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2026/10/25)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 찬132, ‘주의 영광 빛나니’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15절로 20절, AC 글 번호로는 510번에서 515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5-20)

 

 

제목은

 

마할랄렐, 야렛, 에녹

 

 

이며, 다음은 이 특별한 AC 본문 리딩 예배를 위한 ‘3분 요약’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 주석, 총 10,837개 글)를 따라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섯 날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일곱째 날의 안식에 이르러 사랑으로 살아가는 천적 인간으로 이끄십니다.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통하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퍼셉션’(perception)을 지녔으며, 신앙은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신의 감각과 ‘프로프리움’(proprium)을 신뢰하면서 이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이 더 깊은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구원의 길을 보존하셨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가인의 계열은 라멕에 이르러 황폐해졌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하여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하셨습니다. 또한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다시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창5에서는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가 단순한 개인들의 출생과 죽음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의 계승과 상태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 셋과 에노스,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던 퍼셉션은 점차 덜 명료하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지난주에는 이러한 쇠퇴가 단지 인식 능력의 약화가 아니라, 사랑과 선한 쓰임의 생명이 약해지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마할랄렐과 야렛, 그리고 에녹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읽습니다. 특히 마할랄렐 교회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야렛을 거쳐 에녹에 이르러서는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교리로 보존하여 후대에 전할 길이 준비됩니다.

 

오늘 특별히 기억할 것은 ‘진리를 아는 기쁨은 선을 행하는 기쁨을 섬겨야 하며, 인간의 내적 상태가 약해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다음 길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510-515 요약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창5:6-14, AC.496-509를 통하여 셋에서 에노스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다시 게난에서 마할랄렐로 이어지는 태고교회 후속 교회들의 계승을 살펴보았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알아차리는 ‘퍼셉션’(perception)을 지닌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후속 교회들에 이르면서 퍼셉션은 점차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변화를 열매나 씨앗의 가장 안쪽 알맹이에서 그것을 둘러싼 막으로 나아가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AC.503에서는 퍼셉션의 생명이 단순히 선과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 있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다음 말씀인 창5:15-20, AC.510-515를 읽습니다. 여기에는 마할랄렐이 야렛을 낳고, 야렛이 다시 에녹을 낳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름과 나이, 자녀들의 출생과 죽음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과정에서 사랑과 쓰임의 생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으며, 주님께서 그 가운데서도 어떻게 선과 진리를 보존할 길을 마련하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15절은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10에 따르면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야렛’(Jared)은 여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로부터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을 거쳐 이제 야렛이라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이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한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승은 앞선 교회의 상태가 다음 교회에 그대로 반복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앞선 교회로부터 선과 진리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는 점차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AC.511에서 마할랄렐 교회의 상태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설명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 능력이 더욱 개별적이고 명료한 것에서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어 감에 따라 ‘사랑의 생명 또는 쓰임의 생명’도 마찬가지로 감소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생명 또는 쓰임의 생명이 어떠한가에 따라 퍼셉션 능력도 그러하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난주 AC.503에서 배운 가르침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퍼셉션은 사랑이나 쓰임과 별도로 존재하는 특별한 지적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선을 행하는 생명으로 살아 있을 때, 그 사랑과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은 천적인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질서를 잘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많이 배운 뒤 그 진리를 통하여 선에 이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는 생명이 먼저 있었으며,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퍼셉션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과 선이 중심이고 진리는 그 사랑과 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생명의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마할랄렐 교회에 이르러 이 질서에 매우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AC.511은 마할랄렐 교회를 이루었던 사람들이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상태’였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저세상에서 그들과 같은 사람들을 경험함으로써 알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진리를 버리거나 거짓을 사랑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진리를 알고 이해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기쁨이 선을 행하고 이웃에게 쓰임이 되는 기쁨보다 앞서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면 매우 작은 변화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알아 가는 일은 분명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적 질서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본래 진리는 선을 섬기고, 선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며, 사랑은 실제 쓰임 가운데 생명이 됩니다. 그런데 진리를 아는 것 자체에서 얻는 기쁨이 그 진리로 선을 행하는 기쁨보다 더 커지면, 진리와 사랑 사이의 질서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이지만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진리를 아는 기쁨’ 자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더 사랑하는가’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목적이 주님을 더 깊이 알고, 무엇이 선인지 더 분명하게 이해하며, 이웃에게 더 지혜롭게 쓰임이 되기 위한 것이라면 그 기쁨은 선한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더 큰 목적이 되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일이 그 뒤로 밀려난다면, 진리가 사랑과 쓰임을 섬기는 본래의 질서는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퍼셉션이 왜 점차 흐려졌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퍼셉션은 단순히 특별한 영적 감각이나 신비한 인식 능력이 아니라, 사랑과 선으로부터 진리를 알아보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쓰임의 생명이 약해지면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능력도 함께 약해집니다. 마할랄렐 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한 것은 단지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더 사랑하고 무엇에서 더 큰 기쁨을 느끼는가 하는 내적 질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말씀의 속뜻을 배우고, 상응을 이해하며,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깊이 공부하는 데서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에는 몰랐던 진리를 깨닫고 말씀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앎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는 살펴야 합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서 만족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진리로 인해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에게 더 선한 쓰임이 되는 사람으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많이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만큼 사랑이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응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이웃을 더 따뜻하게 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말씀에 관한 지식이 자신을 높이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진리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사랑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주시는 목적은 단지 많은 것을 알게 하시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선을 분별하고, 선을 사랑하며,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배우면서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이 알게 되었는가?’뿐 아니라 ‘이 진리로 인해 나는 어떤 선을 더 사랑하게 되었으며, 누구에게 어떤 쓰임이 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제 16절과 17절에서는 마할랄렐이 야렛을 낳은 뒤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12는 이 말씀들의 의미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고 간단히 밝힙니다. 우리는 이미 ‘날들’과 ‘연수’가 교회의 때와 상태들을, ‘아들들과 딸들’이 그 교회에 속한 진리들과 선들을, ‘죽었다’는 말씀이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만 같은 표현이 사용되더라도 각 교회가 지닌 진리와 선의 구체적인 어떠함은 그 교회의 내적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따라서 마할랄렐의 자녀들과 죽음 역시 앞서 AC.511에서 설명한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마할랄렐이 죽었다는 것은 마할랄렐 교회를 특징짓던 상태가 끝났음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의 완전한 소멸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마할랄렐로부터 야렛이라는 다음 교회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창5에서 반복되는 ‘낳음’과 ‘죽음’은 한 교회의 상태가 다음 교회로 이어지는 과정과 그 고유한 상태가 끝나는 과정을 함께 보여 줍니다.

 

이제 18절은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13에 따르면 야렛은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에녹은 지금까지의 교회 계승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퍼셉션이 어떻게 점차 쇠퇴했는가가 중심이었다면, 에녹에 이르러서는 그 퍼셉션으로부터 나온 것들이 어떻게 후대를 위하여 보존되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창5의 개요인 AC.464에서 에녹의 역할을 미리 밝혔습니다.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들었던 이들이 있었으며, 이것이 ‘에녹’이라는 이름으로 의미되었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는 생명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직접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퍼셉션한 진리를 따로 모아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배워서 진리를 알아 가는 방식이 중심적인 역할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속 교회들에서 퍼셉션이 점차 흐려지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처럼 선으로부터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없는 상태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앞선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선과 진리는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것들이 함께 사라져 버린다면 후대의 사람들은 무엇을 통하여 진리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에녹의 역할이 나타납니다.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들고 후대를 위하여 보존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여전히 퍼셉션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교리가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훗날 그것을 필요로 할 사람들을 위하여 보존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 안에서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는 것이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그 퍼셉션으로부터 나온 진리를 교리로 보존하여 전달할 필요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만 에녹을 곧바로 훗날 노아로 시작되는 영적 교회와 동일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에녹 역시 태고교회 시대의 계승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가운데 이전에 퍼셉션된 진리들이 후대를 위해 보존될 길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AC.5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렛 교회에 관하여 매우 흥미로운 설명을 덧붙입니다. 야렛이라는 교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 교회의 어떠함은 앞선 마할랄렐과 뒤따르는 에녹을 통하여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렛이 이 두 교회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5의 교회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마할랄렐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에녹에서는 이전에 퍼셉션되었던 것들을 교리로 모아 보존하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야렛은 바로 이 두 상태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야렛을 이해하려면 그 이름만 따로 떼어 어떤 독립적인 특징을 찾으려 하기보다, 마할랄렐에서 에녹으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변화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야렛 교회가 이미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거나 특정한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C.514는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야렛이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으며,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과정과 그것이 교리로 보존되는 과정 사이에서 하나의 연결 고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변화가 단절된 사건들의 반복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상태들의 연속임을 보게 됩니다. 앞선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사랑과 퍼셉션의 상태가 달라지며, 마침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진리가 보존되는 단계에 이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내적 상태가 변화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 다음 시대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계셨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이 처음의 퍼셉션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맞추어 선과 진리를 보존할 길을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19절과 20절에서는 야렛이 에녹을 낳은 뒤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15는 여기서 앞서 설명한 ‘날들’과 ‘연수’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면서, 홍수 이전 사람들의 매우 긴 수명이라는 문제를 직접 다룹니다. 스베덴보리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나이가 야렛의 구백육십이 세나 므두셀라의 구백육십구 세처럼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 장 3절에 나오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는 말씀을 함께 제시합니다.

 

이것은 창5의 계보를 읽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이 장에 나오는 이름들과 연수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개인의 생애나 수명 기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사람’,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은 각각 교회를 의미하며, 그들에게 연결된 ‘날들’과 ‘연수’ 역시 그 교회들의 때와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야렛이 구백육십이 세를 살았다는 말씀의 중심은 한 개인이 실제로 962년을 살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야렛으로 표현된 교회의 때와 상태가 말씀의 숫자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창6:3의 백이십 년을 함께 언급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창5에서는 구백 년이 넘는 수명이 반복되지만, 바로 다음 장에서는 인간의 날이 백이십 년이라고 기록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숫자들을 모두 단순한 생물학적 수명으로 읽지 않고, 교회의 때와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다만 이것이 각 숫자에 어떤 구체적인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가 임의로 계산하거나 추정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515가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이 연수들이 특정 개인의 실제 나이가 아니라 교회의 때와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창5의 이름들이 각각 교회를 의미하고 연수도 실제 수명이 아니라면, 창세기 초반은 역사적 실재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이야기라는 뜻일까요? 여기에는 신중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창세기 초반의 계보는 현대적인 연대기나 전기 자료처럼 개인들의 생애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안에 표현된 교회의 영적 상태와 변화까지 아무런 실재가 없는 허구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문자적 서술 안에서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의 영적 역사를 읽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뜻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의 문자를 무시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 안에 담긴 내적 의미를 읽는 것입니다. ‘야렛이 구백육십이 세를 살았다’는 말씀에서 단순히 그 숫자가 실제 수명인지 아닌지를 논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어떤 교회의 상태를 계시하고 계시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창5는 기이할 만큼 오래 살았던 사람들의 족보가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가 어떻게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거치며 변화해 갔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가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연수들이 자연적인 시간보다 교회의 때와 상태를 의미한다고 해서, 이 여러 교회가 실제 역사 속에서 얼마 동안 존속했는지, 또는 서로 어느 정도 같은 시대에 존재했는지까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515가 밝히는 것은 숫자의 속뜻이지 각 교회의 구체적인 역사적 존속 기간이나 공존 기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5의 숫자로 여러 교회의 역사적 연대표를 만들어 내기보다, 그 숫자들을 통하여 말씀께서 드러내시는 교회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의 AC.510-515를 하나로 모아 보면, 창5의 계보에는 세 가지 중요한 흐름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사랑과 쓰임의 질서 변화’입니다. 마할랄렐 교회에 이르러 진리를 아는 기쁨이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버린 상태가 아니라, 진리가 섬겨야 할 사랑과 쓰임보다 진리 자체에서 얻는 기쁨을 더 좋아하게 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질서의 변화와 함께 퍼셉션도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어 갔습니다.

 

둘째는 ‘퍼셉션의 쇠퇴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교리적 보존’입니다. 마할랄렐에서 야렛으로, 야렛에서 에녹으로 이어지는 동안 교회의 상태는 계속 변화하였습니다. 특히 야렛은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였으며, 에녹에 이르러서는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교리로 만들어 후대를 위하여 보존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인간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없게 되는 가운데서도, 그 진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될 길이 준비된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의 때와 상태를 통하여 드러나는 영적 역사’입니다. 마할랄렐의 팔백구십오 세와 야렛의 구백육십이 세는 단순한 개인의 수명 기록이 아니라 각각의 교회가 지닌 때와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를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누가 몇 년을 살았는가보다 각 교회가 어떤 선과 진리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내적 상태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흐름을 함께 바라보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처음의 천적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사랑과 쓰임의 생명은 점차 감소하였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알아차리는 퍼셉션도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달라졌다고 해서 선과 진리의 근원이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달라진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달라진 상태를 아시고 다음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퍼셉션이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이전 교회들이 받았던 선과 진리가 후대에 전달될 수 있도록 보존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이 에녹의 등장을 통하여 드러나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처음의 완전한 상태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곧바로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될 때에도, 변화된 상태에 맞추어 그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가 그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실제 삶에서 행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특별한 영적 능력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주신 진리를 올바르게 사랑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고 교리를 배우는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더 많은 지식을 쌓는 것 자체가 마지막 목적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욱 깊이 알고 이웃을 더욱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이루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이 선을 행하는 기쁨으로 이어지고, 우리가 받은 사랑이 실제 삶에서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나타날 때, 그 진리는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한 가지 질문 앞에 세워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아는 기쁨과 그 진리로 선을 행하는 기쁨 가운데 무엇을 더 사랑하고 있는가?’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기쁨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할랄렐 교회에서 나타난 질서의 변화를 자신의 안에서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진리를 배울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자비로워지며, 작은 일에서도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기를 기뻐한다면 그 진리는 본래의 목적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상태가 약해지는 때에도 주님을 향한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같은 열심과 명료함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상태를 아시며, 그 상태에 맞추어 계속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전처럼 분명하게 보지 못할 때에도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가 다시 사랑과 선한 쓰임으로 이어질 길을 열어 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교리를 통하여 진리를 보존할 길을 준비하셨던 주님께서는 오늘도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창5:15-20은 단순히 마할랄렐과 야렛과 에녹이라는 이름이 이어지는 족보가 아닙니다. 그 속뜻으로는 인간의 사랑과 퍼셉션이 어떻게 변해 갔으며, 그 변화 속에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선과 진리를 보존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참된 신앙의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진리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그 진리와 결합되어 실제로 선한 쓰임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창5:15-20, AC.510-515를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말씀입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은 선을 행하는 기쁨을 섬겨야 하며, 인간의 내적 상태가 달라지고 약해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그 상태에 맞는 다음 길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며, 우리의 모든 변화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510, 창5: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C.510-511)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창5:15) AC.510 ‘마할랄렐’(Mahalalel)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야렛’(Jared)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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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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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2, 창5:16-17,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Ma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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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3, 창5: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C.513-514)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3 ‘야렛’(Jared)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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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4, 창5:18,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에 있는 야렛’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4 ‘야렛’(Jared)이라 하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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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5, 창5:19-20,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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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오늘 범위 창5:15-20, AC.510-515 중 리딩 필독 두 편 링크입니다. 혹시 몹시 바쁘신 분들은 꼭 이 링크들만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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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5, 창5:19-20,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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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다음은 다음 주(20261101, 성찬) 리딩 본문(창5:21-24, AC.516-522) 소개입니다.

 

다음 주에는 창5:21-24, AC.516-522를 통하여 ‘에녹’(Enoch)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살펴보겠습니다. 에녹은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들고, 후대를 위하여 보존하는 일을 나타냅니다. 특히 성경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합니다. 다음 주에는 이 특별한 표현의 속뜻을 살펴보면서, 퍼셉션이 점차 사라져 가는 가운데 주님께서 어떻게 진리를 보존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0-25(D1)

 

2674, 3, 창5.3, 2026-10-25(D1)-주일예배(창5,15-20, AC.510-515), ‘마할랄렐, 야렛, 에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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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10/18, 창5:6-14, AC.496-509), ‘흐려지는 퍼셉션, 변함없는 주님의 섭리’

※ 오늘(2026/10/18)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 찬131, ‘다 나와 찬송부르세’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6절로 14절, AC 글 번호로는 496번에서 509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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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5 심화

2. ‘렘6:3은 심판의 장면인데 왜 천적 교회의 상응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었는가?’

 

AC.415의 마지막 인용인 렘6:3은 앞서 나온 양 떼와 목초지의 말씀들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렘23:3에서는 주님께서 흩어진 양 떼를 모으시고, 겔34:14에서는 좋은 꼴로 먹이십니다. 그러나 렘6장은 예루살렘을 향한 위협을 선포하는 문맥입니다. 그 가운데 목자들과 가축 떼가 ‘딸 시온’에게 와서 그 주위에 장막을 치고 각기 자기 자리를 차지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한 뒤 ‘딸 시온’은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장막’과 ‘가축 떼’가 그 교회에 관하여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설명합니다. 심판을 알리는 장면이 어떻게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밝히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까?

 

먼저 렘6:3의 문자적 문맥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 예루살렘은 위협을 받고 있으며, 목자들이 양 떼를 데리고 와 장막을 치는 모습도 그 위협의 흐름 안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목자들이 시온을 보호하려고 모여들었다’거나 ‘가축 떼가 평화롭게 먹으므로 천국의 안식이 이루어졌다’고 풀이하면 본문의 방향이 바뀌어 버립니다. 말씀의 속뜻을 살핀다는 이유로 문자적 장면을 그 반대의 이야기로 고쳐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이 실제 성경을 펼쳐 읽었을 때에도 설명이 본문과 충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에서 직접 밝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설명은 짧고 분명합니다. ‘딸 시온’은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장막’과 ‘가축 떼’가 그 교회에 관하여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목자들의 정체를 선한 인도자로 풀이하지도 않고, 장막을 치는 행위를 교회의 보호라고 설명하지도 않으며, 각기 자기 자리를 차지하는 일을 천국에서 각자의 수용 능력에 따라 선을 받는 상태라고 풀이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AC.415를 해설하는 우리도 그가 직접 밝힌 범위를 먼저 지켜야 합니다.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를 이해하려면 AC.415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증명하려는 것은 야발의 ‘가축’이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말씀에서 가축과 그에 관련된 표현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왔습니다. 렘6:3에는 ‘딸 시온’, ‘장막’, ‘가축 떼’가 한 구절 안에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교회를 나타내는 시온과 관련하여 장막과 가축 떼가 함께 언급된다는 점을 근거로 삼습니다. 그 구절의 문자적 장면 전체가 평화롭기 때문에 인용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용된 표현들이 그의 논증과 관련되기 때문에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어떤 구절에서 특정 표현의 속뜻을 밝힌다고 해서, 그 구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행동을 같은 방향의 긍정적인 뜻으로 풀이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렘6:3의 문자적 장면은 경고의 문맥에 그대로 두면서, 스베덴보리가 그 가운데서 주목한 ‘딸 시온’, ‘장막’, ‘가축 떼’의 관계를 살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장막은 사랑의 거룩한 것’이라는 설명만 붙들고 그 장막을 치는 모든 행동까지 거룩한 행위로 단정하면, 상응을 읽는 일이 본문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본문 위에 다른 이야기를 덧씌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기존 심화의 몇몇 설명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장막을 친다’는 것을 곧바로 ‘교회가 사랑 안에서 보호되고 질서를 이루는 상태’라고 하거나,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인다’는 것을 ‘각 사람이 자기 상태에 따라 선과 진리를 공급받는 것’이라고 한 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러한 설명이 다른 저작이나 다른 문맥에서 논의될 여지는 있더라도, AC.415는 이 구절을 그렇게 풀이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렘6장의 문자적 문맥까지 고려하면, 이 해석들을 이번 번호의 직접적인 결론으로 제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말한 것과 우리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충실한 해설의 출발점입니다.

 

그렇다고 렘6:3이 AC.415에서 어색하게 끼어든 인용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AC.414에서 장막의 의미를 밝힌 뒤, 이번 번호에서 가축의 의미를 밝히는 흐름을 생각하면 이 구절의 위치가 분명해집니다. 장막과 가축 떼가 천적 교회를 나타내는 시온과 관련하여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은, 야발의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장막은 사랑의 거룩한 것을, 가축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냅니다. 렘6:3은 이 두 표현이 천적 교회와 관련하여 함께 사용되는 말씀의 한 사례로 제시된 것입니다.

 

성도들이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상응의 낱말 뜻만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에는 먼저 문자적 문맥을 정직하게 살피고, 이어서 스베덴보리가 그 문맥에서 실제로 무엇을 풀이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직접 풀이하지 않은 부분을 그럴듯한 설명으로 채워 넣는 일은 신중해야 합니다. 렘6:3은 심판의 장면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등장하는 장막과 가축 떼가 AC.415의 논증에 어떤 근거를 제공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읽기가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지 않으면서 함께 존중하는 길입니다. (AC.415 심화 2)

 

 

 

AC.415, 창4:20, ‘가축의 조상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5‘가축의 조상’(father of cattle)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 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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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5 심화 1,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은 왜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AC.414 심화1.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은 왜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AC.415에는 양 떼와 가축뿐 아니라 우리, 목초지, 떡, 밀, 기름, 새 포도주가 잇달아 등장합니다. 이 많은 표현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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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5 심화

1.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은 왜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AC.415에는 양 떼와 가축뿐 아니라 우리, 목초지, 떡, 밀, 기름, 새 포도주가 잇달아 등장합니다. 이 많은 표현을 하나씩 외우려 하면 정작 스베덴보리가 밝히려는 중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가 이 구절들을 인용한 목적은 모든 농경·목축 용어의 뜻을 빠짐없이 정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야발의 ‘가축’이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씀에서 그와 관련된 표현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통해 밝히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각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풀이한 표현을 확인하고, 그 표현들이 공통으로 드러내는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렘23:3에서 주님은 흩어진 양 떼의 남은 자들을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양 떼는 스스로 길을 찾아 돌아오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모으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우리’가 사랑의 선과 관련된다는 근거로 인용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단순한 축사의 울타리로만 생각하기보다, 주님께서 양 떼를 돌아오게 하시는 말씀 안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다만 이 구절의 ‘남은 자’를 곧바로 개인 안에 보존된 선과 진리라는 기술적 의미의 ‘리메인스’로 확정하는 것은 AC.415의 직접 설명을 넘어섭니다. 여기서는 흩어진 양 떼를 다시 모으시는 주님의 행위와 그들이 돌아가는 우리에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겔34:14는 이 관계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주님은 양 떼를 좋은 꼴로 먹이시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그들의 우리가 있게 하시며, 좋은 우리에 눕게 하고 살진 꼴을 먹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 ‘우리’와 ‘목초지’가 사랑의 선들을 나타내고, ‘기름짐’도 그러한 선들에 관하여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이해할 때에는 ‘우리는 보호, 목초지는 진리의 공급, 눕는 것은 안식’이라는 식으로 각 낱말에 별도의 뜻을 먼저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우리와 좋은 꼴, 살진 목초지가 함께 묘사하는 풍성함을 살피면서, 스베덴보리가 그것들을 사랑의 선과 연결했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이번 번호에 더 충실한 읽기입니다.

 

사30:23에서는 땅의 소산으로 만든 떡이 풍성하고 기름지며, 가축이 넓은 초장에서 먹는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떡’이 천적인 것을, 가축이 먹는 ‘기름진 것’이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은 야발의 장막과 가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비교가 됩니다. 장막과 가축이 나란히 놓였을 때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내듯이, 이사야서에서도 천적인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이 함께 나타납니다. 다만 비·씨·땅·넓은 초장에 각각 세부적인 상응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거듭남 단계로 연결하는 것은 AC.415가 직접 제시한 논증이 아닙니다. 그러한 해석은 다른 근거를 확인한 뒤 별도로 다루어야 합니다.

 

렘31:11-12에서는 밀과 새 포도주와 기름, 양 떼와 소 떼의 새끼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밀’과 ‘기름’이 여호와의 거룩한 것을 묘사하고, ‘새 포도주’와 ‘양 떼와 소 떼의 새끼들’이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묘사한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단순히 곡식과 가축이 풍성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여호와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을 구별하여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기존 심화에서 새 포도주를 별도의 설명 없이 ‘영적 선’이나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로 확정하면, 이번 번호가 직접 제시한 구별과 어긋날 수 있습니다. AC.415에서는 그가 실제로 밝힌 범위, 곧 새 포도주가 여기서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들을 묘사한다는 설명을 우선해야 합니다.

 

이 네 구절을 함께 놓으면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이 열립니다. 렘23:3에서는 흩어진 양 떼를 다시 모으시는 주님을, 겔34:14에서는 좋은 우리와 목초지에서 먹이시는 주님을 봅니다. 사30:23과 렘31:11-12에서는 천적인 것 또는 여호와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이 함께 묘사됩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동일한 장면을 말하지는 않지만, AC.415에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의 관계를 밝히는 근거로 모입니다. 가축의 속뜻은 동물이라는 외형만 보고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축이 말씀 안에서 무엇과 함께 등장하는지를 살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기서 ‘사랑이 먼저이고 선이 그다음’이라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이 먼저 마음속에 사랑을 완성한 뒤에야 비로소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415가 강조하는 것은 선의 근원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선의 근원이므로, 선을 그 사랑과 분리하여 독립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말하면서도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는 관심이 없다면, 장막과 가축을 함께 놓은 말씀의 관계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 셈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야발의 속뜻을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라고 함께 설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은 성도에게 외워야 할 상응 용어를 늘려 주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이 무엇인지를 말씀의 여러 장면을 통해 생각하게 합니다. 흩어진 양 떼를 모으시고 먹이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은 선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야발의 ‘가축의 조상’이라는 표현을 읽을 때에는 목축의 기원을 설명하는 문자적 기록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뜻에서 사랑과 선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질서를 보아야 합니다. (AC.415 심화 1)

 

 

 

AC.415 심화 2, ‘렘6:3은 심판의 장면인데 왜 천적 교회의 상응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었는가?’

AC.415 심화2. ‘렘6:3은 심판의 장면인데 왜 천적 교회의 상응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었는가?’ AC.415의 마지막 인용인 렘6:3은 앞서 나온 양 떼와 목초지의 말씀들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렘23: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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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5, 창4:20, ‘가축의 조상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5‘가축의 조상’(father of cattle)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 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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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5

‘가축의 조상’(father of cattle)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 장 2절에 관하여 앞에서 설명한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집니다. 거기서는 ‘양 떼를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목자’(shepherd) 대신 ‘조상’(father)이라는 말을, ‘양 떼’(flock) 대신 ‘가축’(cattle)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야발이 ‘조상’(father)이라고 불리는 ‘가축’(cattle)이라는 말은 ‘장막’(tent) 바로 뒤에 나옵니다. 이로부터 그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또한 여기서 뜻하는 것은 가축을 위한 거처나 우리, 곧 장막과 가축 우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조상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사랑의 천적인 것들에서 나오는 선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의 여러 구절에서 분명해집니다. 예레미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by the “father of cattle” is signified the good that is derived from the holy things of love, is evident from what was shown above, at verse 2 of this chapter, where it was shown that a “shepherd of the flock” signifies the good of charity. Here however the term “father” is employed instead of “shepherd,” and “cattle” instead of “flock”; and the word “cattle,” of which Jabal is said to be the “father,” follows immediately after “tent,” whence it is evident that it signifies the good that comes from the holy of love, and that there is meant a habitation or fold for cattle, or the father of them that dwell in tents and in folds for cattle. And that these expressions signify goods from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is evident from vari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Jeremiah: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렘23:3) I will gather the remnants of my flock out of all lands whither I have scattered them, and I will bring them again to their folds, that they may be fruitful and multiply. (Jer. 23:3)

 

에스겔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In Ezekiel: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겔34:14) I will feed them in a good pasture, and upon the mountains of the height of Israel shall their fold be; there shall they lie down in a good fold, and in a fat pasture shall they feed upon the mountains of Israel, (Ezek. 34:14)

 

여기서 ‘우리들’(folds)과 ‘목초지들’(pastures)은 사랑의 선들을 나타내며, ‘기름짐’(fatness)도 그러한 선들에 관하여 말하는 표현입니다. 이사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folds” and “pastures” denote the goods of love, of which “fatness” is predicated. In Isaiah: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사30:23) He shall give th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halt sow the ground; and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shall be fat and full of oil; in that day shall he feed thy cattle in a broad meadow, (Isa. 30:23)

 

여기서 ‘떡’(bread)은 천적인 것을 의미하고, 가축이 먹는 ‘기름진 것’(fat)은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by “bread” is signified what is celestial, and by the “fat” whereon the cattle should feed, the goods thence derived. In Jeremiah:

 

11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12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렘31:11, 12) Jehovah hath redeemed Jacob, and they shall come and sing in the height of Zion, and shall flow together to the good of Jehovah, for the wheat, and for the new wine, and for the oil, and for the sons of the flock, and of the herd; and their soul shall be as a watered garden, (Jer. 31:11–12)

 

여기서는 ‘밀’(wheat)과 ‘기름’(oil)으로 여호와의 거룩한 것을, ‘새 포도주’(new wine)와 ‘양 떼와 소 떼의 새끼들’(sons of the flock and of the herd), 곧 ‘가축’(cattle)으로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묘사합니다. 또 다른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 holy of Jehovah is described by “wheat” and “oil,” and the goods derived from it by “new wine” and the “sons of the flock and of the herd,” or of “cattle.” Again:

 

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렘6:3) The shepherds and the flocks of their cattle shall come unto the daughter of Zion; they shall pitch their tents toward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everyone his own space. (Jer. 6:3)

 

‘딸 시온’(daughter of Zion)은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장막들’(tents)과 ‘가축 떼들’(flocks of cattle)은 그 교회에 관하여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The “daughter of Zion” denotes the celestial church, of which “tents” and “flocks of cattle” are predicated.

 

해설

AC.415는 야발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그가 왜 ‘가축의 조상’이라고 불리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14에서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씀의 여러 구절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장막 바로 뒤에 나오는 ‘가축’에 주목합니다. 창4:20에서 장막과 가축은 서로 무관한 두 가지 생업으로 나열된 것이 아닙니다.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고,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내기 때문에 두 표현이 함께 놓인 것입니다. 이 번호의 중심은 ‘가축이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뿐 아니라, ‘그 선은 어디에서 나오는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4:2의 아벨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그 표현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한다고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야발에 대해서는 ‘목자’ 대신 ‘조상’, ‘양 떼’ 대신 ‘가축’이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더구나 ‘가축’은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장막’ 바로 뒤에 나옵니다. 따라서 두 인물을 단순히 ‘둘 다 가축을 치므로 같은 뜻이다’라고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아벨의 경우에는 체어리티의 선이, 야발의 경우에는 장막이 나타내는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비롯되는 선이 강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과 그 배열을 함께 살펴 이러한 차이를 밝힙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선’이라는 말은 사랑과 선을 서로 떨어진 두 가지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사람이 무엇을 진심으로 원하고 소중히 여기는가와 관계되며, 선은 그 사랑에서 비롯되는 좋은 것과 그에 따른 삶에 관계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사랑에 따라 선을 원하고 행하도록 이끌립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일의 내적인 근원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AC.415가 말하는 것은 모든 선행을 무조건 천적인 선이라고 부르자는 뜻이 아니라, 야발의 ‘가축’이 특별히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축의 속뜻을 알려면 그 앞에 놓인 장막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렘23:3에서 주님은 흩어진 양 떼의 남은 자들을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겔34:14에서는 양 떼를 좋은 꼴로 먹이시고, 좋은 우리에 눕게 하시며, 살진 꼴을 먹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말씀을 통해 ‘우리’와 ‘목초지’가 사랑의 선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겔34:14의 ‘기름짐’도 그러한 선들에 관하여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밝힙니다. 이 구절들에서 양 떼가 돌아오고 먹고 쉬는 모습은 주님께서 그들을 돌보시는 말씀과 함께 나타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한 울타리로, 목초지는 단순한 먹이의 장소로만 읽지 않고,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사랑의 선과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30:23과 렘31:11-12에서는 먹을 것과 가축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사야서는 땅의 소산으로 만든 풍성한 떡과 넓은 초장에서 먹는 가축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떡’이 천적인 것을, 가축이 먹는 ‘기름진 것’이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예레미야서는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신 뒤 백성이 밀과 새 포도주와 기름, 양 떼와 소 떼의 새끼들을 위하여 모여들며 그 영혼이 물 댄 동산 같아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밀’과 ‘기름’으로 여호와의 거룩한 것을, ‘새 포도주’와 ‘양 떼와 소 떼의 새끼들’로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설명합니다. 두 구절은 서로 다른 풍요의 모습을 그리지만, 이번 번호에서는 천적인 것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의 관계를 밝히는 근거로 함께 사용됩니다.

 

마지막으로 렘6:3에서는 목자들과 가축 떼가 ‘딸 시온’에게 와서 그 주위에 장막을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딸 시온’이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그 교회에 관하여 ‘장막’과 ‘가축 떼’라는 표현이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본문의 문자적 문맥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렘6장은 예루살렘을 향한 위협을 선포하므로, 목자들이 장막을 치는 장면 자체를 평화로운 목축이나 천국의 안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에서 직접 밝히는 것은 ‘딸 시온’이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그와 관련하여 ‘장막’과 ‘가축 떼’라는 표현이 함께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살피는 일은 문자적 문맥을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이제 AC.412-415의 흐름을 돌아보면 야발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AC.412는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AC.413은 이 교리가 천적인 것에 속한다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AC.414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근거를 제시했고, 이번 AC.415는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내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야발은 단순히 장막 생활과 목축을 시작한 사람이라는 문자적 기록을 넘어, 사랑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성도들이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장막은 사랑, 가축은 선’이라는 대응표만이 아닙니다. 선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그 근원으로 삼는다는 질서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장막과 가축을 함께 살펴보는 이유입니다. (AC.415 해설)

 

심화

1.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은 왜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AC.415 심화 1,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은 왜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AC.414 심화1.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은 왜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AC.415에는 양 떼와 가축뿐 아니라 우리, 목초지, 떡, 밀, 기름, 새 포도주가 잇달아 등장합니다. 이 많은 표현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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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렘6:3은 심판의 장면인데 왜 천적 교회의 상응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었는가?’

 

AC.415 심화 2, ‘렘6:3은 심판의 장면인데 왜 천적 교회의 상응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었는가?’

AC.415 심화2. ‘렘6:3은 심판의 장면인데 왜 천적 교회의 상응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었는가?’ AC.415의 마지막 인용인 렘6:3은 앞서 나온 양 떼와 목초지의 말씀들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렘23: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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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6, 창4:20, ‘야발이 최초의 목축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6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 의미된다는 사실은, 야발이 ‘장막과 가축의 우리에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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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창4:20, ‘장막에 거주한다는 것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 말씀의 장막과 성막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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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심화

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왜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는가?’

 

AC.414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으며, 이를 기억하게 하는 절기로 초막절이 제정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레23:42-43은 이스라엘 자손이 초막에 거주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그들을 초막에 거주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대대로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막절은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입니까, 아니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를 기억하는 절기입니까? 이 질문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표상적 의미를 어떻게 함께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먼저 레위기가 직접 밝히는 초막절의 기념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인 뒤 초막절을 지켰으며, 일정 기간 초막에 거주했습니다. 레23:42-43은 그 이유를 출애굽 때의 초막 생활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초막절의 문자적 의미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받아들인다는 이유로 ‘초막절은 사실 출애굽과 관계가 없다’거나 ‘레위기가 밝힌 기념 이유는 겉으로만 내세운 설명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절기의 규례는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태고교회를 말합니까? AC.414에서 그는 초막절의 문자적 제정 이유를 다시 설명하기보다, ‘장막’이라는 표상이 지닌 더 오래된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면서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장막은 그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어 천적인 것과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초막에 거주하는 절기를 지킬 때, 그 행위는 출애굽의 역사를 기억하는 동시에 장막이 오래전부터 지녀 온 거룩한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표상에 문자적 역사와 속뜻이 함께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무엇을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는가?’와 ‘그 기념에 사용된 장막은 무엇을 표상하는가?’를 나누어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레위기가 직접 답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뒤 초막에 거주했던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AC.414가 답합니다. 장막은 태고교회의 거룩한 예배와 연결되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는 것입니다. 두 대답은 서로 다른 층위의 질문에 대한 것이므로, 하나를 인정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함께 인용한 신16:13도 이 관계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말씀은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뒤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레23:39 역시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인 뒤 절기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초막절에는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일뿐 아니라 수확을 마친 뒤 주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는 일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다만 AC.414는 타작마당이나 포도주 틀의 세부적인 속뜻을 여기서 풀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심화에서는 그 물건들에 새로운 상응을 임의로 부여하기보다, 초막절이 출애굽의 기억과 수확의 기쁨을 함께 지닌 절기라는 문자적 문맥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호12:9에서 주님은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도 AC.414가 초막절과 장막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인용한 본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막 생활이 단지 과거의 불편한 생활 방식으로만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말씀은 장막에 거주하는 모습을 다시 불러오며,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을 사랑의 거룩한 것에 관한 장막의 의미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호세아서의 구체적인 역사적 문맥과 AC.414가 밝히는 속뜻을 구별하여 읽어야 합니다. 이 한 구절만으로 태고교회의 모든 예배 방식이나 초막절의 세부 규례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목회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오늘 우리도 초막에서 살아야 더 거룩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AC.414의 설명은 그런 결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의 재료나 생활 방식 자체가 거룩함을 만들어 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는 것은 그 장막과 연결된 예배의 내적인 의미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을 읽는 성도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주님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그 기억이 가리키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함을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절기의 형식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과 그 절기가 나타내는 거룩한 것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결국 초막절의 문자적 기념 내용은 출애굽과 광야의 초막 생활이며, 스베덴보리가 AC.414에서 밝히는 표상적 의미는 장막에 담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됩니다. 이 두 의미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적 역사를 통해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고, 장막의 속뜻을 통해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의 거룩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초막절을 읽으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어느 시대의 장막이 더 중요합니까?’라는 선택이 아니라, 말씀의 역사 속에서도 그 속뜻 안에서도 사람을 주님께로 이끄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14 심화 2)

 

 

 

AC.414, 창4:20, ‘장막에 거주한다는 것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 말씀의 장막과 성막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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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심화 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 심화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를 읽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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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심화

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를 읽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면서도, 고대에는 장막에서 예배를 드렸고 그 장막이 모독되기 시작하자 성막이 세워졌으며, 그 후에는 성전이 세워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무엇이며, 예배의 장소가 바뀌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풀려면 ‘무엇을 표상하는가?’와 ‘어떤 역사적 상태에서 사용되었는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먼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세 건축물이 문자적으로 동일하다거나, 그 안에서 행해진 예배의 모든 절차가 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장막은 가족이 거주할 수 있는 처소이고,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 가운데 세워진 예배의 처소이며, 성전은 이후에 세워진 건축물입니다. 이 차이는 문자적인 역사에서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공통된 의미는 이 서로 다른 처소들이 모두 주님에게 속한 거룩함을 표상한다는 데 있습니다. 외적인 형태는 달라져도 그 형태가 가리키는 거룩함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하게 된 이유를 태고교회의 예배에서 찾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며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장막은 단지 비바람을 막아 주는 생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예배가 이루어지는 처소였고, 스베덴보리는 그 예배를 사랑의 거룩함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장막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는 천막이라는 물건 자체보다, 그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드려졌던 예배와 그 예배에 속한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AC.414는 사람들이 장막에서 불경한 예배를 행하며 그것을 모독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장막이라는 물건이 더러워졌으므로 하나님께서 더 좋은 건물을 요구하셨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천막의 재료나 구조가 아니라 예배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거룩한 예배를 위해 사용되던 처소가 그와 반대되는 예배에도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와 관련하여 성막이 세워지고, 그 후에는 성전이 세워졌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예배 장소의 변화가 단순한 건축 기술의 발전만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성막과 성전은 장막보다 더 높은 수준의 거룩함을 지닌 것입니까? AC.414는 오히려 태고교회의 장막이 후에 모독된 성전보다 더 거룩하게 여겨졌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건물이 더 크고 견고해졌다는 사실이 그 안에서 드리는 예배까지 더 거룩해졌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의 장막을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는 그 장막이 연결되어 있던 사랑의 예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막·성막·성전의 순서를 외적인 규모나 화려함에 따라 영적 우열을 매기는 순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27:4-6은 이 세 표현의 공통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살기를 구하고 성전에서 주님을 사모하며, 환난 날에는 초막과 장막 안에서 보호받고 장막에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는 여러 이름의 거룩한 처소가 등장하지만, 다윗이 구하는 중심은 하나입니다. 그는 주님 가까이에 머물며 그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분의 보호 안에서 예배드리기를 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문맥을 통해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각각의 건축물을 따로 떼어 놓고 이름만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구하고 누구에게 나아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AC.414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의 본질에 관하여 장막이시며 성막이시고 성전이시라고 말합니다. 이 설명에 이르면 세 처소가 공통으로 가리키는 중심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룩함은 장막이나 성막이나 성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거룩함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표상하는 처소가 거룩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또한 천적 사람을 주님의 장막이나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사람이 독립적으로 거룩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장막과 성막과 성전은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처소이고, 그것들이 사용된 예배의 상태도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에서 그 처소들은 모두 주님과 그분에게서 오는 거룩함을 표상한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따라서 ‘같은 의미’라는 말은 역사적 차이를 지우는 말이 아니며,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다’는 사실도 그 공통된 속뜻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어느 시대의 건물이 가장 거룩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예배가 외적인 처소에 머무르지 않고 그 처소가 가리키는 주님과 그분의 사랑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14 심화 1)

 

 

 

AC.414 심화 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왜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AC.414 심화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왜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는가?’ AC.414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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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창4:20, ‘장막에 거주한다는 것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 말씀의 장막과 성막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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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

‘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tents)이 뜻하는 바를 보면 분명해집니다. 다윗의 시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to “dwell in tents” signifies what is holy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ents” in the Word. As in David: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시15:1, 2) Jehovah, who shall abide in thy tent? Who shall dwell in the mountain of thy holiness? He that walketh upright, and worketh righteousness, and speaketh the truth in his heart, (Ps. 15:1–2)

 

이 말씀에서는 ‘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he tent)는 것, 또는 ‘성산에 거주한다’(in the mountain of holiness)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랑의 거룩한 것들, 곧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또 다른 시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in which passage, what it is to “dwell in the tent” or “in the mountain of holiness” is described by holy things of love, namely, the walking uprightly, and working righteousness. Again: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19:4) Their line is gone out through all the earth, and their discourse to the end of the world. In them hath he set a tent for the sun, (Ps. 19:4)

 

여기서 ‘해’(sun)는 사랑을 나타냅니다. 또 다른 시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 “sun” denotes love. Again: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시61:4) I will abide in thy tent to eternities, I will trust in the covert of thy wings, (Ps. 61:4)

 

여기서 ‘장막’(tent)은 천적인 것을, ‘날개 아래의 그늘’(covert of wings)은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이사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 “tent” 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 “covert of wings” 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In Isaiah: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사16:5) By mercy the throne has been made firm, and one hath sat upon it in truth, in the tent of David, judging and seeking judgment, and hasting righteousness, (Isa. 16:5)

 

여기서도 ‘장막’(tent)은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는 ‘공의로 판결함’(judging judgment)과 ‘공의를 신속히 행함’(hasting righteousness)이 언급되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also the “tent” denotes what is holy of love, as may be seen by the mention of “judging judgment,” and “hasting righteousness.” Again:

 

우리 절기의 시온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사33:20) Look upon Zion, the city of our appointed feast; thine eyes shall see Jerusalem a quiet habitation, a tent that shall not be moved away, (Isa. 33:20)

 

이는 하늘의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입니다. speaking of the heavenly Jerusalem.

 

[2] 예레미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In Jeremiah: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할 것이고 그 거처들에 사랑을 베풀 것이라 성읍은 그 폐허가 된 언덕 위에 건축될 것이요 (렘30:18) Thus said Jehovah, Behold, I bring again the captivity of Jacob’s tents, and will have mercy on his dwelling places, and the city shall be builded upon her own heap; (Jer. 30:18)

 

‘장막의 포로 됨’(captivity of tents)은 천적인 것, 곧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모스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e “captivity of tents” signifies the vastation of what is celestial, or of the holy things of love. In Amos: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암9:11) In that day will I raise up the tabernacle of David which is fallen; and will fence up the breaches thereof, and I will raise up its ruins, and I will build it as in the days of eternity, (Amos 9:11)

 

여기서도 ‘성막’(tabernacle)은 천적인 것과 거기에 속한 거룩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예레미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 “tabernacle” in like manner 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 holy things thereof. In Jeremiah: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렘4:20) The whole land is laid waste, suddenly are my tents laid waste, and my curtains in a moment. (Jer. 4:20)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휘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 (렘10:20) My tent is laid waste, and all my cords are plucked out, my sons are gone forth from me, and they are not; there is none to stretch my tent anymore, and to set up my curtains, (Jer. 10:20)

 

여기서 ‘장막’(tent)은 천적인 것들을, ‘휘장들’(curtains)과 ‘줄들’(cords)은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 “tent” 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curtains” and “cords” spiritual things thence derived. Again:

 

너희는 그들의 장막과 양 떼를 빼앗으며 휘장과 모든 기구와 낙타를 빼앗아다가 소유로 삼고 (렘49:29) Their tents and their flocks shall they take; they shall carry off for themselves their curtains, and all their vessels, and their camels, (Jer. 49:29)

 

이는 아라비아와 동방의 자손들에 관한 말씀인데, 이들은 천적인 것 또는 거룩한 것을 지닌 사람들을 표상합니다. 또 다른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speaking of Arabia and the sons of the east, by whom are represented those who possess what is celestial or holy. Again: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애2:4) Into the tent of the daughter of Zion the Lord hath poured out his wrath like fire, (Lam. 2:4)

 

이는 신앙의 천적인 것 또는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지는 상태에 관한 말씀입니다. speaking of the vastation of the celestial or holy things of faith.

 

[3] 말씀에서 ‘장막’(tent)이라는 말을 천적인 것과 사랑의 거룩한 것들을 표상하는 데 사용하는 이유는, 고대에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 의식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불경한 종류의 예배로 장막을 모독하기 시작하자 성막이 세워졌고, 그 후에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장막은 후에 성막이, 그리고 그다음에는 성전이 나타내게 된 모든 것을 표상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거룩한 사람도 주님의 ‘장막’(tent), ‘성막’(tabernacle), ‘성전’(temple)이라고 불립니다. ‘장막’(tent)과 ‘성막’(tabernacle)과 ‘성전’(temple)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다윗의 시편에서 분명해집니다. The reason why the term “tent” is employed in the Word to represent the celestial and holy things of love is that in ancient times they performed the holy rites of worship in their tents. But when they began to profane the tents by profane kinds of worship, the tabernacle was built, and afterwards the temple, and therefore tents represented all that was subsequently denoted first by the tabernacle, and afterwards by the temple. For the same reason a holy man is called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of the Lord. That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s evident in David: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27:4-6) One thing have I asked of Jehovah,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remain in the house of Jehovah all the days of my life, to behold Jehovah in sweetness, and to visit early in his temple; for in the day of evil he shall hide me in his tabernacle; in the secret of his tent shall he hide me; he shall set me up upon a rock. And now shall my head be lifted up against mine enemies round about me, and I will offer in his tent sacrifices of shouting. (Ps. 27:4–6)

 

[4]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은 그분의 인성의 본질에 관하여 ‘장막’(tent)이시며, ‘성막’(tabernacle)이시고, ‘성전’(temple)이십니다. 여기서 모든 천적 사람도 그렇게 불리며, 천적이고 거룩한 모든 것 역시 그렇게 불립니다. 태고교회는 그 뒤를 이은 교회들보다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으며, 당시 사람들은 각자 자기 가족 안에서 따로 살면서 장막에서 그토록 거룩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장막은 후에 모독된 성전보다 더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초막절이 제정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일 때 초막절을 지켰으며, 그 기간에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장막에서 거주했습니다. (레23:39-44, 신16:13, 호12:9) (AC.414)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as to his human essence is the “tent,” the “tabernacle,” and the “temple”; hence every celestial man is so called, and also everything celestial and holy. Now as the most ancient church was better beloved of the Lord than the churches that followed it, and as men at that time lived alone, that is, in their own families, and celebrated so holy a worship in their tents, therefore tents were accounted more holy than the temple, which was profaned. In remembrance thereof the feast of tabernacles was instituted, when they gathered in the produce of the earth, during which, like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dwelt in tents. (Lev. 23:39–44; Deut. 16:13; Hosea 12:9)

 

해설

AC.414는 앞의 AC.412-413에서 제시한 야발의 속뜻을 말씀의 여러 구절로 뒷받침합니다.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고, 스베덴보리는 그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당연히 ‘장막에 사는 일이 왜 사랑의 거룩함과 관계됩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번 번호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이라는 물건의 모양이나 용도만으로 뜻을 정하지 않고, 말씀에서 장막이 어떤 말들과 함께 등장하며 어떤 상태를 묘사하는지를 여러 본문에 걸쳐 살핍니다. 이 번호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인용 구절의 수를 따라가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구절들이 어떤 공통된 의미를 드러내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먼저 시15:1-2는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인지 묻고,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고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첫 근거로 제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장막에 거한다는 것이 단순히 거룩한 장소에 들어가는 일이라면, 시편의 대답은 건물에 출입할 자격이나 예배 절차에 관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실천하며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것은 사랑이 실제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장막에 거주한다’는 속뜻은 거룩한 공간을 소유하거나 그 안에 머무는 외적인 행위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 그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것이 야발을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와 연결하는 첫 번째 근거입니다.

 

다른 인용 구절들은 장막이 사랑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여러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시19:4에서는 해를 위하여 장막을 베푸셨다고 하는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해가 사랑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시61:4에서는 주의 장막에 머무는 것과 주의 날개 아래 피하는 것이 함께 나오며, 그는 장막을 천적인 것, 날개 아래의 그늘을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으로 구별합니다. 사16:5에서는 다윗의 장막 안에서 인자함으로 굳게 선 왕위와 공의로운 판결이 나타납니다. 사33:20에서는 시온과 예루살렘을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으로 묘사합니다. 이 구절들이 모두 같은 장면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장막이 사랑과 거룩함, 그리고 그 사랑에 속한 삶과 연결된다는 점에서는 서로를 비추어 줍니다. 특히 장막과 날개 아래의 그늘을 구별한 시61:4는 천적인 것과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레미야서와 아모스서의 인용은 장막의 의미를 반대 방향에서도 보여 줍니다. 렘30:18은 야곱의 장막이 포로 된 상태에서 돌아오는 일을 말하고, 암9:11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는 일을 말합니다. 반면 렘4:20과 렘10:20에서는 장막이 무너지고 휘장과 줄이 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의 포로 됨을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상태로 설명하며, 장막은 천적인 것들을, 휘장과 줄은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이때 장막의 회복과 파괴를 단순히 천막의 재건이나 손실로만 읽지 않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므로, 장막이 무너지는 말씀은 교회 안에서 그 사랑에 속한 것들이 황폐해지는 상태를 이해하는 근거가 되고, 장막을 다시 세우는 말씀은 그와 반대되는 회복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가 인용된 모든 물건과 인물의 속뜻까지 각각 풀이하는 것은 아니므로, 휘장·줄·자녀·낙타 등의 의미를 이 자리에서 임의로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왜 하필 장막이 그러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지 역사적인 이유를 설명합니다. 고대 사람들은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장막이 불경한 예배로 모독되기 시작하자 성막이 세워졌고, 그 뒤에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장막은 나중에 성막과 성전이 표상하게 된 거룩한 것들을 먼저 나타내는 표상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막이라는 재료나 건축 방식 자체가 성막이나 성전보다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장막의 거룩함은 그것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예배 장소가 장막에서 성막과 성전으로 바뀌어도, 그 장소들이 가리켜야 할 중심은 주님과 그분에게서 오는 거룩함입니다.

 

시27:4-6은 이러한 연결을 한 본문 안에서 보여 줍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살기를 구하고, 성전에서 사모하며, 환난 날에는 초막과 장막 안에서 보호받고, 장막에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근거로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문자적인 건축물들이 동일하거나 말씀의 모든 문맥에서 각 표현의 세부 의미까지 언제나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본문에서는 서로 다른 이름의 거룩한 처소들이 모두 주님께 나아가고 그분의 보호 안에 머무르며 예배드리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느 건물이 더 거룩한가?’보다 ‘그 건물이 나타내는 거룩함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 거룩함의 근원은 건물 자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번 번호의 마지막 부분은 그 의미를 가장 높은 차원까지 끌어올립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의 본질에 관하여 장막이시며 성막이시고 성전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천적 사람과 천적이고 거룩한 모든 것도 그렇게 불린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람을 주님의 장막이나 성전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사람이 스스로 거룩함의 근원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야발의 ‘장막에 거주하는 자’라는 표현도 단순히 옛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관한 기록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가 새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끝으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며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고, 이를 기억하게 하는 절기로 초막절이 제정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레23:39-44와 신16:13은 수확 후 초막절을 지키는 일을 말하며, 호12:9는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레위기 본문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 자손이 초막에 거주했던 일을 기억하게 한다고도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문자적인 절기의 기념 내용과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에 관한 표상적 의미를 서로 지워 버리지 않고 함께 읽어야 합니다. AC.414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장막은 그 자체가 거룩함의 근원이어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 안에서 드리는 거룩한 예배를 표상하기 때문에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야발의 속뜻을 이해하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여러 장막을 길게 살펴본 이유입니다. (AC.414 해설)

 

심화

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 심화 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 심화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를 읽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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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왜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는가?’

 

AC.414 심화 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왜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AC.414 심화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왜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는가?’ AC.414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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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5, 창4:20, ‘가축의 조상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5‘가축의 조상’(father of cattle)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 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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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3, 창4:20, ‘아다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인 이유 - 야발이 뜻하는 사랑과 선’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3‘아다’(Adah)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그의 맏아들 야발이 ‘장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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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3

‘아다’(Adah)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그의 맏아들 야발이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이자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and of cattle)이라고 불리는 데서 분명해집니다. 이것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을 의미하므로 천적인 것입니다. That by “Adah” is signified the mother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her firstborn Jabal being called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which are celestial because they signify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goods thence derived.

 

해설

AC.413은 앞 번호에서 밝힌 야발의 속뜻을 근거로, 그의 어머니 아다가 왜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AC.412에서는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설명을 거꾸로 따라 올라갑니다. 야발이 뜻하는 것들이 천적이기 때문에, 그를 낳은 아다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중심은 새로운 상응을 하나 더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아다와 야발의 의미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밝히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들이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아다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신앙이나 성품을 평가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 아다는 야발의 어머니이고,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자 관계를 새 교회 안에서 생겨나는 것들의 관계로 읽습니다. 아다가 ‘어머니’라는 것은 그녀에게서 태어나는 것으로 표현된 것들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야발의 속뜻을 살펴보면 아다가 의미하는 바도 더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야발이 뜻하는 것은 왜 천적인 것입니까? AC.413은 그 이유를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여기서 천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고상하거나 종교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번 문맥에서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 관계된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이 천적이므로, 그것들에 관한 교리를 뜻하는 야발도 천적인 것과 관련됩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천적’이라는 이름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천적인지를 사랑과 선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특히 ‘그로부터 나오는’이라는 표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선은 사랑과 무관하게 따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이 무엇을 원하고 소중히 여기는가에 관계된다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은 그것이 실제로 나타나는 모습과 관계됩니다. 물론 겉으로 비슷한 일을 한다고 해서 언제나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까지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선을 말하면서도 그 근원인 사랑을 함께 말합니다. 이번 번호의 순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 먼저이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이 그다음입니다.

 

이 설명은 앞서 가인의 계보를 읽으며 반복해서 살펴본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가인의 계보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그 분리가 깊어져 마침내 신앙마저 소멸하는 상태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새 교회의 계보에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가 등장합니다. 다만 AC.413이 새 교회의 모든 성격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번호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야발이 의미하는 교리의 천적인 성격과, 그 성격을 통해 밝혀지는 아다의 의미입니다.

 

성도들은 이 대목에서 ‘아다가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낯선 상응 하나로만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곧 야발이 의미하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이 천적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의 연결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사랑과 선을 함께 말하되, 선이 사랑에서 나온다는 질서를 기억해야 합니다. AC.413은 아다와 야발의 관계를 통해 새 교회의 천적인 것들이 무엇과 관련되는지를 한층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AC.413 해설)

 

 

 

AC.414, 창4:20, ‘장막에 거주한다는 것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 말씀의 장막과 성막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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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2, 창4:20,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야발 -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나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20) AC.412‘아다’(Adah)는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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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창4:20)

 

AC.412

‘아다’(Adah)는 앞에서와 같이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야발’(Jabal), 곧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이자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and of cattle)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하며, 이것들은 천적인 것입니다. By “Adah” is signified, as before, the mother of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by “Jabal,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is signified doctrine concerning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goods thence derived, which are celestial.

 

해설

AC.412는 창4:20에 등장하는 야발의 속뜻을 밝히는 첫 번째 번호입니다. 앞서 AC.405에서 아다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아다의 아들 야발에게서 그 가운데 천적인 것에 관한 교리를 봅니다. 창4:20은 야발을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라고 소개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장막 생활과 목축의 시작을 알려 주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계보를 새 교회 안에서 어떤 가르침이 생겨났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조상’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때에는 한 생업의 최초 발명자라는 문자적 의미와 함께, 그에 해당하는 교리가 시작되는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장막에 거주하는 일과 가축을 치는 일이 왜 사랑과 선에 관한 교리와 연결됩니까? AC.412는 그 대응 관계를 먼저 제시할 뿐, 장막과 가축의 속뜻을 각각 입증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번호만으로 ‘장막은 언제나 이것, 가축은 언제나 저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번 문장에는 분명한 순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랑의 거룩한 것들’을 말하고, 이어서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을 말합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선이 그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놓치면 야발의 의미를 단순히 종교적 지식이나 선행의 기술에 관한 가르침으로 축소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이 사람의 삶에 나타내는 선에 관한 교리입니다.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라는 표현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룩함은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사랑에 덧붙이는 성질이 아닙니다. 사랑의 근원이 주님께 있기 때문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에 속한 것들이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야발이 의미하는 교리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스스로 훌륭한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 교리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알고 받아들이며, 그 사랑이 자신의 삶을 이끌도록 하는 일과 관련된 가르침입니다. 성도들이 여기서 사랑을 단지 따뜻한 감정이나 사람 사이의 호감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번 번호의 사랑은 교회의 천적인 것과 관련된 사랑이며,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까지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도 중요합니다. 사랑과 선은 같은 말의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사랑이 사람의 내면에서 무엇을 원하고 소중히 여기는가와 관계된다면, 선은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와 관계됩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에게 필요한 선을 행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이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선한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이 무엇인지는 별도로 살펴야 합니다. AC.412는 이 모든 문제를 상세히 풀이하지는 않지만,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사랑과 선을 떼어 놓지 않도록 이끕니다. 사랑은 선의 근원이며, 선은 사랑이 삶에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야발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이나 선 자체가 아니라 왜 ‘그것들에 관한 교리’입니까? 이 구별은 새 교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필요합니다. 사랑과 선의 근원은 주님이시지만, 교회는 그 사랑과 선에 관하여 배우고 가르칩니다.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인지, 그 사랑에서 어떤 선이 나오는지,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삶으로 나타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가르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와 삶은 동일하지 않지만 서로 무관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에 관한 교리는 사랑의 삶을 대신할 수 없고, 사랑의 삶 또한 무엇이 참된 선인지 알려 주는 진리의 가르침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야발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새 교회 안에 사랑과 선에 관한 가르침이 있다는 뜻이지, 교리를 아는 것만으로 이미 사랑과 선을 소유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대목은 가인의 계보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흐름과 나란히 놓을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에게서 시작된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앞서 지배하도록 한 데 있었습니다. 그 분리는 라멕에게 이르러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의 계보를 설명하면서 야발에게서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봅니다. 여기서 곧바로 ‘야발이 가인의 모든 잘못을 바로잡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앞의 계보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문제였다면, 이제 새 교회에 관한 설명에서는 사랑과 선에 관한 교리가 등장한다는 대비는 분명히 살펴볼 만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무엇을 중심에 두어야 하는지를 다시 묻게 되는 자리입니다.

 

성도들이 AC.412를 읽고 기억해야 할 것은 야발이라는 이름에 낯선 뜻 하나를 더 외우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배우는 신앙의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알도록 이끄는가? 그 사랑이 내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도록 돕는가?’라는 질문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동시에 장막과 가축의 속뜻을 이번 번호에서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야발이 의미하는 교리의 전체 내용을 먼저 밝히고 있으며, 그 표현들이 왜 그러한 뜻을 지니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AC.412는 새 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보는 출발점입니다. 그 출발점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중심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입니다. (AC.412 해설)

 

 

 

AC.413, 창4:20, ‘아다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인 이유 - 야발이 뜻하는 사랑과 선’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3‘아다’(Adah)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그의 맏아들 야발이 ‘장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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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1, 창4:19,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왜 황폐의 마지막 때가 오는가? - 예언서에 나타난 황폐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1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예언서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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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1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예언서들에서 자주 밝히신 바입니다. 그곳에서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이를 ‘황폐’(vastation) 또는 ‘황폐하게 함’(laying waste)이라 부르고,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황량’(desolation)이라 부릅니다. 또한 ‘완결’(consummation)과 ‘끊어 버림’(cutting off)이라고도 말합니다. 사6:9, 11-12, 사23:8-끝, 사24, 사42:15-18, 렘25, 단8, 단9:24-끝, 습1, 신32, 계15-16 및 그 이후의 장들을 보십시오. That the last time of vastation must exist before a new church can arise, is frequently declared by the Lord in the prophets, and is there called “vastation” or “laying waste,” in reference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 “desolation,” in relation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It is also spoken of as “consummation” and “cutting off.” (See Isa. 6:9, 11–12; 23:8 to the end; 24; 42:15–18; Jer. 25; Dan. 8; 9:24 to the end; Zeph. 1; Deut. 32; Rev. 15; 16; and following chapters.)

 

해설

AC.411은 앞의 AC.408-410에서 설명한 교회의 황폐와 새로운 시작의 질서를 말씀의 예언서들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이전 교회의 황폐가 마지막 때에 이르러야 한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것이 가인의 계보에만 적용되는 해석이 아니라, 주님께서 예언서들에서 거듭 밝히신 교회의 상태와 관련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 다니엘서와 스바냐서, 신명기와 요한계시록의 여러 대목을 제시합니다.

 

먼저 ‘황폐’(vastation)와 ‘황폐하게 함’(laying waste)은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천적인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이 황폐해진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에 생명을 주어야 할 사랑과 선이 사라지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는 앞에서 가인이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운 데서 시작된 분리가 라멕에게 이르러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진행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한편 ‘황량’(desolation)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영적인 것은 신앙의 진리와 그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황량은 교회 안에서 신앙의 진리가 더 이상 살아 있는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두 용어의 관계를 짧게 구별할 뿐, 각각에 해당하는 모든 영적 상태를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황폐와 황량을 서로 완전히 무관한 두 사건으로 나누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측면에서 구별하여 표현한 것으로 읽는 편이 적절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완결’(consummation)과 ‘끊어 버림’(cutting off)이라는 표현도 덧붙입니다. 이 말들은 교회의 이전 상태가 끝에 이르는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들입니다. 특히 이번 문맥에서 ‘완결’은 교회가 충만하고 온전해졌다는 긍정적인 뜻이 아니라, 이전 교회의 상태가 그 끝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이 두 표현의 세부적인 차이까지 정의하지 않으므로, 각각의 의미는 인용된 본문과 이어지는 AC의 설명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용어 구별은 말씀에 나타나는 심판과 종말의 표현을 읽을 때 중요합니다. 예언서에서 땅이 황폐해지고 성읍이 무너지며 모든 것이 끝나는 듯한 말씀이 나올 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외적인 재난의 묘사로만 읽지 않습니다. 그 말씀에 교회의 내적인 상태, 곧 사랑과 선, 신앙과 진리가 어떻게 쇠퇴하고 끝에 이르는가에 관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언서의 모든 황폐와 멸망의 표현을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뜻으로 바꾸어 읽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각 말씀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문맥 안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이번 번호에 인용된 사6:9, 11-12는 그 연결을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이 됩니다. 이사야가 전하도록 명령받은 말씀에는 백성이 듣고도 깨닫지 못하며 보고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이어 이사야가 언제까지 그러한 일이 계속되는지를 묻자, 성읍들이 황폐해지고 주민이 없어지며 땅이 황무해질 때까지라는 대답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을 인용한 이유는 단순히 황폐라는 낱말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진리를 듣고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가 교회의 황폐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앞의 AC.410에서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고,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상태를 설명한 내용과 맞닿아 있습니다.

 

단9:24 이하의 말씀도 이번 논의와 연결됩니다. 그곳에는 허물이 그치고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고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일과 함께, 정해진 기간과 끝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대목을 인용하는 것은 이전 상태의 끝과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 서로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411은 다니엘서의 각 구절을 하나씩 풀이하지 않으므로, 이 인용만으로 다니엘서의 모든 예언을 특정한 역사적 시기나 사건에 대응시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 15장과 16장 및 그 이후의 장들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그곳에는 재앙과 심판, 이전 상태의 끝을 나타내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 역시 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이해하는 데 관련된다고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앙의 장면 자체에만 시선을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AC.411이 인용하는 목적은 교회의 황폐가 마지막 때에 이른 뒤 새로운 교회가 일어난다는 앞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들은 AC.408에서 말한 새로운 ‘아침’과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다른 인용 본문들도 각각의 문맥은 다르지만,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제시하는 공통된 논점은 분명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는 말씀에서 여러 표현으로 선포되며, 그 상태가 끝에 이르는 일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이 모든 인용 구절이 동일한 사건을 똑같은 방식으로 묘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각각의 예언을 자세히 해설하기보다, 말씀 전체에 이러한 질서가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AC.408-411의 흐름을 함께 보면 논의가 정리됩니다. 이전 교회가 황폐해지기 전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어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 상태가 끝에 이르면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오고 새 교회가 일어납니다. AC.409는 이를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 교회의 출현과 연결했고, AC.410은 새 교회가 진리를 알고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무는 사람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아직 진리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AC.411은 이러한 질서가 예언서들에서도 거듭 선포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인간이 일부러 신앙과 체어리티를 잃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황폐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황폐해진 교회의 마지막 상태와 그 이후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는 질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빛은 황폐 자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의 AC.407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의 어떤 핵심이 보존되고, 주님께서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결국 AC.411은 라멕에게서 드러난 황폐를 말씀 전체의 교회 역사와 연결하는 번호입니다. ‘황폐’와 ‘황폐하게 함’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황량’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며, ‘완결’과 ‘끊어 버림’ 역시 이전 교회가 끝에 이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예언서들에 거듭 등장한다는 사실을 통해, 이전 교회의 마지막 때와 새 교회의 출현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말씀은 교회의 황폐를 말하면서도 그 이후에 비칠 새로운 아침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AC.411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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