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라는 말은 ‘가인’(Cain)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 장의 처음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합니다. 이전에는 그들이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에 관한 구별된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이전에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가져다가 교리로 정리하였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습니다. 고대에는 새로운 것이 생길 때마다 그것에 이름을 붙였으며, 이런 식으로 그 이름 안에 담긴 것들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라는 말로 설명되고(창16:11), That the words “I have gotten a man, Jehovah” signify that with such as are called “Cain” faith i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t the beginning of this chapter. Previously, they had been as it were ignorant of what faith is, because they had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of faith. But when they began to make a distinct doctrine of faith, they took the things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reduced them into doctrine, calling it “I have gotten a man, Jehovah,” as if they had found out something new; and thus what was before inscribed on the heart became a mere matter of knowing. In ancient times they gave every new thing a name, and in this way set forth the things involved in the names. Thus the signification of the name Ishmael is explained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her affliction;” (Gen.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창16:11)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므로’(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라는 말로(창29:32), that of Reuben, by the expression, “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 (Gen. 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창29:32)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라는 말로(창29:33), the name Simeon,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 (Gen. 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유다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라는 말로 설명됩니다(창29:35). and that of Judah by, “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 (Gen. 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창29:35)

 

또한 모세는 자신이 세운 제단을 ‘여호와 닛시’, 곧 ‘여호와는 나의 깃발’(Jehovah my banner)이라고 불렀습니다(출17:15). and an altar built by Moses was called, “Jehovah my banner.” (Exod. 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출17:15)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여기서는 신앙의 교리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곧 ‘가인’(Cain)이라고 한 것입니다. In like manner the doctrine of faith is here denominated “I have gotten a man, Jehovah,” or “Cain.”

 

해설

AC.340은 바로 앞 AC.338에서 말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전혀 새로운 거짓 신앙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들이 교리로 정리한 것은 이전부터 태고교회 안에 있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진리의 내용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알고 받아들이는 방식이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신앙에 무지했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하나의 독립적인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떼어 정의하고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에 속한 것은 이미 사랑과 생명 안에 들어 있었고, 말하자면 ‘마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하나씩 따로 꺼내어 구별하고, 그것들을 ‘신앙에 관한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변화를 ‘이전에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그들이 정리한 모든 내용이 갑자기 거짓이 되었다는 뜻도 아니고, 교리를 만들었다는 행위 자체가 악이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문제는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본래 사랑 안에 살아 있던 신앙이 점차 사랑으로부터 구별되고, 마침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AC.338에서 보았듯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성립할 수 있는 무엇으로 세우기 시작한 데 있습니다. AC.340은 그 분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퍼셉션으로 알던 것’과 ‘지식으로 알게 된 것’의 대비를 통하여 보여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에 전혀 몰랐던 진리를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을 따로 꺼내어 교리적으로 정리하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무엇인가를 새로 ‘얻었다’고 여겼고, 그렇게 얻었다고 여긴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미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더 내적인 앎의 방식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진리를 사랑 안에서 살아서 알았는데 이제는 그것을 자기 앞에 하나의 대상으로 세워 지식으로 알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생명 안에서 알려지는 것에서 신앙에 관하여 아는 것으로 옮겨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퍼셉션은 좋고 지식은 나쁘다’, 또는 ‘교리가 없는 신앙이 교리가 있는 신앙보다 더 높다’는 일반적인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특수한 천적 상태를 설명하는 문맥이기 때문입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이 주어졌다고 설명하면서, 곧이어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했습니다. 후대의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공부하며 선과 진리를 구별하여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거듭남에 필요한 과정입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지식에만 머물러 체어리티와 결합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단지 지식이 되어 가는 방향으로 쇠퇴가 나타났다면, 후대 인간에게서는 주님께서 지식과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를 다시 사랑과 삶 안으로 이끄셔서 체어리티와 결합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두 시대의 질서를 단순히 같은 공식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AC.340 후반에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 그리고 ‘여호와 닛시’가 차례로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이 ‘가인’이라는 이름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마엘은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는 말과 함께 이름이 주어지고(창16:11),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므로’라는 말과 연결되며(창29:32),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라는 말과 연결됩니다(창29:33). 유다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에서 그 이름이 주어지고(창29:35), 모세가 세운 제단에는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이 붙습니다(출17:15).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인용한 것은 여기서 이스마엘이나 르우벤, 시므온, 유다의 속뜻을 각각 해설하거나 ‘여호와 닛시’의 상응을 따로 밝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모든 예가 보여 주는 공통점은 고대에는 어떤 상태나 사건의 성질을 이름 안에 담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 역시 단순한 호칭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교회적, 교리적 상태를 담고 있는 이름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바로 앞 AC.339와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AC.339에서는 태고인들이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들을 의미하게 하였으며, 교회에 속한 것들이 자연적인 출생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나는’ 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들로 계보를 구성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40에서는 그 원리를 실제 성경의 여러 이름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인용구절은 각각 독립된 다섯 가지 주제를 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설명을 여러 사례로 뒷받침합니다.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 ‘여호와 닛시’가 각각 그 이름과 관련된 상태와 의미를 담고 있듯이,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특정한 변화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39와 AC.340은 서로 떨어진 설명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이름과 계보로 표현되는가’를 설명하는 하나의 연속된 해석 원리가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가인의 시작이 얼마나 미묘한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처음부터 ‘사랑은 필요 없다’, ‘체어리티는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구별하여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신앙은 점차 사랑으로부터 독립된 위치를 갖게 됩니다. 이후 창4의 흐름에서 이 분리는 더 분명해져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340은 단순히 ‘옛사람들은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가?’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가인이라는 교리적 상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이 지식의 대상이 되고, 그 지식이 사랑 안에 다시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것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의 본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대목은 AC를 읽고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실제적인 경고가 됩니다. 우리는 ‘상응’, ‘퍼셉션’, ‘리메인스’, ‘속 사람과 겉 사람’,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같은 개념을 배우면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 지식이 많아질수록 그것을 ‘내가 얻은 것’으로 여기고, 그 지식 때문에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밝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위험도 생길 수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소유하여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수단입니다. 배운 진리를 통하여 자기 안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며,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갈 때 그 진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AC.340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아는 진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머리에만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마음과 삶에도 새겨지고 있는가?’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가인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살아 있는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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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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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

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밝혀졌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그 교회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잉태와 출생 역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태고인들에게는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들을 의미하게 하며, 그렇게 해서 계보를 구성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교회에 속한 것들은 서로 이러한 관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곧 자연적인 출생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나는 것처럼, 교회에 속한 것들도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는 교회에 속한 것들을 ‘잉태’(conceptions), ‘출생’(births), ‘자손’(offspring), ‘갓난아이’(infants), ‘어린아이’(little ones), ‘아들’(sons), ‘딸’(daughters), ‘청년’(young men) 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말씀의 예언적 부분에는 이와 같은 표현들이 매우 많이 나옵니다. In the three foregoing chapters it has been sufficiently shown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so that it cannot be doubted, and this being admitted, it is evident that the conception and the birth effected by that church were of the nature we have indicated. It was customary with the most ancient people to give names, and by names to signify things, and thus frame a genealogy. For the things of the church are related to each other in this way, one being conceived and born of another, as in generation. Hence it is common in the Word to call things of the church “conceptions,” “births,” “offspring,” “infants,” “little ones,” “sons,” “daughters,” “young men,” and so on. The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abound in such expressions.

 

해설

AC.339는 앞으로 이어질 창4의 이름과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바로 앞 AC.338에서 스베덴보리는 ‘아담과 그의 아내’를 태고교회로, 그 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신앙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한 상태를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가 어떻게 ‘잉태’하고 ‘낳으며’, 신앙이나 교리에 속한 것이 어떻게 그 교회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39는 바로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인들에게는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게 하며, 그렇게 해서 계보를 구성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 속한 것들’도 자연적인 혈연관계와 비슷한 발생 관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인 출생에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나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하나의 교회적 상태가 다른 상태에서 생겨나고, 하나의 교리적 원리가 또 다른 교리적 상태를 낳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교회에 속한 것들을 ‘잉태’, ‘출생’, ‘자손’, ‘갓난아이’, ‘어린아이’, ‘아들’, ‘딸’, ‘청년’ 등의 가족과 출생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 ‘말씀의 예언적 부분에는 이와 같은 표현들이 매우 많이 나온다’고 덧붙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창4의 이름들을 읽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설에서 가인과 아벨, 에녹과 이랏, 므후야엘과 므드사엘, 라멕 등을 읽을 때 중심이 되는 것은 개인들의 가족사를 재구성하는 일이 아니라, 그 이름들이 의미하는 교리적, 교회적 상태와 그 상태들의 발생 관계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계보를 읽으면서 우리가 계속 물어야 할 것은 ‘이 사람은 역사적으로 누구였는가?’만이 아니라 ‘이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은 앞의 어떤 상태로부터 생겨났고 다시 무엇을 낳는가?’입니다. 그렇다고 곧바로 ‘그러므로 이것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지어낸 비유다’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339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하려는 핵심은 역사성 여부를 논증하는 데 있지 않고, 말씀의 이름과 계보 안에 교회에 속한 것들의 영적 발생과 파생이 담겨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잉태’와 ‘출생’이라는 표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9가 이 둘의 세부 상응을 각각 따로 정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은 분명합니다. 교회에 속한 것들은 서로 아무 관계 없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생겨납니다. 이 원리를 우리의 내적 상태에 적용해 보면, 어떤 생각이나 원리가 마음에서 받아들여지고 자라다가 마침내 하나의 확고한 신앙이나 삶의 형태로 나타나는 과정을 ‘잉태’와 ‘출생’의 이미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AC.339의 직접적인 단어별 정의라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한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난다’는 원리를 인간의 내적 삶에 적용하여 이해한 것입니다.

 

바로 앞 AC.338의 가인과 연결하면 이 원리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는 본래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교리적 상태가 생겨났으며, 그것이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가 자리 잡으면 그 원리에서 다시 다른 교리적 상태들이 파생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오고, 다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계보가 이어집니다. AC.331에서 에녹을 이 이단의 ‘확장’이라고 했고, AC.332에서는 이 하나의 이단에서 여러 이단이 생겨났으며 그 마지막 라멕에게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AC.339는 바로 그러한 앞의 개요가 왜 ‘아버지-아들-후손’이라는 계보의 형식으로 기록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해석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우리가 앞서 창4와 창5의 관계를 살피면서 중요하게 구별했던 문제에도 빛을 줍니다.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을 단순히 두 집안의 연대기로 놓고 ‘가인 계열이 먼저 진행된 뒤 셋 계열이 시작되었는가?’, ‘두 가문은 정확히 어느 시점에 함께 존재했는가?’와 같은 질문만으로 접근하면 스베덴보리가 이 계보에서 읽는 핵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 계보들은 태고교회 안에서 나타난 교리적, 교회적 상태들의 계승과 파생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나란히 이어진다’고 말할 때에도 두 실제 가문의 정확한 역사적 병행 연표를 우리가 알고 있다는 뜻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각각의 계보를 통하여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와 그 흐름을 보여 주며, AC.339는 그 계보를 무엇보다 그러한 영적 발생 관계로 읽도록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영적 원리는 대개 혼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받아들여지면 그것으로부터 또 다른 선한 생각과 애정이 생겨나고, 그것들은 다시 선한 말과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거짓된 원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그 거짓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이 필요해지고, 그것이 다시 다른 악과 거짓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잉태하고 낳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39의 직접적인 역사 서술이라기보다, 이 번호가 제시하는 발생과 파생의 원리를 우리 자신의 영적 삶에 적용해 본 것입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반대로 악과 거짓은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proprium으로 돌이킬 때 서로 연결되고 증식합니다.

 

바로 이 원리가 가인의 계보를 무겁게 만듭니다. AC.338에서 나타난 시작은 겉으로 보면 미세해 보입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AC.339가 보여 주는 계보의 원리에 따르면 하나의 교리적 상태는 그 자체로 고립되어 머무르지 않고 다른 상태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다시 그 분리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교리를 낳고, 그 교리가 다른 왜곡을 낳으며, 그렇게 파생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창4의 계보는 바로 이러한 영적 발생의 연속을 보여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의 작은 분리를 ‘이 정도는 괜찮다’고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 라멕의 상태가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처음 받아들인 원리 안에 그다음 상태들이 파생될 수 있는 방향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 각 사람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생각과 애정은 서로 아무 관계 없이 흩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 삶에서 살아가면 그 진리가 다른 선한 생각과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고, 반대로 하나의 거짓을 허용하고 자기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을 받아들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 안에서도 일종의 ‘계보’가 만들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창4의 각 인물을 개인의 심리 단계와 기계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키는 방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39의 직접적인 대상은 태고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것들의 발생 관계이며,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는 ‘내가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낳고 있는가?’라는 영적 자기 성찰의 원리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따라서 AC.339는 창4의 낯선 이름들을 읽기 위한 단순한 사전 설명이 아닙니다. 앞으로 가인의 계보를 읽을 때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하나의 중요한 해석 열쇠입니다. 이름을 보면서 단지 사람을 찾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이름으로 의미된 교리적, 교회적 상태를 보고, 출생을 보면서 생물학적 혈통만을 따라가는 데 머물지 않고 무엇이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39를 읽고 난 뒤 창4의 계보 앞에서 계속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으로부터 태어났으며, 또 무엇을 낳고 있는가?’ 이 질문을 붙들고 가인의 계보를 읽으면 창4는 더 이상 낯선 고대 이름들의 목록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의 교회적 상태가 다른 상태를 낳고, 그 상태가 다시 또 다른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계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우리 안에서 지금 어떤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는 어떤 거짓을 허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무엇을 ‘낳게’ 될지를 주님 앞에서 살피게 됩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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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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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보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미 그 분리가 장차 어디까지 갈 것인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창4의 흐름을 따라가면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그 분리가 처음 나타났을 때 강제로라도 막지 않으셨을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서 주님은 인간이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사람이 돌이킬 수 있도록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다만 그 모든 일을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하십니다.

 

따라서 ‘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막지 않으셨다’고 대답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인간이 주님과 결합하려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제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사람의 행동을 외적으로 통제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만일 인간이 잘못된 선택을 전혀 할 수 없도록 의지와 사고가 강제된다면, 겉으로는 질서 있는 행동이 나타날지 몰라도 자유로운 사랑의 결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허용’의 원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악을 원하시거나 승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가운데 그 자유가 잘못 사용되는 것까지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허용’과 ‘방치’는 전혀 다릅니다. 방치는 인간을 내버려 두는 것이지만, 주님의 허용 안에는 끊임없는 억제와 인도와 보존이 함께 있습니다. 사람이 악으로 기울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악이 가능한 한 더 멀리 진행되지 않도록 억제하시고,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시 돌아설 수 있는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창4의 가인 이야기에서도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가인이 분하여 안색이 변했을 때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가인이 더 멀리 나아가기 전에 다시 선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AC.328에 따르면 체어리티는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삼아 체어리티보다 높아지지만 않는다면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신앙을 버려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다시 선과 체어리티와 올바른 관계 안에 놓이도록 부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지막 선택을 강제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못하도록 그의 내면을 강제로 조종하시거나 다른 생각밖에는 할 수 없도록 만드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유가 거듭남과 결합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을 보여 주시고 진리로 깨우치시며, 악을 억제하시고 내적으로 경고하시며,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마지막 자리까지 대신 차지하지는 않으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한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이고, 속뜻에서는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매우 깊은 실패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십니다. AC.330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것이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보존된 것은 분리된 신앙의 잘못된 상태 자체가 승인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장차 선한 목적에 사용하실 수 있는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방식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잘못되면 그것을 통째로 없애 버리고 싶어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왜곡한 것 가운데에서도 장차 구원의 질서 안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십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은 잘못되었지만 신앙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그것을 사랑에서 떼어 냈지만 주님께서는 신앙이라는 수단 자체를 버리지 않으시고, 이후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될 수 있도록 보존하십니다.

 

이 점은 바로 뒤의 셋과 에노스에서도 보게 됩니다. AC.335에서는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시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신앙을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신앙 자체를 폐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더 넓은 이후의 AC 문맥에서는 태고교회의 종말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마침내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도록 준비하시는 흐름도 나타납니다. 다만 이것은 AC.338 한 번호가 직접 말하는 내용이라기보다 이후 AC에서 더 넓게 전개되는 섭리의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패와 주님의 섭리는 동시에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를 오용하여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한 악을 억제하시고,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새로운 회복의 길을 준비하십니다.

 

‘왜 주님께서는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왜 인간에게 잘못 선택할 수 있는 자유까지 허용하셨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자유가 주님과의 결합에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반드시 실제로 악을 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유란 악을 행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인간이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악을 선택할 가능성은 자유의 오용에서 따라오는 것이지 주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한 번도 잘못 선택하지 못하도록 모든 길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면서 선으로 이끄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잘못 선택했을 때에도 가능한 한 회개의 길을 열어 두십니다. 이것이 ‘허용’과 ‘방치’의 차이입니다. 방치는 인간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한순간도 구원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인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억지로 없애지는 않으시지만, 동시에 그가 다시 선으로 돌아설 길도 계속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섭리를 ‘왜 더 강제로 개입하지 않으셨는가?’라는 기준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깊은 섭리는 때로 인간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안에서 선을 향해 이끄시고, 인간의 실패 가운데에서도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여 다시 구원의 질서 안에서 사용하시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사랑과 신앙을 분리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분리 자체를 선이라고 하시지 않으면서도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시고,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될 길을 마련하십니다. 인간의 실패는 실제이지만, 그 실패보다 주님의 섭리가 더 깊습니다.

 

 

 

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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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 심화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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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신앙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먼저 태고교회에도 신앙은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신앙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방식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서 있는 별개의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알았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한 것도 바로 이 뜻입니다.

 

그런데 AC.338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갑자기 신앙을 버렸거나 처음부터 거짓된 신앙을 만들어 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성립할 수 있는 하나의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8에서 ‘가인=신앙’이라고 한 말과 앞에서 ‘가인=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한 말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가인은 참된 것인 신앙을 붙들고 있지만, 그 신앙을 본래의 사랑의 질서에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세우는 교리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이 처음에는 완전히 정상적인 신앙이었다가 나중에 분리된 신앙으로 변했다’고 너무 선명하게 시간적 단계를 나누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338의 바로 이 시점에서 이미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는 분리의 성격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분리의 결과가 처음부터 모두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창4의 뒤를 따라가면 신앙이 점차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질을 드러낸다는 질서를 거부하며,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진행됩니다. 따라서 AC.338은 분리의 원리가 처음 드러나는 지점을 보여 주고, 후속 본문은 그 원리가 어디까지 발전하는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이 ‘구별’과 ‘분리’의 차이입니다. 신앙과 사랑을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신앙이고 무엇이 체어리티인지, 진리와 선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분명히 배우는 것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신앙을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는 것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전자는 이해를 위한 구별이지만 후자는 생명의 질서를 깨뜨리는 분리입니다.

 

부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 차이를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에게 배려와 존중과 신실함의 원칙은 사랑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그 원칙을 글로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사랑을 파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서로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이 원칙들만 정확히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원칙은 사랑을 섬기는 자리에서 벗어나 사랑을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원칙 자체가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참된 것이 본래의 관계에서 분리된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중요하다’, ‘교리는 정확해야 한다’, ‘진리와 거짓을 분별해야 한다’는 말 자체는 모두 옳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과 교리와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가인의 질서가 나타납니다.

 

이 때문에 가인의 문제는 매우 미묘합니다.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참된 것 하나를 전체의 질서에서 떼어 내어 그 자체로 높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단 역시 반드시 처음부터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를 지나치게 높이고 다른 선과 진리와의 살아 있는 결합을 끊을 때에도 왜곡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37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는 설명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는 것 자체를 가인의 상태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먼저 나타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채 독립적인 최종 목적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진리를 배우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 진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시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38의 핵심은 ‘가인은 신앙이다’와 ‘가인은 분리된 신앙이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의미하지만, 바로 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독립된 것으로 인정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창4의 뒤는 그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았고, 나중에는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338은 분리가 처음 드러나는 아주 중요한 지점입니다. 신앙 자체는 참된 것이지만, 그것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살아 있는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지만, 사랑에서 떨어져 자기 자신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신앙은 가인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의 신앙을 쉽게 ‘가인’이라고 판정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더 알수록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고, 악을 더 잘 보고 피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알수록 자기 옳음을 증명하고 다른 사람을 낮추며, 사랑보다 교리적 승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면 우리는 신앙이 그 생명의 자리에서 분리되기 시작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남을 정죄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입니다.

 

 

 

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 심화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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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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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창4:1)

 

AC.338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the man and Eve his wife)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처럼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그 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은 신앙이며, 여기서는 그것을 ‘가인’(Cain)이라 합니다. 하와가 말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는 것은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By the “man and Eve his wife”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s has been made known; its first offspring, or firstborn, is faith, which is here called “Cain”; her saying “I have gotten a man, Jehovah,” signifies that with those called “Cain,” faith wa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해설

AC.338부터 스베덴보리는 창4:1의 각 표현을 본격적으로 풀이하기 시작합니다. 앞의 AC.324-337이 창4 전체의 속뜻을 미리 보여 주는 개요였다면, 이제부터는 본문을 한 구절씩 따라가며 그 안에 담긴 교회적 상태를 자세히 해설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다시 단순한 두 개인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고 그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신앙이라고 하며, 그것을 여기서는 ‘가인’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의 개요에서 가인을 계속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읽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AC.338에서는 그를 단순히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설명이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생겨났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에도 당연히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독립적으로 서 있는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알았고, 그 앎이 바로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 것도 바로 이 뜻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 안에 살아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AC.338에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신앙이 사랑 안에서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있는 무엇처럼 인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가인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은 필요 없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상태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에 속한 것을 사랑 안에서 떼어 내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보기 시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 분리가 이후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더 높이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가인을 ‘처음에는 좋은 신앙이었는데 나중에 나쁜 신앙으로 변했다’고 단순히 시간적으로 나누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38에서 이미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는 데서 가인의 고유한 분리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신앙이라는 참된 것을 가진 상태이면서 동시에 그 신앙을 본래의 사랑의 질서에서 떼어 내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 점에서 ‘신앙을 구별하는 것’과 ‘신앙을 분리하는 것’을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과 신앙을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무엇이고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진리와 선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분명히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구별된 것을 서로 떨어져도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순간 문제가 달라집니다. 신앙이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일 수 있다고 여기고, 나아가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더 본질적인 것으로 높이면 ‘구별’은 ‘분리’가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바로 이 분리입니다. 앞에서 사용했던 부부의 비유도 여기에 도움이 됩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에게 존중과 배려와 신실함은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습니다. 그 원칙들을 글로 정리하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이 없어도 규칙만 정확히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원칙이 사랑에서 독립하여 사랑을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신앙과 사랑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와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말도 이 문맥에서 중요합니다. 영어 표현은 ‘I have gotten a man, Jehovah’인데, 스베덴보리는 이 말에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이 하나의 독립된 실재처럼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의미를 읽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신앙을 거짓이라고 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참되고 중요한 것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위험을 더욱 미묘하게 만듭니다. 명백한 거짓 하나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가 본래 그것이 결합되어 있어야 할 사랑의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성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단이나 교리의 왜곡도 언제나 처음부터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를 전체보다 높이고 다른 진리와 선의 살아 있는 관계에서 떼어 내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처음 난 것’, 곧 첫 번째 자손이라는 표현 역시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태고교회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태어난 한 개인이라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태고교회로부터 어떤 교리적 상태가 처음 파생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시간표로만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개인들의 전기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생겨난 교리적, 교회적 상태들이 어떻게 파생되고 변화했는지를 표상합니다. 또한 AC.338은 가인의 타락이 이미 완성된 상태만을 보여 주는 번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분리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보기 시작한 변화가 나중에는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는 신앙으로 진행하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까지 이어집니다. 겉으로는 미세해 보이지만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바꾸는 결정적인 방향 전환입니다.

 

AC.337과 함께 읽으면 이 점이 더욱 선명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퍼셉션 안에서 하나였기 때문에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따로 세우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매우 심각한 왜곡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신앙과 체어리티를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배우는 것은 그 자체로 가인의 상태가 아닙니다. 후대의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는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채 자기 자신을 최종적인 것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338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지 ‘내가 믿는 교리가 옳은가?’가 아닙니다. ‘그 교리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도 함께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참된 교리라도 자기 확신과 자기 우월성을 강화하는 데만 사용된다면 그 진리는 본래의 질서를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알수록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그 신앙은 자신의 참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생명은 신앙 자체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8의 핵심은 단순히 ‘가인은 신앙이다’가 아닙니다. ‘가인은 본래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상태다’라는 데 있습니다. 가인의 분리는 체어리티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본래 하나로 있어야 할 것을 따로 세우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창4의 상세 해설은 이제 바로 그 분리가 어떻게 점차 교회의 질서를 바꾸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며,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지를 하나씩 보여 줄 것입니다.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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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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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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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창4,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가인의 왜곡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된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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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심화

4.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30:26)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사30:26을 인용한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앞 시72의 ‘해’와 ‘달’에 대한 설명을 보강하기 위해서입니다. 시72에서 ‘해’는 사랑을, ‘달’은 신앙을 의미하며, ‘달이 다할 때까지’라고 한 것은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을 참조하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사야 인용의 중심도 사랑과 신앙의 관계에 있습니다. ‘달’이 의미하는 신앙과 ‘해’가 의미하는 사랑이 서로 분리된 채 남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 안에서 자신의 생명과 완성을 얻는 천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것을 신앙이 없어져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은 진리가 사라지고 사랑만 남는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가 사랑과 완전히 결합되어 그 사랑의 생명이 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 바로 이러한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사랑했고 이웃을 사랑했으며,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서 있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서 사30:26의 말씀은 가인의 분리와 반대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사람들은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냈습니다. 반면 이사야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이미지는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생명 안에 있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다만 ‘가인은 달을 해에서 떼어 냈다’는 표현은 설명을 위한 비유이지 AC.337의 문자 그대로의 정의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은 가인으로 의미된 사람들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따로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해와 달의 표상은 그 분리가 무엇을 깨뜨렸는지를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사30:26의 앞부분에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 분리되고 손상된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회복되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37에서는 이 ‘상처’와 ‘맞은 자리’의 세부 상응을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지나치게 구체적인 의미를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는 부분도 AC.337에서는 직접 해설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일곱’이 거룩함이나 충만함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는 일반적인 상응을 참고할 수는 있지만, AC.337의 인용 목적을 설명하는 데 반드시 세부 해석까지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이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붙드는 것은 단순합니다. 시72의 ‘달이 다할 때까지’라는 말씀은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을 의미하며,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도 그 동일한 천적 질서를 보여 주는 참조 구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부의 비유로 생각하면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에게 존중과 신실함과 배려라는 원칙은 사랑과 떨어진 외적 조항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원칙을 기쁘게 살아갑니다. 원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살아 있게 됩니다.

 

신앙의 진리도 이와 비슷합니다. 신앙이 사랑이 된다는 것은 진리의 구별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가 더 이상 외부에서 강요되는 명제처럼만 존재하지 않고 사랑과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AC.337 [3]은 오늘날 인간의 과정이 태고교회와 다르다는 것도 함께 알려 줍니다.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사람에게 ‘달빛이 햇빛 같아진다’는 원리를 적용할 때도 처음부터 태고교회의 퍼셉션 상태를 그대로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후대 인간에게서는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끝까지 체어리티와 떨어진 지식으로 남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인간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실 때 신앙은 자신의 참된 목적을 향해 갑니다.

 

따라서 사30:26이 AC.337에서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신앙과 사랑의 최종적인 결합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그 결합이 사랑으로부터 오는 퍼셉션 안에 있었고,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형성되는 길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어느 경우에도 신앙과 사랑이 영원히 분리되어 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은 그래서 AC.337 전체를 아름답게 압축해 줍니다. 신앙의 완성은 자신을 사랑과 분리하여 독립시키는 데 있지 않고,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되는 데 있습니다. 가인은 그 결합을 깨뜨린 상태이고, 주님의 질서는 다시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도록 이끄시는 질서입니다.

 

 

 

AC.337, 창4,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가인의 왜곡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된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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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심화 3, ‘시72:1, 3, 5, 7은 왜 인용되었는가?’

AC.337 심화3. 시72:1, 3, 5, 7은 왜 인용되었는가?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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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심화

3. 시72:1, 3, 5, 7은 왜 인용되었는가?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5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시72:1, 3, 5, 7) Give the king thy judgments, and thy righteousness to the king’s son. The mountains shall bring peace to the people, and the hills in righteousness. They shall fear thee with the sun, and toward the faces of the moon, generation of generations. In his days shall the righteous flourish, and abundance of peace, until there be no moon. (Ps. 72:1, 3, 5, 7)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시72:1, 3, 5, 7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인으로 의미되는 신앙의 분리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 분리가 일어나기 전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가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 교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시72를 통하여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시편에서 그는 주님을 ‘왕’으로, 천적 인간을 ‘왕의 아들’로 보고, ‘해’, ‘달’, ‘산들’, ‘작은 산들’, ‘대대로’라는 표현의 속뜻을 설명합니다.

 

‘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고 그 중심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에서 떨어져 독립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달’은 신앙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와 달이 각각 별개의 두 종교 원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된 질서 안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랑이 중심이고 신앙은 그 사랑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자연계에서 달이 해의 빛을 받아 비춘다는 사실을 하나의 보조적인 비유로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37의 직접적인 논점은 물리적인 천문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해=사랑’, ‘달=신앙’이라는 상응을 통하여 사랑과 신앙의 천적 질서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산들’과 ‘작은 산들’은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이것 역시 그 교회의 중심이 높은 사랑, 곧 주님을 향한 사랑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시72의 장면 전체는 태고교회를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많이 가진 교회로 묘사하지 않고, 사랑을 중심으로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교회로 보여 줍니다.

 

특히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달이 다할 때까지’라고 한 이유를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신앙과 진리가 없어져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더 이상 사랑과 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생명이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진리를 단지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살아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강’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단어의 상응을 따로 해설하지는 않으므로 세부 의미를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시편 전체의 흐름에서 사랑과 신앙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상태와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대대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홍수 이후의 교회들’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시72의 표상은 태고교회만 보여 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이후에도 교회가 계속 이어질 것을 함께 보여 줍니다.

 

그러나 홍수 이후 교회들의 질서는 태고교회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AC.337 [3]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하며,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고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지는 방식이 나타납니다. 길은 다르지만 주님의 목적은 여전히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결합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영원히 분리되어 독립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제 왜 이 시편이 가인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지가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하나의 천적 질서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으로 의미된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따로 고백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은 단순히 새로운 교리 하나를 만들어 낸 이름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교회답게 하던 근본 질서를 깨뜨린 상태를 나타냅니다.

 

시72는 바로 그 ‘깨뜨리기 전의 상태’를 보여 주는 기준점입니다. 해는 사랑을, 달은 신앙을 나타내고, 그 둘은 태고교회 안에서 분리된 경쟁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분리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려면 먼저 해와 달이 하나의 질서 안에 있었던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달이 다할 때까지’라는 말도 이 점을 가장 깊게 보여 줍니다. 신앙의 완성은 사랑과 떨어져 더욱 독립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 안에 완전히 살아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사랑이 된다는 것은 진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37의 시72 인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무엇을 깨뜨렸는지를 설명하기 전에, 해와 달과 산들을 통하여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본래 어떠한 천적 질서 안에 있었는지를 먼저 보여 줍니다. 그 기준이 있어야 가인의 분리가 왜 당시에는 그렇게 엄청난 악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 심화 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AC.337 심화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들으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중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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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심화

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들으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부부관계에 비유하면 AC.337의 차이를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들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돕고, 함부로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기쁨을 자기 기쁨처럼 여깁니다. 그렇다고 매일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펼쳐 놓고 하나씩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이미 서로를 향한 사랑 안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규칙이나 원칙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원칙들이 사랑 안에 살아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신실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해가 되는 일을 피합니다. 규칙의 내용이 사랑 밖에서 억지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랑과 신앙의 관계도 이와 어느 정도 비슷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신앙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에 속한 것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사랑과 별개로 신앙을 따로 떼어 내어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라고 독립된 체계로 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신앙을 따로 언급하는 것조차 꺼렸다는 스베덴보리의 말은 바로 이 하나 된 질서를 배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제 서로의 마음과 유익보다 조항을 먼저 살피고, ‘나는 20개 가운데 19개를 지켰으니 좋은 남편이다’, ‘당신은 14번을 어겼으니 나쁜 아내다’라고 서로를 평가합니다.

 

더 나아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도 이 규칙만 정확히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본래 관계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사랑에서 나온 원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하고, 마침내 사랑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가인의 시작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본래 사랑 안에 있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주된 것으로 높이면서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창4의 흐름은 이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고, 분리된 신앙의 예배가 생기며,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며, 마지막에는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규칙을 조금 더 중요하게 여긴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관계의 생명 자체가 사라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 서로를 향한 사랑이 이미 많이 식어 버린 부부에게는 오히려 ‘서로 모욕하지 말자’,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자’, ‘어려울 때 서로 돕자’ 같은 원칙을 다시 배우고 의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지 않더라도 그것이 옳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잘못된 행동을 멈추고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가운데 관계가 다시 회복될 여지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사랑 자체를 단순한 규칙 준수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상태가 달라지면 원칙과 사랑의 관계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AC.337의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명확하게 고백하는 것 자체는 가인의 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다시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독립된 목적이 되는 데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부부간 준수 사항’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듯, 교리와 신앙고백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원칙은 그 사랑을 표현하고 지키는 형식이 될 수 있으며, 사랑이 약해진 상태에서는 올바른 원칙이 다시 관계의 질서를 배우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준수 사항이 사랑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신앙과 교리가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이것만 정확히 믿으면 된다’는 것으로 바뀌면 진리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부부의 비유가 보여 주는 핵심은 ‘규칙이냐 사랑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올바른 질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고, 후대 인간에게서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이끄십니다. 어느 경우에도 최종 목적은 규칙이나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의 분리는 바로 이 결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신앙을 가진 데 있지 않고,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낸 데 있습니다. 이 비유를 이렇게 이해하면 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에서 그 분리를 ‘엄청난 악’이라고 했는지를 조금 더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AC.337 심화 3, ‘시72:1, 3, 5, 7은 왜 인용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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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심화 1, 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조차 엄청난 악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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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심화

1. 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조차 엄청난 악이었을까?

 

AC.337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무엇을 믿는지 분명하게 고백하고 올바른 교리를 배우는 것은 오히려 신앙생활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이 교리의 왜곡이었고, 심지어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신앙고백 역시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37 자체가 그 답을 줍니다. 태고교회와 오늘날 인간의 영적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고,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하며, 지금은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고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에게 사랑과 신앙은 아직 분리된 두 체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따라서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그 사랑으로부터 살아 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부모가 자기 아이를 깊이 사랑할 때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과 ‘나는 내 아이가 소중하다고 믿는다’를 두 개의 별도 체계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알고 있으며, 그 앎이 사랑과 함께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를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아이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면 질서가 달라집니다. 원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앎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시킨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다는 것은 이보다 훨씬 깊은 영적 차원에서 그러한 전도를 의미했습니다.

 

가인의 시작도 ‘사랑을 버리자’는 노골적인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세우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도 온전한 신앙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다음에는 신앙이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만 있으면 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창4에서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가인 계열의 진행은 바로 이러한 분리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였지만, 결국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며,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에게 신앙을 따로 배우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인의 분리가 아닙니다. AC.337은 이 점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이해하며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은 후대 인간에게 필요한 과정입니다.

 

여기서 ‘신앙이 앞선다’는 것은 ‘신앙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인간을 체어리티로 이끌기 위해 주어지고,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인간 안에 선을 형성하실 때 신앙은 자신의 참된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신앙고백이 가인적으로 되는 지점은 신앙을 말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때입니다. 교리를 정확히 안다는 사실이 삶에서의 선을 대신하고, 올바른 신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악을 피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필요를 약화시킨다면 가인의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확한 교리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악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그 신앙은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이 악이었다’는 말을 오늘날 모든 신앙고백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때’라고 한 것을 중요하게 보아야 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퍼셉션 안에서 하나였던 천적 교회에서는 그것을 처음 분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시대와 상태에 따라 주님의 거듭남의 질서가 어떻게 달리 적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과 후대의 영적 인간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둘 모두를 관통하는 목적은 같습니다. 진리와 선이 결합되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37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내가 고백하는 신앙은 어디로 나를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그 신앙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채 자기 자신만을 높인다면 태고교회의 가인에게서 나타난 영적 위험이 오늘 우리 안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AC.337 심화 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AC.337 심화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들으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중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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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창4,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가인의 왜곡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된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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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교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또한 그 교회의 이단들과 분파들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 관해서는 위에서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곧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그들은 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신앙, 곧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될까 하여 신앙을 언급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AC.200, 203) As this chapter treats of the degener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falsification of its doctrine, and consequently of its heresies and sects, under the names of Cain and his descendants, it is to be observed that there is no possibility of understanding how doctrine was falsified, or what was the nature of the heresies and sects of that church, unless the nature of the true church be rightly understood. Enough has been said above concerning the most ancient church, showing that it was a celestial man, and that it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was of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Through this love they had faith from the Lord, or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that belonged to faith, and for this reason they were unwilling to mention faith, lest it should be separated from love, as was shown above. (n. 200, 203)

 

[2] 천적 인간은 이와 같으며, 시편에서도 표상을 통하여 이와 같이 묘사됩니다. 거기서는 주님을 ‘왕’으로, 천적 인간을 ‘왕의 아들’로 말합니다. Such is the celestial man, and such he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in David, where the Lord is spoken of as the king, and the celestial man as the king’s son: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5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시72:1, 3, 5, 7) Give the king thy judgments, and thy righteousness to the king’s son. The mountains shall bring peace to the people, and the hills in righteousness. They shall fear thee with the sun, and toward the faces of the moon, generation of generations. In his days shall the righteous flourish, and abundance of peace, until there be no moon. (Ps. 72:1, 3, 5, 7)

 

‘해’(sun)는 사랑을, ‘달’(moon)은 신앙을, ‘산들’(mountains)과 ‘작은 산들’(hills)은 태고교회를, ‘대대로’(generation of generations)는 홍수 이후의 교회들을 각각 의미합니다. ‘달이 다할 때까지’(until there be no moon)라고 한 것은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30:26에서 말한 것도 참조) By the “sun” is signified love; by the “moon,” faith; by “mountains” and “hills,” the most ancient church; by “generation of generations,”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until there be no moon” is said because faith shall be love. (See also what is said in Isaiah 30: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30:26)

 

[3] 태고교회와 그 교리는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지금은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때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이로부터 태고 시대에 사람들이 신앙을 따로 고백하여 그것을 사랑에서 분리했을 때 교리가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리를 왜곡한 사람들, 곧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거나 신앙만을 따로 고백한 사람들을 당시에 ‘가인’(Cain)이라 불렀으며, 이러한 일은 그때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습니다. Such was the most ancient church, and such was its doctrine. But the case is far different at this day, for now faith takes precedence over charity, but still through faith charity is given by the Lord, and then charity becomes the principal. It follows from this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doctrine was falsified when they made confession of faith, and thus separated it from love. Those who falsified doctrine in this way, or separated faith from love, or made confession of faith alone, were then called “Cain”; and such a thing was then regarded as an enormity.

 

해설

AC.337은 창4의 가인과 그 후손들을 더 자세히 해설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칙을 먼저 제시합니다. ‘무엇이 왜곡되었는지를 알려면 먼저 왜곡되기 전의 참된 모습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로 의미되는 이단들과 분파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본래 어떤 관계 안에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교회의 중심은 신앙을 별도로 고백하고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서 있는 독립된 무엇이 아니라 사랑 안에 살아 있는 진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AC.337의 ‘그들은 신앙을 언급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는 표현도 문자적인 금기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낱말 자체를 싫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하나로 있던 것을 따로 떼어 ‘신앙’이라고 세우는 순간 그것이 사랑에서 분리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독립된 종교적 영역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 기준에서 볼 때 가인의 문제가 얼마나 근본적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신앙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독립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태에서는 ‘신앙을 따로 말하고 고백하는 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이 본래 하나로 있었던 천적 인간에게서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단순한 표현상의 구별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질서를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기준이 ‘사랑과 신앙의 하나 됨’이라면 가인의 죄는 단순히 하나의 교리적 오류를 주장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별개의 것으로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그 첫 분리가 뒤의 모든 변질의 출발점이 됩니다.

 

시72의 인용은 이 천적 질서를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해’를 사랑으로, ‘달’을 신앙으로 설명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달이 자기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해의 빛을 받아 비춘다는 점을 기계적인 상응으로 확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337이 직접 밝히는 핵심은 사랑이 중심이고 신앙이 그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았습니다.

 

‘산들’과 ‘작은 산들’은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산과 높은 곳이 사랑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으며, 여기에서도 태고교회의 천적 성격을 보여 줍니다. 그들에게 가장 높은 것은 신앙고백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이웃 사랑과 신앙에 속한 퍼셉션이 나왔습니다.

 

특히 ‘달이 다할 때까지’라는 표현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진리나 신앙이 없어져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남지 않고 사랑 안에서 완전히 살아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이 됩니다.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도 같은 설명을 보강합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의 모든 세부 상응을 해설하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적인 연결점은 달과 해, 곧 신앙과 사랑입니다. 신앙의 빛이 사랑의 빛과 하나 되는 천적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함께 인용합니다.

 

그런데 AC.337 [3]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이 문장을 놓치면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의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포함한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 체어리티가 형성되면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높거나 본질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진리와 신앙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먼저 의식적으로 주어질 수 있지만, 그 신앙의 목적은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형성하시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바로 앞 AC.335의 셋과 AC.336의 에노스를 조심해서 구별해야 합니다. 셋은 ‘새로운 신앙’,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라고 했지만, 셋과 에노스 자체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AC.337 [3]의 ‘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는 후대 영적 인간의 질서를 셋과 에노스에게 그대로 소급해서는 안 됩니다. AC.335-336은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의 분리 이후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가 형성된 것을 말하고, AC.337 [3]은 그것과 별도로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스베덴보리 시대의 후대 질서를 대비합니다.

 

이 구별을 해 두면 가인의 의미도 더욱 정확해집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이 먼저 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는 것은 정상적인 거듭남의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먼저 나타났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 독립시키고 높인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신앙고백을 하거나 교리를 배우는 것 자체를 가인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후대 인간에게는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끝날 때입니다. 신앙고백의 정확성이 삶에서의 선과 체어리티를 대신하게 되면 가인의 영적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7의 마지막 ‘이러한 일은 그때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다’는 말에서 ‘그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였던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신앙을 별도로 떼어 고백하는 것은 그 질서 자체의 붕괴를 뜻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인간이 신앙을 명확히 배우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같은 악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어떤 질서를 무조건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의 질서와 영적 인간의 질서를 구별해야 하고, 태고교회와 홍수 이후 교회의 상태도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이 먼저였다는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 사람에게 ‘먼저 사랑이 생긴 다음에야 진리를 배워야 한다’는 시간적 공식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오늘날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는 말도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중요하다’는 교리적 우선권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듯,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때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과정상의 선행과 본질상의 주도권은 서로 다릅니다.

 

AC.337은 이처럼 가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점을 세워 줍니다. 참된 태고교회의 질서는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으로 지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깨뜨린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후 가인의 후손들과 여러 이단적 상태를 읽을 때에도 ‘무엇을 믿었는가?’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어떤 관계에 놓였는가?’를 계속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처럼 퍼셉션으로 직접 진리를 아는 상태에 있지 않으며, 먼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목적은 여전히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체어리티를 이루시고, 마침내 진리가 삶과 사랑 안에서 살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37은 ‘신앙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구호보다 훨씬 정교한 질서를 가르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앙과 사랑의 최종적인 분리가 주님의 질서는 아닙니다. 신앙은 사랑과 결합될 때 살아 있고,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그 목적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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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6, 창4:26, ‘에노스’(Enosh)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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