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0

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거나,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황폐입니다. 옛날의 유대인들과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그러합니다. 둘째는 무지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황폐입니다. 고대와 오늘날의 이방인들이 그러합니다.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는 사람들, 곧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황폐의 마지막 때가 이르면, 그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교회가 새롭게 일어납니다. 홍수 이전의 태고교회에서도,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에서도, 유대교회에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새로운 빛이 그 이전이 아니라 바로 그때 비치는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계시된 것들이 참되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믿지 않으므로, 더 이상 그것들을 모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Vastation is of two kinds; first, of those who know and do not wish to know, or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like the Jews of old, and the Christians of the present day; and secondly, of those who, in consequence of their ignorance, neither know nor see anything, like both the ancient and modern gentiles. When the last time of vastation comes upon those who know and do not desire to know, that is,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then a church arises anew, not among them, but with those whom they call gentiles. This occurred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was before the flood, with the ancient church that was after that event, and also with the Jewish church. The reason why new light shines forth then and not before is, as has been said, that then they can no longer profane the things revealed,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that they are true.

 

해설

AC.410은 교회의 황폐를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하나는 진리를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고,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지로 말미암아 아직 진리를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겉으로 보면 두 경우 모두 참된 신앙이 없는 상태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원인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첫째는 이미 접한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이고, 둘째는 진리를 받아들일 기회나 지식 자체가 없었던 상태입니다.

 

이 구별은 앞의 AC.409에서 교회가 왜 황폐해진 사람들 가운데 머물지 않고,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옮겨지는지를 설명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 진리를 알지 못하여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새로운 교회가 후자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길도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종류의 황폐를 설명할 때 스베덴보리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는다’는 표현에 이어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무엇을 본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거나 알아차리는 일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진리를 접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알고 이해하는지, 무엇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지는 외적인 소속이나 행동만으로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첫째 종류의 사례로 옛날의 유대인들과 자신의 시대의 기독교인들을, 둘째 종류의 사례로 고대와 자신의 시대의 이방인들을 듭니다. 이 사례들은 그가 교회의 황폐와 이전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신학적 구분입니다. 특히 원문의 ‘오늘날’은 AC가 집필되던 스베덴보리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이를 오늘날의 유대인이나 기독교인, 또는 다른 종교에 속한 모든 사람의 실제 신앙 상태에 대한 일괄적인 판정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살펴야 할 것은 집단에 붙인 명칭보다 ‘진리를 알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와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 사이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첫째 종류의 황폐가 마지막에 이르면 교회가 그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새롭게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홍수 이전의 태고교회,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 유대교회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새 교회가 일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기존 교회의 명칭이나 조직이 바뀐다는 뜻이 아닙니다. 새로운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교회의 생명이 새롭게 시작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빛은 그 이전이 아니라 황폐의 마지막 때에 비치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앞의 AC.408에서 제시한 이유를 다시 듭니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계시된 것들이 참되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인정하거나 믿지 않으므로, 그것들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는 동안 새로운 빛이나 체어리티가 스며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설명을 이어받아, 그러한 상태가 끝난 뒤에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지는 이유를 밝힙니다.

 

여기서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는 것’과 ‘단지 알고 있을 뿐 인정하거나 믿지 않는 것’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의 AC.408에서 어떤 진리를 단지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모독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AC.410에서도 모독할 수 없게 되는 이유를 계시된 것들이 참되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인정하거나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를 ‘진리에 관하여 들었거나 지식이 있는 사람은 모두 모독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모독의 문제는 거룩한 것을 어떻게 인정하고 믿으며, 그것을 무엇과 결합시키는가에 관계됩니다.

 

또한 무지 자체가 신앙보다 낫다거나, 진리를 배우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려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무지가 영적 목표라는 뜻이 아니라,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한 사람에게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것이 새 교회의 시작이지, 계속 무지 가운데 머무는 것이 새 교회의 완성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의 두 종류의 황폐는 진리를 아는 일의 가치를 낮추기 위한 구별이 아니라, 진리를 대하는 서로 다른 상태를 밝히기 위한 구별입니다.

 

이제 AC.407-410을 함께 읽으면 논의의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황폐해질 수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교회의 어떤 핵심은 보존됩니다. 이전 교회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인 상태가 끝나면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옵니다. 그리고 새 교회는 진리를 알고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무는 사람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아직 진리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AC.410은 바로 이 마지막 구별을 명확히 하는 번호입니다.

 

결국 이번 번호는 교회의 새로운 시작을 이해할 때 ‘진리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만을 기준으로 삼을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는가, 그리고 받아들인 진리가 삶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로 살아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황폐해진 교회의 끝에서 새로운 빛이 비치고, 그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새 교회가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AC.410이 앞의 ‘아침’과 ‘새 교회’에 관한 설명에 더하는 핵심입니다. (AC.410 해설)

 

 

 

AC.411, 창4:19,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왜 황폐의 마지막 때가 오는가? - 예언서에 나타난 황폐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1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예언서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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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9, 창4:19, ‘아다와 씰라는 왜 라멕의 아내인가? - 속 교회와 겉 교회는 하나입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9‘가인’(Cain)이라 불린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이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해졌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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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9

‘가인’(Cain)이라 불린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이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해졌습니다. 사랑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신앙을 으뜸으로 삼아 사랑보다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이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은 점차 그것에서 벗어났으며,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은 마침내 신앙마저 완전히 부인했습니다. 이때가 되자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왔고, 여기서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라 불리는 새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라멕의 아내들’(wives of Lamech)이라 불립니다. 라멕에게는 아무런 신앙도 없었지만 이들이 그의 아내들이라 불리는 것은, 역시 아무런 신앙도 없었던 유대인들의 속 교회와 겉 교회가 말씀에서 ‘아내들’(wives)이라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야곱의 두 아내인 레아와 라헬로 표상되는데, 레아는 겉 교회를, 라헬은 속 교회를 표상합니다. 이 교회들은 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일 뿐입니다. 속 교회에서 분리된 겉 교회, 곧 표상적 교회는 우상 숭배적인 것 또는 죽은 것과 같지만, 속 교회와 겉 교회가 함께 있을 때 하나의 교회를, 실로 동일한 하나의 교회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야곱과 그의 후손들은 라멕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신앙도 없었으므로, 교회가 그들에게 머물 수 없었고 불신앙이 아니라 무지 가운데 살고 있던 이방인들에게 옮겨졌습니다. 교회가 황폐해졌으면서도 자기들 가운데 진리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머무는 일은 드물며, 있다 하더라도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들에 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옮겨집니다. 이들은 앞의 사람들보다 신앙을 훨씬 더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The case was the same with the heresy called “Cain,” which in process of time was vastated, for although it acknowledged love, yet it made faith the chief and set it before love, and the heresies derived from this one gradually wandered from it, and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altogether denied even faith. When this time arrived, a new light, or morning, shone forth, and a new church was made which is here named “Adah and Zillah,” who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They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although he possessed no faith, just as the internal and external church of the Jews, who also had no faith, are also in the Word called “wives,” being represented by Leah and Rachel, the two wives of Jacob—Leah representing the external church and Rachel the internal. These churches, although they appear like two, are yet only one; for the external or representative, separate from the internal, is but as something idolatrous, or dead, whereas the internal together with the external constitute a church, and even one and the same church, as Adah and Zillah do here. As however Jacob and his posterity, like Lamech, had no faith, the church could not remain with them, but was transferred to the gentiles, who lived not in infidelity but in ignorance. The church rarely, if ever, remains with those who when vastated have truths among them [apud se] but is transferred to those who know nothing at all of truths, for these embrace the faith much more easily than the former.

 

해설

AC.409는 가인의 계보에서 일어난 황폐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설명하면서, 교회의 속과 겉이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05에서는 라멕이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고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가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408에서는 이전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두 설명을 연결하여, 가인에게서 시작된 분리가 라멕에게서 신앙의 소멸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교회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가인이라 불린 이단이 처음부터 사랑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사랑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신앙을 으뜸으로 삼아 사랑보다 앞세웠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분리였습니다. 참된 질서에서는 신앙이 사랑에 속하고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하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은 그 질서를 뒤집어 신앙이 사랑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후 그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은 점차 최초의 상태에서 더 멀어졌고, 마침내 여섯 번째인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완전히 부인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처음 상태와 라멕의 마지막 상태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인은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웠습니다. 반면 라멕은 신앙마저 부인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는 처음부터 모든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데서 시작하여 그 분리가 점차 진행된 끝에 신앙 자체도 소멸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409는 이러한 진행을 ‘점차 그것에서 벗어났다’는 말로 압축합니다.

 

바로 그때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왔고 새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새 교회를 ‘아다와 씰라’라고 부릅니다. AC.405에서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며,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 구별을 교회의 속과 겉이라는 관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새 교회는 내적인 것만을 가진 교회도 아니고 외적인 것만을 가진 교회도 아닙니다. 속과 겉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라멕에게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왜 새 교회를 나타내는 아다와 씰라가 하필 ‘라멕의 아내들’이라고 불리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에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그의 해석에서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도 참된 신앙이 없었지만, 그들과 관련된 교회의 속과 겉은 말씀에서 아내들로 표상됩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가 라멕의 아내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만으로 라멕 자신에게 참된 신앙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교에서 레아는 겉 교회를, 라헬은 속 교회를 표상합니다. 겉 교회는 예배의 형식과 의식, 말씀의 외적인 표현과 생활의 자연적인 차원에 관계되고, 속 교회는 그 안에 있어야 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살아 있는 신앙에 관계됩니다. 물론 이번 번호가 레아와 라헬의 모든 상응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두 아내의 표상을 통하여 교회의 속과 겉이 구별되면서도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원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원리를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속 교회와 겉 교회는 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속과 겉은 서로 독립하여 따로 존재하는 두 교회가 아닙니다. 속 교회가 겉 교회에 생명을 주고, 겉 교회는 속 교회가 자연적인 삶 가운데 나타나는 형식이 됩니다. 따라서 둘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앞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설명할 때 확인한 원리와도 통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구별된다고 해서 서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듯, 교회의 속과 겉도 구별되지만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교회에서 분리된 겉 교회, 곧 표상적 교회는 ‘우상 숭배적인 것 또는 죽은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예배 형식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 형식이 속에 있는 사랑과 신앙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예배와 의식이 아무리 정교하고 말씀의 외적인 형식을 충실히 보존하더라도,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교회의 외적 표현이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속 교회와 겉 교회가 함께 있을 때에는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를 이룹니다.

 

이것이 아다와 씰라에게도 적용됩니다.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고,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서로 경쟁하는 두 교회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은 새 교회의 서로 다른 차원을 나타내며, 그 차원들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룹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는 어느 한쪽만을 참된 교회로 여기거나 다른 한쪽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새 교회는 내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함께 있어야 온전한 하나의 교회가 됩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왜 교회가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 머물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 옮겨졌는지를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야곱과 그의 후손들은 라멕과 마찬가지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교회가 그들에게 계속 머물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교회가 옮겨졌다는 것은 어떤 민족의 혈통이나 문화가 본질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적 상태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불신앙’과 ‘무지’의 구별에서 드러납니다. 이번 번호에서 불신앙은 단순히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미 진리들이 자기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반면 무지는 진리 자체를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미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황폐해진 사람들보다 신앙을 훨씬 더 쉽게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진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이미 진리를 알고도 거부하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앞의 AC.408에서 설명한 모독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고 믿으면서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빛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한 방식으로 거룩한 것을 모독한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길이 열려 있습니다. AC.409에서 교회가 무지 가운데 있던 이방인들에게 옮겨졌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영적 질서와 관련됩니다.

 

다만 이 설명을 오늘날 특정 종교나 민족에 속한 사람들의 실제 신앙 상태를 일괄적으로 판정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의 신학적 해석 안에서 교회의 황폐와 이전을 설명하는 원리입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인정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외적인 소속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진리를 많이 배웠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제 AC.405-409의 흐름을 함께 보면 라멕과 두 아내의 의미가 한층 선명해집니다. 가인에게서는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는 분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는 여러 이단을 낳으며 진행되었고,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부인되는 황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때 새로운 아침이 밝아 왔고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새 교회는 천적이고 영적인 내적 차원과 자연적인 외적 차원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결국 AC.409는 두 가지 질서를 함께 보여 줍니다. 하나는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는 분리가 계속될 때 결국 신앙마저 소멸할 수 있다는 황폐의 질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전 교회의 황폐 이후에도 새로운 빛이 비치고, 속과 겉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새 교회가 일어난다는 회복의 질서입니다. 이때 참된 교회의 본질은 외적인 형식만을 보존하는 데 있지 않고, 그 형식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살아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 내적·외적 질서가 함께 이루는 하나의 새 교회를 보여 줍니다. (AC.409 해설)

 

 

 

AC.410, 창4:19, ‘교회의 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 알면서 거부하는 상태와 아직 알지 못하는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0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거나,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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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8, 창4:19,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 아침이 밝는 이유 - 거룩한 것의 모독과 새로운 시작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 더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이전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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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8 심화

1. 진리를 모르면 모독할 수 없다면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나은가?

 

AC.408-410을 읽으면 매우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알면서 그것들을 인정하고 믿은 뒤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는 상태를 매우 위험하게 설명하는 한편, 그것들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모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진리를 배우지 않는 것이 안전한 것 아닐까요? 주님과 말씀에 관하여 적게 알수록 모독할 위험도 줄어든다면, 무지가 오히려 유리한 상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408의 요점은 ‘무지가 좋은 상태’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모독’이 단순한 무지나 불신앙과 같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거룩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자기 안에서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가 다시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는 방식의 모독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반면 사람이 진리를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신앙의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그 반대되는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면 서로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들이 그의 내면에서 뒤섞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위험하다고 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모르는 사람’과 ‘알면서 거부하는 사람’ 사이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AC.410은 황폐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고,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상태이며, 다른 하나는 무지 때문에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후자의 사람에게 진리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완성된 영적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진리를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이미 알고 보면서도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상태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교회가 때때로 이전 교회의 중심이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까? AC.408-410의 문맥에서는 이미 계시된 거룩한 것들을 알고도 계속 거부하고 뒤섞어 온 곳보다, 아직 그것들을 알지 못했던 곳에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민족이나 종교 집단 자체가 다른 집단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교회의 ‘상태’입니다. 어느 곳이든 진리를 알고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상태가 될 수 있고, 어느 곳이든 아직 알지 못했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된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복음을 듣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하다’거나 ‘진리를 배우지 않는 것이 영적으로 유리하다’는 결론으로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거듭나게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문제는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인 뒤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가입니다.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위험 자체가 아니라 큰 선물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라는 부르심입니다. 위험은 빛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아들여 빛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어둠과 결합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408의 ‘새로운 아침’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지를 보존하기 위해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빛을 주시기 위해 일으키십니다. 이전 상태에서는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여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 상태가 끝에 이르면 아직 그렇게 뒤섞이지 않은 곳에서 다시 진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는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출발 상태일 뿐입니다. 목적은 결국 진리를 알고, 인정하고, 믿으며, 그것을 체어리티의 삶과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목회적으로도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우리는 ‘모르면 책임이 적으니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빛을 주실 때 그 빛을 감사히 받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동시에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그가 아직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진리를 알고도 거부한다는 것은 같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AC.408-410은 주님께서 인간의 상태를 얼마나 세밀하게 구별하시며, 황폐 가운데서도 다시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하여 새로운 아침을 여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AC.408 심화 1)

 

 

 

AC.408, 창4:19,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 아침이 밝는 이유 - 거룩한 것의 모독과 새로운 시작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 더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이전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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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 더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이전이 아니라, 교회는 새롭게 시작됩니다. 곧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말씀에서는 ‘아침’(morning)이라고 부릅니다. 교회가 황폐해지기 전에는 새로운 빛, 곧 ‘아침’(morning)이 밝아 오지 않는 이유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빛이나 체어리티에 속한 어떤 것도 그 안에 스며들게 할 수 없습니다. ‘가라지’(tares)가 모든 ‘좋은 씨’(good seed)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으면 신앙을 더 이상 모독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정하고 믿지는 않으면서 단지 알고 있기만 하는 사람들은 모독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유대인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주님을 자신들이 기다려 왔고 지금도 계속 기다리는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인정하거나 믿지 않으므로 모독할 수 없습니다. 주님에 관하여 들은 무슬림들(Mohammedans)과 이방인들(gentiles)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교회가 아무것도 인정하거나 믿지 않게 될 때까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When a church has been so vastated that there is no longer any faith, then and not before, it begins anew, that is, new light shines forth,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morning.” The reason why the new light or “morning” does not shine forth until the church is vastated, is that the things of faith and of charity have been commingled with things profane; and so long as they remain in this state it is impossible for anything of light or charity to be insinuated, since the “tares” destroy all the “good seed.” But when there is no faith, faith can no longer be profaned, because men no longer believe what is declared unto them; and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but only know, cannot profane, as was observed above. This is the case with the Jews at the present day, who in consequence of living among Christians must be aware that the Lord is acknowledged by Christians to be the messiah whom they themselves have expected, and still continue to expect, but yet they cannot profane this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it. And it is the same with the Mohammedans and gentiles who have heard about the Lord. It was for this reason that the Lord did not come into the world until the Jewish church acknowledged and believed nothing.

 

해설

AC.408은 교회의 황폐와 새로운 시작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07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마침내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르지만, 그 가운데서도 교회의 어떤 핵심은 보존된다고 했습니다. 태고교회의 남은 부분이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었으며, 그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른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제 AC.408은 왜 이전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는지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더 이상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비로소 새롭게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하는 이 상태를 말씀의 ‘아침’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아침은 단순히 어둠이 끝난 다음의 시간대를 뜻하지 않습니다. 이전 교회의 황폐 이후에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아침은 교회의 영적 상태가 새로워지는 일과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전 교회가 완전히 황폐해지기 전에는 새로운 아침이 밝아 올 수 없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거짓된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고 믿으면서도 그것을 모독적인 것과 결합시키는 상태가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새로운 빛이나 체어리티를 그 안에 스며들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가라지’가 모든 ‘좋은 씨’를 파괴한다고 말합니다. 가라지와 좋은 씨는 서로 다른 성격의 것들이 한곳에 뒤섞여 있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번 문맥에서 좋은 씨는 새롭게 받아들여질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관련되며, 가라지는 그것들을 파괴하는 모독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핵심은 교회 안에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인 상태에서는 새로운 영적 생명이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에는 그것을 더 이상 모독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더 이상 인정하거나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별은 ‘아는 것’과 ‘인정하고 믿는 것’의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진리에 관하여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진리를 자기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알고 있을 뿐 인정하거나 믿지 않는 경우에는 이번 문맥에서 말하는 모독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모독은 단순한 무지나 불신앙과 구별됩니다. 거룩한 것에 관한 정보를 접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독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논지는 거룩한 것을 실제로 인정하고 믿는 상태와 그것을 모독적인 것에 결합시키는 상태 사이의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가 황폐해져 더 이상 신앙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상태도 지속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에 기독교인들 가운데 살던 유대인들을 예로 듭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신들은 그것을 인정하거나 믿지 않으므로 그 신앙을 모독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에 관하여 들은 무슬림들과 이방인들도 같은 원리의 예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려는 것은 특정 집단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어떤 진리를 외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인정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 대목의 ‘오늘날’은 AC가 집필되던 스베덴보리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또한 그가 유대인과 무슬림과 이방인을 예로 든 것은 그의 신학적 관점에서 모독의 조건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오늘날 해당 종교에 속한 모든 사람의 실제 신앙 상태에 대한 일반적인 사실 판단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사람마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인정하며, 실제로 무엇을 믿는지는 외적인 종교적 소속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유대교회가 아무것도 인정하거나 믿지 않게 될 때까지 세상에 오시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강림 시기를 교회의 황폐와 모독의 문제에 연결하는 그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전 교회가 거룩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새로운 빛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그 상태가 끝난 뒤에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당시 모든 유대인이 아무런 종교적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역사적 진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주님에 관한 참된 신앙이라는 자신의 신학적 기준으로 유대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AC.407과 AC.408을 함께 읽으면 교회의 황폐와 보존, 그리고 새로운 시작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이전 교회는 참된 신앙에서 떠나 황폐해집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 어떤 핵심이 남아 보존됩니다. 그리고 이전 교회의 황폐가 끝에 이르러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열릴 때,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아침’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황폐를 그 자체로 좋은 일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하는 것은 교회의 비극적인 상태입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상태에서도 교회의 남은 부분을 보존하시며, 거룩한 것과 모독적인 것이 뒤섞인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때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십니다. 따라서 새로운 아침은 인간이 신앙을 잃었기 때문에 자동으로 찾아오는 결과가 아니라, 황폐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핵심을 보존하시고 새로운 빛을 주시는 주님의 섭리와 관련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거듭남을 생각할 때에도 조심스럽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신앙이 없다고 느끼거나 영적으로 메마른 시기를 겪는다고 해서 반드시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교회의 황폐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더 깊이 무너져야만 주님께서 새롭게 하신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408은 우선 교회 전체의 상태와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설명하는 번호입니다.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는 거룩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악과 결합시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러한 결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원리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결국 AC.408의 중심은 ‘황폐가 끝나야 아침이 시작된다’는 말에만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런 질서가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면서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신앙이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모독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새로운 시작의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아침’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시작입니다. (AC.408 해설)

 

심화

1. 진리를 모르면 모독할 수 없다면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나은가?

 

AC.408 심화 1, ‘진리를 모르면 모독할 수 없다면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나은가?’

AC.408 심화1. 진리를 모르면 모독할 수 없다면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나은가? AC.408-410을 읽으면 매우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알면서 그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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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9, 창4:19, ‘아다와 씰라는 왜 라멕의 아내인가? - 속 교회와 겉 교회는 하나입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9‘가인’(Cain)이라 불린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이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해졌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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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7, 창4:19, ‘교회가 황폐해져도 남아 있는 핵심 - 노아로 이어지는 교회의 보존’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7교회 전체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마침내 신앙이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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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7

교회 전체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마침내 신앙이 완전히 없어지는 데 이르며, 이때 그 교회가 ‘황폐해졌다’(vastated)고 합니다. 태고교회에서 가인파(Cainites)라 불린 사람들에게도 그러했고, 홍수 후 고대교회에도 그러했으며, 유대교회에도 그러했습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실 당시 유대교회는 이처럼 황폐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주님께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주님을 믿는 신앙에 관해서는 더욱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강림 후에 존재했던 초기 기독교회도 그러했으며, 오늘날에는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완전히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언제나 어떤 핵심(nucleus)이 남아 있으며, 신앙에 관하여 황폐해진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에서도 그러했습니다. 그 교회의 남은 부분(remnant)은 홍수 때까지 존속했고, 그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 교회의 남은 부분을 ‘노아’(Noah)라고 부릅니다. The state of a church in general is thus circumstanced. In process of time it departs from the true faith until at last it comes to be entirely destitute of faith, when it is said to be “vastated.” This was the case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among those who were called Cainites, and also with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s well as with the Jewish church.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this last was in such a state of vastation that they knew nothing about the Lord, that he was to come into the world for their salvation, and they knew still less about faith in him. Such was also the case with the primitive Christian church, or that which existed after the Lord’s advent, and which at this day is so completely vastated that there is no faith remaining in it. Yet there always remains some nucleus of a church, which those who are vastated as to faith do not acknowledge; and thus it was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of which a remnant remained until the time of the flood, and continued after that event. This remnant of the church is called “Noah.”

 

해설

AC.407은 앞의 AC.405-406에서 설명한 라멕의 황폐를 교회 전체의 역사라는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라멕은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며, 그가 사람과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황폐가 가인의 계보에서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날 때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황폐’(vastation)는 이번 문맥에서 교회가 참된 신앙을 잃어 마침내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황폐를 단순히 교회의 외적인 쇠퇴나 건물과 제도의 소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외적으로 존속하더라도 그 안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된 참된 신앙이 사라진다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는 황폐한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규모가 작아졌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회가 황폐해졌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이번 번호가 다루는 것은 교회의 내적인 신앙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황폐의 사례로 태고교회에서 가인파라 불린 사람들, 홍수 후 고대교회, 유대교회, 그리고 초기 기독교회를 차례로 언급합니다. 여기서 태고교회 전체와 가인파를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처음 사례로 지목하는 것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 가운데 ‘가인파라 불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계열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태고교회의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가인과 같은 상태였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 고대교회와 유대교회에 관한 언급도 같은 논지를 이어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처음의 참된 신앙에서 점차 떠나 황폐에 이르는 일이 여러 교회에서 반복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주님의 강림 당시 유대교회가 주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실 것을 알지 못했고 주님을 믿는 신앙에 관해서는 더욱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이 주님에 관한 동일한 지식과 태도를 가졌다는 역사적·사회적 일반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 기독교회에 관한 설명에서도 시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 후에 존재했던 초기 기독교회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에 이르렀으며, 자신의 시대에는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다고 진술합니다. 여기서 ‘오늘날’은 AC가 집필되던 스베덴보리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별도의 검토 없이 오늘날의 모든 기독교회와 모든 신자에 대한 현재적 사실 판단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교회의 황폐를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쇠퇴를 설명한 직후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nucleus)은 교회가 황폐해졌다고 해서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황폐해진 사람들은 그 핵심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들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교회의 남은 부분은 존속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황폐와 교회의 완전한 소멸을 동일하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이번 번호의 ‘핵심’(nucleus)과 ‘남은 부분’(remnant)은 서로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교회에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는다고 말한 뒤, 태고교회에서도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이 홍수 때까지 존속했고 홍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노아는 이번 문맥에서 단순히 홍수 이야기의 한 인물을 넘어, 황폐해진 태고교회로부터 보존되어 이어지는 교회의 남은 부분을 나타냅니다.

 

다만 여기서 ‘남은 부분’을 곧바로 개인의 거듭남에서 말하는 기술적 의미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번호는 교회 전체의 황폐와 그 가운데 보존되는 교회의 핵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 안에 보존되는 리메인스와 연결하여 생각할 여지는 있지만, 그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관련 AC 본문을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사용한 ‘핵심’과 ‘교회의 남은 부분’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살리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제 가인의 계보와 노아의 관계도 조금씩 드러납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라멕에게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역사는 그 황폐로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이 보존되어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며, 그 남은 부분이 노아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계보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노아로 이어지는 흐름은 교회의 황폐와 보존이라는 두 측면에서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참된 신앙에서 떠나 황폐해지더라도 주님께서는 교회의 모든 것이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새로운 교회로 이어질 수 있는 핵심을 보존하십니다. 물론 이번 번호는 그 핵심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보존되었는지, 홍수 이후의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 내용은 노아와 홍수에 관한 이어지는 AC에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황폐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남은 부분이 존속한다는 사실만큼은 이번 번호에서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따라서 AC.407을 읽을 때에는 교회의 황폐에 관한 진술만큼이나 그 뒤에 나오는 ‘그러나’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교회의 황폐를 열거한 뒤에도 교회에는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는다고 말합니다. 황폐해진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핵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남은 부분은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었고,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릅니다. 결국 AC.407은 한 교회의 쇠퇴를 설명하면서도, 그 쇠퇴를 넘어 계속되는 교회의 보존을 함께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AC.407 해설)

 

 

 

AC.408, 창4:19,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 아침이 밝는 이유 - 거룩한 것의 모독과 새로운 시작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 더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이전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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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6, 창4:19, ‘라멕은 왜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는가? -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라멕’(Lamech)이 황폐(vastation), 곧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뒤에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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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

‘라멕’(Lamech)이 황폐(vastation), 곧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뒤에 나오는 23절과 24절로부터 분명합니다. 거기서는 그가 ‘내 상처를 위하여 사람을 죽였고, 내 상함을 위하여 어린아이를 죽였다’(slew a man to his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his hurt)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람’(man)은 신앙을, ‘어린아이’(little one), 곧 ‘어린 자녀’(little child)는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or that there was no faith,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verses (23–24), in which it is said that he “slew a man to his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his hurt”; for there, by a “man” is meant faith, and by a “little one” or “little child,” charity.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23, 24)

 

해설

AC.406은 앞의 AC.405에서 라멕이 ‘황폐’, 곧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 근거를 밝혀 줍니다. 그 근거는 라멕의 이름 자체가 아니라 뒤에 나오는 창4:23-24의 라멕의 노래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노래에서 라멕이 ‘사람을 죽였고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한 말씀을 인용한 뒤,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황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계보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상태를 표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분리된 신앙이라도 아직 보존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AC.392-396에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은 그 신앙이 훗날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데 쓰일 수 있도록 구별하여 보존하시는 섭리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멕에 이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AC.405에서는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했고, 이번 번호에서는 그 이유를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내는 라멕의 노래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과 ‘어린아이’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별하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문맥에서 ‘사람’을 신앙으로, ‘어린아이’를 체어리티로 풀이합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을 죽였다는 표현은 단순히 같은 의미를 반복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가지가 모두 소멸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앞서 가인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지만,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른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신앙을, ‘어린아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체어리티를 뜻한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밝히는 것은 라멕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 표현들의 속뜻입니다. 같은 단어라도 말씀의 문맥과 그것이 다루는 영적 상태에 따라 구체적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해석은 창4:23-24의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죽였다’는 표현을 실제 살인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만 읽으면 스베덴보리가 밝히려는 영적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그는 앞의 AC.403에서 창세기 이 부분이 영적인 것들을 역사 형식 아래 배열한 표상적 서술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라멕의 노래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읽습니다.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를 죽였다는 것은 그 계열의 교회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게 된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다만 ‘상처’와 ‘상함’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이번 번호에서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라멕의 노래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뒤의 번호에서 살펴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대목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홀로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일은 단순히 신앙에 덧붙여야 할 한 가지 덕목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생명을 얻는 관계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라멕에게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는 설명은 이러한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를 앞의 AC.405와 함께 읽을 때에는 또 하나의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라멕은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지만, 그의 두 아내는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라멕에게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했다는 사실이 곧 모든 사람에게서 선과 진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서 이어진 교리적 계열의 황폐와 새 교회의 출현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교회의 황폐가 곧 주님의 모든 교회 역사의 종말은 아닌 것입니다.

 

결국 AC.406은 라멕의 의미를 뒤에 나오는 말씀으로 확인하는 번호입니다.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의미하며, 라멕이 이들을 죽였다는 말씀은 그 계열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가인에게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새 교회의 출현도 예고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라멕에게서 이전 교회의 황폐를 보면서도, 그 이후의 새로운 교회를 위한 주님의 섭리가 계속되고 있음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AC.406 해설)

 

 

 

AC.407, 창4:19, ‘교회가 황폐해져도 남아 있는 핵심 - 노아로 이어지는 교회의 보존’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7교회 전체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마침내 신앙이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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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5, 창4:19, ‘라멕에게서 신앙이 소멸하고 새 교회가 일어나다 - 아다와 씰라의 속뜻’ (AC.405-4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AC.405가인으로부터 순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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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AC.405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Lamech)은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됨으로써 초래된 황폐(vastation)를 의미합니다. 그의 ‘두 아내’(two wives)는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아다’(Adah)는 그 교회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씰라’(Zillah)는 그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By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from Cain, is signified vastation, in consequence of there being no longer any faith; by his “two wives” is signified the rise of a new church; by “Adah,” the mother of its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by “Zillah,” the mother of its natural things.

 

해설

AC.405는 가인에게서 시작된 교리적 분리가 어디에 이르렀으며, 그 이후 어떤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의 AC.399-404에서는 가인이라는 최초의 이단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이단이 나오고,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하는 성읍이 형성되며, 다시 여러 이단이 계보를 따라 파생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계보는 라멕에 이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이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됨으로써 초래된 황폐’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일이었지만, 그 분리가 이어진 끝에는 신앙 자체마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여기서 ‘황폐’(vastation)는 단순히 교회의 외적인 규모가 줄어들거나 제도가 무너지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히는 황폐의 원인은 ‘더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라멕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적 계열이 내적으로 어디까지 쇠퇴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 가인에게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도 보존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신앙이 훗날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데 쓰일 수 있도록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라멕에 이르면 그 계열에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일이 왜 심각한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은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 생명을 얻지 않습니다.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신앙에서 계속 밀어내면 처음에는 신앙만이라도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신앙 역시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라멕의 황폐는 바로 그 분리가 계보를 따라 진행된 결과를 보여 줍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라멕에게서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할 뿐, 그 이전의 각 후손에게서 신앙이 어떤 단계로 얼마나 감소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황폐를 말한 직후 그의 ‘두 아내’가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AC.405의 중요한 전환입니다. 가인의 계보에서 신앙이 소멸하는 것과 새 교회가 일어나는 것이 같은 짧은 번호 안에 함께 등장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두 아내를 단순히 황폐한 교회의 또 다른 특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에게서 이전 교회의 쇠퇴와 구별되는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봅니다.

 

두 아내 가운데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천적인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에, 영적인 것은 그 사랑과 선에 속한 진리와 신앙에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아다가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라는 말은 새 교회 안에서 이러한 내적인 것들이 산출되는 근원적 역할을 표상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아다라는 개인에게서 천적이고 영적인 생명이 독립적으로 나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아다는 새 교회의 이러한 것들이 출현하는 과정을 표상하는 이름입니다.

 

다른 아내인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자연적인 것은 인간의 겉 사람에 속하는 생각과 지식, 말과 행동, 일상적인 삶의 차원과 관계됩니다. 교회는 내적인 사랑과 신앙만을 추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연적인 삶 가운데 표현되고 실현되는 질서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가 각각 천적·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로 구별된다는 사실은 새 교회에 내적인 차원과 자연적인 차원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구별을 곧바로 ‘아다는 좋은 교회이고 씰라는 나쁜 교회’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사람 모두 새 교회의 출현과 관련된다고 말합니다. 아다는 그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며, 씰라는 그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입니다. 자연적인 것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자연적인 삶에까지 내려와 표현될 때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함께 질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후 아다와 씰라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러한 구별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새 교회의 출현을 말하면서도 그 교회의 구체적인 성격과 형성 과정을 아직 모두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AC.405는 라멕의 황폐, 두 아내를 통한 새 교회의 출현, 아다와 씰라가 각각 무엇의 어머니인지만 밝힙니다. 따라서 이 번호만으로 새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었는지, 이전 교회와 정확히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그 안의 모든 천적·영적·자연적 상태가 어떠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자녀들의 의미가 밝혀질 때 그 구체적인 모습도 차례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AC.405가 보여 주는 큰 흐름은 분명합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라멕에게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황폐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라멕의 두 아내를 통하여 새 교회의 출현을 알리고, 그 교회에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이 나타날 것을 예고합니다. 이전 교회의 소멸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 하나의 계보 안에서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이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그 분리를 계속 발전시켜 결국 신앙마저 잃는 상태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교회를 위한 역사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번 번호가 새 교회의 출현을 알려 준다는 사실과, 그 출현의 구체적인 과정이 무엇인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교회의 황폐 이후에도 새로운 것을 일으키시는 섭리의 방향을 볼 수 있지만, 아직 설명되지 않은 세부까지 앞질러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AC.405는 ‘라멕’과 ‘두 아내’를 함께 읽어야 하는 번호입니다. 라멕만 보면 가인에게서 시작된 분리의 비극적인 끝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다와 씰라까지 읽으면 그 끝에서 새 교회의 출현이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다는 그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며,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신앙의 황폐를 말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교회의 내적·외적 형성을 예고합니다. 인간의 실패가 마지막 말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주님의 섭리가 마지막까지 말씀의 흐름을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AC.405 해설)

 

 

 

AC.406, 창4:19, ‘라멕은 왜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는가? -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라멕’(Lamech)이 황폐(vastation), 곧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뒤에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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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4, 창4:18, ‘가인의 계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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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심화

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처음에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설령 그의 삶에 사랑이 부족하더라도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는 더 잘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적인 차원에서는 많은 진리를 알고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AC.379-381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앎’은 단순히 교리 내용을 기억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AC.37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하게 하는 ‘결속’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진리가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교리를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랑과 선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그 진리는 사람 안에서 생명을 얻지 못하고 기억과 이해성 안에 머물게 됩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가 자기 삶에서 ‘참인 것을 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에게서 진리의 목적은 선입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게 하고, 그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배우면서 실제로 선을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할 때, 그 진리는 점차 그의 의지와 삶에 결합됩니다. 그때 그는 단순히 ‘이것이 옳다고 배웠다’고 말하는 데서 더 나아가 왜 그것이 옳은지를 삶을 통해 알게 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배우면서도 그것을 자기 삶의 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리와 그의 실제 애정 사이에 틈이 생깁니다.

 

이것이 AC.380의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가인은 계속 ‘땅’을 갈 수 있습니다. 곧 신앙에 관한 지식을 계속 연구하고 배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가 소멸한 상태에서는 그 땅이 더 이상 결실하지 않습니다. 지식은 늘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선한 삶이라는 열매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결과를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진리를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하나의 살아 있는 중심에서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 점은 ‘체어리티가 있으면 교리를 몰라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살아 있게 합니다. 눈이 있어야 길을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걸어야 목적지에 이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보는 것과 걷는 것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진 것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마침내 그것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게 한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는 말은 교리적 정확성을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진리를 연구할수록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고,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고 그것을 버리며, 실제 쓰임의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 진리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진리를 연구할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만 많아지고 자기의 지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지식은 증가해도 그 지식이 자라야 할 ‘땅’은 점차 효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에 대한 영적인 분별은 지식의 양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을 행하려는 삶 안에서 진리는 서로 연결되고 질서를 얻습니다. 체어리티는 진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 있을 때 사람은 진리를 단지 기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체어리티를 잃은 가인이 마침내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이유이며, 동시에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AC.381 심화 1)

 

 

 

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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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18)

 

AC.404

이 모든 이름은 ‘가인’(Cain)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에 관하여는 이름들 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으므로, 그것들에 관하여 무엇인가 말하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그 이름들의 어원으로부터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랏’(Irad)은 그가 ‘성읍에서 내려온다’(descends from a city)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에녹’(Enoch)이라 불린 이단에서 내려왔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이름들도 이와 같습니다. All these names signify heresies derived from the first, which was called “Cain”; but as there is nothing extant respecting them, except the names, it is unnecessary to say anything about them. Something might be gathered from the derivations of the names; for example, “Irad” means that he “descends from a city,” thus from the heresy called “Enoch,” and so on.

 

해설

AC.404는 창4:18에 이어지는 가인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간결하게 밝혀 줍니다.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왔고, 에녹에게서 이라드가 나왔으며, 그 뒤로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이 이어집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한 가문의 족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이름이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 가인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세대가 이어지는 혈통이 아니라, 최초의 영적 분리가 계속 다른 형태로 파생되어 가는 하나의 교리적 계보로 읽힙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99-400과 직접 연결됩니다. AC.399에서는 가인이라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을 산출했고 그것이 에녹이라 불렸다고 했습니다. AC.400에서는 그 원리를 더욱 일반화하여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라고 했습니다. AC.404는 바로 그 말이 실제 가인의 계보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최초의 분리가 에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여러 이름으로 계속 파생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최초의 이단’이라는 표현은 가인의 본래 의미를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어떤 잘못된 교리 하나를 표상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상태를 표상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AC.398의 표현대로 하면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최초의 분리에서 이후의 여러 이단이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라드, 므후야엘, 므드사엘 등이 각각 정확히 어떤 교리를 주장했는지 알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스스로 멈춥니다. ‘그것들에 관하여는 이름들 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으므로, 그것들에 관하여 무엇인가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해석 태도를 보여 줍니다. 속뜻이 있다고 해서 본문이 제공하지 않는 세부 내용까지 자유롭게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이름의 의미에서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이라드’를 듭니다. 이라드라는 이름은 ‘성읍에서 내려온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속뜻에서는 앞의 ‘성읍’, 곧 에녹이라 불린 이단에서 파생되어 내려온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AC.401에서 에녹은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과 연결되었고, AC.402에서 성읍은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라드가 ‘성읍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앞서 형성된 에녹의 교리적·이단적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가 파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계보에는 상당히 일관된 흐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가인이라는 최초의 분리가 있습니다. 그 분리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이단이 산출됩니다. 에녹은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형성되는 상태와 관련되고, 그 이름을 따라 성읍이 세워지면서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하나의 형태를 갖춥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읍’에서 이라드가 내려옵니다. 하나의 분리된 신앙이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이 교리적인 전체를 이루며, 그 교리적 전체에서 다시 새로운 형태의 분리가 파생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AC.404에서 말하는 ‘계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앞의 상태가 뒤의 상태를 낳는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400에서 이미 말한 ‘잉태와 출생’의 원리와 같습니다. 하나의 교리적 전제가 받아들여지면 그 안에서 다음 결론이 나오고, 그 결론에서 다시 다른 결론이 나옵니다. 처음의 근본 원리가 계속 후속적인 형태들을 산출하면서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절제입니다. 그는 ‘다른 이름들도 이와 같다’고 말할 뿐, 각각의 이름에 대해 상세한 교리적 내용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이름의 어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뒷받침할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응을 다룰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상응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영적 의미를 붙이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 자체와 AC의 설명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403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들을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에 등장하는 이름들도 영적인 상태들의 연속을 역사적 족보의 형태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표상적 역사라고 해서 모든 이름의 세부 의미가 우리에게 자동으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속뜻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속뜻의 모든 세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AC.404는 한편으로는 매우 강하게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강하게 말하는 것은 ‘이 모든 이름은 가인이라는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은 ‘각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이름 외에는 자료가 없으므로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태도를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교리 이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잘못된 근본 원리는 여러 후속적인 오류를 낳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진리를 선한 삶에서 분리하며, 이해를 사랑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시키는 원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교리적 형태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역사 속의 모든 교리나 교파를 임의로 가인의 어느 후손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AC.404 자체가 그런 과도한 추정을 경계하게 합니다.

 

오히려 가인의 계보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더욱 유익합니다. 하나의 잘못된 원리를 받아들였을 때 그것이 어떤 후속적인 생각들을 낳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옳다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원리가 마음에 자리 잡으면, 거기서 상대를 판단하는 생각이 나오고, 그 판단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생기며, 마침내 사랑하지 않는 행동까지도 옳다고 설명하는 하나의 내적 ‘성읍’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의 분리가 그 자체에서 후손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에서는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잘못된 근본 원리가 발견되고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여 피할 때, 주님께서는 진리를 다시 선과 결합시키십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섬기게 되고, 이해는 자기 지성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가인의 계보를 읽는 목적은 단순히 옛 이단의 역사를 분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거나 무너지는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404는 가인의 후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상세히 해독하려 하기보다 그 계보 전체의 성격을 먼저 붙들게 합니다. 그들은 모두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나타냅니다. 이라드가 ‘성읍에서 내려온다’는 이름으로 에녹의 이단에서 파생된 상태를 보여 주듯, 뒤의 이름들도 같은 계보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세부 내용이 주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깊이 읽는 것과 말씀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AC.404는 바로 그 두 가지를 함께 가르쳐 주는 번호입니다. (AC.404 해설)

 

 

 

AC.405, 창4:19, ‘라멕에게서 신앙이 소멸하고 새 교회가 일어나다 - 아다와 씰라의 속뜻’ (AC.405-4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AC.405가인으로부터 순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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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3, 창4:17, ‘왜 창세기 초반은 역사 형식으로 기록되었는가? - 태고인들의 표상적 서술 방식’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3이제 우리는 ‘성읍’(city)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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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3

이제 우리는 ‘성읍’(city)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이 부분 전체가 역사 형식(historical form)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문자적 의미(sense of the letter)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인이 성읍을 세우고 그것을 에녹이라 불렀던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문자적 의미로부터 그들은 또한 가인이 아담의 장자에 불과했음에도 이미 그 땅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말입니다. 역사적 연속(historical series)에는 이러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태고인들(most ancient people)은 모든 것을 ‘표상적 유형들’(representative types) 아래 ‘역사 형식’(form of a history)으로 배열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에게 지극히 즐거운 일이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We have now seen what a “city” signifies. But as all this part of Genesis is put into a historical form, to those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it must seem that a city was built by Cain, and was called Enoch, although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y must also suppose that the land was already populous, notwithstanding that Cain was only the firstborn of Adam; the historical series has this in it. But as we observed above,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accustomed to arrange all things in the form of a history, under representative types,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highest degree, for it made all things seem to be alive.

 

해설

AC.403은 창세기 4장을 읽는 데서만 중요한 번호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부 전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앞의 AC.402에서는 ‘성읍’이 실제 성읍 자체보다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본문은 마치 실제 인물들이 태어나고, 성읍을 세우고, 그 성읍에 이름을 붙인 것처럼 역사 이야기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403은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세기의 이 부분 전체가 역사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만을 따라 읽으면 가인이 실제로 성읍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불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이 그렇게 보이도록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역사 형식을 문자 그대로만 밀어붙일 때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아담의 장자에 불과한데도 이미 성읍을 세울 만큼 많은 사람이 땅에 살고 있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난점이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단순히 ‘가인의 아내는 어디에서 왔는가?’ 같은 역사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실제 사건들의 연대기적 기록만을 목적으로 쓰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의 답은 그렇지 않다는 쪽입니다. 창세기 초반의 이 부분은 영적인 실재를 역사적인 형식 아래 배열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역사적 연속’(historical series)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가인이 태어나고, 아벨을 죽이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일련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연속된 역사처럼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 속뜻에서는 교회의 상태들이 서로 이어지고, 하나의 교리적 상태가 다음 상태를 산출하며,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쇠퇴하는지가 하나의 영적 연속으로 펼쳐집니다. 문자적 역사 형식은 그 영적 연속을 담는 외적 그릇인 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태고인들의 사고방식에서 찾습니다. 태고인들은 ‘모든 것을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하는 데 익숙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표상적 유형들’(representative types)이란 자연적인 인물, 장소, 사건, 사물 등을 통하여 영적이고 천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형식을 말합니다. 곧 추상적인 교리나 영적 상태를 직접 개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사람과 장소와 사건의 형태로 살아 있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적 성격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과 분리된 추상 개념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느끼고 보았으며, 자연적인 형상들을 통해 천적이고 영적인 실재를 지각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영적 진리를 이야기와 인물과 장소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단순한 문학적 장식이 아니라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방식이 그들에게 ‘지극히 즐거운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403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 진리를 단지 추상적인 명제와 정의로만 전달하면 개념으로 머물 수 있지만, 그것을 사람과 사건과 장소의 형식으로 표현하면 진리가 움직이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인과 아벨, 에덴과 놋, 에녹과 성읍은 단순한 추상어가 아니라 영적 상태들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이야기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초반의 서술은 일종의 ‘살아 있는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교리적 오류가 파생된다’고 한 문장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이야기로 펼쳐 보여 줍니다. 그러면 하나의 교리적 명제가 인간의 선택과 관계와 결과를 가진 살아 있는 서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C.403을 근거로 ‘창세기 초반은 역사적 의미가 전혀 없고 순전히 만들어 낸 이야기다’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역사 형식’과 ‘표상적 유형들’입니다. 그의 관심은 문자적 형식 뒤에 있는 속뜻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우리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이 부분을 단순한 문자적 연대기로만 읽지 않고, 영적인 실재를 역사 형식 아래 배열한 말씀으로 읽는다’는 정도입니다.

 

또한 ‘역사 형식’이라고 해서 내용이 임의적이거나 무질서하게 꾸며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역사적 연속’이라고 부른 것처럼, 사건들의 순서와 관계 자체가 영적 상태들의 질서와 진행을 담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보다 먼저 나오고, 아벨을 죽인 뒤 놋 땅에 거하며, 그 뒤 에녹과 성읍이 나오는 순서는 임의적인 배열이 아닙니다. 각각이 앞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연속을 표현합니다.

 

이 점은 AC.399-402의 흐름을 다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분열이 산출되고, 그것이 가르침으로 형성되며, 다시 성읍이라는 교리적 전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만일 이것을 추상적인 교리 설명으로만 기록했다면 매우 건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출생과 이름과 성읍 건설이라는 이야기로 표현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영적 변화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AC.403은 우리가 창세기 초반을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무시하고 곧바로 속뜻으로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이야기의 흐름을 충분히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역사 형식 자체가 속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먼저 나오고, 누가 누구를 낳고, 어디로 이동하며, 무엇을 세우고, 무엇이라 이름하는지가 모두 영적 연속을 담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동시에 문자적 이야기에서만 멈추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깊이는 그 역사 형식 안에 교회의 상태, 인간의 거듭남, 사랑과 신앙의 관계, 선과 진리의 질서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적 의미와 속뜻은 경쟁하는 두 층위라기보다, 외적 형식과 그 안에 담긴 내적 생명의 관계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03의 마지막 표현,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은 우리가 왜 말씀의 표상과 상응을 공부하는지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상응을 공부하는 목적은 단어마다 뜻을 붙여 놓는 일종의 암호 해독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 속 인물과 사건과 장소가 영적 실재와 연결되면서 다시 살아 움직이도록 보는 데 있습니다. ‘가인 = 신앙’, ‘아벨 = 체어리티’, ‘성읍 = 교리’라고 대응표만 외운다면 아직 태고인들이 느꼈던 그 생명성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 관계들이 하나의 살아 있는 영적 서사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AC.403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하나의 중요한 안내문입니다. 태고인들은 영적 실재를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했고, 그 방식은 모든 것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은 단순한 이름과 지명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인간 마음의 변화를 살아 있는 역사처럼 보여 주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결국 AC.403이 말하는 것은 ‘역사를 버리고 상징만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역사적 형식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 형식 안에서 영적 실재가 인물과 사건과 장소를 통하여 살아 움직입니다. 가인의 성읍도 바로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단순히 고대의 한 사람이 세운 도시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가르침을 낳고 교리적 세계를 형성해 갔는지를 살아 있는 역사 형식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고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표상적 서술 방식이며,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기본 관점입니다. (AC.403 해설)

 

 

 

AC.404, 창4:18, ‘가인의 계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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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2, 창4:17, ‘성읍은 왜 교리를 의미하는가? -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가인의 성읍까지’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가인이 ‘쌓은 성읍’(city that was built)이 그 이단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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