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69-474 심화

2,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은 어떻게 다른가?’

 

창1:26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되어 있고, 창5:1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형상’과 ‘모양’을 비슷한 의미의 반복으로 읽기 쉽지만, AC.472-473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표현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영적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은 천적 인간을 의미하며, ‘형상은 모양을 위한 준비 단계’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AC.472의 ‘창조하다’(create)와 ‘만들다’(make)의 구별과 연결됩니다.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은 거듭나서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영적 인간이 된 사람이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은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설명을 함께 놓으면 ‘창조-영적 인간-형상’과 ‘만듦-천적 인간-모양’이라는 거듭남의 질서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거듭남의 시작과 진행 가운데 주님의 질서가 사람 안에 나타나기 시작한 상태이고, 하나님의 모양은 그 질서가 사랑과 삶에 더욱 온전히 자리 잡은 상태입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것이 진리임을 인정하며,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로잡아 갑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아직 싸움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고, 진리이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며 순종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주님의 것이 그의 생각과 삶 안에서 비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질서가 더욱 깊어집니다. 그는 단지 진리가 명령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행합니다. 그래서 AC.473은 천적 인간이 주님의 ‘모양’인 이유를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를 외적으로 억압하고 통제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의지와 사랑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기쁘게 받아들이므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점점 그의 자유와 기쁨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양’이 ‘실제적인 닮음’(real replica)이라는 표현도 사람이 신적인 존재가 되거나 주님과 동일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언제나 피조물이고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다만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것을 내려놓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 살아갈수록, 그의 생각과 의지와 행위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질서가 더욱 실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은 영적 인간보다 더욱 실제적인 ‘모양’이 됩니다.

 

그러므로 ‘형상에서 모양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외형이 점점 하나님처럼 변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중심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알고 믿고 순종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사람의 사랑과 의지에까지 심으십니다. 마침내 사람은 ‘진리이기 때문에 억지로 행하는 상태’에서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쁘게 행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신앙이 사랑으로 들어가고,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외적인 순종이 내적인 기쁨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고교회를 ‘천적 교회’라고 부르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고유한 상태는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었던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을 중심으로 살았으며,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을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창5:1에서 태고교회를 다시 소개하면서 단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이 교회의 고유한 천적 상태를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차이는 거듭남이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를 주셔서 먼저 당신의 ‘형상’을 이루시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 진리를 사랑과 결합시키고 우리의 의지와 삶 속에까지 심으셔서, 우리가 점점 당신의 ‘모양’을 닮아 가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은 단지 올바른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이 삶이 되어 주님의 선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AC.469-474 심화 2)

 

 

 

AC.474, 창5:1,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태고교회’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그러므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birth or propagation)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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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9-474 심화 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69-474 심화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70-471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 시대의 사람들이 ‘집안’(house), ‘일가’(family), ‘민족’(nation)으로 구별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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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가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거듭남을 의미한다고 하면서도, 곧바로 ‘그 의미에는 차이가 있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단어를 단순한 동의어의 반복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 안에서는 서로 비슷해 보이는 표현도 각각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며, 스베덴보리는 이 세 동사 역시 거듭남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나타낸다고 봅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AC.16 자체는 그 차이를 여기서 자세히 정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창조는 생명을 처음 넣어 주는 단계, 형성은 그 생명을 질서 있게 만드는 단계, 만듦은 그것을 행동으로 구현하는 마지막 단계’라고 세 동사를 하나의 고정된 순서표로 확정하는 것은 AC.16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런 설명은 이해를 돕는 비유로는 사용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AC.16에서 그렇게 정의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창조하다’는 거듭남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날 때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에 거듭남 자체를 ‘새 창조’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창조’는 자연적 인간이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일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실제로 뒤의 AC에서도 ‘창조하다’는 사람이 새로 창조되거나 거듭나는 것과 특별히 연결되어 설명됩니다.

 

‘만들다’ 역시 단순한 물건 제작의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뒤의 설명을 보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가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경우 ‘만들다’라는 표현과 연결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만들다’를 단순히 외적인 행동으로 구현하는 단계라고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시작하신 거듭남의 역사가 사람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측면까지 포함한다고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짓다’ 또는 ‘형성하다’(form)도 고유한 뜻을 갖습니다. 이 말은 이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것이 일정한 형식과 질서를 갖도록 형성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AC.16 한 번호만으로 세부 의미를 완전히 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여러 곳에서 ‘형성하다’를 다른 표현들과 구별하여 사용하며, 각 문맥에서 그 속뜻을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가 모두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를 말하지만 서로 같은 뜻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43:7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라고 한 사람을 두고 세 동사가 연속하여 사용됩니다. 만일 세 말이 완전히 같은 뜻이라면 이런 반복은 단순한 수사적 장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 하나하나에 속뜻의 차이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 세 동사 역시 한 사람의 거듭남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나타낸다고 읽습니다.

 

AC.88에서도 이 원칙은 다시 확인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주님의 ‘일’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그를 ‘창조하시고, 형성하시고,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세 표현이 말씀에서 ‘아주 구별되게’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대목에서도 각 단어를 간단한 세 단계 공식으로 정의하기보다는, 말씀에서 각각 고유한 관념을 전달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AC.16을 읽을 때도 가장 안전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세 동사의 차이를 기억할 때는 ‘첫째는 이것, 둘째는 이것, 셋째는 이것’이라고 너무 빨리 고정하기보다, ‘거듭남은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형성하시며, 마침내 온전하게 이루어 가시는 전적인 역사이고, 말씀은 이 한 역사를 여러 고유한 표현으로 구별하여 말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후 AC에서 이 단어들이 다시 나타날 때마다 그 문맥에서 구체적인 뜻을 확인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한 ‘의미의 차이’가 점차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세 동사가 함께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거듭남의 주체가 주님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하지만, 사람 자신이 스스로를 새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시고, 형성하시고,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AC.16에서 이 세 단어의 차이를 묻는 일은 단순한 어휘 연구가 아니라, 거듭남 전체가 누구의 역사인가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AC.16 심화 1)

 

 

 

AC.16, 창1:1, ‘태초와 거듭남의 시작 : 사람의 새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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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한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태초’는 또한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하는데, 이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a new creation)라고 합니다.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창조하다’(to create), ‘짓다’(to form), ‘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은 거듭나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각각 그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러므로 주님은 ‘구속자’(the 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the 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the Maker), 그리고 ‘창조자’(the Creator)라고 불리시는데, 같은 선지서에서,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시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천’(heaven)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지’(earth)는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AC.16부터 스베덴보리는 창1:1의 각 표현을 본격적으로 풀기 시작합니다. 첫 표현은 ‘태초’(the beginning)입니다. 그는 먼저 ‘태초’가 태고, 곧 가장 오래된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선지서에서는 이를 ‘옛날’(the days of old) 또는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시간 개념 자체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AC.16에서 중요한 것은 이 ‘태초’가 문자적으로 먼 옛 시작을 가리킬 뿐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하는 첫 시기까지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에, 그에게도 하나의 새로운 시작, 곧 영적인 ‘태초’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앞의 AC.4에서 이미 창세기 1장이 사람의 새 창조, 곧 거듭남을 다룬다고 밝힌 것과 직접 연결됩니다. 창1:1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의 시작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사람이 ‘생명을 받는다’는 말도 육체적 생명을 새로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매여 있던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영적 생명으로 깨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순한 성격 개선이나 종교적 습관의 보완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질서를 이루어 가시는 ‘새 창조’입니다.

 

이 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43:7을 인용합니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여기서는 한 사람 또는 한 백성을 두고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라는 세 동사가 함께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이유는 선지서의 ‘창조’ 언어가 단지 우주나 인간의 최초 창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주님께 속하도록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동시에 이 세 동사가 모두 같은 뜻으로 무의미하게 반복된 것이 아니라 각각 의미의 차이를 가진다고 밝힙니다. 다만 AC.16에서는 그 차이를 아직 자세히 풀지 않으므로, 여기서 세 동사를 임의로 세 단계에 정확히 배당하기보다는 ‘말씀은 거듭남을 여러 측면에서 창조·형성·만듦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정도로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어지는 사43:15의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는 말씀은 새 창조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더욱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앞에서 주님을 ‘구속자’,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 ‘만드신 이’, ‘창조자’라고 부른다고 설명한 뒤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창조자’라는 호칭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으로 존재하게 된 사실만을 말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습니다. AC.16의 문맥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을 구속하시고, 형성하시고, 새롭게 만드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이 ‘새 창조’라면 그 창조자는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선택하며 순종하지만, 그 안에서 생명을 주시고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점이 이 인용의 핵심입니다.

 

시102:18의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는 말씀은 ‘창조’가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의 백성은 육체적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창조함을 받을’ 백성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이 표현은 사람이나 교회가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매우 적절한 증거가 됩니다. 이미 자연적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시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씀 안의 ‘창조’에는 최초의 물질적 창조를 넘어선 영적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롭게 된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것은 새 창조가 단순한 내면의 심리 변화가 아니라,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향하는 새로운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네 번째 인용인 시104:30은 이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기서는 ‘창조’와 ‘새롭게 하다’가 한 구절 안에서 나란히 나타납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16의 ‘거듭남은 새 창조’라는 설명과 매우 잘 맞습니다. 주님의 영이 보내어질 때 그들이 ‘창조되고’, 그 결과 ‘지면’이 새로워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붙드는 핵심은 주님의 생명과 역사가 사람을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시104:30의 ‘주의 영’을 성령론 전체로 확대하거나 ‘지면’을 AC.16의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겉 사람과 반드시 일대일로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번호에서 이 구절이 담당하는 직접적인 역할은 ‘창조’가 곧 새롭게 함과 연결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 네 인용을 함께 놓고 보면 왜 스베덴보리가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라고 한다’고 말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사43:7에서는 사람이 ‘창조되고, 지어지고, 만들어지며’, 사43:15에서는 주님이 ‘창조자’라고 불리시고, 시102:18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백성이 다시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라고 불리며, 시104:30에서는 주님의 영으로 ‘창조됨’과 ‘새롭게 됨’이 함께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네 구절은 따로따로 흩어진 증거가 아니라 하나의 논증을 이룹니다. 말씀의 선지적 언어에서 ‘창조’는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별도의 인용 구절 심화가 없어도 AC.16에서 왜 이 네 본문을 가져왔는지가 충분히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창1:1의 ‘천’(heaven)과 ‘지’(earth)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미리 예고합니다. ‘천’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지’는 겉 사람을 의미하며, 그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너무 앞서갈 필요는 없습니다. AC.16이 아직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속뜻에서 읽을 때, 우주 창조의 언어가 동시에 인간의 내적·외적 존재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질서 지어지는 거듭남의 언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AC.16의 중심은 간결합니다. ‘태초’는 사람의 거듭남이 시작되는 첫 시기를 포함하고, 거듭남은 ‘새 창조’이며, 그 새 창조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제 이어지는 구절들은 그 새 창조가 속 사람과 겉 사람 안에서 어떤 질서로 이루어지는지를 하나씩 보여 주게 됩니다. (AC.16 해설)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심화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가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거듭남을 의미한다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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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AC.17-19),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 : 거듭남 이전 인간의 실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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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AC.15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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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2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날’(day in which God created man)이 그가 영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모양대로 그를 만드셨다’(God making him in his likeness)가 그가 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분명합니다. ‘창조하다’(create)라는 표현은 본래 사람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 곧 거듭나는 것과 관련되고, ‘만들다’(make)라는 말은 사람이 완전하게 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가 정확하게 구별되어 사용됩니다. 이것은 앞서 2장에서 보여 준 바와 같습니다. 거기서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만들어진 것에 관하여 ‘하나님이 그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구절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창조하다’는 영적 인간과 관련되고, ‘만들다’, 곧 완전하게 하다는 천적 인간과 관련됩니다. (AC.16, 88) That by the “day in which God created man” is signified his being made spiritual, and that by “God making him in his likeness” is signified his being made celestial, appears from what was said and shown above. The expression to “create” properly relates to man when he is being created anew, or regenerated; and the word “make,” when he is being perfected; wherefore in the Word there is an accurate distinction observed between “creating,” “forming,” and “making,” as was shown above in the second chapter, where it is said of the spiritual man made celestial that “God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created in making”; and in other passages also, to “create” relates to the spiritual man, and to “make,” that is, to perfect, to the celestial man. (See n. 16 and 88.)

 

해설

AC.472는 창5:1에 사용된 ‘창조하다’와 ‘만들다’를 같은 뜻의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는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사람의 거듭남에서 서로 다른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창조하다’는 사람이 새롭게 창조되어 영적 인간이 되는 것과 관련되고, ‘만들다’는 그렇게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이 더욱 완전하게 되어 천적 인간이 되는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거듭남의 진행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완성된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새롭게 창조’되어야 합니다. 자연적인 삶과 자기 자신의 것, 곧 proprium에 매여 있던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신앙을 받아 새로운 영적 생명을 얻는 것이 ‘창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역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고, 사람이 진리를 단지 알고 믿는 상태를 넘어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고 행하는 상태에 이를 때 그는 점차 천적 인간으로 ‘만들어집니다’.

 

이 때문에 AC.472는 창2의 ‘하나님이 그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말씀을 다시 불러옵니다. AC.16과 AC.88에서 살펴본 것처럼 ‘안식’은 주님께서 더 이상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싸움이 지나고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움직이는 천적 상태에 이른 것을 뜻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애쓰지만,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이 중심이 되어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창조’에서 시작된 거듭남이 ‘만드심’, 곧 완전하게 하심으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완전하게 된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흠이 전혀 없는 절대적인 완전성에 도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그런 완전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하게 하심은 거듭남의 질서가 더 온전히 이루어져, 신앙과 진리가 사랑과 선에 결합되고 사람이 점점 더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구별은 태고교회가 왜 ‘천적 교회’라고 불리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창5:1은 먼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한 뒤 ‘하나님의 모양대로 그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AC는 이 순서를 ‘영적 인간이 됨’에서 ‘천적 인간이 됨’으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도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창조하거나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계속해서 당신의 모양을 닮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결국 AC.472는 말씀의 단어 하나까지도 거듭남의 질서를 담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창조하다’는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만들다’는 그 생명이 사랑과 결합하여 더욱 온전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지 진리를 알고 신앙을 갖게 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진리가 사랑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삶이 흘러나오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태고교회는 바로 이 질서가 가장 충만하게 이루어진 교회였습니다. (AC.472 해설)

 

 

 

AC.473, 창5:1,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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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1, 창5:1,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살았던 이유’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1그들이 이처럼 따로 떨어져 살면서 오직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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