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아벨’(Abel)과 그의 ‘제물’(offering)에 관하여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That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signifies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therein, are pleasing to the Lord, has been explained before, as regards both “Abel,” and his “offering.”

 

해설

AC.354는 매우 짧으며, 사실상 AC.350-353 전체를 한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결론입니다. 새로운 상응을 제시하기보다 창4:4의 마지막 부분인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말씀의 속뜻을 다시 확인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벨이라는 개인이 가인보다 더 사랑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내적 상태와 예배가 주님의 질서와 하나를 이루는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체어리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지 않고, 예배가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말합니다. 이것은 AC.349에서 밝힌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곧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는 원리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외적인 예배의 형식이 아무리 온전해 보여도 그 안에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이 없다면 그것만으로 살아 있는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외적인 예배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내적 생명으로 받아 그것을 표현한다면, 그 외적인 것 역시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그러므로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올바른 질서가 중요합니다.

 

AC.350-353은 바로 이 질서를 차례로 밝혀 왔습니다. AC.350은 ‘아벨’이 체어리티이고 ‘양 떼의 처음 난 것’이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이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개괄했습니다. AC.351은 체어리티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로 설명했고, AC.352는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습니다. AC.353은 ‘기름’이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하며,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AC.354의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말씀은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묶습니다. 아벨의 예배가 살아 있는 까닭은 체어리티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체어리티와 사랑의 생명이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표현도 조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보시고 기분이 좋아지시고 가인의 제물을 보시고 마음이 상하셨다는 식으로 인간의 변화하는 감정을 주님께 그대로 투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선은 변하지 않습니다. 차이는 인간이 그 사랑과 선을 어떤 상태에서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으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생명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아보심’과 ‘돌아보지 않으심’은 변하는 주님의 사랑보다 서로 다른 인간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과 아벨의 두 제물을 가르는 기준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 역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에게도 행위가 있었고 외적인 예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예배를 드렸느냐, 드리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더구나 곡식보다 동물 제물이 본질적으로 우월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AC.348-349에서 살펴보았듯 가인의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그의 ‘제물’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합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결국 두 제물을 가르는 것은 ‘무엇을 드렸는가?’보다 ‘그 예배가 어디에서 생명을 얻고 있는가?’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아벨의 예배를 인간의 공로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아벨에게 체어리티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 가인보다 더 훌륭한 예배를 만들어 주님께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AC.352가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고, AC.353도 ‘기름’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이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란 인간이 자기에게서 좋은 것을 생산하여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고 그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 선에 따라 살아가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을 행하지만 그 사랑과 선의 생명을 자기 proprium에 돌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다시 분명하게 해 줍니다.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읽으면서 반복해서 보았듯 스베덴보리의 요점은 ‘신앙보다 행위가 중요하다’거나 ‘신앙 대신 체어리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AC.353은 오히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을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배도 체어리티에 기초할 때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예배와 삶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하나의 생명 안에서 올바른 질서를 이루는가입니다.

 

AC.354는 바로 다음 AC.355로 넘어가기 직전의 중요한 경계이기도 합니다. 창4:4에서는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라고 했고, 창4:5에서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이어집니다. 따라서 AC.354에서 먼저 ‘돌아보심’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다음에 나오는 ‘돌아보지 않으심’을 주님의 거절이나 편애로 오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벨에게는 체어리티에 기초한 살아 있는 예배가 있고, 가인에게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가 있습니다. 말씀은 이 두 내적 상태의 차이를 ‘돌아보셨다’와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표현으로 드러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돌아볼 때도 AC.354는 매우 간단하면서 깊은 기준을 줍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읽고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며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은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외적 예배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그릇이 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수록 자기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게 되는지, 진리를 알수록 이웃의 참된 선과 유익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지, 받은 은사와 지식을 자기 우월감보다 쓰임을 위해 사용하게 되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외적인 행위로 다른 사람의 내면을 판단하라는 기준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신앙과 예배를 주님 앞에서 살펴보는 기준입니다.

 

결국 AC.354는 AC.350-353의 긴 설명을 매우 단순한 한 문장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처음 난 것은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이며, 기름은 주님께 속한 천적인 사랑의 선입니다. 그러므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체어리티가 되고, 그 체어리티가 신앙과 행위와 예배에 생명을 주는 질서가 살아 있음을 뜻합니다. 참된 예배의 생명은 외적인 형식 자체에도, 인간 자신의 경건이나 공로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어 신앙과 예배 속에 살아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아벨의 제물이 표상하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AC.355,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 - 체어리티가 떠날 때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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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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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창4:4)

 

AC.350

여기서 ‘아벨’(Abel)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양 떼의 처음 난 것’(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은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기름진 것’(fat, ‘기름’)은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음을 뜻합니다. By “Abel” here as before is signified charity; and by the “firstlings of the flock” is signified that which is holy, which is of the Lord alone; by “fat” 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also is of the Lord; and by “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in charity, were well-pleasing to the Lord.

 

해설

AC.350은 창4:4의 아벨의 제물을 개괄하면서 바로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 정반대의 예배를 보여 줍니다. AC.346-349에서는 가인의 ‘땅의 소산’과 ‘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은 행위’이고,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 역시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진 예배가 아닙니다. 이제 아벨의 제물에서는 그 반대편이 나타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양 떼의 처음 난 것’은 주님께만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진 것’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은 단순히 가인의 것보다 더 좋은 물질을 드린 제사가 아니라 체어리티에 기초한 살아 있는 예배를 표상합니다.

 

먼저 ‘아벨’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벨을 단순히 ‘착한 사람’, 가인을 ‘나쁜 사람’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그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할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두 형제의 제물은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두 개인이 서로 다른 물건을 하나님께 바친 사건의 차원을 넘어, 서로 다른 내적 근원에서 나오는 두 종류의 예배를 보여 줍니다. 가인의 예배에는 외적 행위와 제물이 있었지만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었고, 아벨의 예배는 체어리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곡식과 양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거룩한가가 아니라 그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내적 생명이 무엇인가입니다.

 

‘양 떼의 처음 난 것’에서 스베덴보리는 ‘처음 난 것’이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곧바로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이 짧은 말은 AC.350 전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참된 선과 사랑과 체어리티가 있다면 그 근원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거룩함을 생산하여 그것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행하면서, 그 선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처음 난 것’을 드린다는 것은 인간의 공로를 드러내는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거룩함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선을 행하면서 ‘내가 선하다’고 자기에게 돌리는 것과, 마치 자기에게서 행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면서도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기름진 것’은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다시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처음 난 것’의 거룩함도 주님의 것이고 ‘기름진 것’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도 주님의 것입니다. 천적인 것은 이 문맥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 속한 선이라는 중심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그 기름진 것을 드렸다는 것은 단순히 가장 좋은 부분을 골라 바쳤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배의 내적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는 거룩함과 사랑의 선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도 자연적인 제물의 품질보다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이 중심입니다.

 

이것은 AC.349의 핵심 원리와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곧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AC.350의 아벨의 제물은 바로 그 원리를 보여 줍니다. 외적으로는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기름진 것을 드리지만, 그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체어리티와 천적인 선이며 그 모든 것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를 서로 대립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담고 표현하는 그릇이며, 내적인 것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을 때 그 외적인 예배 역시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문제는 외적인 예배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외적인 것 안에 무엇이 살아 있는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말씀도 이 질서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어떤 종류의 제물을 보시고 마음이 바뀌어 아벨에게는 호의를 보이시고 가인에게는 호의를 거두셨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선은 변하지 않습니다. 차이는 주님 쪽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 쪽의 받아들임에 있습니다.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라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생명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특히 원문의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all worship grounded in charity)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예배를 드린 뒤 별도로 추가하는 선행 하나가 아닙니다.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내적 토대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이웃에게 착하게만 하면 예배나 신앙은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체어리티 자체도 주님에게서 오며, 진리는 무엇이 참된 선이고 참된 이웃 사랑인지를 가르칩니다.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이 결합되고 그것이 외적인 예배 안에서 표현될 때 예배는 살아 있게 됩니다. 따라서 AC.350은 신앙을 체어리티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의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둘 다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으므로 차이는 ‘예배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체어리티에 기초하여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창4:3-4를 곡식 제사와 동물 제사의 우열로 읽는 것은 속뜻의 중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곡식과 첫 열매 역시 거룩한 제물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양고기를 곡식보다 좋아하셨기 때문에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두 제물의 차이는 물질에 있지 않고 그것들이 표상하는 내적 상태에 있습니다.

 

AC.348-350을 함께 놓으면 이 질서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을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습니다. AC.349에서는 외적인 예배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50에서는 아벨의 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합니다. 다만 이것을 ‘체어리티 → 행위 → 예배’라는 기계적인 세 단계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과 행위와 예배가 모두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과 살아 있는 행위와 살아 있는 예배의 생명은 서로 다른 세 근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예배에도 직접적인 자기 성찰의 기준이 됩니다. 예배의 형식과 말씀의 정확성, 기도와 찬송, 헌금과 봉사는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 자신의 의와 경건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예배는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와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하기보다 그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게 하고, 자기 안의 악을 살펴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을 드린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무엇인가 특별한 종교적 행위를 더 많이 드린다는 뜻보다 내가 가진 선과 사랑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고 그 선에 따라 살아가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350의 중심은 ‘왜 아벨의 제물을 주님께서 받으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아벨이라는 개인을 편애하셨기 때문도 아니고, 양의 제물이 땅의 소산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양 떼의 처음 난 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진 것’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의 질서와 합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와 거룩함과 천적인 선의 근원 역시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를 가르는 가장 깊은 차이이며, 동시에 살아 있는 예배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AC.350의 핵심입니다.

 

 

 

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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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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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6 심화

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이 대목은 AC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동물 제사는 좋아하시고 농산물 제사는 싫어하신 것인가?’ 그러나 AC.326의 초점은 제물의 물질적 종류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두 제물의 차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의 AC.325에서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표상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 역시 각각의 내적 상태에서 나오는 예배를 나타냅니다.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이고,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차이는 먼저 ‘무엇을 가져왔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가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성경이 단순히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지 않고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며, 반대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말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배와 예배자의 내적 상태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드리는 외적인 행위만 따로 떼어 놓고 그것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예배 안에 어떤 사랑과 의도가 있으며, 그 사람의 삶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가 함께 관련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까닭을 ‘그가 덜 좋은 물건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26이 직접 제시하는 이유는 그 예배가 ‘분리된 신앙’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신앙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신앙이 자기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것이 문제입니다. 반대로 아벨의 예배가 받아들여진 것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셔서 그의 예배를 임의로 거부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습니다. 달라진 것은 인간 편의 상태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여 결합하는 질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받지 않으셨다’는 말씀은 변덕스러운 하나님의 감정이라기보다 인간의 내적 상태와 영적 질서의 문제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예배에도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주일의 예배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서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찬송하지만 일상에서는 알고 있는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이웃의 선을 외면한다면, 외적인 예배 형식만으로 그 분리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일상에서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려고 힘쓰며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고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는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그 삶과 예배는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착하게 살기만 하면 신앙이나 교리는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문제는 진리와 선 가운데 어느 하나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함께 있어야 할 것들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게 하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삶 안에서 선으로 살아 있게 합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정확한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떼어 놓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창4:3-5에서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단순히 두 종류의 제물이 아니라 두 종류의 예배이며, 더 깊게는 그 예배가 나오는 두 가지 내적 상태입니다. 하나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AC.325에서 시작된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AC.326에서는 이렇게 ‘예배의 분리’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창4의 이야기는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가인은 자신을 돌아보거나 사랑과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기보다 분노하고 안색이 변합니다. 따라서 다음 AC.327부터는 ‘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창4의 비극은 이제 내적인 분리에서 예배의 분리로, 그리고 다시 분노와 체어리티에 대한 적대로 깊어져 갑니다.

 

 

 

AC.326, 창4:3-5, 가인의 제물, 아벨의 제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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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3-5)

 

AC.326

각각의 예배가 묘사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가인의 제물’(offering of Cain)로, 체어리티의 예배는 ‘아벨의 제물’(offering of Abel)로 묘사됩니다. (3-4절)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는 받아들여졌으나,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4-5절) The worship of each is described, that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by the “offering of Cain”; and that of charity, by the “offering of Abel.” (verses 3–4) That worship from charity was acceptable, but not worship from separated faith. (verses 4–5)

 

해설

AC.326은 앞의 AC.325에서 제시된 ‘가인’과 ‘아벨’의 의미를 이제 예배의 문제로 발전시킵니다. AC.325에서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단지 두 가지 교리적 상태로 머물지 않고 각각 그 상태에 맞는 예배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창4:3-4에서 가인도 제물을 드리고 아벨도 제물을 드립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여호와께 예배드리며 둘 다 제물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AC.326은 그 차이가 제물의 외적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worship from charity)입니다. 참된 예배는 단순히 예배의 형식이 바르고 교리가 정확하며 기도와 찬송과 헌물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참된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배의 내적 생명이 중요합니다. AC.326에 따르면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예배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외적인 예배 안에 생명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주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거나 예배 자체를 거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립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도 얼마든지 종교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고 예배를 드리며 교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다면 그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 역시 그 분리를 그대로 품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는 말씀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두 사람이 가져온 물건을 비교하여 하나는 좋아하시고 다른 하나는 싫어하셨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속뜻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땅의 소산’과 ‘양의 첫 새끼’라는 물질적 차이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각각 어떤 내적 예배를 표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를,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받으셨다’와 ‘받지 않으셨다’는 표현도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호의를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임의로 등을 돌리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인간 편의 상태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결합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따라서 차이는 주님의 사랑이 달라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제물’은 오늘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게 하는 매우 엄중한 표상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물을 드리면서도, 그 신앙을 실제 이웃 사랑과 삶에서 분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고 어떤 진리를 알고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는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가’, ‘나의 신앙은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나타나는가’와 완전히 분리된다면,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에서 가인의 원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AC.326을 ‘교리와 신앙은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도록 인도하고, 그 진리는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 안에서도 신앙과 체어리티는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AC.326은 ‘아벨의 제물’을 단순히 체어리티라고 하지 않고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배와 삶을 분리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예배의 내적 생명은 예배 시간에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평소에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고,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려 할 때 그 삶의 체어리티가 기도와 찬송과 말씀을 듣는 외적 예배 안에도 들어갑니다. 예배의 내적 질은 삶의 방향과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26은 창4의 비극이 깊어지는 두 번째 단계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사랑과 신앙 사이에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AC.326에서는 그 내적 분리가 예배에 나타납니다. 겉으로는 가인도 아벨도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지만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의 예배는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입니다.

 

심화

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AC.326 심화 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AC.326 심화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이 대목은 AC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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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창4:1-2, 가인과 아벨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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