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hid from thy faces)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얼굴’(faces of Jehovah)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이며,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의 ‘얼굴’(faces)은 신앙의 선들을 의미합니다. That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faces of Jehovah.” The “face of Jehovah,” as before said, is mercy, from which proceed all the goods of the faith of love, and therefore the goods of faith are here signified by his “faces.”

 

해설

AC.387은 창4:14의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리니’라는 말을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그 근거를 ‘여호와의 얼굴’의 상응에서 찾습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를 의미하며,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얼굴’이라는 한 상응어를 설명하는 짧은 문장이면서도,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주는 번호입니다.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표현에서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며, 얼굴을 사람에게 향하시거나 돌리시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이시며 자비이십니다. 따라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어느 순간 자비를 거두시고 가인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이 그 자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저주’를 설명하면서 계속 지켜 온 원리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과 거짓으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섭니다. 태양은 계속 빛을 비추고 있지만 사람이 등을 돌리거나 문을 닫으면 어둠 가운데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이것은 이해를 위한 비유일 뿐이지만,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상태가 주님의 자비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그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라는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AC.387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여호와의 얼굴이 자비일 뿐 아니라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번 번호에서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참된 선의 근원을 사람 자신에게 두지 않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여호와의 얼굴, 곧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사람이 선을 의도하고 행한다고 해서 그 선의 최초 근원이 인간의 proprium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자기 삶에서 의지하고 행할 때 그것이 사람 안에서 신앙의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종교적인 위로가 사라졌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훨씬 깊게는 신앙에 생명을 주는 선의 근원과의 결합을 잃은 상태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두려 했으며,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표상된 체어리티의 소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체어리티를 제거한 결과는 신앙만 깨끗하게 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고, 결국 그 선의 근원이신 주님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랑의 신앙’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신앙은 사랑과 독립하여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이 참된 신앙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이라는 표현은 신앙과 사랑을 두 개의 독립된 것으로 놓은 뒤 나중에 결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신앙 자체가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그 신앙 안에서 선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주장했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과 정반대입니다.

 

AC.386과 AC.387을 나란히 놓으면 창4:14의 두 표현도 아름답게 대응합니다. ‘지면에서 쫓겨남’은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진리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선의 측면입니다. 결국 가인의 길은 진리만 잃는 것도 아니고 선만 잃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결과 선과 진리 모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어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는 설명은 바로 이 두 가지 분리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85-387의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고,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앙의 선에서 분리되자,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유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킬 위험에 놓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하나의 교리적 오류가 점차 인간의 영적 생명 전체를 흔드는 결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을 주님의 거절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바로 다음 전개가 그것을 더욱 분명히 보여 줍니다. 가인은 주님의 얼굴에서 숨겨졌다고 느끼고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만, 주님은 그를 완전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어 보존하십니다. 주님의 얼굴이 자비라는 AC.387의 선언은 이후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인간이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어도 주님의 자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AC.384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한 것도 여기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 선의 근원이 가인 자신에게 있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가 모든 선의 근원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가인에게 아직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온 것이며, 주님께서는 악과 거짓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하도록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의 가인의 표를 단순한 형벌의 완화가 아니라 주님의 보존 섭리와 연결하여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AC.387의 중심은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는 짧은 선언에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단지 주님을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에서 흘러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반대로 그 얼굴에서 숨겨진다는 것은 주님의 자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그 자비에서 나오는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비극은 주님께서 자비를 거두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함으로써 그 자비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앙의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데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가인에게도 주님은 보존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것이 곧이어 나타날 ‘가인의 표’를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준비가 됩니다.

 

 

 

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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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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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떨어짐’(falling)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얼굴은 내적인 것들을 의미했는데,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하여 빛나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얼굴이 내적인 것들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이어서, 누구든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가 어떤 성품과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얼굴로는 한 가지를 나타내면서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일을 괴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가장과 기만은 당시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러므로 내적인 것들이 ‘얼굴’로 의미되었습니다. 체어리티가 얼굴에서 빛날 때에는 얼굴이 ‘들렸다’(lifted up)고 하였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얼굴이 ‘떨어졌다’(fall)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말씀에서처럼 주님께서도 사람을 향하여 ‘그 얼굴을 드신다’(lifts up his faces upon man)고 표현됩니다. That by the “faces falling” 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face” and of its “falling.” The face, with the ancients, signified internal things, because internal things shine forth through the face; and in the most ancient times men were such that the face was in perfect accord with the internals, so that from a man’s face everyone could see of what disposition or mind he was. They considered it a monstrous thing to show one thing by the face and think another. Simulation and deceit were then considered detestable, and therefore the things within were signified by the face. When charity shone forth from the face, the face was said to be “lifted up”; and when the contrary occurred, the face was said to “fall”; wherefore it is also predicated of the Lord that he “lifts up his faces upon man,” as in the benediction (Num. 6:26; and in Ps. 4: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6)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4:6)

 

이 말씀들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굴이 ‘떨어진다’(face falling)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예레미야에서 알 수 있습니다. by which is signified that the Lord gives charity to man. What is meant by the “face falling,” appears from Jeremiah: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2)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 for I am merciful, saith Jehovah. (Jer. 3:12)

 

‘여호와의 얼굴’(face of Jehovah)은 자비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향하여 ‘그 얼굴을 드신다’(lifts up his face)는 것은 자비로 그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반대가 얼굴을 ‘떨어뜨리는 것’(makes the face to fall), 곧 인간의 얼굴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The “face of Jehovah” is mercy, and when he “lifts up his face” upon anyone, it signifies that out of mercy he gives him charity; and the reverse when he “makes the face to fall,” that is, when man’s face falls.

 

해설

AC.358은 창4:5의 ‘안색이 변하니’를 설명합니다. 개역개정의 ‘안색이 변하다’는 자연스러운 번역이지만,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표현은 훨씬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faces falling’, 곧 ‘얼굴이 떨어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먼저 왜 ‘얼굴’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얼굴이 ‘들리는 것’과 ‘떨어지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로 앞 AC.357에서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AC.358은 그 결과를 한 단계 더 깊이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떠나자 단순히 감정 하나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들’ 자체가 변했고, 그것이 ‘얼굴이 떨어졌다’는 말씀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고대인들에게 ‘얼굴’이 내적인 것들을 의미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하여 빛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태고교회 사람들은 얼굴과 내적인 것이 완전히 일치하여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어떤 성품과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이 표정을 잘 읽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천적 상태에서는 내적 사랑과 외적 표현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분리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얼굴로는 한 가지를 나타내면서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가장과 기만’을 괴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날의 사회생활에 그대로 적용하여 속에 있는 감정을 무엇이든 얼굴과 말로 드러내야 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감정을 절제하는 것과 상대를 속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된 모습을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거듭남의 목표도 악한 속마음을 그대로 외부에 표출하여 속과 겉을 일치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면 자체를 변화시키셔서 속에서 선을 사랑하고 겉에서도 그 선을 행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이 배경에서 ‘얼굴이 들린다’와 ‘얼굴이 떨어진다’는 표현의 의미가 열립니다. 체어리티가 얼굴에서 빛날 때에는 얼굴이 ‘들렸다’고 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얼굴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단순히 화가 나서 얼굴빛이 어두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가인의 진행 과정이 보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가 생기며,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납니다. 이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가 분노로 드러나고, 이제 그 결과 내적인 것들이 변합니다. 곧이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이러한 내적 변화가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의 소멸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 줍니다.

 

민6:26과 시4:6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분명해집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자연적인 의미에서 ‘얼굴을 든다’고 하면 자신감이나 당당함을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서는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인간의 얼굴이 참으로 들리는 것은 자기 사랑으로 자신을 높일 때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그의 내적인 것들 안에 받아들여져 그것이 외적인 삶을 통하여 빛날 때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기도 역시 주님께서 우리를 외면하고 계시다가 마음을 바꾸어 다시 바라봐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가 받아들여 그것이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렘3:12은 같은 사실을 반대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개역개정은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표현은 문자적으로 ‘내 얼굴을 너희에게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라’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얼굴’과 ‘자비’를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간결하게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이고, 얼굴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그 반대의 외관을 나타냅니다. 민6:26과 시4:6, 렘3:12은 서로 따로 떨어진 증거 구절들이 아니라 ‘얼굴’, ‘자비’, ‘체어리티’, ‘들림과 떨어짐’의 상응을 하나로 밝혀 주는 인용들입니다.

 

여기서 바로 앞 AC.357의 ‘여호와의 진노’와 동일한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AC.357에서는 말씀에서 여호와께 분노와 진노가 돌려지지만 실제 분노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가운데 주님의 질서에 반발할 때 마치 주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처럼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AC.358에서도 주님의 얼굴 자체가 실제로 들렸다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떤 때에는 자비로운 얼굴로 인간을 바라보다가 인간이 잘못하면 노한 얼굴로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그 반대가 얼굴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한 뒤 곧바로 ‘곧 인간의 얼굴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이며 그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그의 내적인 것들이 달라집니다.

 

이 점은 가인의 경우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주님께서 먼저 가인에게 얼굴을 떨어뜨리셨기 때문에 가인의 얼굴이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그 체어리티에 반발합니다. 따라서 한쪽에는 ‘주님께서 얼굴을 드심’, 곧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시는 끊임없는 신적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인간의 얼굴이 떨어짐’, 곧 그 체어리티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내적인 것들이 변하는 상태가 있습니다. 이 대비를 붙들면 ‘하나님께서 왜 가인을 외면하셨는가?’라는 질문의 방향도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랑을 거두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질서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AC.358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의 얼굴과 내면의 일치를 설명하는 것도 이런 점에서 중요합니다. 다만 여기서 ‘태고교회 전체가 이 지점에서 곧바로 속과 겉이 완전히 분리된 인간 상태로 바뀌었다’고 너무 크게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58이 직접 말하는 것은 고대인들에게 얼굴이 내적인 것을 의미했던 이유와 태고시대의 특별한 상태입니다. 가인은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무너져 가는 특정 계열과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 체어리티가 떠남으로 내적인 것들이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이후 태고교회의 쇠퇴 과정과 연결되지만, 이 한 번호만으로 당시 모든 사람의 내적·외적 상태를 동일하게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얼굴’의 상응은 거듭남을 생각할 때에도 아름다운 방향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그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내적인 것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변화하고, 그 선이 말과 행동과 관계와 일상의 쓰임을 통하여 외적으로 나타납니다. 태고교회에서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하여 빛났듯이, 거듭나는 인간에게서도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은 외적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선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proprium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인간의 얼굴이 ‘들리는’ 것도 결국 자기 힘으로 자신을 높인 결과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를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결국 AC.358의 핵심은 ‘얼굴은 내적인 것들이 빛나는 자리’라는 데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있을 때 얼굴은 들리고, 체어리티가 떠날 때 얼굴은 떨어집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이며, 주님의 얼굴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얼굴, 곧 인간의 내적인 상태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안색이 변함’은 단순한 표정 변화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57이 ‘분노’를 통하여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보여 주었다면, AC.358은 그 결과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그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고 말씀하십니다. 내적인 것들이 이미 변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주님의 부르심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 (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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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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