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7

교회 전체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마침내 신앙이 완전히 없어지는 데 이르며, 이때 그 교회가 ‘황폐해졌다’(vastated)고 합니다. 태고교회에서 가인파(Cainites)라 불린 사람들에게도 그러했고, 홍수 후 고대교회에도 그러했으며, 유대교회에도 그러했습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실 당시 유대교회는 이처럼 황폐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주님께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주님을 믿는 신앙에 관해서는 더욱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강림 후에 존재했던 초기 기독교회도 그러했으며, 오늘날에는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완전히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언제나 어떤 핵심(nucleus)이 남아 있으며, 신앙에 관하여 황폐해진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에서도 그러했습니다. 그 교회의 남은 부분(remnant)은 홍수 때까지 존속했고, 그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 교회의 남은 부분을 ‘노아’(Noah)라고 부릅니다. The state of a church in general is thus circumstanced. In process of time it departs from the true faith until at last it comes to be entirely destitute of faith, when it is said to be “vastated.” This was the case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among those who were called Cainites, and also with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s well as with the Jewish church.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this last was in such a state of vastation that they knew nothing about the Lord, that he was to come into the world for their salvation, and they knew still less about faith in him. Such was also the case with the primitive Christian church, or that which existed after the Lord’s advent, and which at this day is so completely vastated that there is no faith remaining in it. Yet there always remains some nucleus of a church, which those who are vastated as to faith do not acknowledge; and thus it was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of which a remnant remained until the time of the flood, and continued after that event. This remnant of the church is called “Noah.”

 

해설

AC.407은 앞의 AC.405-406에서 설명한 라멕의 황폐를 교회 전체의 역사라는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라멕은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며, 그가 사람과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황폐가 가인의 계보에서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날 때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황폐’(vastation)는 이번 문맥에서 교회가 참된 신앙을 잃어 마침내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황폐를 단순히 교회의 외적인 쇠퇴나 건물과 제도의 소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외적으로 존속하더라도 그 안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된 참된 신앙이 사라진다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는 황폐한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규모가 작아졌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회가 황폐해졌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이번 번호가 다루는 것은 교회의 내적인 신앙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황폐의 사례로 태고교회에서 가인파라 불린 사람들, 홍수 후 고대교회, 유대교회, 그리고 초기 기독교회를 차례로 언급합니다. 여기서 태고교회 전체와 가인파를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처음 사례로 지목하는 것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 가운데 ‘가인파라 불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계열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태고교회의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가인과 같은 상태였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 고대교회와 유대교회에 관한 언급도 같은 논지를 이어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처음의 참된 신앙에서 점차 떠나 황폐에 이르는 일이 여러 교회에서 반복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주님의 강림 당시 유대교회가 주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실 것을 알지 못했고 주님을 믿는 신앙에 관해서는 더욱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이 주님에 관한 동일한 지식과 태도를 가졌다는 역사적·사회적 일반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 기독교회에 관한 설명에서도 시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 후에 존재했던 초기 기독교회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에 이르렀으며, 자신의 시대에는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다고 진술합니다. 여기서 ‘오늘날’은 AC가 집필되던 스베덴보리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별도의 검토 없이 오늘날의 모든 기독교회와 모든 신자에 대한 현재적 사실 판단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교회의 황폐를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쇠퇴를 설명한 직후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nucleus)은 교회가 황폐해졌다고 해서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황폐해진 사람들은 그 핵심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들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교회의 남은 부분은 존속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황폐와 교회의 완전한 소멸을 동일하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이번 번호의 ‘핵심’(nucleus)과 ‘남은 부분’(remnant)은 서로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교회에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는다고 말한 뒤, 태고교회에서도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이 홍수 때까지 존속했고 홍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노아는 이번 문맥에서 단순히 홍수 이야기의 한 인물을 넘어, 황폐해진 태고교회로부터 보존되어 이어지는 교회의 남은 부분을 나타냅니다.

 

다만 여기서 ‘남은 부분’을 곧바로 개인의 거듭남에서 말하는 기술적 의미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번호는 교회 전체의 황폐와 그 가운데 보존되는 교회의 핵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 안에 보존되는 리메인스와 연결하여 생각할 여지는 있지만, 그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관련 AC 본문을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사용한 ‘핵심’과 ‘교회의 남은 부분’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살리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제 가인의 계보와 노아의 관계도 조금씩 드러납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라멕에게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역사는 그 황폐로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이 보존되어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며, 그 남은 부분이 노아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계보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노아로 이어지는 흐름은 교회의 황폐와 보존이라는 두 측면에서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참된 신앙에서 떠나 황폐해지더라도 주님께서는 교회의 모든 것이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새로운 교회로 이어질 수 있는 핵심을 보존하십니다. 물론 이번 번호는 그 핵심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보존되었는지, 홍수 이후의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 내용은 노아와 홍수에 관한 이어지는 AC에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황폐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남은 부분이 존속한다는 사실만큼은 이번 번호에서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따라서 AC.407을 읽을 때에는 교회의 황폐에 관한 진술만큼이나 그 뒤에 나오는 ‘그러나’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교회의 황폐를 열거한 뒤에도 교회에는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는다고 말합니다. 황폐해진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핵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남은 부분은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었고,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릅니다. 결국 AC.407은 한 교회의 쇠퇴를 설명하면서도, 그 쇠퇴를 넘어 계속되는 교회의 보존을 함께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AC.407 해설)

 

 

 

AC.408, 창4:19,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 아침이 밝는 이유 - 거룩한 것의 모독과 새로운 시작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 더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이전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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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6, 창4:19, ‘라멕은 왜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는가? -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라멕’(Lamech)이 황폐(vastation), 곧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뒤에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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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그리고 그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Cain)이라 하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a man Jehovah, ‘여호와인 사람’)라고 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신앙이 ‘날들의 끝에’, 곧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That by the “end of days” is signified in process of time, is evident to all. At first, and while there was simplicity in it, the doctrine here called “Cain” does not appear to have been so unacceptable as it became afterwards,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y called their offspring a “man Jehovah.” Thus at first faith was not so far separated from love as at the “end of days,” or in process of tim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every doctrine of true faith.

 

해설

AC.347은 바로 앞 AC.346의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을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분리가 한순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심해졌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처음에 그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이라 하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처음에는 신앙이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가인 해석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줍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지만, 그 분리가 처음부터 마지막 상태와 똑같은 정도였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구별하여 인식하는 방향이 시작되었지만, 처음에는 사랑과의 거리가 아직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거리가 더욱 벌어졌고, 결국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와 예배가 나타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단순함’(simplicity)을 단순히 지식이 적거나 사고가 미숙한 상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47의 문맥에서는 아직 신앙에 관한 교리가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강하게 세우면서 사랑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초기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이 초기 상태를 곧 ‘가인은 처음에는 온전한 참된 신앙이었다’고 표현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338에서 이미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AC.340에서도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꺼내어 구별된 교리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성격은 처음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다만 AC.347이 새롭게 알려 주는 것은 그 분리가 처음부터 최종적인 형태로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점차 심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구별’과 ‘분리’를 다시 정확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특히 후대의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신앙에 관한 교리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본래 질서를 잃고, 점차 사랑과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데 있습니다. AC.347의 표현을 빌리면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리 분리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간격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사랑과 체어리티에 의해 살아 있게 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충분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그 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밀어내는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은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합니다. AC.346에서는 이 말을 우선 단순하게 ‘시간이 흐른 뒤’라고 설명했습니다. AC.347은 이제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후대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분리가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창4:3에서 가인은 ‘땅의 소산’을 여호와께 제물로 가져옵니다. AC.346에서 이것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와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세월이 지난 후에’는 단순히 달력상의 어느 기간이 지나갔다는 사실만을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맥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상태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더 멀리 사랑에서 분리되었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초기 상태가 후대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근거로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했다는 사실을 듭니다. 이것은 앞의 AC.338과 AC.340에서 이미 자세히 살펴본 창4:1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표현을 근거로 ‘초기의 가인은 완전한 신앙이었다’고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신앙이 사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지지 않았고, 그들이 신앙에 속한 것을 주님과 관련하여 인식하는 상태가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상태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덩어리의 완성된 악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따로 인식하기 시작한 작은 분리가 있었고, 그 분리가 점차 깊어져 나중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멀리 떨어지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AC.347의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를 가인이라는 특정 교리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엄중한 경고입니다. 참된 교리는 처음부터 거짓이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에 속한 것을 담고 있는 교리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 본래의 사랑과 생명에서 점점 멀어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주님을 더 잘 알고, 말씀을 더 바르게 이해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돕기 위해 교리를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관심이 ‘이 진리에 따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누가 이 교리를 더 정확하게 알고 고백하는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교리가 자기 집단의 우월성을 증명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면, 교리의 문장은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의 성질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리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타락한다거나, 교리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보존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교리 그 자체보다 그것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참된 교리를 보존한다는 것은 문장을 정확하게 전승하는 것과 함께 그 교리가 지향하는 생명도 보존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정확하게 보존하면서도 그 교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리적 정확성을 지키는 일과 사랑을 지키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함께 가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보호하고 방향을 주며, 선은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이 원리는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경고가 됩니다. 처음 말씀을 배우거나 AC를 공부할 때에는 ‘주님을 더 알고 싶다’, ‘내 삶을 고치고 싶다’, ‘말씀의 속뜻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더 잘 따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이 쌓이고 익숙해지면서 어느 순간 관심이 ‘나는 이것을 안다’는 데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지식을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 자체가 거짓으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그 진리와 우리의 사랑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347은 다른 교회나 다른 시대의 교리 타락을 분석하는 도구가 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AC 번역과 해설 작업에도 이 원리는 매우 직접적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의 속뜻을 더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삶과 목회에 사용하기 위해 시작한 공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정확한 번역’, ‘정확한 상응’, ‘정확한 교리’를 갖추는 것 자체에만 만족하게 될 위험은 언제든 있습니다. 물론 정확성은 중요하며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정확성이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자기 안의 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44에서 말한 신앙의 목적을 놓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보존하는 일과 그 진리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을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결국 AC.347이 보여 주는 것은 ‘처음의 상태가 끝의 상태를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처음부터 후대와 똑같이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것으로 세우는 방향이 계속되면서 그 거리는 점점 커졌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후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가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앙의 생명을 한 번 얻고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진리는 계속 사랑을 향하고, 신앙은 계속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7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처음에 무엇을 믿었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내가 가진 신앙은 사랑과 더 가까워지고 있는가, 아니면 점점 멀어지고 있는가?’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짧은 표현 속에 바로 이 엄중한 자기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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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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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8/2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0, ‘전능왕 오셔서’, 찬90, ‘주 예수 내가 알기 전’입니다.

 

오늘부터 창4 절별 주석을 시작, 오늘은 그 첫 번째, 1절로 2절, AC 글 번호로는 338번에서 345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1-2)

 

제목은

 

가인과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38-345 요약입니다.

 

AC.338-345는 앞의 AC.324-337에서 제시된 창4 전체의 개요를 바탕으로, 이제 창4:1-2의 각 표현을 하나씩 풀어 가며 ‘가인’과 ‘아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본격적으로 밝히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는 태고교회를, 그들에게서 태어난 ‘가인’과 ‘아벨’은 그 교회 안에서 생겨난 신앙과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출생 이야기는 단순히 한 가정에서 두 아들이 태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내적 생명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떻게 구별되고, 마침내 서로 분리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338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인’이 처음부터 완전히 타락한 신앙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신앙’이라고 하며, 그것을 ‘가인’이라 부릅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신앙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안에 살아 있었기 때문에 사랑과 별개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바로 여기에서 ‘가인의 분리’가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이해할 때에는 ‘구별’과 ‘분리’를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특히 오늘날의 인간은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과정을 거칩니다. 문제는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랑 없이도 신앙 자체가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본래 사랑을 섬겨야 할 신앙이 사랑과 독립하여 자기 자리를 주장하기 시작할 때 가인의 길이 열립니다.

 

AC.339-340은 창세기 초기의 ‘잉태’, ‘출생’, ‘자손’, ‘아들’, ‘딸’, ‘이름’,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태고인들은 이름을 통하여 어떤 교회적·교리적 실재를 나타냈으며, 그것들의 관계를 자연적인 출생과 계보의 형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자연계에서 자녀가 부모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나듯이 교회 안에서도 하나의 교리와 상태가 다른 교리와 상태로부터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창4의 계보를 단순히 개인들의 생물학적 족보와 시간적 연속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이러한 출생과 계보를 통하여 교회의 영적 상태들이 서로 어떻게 생겨나고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러한 원리는 창4뿐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이어집니다. ‘아들’은 교회의 진리와 신앙에 속한 것을, ‘딸’은 선과 사랑에 속한 것을 나타낼 수 있으며, ‘낳다’와 ‘출생’은 새로운 교리와 교회적 상태가 생겨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단순히 첫아들이 태어났다는 의미를 넘어, 태고교회의 생명 가운데서 신앙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영적 변화를 묘사합니다. 바로 이 원리를 이해해야 이후에 이어지는 가인의 후손들과 창5의 계보 역시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교리의 연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341에서는 두 번째 자손인 ‘아벨’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벨’과 ‘형제’가 체어리티를 상징한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경쟁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형제’처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나중에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죽이는 사건이 아니라, 신앙이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마침내 소멸시키는 교회의 내적 비극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깊이 있다고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엇이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이며, 진리는 선을 향하고 선 안에서 살아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진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완전히 분리되면 겉으로는 여전히 신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그 안의 생명은 사라지게 됩니다.

 

AC.342-344는 ‘아벨은 양 치는 자였다’는 말씀을 통하여 체어리티의 성격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양 떼’는 선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며, ‘양 치는 자’는 그러한 선을 돌보고 행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벨이 양 치는 자였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단순한 감정이나 선한 의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선을 돌보고 행하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체어리티에는 이웃의 선을 바라보고, 그것을 보호하고,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내려는 삶이 들어 있습니다.

 

반대로 AC.345의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다’는 말씀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땅’은 교회를 의미하지만, 가인이 ‘땅을 경작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체어리티 없이 신앙만을 붙들면서 점차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행하는 ‘양 치는 자’인 반면,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낸 채 외적인 것에 머무는 ‘농사하는 자’가 됩니다. 이렇게 두 직업의 차이는 곧 두 교회적 상태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38-345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가인의 타락’이 처음부터 극단적인 악의 모습으로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출발점은 매우 미세했습니다. 참된 신앙을 버린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바라본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분리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은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주장하고, 결국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게 됩니다. 이후 창4에서 나타나는 가인의 분노와 안색의 변화, 그리고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바로 이 분리가 점차 심화된 결과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에도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내가 무엇을 믿는가?’가 아닙니다. ‘내가 믿는 진리가 내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있는가?’도 중요합니다. 진리를 알수록 주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자신의 악을 더 잘 보고 버리며,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게 된다면 그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수록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사랑보다 교리적 우월성과 승리를 앞세우게 된다면, 아무리 그 교리 자체가 참되더라도 그 안에서 ‘가인의 분리’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이러한 분리를 처음부터 강제로 막지 않으신 데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중요한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잘못된 방향을 원하시거나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십니다. 사랑과 체어리티는 강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보여 주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돌이킬 길을 마련하시지만 인간이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는 마지막 자리까지 대신 차지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과 동시에, 그 실패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회복의 길을 계속 마련하신다는 섭리를 함께 보여 줍니다.

 

결국 AC.338-345의 중심은 ‘가인은 신앙이고 아벨은 체어리티다’라는 단순한 대응에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입니다. 신앙은 본래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을 때에만 참된 신앙입니다. 가인은 그 결합이 처음 흔들리기 시작한 상태를, 아벨은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할 체어리티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양 치는 자’와 ‘농사하는 자’라는 대비를 통하여 두 길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한쪽은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고, 다른 한쪽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붙들면서 점차 외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향합니다.

 

따라서 이 구간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신앙이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가?’입니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를 마침내 우리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선과 결합시키는 역사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을 줄 때 둘은 다시 본래의 질서를 이루게 됩니다. 그때 신앙은 단순히 옳은 것을 알고 고백하는 신앙을 넘어, 실제 삶에서 선을 낳는 ‘신앙다운 신앙’이 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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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 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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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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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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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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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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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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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5, 창4:2,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농사하는 자’ 가인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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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보충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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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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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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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23(D1)

 

 

2665, 2, 창4.2, 2026-08-23(D1)-주일예배(창4,1-2, AC.338-345), ‘가인과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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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30, 창4:3-5, AC.346-358),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

※ 오늘(2026/08/3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1, ‘홀로 한 분 하나님께’, 찬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346번에서 358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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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16, 창4, AC.324-337), ‘가인과 아벨, 신앙과 체어리티에 관하여’

※ 오늘(2026/08/1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9,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 찬89, ‘샤론의 꽃 예수’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시작 전 먼저 창4 전체 개요를 살피는 ‘창4 본문, 개요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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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 심화

1.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미한다면, 무엇이 한 신앙을 가인으로 만들고 다른 신앙을 셋으로 만드는 것일까요? ‘신앙’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는 그 신앙의 질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인에게도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주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고, 그 분리된 상태는 점차 왜곡되어 마지막에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면 셋은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신앙’이며,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집니다. 따라서 셋으로 의미되는 신앙의 특징은 신앙 자체를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신앙을 사용하여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형성하실 수 있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AC.328에서 제시된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교리를 알고 있는지, 얼마나 정확한 신조를 고백하는지, 얼마나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만으로는 그 신앙의 내적 질을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이 실제로 어떤 사랑과 삶을 낳는지가 중요합니다.

 

다만 이 원리를 다른 사람의 내면을 판정하는 잣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외적 행동 몇 가지를 보고 그의 신앙 전체가 참인지 거짓인지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AC.328의 원리는 무엇보다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진리가 실제로 나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며, 주님의 뜻을 자기 뜻보다 앞세우게 하고,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를 단순히 외적인 선행의 양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내적 사랑이며, 외적인 행위는 그 사랑이 삶 속에서 나타나는 형식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의 차이는 ‘교리를 가진 신앙’과 ‘교리가 없는 사랑’의 차이가 아닙니다. 셋 역시 신앙입니다. 신앙과 진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진리가 선을 향하고 신앙이 체어리티의 형성을 향할 때 신앙은 자신의 참된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 점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긴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신다고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체어리티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신앙을 이용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며, 신앙의 진리는 주님께서 그 선을 인간 안에 형성하시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셋의 신앙도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AC.335는 ‘새로운 신앙이 주님에 의해 주어졌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가인의 실패 이후 인간이 스스로 더 나은 종교 체계를 만들어 셋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셨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말씀을 배우는 목적은 단지 더 많은 정보를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교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목적도 논쟁에서 이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생각을 바로잡고, 악을 보게 하며,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삶으로 이끄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사람을 더 교만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보게 하며, 자기 옳음을 지키는 도구가 된다면 그 방향을 경계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알수록 자신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의 자비를 더 의지하며, 이웃의 유익을 더 지혜롭게 구하게 된다면 그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안다는 사실 자체가 셋의 신앙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 지식이 자신의 영적 우월감을 키우면 가인의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고, 반대로 그 진리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더 의지하며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셋의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 안의 가인, 내 안의 셋’이라는 표현을 너무 문자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가인과 셋은 본래 태고교회 안의 서로 다른 교리적, 교회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우리는 그 속뜻에서 드러나는 영적 원리를 자신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표상과 개인적 적용을 구별하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셋의 새로운 신앙을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신앙 질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과 에노스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우선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셨다’는 AC.335의 직접 진술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AC.336에서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가 ‘에노스’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셋의 신앙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셋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셋의 목적은 에노스, 곧 체어리티가 심어진 새로운 교회적 상태로 이어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AC.335는 매우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 것은 신앙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크게 주장하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얼마나 살아 있게 하실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가인의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고,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는 길이 되었습니다. 둘 다 ‘신앙’이지만 그 생명과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표지는 신앙 자체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인간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실 수 있도록 올바른 질서 안에 놓이는 데 있습니다.

 

 

 

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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