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우리가 뒤늦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34의 ‘가장 어두운 때’는 절망의 증거라기보다 인간의 종말이 주님의 종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이 모두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른 상태에서도 주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다시 선과 진리가 결합되고, 체어리티와 신앙이 살아 있는 교회적 상태가 일어날 수 있도록 계속 섭리하십니다.

 

이것이 AC.334가 교회의 종말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희망을 품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전 교회의 내적 생명은 끝날 수 있지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가장 깊은 어둠보다 주님의 구원의 뜻이 더 멀리 갑니다.

 

 

 

AC.334 심화 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 심화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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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르렀을 때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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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다음 AC.333에서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한 교회적 상태에서 신앙마저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나타난다는 것이 모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한 교리적 계열이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과 ‘주님의 교회 전체가 끝났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332가 말하는 라멕의 상태는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그 교리적 계열의 마지막을 나타냅니다. 그 안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더 이상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주님께서 더 이상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일으키실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33은 바로 이 점을 보여 줍니다. 라멕으로 표상되는 한 상태가 종말에 이른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그 새로운 교회를 표상하고,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은 그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멕이 좋아져서 다시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가 끝난 자리에서 다른 교회적 상태가 새롭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한 교리적 계열의 성공 여부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어떤 상태가 자유의 오용과 왜곡 때문에 종말에 이를 수는 있지만, 주님의 구원의 질서가 그 상태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의 길을 막더라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다른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이 점에서 AC.330의 ‘가인의 표’와도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보존이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교리적 상태가 반드시 끝까지 살아 있는 신앙을 유지한다는 보장은 아니었습니다. 라멕에서 그 한 계열은 결국 신앙마저 잃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AC.333은 오히려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즉 주님의 섭리는 특정한 하나의 계열에만 매여 있지 않습니다. 한 상태가 종말에 이르더라도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 자체가 소멸되지 않도록 계속 역사하십니다.

 

여기서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는 아직 홍수 이전의 문맥 안에 있습니다. 반면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는 태고교회의 종말 이후 인간의 거듭남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더 큰 전환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어떤 곳에서 ‘새로운 교회’라고 말할 때마다 반드시 인류 역사의 새로운 대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앞의 상태와 구별되는 새로운 교회적 형성이 일어났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AC.333의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이 점은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시간표로 읽지 않는 데도 중요합니다. 라멕,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단순히 ‘나쁜 아버지와 좋은 자녀들’처럼 읽으면 속뜻의 구조를 놓치게 됩니다. 중심은 개별 인물의 도덕적 성격이 아니라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끝나고 새롭게 형성되는가에 있습니다.

 

AC.333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새로운 교회의 성격이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통하여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이 각각 교회의 천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종말 가운데서 새로 일어난 교회에도 다시 교회에 속한 여러 차원의 것들이 존재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태고교회 최초의 순수한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천적인 것’, ‘영적인 것’, ‘자연적인 것’이라는 말을 사용하더라도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는 이어지는 AC에서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AC.333은 우선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그 교회 안에 이러한 것들이 있었다는 큰 틀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라멕과 아다와 씰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말과 새 시작’입니다. 라멕은 한 교리적 계열의 끝을 나타내고, 아다와 씰라는 그 끝의 자리에서 새롭게 일어난 교회를 나타냅니다. 인간의 한 상태는 끝날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끝을 새로운 시작의 자리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 교회를 바라볼 때에도 중요합니다. 어떤 교회적 형식이나 제도가 쇠퇴한다고 해서 곧 주님의 교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외적인 조직이 계속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내적인 교회적 생명이 살아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실제로 결합되는 곳에서 새롭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33은 라멕의 종말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한 계열이 신앙에 속한 것까지 잃었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인간이 종말을 만들 수는 있어도 주님의 섭리 자체를 종말시키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AC.332에서 AC.333으로 넘어갈 때 가장 깊이 붙들어야 할 아르카나입니다.

 

 

 

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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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창4:19-22)

 

AC.333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는데,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가 이를 의미하며, 그들의 아들들인 ‘야발’(Jabal), ‘유발’(Jubal), ‘두발가인’(Tubal-Cain)으로 그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야발’은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유발’은 영적인 것들을, ‘두발가인’은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19-22절) A new church then arose, which is meant by “Adah and Zillah,” and is described by their sons “Jabal,” “Jubal,” and “Tubal Cain”; the celestial things of the church by “Jabal,” the spiritual by “Jubal,” and the natural by “Tubal-Cain.” (verses 19–22)

 

해설

AC.333은 가인 계열의 이야기를 읽다가 상당히 뜻밖의 전환을 만나는 글입니다. 바로 앞 AC.332에서는 가인으로부터 생겨난 여러 이단들이 계속 변질되어 오다가 마지막 ‘라멕’에 이르렀고,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인으로 표상된 그 교리적 계열은 완전히 종말에 이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AC.333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회를 ‘아다와 씰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먼저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의 계열이 원래의 태고교회 상태로 되돌아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라멕에 이른 그 교리적 상태는 이미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은 종말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한 교리적 계열이 종말에 이른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와 섭리까지 함께 종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종말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러한 새로운 교회를 표상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330-332와 함께 읽을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AC.330에서는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므로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AC.332에서는 가인으로부터 이어진 한 교리적 계열이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게 됩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AC.333은 오히려 바로 그 종말 가운데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새로운 교회가 ‘아다와 씰라’라는 두 여자로 표상된다는 점입니다. 말씀에서 여자는 교회를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AC.333의 단계에서는 아다와 씰라 각각의 세부적인 의미를 너무 앞서 정리하기보다, 우선 두 사람이 함께 ‘새로운 교회’를 의미한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교회의 보다 구체적인 상태와 당시의 상황은 이어지는 번호에서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또한 이 새로운 교회의 성격은 그들의 아들들인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통하여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야발은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유발은 ‘영적인 것들’을, 두발가인은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 새로운 교회 안에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 차원에 해당하는 것들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들’은 주님 사랑과 선에 관계된 것들, ‘영적인 것들’은 신앙과 진리에 관계된 것들, ‘자연적인 것들’은 그것들이 외적 삶과 형식 안에서 나타나는 차원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333 한 번호만으로 이 셋의 구체적인 성격이나 상호 관계를 모두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후 AC에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각각 무엇을 더 구체적으로 표상하는지가 자세히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33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라멕의 종말 뒤에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그 교회 안에 다시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나타났다’는 큰 구조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한 교리적 계열의 실패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 편에서는 한 상태가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새로운 시작을 마련하십니다.

 

여기서 ‘새로운 교회’라는 말을 곧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교회는 아직 창4의 홍수 이전 문맥 안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교회입니다.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는 태고교회의 종말 이후 인간의 거듭남 질서 자체가 달라지는 더 큰 전환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이라도 그 범위와 의미를 문맥에 따라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AC.333을 ‘라멕이라는 악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들들은 갑자기 좋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식으로 읽으면 속뜻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추적하는 것은 개별 인물의 도덕성보다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입니다. 라멕은 한 교리적 계열의 종말을 표상하고, 아다와 씰라는 그 종말 가운데 새롭게 일어난 교회를, 그들의 아들들은 그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을 표상합니다.

 

이 점에서 창4의 계보는 다시 한번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낳았다’는 말은 속뜻에서 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가 파생되고 전개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가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낳았다는 것은 그 새로운 교회 안에서 여러 교회적 요소들이 형성되고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333은 절망의 끝에서 시작되는 글입니다.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지만,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고, 그 안에서 다시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인간의 한 계열은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종말을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자리로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어떤 교회적 형식이나 한 시대의 신앙 구조가 쇠퇴한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와 구원의 역사가 끝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형식의 종말 가운데서도 보존할 것을 보존하시고 새롭게 일으킬 것을 일으키십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형식을 붙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어떤 선과 진리, 어떤 체어리티와 신앙의 질서를 새롭게 일으키고 계시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AC.333의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라멕의 종말’과 ‘아다와 씰라의 새로운 교회’가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의 종말이 곧 주님의 종말은 아닙니다. 인간 편에서 더 이어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AC.333 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AC.333 심화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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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르렀을 때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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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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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곧이어 등장하는 아다와 씰라, 그리고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후의 AC를 읽다 보면 이들이 단순히 악과 거짓만을 표상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가인 계열은 이미 라멕에서 끝난 것 같은데 왜 그 뒤에 유용해 보이는 것들이 다시 나타나는가?’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내적인 교회의 생명이 소멸되었다’는 것과 ‘그 계열에서 모든 외적인 것까지 즉시 쓸모없어졌다’는 것이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내적으로 종말에 이를 수 있어도 그 안에서 형성된 지식과 기술, 예배와 교리의 외적 형식 가운데 후대에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 남을 수 있습니다.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악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사회와 교회의 쇠퇴 가운데서도 후대에 쓸 수 있는 것들을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설명하는 AC에서는 천적인 것, 영적인 것, 자연적인 것과 관련된 여러 외적 형식과 기능이 구별되어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용한 외적인 것이 나타났다’는 사실과 ‘가인으로 시작된 교회적 상태가 다시 본래의 생명을 회복했다’는 것을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멕에서 신앙의 내적 생명이 종말에 이르렀다는 설명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 이후에 유용한 것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가인 계열이 다시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내적인 것이 약해지거나 사라진 뒤에도 외적인 지식과 기술, 형식은 한동안 남을 수 있고 오히려 크게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나중에 올바른 내적 생명과 결합될 때 좋은 쓰임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종말’도 모든 외적 종교 활동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생명인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의 결합이 더 이상 그 교회적 상태 안에서 유지되지 못할 때 내적으로는 종말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 형식과 교리적 지식과 여러 유용한 외적 요소는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창4와 창5를 읽을 때에도 ‘가인 계열은 악한 사람들, 셋 계열은 선한 사람들’이라는 단순한 두 혈통의 대립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심 관심은 각각의 계보가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와 그 변화에 있습니다. 창5의 계보 역시 언제까지나 동일하게 순수한 상태로 유지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는 결국 쇠퇴하고 종말을 향해 갑니다.

 

그러므로 홍수 역시 단순히 ‘악한 가인 혈통은 멸망하고 선한 셋 혈통은 살아남았다’는 구조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속뜻과 맞지 않습니다. 노아는 단순한 ‘셋 계열의 착한 생존자’라기보다 새로운 교회적 상태, 곧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거듭나는 영적 교회의 시작을 표상합니다.

 

후속 AC 전체에서 보면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는 인간의 의지 자체가 깊이 부패하면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이해와 진리를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며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노아는 바로 그 전환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아다와 씰라 계열에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종말을 향하고 있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 버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보존하시고, 후대의 교회와 인간 사회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쓰임을 위해 남겨 두십니다.

 

따라서 이 심화가 보여 주는 중요한 원리는 ‘종말 가운데서의 보존’입니다. 내적 생명이 쇠퇴해도 모든 외적인 유용성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쇠퇴한 것 가운데서조차 후대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건져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만나면서 우리는 ‘가인 계열이 다시 살아났구나’라고 보기보다, ‘내적인 교회적 생명이 종말을 향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어떤 외적인 것들을 보존하여 이후의 쓰임을 준비하시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AC.332 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심화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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