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한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태초 또한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하는 시기를 포함하는데, 이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창조(a new creation)라고 합니다.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창조하다(to create), 짓다(to form), 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은 거듭나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각각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the beginning.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days of old[antiquitatis] and also thedays of eternity.Thebeginning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new creationof man. The expressions tocreate,toform,tomake,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내가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러므로 주님은 구속자(the 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the 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the Maker), 그리고 창조자(the Creator)라고 불리시는데, 같은 선지서에서,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redeemer,theformer from the womb,themaker,and also the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heaven) 거듭남 이전의 사람을, (earth)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있습니다. Thatheaven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earth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AC.16부터 스베덴보리는 창1:1의 각 표현을 본격적으로 풀기 시작합니다. 첫 표현은 태초(the beginning)입니다. 그는 먼저 태초가 태고, 곧 가장 오래된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선지서에서는 이를 옛날(the days of old) 또는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시간 개념 자체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AC.16에서 중요한 것은 이 태초가 문자적으로 먼 옛 시작을 가리킬 뿐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하는 첫 시기까지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에, 그에게도 하나의 새로운 시작, 곧 영적인 태초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창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앞의 AC.4에서 이미 창세기 1장이 사람의 새 창조, 곧 거듭남을 다룬다고 밝힌 것과 직접 연결됩니다. 1:1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의 시작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사람이 생명을 받는다는 말도 육체적 생명을 새로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매여 있던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영적 생명으로 깨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순한 성격 개선이나 종교적 습관의 보완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질서를 이루어 가시는 창조입니다.

 

이 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43:7을 인용합니다.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내가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여기서는 한 사람 또는 한 백성을 두고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라는 세 동사가 함께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이유는 선지서의 창조 언어가 단지 우주나 인간의 최초 창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주님께 속하도록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동시에 이 세 동사가 모두 같은 뜻으로 무의미하게 반복된 것이 아니라 각각 의미의 차이를 가진다고 밝힙니다. 다만 AC.16에서는 그 차이를 아직 자세히 풀지 않으므로, 여기서 세 동사를 임의로 세 단계에 정확히 배당하기보다는 말씀은 거듭남을 여러 측면에서 창조·형성·만듦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정도로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어지는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는 말씀은 새 창조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더욱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앞에서 주님을 구속자, 태에서부터 지으신 , 만드신 , 창조자라고 부른다고 설명한 뒤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창조자라는 호칭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으로 존재하게 된 사실만을 말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습니다. AC.16의 문맥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을 구속하시고, 형성하시고, 새롭게 만드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이 창조라면 그 창조자는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선택하며 순종하지만, 그 안에서 생명을 주시고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점이 이 인용의 핵심입니다.

 

102:18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는 말씀은 창조가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의 백성은 육체적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창조함을 받을 백성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이 표현은 사람이나 교회가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매우 적절한 증거가 됩니다. 이미 자연적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시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씀 안의 창조에는 최초의 물질적 창조를 넘어선 영적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롭게 된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것은 새 창조가 단순한 내면의 심리 변화가 아니라,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향하는 새로운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네 번째 인용인 시104:30은 이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기서는 창조새롭게 하다가 한 구절 안에서 나란히 나타납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16거듭남은 창조라는 설명과 매우 잘 맞습니다. 주님의 영이 보내어질 때 그들이 창조되고, 그 결과 지면이 새로워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붙드는 핵심은 주님의 생명과 역사가 사람을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시104:30주의 을 성령론 전체로 확대하거나 지면AC.16의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겉 사람과 반드시 일대일로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번호에서 이 구절이 담당하는 직접적인 역할은 창조가 곧 새롭게 함과 연결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 네 인용을 함께 놓고 보면 왜 스베덴보리가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창조라고 한다고 말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43:7에서는 사람이 창조되고, 지어지고, 만들어지며, 43:15에서는 주님이 창조자라고 불리시고, 102:18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백성이 다시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라고 불리며, 104:30에서는 주님의 영으로 창조됨새롭게 이 함께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네 구절은 따로따로 흩어진 증거가 아니라 하나의 논증을 이룹니다. 말씀의 선지적 언어에서 창조는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별도의 인용 구절 심화가 없어도 AC.16에서 왜 이 네 본문을 가져왔는지가 충분히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창1:1(heaven)(earth)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미리 예고합니다. 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는 겉 사람을 의미하며, 그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너무 앞서갈 필요는 없습니다. AC.16이 아직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속뜻에서 읽을 때, 우주 창조의 언어가 동시에 인간의 내적·외적 존재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질서 지어지는 거듭남의 언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AC.16의 중심은 간결합니다. 태초는 사람의 거듭남이 시작되는 첫 시기를 포함하고, 거듭남은 창조이며, 그 새 창조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제 이어지는 구절들은 그 새 창조가 속 사람과 겉 사람 안에서 어떤 질서로 이루어지는지를 하나씩 보여 주게 됩니다. (AC.16 해설)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심화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가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거듭남을 의미한다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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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AC.17-19),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 : 거듭남 이전 인간의 실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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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AC.15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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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해설

AC.15는 바로 앞 AC.14의 선언을 한 단계 더 깊게 합니다.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킬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15는 이에 대해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AC.14AC.15는 서로 떨어진 두 선언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집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장을 자신의 신학적 설명만으로 제시하지 않고 요14:6, 8-11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이 긴 인용의 핵심은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주님께서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대답하신 데 있습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안에 계신 을 믿으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이 AC.15에 인용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라는 선언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은 아버지를 주님과 떨어진 또 다른 신적 존재로 찾아서는 안 된다는 AC.15의 논지를 뒷받침합니다. 또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안에 계신다는 말씀은 두 분이 단순히 같은 목적을 가지고 협력한다는 정도를 넘어서는 하나 됨을 나타냅니다. 다만 AC.15는 여기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 전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단락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와 주님의 신적 인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이 짧은 번호 안으로 미리 끌어오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핵심, 곧 천국에서는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며 주님과 아버지가 하나이시라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14:6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도 같은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단지 아버지께 데려다주는 외적인 통로나 중간 단계이고, 그 뒤에 주님과 별도로 만나야 할 또 다른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AC.15의 인용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빌립에게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며,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계시고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심을 밝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함께 인용한 것은 인간의 시선을 주님 너머의 또 다른 아버지에게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안에서 아버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AC.15는 짧지만 이후 AC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세웁니다. AC.14주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에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답했다면, AC.15그러면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며,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계신다고 답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요14:6, 8-11을 길게 인용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후 거듭남과 천국과 말씀의 속뜻을 읽으면서 주님을 만날 때 우리의 시선을 그분과 아버지 사이에서 둘로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주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AC.15 해설)

 

 

 

AC.16, 창1:1, ‘태초와 거듭남의 시작 : 사람의 새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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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AC.14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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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천국 전체에서 그분만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시는데, 이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고 명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In the following work, by the name Lord is meant the savior of the world, Jesus Christ, and him only; and he is calledthe Lordwithout the addition of other names. Throughout the universal heaven he it is who is acknowledged and adored as Lord, because he has all sovereign power in the heavens and on earth. He also commanded his disciples so to call him, saying,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그리고 그분의 부활 후에 제자들은 그분을 주님(the Lord)이라 불렀습니다. And after his resurrection his disciples called himthe Lord.

 

해설

AC.14는 창세기 1장의 개별 표현을 해설하기에 앞서,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를 읽는 데 필요한 중요한 용어 하나를 분명히 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 그 이름이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한다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이후 AC를 읽다가 주님이라는 표현을 만나면 누구를 가리키는지 별도로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선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오직 그분만이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신적 존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 가장 높은 자리를 드린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AC.14가 직접 밝히는 것은 온 천국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받으신다는 사실이며, 그 이유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부와 성령의 관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곧 이어지는 AC.15와 이후 주님에 관한 가르침을 함께 보아야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선 주님이라는 이름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설명만으로 이 명칭을 정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13:13)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라고 부르는 것을 주님 자신이 옳다고 확인하신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부활 후 제자들이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덧붙입니다. 따라서 AC.14의 논지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분명합니다. 주님이라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며, 그 호칭은 주님 자신의 말씀과 제자들의 증언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AC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인간의 거듭남, 천국, 교회, 말씀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끊임없이 주님을 언급합니다. 그때마다 막연한 신적 원리나 이름 없는 절대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앞의 AC.7-13에서 거듭남의 여러 상태를 살펴본 직후 이 선언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그 모든 거듭남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 누구인지도 자연스럽게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AC.14는 짧지만 이후 전체 저작의 독법을 정해 주는 중요한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여러 중개자 가운데 한 분이 아니며, 온 천국이 인정하고 경배하는 주님이십니다. 다만 이 짧은 단락 하나에서 삼위일체와 주님의 신적 인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한꺼번에 끌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다음 AC.15에서 아버지와 주님의 하나 되심이 이어지고, 이후 관련 가르침들이 점차 펼쳐집니다. AC.14에서는 먼저 이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됩니다. 앞으로 AC에서 말하는 주님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AC.14 해설)

 

심화

1. 주님 예수 그리스도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 심화 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 심화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뜻한다고 말하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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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AC.15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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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창1 개요, ‘모두가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 거듭남의 현실’

AC.13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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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번째 상태까지만, 다른 이들은 번째, 번째, 혹은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르지만, 이렇게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 적고(few),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do not all arrive at this state. The greatest part, at this day, attain only the first state; some only the second; others the third, fourth, or fifth; few the sixth; and scarcely anyone the seventh.

 

해설

AC.13은 앞에서 설명한 거듭남의 여러 상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정도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짧게 덧붙입니다. 여기서 상태는 바로 앞 AC.12에서 설명한 여섯 번째 상태를 가리킵니다. 곧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며,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앞의 여섯 상태를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차례차례 통과하여 마침내 같은 지점에 도달하는 고정된 프로그램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을 사람들의 영적 수준을 판정하는 서열표처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다섯 번째 상태이고 사람은 번째 상태다라고 외적인 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AC.13의 목적이 아닙니다. 앞선 AC.7-12에서 살펴본 상태들은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는 것이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분류하기 위한 기준표가 아닙니다. 특히 외적으로 경건하게 말하거나 선을 행하는 모습만으로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알 수는 없습니다. AC.9에서도 이미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하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직 생명이 없는 상태가 있을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의 모양만이 아니라 그 행동이 어떤 내적 원리에서 나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13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일곱 번째 상태입니다. 그러나 AC.13 자체는 이 일곱 번째 상태가 무엇인지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의 흐름과 AC.12 마지막에서 사랑이 지배권을 얻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한 내용, 그리고 이어지는 창조의 일곱째 날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짧은 문장만을 근거로 일곱 번째 상태를 여러 영적 개념과 곧바로 동일시하여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상태가 깊어질수록 실제로 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왜 뒤의 상태로 갈수록 사람이 줄어드는지를 AC.13이 설명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인내하지 못해서인지, 시험이 어려워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를 이 번호만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13은 이유를 분석하기보다 단지 실제 상태의 차이를 짧게 알려 줍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at this day)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은 번째 상태에 있고, 어떤 사람들은 번째, 어떤 사람들은 번째, 번째, 다섯 번째 상태에 있으며,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말을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통계적 법칙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대부분, 적은 이들, 거의 아무도 없음이라는 표현 역시 정확한 비율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대부분이 번째 상태에 있다는 말을 곧바로 대부분의 신앙인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확대하는 것도 AC.13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말하는 거듭남의 여러 상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정도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AC.13은 매우 짧지만 앞의 AC.7-12를 읽는 방식에 중요한 균형을 잡아 줍니다. 창조의 날들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준다고 해서 그것을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같은 속도와 같은 깊이로 통과하는 일률적인 단계표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남으로 이끄시는 질서는 분명하지만, 실제 사람들의 상태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관심은 다른 사람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질서 있게 하고 계시는지를 살피는 데 있어야 합니다. AC.13은 거듭남의 높은 상태를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도록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거듭남이 얼마나 깊고 실제적인 주님의 역사인지를 겸손하게 바라보게 하는 짧은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3 해설)

 

심화

1. 일곱 번째 상태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 비교

 

AC.13, 심화 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AC.13.심화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수도원 전통에서 말해 온 ‘완덕’이나 ‘합일’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일곱 번째 상태’ 사이에는 분명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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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AC.14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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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창1 개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움직이는 영적 인간의 여섯 번째 상태’

AC.12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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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ing), 그리고 (day) 의미는 위의 5절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The meaning ofevening,ofmorning,and ofday,was shown above at verse 5.

 

해설

AC.26은 매우 짧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8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를 다시 길게 해설하지 않고, 저녁(evening), 아침(morning), (day)의 의미는 앞의 5절에서 이미 설명했다고만 말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역할은 새로운 의미를 추가하는 데 있지 않고, 첫째 날을 해설하면서 이미 세워 놓은 원리가 둘째 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앞의 AC.22에서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 곧 그늘이나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를 뜻하고, 아침은 그 뒤에 오는 상태, 곧 빛이나 진리와 신앙에 관한 지식의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것은 일반적으로 저녁, 주님께 속한 것은 아침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AC.23에서는 이 말씀에서 시간 자체를 나타내며, 그로부터 그 시간의 상태도 나타낼 수 있음을 여러 선지서의 용례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AC.26의 짧은 참조는 바로 앞에서 확정한 이 의미들을 다시 가져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을 읽는 데 중요한 점을 보여 줍니다. 첫째 날에 적용된 저녁, 아침, 의 속뜻이 둘째 날에 와서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1에서 창조의 날들이 이어질 때, 각 날의 구체적인 내용은 달라지지만 저녁, 아침, 이라는 표현은 앞에서 설명된 의미를 바탕으로 계속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그 뜻을 다시 설명하지 않고 5절 해설을 가리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AC.26은 바로 앞 AC.24-25와 연결해서 읽으면 자연스럽습니다. 둘째 날에는 궁창이 생기고,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이 구별되며,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고, 사람 안의 것들이 점차 질서 안에 놓이는 거듭남의 상태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의 끝에도 다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둘째 날 역시 단순한 자연계의 하루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저녁, 아침, 의 의미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다만 AC.26 자체가 모든 영적 성장은 반드시 혼란과 약화를 거쳐야 한다는 새로운 법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짧은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하려는 일은 훨씬 단순합니다. 독자가 이미 설명된 용어의 의미를 잊지 않고 계속 적용하도록 앞의 해설을 다시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AC를 읽을 때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설명했다고 할 때에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뜻을 만들어 내기보다, 먼저 그가 가리키는 앞의 설명으로 돌아가 그 의미를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AC.26의 핵심은 재확인입니다. 둘째 날의 저녁, 아침, 도 첫째 날에서 이미 밝혀진 속뜻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각 날은 서로 고립된 장면들이 아니라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로 이어지며, 같은 표현들은 앞에서 밝혀진 의미를 지니면서 다음 상태로 계속 나아갑니다. AC.26은 짧은 한 문장으로 그 연결을 놓치지 않도록 해 주는 번호입니다. (AC.26 해설)

 

 

 

AC.27, 창1:9, ‘물이 모이고 땅이 드러남 : 기억 속에 모인 진리와 겉 사람의 준비’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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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 창1:6-7, ‘하늘과 땅을 펴심 : 파괴가 아니라 굽힘으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땅을 펼치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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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 7)

 

AC.25

땅을 펼치고 하늘을 편다(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선지자들이 매우 흔히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사야에 보면, To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 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As in Isaiah: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없이 땅을 펼쳤고 (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am Jehovah that maketh all things,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lone, that spreadeth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또한 주님의 강림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And again, where the advent of the Lord is openly spoken of: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2:3)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 주님께서는 오류들을 꺾지 않으시고 욕정들을 끄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굽히십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that is, he does not break fallacies, nor quench cupidities, 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 and therefore it follows: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소산을 내시며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42:5) Jehovah God createth the heavens, and stretcheth them out; he spreadeth out the earth, and the productions thereof; he giveth breath unto the people upon it, and spirit to them that walk therein (Isa. 42:5).

 

이와 같은 뜻을 지닌 다른 구절들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해설

AC.25는 바로 앞 AC.24에서 설명한 궁창,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을 선지서의 언어를 통해 한 번 더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이 사람의 거듭남을 말할 때 땅을 펼치고 하늘을 편다는 표현을 매우 흔히 사용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하늘과 땅에 관한 설명 자체가 아니라, 창조의 언어가 사람의 재창조, 곧 거듭남을 말하는 데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하늘은 속 사람, 은 겉 사람과 연결되었으므로, 하늘과 땅을 새롭게 펴고 펼친다는 표현은 거듭남 가운데 사람의 내적·외적 질서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세워지는 것과 연결됩니다.

 

첫 번째로 인용되는 사44:24에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분이라고 하시면서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없이 땅을 펼쳤다고 말씀하십니다. AC.25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선지서의 표현이 사람을 지으시고 구속하시는 주님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구속자지은 라는 표현이 하늘과 땅을 펴시는 창조의 언어와 함께 놓임으로써, 창조의 언어가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를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주님의 단독 사역이라고 단순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생명과 능력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주님에게서 받은 자유 안에서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응답하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AC.25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사42:3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는 오류들을 꺾지 않으시고 욕정들을 끄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굽히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모든 오류와 욕정을 한순간에 강제로 제거하여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드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아직 오류와 욕정이 존재하는 그 사람의 현재 상태에서도 그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그를 점차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십니다.

 

여기서 굽히신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오류 자체를 조금씩 고쳐 마침내 진리로 만들고, 악한 욕정 자체를 정화하여 마침내 선한 사랑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짓은 진리가 되어야 할 재료가 아니며 악한 사랑은 그대로 천국적 사랑으로 발전하는 씨앗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은 처음에는 오류와 욕정의 영향을 받으면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끄시면서 점차 거짓에서 진리로, 악한 사랑의 지배에서 선한 사랑의 질서로 방향을 바꾸게 하십니다. AC.24에서 사람이 감각의 착각과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참되고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고 한 설명이 바로 이 대목과 연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사42:3 다음에 사42:5를 이어 인용합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소산을 내시며라는 표현은 다시 창조의 언어로 돌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AC.25가 여기서 호흡, , 소산 각각의 세부 상응을 해설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이 단락에서의 직접적인 논지는 주님의 강림을 말하는 같은 문맥 안에서 꺾지 않고 끄지 않으며 굽히심하늘을 펴고 땅을 펼치심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거듭남은 파괴를 통한 새 창조가 아니라,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주님께서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시면서 그의 내적·외적 질서를 새롭게 세우시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한 갈대꺼져가는 등불을 사람 안의 선과 진리에 일대일로 대응시켜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25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이 이미지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역사 방식입니다. 사람에게 아직 오류와 욕정이 남아 있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 사람을 강제로 꺾고 끄는 방식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현재 상태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점진성은 인간의 악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자유와 수용 능력을 따라 질서 있게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결국 AC.25가 선지서의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표현을 가져오는 이유는 창세기의 창조 언어와 인간의 거듭남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1에서 하늘과 땅이 질서를 찾아가는 모습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단번에 파괴하고 새것으로 대체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혼합되고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그의 자유 안에서 점차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굽히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를 새롭게 세워 가십니다. 이것이 AC.25가 보여 주는 하늘과 땅을 펴심굽히심의 거듭남입니다. (AC.25 해설)

 

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42:3)

 

AC.25 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사42:3)

AC.25 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사42:3) AC.25에서 스베덴보리는 사42:3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를 인용하면서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원리를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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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 창1:8, ‘저녁과 아침과 날 : 앞서 밝힌 의미의 재확인’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저녁’(evening), ‘아침’(mor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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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 창1:6-7(AC.24-25), ‘궁창의 구별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때’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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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1:6, 7)

 

AC.24

하나님의 , 주님의 자비가 참되고 선한 지식을 낮으로 이끌어 내시고, ,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는 선과 진리는 없다는 빛을 주신 , 주님은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시며, 따라서 사람 안에 있는 지식(cognitiones)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scientifica) 구별하십니다. 사람을 궁창(expanse)이라 하고,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을 궁창 위의 (the waters above the expanse)이라 하며, 사람의 기억 지식을 궁창 아래의 (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이라 합니다. After the spirit of God, or the Lords mercy, 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and has given the first light, that the Lord is, that he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 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 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2 The internal man is called anexpanse; 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the waters above the expanse; 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

 

 

2. 지식(knowledges, cognitiones)이란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들을 뜻하는데, 예를 들면 우리가 나는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다라고 말할 때의 앎입니다. 반면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외적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들로, 신학적인 것이든 밖의 것이든 온갖 종류가 대량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용어에 대한 스베덴보리 자신의 정확한 정의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AC.27, 896, 1486, 2718, 5212 보시고, 또한 개정자의 서문 주해(Revisers Prefatory Notes)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Knowledges [cognitiones] are what we really know, as when we sayI do not merely think so, I know it.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re what we have in the external memorya vast accumulation of all kinds, theological and otherwise. For precise definitions of these words by Swedenborg himself, see Arcana Coelestia, n. 27, 896, 1486, 2718, 5212. See also the Revisers Prefatory Notes. [Reviser]

 

 

[2] 사람은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에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더욱이 성질과 상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에 깊이 잠겨 있으면서 사람에 속한 것들까지 안에 잠기게 하여, 서로 구별되는 것들을 혼란스럽고 어두운 하나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하시고, 그다음에 물과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후의 구절에서처럼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하지는 않으십니다. Man, 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 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 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For, 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 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 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Therefore it is first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and then,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but not,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1:7, 8)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Gen. 1:78).

 

[3] 따라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다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은 오직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주님에 의해 자기가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도록 인도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궁창 아래의 물들의 구별이 언급되고, 그다음에 궁창 위의 물들이 언급됩니다. 또한 이것은 천국의 아르카나인데,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것들,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에 의해서도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저녁에서 아침으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또는 (earth)에서 하늘(heaven)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궁창, 사람을 하늘(heaven)이라 하는 것입니다. 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 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which are of the Lord alone. Now as the external man, when being regenerated, 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 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 and whereas, being such, he is led by them of the Lord, as by things of his own, 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 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 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 that man, by things of his own, 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 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 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 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or fromearthtoheaven. Therefore the expanse, or internal man, is now calledheaven.

 

해설

AC.24는 창세기 1장의 둘째 날에 등장하는 궁창이 인간의 거듭남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본문입니다. 앞선 단계에서 주님의 자비가 참되고 선한 지식을 낮으로 이끌어 내시고, 사람에게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자체이고 진리 자체이시고 모든 선과 진리는 그분에게서 온다는 첫 빛을 주셨다면, 이제 그 빛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궁창의 핵심은 단순한 분리보다 구별입니다. 거듭남 이전에는 서로 다른 것들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었지만, 이제 주님께서 그것들이 서로 다름을 드러내시고 질서를 세우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을 궁창(expanse)이라고 하고, 속 사람 안의 지식을 궁창 위의 ,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궁창 아래의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cognitionesscientifica의 구별이 중요합니다. 본문에 붙은 개정자의 주에 따르면 cognitiones는 사람이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는 정도를 넘어 나는 그것을 안다고 할 때의 앎이며, scientifica는 외적 기억 안에 축적되어 있는 온갖 종류의 기억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 둘을 곧바로 살아 있는 영적 지식죽은 세속 지식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AC.24에서 우선 강조되는 것은 이들이 속하는 층위가 다르며, 거듭남 가운데 그 차이가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거듭남 이전의 사람은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며, 더욱이 그 성질과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에 깊이 잠겨 있기 때문에 속 사람에 속한 것들까지 같은 차원 안에 끌어들여, 본래 구별되어야 할 것들을 혼란스럽고 어두운 하나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표현 순서도 섬세합니다. 처음에는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고 하고 물과 물로 나뉘라고 할 뿐, 곧바로 궁창 아래의 궁창 위의 이라고 명확히 부르지 않습니다. 이후에야 위와 아래의 물이 분명히 구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문장 순서에서 거듭남의 질서를 읽습니다. 사람은 먼저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 가고, 그다음에야 그 둘에 속한 것들의 질서를 점차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이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은 속 사람이 있으며, 그 속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 중인 사람의 겉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신이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은 앞선 거듭남의 단계들과도 연결됩니다. 사람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으면서도 아직 그것을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상태를 지나갑니다.

 

바로 여기서 AC.24의 매우 중요한 아르카나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통해서도 그를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감각의 착각과 욕정과 같은 사람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주님께서 사람을 참되고 선한 것들로 이끄시고 굽히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을 주님께서 선한 것으로 인정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아직 그것들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현재 상태와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점차 선과 진리 쪽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거듭남은 이미 완전해진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아직 자기 자신의 것들 속에 있는 사람을 주님께서 차츰 질서 안으로 이끄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궁창 아래의 물이 먼저 언급되고 궁창 위의 물이 그다음에 언급되는 순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의 의식과 경험에서는 겉 사람의 것들이 먼저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을 행한다고 느끼며, 그 뒤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처음부터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자신 안에 겉 사람과 구별되는 속 사람이 있음을 알고, 그 속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궁창은 바로 이러한 구별이 시작되고 질서가 세워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땅에서 하늘로 진행된다고 말합니다. 앞의 AC.22-23에서 살핀 저녁과 아침의 질서가 여기에서 다시 거듭남의 실제 과정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보이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주님께 속한 것으로 이끄시며, 겉 사람에 머물러 있던 그의 의식은 점차 속 사람의 질서와 연결되어 갑니다. 이 과정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전체와 각각의 부분에서 계속된다는 것이 모든 움직임과 순간이라는 표현의 뜻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궁창, 곧 속 사람을 하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사람 안에 별도의 작은 천국이 만들어졌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24의 직접적인 뜻은 속 사람이 으로 표현되는 겉 사람과 구별되며, 그 속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가 주님께 속한다는 데 있습니다. 거듭남은 이렇게 혼란스럽게 섞여 있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주님에 의해 구별되고, 사람 자신의 것처럼 여겨지던 것들이 점차 주님의 선과 진리 아래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1의 궁창은 바로 그 구별과 질서의 시작을 나타냅니다. (AC.24 해설)

 

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C.24 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C.24 심화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이라는 표현은 처음 접하면 조금 낯설지만, AC를 읽으면서 자주 만나게 되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AC.24의 영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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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 창1:6-7, ‘하늘과 땅을 펴심 : 파괴가 아니라 굽힘으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땅을 펼치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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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 창1:5, ‘날이 뜻하는 시간과 상태 : 거듭남의 날들을 읽는 원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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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 짐승(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그는 형상(image)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들이 그의 음식(food) 됩니다. 또한 그의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로부터 싸움이 일어나며,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고, 그는 천적 인간이 됩니다.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living souland thebeast.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image.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가축을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지면의 맺는 모든 채소와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24-3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는데, 이는 창1의 여섯째 날, 곧 짐승과 사람의 창조에 해당하는 단계입니다. 앞선 다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은 이미 살아 있는 생명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사람은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고해지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만이 아니라 사랑이 함께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람은 신앙으로 말할 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순서를 제시합니다. 그는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단계의 사람이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질서 가운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앞선 상태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신앙이 이제 사랑과 함께 작용하면서, 사람이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짐승(beast)이라 한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여기서 짐승은 일상적인 말에서처럼 거칠고 악한 본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등장하는 생물들과 짐승들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들을 표상합니다. 다만 각각의 생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뒤의 해당 절에서 자세히 다루어지므로, 여기서는 여섯 번째 상태에서 더욱 충만한 생명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큰 흐름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동시에 그를 형상(image)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26-27하나님의 형상과 직접 연결됩니다. 여기서는 형상의 모든 의미를 미리 풀기보다,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함께 행동하기 시작한 거듭난 사람을 스베덴보리가 영적 인간이며 형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형상의 구체적인 속뜻은 이어지는 창조 본문의 해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의 삶은 두 층위로 유지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들을 그의 음식(food)이라고 합니다. 몸이 음식을 통해 유지되듯이 영적 생명도 그것을 기르고 유지하는 양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지식만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행위들이 함께 언급된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과 그 진리를 선한 삶으로 살아 내는 것이 함께 영적 생명을 이루어 갑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됩니다. 이것은 몸이나 감각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연계에서 몸을 가지고 살아가며 감각을 통하여 세상을 접합니다. 문제는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 가운데 무엇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가입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싸움이 일어납니다.

 

AC.12는 이 싸움을 길게 설명하지 않고 그 방향과 결과를 짧게 제시합니다. 싸움은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며, 그 후 사람은 천적 인간이 됩니다. 여기서 사랑은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뜻합니다.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던 사람이 마침내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에 이를 때, 스베덴보리는 그를 천적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단순히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의 사람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12에서는 아직 이 둘의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듭남의 진행 가운데 처음에는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사랑이 지배적인 원리가 되는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더 깊은 차이는 이후 AC에서 훨씬 정교하게 밝혀집니다.

 

결국 AC.12는 창조의 여섯째 날에 대응하는 거듭남의 여섯 번째 상태를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사람은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며,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함께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영적 인간이며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로 양육되고, 자연적 생명과의 싸움을 지나 마침내 사랑이 지배하는 질서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AC.12는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너머의 천적 상태를 바라보게 합니다. (AC.12 해설)

 

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 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 심화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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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창1 개요, ‘모두가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 거듭남의 현실’

AC.13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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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창1 개요,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고해지는 다섯 번째 상태’

AC.11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생명 있는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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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생명 있는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 하늘의 새들(birds of the heavens)이라 불립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fish of the sea,and thebirds of the heavens.

 

해설

AC.11은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AC.10의 네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면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그 내적인 생명이 실제로 활동하면서 생명 있는 것들을 산출하기 시작합니다. 창조 이야기에서도 넷째 날까지 빛과 궁창과 땅과 식물과 광명체들이 나타났지만, 다섯째 날에 이르러 처음으로 움직이는 생물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순서를 인간의 거듭남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신앙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에 관한 말을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상태에서도 사람은 이미 경건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AC.9에서는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것들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AC.10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한 뒤, AC.11에서는 이제 신앙이 실제로 그 사람의 말과 생각에서 활동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어지는 그로써 진리와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표현은 조금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증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여러 삶의 경험을 통하여 진리와 선이 참임을 검증한다는 구체적인 과정으로 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11 자체가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밖에서 배워 받아들였던 진리가 이제 그 사람 안에서 신앙으로 활동하며 그의 생각과 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AC.9AC.11을 비교하면 중요한 변화가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AC.9에서 사람은 이미 회개하고 선을 행했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행하는 것들은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11에서는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이 생명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두 표현의 대비는 거듭남에서 단순히 어떤 행동을 하느냐만이 아니라, 그 행동이 어떤 내적 생명에서 나오는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AC.11에서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7부터 이어지는 전체 과정에서 거듭남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게 하시며, 사람이 회개하고 선을 행하는 과정을 지나도록 이끄십니다. 그리고 AC.10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AC.11생명 있는 것들 역시 그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생명 있는 산출물들을 바다의 물고기하늘의 새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창1:20-23의 다섯째 날과 직접 연결됩니다. 그러나 AC.11은 아직 물고기와 새의 세부적인 상응을 밝히는 곳이 아니라 창조의 여섯 날이 거듭남의 여섯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개괄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물고기와 새가 각각 무엇을 세밀하게 의미하는지를 미리 확정하기보다, 넷째 상태에서 속 사람 안에 불붙은 신앙과 체어리티로부터 이제 처음으로 생명 있는 것들이 산출되기 시작한다는 큰 흐름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창조의 순서도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셋째 날에는 식물이 나타나고, 넷째 날에는 광명체들이 나타나며, 다섯째 날에는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와 새가 등장합니다. 거듭남에서도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는 외적인 변화가 먼저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모두 동일한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의 것을 차례로 질서 있게 하시면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으로부터 살아 있는 결과들이 산출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상태 역시 거듭남의 마지막 상태는 아닙니다. 바로 다음 AC.12에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여섯 번째 상태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11에서는 신앙이 살아 움직이며 진리와 선 안에서 사람이 확고해져 가는 것이 중심이라면, 다음 상태에서는 사랑이 더욱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 차이를 남겨 두어야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상태의 경계가 흐려지지 않습니다.

 

또한 확증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긍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문맥에서는 사람이 거짓을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 안에서 확고해지는가입니다. AC.11에서는 그 대상이 분명히 진리와 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확증은 자기주장의 완고함이 아니라, 거듭남 가운데 신앙이 활동하면서 사람이 진리와 선 안에서 점차 확고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AC.11의 다섯 번째 상태는 생명확고해짐이라는 두 흐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더 이상 외부에서 배운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고 그 사람에게서 말로 나타날 만큼 활동하기 시작하며, 사람은 그 신앙으로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집니다. 동시에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이 이제 생명 있는 것들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창조의 다섯째 날에 나타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로 표현합니다. 다음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 살아 있는 신앙이 사랑과 더욱 깊이 결합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AC.11 해설)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 무슨 뜻인가?

 

AC.11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 심화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을 처음 읽으면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라는 표현에서 조금 멈추게 됩니다. 우리말의 ‘확증하다’는 보통 어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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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창1 개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움직이는 영적 인간의 여섯 번째 상태’

AC.12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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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창1 개요,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네 번째 상태’

AC.10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으며, 신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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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으며,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사람 안에서 불붙게 되며, 이것들을 광명체(luminaries)라고 합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 and illuminated by faith. 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 and brought forth goods, 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 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 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alled twoluminaries.

 

해설

AC.10은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첫 번째 상태에서 인간은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었고, 두 번째 상태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했으며, 세 번째 상태에서는 회개하고 경건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아직 그 선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네 번째 상태에서는 한층 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은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며,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속 사람 안에서 실제로 불붙게 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이전 상태에서도 사람이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네 번째 상태에서 비로소 외적으로 선한 행동이 처음 나타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차이는 그 선의 내적인 근원과 상태에 있습니다. 이전에는 시험과 곤경을 지나면서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했지만, 아직 그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AC.9가 덧붙여 보여 준 것처럼 그는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AC.10의 변화는 단순히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었다는 변화가 아니라, 이미 행하고 있던 선이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과 연결되기 시작하는 변화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먼저 사랑에 감동된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종교적인 감정이 강해지거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뜻한다고 볼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선을 외적인 압박 때문에 행하는 데서 점차 벗어나 선 자체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시험과 곤경이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을 잠잠하게 하는 과정에서 선이 나타났다면, 이제는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체어리티가 실제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사람은 신앙으로 밝아집니다. 신앙은 여기서 단순히 알고 있는 교리나 기억 속의 신앙 지식에 머물지 않습니다. AC.8에서 리메인스로 저장되어 있던 신앙의 지식들이 언급되었고, AC.9에서는 사람이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AC.10에서는 신앙이 사람을 밝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진리가 단지 밖에서 주어진 지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 안에서 실제로 빛의 기능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의 핵심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주는 말이 불붙게 된다(enkindled)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불붙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신앙과 체어리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상태들에서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 구별이 일어나도록 이끄시며, 사람이 회개하고 선을 행하는 과정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준비 가운데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 점에서 AC.9AC.10의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AC.9의 사람도 선을 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선행이 있느냐 없느냐만으로 두 상태를 구별할 수 없습니다. AC.9에서는 사람이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아직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AC.10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외적으로 선한 행동의 수가 늘어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행동의 내적인 생명과 근원이 달라져 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불붙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창1:14-18에서 넷째 날에 등장하는 두 큰 광명체와 직접 연결됩니다. 그러나 AC.10은 아직 그 광명체들의 세부적인 상응을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며, 창조 이야기의 두 광명체가 바로 이 내적 변화를 나타낸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세부적인 의미는 이후 해당 절의 해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순서는 창세기 1장의 거듭남 구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빛은 첫째 날에 이미 나타났지만, 해와 달과 별에 해당하는 광명체들은 넷째 날에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처음부터 어떤 빛과 신앙의 지식이 주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속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로 자리 잡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상태를 거치게 하시면서 사람 안의 것을 질서 있게 준비하시고,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가 내적으로 살아 움직이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AC.10에서 말하는 네 번째 상태를 단순히 신앙심이 강해지는 단계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더 중요한 변화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 사람의 내적 삶에서 실제로 생명을 가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선을 단지 해야 하기 때문에 행하는 데서 점차 벗어나 선에 마음이 움직이고, 진리를 단지 알고 있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진리로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진다고 표현한 변화입니다.

 

또한 이 상태를 인간의 성취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AC.7부터 이어지는 거듭남의 모든 상태에서 주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실제로 회개하고,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며,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생명을 주시고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점차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기에게 선의 공로를 돌리는 데서 벗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AC.10의 네 번째 상태는 앞선 세 상태에서 준비되어 온 것이 속 사람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리메인스로 저장되어 있던 것, 시험과 곤경 가운데 드러나기 시작한 것, 회개와 선행으로 나타났지만 아직 자기에게 귀속되던 것이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살아 있는 내적 원리로 불붙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창조의 넷째 날에 나타난 두 광명체로 표현합니다. 이후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 내적인 생명이 더욱 풍성한 살아 있는 결과들을 낳게 됩니다. (AC.10 해설)

 

 

 

AC.11, 창1 개요,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고해지는 다섯 번째 상태’

AC.11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생명 있는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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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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