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proprium의 본질과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는 교회의 사람은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그러한 proprium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라고 한 것입니다. That by “a help as with him” is signified man’s own, is evident both from the nature of this own, and from what follows. As however the man of the church who is here treated of was well disposed, an own was granted him, but of such a kind that it appeared as it were his own, and therefore it is said “a help as with him.”

 

해설

AC.140은 AC.138에서 제시한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proprium에 관한 매우 중요한 구별이 처음 나타납니다. 여기서 다루는 교회의 사람은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지만, 그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실제로 소유하는 자기 생명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이었습니다.

 

이 설명은 AC.139의 마지막 문장과 직접 이어집니다. 태고교회의 이 후손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인간으로 ‘혼자 거하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욕구에는 이미 악의 방향이 들어 있었지만, AC.140은 이들이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지금 다루는 상태를 완전히 타락한 인간의 상태로 앞당겨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당시 상태에 맞는 proprium을 허락하십니다.

 

그 proprium의 성격을 보여 주는 핵심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이라는 표현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것으로 경험되는 어떤 것이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주님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서 AC.124에서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이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AC.135에서도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0은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 자체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성격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이로써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과 ‘나는 이것을 내 것으로 느끼며 살아간다’는 인간의 경험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할 중요한 실마리가 생깁니다.

 

이 점에서 ‘그를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이 표현의 모든 세부를 풀지는 않지만, 적어도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인지는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과 별개의 독립적인 생명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의 초점은 인간에게 주님과 경쟁하는 또 하나의 생명 근원이 생겼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인간이 자기의 것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상태가 어떻게 허용되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AC.122부터 계속되어 온 ‘주님의 것’과 ‘자기의 것’의 문제에도 중요한 빛을 던집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의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을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요구를 단순히 끊어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것으로 느끼는 것’과 ‘실제로 자기에게서 생명이 나온다고 믿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이제 조금씩 볼 수 있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proprium을 해석할 때 특히 중요합니다. 인간이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행한다’고 느끼는 것 자체를 곧바로 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140에서 다루는 사람은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게도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에게 자기의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의 근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있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 구별의 전체 의미는 이어지는 설명을 더 읽은 뒤 확정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AC.140은 AC.132에서 시작된 ‘허락된 proprium’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합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은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실제적인 자기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인간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의 삶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관계가 앞으로 갈빗대와 여자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 어떻게 더 밝혀지는지를 계속 따라가야겠습니다. (AC.140)

 

 

 

AC.141, 창2:18, ‘육체적·영적·천적 인간의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인간의 proprium에 관해서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그것

bygrace.kr

 

AC.139, 창2:18, ‘혼자 거하다 -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천적 인간의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39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 있던 사람들을 ‘혼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re adjoined to the man’s own, so that they appear as a one (verse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해설

AC.135는 창2:24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의 속뜻을 미리 요약합니다. AC.132-134에서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으며, 마침내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는 과정이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AC.135에서는 그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지가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proprium이 주어졌다고 해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앞의 AC.124에서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고, AC.129에서는 출발점이 주님이면 생명이고 자기 자신이면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진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을 갖게 된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AC.135는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된다고 말합니다.

 

특히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는 표현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영적 생명과 인간의 proprium이 그 근원에서 실제로 하나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사랑하고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경험됩니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밝혀 온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인간이 자기의 것으로 느끼는 삶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이 점에서 AC.135는 ‘허락된 proprium’이라는 AC.132의 표현도 조금씩 이해하게 합니다. 만일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진다는 것이 단순히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면, 이어서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된다는 설명은 나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자기의 것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이 주어지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거기에 결합됨으로써 인간에게는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가 형성됩니다. 다만 이 결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아직 이 한 문장만으로 더 나아가 규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 때문에 창2:24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도 이 문맥에서는 먼저 자연적인 부부의 결합을 넘어 인간의 proprium과 천적·영적 생명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앞에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것이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것을 묘사한다고 했으므로, 이제 ‘한 몸’이 되는 것은 그 proprium에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인 각 표현의 상응은 이어지는 번호에서 설명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 전체 구조만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AC.135는 또한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을 엽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행한다’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AC.135의 표현을 따르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이 가능하다고 이해할 여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자유와 책임의 관계까지 여기서 완성해서 설명하기보다는, 현재 본문이 직접 말하는 범위 안에서 그 가능성만 열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AC.135는 proprium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한 문장을 제공합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별도의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오며, 그것들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인간에게는 하나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창2:24를 해설하면서 중요한 것은 ‘하나가 된다’는 말만이 아니라 ‘하나처럼 보인다’는 스베덴보리의 섬세한 구별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AC.135)

 

 

 

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이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bygrace.kr

 

AC.134, 창2:18-25 개요,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다 -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짐’ (21-23절)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4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으로부터 매우 분명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자신을 포도원을 만들고 그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농부들에게 세로 준 집주인에 비유하셨습니다. (마21:33) That wisdom, intelligence, reason, and knowledge [scientia] are not of man, but of the Lord, is very evident from all that the Lord taught; as in Matthew, where the Lord compares himself to a householder who planted a vineyard, and hedged it round, and let it out to husbandmen (21: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21:33)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nd in John: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16:13, 14) The Spirit of truth shall guide you into all truth; for he shall not speak of himself, but what things soever he shall hear, he shall speak; he shall glorify me, for he shall receive of mine, and shall declare it unto you (John 16:13–14).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3:27) A man can receive nothing except it be given him from heaven (John 3:27).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은 천국의 아르카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That this is really so is known to everyone who is acquainted with even a few of the arcana of heaven.

 

해설

AC.124는 앞의 AC.121-123에서 설명한 천적 질서의 근거를 주님의 말씀에서 확인합니다. AC.121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어 AC.122와 AC.123에서는 천적 인간이 이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24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말씀에서도 분명하다고 합니다.

 

먼저 마21:33의 포도원 비유가 인용됩니다. 집주인은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른 뒤 그것을 농부들에게 맡깁니다. 이 인용에서 중요한 것은 농부들이 포도원의 주인이 아니라 맡아 경작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바로 AC.122의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는 것’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주님께서 주신 것들을 실제로 받아 사용하고 돌보지만, 그것들의 최초 소유자는 아닙니다. 포도원을 맡은 농부가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주장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자기 안에 있는 지혜와 지성과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요16:13-14의 ‘진리의 성령’에 관한 말씀은 이 원리를 더욱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는 표현에서 강조되는 것은 진리의 근원입니다. 진리는 독립적으로 자기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것을 받아 전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의 참된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님의 말씀으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요3:27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는 말씀은 AC.124의 논지를 가장 간결하게 압축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람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신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무기력한 존재로 만드는 설명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받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가 받는 참된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122의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말의 뜻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AC.124에서 말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사람에게 실제 지혜나 지성이나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21은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질서 있게 작용한다고 분명히 설명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사람 안에 실제로 있으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자기의 것으로 느끼며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과, 그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이 점은 AC.123의 세 종류의 인간에 관한 설명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영적 인간은 말씀으로부터 그것을 배워 인정하며,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깁니다. AC.124의 세 성경 인용은 그 가운데 영적 인간이 말씀을 통하여 배우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실제로 제시하는 셈입니다. 주님의 말씀 자체가 포도원의 주인이 누구인지, 진리가 어디에서 오는지, 사람이 가진 것이 어디에서 주어지는지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아르카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이것이 실제로 그러함을 안다고 말합니다. 이는 AC.123에서 천적 인간이 퍼셉션으로 아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결국 AC.121부터 AC.124까지의 흐름은 매우 일관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들어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에 이르고, 사람은 그것을 받아 실제로 누리고 사용하지만,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의 삶은 주님께 받은 것을 잃어버리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충만히 받아 사용하면서도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내적으로 인정하는 삶입니다. (AC.124)

 

 

 

AC.125, 창2:16,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다 -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알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모든 나무의 열

bygrace.kr

 

AC.123, 창2:15,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3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창2:15)

 

AC.122

‘에덴동산’(garden of Eden)은 앞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는 것’(till it and take care of it)은 그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By the “garden of Eden” are signified all things of the celestial man, as described; by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is signified that it is permitted him to enjoy all these things, bu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because they are the Lord’s.

 

해설

AC.122는 창2:15의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말씀의 속뜻을 매우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에덴동산’은 단순히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동산을 경작하고 지킨다는 것도 자연적인 농경 행위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 인간이 주님께 받은 모든 것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지를 나타냅니다.

 

앞의 설명들을 생각하면 ‘에덴동산’ 안에는 사랑과 지혜와 지성, 그리고 그로부터 질서 있게 이어지는 이성과 앎까지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AC.121에서는 그 생명의 질서가 ‘동쪽’이신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에 속한 앎들에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122에서 말하는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재산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의 생명과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해서 인간이 그것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에게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이 허락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지혜와 지성은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에 주어지고, 인간은 그것을 자기의 생명처럼 느끼며 살아갑니다. 천적 질서는 인간이 아무것도 느끼거나 행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충만히 누리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AC.122의 중심이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 안에 사랑과 지혜와 지성과 선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들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실제로 누리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따라서 ‘내 안에 있다’는 것과 ‘나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 사람 안에 있으므로 사람은 그것으로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이십니다.

 

이 점에서 ‘경작하며 지킨다’는 표현도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듯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실제 삶 가운데 사용합니다. 다만 그렇게 사용하면서 사랑과 지혜와 선을 자신의 독립적인 소유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간의 활동과 주님의 생명 사이의 질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실제로 경작하고 지키지만, 그가 경작하고 지키는 모든 생명의 것은 주님께 속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121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22는 그렇게 생명을 얻은 모든 것을 사람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받아 누리고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흐름의 출발점을 잊고 ‘이 지혜는 내 지혜이고, 이 선은 내 선이며, 이 생명은 나에게서 나온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천적 질서는 생명의 흐름뿐 아니라 그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질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킨다’는 말씀에는 천적 인간의 매우 근본적인 삶의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고 자기 것으로 빼앗지도 않습니다. 받아서 누리고, 실제 삶 가운데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소유하려 하지 않고, 주님의 것으로 받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에덴동산 안에서 살아가는 천적 인간의 질서입니다. (AC.122)

 

 

 

AC.123, 창2:15,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3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

bygrace.kr

 

AC.121, 창2:14, ‘천적 질서 -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지식까지’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1천적 질서의 본질, 곧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강들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