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7
천적인간이‘안식일’(sabbath),곧‘안식’(rest)인또하나의이유는그가천적인간이될때싸움이그치기때문입니다.악한영들은물러가고선한영들이가까이오며,천적천사들도가까이옵니다.이들이함께있을때에는악한영들이도저히머물수없어멀리달아납니다.그리고싸움을수행한것은사람자신이아니라사람을위하여주님홀로이셨기때문에,주님께서‘쉬셨다’(rested)고합니다. Another reason why the celestial man is the “sabbath,” or “rest,” is that combat ceases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 evil spirits retire,and good ones approach,as well as celestial angels;and when these are present,evil spirits cannot possibly remain,but flee far away. And since it was not the man himself who carried on the combat,but the Lord alone for the man,it is said that the Lord “rested.”
해설
AC.87은 천적 인간을 ‘안식일’, 곧 ‘안식’이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밝힙니다. 그가 천적 인간이 될 때 싸움이 그치기 때문입니다. AC.84에서는 ‘모든싸움이그친다’는 사실을 말했고, AC.85에서는 여섯 날의 싸움과 수고 뒤에 평화의 상태가 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싸움이 그칠 때 영계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오며, 이들이 함께 있을 때 악한 영들은 머물지 못하고 멀리 달아납니다.
그러나 AC.87의 가장 중요한 설명은 마지막 문장에 있습니다. 앞선 여섯 날 동안 싸움이 있었지만, 그 싸움을 실제로 수행한 것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사람을위하여주님홀로’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싸움이 끝났을 때 말씀은 사람이 쉬었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쉬셨다’고 합니다. 창조의 여섯 날을 사람의 거듭남으로 읽으면서도 그 거듭남의 근원적인 행위자를 사람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81에서도 영적 인간은 실제로 ‘싸움가운데있으며언제나승리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싸움을 경험하고 악과 거짓에 맞서며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지만, 그 싸움에서 악을 이기게 하는 능력의 근원은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AC.87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과 응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승리의 능력과 공로를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또한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는 설명은 천적 인간의 안식이 단순한 심리적 평온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인간의 거듭남은 영계와 분리된 인간 내부만의 변화가 아닙니다. 사람이 천적 상태에 이르면서 그와 함께하는 영적 환경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악한 영들의 공격이 물러가면서 싸움의 상태도 그칩니다.
따라서 AC.87에서 ‘주님께서쉬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피곤하여 활동을 중단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위하여 싸우신 분이 주님 홀로이시므로 그 싸움이 그친 상태를 주님의 안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AC.84에서 시작된 ‘왜주님께서쉬신다고하는가?’라는 질문은 여기에서 가장 직접적인 답에 이릅니다. 여섯 날의 싸움도 주님의 역사이고, 그 싸움이 끝나 천적 인간의 평화에 이른 것도 주님의 역사이므로, 그 완성된 상태가 주님의 ‘안식’입니다. (AC.87해설)
AC.86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경계를 ‘안식일의저녁’이라 합니다. 영적 인간은 이미 ‘여섯째날’이 되었지만, 이제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상태에 들어갑니다. AC.83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고 했던 바로 그 전환이 여기서는 ‘안식일의저녁’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사이가 단순히 끊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고 전혀 별개의 천적 인간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여섯째 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안식일의저녁’이라 하고,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 것은 바로 이 상태를 표상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저녁’은 단순히 하루가 끝나는 자연적인 시간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86에서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특정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유대교회의 안식일 규례도 외적인 의식에 그치지 않고,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질서를 표상하고 있었습니다. AC.85에서 유대교회의 제도 가운데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한 설명이 바로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그러나 ‘안식일의저녁’이 마지막 상태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이어 천적 인간을 ‘아침’이라 하며, 그것은 다음 번호에서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86은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싸움과 안식 사이의 전환점을 보여 주는 짧은 연결 번호입니다. ‘저녁’은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이고, ‘아침’은 그렇게 된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AC.86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거듭남의 과정이 연속적인 질서를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에게서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며, 이것이 ‘안식일의저녁’입니다. 그리고 그 전환을 지나 천적 인간의 상태에 이르면 ‘아침’이 됩니다. 다음 번호는 바로 이 ‘아침’의 의미를 더 밝히게 됩니다. (AC.86해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5
천적인간이‘일곱째날’(seventhday)이라는것과,그러므로일곱째날을거룩하게구별하여안식일이라한것은지금까지밝혀지지않은아르카나입니다.천적인간의본성이무엇인지아는사람이아무도없었고,영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도거의없었기때문입니다.이러한무지로말미암아사람들은둘사이에큰차이가있음에도영적인간을천적인간과같은것으로여겨왔습니다.그차이는AC.81에서볼수있습니다.일곱째날에관하여,그리고천적인간이‘일곱째날’(seventhday),곧‘안식일’(sabbath)이라는것에관하여는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라는사실에서분명합니다.그러므로주님께서는이렇게말씀하십니다. That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day,” and that the seventh day was therefore hallowed,and called the sabbath,are arcana which have not hitherto been discovered.For none have been acquainted with the nature of the celestial man,and few with that of the spiritual man,whom in consequence of this ignorance they have made to be the same as the celestial man,notwithstanding the great difference that exists between them,as may be seen in n.81.As regards the seventh day,and as regards the celestial man being the “seventhday” or “sabbath,” thi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and therefore he says:
이말씀은주님께서사람자체이시며안식일자체이심을함축합니다.하늘과땅에있는주님의나라는주님으로말미암아안식일,곧영원한평화와안식이라합니다.which words imply that the Lord is man himself,and the sabbath itself.His kingdom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s called,from him,a sabbath,or eternal peace and rest.
[2] 여기서다루는태고교회는그뒤에이어진모든교회보다더욱주님의안식일이었습니다.그뒤의주님의모든가장내적인교회도역시안식일이며,거듭난모든사람도천적인간이될때에는안식일입니다.그가주님의형상이기때문입니다.그에앞서여섯날의싸움또는수고가있습니다.이러한것들은유대교회에서수고하는날들과일곱째날인안식일로표상되었습니다.그교회에서는주님과그분의나라를표상하지않는것은아무것도제정되지않았기때문입니다.이와같은것이궤가나아갈때와쉴때에도표상되었습니다.광야에서궤가이동한것은싸움과시험을표상했고,궤가쉰것은평화의상태를표상했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궤가떠날때모세는이렇게말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which is here treated of,was the sabbath of the Lord above all that succeeded it.Every subsequent inmost church of the Lord is also a sabbath;and so is every regenerate person when he becomes celestial,because he is a likeness of the Lord.The six days of combat or labor precede.These things were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days of labor,and by the seventh day,which was the sabbath;for in that church there was nothing instituted which was not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The like was also represented by the ark when it went forward,and when it rested,for by its journeyings in the wilderness were represented combats and temptations,and by its rest a state of peace;and therefore,when it set forward,Moses said:
천적인간의성질은자기자신의바람에따라행하지않고주님의선하신뜻에따라행하는것이며,그주님의뜻이그의‘바람’(desire)이됩니다.그리하여그는내적인평화와행복을누리는데,이것은여기서‘땅의높은곳에올려짐’(beingupliftedovertheloftythingsoftheearth)으로표현되며,동시에외적인평온과즐거움도누리는데,이것은‘야곱의기업으로길러짐’(beingfedwiththeheritageofJacob)으로나타납니다. Such is the quality of the celestial man that he acts not according to his own desire,but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which is his “desire.” Thus he enjoys internal peace and happiness-here expressed by “beingupliftedovertheloftythingsoftheearth” -and at the same time 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which is signified by “beingfedwiththeheritageofJacob.”
해설
AC.85는 천적 인간이 왜 ‘일곱째날’, 곧 ‘안식일’인가를 한층 더 깊이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아르카나였다고 하면서 그 직접적인 이유를 천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영적 인간의 본성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두 인간 사이에는 AC.81에서 본 것처럼 큰 차이가 있는데도 사람들이 그 차이를 알지 못하여 둘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의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AC.85에서 더 근본적인 설명은 ‘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다’라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자는안식일에도주인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 자체이시며 안식일 자체이심을 함축하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식일, 곧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라 합니다. 결국 천적 인간이 안식일인 까닭도 그 안식이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교회와 개인에게 함께 적용됩니다. 태고교회는 뒤에 이어진 모든 교회보다 더욱 주님의 안식일이었고, 이후의 모든 가장 내적인 교회도 안식일입니다. 또한 거듭난 사람도 천적 인간이 될 때에는 주님의 형상이므로 안식일입니다. 그러나 그 안식에 앞서 ‘여섯날의싸움또는수고’가 있습니다. 유대교회의 수고하는 날들과 안식일, 그리고 광야에서 궤가 나아가고 쉬었던 일은 이 질서를 표상합니다. 궤의 이동은 싸움과 시험을, 궤의 쉼은 평화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AC.84에서 말한 ‘모든싸움이그친다’는 것은 AC.85에서 ‘평화의상태’라는 적극적인 내용으로 한층 더 분명해집니다.
이사야의 안식일 말씀은 그 평화가 어떤 상태인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바람에 따라 행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하며, 더 나아가 주님의 뜻이 바로 자기의 ‘바람’이 됩니다. 이것은 외적인 강제로 자기 욕망을 억누르는 상태와 다릅니다. AC.81에서 천적 인간은 겉으로 드러나는 결박에 의해 제어되지 않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가운데 자유롭다고 했는데, AC.85는 그 자유의 내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뜻과 사람의 바람이 대립하여 억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뜻을 기뻐하는 것이 그 사람 자신의 바람이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의 안식은 단순한 무활동이나 싸움의 부재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이 있고 동시에 외적인 평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를 이사야의 ‘땅의높은곳에올려짐’으로, 후자를 ‘야곱의기업으로길러짐’으로 설명합니다. 결국 안식일의 깊은 중심에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며, 주님의 뜻이 자신의 바람이 된 데서 오는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이로써 AC.74와 AC.84에서 이어져 온 질문도 상당히 분명해집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인 것은 여섯 날의 싸움과 수고 뒤에 오는 주님의 안식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쉬신다고 하는 것은 피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싸움이 그치고 주님의 평화가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안식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다’라는 데 있습니다. (AC.85해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창2:2, 3)
AC.84
천적인간은‘일곱째날’(seventhday)입니다.주님께서여섯날동안역사하셨기때문에그것을‘그분의일’(hiswork)이라하며,그때모든싸움이그치기때문에주님께서‘그분의모든일을마치고쉬신다’(restfromallhiswork)고합니다.이런이유로일곱째날은거룩하게구별되었고,‘안식’(rest)을뜻하는히브리어에서유래하여안식일이라불렸습니다.이와같이사람이창조되고,형성되고,만들어졌습니다.이러한것들은말씀자체에서매우분명합니다.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day,” which, as the Lord has worked during the six days, is called “hiswork”; and as all combat then ceases, the Lord is said to “restfromallhiswork.” On this account the seventh day was sanctified, and called the sabbath, from a Hebrew word meaning “rest.” And thus was man created, formed, and made. These things are very evident from the words.
해설
AC.84는 앞에서 천적 인간을 ‘일곱째날’이라 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여섯 날 동안 이루어진 것은 근본적으로 주님의 역사이며, 그래서 그것을 ‘그분의일’이라 합니다. 사람이 죽은 상태에서 영적 인간으로 형성되고, 마침내 천적 인간이 되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실제로 싸움을 겪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를 창조하고 형성하며 새롭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의 안식을 이해하려면 먼저 앞선 여섯 날의 역사가 누구의 일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일곱째 날에 주님께서 ‘그분의모든일을마치고쉬신다’고 하는 이유는 ‘모든싸움이그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안식을 인간처럼 수고하여 피곤해진 뒤 쉬시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은 거듭남의 싸움이 그친 상태와 관계됩니다.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으면서 승리하지만, 천적 인간은 같은 방식의 싸움 가운데 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AC.84는 이제 그 차이를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의 구조에 연결합니다.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여섯 날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싸움이 그치고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일곱째 날, 곧 안식의 상태가 됩니다.
이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고 안식일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안식일이라는 명칭 자체를 ‘안식’을 뜻하는 히브리어와 연결합니다. 따라서 안식일의 속뜻은 단순히 일정한 날짜에 일을 멈추는 외적인 행위에 머물지 않고,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 거듭남의 싸움이 그치고 천적 상태에 이르는 것과 연결됩니다. 다만 AC.84는 그 안식의 상태를 아직 상세하게 펼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왜 그것을 주님의 안식이라 하는지 그 기본 원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마지막의 ‘이와같이사람이창조되고,형성되고,만들어졌습니다’라는 말은 앞선 여섯 날과 일곱째 날 전체를 한 문장으로 되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안에서 질서 있게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종착점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싸움을 완수하여 스스로 안식을 획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가 그 사람 안에서 이루어져 싸움이 그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84에서 일곱째 날은 단순히 창조 이후에 덧붙여진 하루가 아니라, 앞선 모든 역사가 향하고 있던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AC.84해설)
‘하늘과땅과그것들의모든만상’(heavensandtheearthandallthearmyofthem)이‘다이루어졌다’(finished)고하는것은사람이‘여섯째날’(sixthday)이되었을때입니다.그때신앙과사랑이하나를이루기때문입니다.이렇게하나를이룰때에는신앙이아니라사랑이,다시말해영적인것이아니라천적인것이주된것이되기시작합니다.이것이천적인간이되는것입니다. The “heavensandtheearthandallthearmyofthem” are said to be “finished,”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day,” for then faith and love make a one.When they do this,love,and not faith,or in other words the celestial principle,and not the spiritual,begins to be the principal,and this is to be a celestial man.
해설
AC.83은 창2:1의 ‘하늘과땅과그것들의모든만상이다이루어졌다’는 말이 사람의 거듭남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이 ‘여섯째날’이 되었을 때 그것들이 ‘다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완성’은 단순히 여러 영적 요소가 모두 갖추어졌다는 뜻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 형성되어 온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질서를 이루게 된 상태와 관계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신앙이아니라사랑이주된것이되기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없어지거나 무가치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이룬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달라지는 것은 신앙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둘 사이의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주된 위치에 있었다면, 천적 인간으로 나아가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은 그 사랑과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이것은 AC.81의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 영적 인간은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신앙의원리’에서 선과 진리를 인정하고 행동하지만,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나오는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랑에서 행동한다고 했습니다. AC.83의 ‘신앙이아니라사랑이주된것이된다’는 말은 바로 그 차이를 창2:1의 ‘다이루어졌다’는 표현과 연결하여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을 이해할 때 ‘신앙에서사랑으로갈아탄사람’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 됨으로써 신앙도 사랑에서 나오고 사랑과 하나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또한 ‘영적인것이아니라천적인것이주된것이되기시작한다’는 표현에서 ‘되기시작한다’는 말도 중요합니다. AC.83은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을 아무 관계 없는 두 상태로 끊지 않습니다. 여섯째 날에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 곧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고, 이것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1의 여섯째 날은 영적 인간의 완성인 동시에 창2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천적 상태로 이어지는 경계에 놓여 있습니다.
AC.83은 이처럼 ‘다이루어졌다’는 말씀을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읽게 합니다. 그리고 그 결합 안에서 무엇이 주된 것인가를 분명히 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으면서도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질서, 바로 이것이 AC.83이 보여 주는 천적 인간으로의 변화입니다. (AC.83해설)
이장에서는천적인간을다루는데,앞장에서는죽은사람으로부터형성된영적인간을다루었습니다.그러나오늘날에는천적인간이무엇인지알려져있지않고,영적인간이나죽은사람이무엇인지조차거의알려져있지않으므로,그차이를알수있도록각각의성질을간략히밝히는것이저에게허락되었습니다.첫째,죽은사람은육체와세상에속한것외에는아무것도참되고선한것으로인정하지않으며,그것을숭배합니다.영적인간은영적이고천적인진리와선을인정하지만,사랑에서라기보다는신앙의원리에서그렇게하며,또한그원리에서행동합니다.천적인간은영적이고천적인진리와선을믿고퍼셉션하며,사랑에서나오는신앙외에는다른신앙을인정하지않고,또한그사랑에서행동합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celestial man,as the preceding one did of the spiritual,who was formed out of a dead man. But as it is unknown at this day what the celestial man is,and scarcely what the spiritual man is,or a dead man,it is permitted me briefly to state the nature of each,that the difference may be known.First,then,a dead man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but what belongs to the body and the world,and this he adores.A spiritual man acknowledg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but he does so from a principle of faith,which is likewise the ground of his actions,and not so much from love.A celestial man believes and perceiv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acknowledging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from love,from which also he acts.
[2] 둘째,죽은사람을움직이는목적들은오직육체적이고세상적인삶만을향하며,그는영원한삶이무엇인지도,주님이누구신지도알지못합니다.혹안다고해도믿지않습니다.영적인간을움직이는목적들은영원한삶을향하며,그것을통하여주님을향합니다.천적인간을움직이는목적들은주님을향하며,그분을통하여주님의나라와영원한삶을향합니다. Second:The ends which influence a dead man regard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nor does he know what eternal life is,or what the Lord is;or should he know,he does not believe. The ends which influence a spiritual man regard eternal life,and thereby the Lord. The ends which influence a celestial man regard the Lord,and thereby his kingdom and eternal life.
[3] 셋째,죽은사람은싸움가운데있을때거의언제나굴복하며,싸움가운데있지않을때에는악과거짓이그를지배하므로그는종입니다.그를붙들어매는결박은외적인것으로,법에대한두려움,생명을잃는것에대한두려움,재산과이익을잃는것에대한두려움,그리고그것들때문에그가중요하게여기는평판을잃는것에대한두려움과같은것들입니다.영적인간은싸움가운데있지만언제나승리합니다.그를제어하는결박은내적인것이며,양심의결박이라합니다.천적인간은싸움가운데있지않으며,악과거짓의공격을받을때에는그것들을업신여기므로정복자라합니다.그는겉으로보기에는어떤결박에도제어되지않고자유롭습니다.그의결박은겉으로드러나지않으며,선과진리에대한퍼셉션입니다. Third:A dead man when in combat almost always yields,and when not in combat,evils and falsities have dominion over him,and he is a slave. His bonds are external,such as the fear of the law,of the loss of life,of wealth,of gain,and of the reputation which he values for their sake. The spiritual man is in combat,but is always victorious;the bonds by which he is restrained are internal,and are called the bonds of conscience. The celestial man is not in combat,and when assaulted by evils and falsities,he despises them,and is therefore called a conqueror. He is apparently restrained by no bonds,but is free. His bonds,which are not apparent,are perceptions of good and truth.
해설
AC.81은 창1에서 다룬 영적 인간과 창2에서 다루는 천적 인간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죽은 사람까지 포함한 세 상태를 직접 비교합니다. 여기서 ‘죽은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는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만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숭배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AC.67-72에서 육체의 죽음과 다른 삶을 다룬 직후라고 해서 여기의 ‘죽은사람’을 사망한 사람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81의 세 구별은 한 인간이 거듭남 가운데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첫 번째 차이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근원에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만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선과 진리를 인정하지만 ‘사랑에서라기보다는신앙의원리에서’ 그렇게 하며 그 신앙에서 행동합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믿을 뿐 아니라 퍼셉션하며, ‘사랑에서나오는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랑에서 행동합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신앙이 없어지고 사랑만 남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고, 행동 역시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질서가 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차이는 사람을 움직이는 ‘목적’에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목적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삶에 머뭅니다. 영적 인간의 목적은 영원한 삶을 향하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의 목적은 먼저 주님을 향하고, 그분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합니다. 여기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은 모두 주님과 영원한 삶을 향하지만 그 질서가 다릅니다. AC.73에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간다고 했던 말은 단순히 같은 것을 더 강하게 믿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목적의 질서가 달라지는 변화와도 관계됩니다.
세 번째 차이는 영적 싸움과 사람을 제어하는 결박에서 나타납니다. 죽은 사람은 싸움에서 거의 언제나 굴복하고, 싸움이 없을 때에는 악과 거짓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를 제어하는 것은 법이나 생명, 재산, 이익, 평판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외적인 결박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으면서 승리하고, 그를 제어하는 것은 양심이라는 내적인 결박입니다. 천적 인간은 더 이상 같은 방식의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이 공격해 와도 그것들을 업신여깁니다. 그에게도 결박이 있지만 그것은 외적으로 강제하는 결박처럼 드러나지 않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는 겉으로 보기에 어떤 결박에도 제어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이 세 구별은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을 서로 완전히 별개의 인간 종류로 나누기 위한 분류표라기보다, 앞 장과 이 장에서 다루는 거듭남의 상태 차이를 이해하게 하는 설명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천적 인간을 단순히 영적 인간보다 ‘더높은사람’이라고만 이해하면 AC.81의 세밀한 구별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차이는 선과 진리를 어디에서 받아들이는가, 무엇이 삶의 주된 목적이 되는가, 악과 거짓 앞에서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 세 기준을 붙들면 앞으로 창2에서 말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훨씬 정확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81해설)
그는또한주님으로부터오는모든퍼셉션을통하여무엇이선이고참인지를아는것이허락됩니다.그러나자기자신과세상으로부터그렇게해서는안되며,감각적인것들과기억지식을통하여신앙의아르카나를탐구해서도안됩니다.그렇게하면그의천적본성이죽게됩니다.(16-17절)He is also permitted to acquire a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from the Lord,but he must not do so from himself and the world,nor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memory-knowledge[sensualia et scientifica];which would cause the death of his celestial nature(verses 16–17).
AC.80은 창2:16-17의 개요이며, 앞에서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질서에 하나의 중요한 제한을 제시합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과 같은 사람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그 안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0에서는 선과 진리를 ‘아는것’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이 금지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금지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알려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2:16-17의 금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선악을알게하는나무’가 등장한다고 해서 지식이나 이성 자체가 금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AC.75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음을 말했고, AC.78에서는 이성과 기억지식이 겉 사람에게 속하며 이것들까지도 지혜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80의 문제는 인간이 알고 생각하고 배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선과 진리 및 신앙의 아르카나를 무엇으로부터 알고 판단하려 하는가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주님으로부터오는모든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AC.77에서는 에덴동산의 보기에 좋은 나무들이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80은 그 퍼셉션의 근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을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직감이나 자기 확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은 ‘자기자신과세상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알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그 뜻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혀 줍니다. 그는 ‘감각적인것들과기억지식을통하여신앙의아르카나를탐구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 ‘감각적인것들’은 인간이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이는 외적인 것들과 관계되고, ‘기억지식’은 사람이 배우고 경험하여 기억에 받아들인 것들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AC.78에서 기억지식은 천적 인간의 겉 사람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통하여 ‘신앙의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AC.80은 자연계의 사실을 관찰하거나 기억지식을 배우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적인 것의 진실 여부를 인간 자신이 결정하려는 질서를 경계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아르카나를탐구해서는안된다’는 말을 질문이나 연구 자체의 금지로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의 속뜻을 밝히면서 끊임없이 설명하고 구별하고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AC.80에서 금지되는 것은 탐구라는 행위 자체라기보다, 그 앞에 붙어 있는 ‘감각적인것들과기억지식을통하여’라는 방식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아내려 하는 것이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 구별 때문에 AC.80을 반지성주의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에게 이성과 기억지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며, 자연적인 사실을 감각과 관찰을 통하여 확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것은 ‘신앙의아르카나’입니다. 자연적인 것들을 알아보는 데 사용하는 감각과 기억지식을 그대로 신적인 것의 최종 판단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가 단순한 인식 방법의 차이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천적본성이죽게됩니다.’ 여기서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닙니다. 창2:17의 ‘네가먹는날에는반드시죽으리라’는 말씀이 속뜻에서는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되는 것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AC.73에서 거듭남 이전의 사람이 ‘죽어있던’ 상태라고 한 것과 AC.80에서 천적 본성이 ‘죽게된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AC.79와 AC.80을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도 보입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AC.80에서는 선과 진리를 알 수 있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두 번호 모두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가지거나 아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방향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이 관계를 여기서 proprium이나 인간의 자유에 관한 전체 교리로까지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AC.79와 AC.80이 보여 주는 직접적인 연결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AC.80은 따라서 창2:16-17의 금령을 ‘알지말라’는 명령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부터아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할 때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는 것이, 이 개요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16-17에 관하여 먼저 제시하는 핵심입니다. (AC.80해설)
천적인간은그러한동산입니다.그러나그동산은주님의것이므로,이사람은이모든것을누리는것은허락되지만,그것들을자기것으로소유해서는안됩니다.(15절)The celestial man is such a garden.But as the garden is the Lord’s,it is permitted this man to enjoy all these things,and ye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verse 15).
여호와하나님이그사람을이끌어에덴동산에두어그것을경작하며지키게하시고(15절)
해설
AC.79는 앞에서 묘사한 에덴동산을 천적 인간 자신과 연결합니다. AC.77에서는 그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되고, 그 안의 나무들은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이며,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는 사랑과 신앙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AC.78에서는 동산의 강이 지혜이고, 그 지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에게 속한 여러 것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9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천적인간은그러한동산’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과 무관한 외부의 장소로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성과 지혜와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질서를 함께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그동산은주님의것’이라고 합니다. 천적 인간이 동산이라고 하면서도 그 동산의 소유권을 인간에게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퍼셉션, 사랑과 신앙, 지혜, 선과 진리, 앎, 이성, 기억지식 등은 모두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이지만, 그 근원을 사람 자신에게 둘 수는 없습니다. AC.78에서도 이 모든 것이 지혜에서 나오며 그 지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AC.79는 이제 그 질서를 ‘그동산은주님의것’이라는 말로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따라서 ‘누리는것’과 ‘자기것으로소유하는것’의 구별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사람이 실제로 누린다는 사실은 부정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지혜와 지성,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실제로 있으며, 그는 그것들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없으므로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행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선하고 참된 것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질서와 관계됩니다.
AC.79는 아직 이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것으로소유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며,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것으로 보이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뒤에서 더 깊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후대의 ‘proprium’교리를 모두 앞당겨 넣기보다, 천적 인간이 모든 것을 풍성하게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자기 소유로 삼지 않는다는 기본 질서를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이라는 말과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라는 말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질서 안에서 함께 성립합니다. (AC.79해설)
그다음그의지성은동쪽에있는에덴동산으로묘사됩니다.그동산에서보기에아름다운나무들은진리에대한퍼셉션이고,먹기에좋은나무들은선에대한퍼셉션입니다.생명나무는사랑을뜻하고,지식[scientiae]의나무는신앙을뜻합니다.(8-9절)Afterwards his intelligence is described by the garden in Eden,in the east;in which the trees pleasant to the sight are perceptions of truth,and the trees good for food are perceptions of good. Love is meant by the tree of lives,faith by the tree of knowledge[scientiae](verses 8–9).
AC.77은 천적 인간의 ‘지성’이 어떻게 묘사되는지를 개요로 보여 줍니다. AC.75에서는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을,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을 다루었고, 이제 그의 지성은 ‘동쪽에있는에덴동산’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이 문맥에서 단순히 아름다운 장소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 인간의 지성과 관계되는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다만 왜 ‘에덴’이고 왜 ‘동쪽’인지까지 AC.77이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 구체적인 속뜻은 뒤따르는 해설을 기다려야 합니다.
동산 안의 나무들도 구별됩니다. ‘보기에아름다운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좋은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진리와 선의 ‘지식’을 말하지 않고 ‘퍼셉션’을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개요만 가지고 퍼셉션의 성격을 모두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천적 인간의 지성 안에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이 있으며, 창2:9의 서로 다른 나무들이 그것을 묘사한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두 나무가 언급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뜻하고,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뜻합니다. 이 대목은 이후 창2와 창3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지식의나무’ 자체를 처음부터 악한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AC.77에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분명히 ‘신앙’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후 지식의 나무와 관련하여 문제가 생길 때에는 신앙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단순화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이 어떤 질서와 관계 안에 놓이는지가 어떻게 설명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77은 이처럼 천적 인간의 지성을 하나의 동산으로, 그 안의 나무들을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으로, 그리고 그 중심적인 두 나무를 사랑과 신앙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창2:8-9의 상세 해설이 아니라 개요입니다. 그러므로 에덴, 동쪽, 나무, 보는 것, 먹는 것,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를 각각 고정된 상응표처럼 미리 완성하기보다, 지금은 이 모든 것이 천적 인간의 지성 안에서 서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전체 그림을 붙들고 뒤따르는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AC.77해설)
그의생명은그에게생명의숨을불어넣으심으로묘사됩니다.(7절)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verse 7).
여호와하나님이땅의흙으로사람을지으시고생기를그코에불어넣으시니사람이생령이되니라(7절)
해설
AC.76은 창2:7의 속뜻을 개요로 제시하면서 천적 인간의 ‘생명’에 초점을 맞춥니다. AC.75에서는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이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된다고 했고, 이제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그에게 ‘생명의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창2:5-7의 여러 표현은 서로 떨어진 장면들이 아니라 천적 인간에게 속한 것들을 차례로 보여 주는 하나의 흐름 안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생명의숨’을 불어넣으심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설명하지 않고, 그것이 ‘그의생명’을 묘사한다고만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 개요에서 ‘생명의숨’을 곧바로 어떤 특정한 인간의 능력이나 기능 하나와 동일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이 표현을 단순히 최초 인간의 육체가 처음 호흡하기 시작했다는 장면으로만 한정해서 읽는다면, 스베덴보리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거듭남의 연속적인 문맥을 놓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AC.73부터 계속 다루고 있는 천적 인간입니다.
특히 ‘그에게…불어넣으심’이라는 표현은 그의 생명의 근원이 그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AC.76한 문장만으로 그 생명이 정확히 무엇이며,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오는지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 개요가 직접 말하는 것은 천적 인간의 생명이 창2:7의 ‘생명의숨을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표현의 구체적인 속뜻은 뒤따르는 상세 해설에서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AC.76은 매우 짧지만 AC.75와 함께 중요한 구별을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고, 또한 그의 생명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는 관목과 초목 및 그것들을 적시는 안개의 모습으로, 후자는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합니다. 이 각각이 천적 인간 안에서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는 아직 개요에서 앞당겨 정하지 않고, 이어지는 설명의 순서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AC.76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