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를 한 문장 안에서 연결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한 이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다는 것,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라는 것, 그리고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으며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읽으면 ‘사랑이적은것과아르카나가가려지는것이무슨관계가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을 이해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AC.32가 말하는 ‘아르카나’의 내용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추어져 있었다는 아르카나는 추상적인 비밀 지식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한 사랑과 신앙의 질서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큰광명체들’이라 하고, 사랑을 더 큰 광명체, 신앙을 더 작은 광명체라 하며, 사랑은 낮을, 신앙은 밤을 다스린다는 것이 그 아르카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를 이해하려면 신앙을 사랑과 독립된 별도의 종교적 능력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30부터 계속되는 논리는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더 작은 광명체인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신앙도 살아 있으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본래의 생명을 잃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사랑 자체가 거의 사라지면 ‘신앙은사랑에서생명을얻는다’는 진리도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신앙을 교리의 인정, 지적 동의, 종교적 주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워지고, 사랑은 신앙과 나란히 놓이는 하나의 덕목 정도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이더큰광명체이고신앙이그사랑에서생명을얻는다’는 질서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아르카나가가려져있음’과 ‘사랑이거의없음’이 연결됩니다. 아르카나가 말씀 안에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의 참된 관계가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알려지거나 인정되지 않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던 것을 이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설명하도록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거의없고,그결과신앙도거의없다’는 표현에서 순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없어서사랑이없다’고 하지 않고, 사랑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30부터 이어진 광명체의 질서와 정확히 같습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더 작은 광명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2에서 세 가지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세대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졌고, 사랑이 거의 없으므로 살아 있는 신앙도 거의 없어졌으며, 그 결과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 자체가 교회에서 가려졌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시대에 ‘해는사랑이고달은신앙이며,신앙은사랑에서생명을얻는다’는 아르카나를 다시 밝혀야 했다는 것이 AC.32의 논리입니다. (AC.32심화2)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가리켜 ‘지금이세대의종말(theconsummationoftheage)’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AC가 쓰인 때로부터 이미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세계와 기독교회는 계속 존재하고 있으니,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이 질문은 ‘세대의종말’을 현대적인 시간 개념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영적 상태로 읽을 것인가와 관계됩니다.
우선 AC.32자체가 ‘세대의종말’을 무엇과 연결하는지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이때에는사랑이거의없고,그결과신앙도거의없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종말’의 핵심은 몇 년 뒤 세상이 사라진다는 시간표가 아니라, 한 교회가 그 본래의 사랑과 신앙을 거의 잃어버린 영적 상태에 있습니다.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살아 있는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를 스베덴보리는 ‘세대의종말’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세대’(age)를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 인간 세대, 곧 20년이나 30년 정도의 기간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복음서의 ‘consummationoftheage’역시 한 사람의 세대가 끝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교회적 시대의 완결과 관계된 표현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18세기에 ‘세대의종말’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몇십년안에지상세계가끝난다’는 예언을 한 것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종말’이라는 말을 어떤 상태가 마지막 단계에 이른 것으로 이해하면 시간이 오래 흐른다는 사실 자체가 곧 모순이 되지는 않습니다. 한 교회가 그 본래의 사랑과 신앙을 잃었다고 해서 지상의 조직과 제도, 예배와 교리, 교회 건물과 이름이 그 즉시 모두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형태는 남아 있으면서도 그 교회의 내적 생명은 크게 쇠퇴한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AC.32의 관심은 바로 그 내적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2026년이라는 현재 시점에서 ‘왜아직종말이끝나지않았는가?’라고 묻기 전에,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종말’이라고 불렀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32에서 그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물리적 소멸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질서가 소진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이 단락의 문맥에 가장 잘 맞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는 최후의 심판과 새 교회에 관하여 훨씬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그 후 수백 년의 교회사를 정확히 어떤 단계의 ‘과도기’라고 이름 붙일 것인지, 또는 현재가 그 과정의 어느 지점인지를 AC.32만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자기 시대의 교회를 ‘사랑이거의없고그결과신앙도거의없는종말상태’로 보았다는 사실까지만 분명히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세대의종말’이 수백 년 동안 계속된다고 생각하기보다, 먼저 ‘종말’이 달력상의 짧은 기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AC.32에서 그 상태를 판단하는 기준은 매우 분명합니다. 사랑이 살아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이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2심화1)
AC.31 [3]에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저녁부터아침까지항상타는등불’을 두도록 명하신 규례를 언급합니다. 출27:20-21에는 순수한 감람유를 가져다가 등불을 켜고 회막 안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그것을 보살피도록 하는 명령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등불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로 지켰지만, 그 규례가 표상하는 천국의 내적 의미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자기가 하는 행위의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행위를 통하여 거룩한 것을 표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표상’과 ‘그표상을행하는사람의내적상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 자신도 그 거룩한 상태 안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제사, 절기, 성막과 성전, 제사장 직무와 의복 등은 주님과 천국과 교회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표상의 거룩함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깊은 영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느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제도와 말씀에 부여하신 표상적 질서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제사장이 등불의 내적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해서 등불의 표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그 제물과 제단과 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적 의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표상의 의미는 사람의 주관적인 해석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표상이제대로기능하려면그것을행하는사람이반드시그의미를몰라야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를 아는 것 자체가 표상을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더 오래된 교회들에서는 자연계의 사물들이 무엇을 상응하고 표상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해야표상이가능하다’는 것이 영적 원리는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특별한 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많은 사람이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강하게 기울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율법과 규례를 주셨고, 그 외적 예배가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도록 질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내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정해진 규례를 수행하는 동안 그 외적 행위는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의미를모르면서어떻게그렇게철저하게지킬수있었는가?’라는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명령의 모든 깊은 의미를 알아야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외적 명령을 준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들의 무지를 그 자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의미를몰랐기때문에오히려더좋은표상교회가될수있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은 그 자체로 더 높은 영적 상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러한 인간의 상태 속에서도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시고, 외적인 예배를 통하여 천국의 것들이 표상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이상적이어야만 주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태를 아시고, 그 상태에 맞추어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십니다. 유대교회의 외적 예배 역시 그런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내적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규례를 통하여 주님과 천국에 관한 표상들이 역사 속에 계속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AC.31에서 말하는 ‘항상타는등불’은 무엇을 표상했을까요?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만큼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규례가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상의 세부적인 의미는 ‘적절한곳에서’설명하겠다고 여기서 유보합니다. 그러므로 AC.31만을 가지고 ‘저녁은반드시이런상태이고,등불이밤새타는것은반드시이런교회사적보존을뜻한다’는 식으로 세부 상응을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밝힌 만큼과 우리가 그 원리를 따라 추론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심화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이렇습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이 모든 규례의 내적 의미를 알아야만 그 규례가 표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표상의 근거는 인간의 이해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영적 질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의미를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표상을 가능하게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내적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외적 예배까지 사용하여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고 보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타는등불’은 유대인들이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보다, 그 규례를 통하여 주님께서 무엇을 표상하도록 하셨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31에서는 그것이 바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신앙이며, 주님께서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고 다시 겉 사람의 삶에까지 나타나게 하시는 질서입니다. (AC.31심화3)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 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강림과이방인들의밝아짐,따라서새교회와,특히어둠가운데있다가빛을받아거듭나는모든사람’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새교회’라는 표현을 보면 자연스럽게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 말하는 ‘새교회’(NewChurch), 곧 새 예루살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1의 이 한 문장만 놓고 그것을 곧바로 특정한 역사적 교회나 교단으로 한정하는 것은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같은 문장에서 범위를 함께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먼저 ‘주님의강림과이방인들의밝아짐’을 말하고, 그 결과로 ‘새교회’를 언급한 뒤, 곧바로 ‘특히어둠가운데있다가빛을받아거듭나는모든사람’을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심은 어떤 조직의 명칭보다 ‘어둠가운데빛이임하고,주님으로말미암아새로운영적상태가시작되는것’에 있습니다.
사60의 본문 자체도 이 문맥과 잘 맞습니다. ‘일어나라빛을발하라이는네빛이이르렀고’, ‘어둠이땅을덮을것이며캄캄함이만민을가리려니와’, 그리고 ‘여호와가네영원한빛이된다’는 말씀은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을 묘사합니다. AC.31에서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해와 달의 ‘밝아짐’을 통해 사랑과 신앙이 주님에게서 다시 살아나는 상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새교회’는 우선 주님의 오심과 빛의 유입으로 새롭게 세워지는 교회의 상태를 뜻한다고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그와 같은 질서가 한 개인의 거듭남에도 적용된다고 직접 말합니다.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이 주님의 빛을 받아 사랑과 신앙이 살아나기 시작할 때, 그 사람 안에서도 일종의 새로운 교회의 상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교회를 단순히 건물이나 조직의 이름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교회가 참으로 교회가 되려면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새교회’라는 말의 핵심도 외적 명칭의 새로움보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빛과 생명이 들어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 말하는 ‘새예루살렘’과 전혀 관계없다고 미리 선을 그을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AC.31은 여기서 그 역사적·교회사적 동일성을 논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을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범위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곧 사60은 주님의 강림으로 어둠 가운데 빛이 임하고, 그로 인해 새 교회가 일어나며, 개별적으로는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이 빛을 받아 거듭나는 상태를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60의새교회가어느교회인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AC.31에서는 특정한 후대 교단명을 먼저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기보다, 주님의 강림과 빛의 유입으로 새롭게 세워지는 교회의 상태를 뜻하며, 그와 같은 새로움은 거듭나는 각 사람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이 자리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고 있는 범위입니다. (AC.31심화2)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와 애굽에 관하여 ‘단지감각과단지기억지식의원리’(theprincipleofmeresenseandofmereknowledge)를 뜻하며, 여기서는 그것들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을 읽을 때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감각이나 기억 지식 자체를 나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감각을 통하여 자연세계를 접하고, 기억 지식을 통하여 배우고 생각합니다. 앞의 AC.24-29에서도 기억 지식은 거듭남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다루어졌습니다. 문제는 감각과 기억 지식이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만’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눈으로확인되지않는것은믿을수없다’고 하면서 영적인 모든 것을 감각적 증거 아래에 두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천국, 영혼, 주님의 섭리와 같은 것을 오직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는지 없는지로만 판단하는 것입니다. 질문하고 검토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연적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실재의 전부로 정하고, 그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태도입니다. 감각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는 자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의 재판관이 될 때 질서가 뒤집힙니다.
기억 지식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과 신학과 교리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지식 자체는 귀중하며,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내가알고있는것만참이다’, ‘내이성이납득하지못하면주님의말씀도받아들일수없다’는 식으로 기억 지식을 가장 높은 자리에 놓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지식이 사랑과 신앙을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신앙의 가능 여부를 판정하는 지배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 삶에서는 이런 모습이 아주 미묘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리에는 매우 정확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사랑과 자비가 사라질 수 있고, 말씀의 구절을 많이 알면서도 그 지식을 상대방을 판단하고 이기는 데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식이많아서사랑이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지식이라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쓰이면 매우 유익합니다. 문제는 지식이 자기 지성에 대한 신뢰와 결합하여 사랑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입니다.
감각적인 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 세계를 자세히 관찰하고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 자체는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통하여 주님의 지혜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사실만을 전부라고 여기고 영적인 원인이나 목적 자체를 배제할 때, 감각은 더 이상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지배하는 원리가 됩니다. AC.31에서 경고하는 것은 바로 이런 질서의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감각과단지기억지식에의해사랑과신앙이소멸된다’는 말을 ‘과학이나지식이신앙을파괴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지식과 이해를 거듭남의 중요한 단계로 봅니다. 오히려 사람의 감각과 지식이 자기보다 높은 것, 곧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섬길 때에는 그것들이 거듭남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AC.31의 표현은 결국 ‘무엇이무엇을다스리는가?’의 문제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중심이 되고 감각과 기억 지식이 그것들을 섬기면 질서가 바르게 서지만, 감각과 기억 지식만이 최종 기준이 되어 사랑과 신앙을 재단하기 시작하면 영적 빛은 점차 가려질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서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은 바로 이런 상태를 나타냅니다. 자연적인 것 자체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영적인 것 위에 올라가 지배할 때 사랑과 신앙의 빛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AC.31심화1)
AC.30 [3]의 ‘그러나그것들은태양의빛이그것을받는대상안에서보이듯이,의지와이해안에서그렇게나타날뿐입니다’라는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중요한 원리를 아주 압축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그것들’은 바로 앞에서 말한 사랑과 신앙이며, 특히 중요한 표현은 ‘initsrecipientobjects’, 곧 ‘빛을받아들이는대상안에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태양빛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태양빛이 물이나 나뭇잎, 창문이나 돌에 비치면 빛은 각각의 대상 안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빛 자체의 근원은 아닙니다. 빛의 근원은 태양이고, 대상은 그 빛을 받아 그것이 나타나게 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의지와 이해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비유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사람 안에서 사랑은 의지에,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은 ‘내가사랑한다’, ‘내가진리를이해한다’, ‘내가이것을믿는다’고 느낍니다. 실제로 그것들은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서 일어나며, 사람은 자유 가운데 그것을 받아들이고 행합니다. 그러나 AC.30이 강조하는 것은 그 생명의 최초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주님의자비’라고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태양의빛이그것을받는대상안에서보인다’는 말은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용체는 실제로 받아들이며, 사람은 자유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은 생각하고 선택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만 그 모든 과정에서 참된 사랑과 참된 신앙의 생명 자체를 자기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핀 AC.29의 ‘생명없는’상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사람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면서도 처음에는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행하고 선택하면서도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 자신의 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근원을 올바르게 구별하게 합니다.
실제 삶에서도 이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기로 결정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는 실제로 상황을 판단하고, 도울 것을 선택하며, 자신의 손과 시간과 재물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나는아무것도하지않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참된 선, 곧 이웃을 위하는 사랑의 생명까지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냈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태양빛이 물체 안에 실제로 나타나면서도 그 빛의 근원이 그 물체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AC.30 [3]의 이 비유는 ‘사람에게나타나는것은가짜이고주님만모든것을하신다’는 식의 인간 부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의지와 이해는 사랑과 신앙을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수용체이며,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그 수용체 안에 사랑을 일으키시고 진리로 비추십니다. 이것이 ‘태양의빛이그것을받는대상안에서보이듯이’라는 비유의 핵심입니다. (AC.30심화1)
모든진리와정의의법은천적기원들,곧천적인간의생명의질서로부터흘러나옵니다.온천국은하나의천적인간인데,이는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기때문입니다.그리고주님께서천국과천적인간의모든것안에서모든것이시므로,천국과천적인간은그분으로말미암아천적이라합니다.모든진리와정의의법이천적기원들,곧천적인간의생명의질서로부터내려오는것처럼,특별히‘혼인의법’(thelawofmarriages)이그러합니다.지상의모든혼인은‘천적혼인’(celestialmarriage),곧천국의혼인으로부터,그리고그혼인에따라파생되어야합니다.이혼인은한분주님과하나의천국,곧머리가주님이신하나의교회가있는그러한혼인입니다.여기서파생되는‘혼인의법’(lawofmarriages)은한남편과한아내가있어야한다는것입니다.이경우그들은천적혼인을표상하며,천적인간의본이됩니다.이법은태고교회의사람들에게계시되었을뿐아니라그들의속사람에새겨져있었습니다.그러므로그당시에는한남자가오직한아내만을두었고,그들은하나의집을이루었습니다.그러나그들의후손들이속사람이기를그치고겉사람이되었을때에는여러아내를맞이하였습니다.태고교회의사람들은그들의혼인에서천적혼인을표상했기때문에,부부의사랑은그들에게일종의천국이자천국의행복이었습니다.그러나교회가쇠퇴했을때그들은더이상부부의사랑안에서행복을퍼셉션하지못하고,다수에게서오는쾌락,곧겉사람의즐거움에서행복을퍼셉션했습니다.이것을주님께서는‘마음의완악함’(hardnessofheart)이라하셨으며,이로말미암아그들은모세를통하여여러아내를두는것을허락받았습니다.주님께서친히다음과같이가르치십니다.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 flow from celestial beginnings,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and as he is the all in all of heaven and the celestial man,they are thence called celestial. As every law of truth and right descends from celestial beginnings,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so in an especial manner does the law of marriages. It is the celestial(orheavenly)marriage from and according to which all marriages on earth must be derived;and this marriage is such that there is one Lord and one heaven,or one church whose head is the Lord. The law of marriages thence derived is that there shall be one husband and one wife,and when this is the case they represent the celestial marriage,and are an exemplar of the celestial man. This law was not only revealed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but was also inscribed on their internal man,wherefore at that time a man had but one wife,and they constituted one house. But when their posterity ceased to be internal men,and became external,they married a plurality of wives. Becaus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ir marriages represented the celestial marriage,conjugial love was to them a kind of heaven and heavenly happiness,but when the church declined they had no longer any perception of happiness in conjugial love,but in pleasure from a number,which is a delight of the external man. This is called by the Lord “hardnessofheart,” on account of which they were permitted by Moses to marry a plurality of wives,as the Lord himself teaches:
AC.162는 창2:24의 ‘둘이한몸을이룰지로다’를 혼인 자체의 질서로 확장하여 설명합니다. 출발점은 지상의 혼인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인간 사회의 편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천적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특별히 혼인의 법이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혼인은 단순한 사회 제도나 생활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질서가 지상에서 표상되는 매우 중요한 형식입니다.
이 설명의 중심에는 ‘천적혼인’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상의 모든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그리고 그 혼인에 따라 파생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천적 혼인을 설명하면서 먼저 ‘한분주님과하나의천국’을 말하고, 이어 ‘머리가주님이신하나의교회’를 말합니다. 따라서 혼인의 하나 됨을 이해하는 가장 깊은 기준은 두 인간이 서로에게만 집중하여 하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 됨의 근원이 한 분 주님에게 있다는 데 있습니다. 천국도 교회도 그분을 머리로 할 때 하나이며, 지상의 혼인도 이 천적 질서를 표상합니다.
바로 여기서 한 남편과 한 아내라는 혼인의 법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당시의 관습이나 인간이 만들어 낸 윤리 규정에서 도출하지 않고 천적 혼인으로부터 도출합니다. 한 남편과 한 아내가 혼인을 이룰 때 그들은 천적 혼인을 표상하고 천적 인간의 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부일처는 이 단락에서 단순히 허용된 여러 결혼 형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천적 혼인에서 파생되는 혼인의 질서로 제시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이 법이 외적으로 계시되었을 뿐 아니라 속 사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이 한 남자와 한 여자로 하나의 집을 이루었던 것은 단지 외적인 명령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가 그 질서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부의 사랑은 ‘일종의천국이자천국의행복’이었습니다. 혼인의 외적 형태와 그들의 내적 생명의 질서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혼인에서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들은 더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다수에게서 오는 쾌락, 곧 겉 사람의 즐거움에서 그것을 퍼셉션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아내의 수가 바뀌었다는 외적 사실보다 행복을 어디에서 퍼셉션하게 되었는가 하는 내적 변화입니다. 혼인의 외적 변화는 이미 일어난 인간 내면의 변화를 드러내는 결과였습니다.
이 때문에 AC.162가 막10:5-9를 인용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모세가 허용한 것을 곧바로 창조의 본래 질서와 동일시하지 않으시고, ‘너희마음이완악함으로말미암아’ 그렇게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신 뒤 ‘창조때로부터’의 질서로 돌아가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한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수의 아내가 허락되었다는 사실이 혼인의 본래 법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허용된 것이 있었지만, 혼인의 기원과 기준은 여전히 천적 혼인에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마음의완악함’을 단순히 고집이 세거나 잔인하다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AC.162자체의 흐름에서 보면,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었으며, 부부의 사랑에서 누리던 천국의 행복을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된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막10장에서 모세의 허용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창조의 처음을 다시 가리키신 것은, 인간의 변화된 상태와 혼인의 본래 질서를 구별하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AC.162는 이렇게 창2:24를 천적 혼인에서 지상의 혼인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질서 안에 놓습니다. 한 분 주님, 하나의 천국과 교회, 한 남편과 한 아내, 그리고 하나의 집이라는 흐름의 중심에는 단순한 숫자상의 ‘하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 됨이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부부의 사랑이 천국의 행복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혼인이 이 천적 질서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혼인의법’은 결혼생활에 관한 하나의 규칙을 넘어, 지상의 혼인이 어디에서 그 본과 질서를 받아야 하는지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AC.162해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창2:24)
AC.161
이태고교회의후손들은악하지않았고여전히선했습니다.그리고그들은겉사람안에서,곧자기들의proprium안에서살기를원했기때문에주님께서는이것을그들에게허락하셨으며,다만영적천적인것을자비롭게그안에스며들게하셨습니다.속사람과겉사람이어떻게하나로서활동하는지,또는어떻게하나처럼보이는지는하나가다른하나안으로유입되는것을알지못하면알수없습니다.이에관하여어떤관념을갖기위해하나의행위를예로들어보겠습니다.어떤행위안에체어리티,곧사랑과신앙이없고,또그사랑과신앙안에주님이계시지않는다면,그행위는체어리티의행위또는신앙의열매라고할수없습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but was still good;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what is spiritual celestial,however,being mercifully instilled therein.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or how they appear as a one,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that is,love and faith,and in these the Lord,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or the fruit of faith.
해설
AC.161에서 먼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악하지않았고여전히선했다’고 분명히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미 악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전의 천적 인간처럼 전적으로 속 사람의 질서 안에서 살기보다 겉 사람 안에서, 곧 자기들의 proprium안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을 원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그들을 악한 상태라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이러한 상태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허락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proprium에 내버려 두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곧이어 주님께서 ‘영적천적인것’을 자비롭게 그 안에 스며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고 한 것, AC.154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한 것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proprium안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그 생명의 근원이 proprium자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면서 하나처럼 보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유입’(influx)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이 실제로 하나의 것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AC.159에서 천적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입을 통하여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이것은 앞서 AC.155에서 천사들의 상태를 설명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하지만,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곧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과 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AC.161에서 겉 사람의 proprium안에 영적 천적인 것이 스며든다는 설명도 같은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유입을 추상적인 설명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듭니다. 어떤 행위가 겉으로 선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여기서 행위는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사랑과 신앙은 그 행위를 안에서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AC.161에서 말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하나 됨은 둘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흘러들어 실제 삶과 행위 안에서 함께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둘이한몸을이룰지로다’를 해설하면서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고 한 내용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하나처럼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 안에서 질서 있게 받아들여져 하나의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AC.161은 창2후반부의 proprium에 관한 설명을 한 단계 더 깊게 만듭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proprium안에 무엇이 스며들어 있으며, 무엇이 그 삶과 행위의 내적 근원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천적인 것이 그 안에 있고, 그것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 안으로 유입되어 실제 삶에서 나타날 때, 인간은 자기 삶을 자기 삶처럼 살아가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에게 두게 됩니다. 이것이 AC.161이 유입이라는 개념을 통해 보여 주기 시작하는 중요한 질서입니다. (AC.161 해설)
또한‘구스땅’(landofCush),곧에티오피아에는금과보석들과향료가풍부했는데,앞에서말한것처럼이것들은선과진리,그리고거기서나오는기쁘게받아들여지는것들,곧사랑과신앙에관한앎들과같은것들을뜻합니다.이것은앞서인용한사60:6,마2:1,11,시72:15의구절들(AC.113)에서도분명합니다. The “landofCush,” or Ethiopia, moreover, abounded in gold, precious stones, and spices, which, as before said, signify good, truth, and the things thence derived which are grateful, such as are those of the knowledges of love and faith. This is evident from the passages above cited (n. 113) from Isa. 60:6; Matt. 2:1, 11; Ps. 72:15.
말씀에서‘구스’(Cush),곧‘에티오피아’(Ethiopia)와‘스바’(Sheba)가이와유사한것들을뜻한다는것은선지서에서도분명합니다.스바냐에서는‘구스의강들’(riversofCush)도언급됩니다. That similar things are meant in the Word by “Cush” or “Ethiopia,” and also by “Sheba,”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Zephaniah, where also the “riversofCush” are mentioned:
라고하는데,이들도마찬가지로신앙에관한앎들을뜻합니다.또주님에관하여,따라서천적인간에관하여말하는시편에서는, by whom in like manner are signified knowledges[cognitiones]of faith.So in David,speaking of the Lord,consequently of the celestial man:
라고합니다.이말씀들은앞뒤구절과의연결에서분명한것처럼신앙의천적인것들을뜻합니다.솔로몬에게와서어려운질문들을하고향료와금과보석들을가져온스바여왕도이와유사한것들을뜻했습니다(왕상10:1-2). These words,as is plain from their connection with the preceding and subsequent verses,signify celestial things of faith.Similar things were signified by the queen of Sheba,who came to Solomon,and proposed hard questions,and brought him spices,gold,and precious stones(1 Kings 10:1–2).
말씀의역사부분에들어있는모든것은선지서에있는것들과마찬가지로아르카나를뜻하고,표상하며,그안에담고있기때문입니다. For all things contained in the historical parts of the Word,as well as in the prophets,signify,represent,and involve arcana.
해설
AC.117은 앞의 AC.116에서 ‘구스땅’이 마음 또는 능력을 뜻하고, 기혼이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한 앎을 뜻한다고 한 해석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뒷받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구스, 곧 에티오피아에 금과 보석과 향료가 풍부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앞의 AC.113-114에서 금은 선을, 보석은 신앙의 진리를 나타냈고, 향료와 같은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은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것들과 연결되었습니다. 따라서 구스와 그 부요함은 여기서 단순한 지역적 풍요를 넘어 사랑과 신앙에 관한 앎들을 나타내는 말씀의 이미지가 됩니다.
습3:5, 9-10을 인용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여기에는 ‘구스의강들’이 등장하고, 그 너머에서 주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예물을 가져옵니다. 지금 창2:13에서도 둘째 강 기혼이 ‘구스온땅을두른다’고 했으므로, ‘강’과 ‘구스’가 함께 등장하는 이 말씀은 기혼과 구스의 속뜻을 뒷받침합니다. 더구나 그곳에서 오는 것은 주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따라서 구스와 관련된 앎들은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에 속하며 주님을 향하는 것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단11:43은 이 번호에서 특히 중요한 구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애굽’은 기억지식을 뜻하고 ‘구스사람들’은 앎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두 표현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여기서는 구별되어 사용됩니다. 앞의 AC.111에서 겉 사람이 기억지식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여기는 문제를 지적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기억지식은 사람이 외적으로 배우고 기억하는 지식과 관계되지만, 여기서 구스가 나타내는 앎들은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AC.116-117의 기혼을 단순히 지식이 많아지는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겔27:22의 스바와 라아마의 상인들이 향료와 보석과 금을 가져오는 장면도 같은 의미를 뒷받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신앙에관한앎들’과 연결합니다. 여기에서도 금과 보석과 향료가 다시 함께 등장합니다. 앞 번호들에서 각각 따로 설명했던 선과 진리, 그리고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이제 ‘앎들’이라는 주제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스와 스바가 나타내는 앎은 생명과 분리된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내용, 곧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을 알고 있는 상태와 관계됩니다.
시72:7, 10에서는 다시스와 섬의 왕들, 스바와 시바의 왕들이 예물을 드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시편이 주님에 관하여 말하며, 따라서 천적 인간에 관하여 말한다고 설명하고, 이 말씀들이 ‘신앙의천적인것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님에관하여,따라서천적인간에관하여’라는 연결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과 천적 인간을 동일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천적 인간에게 있는 참된 사랑과 신앙의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지금까지의 설명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 안에 나타나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은 그 사람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질서에 속합니다.
솔로몬을 찾아온 스바 여왕의 이야기를 인용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스바 여왕은 어려운 질문들을 가지고 솔로몬에게 와서 향료와 금과 보석을 가져왔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역사적 사건에도 앞의 선지서에서 본 것과 유사한 것들이 표상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마지막 문장이 중요해집니다. ‘말씀의역사부분에들어있는모든것은선지서에있는것들과마찬가지로아르카나를뜻하고,표상하며,그안에담고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역사적 서술도 단순히 과거 사건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내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따라서 AC.117의 여러 인용은 ‘구스=앎’이라는 대응 하나를 증명하기 위한 자료의 나열에 그치지 않습니다. 금과 보석과 향료, 구스와 스바, 예물과 경배라는 이미지들이 반복되면서,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이 사랑과 신앙의 생명 안에 있을 때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창2:13의 기혼으로 돌아오면 그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에덴에서 시작된 생명의 강이 이제 인간의 이해와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앎들에까지 이릅니다. 사람은 단순히 기억지식을 쌓아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의 생명 안에서 선과 진리를 알고 이해하게 됩니다. 기혼과 구스는 바로 그 이해와 앎의 영역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117해설)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창2:13)
AC.116
‘둘째강’(secondriver),곧‘기혼’(Gihon)은선과진리,또는사랑과신앙에속한모든것에관한앎을뜻하고,‘구스땅’(landofCush)은마음또는능력을뜻합니다.마음은의지와이해로이루어져있습니다.첫째강에관하여말한것은의지에관계하고,이둘째강에관하여말한것은이해에관계하는데,선과진리에관한앎들은이해에속합니다. The “secondriver,” which is called “Gihon,” signifies the knowledge [cognitio] of all things that belong to the good and the true, or to love and faith, and the “landofCush” signifies the mind or faculty. The mind is constituted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and what is said of the first river has reference to the will, and what of this one to the understanding to which belong 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good and of truth.
해설
AC.116은 에덴에서 나온 네 강 가운데 둘째 강 ‘기혼’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기혼은 ‘선과진리,또는사랑과신앙에속한모든것에관한앎’을 뜻하고, 기혼이 두르는 ‘구스땅’은 마음 또는 능력을 뜻합니다. 앞의 첫째 강 비손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나타냈다면, 이제 둘째 강 기혼은 선과 진리에 관한 ‘앎’과 관계됩니다. 이로써 에덴에서 흘러나온 하나의 강이 여러 강으로 갈라진다는 말씀이 인간 안의 서로 구별되는 능력과 그 작용을 점점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앎’을 앞에서 자주 등장했던 ‘기억지식’과 곧바로 같은 것으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문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cognitio와 cognitiones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AC.111에서 겉 사람들이 거의 기억지식밖에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른다고 했던 것과 달리, 여기서 말하는 앎들은 ‘선과진리,또는사랑과신앙에속한모든것’에 관한 앎들입니다. 따라서 기혼이 나타내는 것은 단순히 많은 정보를 기억하고 축적하는 능력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을 알고 이해하는 데 관계된 마음의 영역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마음은의지와이해로이루어져있다’는 설명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앞의 AC.111에서는 많은 사람이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둘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16은 그 원리를 네 강의 해석에 직접 적용합니다. 첫째 강에 관한 것은 의지에 관계하고, 둘째 강에 관한 것은 이해에 관계합니다. 하나의 마음 안에 의지와 이해가 있으면서도 둘은 서로 구별되고, 에덴의 첫째 강과 둘째 강은 그 구별되는 두 측면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혼은 이해와 관계할까요? AC.116자체가 그 이유를 바로 밝혀 줍니다. ‘선과진리에관한앎들은이해에속하기’ 때문입니다. 이해는 단순히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능력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선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인지,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받아들이는 능력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기혼’이 나타내는 앎은 인간의 이해 안에서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이 자리 잡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강과 둘째 강을 함께 보면 앞에서 다소 추상적으로 들렸던 의지와 이해의 구별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AC.110-115에서 첫째 강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과 관계되었고, 그 설명은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드는 데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제 둘째 강 기혼은 선과 진리에 관한 앎들을 가진 이해와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마음을 하나의 막연한 영적 능력으로 다루지 않고, 의지와 이해라는 서로 구별되는 두 능력이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각각 고유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별 역시 인간의 능력을 주님과 독립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설명되는 네 강 전체의 출발점은 여전히 에덴에서 흘러나온 하나의 강입니다. 앞에서 그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이며, 그 지혜가 동산을 적셔 지성을 주는 것으로 설명되었습니다(AC.107). 그리고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는 모두 그 근원에서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AC.112). 그러므로 의지와 이해, 그리고 그 이해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앎들도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AC.116은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면서도 다시 에덴의 강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잊지 않게 합니다. 마음에는 의지와 이해가 있고, 이해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앎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살아 있는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 것은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는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들기 때문입니다. 기혼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과 진리를 파악하여 주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서 인간의 이해가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 주는 둘째 강입니다. (AC.116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