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68 심화

‘리메인스가 없으면 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AC.468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리메인스가 무엇이기에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이처럼 직접 연결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리메인스를 단순히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이나 과거에 배운 종교적 지식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저장하고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과 연결된 순진함, 사랑, 자비, 체어리티 등의 상태입니다. 특히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히기 전, 부모를 신뢰하고 이웃에게 호의를 품으며 주님과 천국에 관한 선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주님은 그러한 상태들을 사람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람은 나중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주님은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리메인스는 사람이 스스로 쌓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영적 저축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내면에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사람이 성장하면서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에 깊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으로는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과 거짓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만일 사람 안에 이것과 다른 근원에서 온 것이 전혀 없다면, 주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실 접점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 안에는 사람이 한때 받아들였던 선과 진리, 순진함과 체어리티의 상태가 있습니다. 주님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바로 이것들을 사용하여 사람을 자기중심적인 생명에서 돌이키고 선과 진리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리메인스가 구원한다는 말은 리메인스 자체가 주님과 별도로 어떤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리메인스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주님께서 친히 사람 안에 보존하신 것이며, 훗날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사용하시는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의 교리는 결국 인간의 공로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주님의 선행하시는 자비와 섭리에 관한 교리입니다. 사람이 아직 자신의 거듭남을 생각하지도 못하던 때부터 주님은 이미 훗날 그를 살리실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의지와 이성으로 받아들여 마치 자기 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리메인스는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도록 사람의 내면에 보존된 천국적인 기반이 됩니다. 악과 거짓의 영향만 있고 그 반대편에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상태가 전혀 없다면 참된 영적 선택과 거듭남의 가능성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AC.468이 개인의 리메인스와 교회 전체의 리메인스를 나란히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것처럼, 인류 전체 안에서도 주님은 참된 교회와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언제나 어떤 사람들을 남겨 두십니다. 홍수 직전의 ‘노아’가 바로 그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온 땅이 부패했다고 표현될 만큼 교회가 황폐해졌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마지막 리메인스가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고대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거듭남과 인류 가운데 교회가 다시 일어나는 일이 같은 영적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 ‘남은 자’가 반복해서 등장하고, ‘십’과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표상합니다. 사6:13의 모든 것이 베임을 당한 뒤에도 남아 있는 ‘거룩한 씨’, 암5:3의 백 명 가운데 남은 열 명, 창18:32의 소돔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모두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것’이라는 원리를 보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의 크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남겨 두신 선과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가 없으면 영원히 멸망한다’는 AC.468의 말씀은 사람을 두렵게 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얼마나 철저하게 주님의 선행하시는 역사에 의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언제 어떤 선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이 자신의 내면 어디에 보존되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시며, 사람이 훗날 거듭남의 길에 들어설 때 그것을 불러내어 사용하십니다.

 

이 점에서 ‘노아’는 우리 각 사람의 거듭남을 비추는 매우 깊은 표상이 됩니다. 우리 안의 상태가 아무리 황폐해지고 선과 진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은 인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지키시고 때가 되었을 때 사용하시며,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영적 생명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는 단순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시 주님께 돌아가고 거듭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그의 내면에 준비하고 보존해 두신 생명의 씨앗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AC.468은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AC.468 심화)

 

 

 

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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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심화

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에 느껴지는 문장이 있습니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창1과 창2에서 ‘천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거듭남의 가장 깊은 상태에 이른 사람이나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갑자기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천적 인간이라 했던 사람들은 무엇이며, 왜 여기서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AC.162가 무엇을 설명하려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온다고 말합니다. 이어 온 천국이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하고, 그 이유를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며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강조점은 누가 천적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보다 ‘천적인 것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2에서 계속 배워 온 질서와도 같습니다. 지혜와 지성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과 진리도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AC.149에서는 더 나아가 오직 주님만이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의 것, 곧 주님의 proprium을 가지고 계시며, 주님의 proprium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생명이 아니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천적인 것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인 생명을 받아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라는 말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천적 인간’이었다는 말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천적인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천적 인간이십니다. 반면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천적 인간이 됩니다. AC.155에서 천사들이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천사가 천사인 까닭도, 천적 인간이 천적 인간인 까닭도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AC.162가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한 뒤 곧바로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의 모든 천사를 하나의 거대한 사람으로 상상하라는 데 우선적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천국의 천적인 성질 자체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도 ‘주님께서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시므로, 천국과 천적 인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적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은 스스로 천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적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혼인의 법’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지상의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한다고 할 때, 그 천적 혼인의 가장 깊은 중심에도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AC.162가 천적 혼인을 ‘한 분 주님과 하나의 천국, 곧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라고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혼인의 하나 됨도 인간 둘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 그 본과 질서를 한 분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따라서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라는 문장은 인간이나 천사의 천적 상태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천적인 모든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고 천국이 천적 천국이 되는 것은 주님과 별도로 천적인 무엇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생명과 질서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짧은 문장은 지금까지 창2가 계속 가르쳐 온 한 가지 질서를 다시 가장 깊은 곳에서 확인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AC.162 심화 1)

 

 

 

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AC.162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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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이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25절) And innocence from the Lord is instilled into this own,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 (verse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해설

AC.136은 창2:25의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의 속뜻을 미리 요약하면서, AC.132부터 이어져 온 proprium의 문제가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고,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된 데 이어, 이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이노센스의 근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인간의 proprium 안에 이노센스가 있다고 하지 않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확인해 온 질서와 일치합니다. 지혜와 지성, 이성과 지식이 주님의 것이며,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도 주님께서 부여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proprium 안에 들어오는 이노센스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졌다고 해서 생명과 선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옮겨간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노센스가 proprium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스며든다는 점입니다. AC.134에서는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졌고, AC.135에서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었습니다. 그런데 AC.136에서도 proprium 자체를 제거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흐름만 놓고 보면, 주님께서는 인간이 proprium으로 기울려는 성향을 단순히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이노센스가 함께할 수 있도록 다루고 계십니다.

 

이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 문장은 proprium 그 자체를 아무 문제 없는 것으로 선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스며들어야 그것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136까지 읽은 단계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을 독립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고, 반대로 주님께서 단순히 제거하시는 대상으로만 볼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고 생명을 결합하시며 이노센스를 스며들게 하시는 과정 전체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설명은 창2:25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를 읽는 방향도 미리 보여 줍니다. 아직 ‘벌거벗음’과 ‘부끄러워하지 않음’ 각각의 구체적인 속뜻은 뒤의 설명을 기다려야 하지만, AC.136에 따르면 이 구절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proprium 안에 있는 상태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벌거벗음은 곧바로 수치나 죄의 상태를 뜻한다고 미리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창3에서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게 되는 상태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이후 설명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AC.132부터 AC.136까지를 함께 보면 이제 하나의 흐름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인간에게 자신이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셨지만, 인간은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되었고, 이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스며들게 됩니다. 인간의 proprium을 허용하시면서도 그것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주님의 질서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36에서 아직 ‘이노센스란 정확히 무엇인가?’를 후대의 교리까지 끌어와 완성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독자가 붙들어야 할 것은 더 단순하면서도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졌지만,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자기 생명의 근원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영적 생명이 결합되고, 다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스며듭니다. 바로 이 상태가 창2:25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상태를 이해하는 문을 열어 줍니다. (AC.136)

 

 

 

AC.137, 창2:18-25 배경, ‘태고교회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 천적 인간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후

AC.137창세기의 처음 세 장은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그 처음 시기부터 멸망한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합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태고교회가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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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5, 창2:18-25 개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al and 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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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re adjoined to the man’s own, so that they appear as a one (verse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해설

AC.135는 창2:24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의 속뜻을 미리 요약합니다. AC.132-134에서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으며, 마침내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는 과정이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AC.135에서는 그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지가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proprium이 주어졌다고 해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앞의 AC.124에서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고, AC.129에서는 출발점이 주님이면 생명이고 자기 자신이면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진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을 갖게 된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AC.135는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된다고 말합니다.

 

특히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는 표현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영적 생명과 인간의 proprium이 그 근원에서 실제로 하나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사랑하고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경험됩니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밝혀 온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인간이 자기의 것으로 느끼는 삶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이 점에서 AC.135는 ‘허락된 proprium’이라는 AC.132의 표현도 조금씩 이해하게 합니다. 만일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진다는 것이 단순히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면, 이어서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된다는 설명은 나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자기의 것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이 주어지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거기에 결합됨으로써 인간에게는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가 형성됩니다. 다만 이 결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아직 이 한 문장만으로 더 나아가 규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 때문에 창2:24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도 이 문맥에서는 먼저 자연적인 부부의 결합을 넘어 인간의 proprium과 천적·영적 생명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앞에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것이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것을 묘사한다고 했으므로, 이제 ‘한 몸’이 되는 것은 그 proprium에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인 각 표현의 상응은 이어지는 번호에서 설명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 전체 구조만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AC.135는 또한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을 엽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행한다’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AC.135의 표현을 따르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이 가능하다고 이해할 여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자유와 책임의 관계까지 여기서 완성해서 설명하기보다는, 현재 본문이 직접 말하는 범위 안에서 그 가능성만 열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AC.135는 proprium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한 문장을 제공합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별도의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오며, 그것들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인간에게는 하나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창2:24를 해설하면서 중요한 것은 ‘하나가 된다’는 말만이 아니라 ‘하나처럼 보인다’는 스베덴보리의 섬세한 구별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AC.135)

 

 

 

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이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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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4, 창2:18-25 개요,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다 -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짐’ (21-23절)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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