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8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 신앙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앙을 그의 신앙 고백이나 성경 지식, 교리적 입장, 기도와 예배의 열심으로 판단합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AC.328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을 보라고 합니다. 그 신앙이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이 실제로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악을 멀리하게 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게 한다면 그 신앙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을 강하게 주장할수록 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자기의 옳음을 세우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바로 그 열매가 그 신앙의 질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행위를 보고 구원 여부를 판단하자’는 단순한 도덕주의와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겉으로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에 따라 이웃에게 유익을 행하려는 내적 애정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많은 선행을 하면서도 속으로 자기 명예와 공로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체어리티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눈에 띄는 큰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의무를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의 유익을 진실하게 바란다면 그 안에 체어리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가 신앙의 내적 질을 보여 줍니다.

 

특히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처음 접하면 자칫 ‘신앙보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니 결국 신앙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닌가?’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28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오직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자신을 체어리티 위에 세우는 데 있습니다. 참된 질서는 신앙 없는 체어리티도, 체어리티 없는 신앙도 아니라 둘의 결합입니다. 다만 그 결합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선이 주된 것이고, 진리는 그 선을 섬기며, 사랑이 생명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 형체와 방향을 줍니다.

 

따라서 AC.325에서 시작된 흐름을 여기까지 이어 보면 매우 선명합니다. 처음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고, 그 사랑과 신앙은 하나였습니다. 그 후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가인’이 되었고, 체어리티는 ‘아벨’이라 불렸습니다. 분리는 예배에까지 이어졌고, 가인의 상태는 점차 악해졌습니다. 그러나 AC.328에 이르러 주님께서는 아직 한 번 더 길을 열어 놓으십니다. ‘아벨’은 아직 ‘가인’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자기 자리를 낮추고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한다면 아직 회복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끝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 위에 서려 한다면, 다음에 일어날 일은 이미 예고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비극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해서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본래 하나여야 할 둘 사이의 질서가 뒤집힘으로써 일어난 비극입니다.

 

 

 

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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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창4:7)

 

AC.328

그리고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으며,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7절) And that the quality of the faith is known from the charity; and that charity wishes to be with faith, if faith is not made the principal, and is not exalted above charity. (verse 7)

 

해설

AC.328은 앞의 AC.325-327에서 계속되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 문제를 한층 더 깊이 다루면서도, 매우 중요한 가능성 하나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태고교회가 본래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으나 이후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했습니다.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까지 나타나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이라는 서로 다른 예배가 되었고,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그런데 AC.328에서는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먼저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질’(quality)은 그 신앙이 어떤 성질의 신앙인가를 뜻합니다. 단지 어떤 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하는가만으로는 신앙의 내적인 질을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이 실제 삶에서 어떤 선을 낳고 있으며, 사람을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별개로 나중에 덧붙이는 장식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살아 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가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신앙을 낮게 평가하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는 말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알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직 그 목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어지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표현은 창4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제거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벨은 본래 가인의 적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없애고 다른 하나만 남기는 것이 주님의 질서가 아닙니다. 둘은 구별되지만 함께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하고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교회 안에서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그러나 여기에 조건이 붙습니다.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입니다. 문제는 신앙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principal)으로 세워 체어리티보다 높이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주된 것’은 단순히 중요하다는 뜻보다 질서를 주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고 체어리티의 질을 결정하려 할 때 본래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다만 이것을 ‘신앙은 낮은 것이고 체어리티만 높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가치 경쟁이 아니라 결합 안의 질서입니다. 진리는 반드시 필요하고 신앙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선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에서는 사람이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그 진리는 결국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무엇을 먼저 배우느냐와 궁극적으로 무엇이 주도하는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아벨의 관계도 새롭게 보입니다. 아벨이 가인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을 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주된 것으로 만들려 할 때 둘의 관계가 깨집니다. 그리고 그 분리가 끝까지 진행되면 다음 AC.329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창4:7의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말씀에는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아벨은 아직 살아 있으며,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완전히 밀어내기 전까지는 결합의 길이 닫힌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그의 상태를 드러내고,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인지를 그 앞에 놓으십니다.

 

이것은 앞의 AC.327에서 가인의 상태가 악해졌다고 했음에도 주님께서 그에게 계속 말씀하신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인간의 상태가 악해졌다고 해서 곧바로 그를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악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진리를 통하여 그의 상태를 드러내시고 돌아설 길을 보여 주십니다. 창4:7은 바로 아벨의 죽음 직전에 주어지는 말씀이라는 점에서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AC.328은 또한 신앙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을 우리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물론 올바른 진리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내가 알고 믿는 진리가 내 삶에서 무엇을 낳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 신앙이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선을 행하게 하며, 자기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향하게 한다면 그 열매를 통하여 신앙의 질이 드러납니다.

 

특히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며 많은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도 이 기준은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아르카나를 알고 있는지가 신앙의 질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의 삶으로 나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될 때 우리가 배우는 아르카나도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AC.325부터 이어진 흐름을 정리하면 이제 매우 선명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었고, 그 분리는 예배에 나타났으며,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는 악해졌습니다. 그러나 AC.328에서는 아직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단계가 결정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음 AC.329에서 우리는 그 비극적인 결과를 만나게 됩니다.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AC.328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AC.328 심화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 신앙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앙을 그의 신앙 고백이나 성경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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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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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7, 창4:5-6,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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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7 심화

1. 왜 ‘분리’가 결국 ‘악’이 되는가?

 

AC.327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분리한 것이 왜 결국 사람의 상태를 ‘악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교리적으로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곧 악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AC.327을 그렇게 개인에 대한 단순한 판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뒤 그 교회적 상태가 계속 진행되면서 어떤 결과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선과 진리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으로 인도하며,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이 되게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문제는 ‘구별’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는 구별되고 신앙과 체어리티도 구별됩니다. 서로 다른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구별이 ‘분리’로 변할 때입니다. 진리가 선과의 관계를 잃고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관계를 잃으면, 진리는 더 이상 자신이 존재하는 본래의 목적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상태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가지고 있고 제물도 드립니다. 외적으로는 매우 종교적인 상태가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관심의 중심이 점차 ‘이 진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서 ‘무엇이 옳은 교리인가?’, 더 나아가 ‘내가 옳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로 옮겨갈 위험이 생깁니다.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입니다. 그러나 선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진리는 인간의 proprium에 의해 자기 사랑이나 자기 우월성을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원래 진리는 사람 자신의 악을 비추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이끌어야 하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람의 사랑과 목적이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왜 가인의 분노가 AC.327에서 중요한지가 드러납니다.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이것이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분노가 일어납니다.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체어리티를 향한 적대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리가 악이 된다’는 말은 단순히 두 교리를 구별하여 설명하는 순간 악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자기 생명인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것을 자처하고, 그 상태가 계속되면서 삶과 애정의 질서까지 뒤집히는 것을 말합니다. AC.325의 분리가 AC.326에서는 예배의 분리로 나타났고, AC.327에서는 사람들의 상태 자체가 악해지는 데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경고가 있습니다. 말씀과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무엇이 참된지를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진리가 나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는 대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옳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진리의 목적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과 속뜻을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이 경고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생명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지식이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자신을 높이는 또 하나의 지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진리를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327의 ‘상태가 악해졌다’는 말은 매우 엄중합니다. 창4의 최초 살인은 어느 순간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보면 그 비극의 시작은 훨씬 앞에 있었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마침내 사람의 내적 상태까지 악하게 되었을 때 아벨을 죽이는 다음 단계가 준비됩니다.

 

결국 AC.327이 보여 주는 것은 ‘분리’의 위험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진리와 선은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선 안에서 목적을 이루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붙들 때 가장 깊이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 얼마나 정확한가?’만이 아니라 ‘이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랑과 어떤 삶으로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AC.327, 창4:5-6,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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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5-6)

 

AC.327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진 것은,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것’(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으로 묘사됩니다. (5-6절) That the state of those who were of separated faith became evil, is described by Cain’s “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 (verses 5–6)

 

해설

AC.327은 AC.325-326에서 시작된 흐름이 이제 사람의 상태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본래 사랑과 하나였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까지 나타났습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지만 그것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였습니다. 이제 AC.327에서는 그 결과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상태가 악해졌다’(became evil)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완전히 악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인은 본래 교회 안에 있던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자신의 생명인 사랑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지만,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고, 이제는 그 분리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 자체가 악해지는 단계로 진행됩니다.

 

이것은 창4의 타락이 한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부터 ‘아벨을 죽이자’는 상태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본래 함께 있어야 할 사랑과 신앙이 서로 떨어져 나가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가 계속되자 예배의 질이 달라졌고, 이제는 그 결과 애정과 내적 상태 자체가 악한 방향으로 변해 갑니다. 이후에는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악화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문자 그대로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대한 가인의 분노이지만, 속뜻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진 것이 이 분노를 통하여 묘사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의 성격이나 순간적인 감정 분석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떤 방향으로 변해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도 사랑과 구별되는 중요한 것이 아닌가?’라는 데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앙은 중요하며 진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된 신앙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체어리티는 더 이상 신앙과 함께 있어야 할 형제가 아니라 신앙의 독립적인 지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분노는 앞으로 일어날 아벨의 죽음과 연결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단지 체어리티 없이 존재하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밀어내며 결국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4의 살인은 속뜻에서 이러한 영적 과정의 마지막 결과를 보여 줍니다.

 

‘안색이 변하였다’는 표현도 가인의 상태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더욱 강하게 묘사합니다. 다만 AC.327에서는 아직 이 표현의 세부적인 상응을 풀어 주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분함’과 ‘안색의 변화’가 함께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음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설명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신앙 자체를 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AC.325부터 계속 지켜야 할 중요한 구별입니다. 문제는 신앙이 아니라 ‘분리된 신앙’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될 때 사람에게 생명을 주며,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나가면, 본래 선을 섬겨야 할 진리가 그 목적을 잃게 됩니다.

 

또한 창4:6에서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C.327은 이 질문의 속뜻을 아직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문자 자체에서도 주님께서 가인의 악해진 상태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이 부르심과 경고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AC.325-327을 함께 놓으면 창4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먼저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다음으로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 사람의 상태 자체가 악해집니다. 결국 아벨의 죽음은 갑자기 등장하는 비극이 아니라 앞에서부터 진행되어 온 분리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AC.327은 우리에게 ‘나는 화를 내는가?’라는 심리적인 질문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진리와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진리가 선과 함께 있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 있을 때 그것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분리되어 신앙이 스스로 서려고 할 때, 처음에는 작은 질서의 변화처럼 보였던 것이 결국 사람의 내적 상태 전체를 바꾸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심화

1. 왜 ‘분리’가 결국 ‘악’이 되는가?

 

AC.327 심화 1, 왜 ‘분리’가 결국 ‘악’이 되는가?

AC.327 심화1. 왜 ‘분리’가 결국 ‘악’이 되는가? AC.327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분리한 것이 왜 결국 사람의 상태를 ‘악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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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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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6, 창4:3-5, 가인의 제물, 아벨의 제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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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6 심화

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이 대목은 AC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동물 제사는 좋아하시고 농산물 제사는 싫어하신 것인가?’ 그러나 AC.326의 초점은 제물의 물질적 종류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두 제물의 차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의 AC.325에서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표상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 역시 각각의 내적 상태에서 나오는 예배를 나타냅니다.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이고,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차이는 먼저 ‘무엇을 가져왔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가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성경이 단순히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지 않고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며, 반대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말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배와 예배자의 내적 상태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드리는 외적인 행위만 따로 떼어 놓고 그것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예배 안에 어떤 사랑과 의도가 있으며, 그 사람의 삶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가 함께 관련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까닭을 ‘그가 덜 좋은 물건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26이 직접 제시하는 이유는 그 예배가 ‘분리된 신앙’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신앙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신앙이 자기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것이 문제입니다. 반대로 아벨의 예배가 받아들여진 것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셔서 그의 예배를 임의로 거부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습니다. 달라진 것은 인간 편의 상태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여 결합하는 질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받지 않으셨다’는 말씀은 변덕스러운 하나님의 감정이라기보다 인간의 내적 상태와 영적 질서의 문제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예배에도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주일의 예배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서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찬송하지만 일상에서는 알고 있는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이웃의 선을 외면한다면, 외적인 예배 형식만으로 그 분리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일상에서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려고 힘쓰며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고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는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그 삶과 예배는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착하게 살기만 하면 신앙이나 교리는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문제는 진리와 선 가운데 어느 하나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함께 있어야 할 것들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게 하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삶 안에서 선으로 살아 있게 합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정확한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떼어 놓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창4:3-5에서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단순히 두 종류의 제물이 아니라 두 종류의 예배이며, 더 깊게는 그 예배가 나오는 두 가지 내적 상태입니다. 하나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AC.325에서 시작된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AC.326에서는 이렇게 ‘예배의 분리’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창4의 이야기는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가인은 자신을 돌아보거나 사랑과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기보다 분노하고 안색이 변합니다. 따라서 다음 AC.327부터는 ‘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창4의 비극은 이제 내적인 분리에서 예배의 분리로, 그리고 다시 분노와 체어리티에 대한 적대로 깊어져 갑니다.

 

 

 

AC.326, 창4:3-5, 가인의 제물, 아벨의 제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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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3-5)

 

AC.326

각각의 예배가 묘사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가인의 제물’(offering of Cain)로, 체어리티의 예배는 ‘아벨의 제물’(offering of Abel)로 묘사됩니다. (3-4절)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는 받아들여졌으나,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4-5절) The worship of each is described, that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by the “offering of Cain”; and that of charity, by the “offering of Abel.” (verses 3–4) That worship from charity was acceptable, but not worship from separated faith. (verses 4–5)

 

해설

AC.326은 앞의 AC.325에서 제시된 ‘가인’과 ‘아벨’의 의미를 이제 예배의 문제로 발전시킵니다. AC.325에서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단지 두 가지 교리적 상태로 머물지 않고 각각 그 상태에 맞는 예배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창4:3-4에서 가인도 제물을 드리고 아벨도 제물을 드립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여호와께 예배드리며 둘 다 제물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AC.326은 그 차이가 제물의 외적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worship from charity)입니다. 참된 예배는 단순히 예배의 형식이 바르고 교리가 정확하며 기도와 찬송과 헌물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참된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배의 내적 생명이 중요합니다. AC.326에 따르면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예배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외적인 예배 안에 생명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주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거나 예배 자체를 거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립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도 얼마든지 종교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고 예배를 드리며 교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다면 그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 역시 그 분리를 그대로 품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는 말씀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두 사람이 가져온 물건을 비교하여 하나는 좋아하시고 다른 하나는 싫어하셨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속뜻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땅의 소산’과 ‘양의 첫 새끼’라는 물질적 차이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각각 어떤 내적 예배를 표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를,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받으셨다’와 ‘받지 않으셨다’는 표현도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호의를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임의로 등을 돌리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인간 편의 상태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결합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따라서 차이는 주님의 사랑이 달라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제물’은 오늘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게 하는 매우 엄중한 표상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물을 드리면서도, 그 신앙을 실제 이웃 사랑과 삶에서 분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고 어떤 진리를 알고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는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가’, ‘나의 신앙은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나타나는가’와 완전히 분리된다면,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에서 가인의 원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AC.326을 ‘교리와 신앙은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도록 인도하고, 그 진리는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 안에서도 신앙과 체어리티는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AC.326은 ‘아벨의 제물’을 단순히 체어리티라고 하지 않고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배와 삶을 분리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예배의 내적 생명은 예배 시간에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평소에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고,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려 할 때 그 삶의 체어리티가 기도와 찬송과 말씀을 듣는 외적 예배 안에도 들어갑니다. 예배의 내적 질은 삶의 방향과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26은 창4의 비극이 깊어지는 두 번째 단계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사랑과 신앙 사이에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AC.326에서는 그 내적 분리가 예배에 나타납니다. 겉으로는 가인도 아벨도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지만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의 예배는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입니다.

 

심화

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AC.326 심화 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AC.326 심화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이 대목은 AC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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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창4:1-2, 가인과 아벨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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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에서 특별히 깊이 살펴볼 표현은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첫 문장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순서가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는 그 질서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가장 깊은 생명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지각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직접 연결됩니다. 퍼셉션은 밖에서 배운 교리를 하나씩 논증하고 판단하여 ‘이것이 참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천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랑 안에 그 사랑에 속한 진리가 있었고, 진리는 자신을 낳은 사랑과 하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말은 단순히 ‘사랑도 하고 신앙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 사랑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선에 속한 진리를 지각했고, 그 진리는 다시 선을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와 ‘어떻게 사는가’를 서로 다른 질문처럼 나누기 쉬운 것과 달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과 지각과 삶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이 천적 질서를 오늘날 영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 그대로 시간적인 순서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거기서 나왔다’고 해서, 오늘날 사람도 먼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충분히 가진 다음에야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영적 인간에게서는 오히려 먼저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 진리를 신앙하며, 그것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은 거듭남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를 가졌지만,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질서가 서로 반대인 것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에게도 진리는 결국 선과 결합되어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길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아는 진리는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 선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중요하다’는 말을 ‘교리와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에게 진리는 거듭남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알지 못하면 올바르게 선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진리가 선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스스로 교회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가인의 원리가 시작됩니다. AC.325는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과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알면 경계하기 쉽지만, 참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전체적인 질서에서 떼어 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면 자신이 여전히 진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퍼셉션이 약해진 사람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보존하며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교리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교리가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교리를 많이 알고 성경의 속뜻을 깊이 이해하며 신앙 고백이 정확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게 되는 것은 큰 은혜이지만, 그 지식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많이 보고 더 깊이 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가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를 아는 목적은 남보다 높은 영적 지식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쓰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25의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그대로 되찾으려 하기보다 그 안에 있는 영원한 질서를 붙들어야 합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배우는 진리가 삶으로 내려오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나타날 때 신앙과 체어리티는 다시 형제로 함께 있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입니다.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이 삶에서 떨어져 독립적인 것이 되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 안의 가인이 태어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AC.325, 창4:1-2, 가인과 아벨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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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1-2)

 

개요

 

AC.325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였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아벨’(Abel)이라 하였습니다. (1-2절) The most ancient 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 but there arose 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 The doctrine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called “Cain”; and charity, which is love toward the neighbor, was called “Abel.” (verses 1–2)

 

해설

AC.325는 창4의 속뜻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열쇠를 제시합니다. 창4의 가인과 아벨을 단지 인류 최초의 두 형제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 데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어떻게 분리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 읽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되는 두 형제의 관계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영적 역사이기도 합니다.

 

첫 문장인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습니다’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사랑을 통하여’(through love)라는 말은 단순히 ‘주님을 사랑하면서 믿었다’는 정도보다 깊은 뜻을 가집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사랑은 신앙에 나중에 덧붙여지는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신앙이 나오는 근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은 서로 독립된 두 가지라기보다 하나의 생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를 이루고 있었으며, 선을 사랑하는 의지에서 그 선에 속한 진리에 대한 지각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신앙은 어떤 교리 내용을 먼저 배우고 논증하여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고, 그 진리를 살아가는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AC.325의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짧은 표현은 바로 이러한 천적 질서를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창4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처음부터 신앙 자체가 거짓이거나 악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자기 생명의 근원인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으로 서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가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나무의 줄기와 뿌리에서 끊어질 때 생명을 잃는 것처럼, 신앙과 진리도 사랑과 선 안에 있을 때 살아 있지만 그것에서 분리되면 본래의 생명을 잃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상태가 ‘가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인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라고 규정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가인을 처음부터 단순히 악이나 거짓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본래 교회 안에 있던 신앙이 사랑에서 구별되기 시작하고, 그 구별이 점차 분리로 굳어져 독립적인 교리가 되어 가는 상태가 가인으로 표상됩니다. 이후 창4에서는 이 분리가 더욱 진행되면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앞세우고,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친절한 감정이나 몇 가지 구제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으로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은 본래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없애야 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아벨을 가인의 ‘형제’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AC.325는 앞의 AC.324에서 말한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이 어떻게 생겨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의 쇠퇴는 언제나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이 밖에서 들어오는 방식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참된 것 하나가 전체적인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세울 때에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것이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되면 질서가 무너집니다.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지만, 선과 삶에서 분리된 진리가 자기 지성과 자기 의를 세우는 수단으로 변하면 가인의 원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날 인간의 거듭남에 그대로 시간적인 순서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고 해서 오늘날의 영적 인간도 먼저 완성된 사랑을 가진 뒤에야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갖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시고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질서는 같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을 단순히 ‘악과 선’으로 대응시키는 것은 아직 너무 이릅니다. 창4의 첫 비극은 아벨이 들에서 죽을 때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본래 하나의 생명을 이루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의 살인은 그 내적인 분리가 끝까지 진행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AC.325는 창4 전체를 읽는 데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줍니다. ‘내가 가진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가, 아니면 그것들과 분리되어 스스로 서려 하고 있는가?’ 창4는 이제 그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 심화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에서 특별히 깊이 살펴볼 표현은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첫 문장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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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6, 창4:3-5, 가인의 제물, 아벨의 제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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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4, 창4,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들과 에노스라는 새로운 교회 (AC.324-337)

창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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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4 심화

1. 창4와 창5는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셋 계열

 

좀 성급한 질문일 수 있지만, 그리고 이미 몇 차례 거듭 고민했던 질문이지만... 창4, 창5를 시간순으로 읽어야 하나요?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가인 이후 이 여러 대가 흐르도록 태고교회는 처음엔 어두운 세월을 지내다가 셋 이후 회복된 걸로 보기에는 ‘태고교회’라는 위상(?)에 어딘가 좀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창4를 시간순으로 읽으면,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이 여러 대가 흐르도록 나이만 먹다가 수백, 수천 년이 흐른 후에야 셋이라는 자녀를 본 게 되는데... 이건 좀... 차라리 창4 따로, 창5 따로, 그러니까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나란히 동시대를 살다가 홍수를 맞이하는, 이런 이해가 더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창4와 창5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창4에서는 가인에게서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여러 대가 이어지고, 라멕에게서 다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긴 계보가 모두 소개된 뒤 창4:25에 와서 다시 ‘아담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연대기처럼 직선적인 시간순으로만 읽으면, 마치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지나간 뒤에야 아담과 하와가 셋을 낳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을 해석하는 방식에서는 이러한 계보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개인들의 출생 연대를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과 에녹, 이랏 등의 이름은 말씀의 속뜻에서 특정한 교리와 교회적 상태를 나타내며, 셋과 에노스 및 창5의 여러 이름들 역시 이어지는 교회적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도 먼저 ‘누가 정확히 몇 년 먼저 태어났는가?’보다 ‘말씀이 어떤 교회적 계열과 상태의 연속을 보여 주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창4는 특히 태고교회 안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들과 그 변화를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계열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구별되기 시작하고, 그 구별이 분리로 굳어지면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며, 그 뒤에도 그 교리적 상태가 여러 형태로 파생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반면 창4 마지막의 셋과 에노스, 그리고 창5에서 다시 이어지는 계보는 태고교회 안의 또 다른 교회적 계승과 상태의 연속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 계열이 역사적으로 완전히 끝난 다음 창5의 셋 계열이 시작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은 한 계열의 영적 역사를 충분히 보여 준 뒤 서술의 초점을 다른 계열로 옮겨 그 계열의 상태들을 다시 처음부터 펼쳐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4와 창5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큰 시대 안에서 전개되는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의 서술로 함께 읽는 것은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여기서 ‘함께’ 또는 ‘나란히’라는 말을 역사적 동시성에 관한 정밀한 연대표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석이 직접적으로 밝히는 것은 각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적 상태와 그 상태들의 연속이지, 가인 계열의 어느 인물이 셋 계열의 어느 인물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살았는지를 확정하는 연대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두 계열이 같은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전개되었다’는 것과 ‘각 세대를 일대일로 맞추어 동시대라고 확정한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창4:25에서 셋이 등장하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워집니다. 이것을 반드시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지나간 뒤 비로소 셋이 태어났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 없이, 말씀의 서술 초점이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회적 계열에서 셋으로 표상되는 다른 교회적 계열로 옮겨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5에서는 다시 아담에서 시작하여 셋과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이어지는 계열을 하나의 연속된 교회적 역사로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가인 계열을 단순히 ‘악한 계열’, 셋 계열을 ‘선한 계열’이라고 나누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처음부터 아무런 진리도 없는 순수한 악을 뜻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이후 점차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서 변질됩니다. 반대로 셋으로 이어지는 계열 역시 아무런 쇠퇴 없이 처음의 가장 순수한 천적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노아까지 이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여러 상태를 거치며 결국 그 시대의 종말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태고교회’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는 단지 가장 처음의 순수한 ‘아담’ 상태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여러 후속 교회와 상태들을 거쳐 그 교회 시대의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큰 흐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매우 높은 천적 상태도 있고, 점차 쇠퇴하는 상태도 있으며, 본래의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적 상태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창1-9의 속뜻을 당시 지상에 살던 모든 사람의 역사적 상태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장들에서 직접 추적하는 것은 무엇보다 교회와 그 교회의 연속적인 상태들입니다. 물론 그 속뜻에 담긴 영적 원리는 오늘의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수 있고, 한 교리나 지식을 전체보다 높일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런 상태에서도 다시 생명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적용과 당시 모든 인류가 똑같은 교회적 상태를 동시에 거쳤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결국 AC.324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두 가지 흐름입니다. 인간 편에서는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고 교리들이 독립하면서 여러 교회적 상태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그 분열과 쇠퇴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섭리가 계속됩니다. 창4와 창5를 이러한 관점에서 함께 읽으면, 가인과 아벨, 셋과 에노스, 그리고 창5의 긴 계보는 단순한 고대 가족사의 연속을 넘어 ‘교회가 어떻게 변화하고 쇠퇴하며,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교회의 생명을 이어 가시는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로 열리게 됩니다.

 

 

 

AC.324, 창4,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들과 에노스라는 새로운 교회 (AC.324-337)

창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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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개요

 

AC.324

여기서는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 곧 이단들(heresies)을 다루며, 그 후에 ‘에노스’(Enosh)라 하는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진 것에 관하여 다룹니다. Doctrines separated from the church, or heresies, are here treated of; and a new church that was afterwards raised up, called “Enosh.”

 

해설

AC.324는 한 문장으로 된 짧은 글이지만 창4 전체의 속뜻을 여는 중요한 개요입니다. 겉으로 보면 창4는 가인과 아벨의 출생과 제물, 아벨의 죽음, 가인의 추방과 후손들, 라멕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마지막의 셋과 에노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을 단순히 최초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연대기로만 읽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점차 구별되고 마침내 분리되면서 여러 교리적, 교회적 상태가 생겨나는 과정과, 그 쇠퇴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을 다룹니다.

 

먼저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사랑과 신앙은 서로 독립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생명 안에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하였으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하면서 본래 함께 있던 것들이 점차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창4에서 가인은 이러한 과정 가운데 나타나는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하게 됩니다.

 

여기서 ‘heresies’를 ‘이단들’이라고 번역할 때에는 오늘날 한국 교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이단’이라는 말과 완전히 같은 의미로만 이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324의 관심은 어느 현대 교단이나 집단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래 교회의 하나 된 생명에서 어떤 교리가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것이 되는 현상입니다. 이후 설명에서 보게 되듯 가인의 문제도 신앙 자체가 악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마침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분리’와 ‘구별’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구별될 수 있으며 실제로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집니다. 그러나 구별된다고 해서 서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을 때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창4는 이 둘의 구별이 어떻게 분리로 변하고, 그 분리가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지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여 줍니다.

 

그리고 AC.324의 후반부는 이 장 전체를 읽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교회에서 여러 교리들이 분리되어 나오고 이전의 상태가 쇠퇴해 가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에노스’라 하는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집니다. 창4의 속뜻에는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분리와 쇠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교회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함께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창4:26의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은 바로 이 에노스와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와 똑같은 형태로 되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달라진 인간의 상태 가운데 새로운 교회적 형태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노스의 등장은 단순히 족보에 한 사람이 더 추가되었다는 의미를 넘어, 한 교회적 상태가 쇠퇴하는 가운데 또 다른 교회적 상태가 시작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점에서 AC.324는 창3의 마지막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창3 마지막에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나가게 되었지만 생명나무의 길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그 길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창4에서는 타락 이후의 인간과 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며, 그 가운데서도 주님과 인간의 연결이 어떻게 보존되어 가는지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창4를 읽을 때 가인 계열을 단순히 ‘나쁜 사람들의 족보’, 셋과 에노스를 ‘좋은 사람들의 족보’로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이름들은 말씀의 속뜻에서 교리와 교회의 여러 상태를 표상합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어떤 교리적 상태가 어떻게 발전하고 변질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의 끝에서 왜 새로운 교회인 에노스가 등장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324는 결국 창4 전체에 두 개의 큰 흐름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인간이 사랑과 신앙을 분리하고, 부분적인 것을 전체보다 앞세우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흐름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한 인간의 쇠퇴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새로운 교회를 일으켜 세우시는 흐름입니다. 앞으로 AC.325-337은 창4의 각 절을 먼저 개괄하면서 바로 이 두 흐름을 차례로 펼쳐 보이게 됩니다.

 

심화

1. 창4와 창5는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셋 계열

 

AC.324 심화 1, 창4와 창5는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셋 계열

AC.324 심화 1. 창4와 창5는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셋 계열좀 성급한 질문일 수 있지만, 그리고 이미 몇 차례 거듭 고민했던 질문이지만... 창4, 창5를 시간순으로 읽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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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창4:1-2, 가인과 아벨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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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3, 창4 앞, 사후의 삶을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사례를 이 장 끝에서 살펴봅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3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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