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

‘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생 제물뿐 아니라 땅과 그 모든 소산의 첫 열매, 그리고 처음 난 것을 드리는 것도 ‘제물’(offerings)이라 불렀으며, 그들의 예배는 이러한 것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천국적인 것들을 표상했고, 모두 주님을 가리켰으므로, 이러한 제물들이 참된 예배를 상징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표상하는 실재가 없다면 표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가 우상과 같은 것, 죽은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곧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표상교회의 모든 제물은 주님을 향한 예배를 상징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앞으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각각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제물’(offerings)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선지서 전반에서도 분명합니다. 말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at by an “offering” is meant worship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ves of the Jewish church, in which sacrifices of every kind, as well as the first fruits of the earth and of all its produce, and the oblation of the firstborn, were called “offerings,” in which their worship consisted. And as they all represented heavenly things, and all had reference to the Lord, it must be obvious to everyone that true worship was signified by these offerings. For what is a representative without the thing it represents? Or what is an external religion without an internal but a kind of idol and a thing of death? The external has life from things internal, that is, through these from the Lord. From these considerations it is evident that all the offerings of a representative church signify the worship of the Lord; and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reat in particular in the following pages. That by “offerings” in general is meant worship, is evident in the prophets throughout, as in Malachi: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말3:2-4) Who shall abide the day of his coming? He shall sit as a refiner and purifier of silver, and he shall purify the sons of Levi, and purge them as gold and silver, and they shall offer unto Jehovah an offering in righteousness. Then shall the offering of Judah and of Jerusalem be pleasant unto Jehovah, as in the days of eternity, and as in ancient years. (Mal. 3:2–4)

 

‘공의로운 제물’(offering in righteousness)은 내적 제물이며, ‘레위 자손’(sons of Levi), 곧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드릴 것입니다. ‘옛날’(days of eternity)은 태고교회를, ‘고대’(ancient years)는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 “offering in righteousness” is an internal offering, which the “sons of Levi,” that is, holy worshipers, will offer. The “days of eternity,” signify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e “ancient years,” the ancient church. In Ezekiel: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에서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겔20:40) In the mountain of my holiness, in the mountain of the height of Israel, there shall all the house of Israel, all that land, worship me; there will I accept them, and there will I require your oblations, and the first fruits of your offerings, in all your sanctifyings. (Ezek. 20:40)

 

‘예물’(Oblations)과 ‘너희가 드리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 역시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된 행위를 뜻합니다. 스바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Oblations” and the “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 are likewise works sanctified by charity from the Lord. In Zephaniah: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습3:10) From beyond the rivers of Ethiopia my suppliants shall bring mine offering. (Zeph. 3:10)

 

‘구스’(Ethiopia)는 천적인 것들, 곧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Ethiopia” denotes those who are in possession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love, charity, and the works of charity.

 

해설

AC.349는 AC.346에서 제시한 세 번째 표현, 곧 가인이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다’는 말씀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제물’이 그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고 간단히 밝혔습니다. 이제 AC.349는 왜 말씀에서 제물이 예배를 의미하는지를 유대교회의 표상들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희생 제물뿐 아니라 땅과 그 모든 소산의 첫 열매, 처음 난 것을 드리는 것도 모두 ‘제물’이라고 불렀고, 그러한 것들이 유대교회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외적인 제물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천국적인 것들을 표상했고 궁극적으로 모두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에 예배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제물이 예배인 까닭은 제단 위에 어떤 물질을 올려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외적인 것이 내적인 거룩한 실재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표상하는 실재가 없다면 표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표상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외적인 의식이 사랑과 체어리티와 주님을 향한 예배를 표상한다면, 그 안에는 실제로 그 내적인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질문은 더욱 강합니다.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가 우상과 같은 것, 죽은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앞 AC.348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했고, 이제 AC.349에서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를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행위든 예배든 외적인 형식 자체가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외적인 예배는 중요하지 않다’거나 ‘내적인 마음만 바르면 예배 형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요점은 외적인 것을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외적인 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349의 핵심 문장은 바로 이것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곧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질서는 주님에게서 시작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사람의 내면에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외적인 예배와 행위 가운데 표현될 때 외적인 것은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는 서로 경쟁하는 두 종류의 예배가 아니라,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서 표현되고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하나의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가인의 제물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예배가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AC.346에서 이미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음을 보았고, AC.348에서는 가인의 ‘땅의 소산’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죽은 행위를 뜻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AC.349에서는 그 소산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리는 것이 그러한 상태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겉으로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외적 예배의 존재만으로 참된 예배가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외적인 것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것이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말3:2-4, 겔20:40, 습3:10의 인용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여러 방향에서 뒷받침합니다. 말라기의 ‘공의로운 제물’은 스베덴보리에게 ‘내적 제물’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드리는 ‘레위 자손’은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며, ‘옛날’은 태고교회, ‘고대’는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제사 형식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내적 본질입니다. 특히 레위가 등장하는 것은 앞의 AC.342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했고 그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와 체어리티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외적인 의식의 정교함이 예배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그 안에 있을 때 예배가 살아 있게 됩니다.

 

겔20:40은 이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물’과 ‘첫 열매’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된 행위’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AC.348과 AC.349를 연결하는 중요한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AC.348에서는 살아 있는 열매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제 AC.349에서는 그 체어리티의 행위가 다시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인간 자신의 선한 성품이나 공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참된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 마치 자기에게서 행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참된 예물이 되고 그 행위와 결합된 외적 예배도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습3:10의 ‘구스’에 대한 설명도 같은 논증을 마무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스가 ‘천적인 것들, 곧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349에 인용된 여러 말씀을 각각 별개의 주제로 떼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말라기의 ‘공의로운 제물’, 에스겔의 ‘예물과 첫 열매’, 스바냐의 ‘예물’은 모두 제물의 참된 영적 실재가 사랑과 체어리티와 그 행위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함께 인용되었습니다. 외적 제물이 참된 예배를 의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내적 실재를 담고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46부터 AC.349까지의 흐름도 매우 선명해집니다. AC.346은 ‘날들의 끝에’, ‘땅의 소산’, ‘제물’을 각각 시간의 경과,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개괄했습니다. AC.347은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리 분리되는 상태를 설명했고, AC.348은 그 상태에서 나온 ‘땅의 소산’이 왜 죽은 행위인지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AC.349는 이제 그러한 행위에서 나온 외적 예배 역시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결국 창4:3 전체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낳고, 더 나아가 예배의 형태까지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가인의 제물 이야기를 ‘가인은 나쁜 것을 드렸고 아벨은 좋은 것을 드렸다’는 물질적 차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곡식을 드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땅의 소산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고, 곡식 제물이 본질적으로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 제물이 어떤 내적 상태에서 나왔는가입니다. 바로 다음 AC.350부터는 아벨의 제물이 다루어집니다. 가인과 아벨 모두 외적으로는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지만,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두 제물의 차이는 제단 위에 놓인 물질보다 그 예배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것의 차이입니다.

 

오늘날의 예배를 돌아볼 때도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헌금하고 성찬에 참여하며 설교하고 봉사하는 외적 예배는 모두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 자체가 자동으로 예배에 영적 생명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AC.349가 묻는 것은 ‘예배 형식을 갖추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외적인 것에 무엇이 생명을 주고 있는가?’입니다. 예배가 우리를 주님 앞에서 낮추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 예배는 정교하게 유지하면서도 자기 의와 지배욕과 다른 사람에 대한 멸시를 붙들고 있다면, 우리는 가인의 제물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예배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AC.349의 중심은 ‘예배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한 질문으로 압축됩니다. 외적 형식이 스스로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곧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이 번호의 중심 문장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외적인 것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외적인 형식만 충실하게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내적인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외적인 행위와 예배 가운데 표현되는 것이 참된 질서입니다. 가인의 제물은 바로 그 질서가 깨어졌을 때 외적 예배가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절의 아벨의 제물은 그와 반대로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게 됩니다.

 

 

 

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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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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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신앙이 없는 행위이며, 그 자체로 죽은 행위입니다. 그것들은 오직 겉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관하여 예레미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by the “fruit of the ground” are meant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ppears also from what follows; for the works of faith devoid of charity are works of no faith, being in themselves dead, for they are solely of the external man. Of such it is written in Jeremiah: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4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렘12:1-2, 4) Wherefore doth the way of the wicked prosper? Thou hast planted them, they also have taken root; they have gone on, they also bear fruit; thou art near in their mouth, and far from their reins;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Jer. 12:1–2, 4)

 

‘입에는 가까우나 마음에는 멀다’(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는 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뜻하며, 그들에 관하여 ‘땅이 슬퍼한다’(the land mourns)고 말합니다. 같은 선지서에서는 그러한 행위를 ‘행위의 열매’(fruit of works)라고 부릅니다. “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 denotes those who are of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concerning whom it is said that “the land mourns.” In the same prophet such works are called the “fruit of works”: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17:9, 10) The heart is deceitful [supplantativum] above all things, and it is desperate, who can know it? I Jehovah search the heart, I try the reins, even to give to every man according to his ways, and according to the fruit of his works. (Jer. 17:9–10)

 

미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n Micah:

 

그 땅은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리로다 (미7:13) The land shall be desolate because of them that dwell therein, for the fruit of their works. (Micah 7:13)

 

그러한 ‘열매’(fruit)는 열매가 아니며, 그러한 ‘행위’(work)는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와 뿌리가 모두 멸망하는 것을 아모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That such “fruit” is no fruit, or that the “work” is dead, and that both fruit and root perish, is thus declared in Amos: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암2:9) I destroyed the Amorite before them, whose height was like the height of the cedars, and he was strong as the oaks; yet I destroyed his fruit from above, and his roots from beneath. (Amos 2:9)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David:

 

왕이 그들의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그들의 자손을 사람 중에서 끊으리로다 (시21:10) Their fruit shalt thou destroy from the earth, and their seed from the sons of man. (Ps. 21:10)

 

그러나 체어리티의 행위는 살아 있으며, 그것들에 관하여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다’(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고 선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But the works of charity are living, and of them it is declared that they “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as in Isaiah: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사37:31) The remnant that is escaped of the house of Judah shall again 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Isa. 37:31)

 

‘위로 열매를 맺는다’(bear fruit upward)는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를 같은 선지서에서는 ‘아름답고 영화로운 열매’(fruit of excellence)라고 부릅니다. To “bear fruit upward” is to act from charity. Such fruit is called the “fruit of excellence,” in the same prophet: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사4:2) In that day shall the shoot of Jehovah be beautiful and glorious, and the fruit of the earth excellent and comely for them that are escaped of Israel. (Isa. 4:2)

 

그것은 또한 ‘구원의 열매’(fruit of salvation)이며, 같은 선지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릅니다. It is also the “fruit of salvation,” and is so called by the same prophet: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 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사45:8) Drop down, ye heavens, from above, and let the skies pour down righteousness; let the earth open, and let them bring forth the fruit of salvation, and let righteousness spring up together; I Jehovah will create it. (Isa. 45:8)

 

해설

AC.348은 앞의 AC.346에서 간략하게 밝힌 가인의 ‘땅의 소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그것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고 했고, 이제 AC.348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행위를 ‘신앙이 없는 행위’이며 ‘그 자체로 죽은 행위’라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강한 표현입니다. 가인에게 행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인은 땅을 경작하고 소산을 거두어 여호와께 제물로 드립니다. 외적으로 보면 행위도 있고 예배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묻는 것은 행위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행위 안에 어떤 생명이 있는가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나온 행위는 겉으로 아무리 종교적이고 선해 보여도 신앙의 참된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은 행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그것들은 오직 겉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외적인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는 결국 자연계의 실제 삶에서 말과 행동과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자기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예배하고 봉사하는 일은 모두 겉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그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외적인 형태만 있을 뿐 그것을 안에서 살아 있게 하는 사랑의 생명이 없습니다. 따라서 AC.348의 ‘겉 사람에게만 속한다’는 말은 외적 행동을 낮추는 말이 아니라, 외적 행동이 내적 생명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렘12:1-2, 4가 첫 번째 증거로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도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외적으로만 보면 생명과 번영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곧이어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라는 결정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말할 수 있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외적인 종교 행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지 않다면 입에 있는 신앙과 내적인 생명 사이에는 거리가 생깁니다. 따라서 ‘열매를 맺는다’는 표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열매가 살아 있는 선의 열매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내적 상태에서 그 열매가 나왔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렘17:9-10과 미7:13도 같은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시고 각 사람에게 그의 길과 ‘행위의 열매’에 따라 갚으십니다. 미가에서도 땅이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열매’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언제나 자동으로 좋은 행위를 뜻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악과 거짓에서도 그것에 맞는 행위가 나오며, 말씀은 그것 역시 ‘행위의 열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열매라는 외적 명칭이 아니라 그 열매의 질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땅의 소산’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소산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살아 있는 열매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암2:9과 시21:10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열매가 결국 멸망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아모스에서는 ‘위의 열매’와 ‘아래의 뿌리’가 함께 언급됩니다. 여기서 AC.348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체어리티가 없는 행위는 참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열매가 아니며 결국 그 열매와 뿌리가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뿌리와 열매의 이미지를 통해 행위에는 그것을 낳는 근원이 있다는 점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번호에서 뿌리를 특정한 영적 기능과 일대일로 대응시켜 지나치게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논지는 훨씬 단순하고 강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오는 행위는 외적인 모양을 가지고 한동안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영적인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348은 죽은 행위를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37:31부터는 정반대의 열매, 곧 살아 있는 체어리티의 행위로 전환합니다.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라는 말씀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위로 열매를 맺는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이라고 매우 명확하게 풀이합니다. 이것이 AC.348 전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참된 열매는 단순히 외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땅의 소산과 이사야의 ‘위로 맺는 열매’는 둘 다 겉으로는 열매이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죽은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로부터 나온 살아 있는 행위입니다.

 

사4:2와 사45:8은 이 살아 있는 열매의 성질을 더욱 밝힙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아름답고 영화로운’ 열매라고 하고, 이어 ‘구원의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특히 사45:8의 마지막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는 말씀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한다는 것이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한 마음을 만들어 선행한다는 뜻이 아님을 분명하게 해 줍니다. 모든 참된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선을 주시고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삶으로 행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행위의 생명은 인간 자신의 공로나 선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에게서 행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은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가르치는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AC.348은 ‘행위’를 평가하는 매우 섬세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단순히 ‘행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좋은 신앙인이다’라고 말하지도 않고, 반대로 ‘행위는 중요하지 않고 신앙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와 행위가 하나의 살아 있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도록 하고 체어리티를 향하게 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행위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참된 행위는 신앙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밖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외적인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죽은 행위’라고 합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행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배, 헌금, 봉사, 구제, 전도, 설교, 성경 공부와 같은 일은 모두 귀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8은 그 외적인 모양만 보고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같은 행위라도 자기 의와 명예와 인정,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의식에서 행할 수도 있고, 주님께 받은 것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려는 체어리티에서 행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적 동기를 완전히 알 수 없으므로 이 말씀을 타인의 행위를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는 왜 이것을 하고 있는가?’, ‘내가 하는 이 일이 정말 이웃의 참된 유익을 향하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특히 AC.348은 앞의 AC.344-346과 함께 읽을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AC.344에서는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과 교리의 목적이 체어리티라고 했습니다. AC.345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고 했고, AC.346에서는 그러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제 AC.348은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밝힙니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행위는 아무리 열매처럼 보여도 죽은 행위이고, 체어리티에서 나온 행위는 살아 있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문제 되는 것은 ‘가인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에게도 ‘땅의 소산’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열매에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AC.348은 ‘열매의 생명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답은 열매의 크기나 외형이나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그것이 체어리티로부터 나오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근원은 다시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이 사람 안에서 신앙의 진리와 결합되고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날 때 행위는 살아 있는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는 우리에게 단순히 ‘더 많은 선행을 하라’고 말하기보다 ‘네 행위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묻습니다. 가인의 ‘땅의 소산’과 이사야의 ‘위로 맺는 열매’는 겉으로 모두 열매이지만 그 생명은 전혀 다릅니다. 바로 그 차이를 분별하는 것이 AC.348의 핵심입니다.

 

 

 

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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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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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그리고 그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Cain)이라 하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a man Jehovah, ‘여호와인 사람’)라고 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신앙이 ‘날들의 끝에’, 곧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That by the “end of days” is signified in process of time, is evident to all. At first, and while there was simplicity in it, the doctrine here called “Cain” does not appear to have been so unacceptable as it became afterwards,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y called their offspring a “man Jehovah.” Thus at first faith was not so far separated from love as at the “end of days,” or in process of tim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every doctrine of true faith.

 

해설

AC.347은 바로 앞 AC.346의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을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분리가 한순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심해졌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처음에 그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이라 하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처음에는 신앙이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가인 해석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줍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지만, 그 분리가 처음부터 마지막 상태와 똑같은 정도였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구별하여 인식하는 방향이 시작되었지만, 처음에는 사랑과의 거리가 아직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거리가 더욱 벌어졌고, 결국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와 예배가 나타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단순함’(simplicity)을 단순히 지식이 적거나 사고가 미숙한 상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47의 문맥에서는 아직 신앙에 관한 교리가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강하게 세우면서 사랑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초기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이 초기 상태를 곧 ‘가인은 처음에는 온전한 참된 신앙이었다’고 표현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338에서 이미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AC.340에서도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꺼내어 구별된 교리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성격은 처음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다만 AC.347이 새롭게 알려 주는 것은 그 분리가 처음부터 최종적인 형태로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점차 심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구별’과 ‘분리’를 다시 정확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특히 후대의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신앙에 관한 교리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본래 질서를 잃고, 점차 사랑과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데 있습니다. AC.347의 표현을 빌리면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리 분리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간격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사랑과 체어리티에 의해 살아 있게 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충분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그 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밀어내는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은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합니다. AC.346에서는 이 말을 우선 단순하게 ‘시간이 흐른 뒤’라고 설명했습니다. AC.347은 이제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후대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분리가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창4:3에서 가인은 ‘땅의 소산’을 여호와께 제물로 가져옵니다. AC.346에서 이것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와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세월이 지난 후에’는 단순히 달력상의 어느 기간이 지나갔다는 사실만을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맥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상태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더 멀리 사랑에서 분리되었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초기 상태가 후대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근거로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했다는 사실을 듭니다. 이것은 앞의 AC.338과 AC.340에서 이미 자세히 살펴본 창4:1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표현을 근거로 ‘초기의 가인은 완전한 신앙이었다’고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신앙이 사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지지 않았고, 그들이 신앙에 속한 것을 주님과 관련하여 인식하는 상태가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상태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덩어리의 완성된 악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따로 인식하기 시작한 작은 분리가 있었고, 그 분리가 점차 깊어져 나중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멀리 떨어지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AC.347의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를 가인이라는 특정 교리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엄중한 경고입니다. 참된 교리는 처음부터 거짓이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에 속한 것을 담고 있는 교리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 본래의 사랑과 생명에서 점점 멀어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주님을 더 잘 알고, 말씀을 더 바르게 이해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돕기 위해 교리를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관심이 ‘이 진리에 따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누가 이 교리를 더 정확하게 알고 고백하는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교리가 자기 집단의 우월성을 증명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면, 교리의 문장은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의 성질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리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타락한다거나, 교리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보존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교리 그 자체보다 그것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참된 교리를 보존한다는 것은 문장을 정확하게 전승하는 것과 함께 그 교리가 지향하는 생명도 보존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정확하게 보존하면서도 그 교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리적 정확성을 지키는 일과 사랑을 지키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함께 가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보호하고 방향을 주며, 선은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이 원리는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경고가 됩니다. 처음 말씀을 배우거나 AC를 공부할 때에는 ‘주님을 더 알고 싶다’, ‘내 삶을 고치고 싶다’, ‘말씀의 속뜻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더 잘 따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이 쌓이고 익숙해지면서 어느 순간 관심이 ‘나는 이것을 안다’는 데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지식을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 자체가 거짓으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그 진리와 우리의 사랑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347은 다른 교회나 다른 시대의 교리 타락을 분석하는 도구가 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AC 번역과 해설 작업에도 이 원리는 매우 직접적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의 속뜻을 더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삶과 목회에 사용하기 위해 시작한 공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정확한 번역’, ‘정확한 상응’, ‘정확한 교리’를 갖추는 것 자체에만 만족하게 될 위험은 언제든 있습니다. 물론 정확성은 중요하며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정확성이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자기 안의 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44에서 말한 신앙의 목적을 놓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보존하는 일과 그 진리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을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결국 AC.347이 보여 주는 것은 ‘처음의 상태가 끝의 상태를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처음부터 후대와 똑같이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것으로 세우는 방향이 계속되면서 그 거리는 점점 커졌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후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가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앙의 생명을 한 번 얻고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진리는 계속 사랑을 향하고, 신앙은 계속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7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처음에 무엇을 믿었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내가 가진 신앙은 사랑과 더 가까워지고 있는가, 아니면 점점 멀어지고 있는가?’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짧은 표현 속에 바로 이 엄중한 자기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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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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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하고,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하며,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an offering to Jehovah)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By the “end of days” is meant in process of time; by the “fruit of the ground,”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nd by “an offering to Jehovah,” worship thence derived.

 

해설

AC.346부터 창4:3의 속뜻으로 들어갑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라는 짧은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날들의 끝에’는 시간이 흐른 뒤를,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AC.346의 가장 중요한 점은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고 ‘예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서 반드시 아무런 종교적 행위도 하지 않거나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으로는 신앙에 속한 많은 행위와 예배가 그대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디에서 나오며 무엇이 그 안에 생명을 주고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먼저 ‘날들의 끝에’는 이 번호에서는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합니다. 앞의 AC.338-345에서 가인이 의미하는 신앙의 성질이 차례로 밝혀졌습니다. 본래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사랑 안에 있었고 퍼셉션으로 알려졌지만,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로 따로 인식되었으며,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참된 신앙의 생명을 잃는다는 사실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창4:3에서는 그 신앙으로부터 무엇이 나오는지를 다룹니다. 다만 ‘날들의 끝에’라는 표현 자체가 어떤 영적 과정의 완성이나 특정 단계를 직접 의미한다고 여기기보다는,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의 설명 그대로 ‘시간이 흐른 뒤’라는 뜻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바로 다음 AC.347에서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그다음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합니다. 여기서 ‘땅의 소산’이라는 표현 자체를 언제나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 AC.343에서 인용된 사30:23의 ‘땅의 소산의 양식’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상응을 하나의 고정된 암호표처럼 사용하여 ‘땅의 소산=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것을 가져오는 사람이 ‘가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고, AC.345에서는 ‘농사하는 자’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경작한 땅에서 나온 소산은 그와 같은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의미합니다. 같은 표현도 그것이 놓인 문맥과 연결된 영적 상태에 따라 의미를 살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는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소산을 거두었으며 그것을 여호와께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문제를 단순히 ‘선행을 하는 사람과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의 대비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외적으로 선해 보이는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내적 성질이 자동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단지 어떤 종류의 외적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종교적 봉사나 헌신처럼 보여도 그것이 자기 의와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행하는 것인지에 따라 그 내적인 성질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면을 쉽게 판단할 수 없으므로, 이 원리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행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살피는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AC.346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지점은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을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풀이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거기에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배가 앞에서 말한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예배와 그의 내적 생명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인도 여호와께 제물을 드립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 때문에 가인의 이야기는 더 깊은 경고가 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도 종교적인 형태를 갖출 수 있고,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심지어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의 형태까지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의 설명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고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면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46에서는 문제가 단지 머릿속의 지식과 교리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자기 나름의 삶과 종교적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활동의 양만 가지고 신앙의 생명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가보다 그 신앙과 행위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가 더 근본적인 질문이 됩니다.

 

이것은 이어질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면 두 사람 모두 여호와께 제물을 드립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가져오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가져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식물 제사는 나쁘고 동물 제사는 좋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적인 제물의 종류가 주님의 반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AC.346이 이미 가인의 제물을 설명하면서 그 배후에 있는 신앙과 행위의 성질을 먼저 밝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예배이고, 뒤에서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로 설명됩니다. 두 예배의 차이는 외적인 물건의 차이보다 그것을 낳은 내적 상태의 차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46은 예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 자체에 큰 의미를 둡니다. 물론 예배는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주님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신앙생활의 소중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AC.346은 ‘예배를 드렸는가?’와 함께 ‘그 예배는 어떤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이것은 예배 중에 감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형식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드렸는지를 평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가 우리를 주님 앞에서 낮추고, 자기 안의 악을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지를 살피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예배와 삶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아니라 같은 내적 생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특히 가인의 제물이 무거운 이유는 그가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도 교리는 남을 수 있고, 종교적 행위도 남을 수 있으며, 예배도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종교생활이 활발하다는 사실만으로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되어 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이것을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의 예배를 의심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의 내적 사랑을 완전히 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AC.346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나는 예배하고 있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내 예배와 신앙은 나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묻게 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AC.346의 흐름은 매우 간결합니다. ‘시간이 흐른 뒤 →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 → 거기에서 나온 예배’입니다. 앞의 AC.338-345가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는 상태의 성질을 설명했다면, 이제 AC.346-349는 그 상태에서 나온 행위와 예배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벌써 중요한 사실 하나가 분명해집니다. ‘행위가 있다’는 것과 ‘체어리티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같은 말이 아니며, ‘예배가 있다’는 것과 ‘예배의 내적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도 언제나 같은 말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하고, 참된 행위는 그 체어리티의 선을 나타내며, 참된 예배 역시 그 생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6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는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입니다.

 

 

 

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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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5, 창4:2,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농사하는 자’ 가인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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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8/2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0, ‘전능왕 오셔서’, 찬90, ‘주 예수 내가 알기 전’입니다.

 

오늘부터 창4 절별 주석을 시작, 오늘은 그 첫 번째, 1절로 2절, AC 글 번호로는 338번에서 345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1-2)

 

제목은

 

가인과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38-345 요약입니다.

 

AC.338-345는 앞의 AC.324-337에서 제시된 창4 전체의 개요를 바탕으로, 이제 창4:1-2의 각 표현을 하나씩 풀어 가며 ‘가인’과 ‘아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본격적으로 밝히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는 태고교회를, 그들에게서 태어난 ‘가인’과 ‘아벨’은 그 교회 안에서 생겨난 신앙과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출생 이야기는 단순히 한 가정에서 두 아들이 태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내적 생명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떻게 구별되고, 마침내 서로 분리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338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인’이 처음부터 완전히 타락한 신앙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신앙’이라고 하며, 그것을 ‘가인’이라 부릅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신앙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안에 살아 있었기 때문에 사랑과 별개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바로 여기에서 ‘가인의 분리’가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이해할 때에는 ‘구별’과 ‘분리’를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특히 오늘날의 인간은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과정을 거칩니다. 문제는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랑 없이도 신앙 자체가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본래 사랑을 섬겨야 할 신앙이 사랑과 독립하여 자기 자리를 주장하기 시작할 때 가인의 길이 열립니다.

 

AC.339-340은 창세기 초기의 ‘잉태’, ‘출생’, ‘자손’, ‘아들’, ‘딸’, ‘이름’,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태고인들은 이름을 통하여 어떤 교회적·교리적 실재를 나타냈으며, 그것들의 관계를 자연적인 출생과 계보의 형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자연계에서 자녀가 부모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나듯이 교회 안에서도 하나의 교리와 상태가 다른 교리와 상태로부터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창4의 계보를 단순히 개인들의 생물학적 족보와 시간적 연속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이러한 출생과 계보를 통하여 교회의 영적 상태들이 서로 어떻게 생겨나고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러한 원리는 창4뿐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이어집니다. ‘아들’은 교회의 진리와 신앙에 속한 것을, ‘딸’은 선과 사랑에 속한 것을 나타낼 수 있으며, ‘낳다’와 ‘출생’은 새로운 교리와 교회적 상태가 생겨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단순히 첫아들이 태어났다는 의미를 넘어, 태고교회의 생명 가운데서 신앙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영적 변화를 묘사합니다. 바로 이 원리를 이해해야 이후에 이어지는 가인의 후손들과 창5의 계보 역시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교리의 연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341에서는 두 번째 자손인 ‘아벨’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벨’과 ‘형제’가 체어리티를 상징한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경쟁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형제’처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나중에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죽이는 사건이 아니라, 신앙이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마침내 소멸시키는 교회의 내적 비극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깊이 있다고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엇이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이며, 진리는 선을 향하고 선 안에서 살아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진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완전히 분리되면 겉으로는 여전히 신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그 안의 생명은 사라지게 됩니다.

 

AC.342-344는 ‘아벨은 양 치는 자였다’는 말씀을 통하여 체어리티의 성격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양 떼’는 선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며, ‘양 치는 자’는 그러한 선을 돌보고 행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벨이 양 치는 자였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단순한 감정이나 선한 의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선을 돌보고 행하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체어리티에는 이웃의 선을 바라보고, 그것을 보호하고,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내려는 삶이 들어 있습니다.

 

반대로 AC.345의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다’는 말씀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땅’은 교회를 의미하지만, 가인이 ‘땅을 경작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체어리티 없이 신앙만을 붙들면서 점차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행하는 ‘양 치는 자’인 반면,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낸 채 외적인 것에 머무는 ‘농사하는 자’가 됩니다. 이렇게 두 직업의 차이는 곧 두 교회적 상태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38-345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가인의 타락’이 처음부터 극단적인 악의 모습으로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출발점은 매우 미세했습니다. 참된 신앙을 버린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바라본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분리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은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주장하고, 결국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게 됩니다. 이후 창4에서 나타나는 가인의 분노와 안색의 변화, 그리고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바로 이 분리가 점차 심화된 결과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에도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내가 무엇을 믿는가?’가 아닙니다. ‘내가 믿는 진리가 내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있는가?’도 중요합니다. 진리를 알수록 주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자신의 악을 더 잘 보고 버리며,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게 된다면 그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수록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사랑보다 교리적 우월성과 승리를 앞세우게 된다면, 아무리 그 교리 자체가 참되더라도 그 안에서 ‘가인의 분리’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이러한 분리를 처음부터 강제로 막지 않으신 데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중요한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잘못된 방향을 원하시거나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십니다. 사랑과 체어리티는 강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보여 주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돌이킬 길을 마련하시지만 인간이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는 마지막 자리까지 대신 차지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과 동시에, 그 실패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회복의 길을 계속 마련하신다는 섭리를 함께 보여 줍니다.

 

결국 AC.338-345의 중심은 ‘가인은 신앙이고 아벨은 체어리티다’라는 단순한 대응에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입니다. 신앙은 본래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을 때에만 참된 신앙입니다. 가인은 그 결합이 처음 흔들리기 시작한 상태를, 아벨은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할 체어리티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양 치는 자’와 ‘농사하는 자’라는 대비를 통하여 두 길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한쪽은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고, 다른 한쪽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붙들면서 점차 외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향합니다.

 

따라서 이 구간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신앙이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가?’입니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를 마침내 우리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선과 결합시키는 역사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을 줄 때 둘은 다시 본래의 질서를 이루게 됩니다. 그때 신앙은 단순히 옳은 것을 알고 고백하는 신앙을 넘어, 실제 삶에서 선을 낳는 ‘신앙다운 신앙’이 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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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 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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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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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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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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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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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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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5, 창4:2,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농사하는 자’ 가인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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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보충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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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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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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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23(D1)

 

 

2665, 2, 창4.2, 2026-08-23(D1)-주일예배(창4,1-2, AC.338-345), ‘가인과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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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30, 창4:3-5, AC.346-358),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

※ 오늘(2026/08/3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1, ‘홀로 한 분 하나님께’, 찬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346번에서 358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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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16, 창4, AC.324-337), ‘가인과 아벨, 신앙과 체어리티에 관하여’

※ 오늘(2026/08/1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9,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 찬89, ‘샤론의 꽃 예수’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시작 전 먼저 창4 전체 개요를 살피는 ‘창4 본문, 개요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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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내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고, 그가 자기 형제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곧 그는 ‘아벨’(Abel)이 의미하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가리켜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till the ground)이라고 했다는 것은 창3:19, 23에서 분명합니다. 거기에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져 땅을 경작하게 되었다’(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a “tiller of the 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is evident from what follows: that Jehovah had no respect to his offering, and that he slew his brother, that is, destroyed charity, signified by “Abel.” Those were said to “till the ground” who look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as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in Gen. 3:19, 23, where we read that the man was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창3:19, 23)

 

해설

AC.345는 창4:2의 마지막 표현, 곧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AC.341부터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대비를 마무리합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이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자연적인 직업의 우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43에서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고 사람을 그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을 나타냈고, AC.344에서는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과 교리의 목적이 체어리티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45는 그 반대편에 있는 가인을 보여 줍니다. 그는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이며, 바로 그런 상태를 여기서는 ‘농사하는 자’라고 합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말씀에서 ‘농사하는 자’나 ‘땅을 경작하는 자’가 언제나 악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연적인 농사나 노동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말씀에서 ‘땅’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아벨은 목축을 했으므로 선하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으므로 악하다’는 식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속뜻과 전혀 다릅니다. AC.345에서 ‘농사하는 자’가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가인이 의미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는 단어 하나에 언제나 똑같이 붙어 있는 고정된 암호가 아니라 말씀의 문맥과 그 안에서 나타나는 영적 상태에 따라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앞으로 일어날 두 사건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특히 두 번째 사건은 결정적입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하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은 신앙 자체가 전혀 없는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라고 말합니다. 외적으로는 신앙이 매우 강해 보일 수도 있고,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가 풍부하며 그것을 열심히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다면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AC.341에서 나온 선언이 AC.345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이것이 가인의 정체를 이해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고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했습니다. AC.345의 가인은 바로 그 위험이 실제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제는 신앙에 속한 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채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고 선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것으로 여겨질 때, 신앙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AC.345가 이 지점에서 창3:19, 23으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창3에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져 ‘땅을 경작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45에서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을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이 ‘농사하는 자’라는 말은 앞 장에서 나타난 이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에덴으로 표상된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질서에서 멀어지면서 시선은 점차 더 낮고 외적인 것에 향하게 됩니다. AC.345는 그러한 상태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사이의 관계를 ‘땅을 경작함’이라는 같은 표현을 통하여 연결해 보여 줍니다.

 

여기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본다’는 말을 자연계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몸을 돌보고, 일하고, 돈을 관리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자연계에서 맡겨진 수많은 쓰임을 수행해야 합니다. 자연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으며 오히려 영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중요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듯 무엇을 ‘바라보는가’입니다. 곧 무엇을 중심과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연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을 섬긴다면 그것들은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종교까지 자기 명예와 이익, 우월감과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면 질서는 뒤집힙니다.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신앙의 시선과 목적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 ‘농사하는 자’ 가인이 보여 주는 위험입니다.

 

이렇게 보면 ‘양 치는 자’ 아벨과 ‘농사하는 자’ 가인의 대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AC.343에서 보았듯 참된 목자는 양 떼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고, 체어리티는 모으고 결합합니다. 반면 AC.345의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붙들면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한쪽은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선과 쓰임으로 나아가는 방향이고, 다른 한쪽은 신앙이 사랑에서 떨어져 점점 자기 자신에게 머무는 방향입니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아주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을 서로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살펴보았듯 문제는 구별 자체가 아니라 분리입니다. 구별된 신앙이 사랑과 다시 결합되지 않고 독립적인 것이 되면,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그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45는 앞으로 일어날 아벨의 죽음을 이미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갑자기 일어난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AC.338부터 설명해 온 분리의 결과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꺼내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고,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을 단지 지식으로 알게 되며, 신앙을 체어리티라는 목적에서 분리한 결과가 마침내 ‘형제를 죽이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인간의 모든 교리적 구별에 적용하여 ‘교리를 세우는 것 자체가 결국 체어리티를 죽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후대의 인간에게는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교리로 이해하며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와 결합하느냐,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완결적인 신앙으로 남느냐에 있습니다.

 

결국 AC.345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 신앙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말씀과 교리를 많이 알고 신앙을 강하게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기 우월성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세상적인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낸다면 우리는 ‘농사하는 자’ 가인의 모습을 우리 자신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비극은 신앙을 버린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면서 그 신앙의 생명과 목적인 사랑과 체어리티를 잃은 데 있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것이 AC.341에서 시작하여 AC.345에서 다시 한번 확정되는 창4:2의 결론입니다.

 

 

 

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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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 그리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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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 그리고 신앙의 교리(doctrine of faith)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입니다(막12:28-35; 마22:34-39). What avails faith, that is, the memory-knowledge [scientia], the knowledge [cognitio], and the doctrine of faith, but that the man may become such as faith teaches? And the primary thing that it teaches is charity. (Mark 12:28-35; Matt. 22:34-39)

 

28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35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막12:28-35)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4-39)

 

이것이 신앙이 지향하는 모든 것의 목적입니다. 이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이나 교리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This is the end of all it has in view, and if this be not attained, what is all knowledge or doctrine but a mere empty nothing?

 

해설

AC.344는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문제를 매우 날카로운 질문 하나로 압축합니다.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낮추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하여 주어졌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scientia), 인식 지식(cognitio), 그리고 신앙의 교리(doctrine of faith)를 차례로 언급한 뒤, 그 모든 것의 목적은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진리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사람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있으며, 그 진리를 아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 그리고 교리를 불필요하거나 낮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말씀의 내용을 배우고 기억해야 하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고 인식해야 하고, 서로 관련된 진리들을 질서 있게 연결하여 교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도 올바르게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그 모든 것에 ‘무엇을 위해서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지식과 교리는 그 자체로 종착점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사람이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목적은 사람이 단지 ‘무엇을 믿는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고, 그가 믿는 진리가 가르치는 대로 ‘그러한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가 자기 삶의 성질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정확한 교리 체계만을 만들어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의지와 사랑과 삶을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이 가르치는 여러 항목 가운데 조금 더 중요한 한 항목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진리들이 궁극적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야 할 방향과 목적이 체어리티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342에서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은 자신에게 머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이루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이 먼저 신앙을 만들고, 그다음 행위를 쌓아 마침내 자기 힘으로 체어리티를 만들어 낸다는 기계적인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도 체어리티도 그 생명과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 하지만,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고 살아 있는 체어리티가 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막12:28-35와 마22:34-39가 여기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두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계명의 중심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두십니다. 특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은 신앙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라고 말할 때, 그는 단순히 교리보다 윤리적 행동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계명과 주님에 관한 모든 참된 진리는 결국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막12장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고까지 말합니다. 따라서 외적인 종교 행위나 신앙고백 역시 그 안에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으면 자기 목적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 두 복음서 인용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함께 제시된 것이므로, 각각 별도의 심화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가 목적이므로 신앙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 없는 막연한 선의나 인간적인 호감이 아닙니다.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 무엇이 주님의 질서에 맞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관계가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선은 진리와 결합하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목적이 수단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단의 참된 가치를 결정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할 때 신앙은 비로소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 맞게 쓰이며,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통하여 바른 방향과 형태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AC.344의 질문은 ‘신앙인가, 체어리티인가?’가 아니라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이것을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놓으면 AC.344가 이 자리에서 등장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을 없애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고 교리로 정리하여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AC.340에서는 그 결과 이전에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어 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4는 그 분리가 왜 치명적인지를 목적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는 것은 단순히 두 요소가 서로 떨어지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잃는 것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가인이 아벨에게서 분리된다는 것은 신앙이 자신이 향해야 할 목적에서 분리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무엇인가 한 부분이 조금 부족한 신앙이 아니라 자기 생명과 목적을 잃은 신앙이 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두고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단언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AC.344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과 교리는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지식과 교리 그 자체를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과 생명에서 분리된 지식과 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방대하고 정교한 신학 체계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께로 돌이키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선을 행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아직 영적인 목적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람 안에서 악을 드러내고, 회개하게 하고, 삶을 바꾸며, 이웃을 향한 선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진리는 더 이상 머리에만 있는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이 점은 AC를 공부하는 우리에게 특히 직접적인 질문이 됩니다. 우리는 신앙, 체어리티, 퍼셉션, 상응, proprium, 리메인스, 속 사람과 겉 사람,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같은 수많은 아르카나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귀하며,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아르카나를 더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의 오류를 더 잘 찾아내는 사람이 되는 데 그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더 잘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며 이웃의 참된 선을 더 구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아르카나에 대한 지식마저 자기 우월성을 세우는 수단이 된다면, 우리는 가인의 문제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가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배운 진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게 하고, 악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지식은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귀한 수단이 됩니다.

 

결국 AC.344의 핵심은 단순히 ‘지식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말보다 훨씬 정교합니다. ‘진리는 삶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신앙의 교리는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중심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입니다. 가인의 오류는 신앙을 귀하게 여긴 데 있지 않고 신앙을 그 목적에서 분리하여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게 한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44가 우리에게 묻는 가장 중요한 질문도 ‘나는 얼마나 정확한 신앙을 알고 있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믿는 이 진리는 주님께서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데 쓰이고 있는가?’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고, 진리가 삶이 되며, 그 모든 것 안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실 때 비로소 신앙은 자신의 목적에 이르고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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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말씀에서 아주 익숙하게 사용하는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shepherd)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양 떼’(flock)라고 합니다.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것을 가르치지도 않는 사람은 참된 목자가 아니며, 선으로 인도받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지 않는 사람은 양 떼에 속하지 않습니다. ‘목자’와 ‘양 떼’가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말씀의 인용으로 확증할 필요는 거의 없지만, 다음 구절들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에서, That a “shepherd of the flock” i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must be obvious to everyone, for this is a familiar figure in the Word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s. He who leads and teaches is called a “shepherd,” and those who are led and taught are called the “flock.” He who does not lead to the good of charity and teach it, is not a true shepherd; and he who is not led to good, and does not learn what is good, is not of the flock. It is scarcely necessary to confirm this signification of “shepherd” and “flock” by quotations from the Word; but the following passages may be cited. In Isaiah: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사30:23) The Lord shall give th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owest the ground, and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in that day shall he feed thy cattle in a broad meadow, (Isa. 30:23)

 

여기서 ‘땅의 소산의 양식’(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다시 이사야에서, where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denotes charity. Again: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사40:11) The Lord Jehovih shall feed his flock like a shepherd; he shall gather the lambs into his arm, and carry them in his bosom, and shall gently lead those that are with young. (Isa. 40:11)

 

시편에서, In David: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시80:1) Give ear, O Shepherd of Israel, thou that leadest Joseph like a flock; thou that sittest on the cherubim, shine forth. (Ps. 80:1)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2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내가 멸절하리니 3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렘6:2, 3) I have likened the daughter of Zion to a comely and delicate woman; the shepherds and their flocks shall come unto her, they shall pitch tents near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everyone his own space.(Jer. 6:2, 3)

 

에스겔에서, In Ezekiel:

 

37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38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겔36:37, 38) Thus saith the Lord Jehovih, I will multiply them as a flock of man, as a hallowed flock, as the flock of Jerusalem in her appointed times; so shall the waste cities be filled with the flock of man. (Ezek. 36:37–38)

 

이사야에서, In Isaiah: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사60:7) All the flocks of Arabia shall be gathered together unto thee, the rams of Nebaioth shall minister unto thee. (Isa. 60:7)

 

양 떼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양 떼를 모으는’(gather the flock) 사람들이며,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양 떼를 흩는’(scatter the flock) 사람들입니다.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ey who lead the flock to the good of charity are they who “gather the flock”; but they who do not lead them to the good of charity “scatter the flock”; for all gathering together and union are of charity, and all dispersion and disunion are from want of charity.

 

해설

AC.343은 앞의 AC.341-342에서 아벨을 ‘양 치는 자’라고 한 이유를 말씀 전체에 익숙한 ‘목자와 양 떼’의 표상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AC.341에서는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AC.342에서는 체어리티를 의미하는 레위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 치는 자’를 표상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3은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하면서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양 떼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목자=가르치는 사람, 양 떼=배우는 사람’이라는 대응 관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것을 가르치지도 않는 사람은 참된 목자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AC.343 전체를 여는 핵심 질문은 ‘목자가 얼마나 많이 가르치는가?’가 아니라 ‘목자가 사람들을 어디로 인도하는가?’입니다. 그 목적지는 분명히 ‘체어리티의 선’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2의 ‘신앙 →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 체어리티’라는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참된 목자는 사람에게 무엇이 참인지를 알려 주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그 신앙이 실제 삶으로 나타나고, 마침내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이루시도록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렇다고 ‘진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목자는 분명히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며, 양 떼 역시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참된 선을 행하려면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를 진리를 통하여 배워야 합니다. 다만 진리는 그 자체에 사람을 붙잡아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가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세운 데 있었다면, 참된 목자의 역할은 정반대로 진리를 통하여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의미가 말씀 전체에서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사실 많은 인용으로 확증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면서도 여러 구절을 제시합니다. 이 구절들을 각각 독립된 주제로 확장하기보다 하나의 공통된 그림으로 읽는 것이 AC.343의 의도에 더 잘 맞습니다. 사30:23에서는 주님께서 비를 주시고 땅이 양식을 내며 가축이 넓은 목장에서 먹는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땅의 소산의 양식’을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시80:1에서는 주님을 ‘이스라엘의 목자’, 곧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라고 부릅니다. 렘6:2-3에서는 목자들과 양 떼가 나타나고, 겔36:37-38에서는 사람들을 ‘양 떼’와 ‘제사 드릴 양 떼’로 표현하며, 사60:7에서도 양 무리가 모여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모든 인용의 중심은 목자와 양 떼라는 말이 말씀에서 사람을 영적으로 인도하고 선으로 이끄는 관계를 나타내는 익숙한 표상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40:11은 이 전체 의미를 가장 아름답게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주 여호와께서 친히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십니다.’ 여기서는 참된 목자의 원형이 결국 주님 자신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신다’는 일련의 모습은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영적 생명을 위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흩어진 것을 모으시며, 연약한 것을 품으시고, 각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사람인 목자가 참된 목자인 것은 자기에게서 목자직의 능력이나 선이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 쓰임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사람들을 자기에게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로 인도하며, 자기 생각으로 먹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하여 사람들이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AC.343은 목회와 가르침을 바라보는 상당히 엄중한 기준도 제시합니다. 성경을 많이 가르치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많은 사람을 이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참된 목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이 사람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배우면서 자기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선을 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 가르침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지식은 많아지는데 자기 교리의 우월성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며, 끊임없이 편을 나누고 적을 만들어 간다면 그 가르침이 정말 AC.343이 말하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사람을 인도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체어리티를 강조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흐리거나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가르치는 일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목자는 진리를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양 떼의 편에서도 똑같이 강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선으로 인도받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지 않는 사람은 양 떼에 속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양 떼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회에 등록되어 있거나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듣는다는 외적인 소속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된 양 떼는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고 그 선으로 인도받으려 합니다. 목자가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해야 한다면 양 떼 역시 그 선을 배우고 받아들여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결국 목자와 양 떼 모두의 중심에는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목자는 자기 권위와 지식을 세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양 떼도 단지 종교적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하시고, 사람은 그 인도를 받아 실제 삶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AC.343의 마지막은 이 모든 설명을 ‘모임과 결합’이라는 매우 중요한 원리로 모읍니다.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임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한 장소에 모여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교회에 속하고 같은 예배에 참석하며 같은 교리를 고백한다고 해서 반드시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결합을 이루는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반대로 외적인 생각과 판단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더라도 서로의 참된 선을 바라며 주님 안에서 이웃의 유익을 구한다면 더 깊은 차원에서 결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리적 차이가 모두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를 보여 주고 체어리티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다만 진리가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생명을 가지려면 체어리티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마지막 원리에서 가인과 아벨의 대비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의 길은 분리의 길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세우고,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며, 마침내 자기 ‘형제’인 아벨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양 치는 자’입니다. 체어리티는 양 떼를 선으로 인도하고, 모으고, 결합합니다. 특히 사40:11의 주님은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는’ 목자로 나타나시므로, 가인이 보여 주는 분리와 목자이신 주님이 보여 주시는 모음은 서로 정반대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가인은 나쁜 사람, 아벨은 착한 사람’이라는 도덕적 대비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는 신앙의 질서를, 아벨은 신앙이 본래 결합되어야 할 체어리티의 선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신앙이 단지 하나의 덕목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자신이 사람을 선으로 인도해야 하는 목적과 생명을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결국 AC.343은 ‘참된 목자는 어디로 인도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답은 ‘체어리티의 선으로’입니다. 참된 목자는 진리를 가르치지만 사람을 지식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 진리가 삶이 되고 선이 되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참된 인도의 근원은 사람인 목자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십니다. 사람은 그 주님의 목자직에 쓰임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AC.343은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진리를 전하고, 가르치고, 권면하고, 돌보는 모든 자리에서 우리는 같은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전하는 진리는 이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 자신이 양 떼의 자리에서는 ‘나는 단지 진리를 듣고 아는 데 머무르는가, 아니면 주님의 인도를 받아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고 그 선을 행하려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체어리티가 있는 곳에서는 모이고 결합하며, 체어리티가 사라지는 곳에서는 흩어지고 분리됩니다. 이것이 ‘양 치는 자’ 아벨을 통하여 AC.343이 보여 주는 참된 목자의 모습입니다.

 

 

 

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 그리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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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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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야곱에게서 난 레아의 첫 아들들도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르우벤’(Reuben)은 신앙을, ‘시므온’(Simeon)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Levi)는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창29:32-34). 이런 이유로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를 표상했습니다. That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chur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nothing else than faith and charity. The same is signified by the first children of Leah from Jacob; “Reuben” denoting faith; “Simeon,” faith in act; and “Levi,” charity (Gen. 29:32, 33, 34), wherefore also the tribe of Levi received the priesthood, and represented the “shepherd of the flock.”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창29:32-34)

 

체어리티는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므로 ‘형제’(brother)라고 하며, 그 이름을 ‘아벨’(Abel)이라고 합니다. As charity is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t is called “brother,” and is named “Abel.”

 

해설

AC.342는 바로 앞 AC.341의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아벨과 형제가 이를 의미한다’는 설명을 말씀의 다른 곳을 통하여 뒷받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잉태하고 낳는다’는 표현은 AC.339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 안에서 하나의 교리적, 교회적 상태가 다른 상태로부터 생겨나는 것을 출생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교회 안에서 참으로 생겨나야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신앙과, 그 진리가 선과 삶으로 결합되어 나타나는 체어리티입니다. 이 둘은 서로 독립하여 경쟁하는 두 요소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적 생명을 이루도록 결합되어야 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야곱과 레아에게서 난 첫 세 아들, 곧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를 가져옵니다.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이 세 이름을 함께 놓으면 AC.342가 보여 주려는 질서가 선명해집니다. 신앙은 단지 어떤 진리를 알고 그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받아들인 진리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렇게 삶으로 나타나는 신앙은 마침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르우벤 → 시므온 → 레위’는 ‘신앙 →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 체어리티’라는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이 나아가는 방향과 정반대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세우려 하지만, 말씀에 나타나는 정상적인 질서에서는 신앙이 자기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삶으로 나아가며 체어리티를 향합니다.

 

다만 이 흐름을 ‘먼저 머리로 진리를 알고, 그다음 일정 기간 행동을 반복하면, 마지막에 자동으로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기계적인 세 단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은 인간의 반복된 행위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고 진리와 선을 결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행위로 나아가고 체어리티에 이르는 과정 전체는 인간이 스스로 선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행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이루시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또한 이것을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에 그대로 소급해서도 안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졌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반면 AC.337이 말하는 후대의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르우벤 → 시므온 → 레위’는 특히 진리를 배워 삶으로 받아들이고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후대 인간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이것을 모든 시대의 인간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단일한 시간표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창29:32-34가 인용된 이유도 바로 이 정도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40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의 이름을 비롯한 여러 사례를 인용하여 고대인들이 어떤 상태와 의미를 이름에 담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AC.342에서는 같은 창29의 구절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이번에는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가 차례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통하여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더 넓은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는 르우벤의 이름이 ‘봄’과, 시므온이 ‘들음’과, 레위가 ‘연합’과 연결되어 각각 더 깊은 의미를 갖지만, AC.342 자체에서는 그 세부 상응까지 모두 풀 필요가 없습니다. 이 번호가 직접 밝히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르우벤은 신앙,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레위는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므로 창29:32-34는 세 인물에 관한 별도의 주제를 여는 인용이라기보다 AC.342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하나의 연속된 계보로 보여 주는 근거입니다.

 

이어지는 레위 지파와 제사장직에 관한 설명도 같은 중심에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레위가 체어리티를 의미하기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고 ‘양 치는 자’를 표상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제사장직의 역사나 제도 전체로 논의를 넓히기보다, 왜 이것이 아벨의 ‘양 치는 자’와 연결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AC.342에서는 레위 역시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그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아 ‘양 치는 자’를 표상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벨 - 체어리티 - 양 치는 자’와 ‘레위 - 체어리티 - 제사장직 - 양 치는 자’가 같은 중심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말씀의 서로 멀리 떨어져 보이는 부분들이 속뜻에서는 하나의 영적 질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양 치는 자’를 곧바로 오늘날의 목회자와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AC.342의 직접적인 초점은 체어리티입니다.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와 연결되는 것은 참된 체어리티가 이웃의 선을 실제로 돌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단지 마음속의 따뜻한 감정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의 참된 유익을 구하며 그것을 실제 쓰임으로 행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사장직 역시 그 본질을 지위나 권위에서 찾기보다 선을 섬기고 사람을 주님의 선과 진리로 인도하는 쓰임에서 보아야 합니다. 다만 ‘목자가 양을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한다’는 이미지는 바로 다음 AC.343에서 훨씬 직접적으로 전개되므로, AC.342에서는 그 주제를 지나치게 앞당겨 확장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다시 ‘형제’라는 표현으로 돌아옵니다. ‘체어리티는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므로 형제라고 하며, 그 이름을 아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이 단지 한 부모에게서 난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넘어,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서로 결합되어 있어야 하는 관계임을 보여 줍니다. 신앙의 정상적인 방향이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곧 신앙에서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거쳐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가인의 비극은 바로 이 방향을 거부한 데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이고 함께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마침내 그 형제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가인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하는 장면도 더욱 무겁게 읽히게 됩니다. 다만 그 구절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AC에서 자세히 다루는 것이 좋고, 여기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형제’로서 결합되어야 한다는 데까지만 붙드는 것이 적절합니다.

 

결국 AC.342의 핵심은 ‘신앙의 목적지는 신앙 자체가 아니다’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삶으로 나아가야 하고, 삶으로 나타나는 신앙은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자신의 생명과 목적을 얻습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참된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내가 알고 믿는 진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단지 머릿속에서 더 많은 교리 지식으로 쌓이고 있는가, 아니면 실제 삶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주님께서 그것을 체어리티와 결합하시도록 받아들이고 있는가? ‘르우벤 → 시므온 → 레위’는 신앙이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고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방향을 보여 주며, 바로 그 점에서 체어리티인 아벨이 왜 신앙인 가인의 ‘형제’인지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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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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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아벨’(Abel)과 ‘형제’(brother)가 이를 의미합니다.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나타내고,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는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비록 그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signified by “Abel” and “brother”; a “shepherd of the flock” denote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and a “tiller of the 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해설

AC.341은 매우 짧지만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핵심 구조를 한 문장 안에 압축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AC.338-340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을 ‘신앙’이라고 하고 그것을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이제 창4:2로 넘어오면서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그것을 ‘아벨’과 ‘형제’가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속뜻에서 처음부터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를 ‘아벨’뿐 아니라 ‘형제’도 의미한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남남인 두 가지가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이며, 체어리티는 신앙의 ‘형제’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결국 신앙이 자신과 결합되어 있어야 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첫 번째 자손은 신앙이고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라는 말을 시간적 또는 영적 우선순위로 곧바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태고교회에서 먼저 신앙이 생긴 뒤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37에서 이미 살펴보았듯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을 받는 질서였습니다. AC.338의 ‘첫 번째 자손’과 AC.341의 ‘두 번째 자손’은 그 본래의 천적 질서를 뒤집어 신앙이 본질적으로 체어리티보다 먼저라는 교리를 세우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AC.339에서 설명한 것처럼 교회에 속한 것들이 서로 어떻게 파생되고 관계를 이루는지를 출생과 계보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태고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의 질서와 후대 영적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를 뒤섞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였는데, 스베덴보리는 이를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체어리티의 매우 중요한 성격이 담겨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이웃에게 좋은 감정을 품는 데 머물지 않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를 단순한 외적 선행과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행동이 겉으로 선해 보인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곧 체어리티인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실제 쓰임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양 치는 자’라는 표현에서 AC.341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양이나 목축에 관한 세부 상응보다 ‘체어리티의 선을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는 살아 움직이고 실제 삶으로 나타나는 선입니다.

 

반면 가인은 ‘농사하는 자’인데,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강하게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농사 자체가 부정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땅’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되며, 이후 AC에서는 그 의미가 훨씬 세밀하게 설명됩니다. AC.341에서 중요한 것은 ‘농사하는 자’라는 표현이 가인이라는 상태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가인은 앞에서 보았듯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구별하여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교리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제 그 신앙이 체어리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들어가 있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다면 결국 체어리티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AC.341의 가장 중요한 문장이 나옵니다.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단순히 ‘불완전한 신앙’이나 ‘조금 부족한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을 잃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참된 의미에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AC.340에서는 본래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상태를 보았습니다. 그때에는 아직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지 쉽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1은 그 분리의 본질을 이미 드러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순간, 사람이 붙들고 있는 것은 이름으로는 신앙일 수 있어도 생명을 가진 참된 신앙은 아닙니다.

 

이것은 교리나 신앙고백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앞의 AC.337에서도 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신앙이 먼저 배워지는가?’가 아니라 ‘그 신앙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와 결합하며, 마침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불필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의 진리를 통하여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배우고 분별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경쟁시키면서 ‘신앙이 중요한가, 사랑이 중요한가?’라고 묻는 것 자체가 이 둘의 본래 관계를 놓치게 할 수 있습니다. 둘은 ‘형제’이며,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 약속과 원칙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고 서로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은 사랑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 자체는 사라지고 ‘나는 정해진 규칙을 모두 지켔으므로 좋은 배우자다’라는 주장만 남는다면, 규칙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관계의 생명은 크게 훼손된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교리를 알고 그것을 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신앙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된 채 자기 완결적인 것으로 남는다면 교리적 형식은 유지되어도 신앙의 생명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41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도 신앙이기는 하지만 조금 부족하다’고 하지 않고 단호하게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 기준은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정하기 위한 잣대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신학적인 오류를 잘 찾아내는 것 자체는 귀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신앙인지는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어떤 생명을 이루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더 알수록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고, 자기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며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며 실제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이웃의 선에는 무관심하고, 그 지식을 자기 우월성과 정당성을 세우는 데 사용한다면 ‘나는 무엇을 믿는가?’뿐 아니라 ‘내 신앙은 지금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1은 앞으로 펼쳐질 가인과 아벨의 비극을 이미 한 문장으로 예고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형제’ 역시 체어리티이며,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가인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단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분리된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때 죽는 것은 아벨만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 역시 자기 생명을 잃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 짧고 단호한 선언이 AC.341의 핵심이며, 앞으로 이어지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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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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