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0 심화

2. 왜 ‘비’와 ‘안개’가 싸움이 그친 뒤의 ‘평화의 평온’을 뜻하는가?

 

AC.90은 곧이어 ‘안개’라 하는 ‘비’가 싸움이 그칠 때의 ‘평화의 평온’이라고 합니다. 자연계의 비와 안개가 왜 사람의 내적인 평화와 연결되는 것일까요?

 

AC.90만 읽으면 스베덴보리는 우선 그 의미를 선언할 뿐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AC.91에서 그 이유를 밝혀 줍니다. 이 평온은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와 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비와 안개의 핵심은 단순히 물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혹은 안으로부터 내려와 메마른 것을 적시고 그곳에서 무엇인가 자라게 하는 모습에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변화하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싸움이 그칩니다. 그때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에게 미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상태를 비와 안개가 지면을 적시는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평화의 평온’은 단순히 싸움이 사라져 조용해진 상태가 아닙니다. AC.92에서는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하여, 그 평온은 단지 싸움의 그침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 생명이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때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어 태어납니다. 비와 안개는 바로 이처럼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생명이 미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비’와 ‘안개’를 단순히 ‘평화’라는 단어와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상응의 모습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메마른 지면이 스스로를 적시는 것이 아니라 비와 안개에 의해 적셔지고, 그렇게 적셔진 지면에서 식물이 자랍니다. 이와 같이 천적 인간의 겉 사람도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을 받아 그 안에서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산출합니다.

 

이 점에서 AC.90의 비와 안개는 AC.87-92의 흐름을 하나로 이어 줍니다.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시고, 싸움이 그치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바로 서고, 그때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을 적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으로부터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비와 안개는 단순한 고요함의 표상이 아니라, 싸움이 끝난 뒤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이 사람 안에 흘러들어 새로운 것을 자라게 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AC.90 심화 2)

 

 

 

AC.90, 창2:5-6, ‘땅에서 지면과 들로, 싸움이 그친 뒤의 평화의 평온’ (AC.90-93)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there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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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0 심화 1, 왜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은 ‘땅’이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인

AC.90 심화1. 왜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은 ‘땅’이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인가? AC.90에서 스베덴보리는 같은 겉 사람을 두고도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머물러 있을 때에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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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0 심화

1. 왜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은 ‘땅’이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인가?

 

AC.90에서 스베덴보리는 같은 겉 사람을 두고도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머물러 있을 때에는 ‘땅’이라 하고, 천적 인간이 되면 ‘지면’, 또한 ‘들’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겉 사람은 그대로인데 그 명칭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먼저 이 차이는 AC.89에서 설명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형성 질서와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의 개혁은 겉 사람, 곧 ‘땅’에서 시작하지만,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 곧 ‘하늘’에서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겉 사람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AC.90에서 그 달라진 상태의 겉 사람을 ‘지면’과 ‘들’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 ‘지면’, ‘들’이라는 세 단어에 언제 어디서나 적용할 수 있는 고정된 의미표를 만들라는 뜻은 아닙니다. AC.90이 직접 알려 주는 것은 현재의 문맥에서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은 ‘땅’이라 하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스베덴보리가 이 번호에서 밝힌 범위 안에서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 ‘지면’과 ‘들’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 줄까요? 바로 이어지는 설명이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 이제 그 ‘들’에서는 ‘관목’과 ‘초목’이 산출됩니다. AC.90은 이것들을 일반적으로 ‘그의 겉 사람이 산출하는 모든 것’이라고 합니다. 즉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속 사람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영역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받아 산출하는 영역으로 묘사되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바로 다음 AC.91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시자 거기에서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산출됩니다. 따라서 ‘지면’과 ‘들’은 천적 인간 안에서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생명 있는 것을 산출하는 겉 사람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지면’과 ‘들’로 명칭이 달라지는 것을 단순한 어휘 변화로 볼 수 없습니다.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변화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달라졌고, 그 결과 겉 사람도 새로운 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겉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제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며, 그곳에서 흘러오는 생명과 평온을 받아 열매 맺는 ‘지면’과 ‘들’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땅은 언제나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이고, 지면과 들은 언제나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은 문맥과 주제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AC.90이 지금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천적 인간의 형성이라는 이 문맥에서 겉 사람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말씀의 표현도 ‘땅’에서 ‘지면’과 ‘들’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AC.90 심화 1)

 

 

 

AC.90 심화 2, 왜 ‘비’와 ‘안개’가 싸움이 그친 뒤의 ‘평화의 평온’을 뜻하는가?

AC.90 심화2. 왜 ‘비’와 ‘안개’가 싸움이 그친 뒤의 ‘평화의 평온’을 뜻하는가? AC.90은 곧이어 ‘안개’라 하는 ‘비’가 싸움이 그칠 때의 ‘평화의 평온’이라고 합니다. 자연계의 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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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0, 창2:5-6, ‘땅에서 지면과 들로, 싸움이 그친 뒤의 평화의 평온’ (AC.90-93)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there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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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9 심화

1. 왜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뀌는가?

 

AC.89에서 스베덴보리는 창2부터 나타나는 한 가지 중요한 변화를 지적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을 다루는 구절들에서는 주님을 단지 ‘하나님’이라 하였는데, 이제 천적 인간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호칭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먼저 AC.89이 실제로 말하는 범위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호칭의 변화를 분명히 지적하고, 이것을 지금부터 앞에서 다루었던 영적 인간과는 다른 사람, 곧 천적 인간을 다룬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AC.89 자체에서는 왜 영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하나님’이라 하고 천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 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한 번호만으로 ‘여호와는 언제나 사랑을 뜻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진리를 뜻한다’거나,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과 진리의 결합을 뜻한다’는 식으로 고정해서 설명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곳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차이를 설명하더라도, 그 설명을 확인하지 않은 채 AC.89의 짧은 언급만으로 전체 호칭 체계를 먼저 완성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이 질문을 계기로 ‘예수’, ‘그리스도’, ‘주’, ‘구주’,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 아들’, ‘인자’, ‘성령’ 등 주님에 관한 모든 호칭을 한꺼번에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러한 호칭들은 각각 성경의 문맥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호칭을 설명하는 곳에서 살펴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여러 호칭이 나온다고 해서 각 호칭에 하나씩 고정된 기능이나 작용을 미리 배정해 놓고 이후의 본문을 그 틀에 맞추어 읽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89의 호칭 변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것을 천적 인간의 형성이 새롭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제시했으므로 반드시 주목해야 합니다. 창1에서 영적 인간이 형성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라 하였는데, 창2에서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면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등장합니다. 독자는 우선 이 변화가 우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방법에서도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질 때 그 차이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이름 하나를 발견하자마자 미리 만든 의미표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 이름의 차이를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89에서는 우선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의 변화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주제가 전환되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표지라는 데까지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왜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뀌는가?’라는 질문은 여기서 완전히 닫기보다 가지고 가는 편이 좋습니다. AC.89이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 주는 것은 호칭의 변화가 의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더 깊은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이후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름들을 직접 설명할 때 하나씩 확인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먼저 만든 주님의 호칭 체계로 AC를 읽는 것이 아니라, AC 자체가 주님의 여러 이름을 어떻게 열어 가는지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89 심화 1)

 

 

 

AC.89, 창2:4, ‘하늘과 땅의 내력 -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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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5 심화

1. ‘이 아르카나는 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는가?’

 

AC.85의 첫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고 그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 하였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아르카나라면, 왜 이것은 처음부터 좀 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말씀에 이 정도의 설명이라도 함께 주어졌다면 안식일과 창조의 날들을 둘러싼 많은 혼란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답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AC.85가 실제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영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85가 직접 주는 첫 번째 답은 분명합니다. ‘일곱째 날’과 ‘안식일’의 속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모르면 왜 영적 인간의 형성이 여섯째 날과 연결되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과 연결되는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앞의 AC.67에서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 안에는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결코 알 수 없는’ 아르카나들이 있다고 한 것과도 닮아 있습니다. 어떤 속뜻은 단어 하나의 암호를 알아내듯 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뜻이 가리키는 영적 실재 자체를 알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C.85의 안식일도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천적 인간이라는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하면 일곱째 날이 왜 천적 인간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천적 인간의 본성을 처음부터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설명하지 않으셨는가?’라고 물으면, AC.85 한 번호만으로는 충분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AC.85는 ‘왜 이 아르카나가 알려지지 않았는가?’에 관하여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왜 주님께서 그것을 더 일찍 명시적으로 계시하지 않으셨는가?’라는 더 큰 섭리의 문제까지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자유와 수용 상태, 말씀의 문자와 속뜻의 관계, 속뜻의 보존, 신적 섭리와 계시의 때 같은 스베덴보리의 다른 가르침들을 곧바로 AC.85의 확정적인 해답으로 끌어오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주제들은 이 질문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지만, 각각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문제를 다루는 곳에서 확인하면서 연결해야 합니다.

 

또 하나 조심할 것은 ‘속뜻이 처음부터 명백하게 쓰여 있었다면 교회사적 혼란이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인간적인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명백한 설명이 언제나 명백한 수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주님의 계시 방식에 대한 우리의 추측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히는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고 처음의 질문을 접어 둘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한 질문으로 남겨 둘 가치가 있습니다. 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것은 아르카나이다’라고 말하는 곳들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왜 이제야 밝혀지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본문들이 충분히 쌓이면 한 번호에서의 추측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의 여러 설명을 서로 대조하면서 더 신중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AC.85에서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데까지 먼저 가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안식일이라는 아르카나가 알려지지 않았던 직접적인 이유는 천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영적 인간의 본성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깊은 질문, 곧 ‘왜 이러한 영적 실재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도록 허용되었는가?’는 여기서 성급하게 닫지 않고, 앞으로 AC가 그 답을 열어 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할 질문입니다. (AC.85 심화 1)

 

 

 

AC.85, 창2:2-3,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며, 천적 인간의 안식은 주님의 안식이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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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심화

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에 느껴지는 문장이 있습니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창1과 창2에서 ‘천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거듭남의 가장 깊은 상태에 이른 사람이나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갑자기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천적 인간이라 했던 사람들은 무엇이며, 왜 여기서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AC.162가 무엇을 설명하려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온다고 말합니다. 이어 온 천국이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하고, 그 이유를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며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강조점은 누가 천적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보다 ‘천적인 것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2에서 계속 배워 온 질서와도 같습니다. 지혜와 지성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과 진리도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AC.149에서는 더 나아가 오직 주님만이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의 것, 곧 주님의 proprium을 가지고 계시며, 주님의 proprium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생명이 아니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천적인 것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인 생명을 받아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라는 말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천적 인간’이었다는 말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천적인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천적 인간이십니다. 반면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천적 인간이 됩니다. AC.155에서 천사들이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천사가 천사인 까닭도, 천적 인간이 천적 인간인 까닭도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AC.162가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한 뒤 곧바로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의 모든 천사를 하나의 거대한 사람으로 상상하라는 데 우선적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천국의 천적인 성질 자체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도 ‘주님께서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시므로, 천국과 천적 인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적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은 스스로 천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적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혼인의 법’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지상의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한다고 할 때, 그 천적 혼인의 가장 깊은 중심에도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AC.162가 천적 혼인을 ‘한 분 주님과 하나의 천국, 곧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라고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혼인의 하나 됨도 인간 둘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 그 본과 질서를 한 분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따라서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라는 문장은 인간이나 천사의 천적 상태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천적인 모든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고 천국이 천적 천국이 되는 것은 주님과 별도로 천적인 무엇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생명과 질서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짧은 문장은 지금까지 창2가 계속 가르쳐 온 한 가지 질서를 다시 가장 깊은 곳에서 확인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AC.162 심화 1)

 

 

 

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AC.162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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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AC.162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시므로, 천국과 천적 인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적이라 합니다.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오는 것처럼, 특별히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이 그러합니다. 지상의 모든 혼인은 ‘천적 혼인’(celestial marriage), 곧 천국의 혼인으로부터, 그리고 그 혼인에 따라 파생되어야 합니다. 이 혼인은 한 분 주님과 하나의 천국, 곧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가 있는 그러한 혼인입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혼인의 법’(law of marriages)은 한 남편과 한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그들은 천적 혼인을 표상하며, 천적 인간의 본이 됩니다. 이 법은 태고교회의 사람들에게 계시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속 사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는 한 남자가 오직 한 아내만을 두었고, 그들은 하나의 집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었을 때에는 여러 아내를 맞이하였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그들의 혼인에서 천적 혼인을 표상했기 때문에, 부부의 사랑은 그들에게 일종의 천국이자 천국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다수에게서 오는 쾌락, 곧 겉 사람의 즐거움에서 행복을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마음의 완악함’(hardness of heart)이라 하셨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여러 아내를 두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 flow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 and as he is the all in all of heaven and the celestial man, they are thence called celestial. As every law of truth and right descends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so in an especial manner does the law of marriages. It is the celestial (or heavenly) marriage from and according to which all marriages on earth must be derived; and this marriage is such that there is one Lord and one heaven, or one church whose head is the Lord. The law of marriages thence derived is that there shall be one husband and one wife, and when this is the case they represent the celestial marriage, and are an exemplar of the celestial man. This law was not only revealed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as also inscribed on their internal man, wherefore at that time a man had but one wife, and they constituted one house. But when their posterity ceased to be internal men, and became external, they married a plurality of wives. Becaus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ir marriages represented the celestial marriage, conjugial love was to them a kind of heaven and heavenly happiness, but when the church declined they had no longer any perception of happiness in conjugial love, but in pleasure from a number, which is a delight of the external man. This is called by the Lord “hardness of heart,” on account of which they were permitted by Moses to marry a plurality of wives, as the Lord himself teaches: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막10:5-9) For the hardness of your heart Moses wrote you this precept,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twain shall be one flesh; wherefore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 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t man put asunder. (Mark 10:5–9)

 

해설

AC.162는 창2:24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를 혼인 자체의 질서로 확장하여 설명합니다. 출발점은 지상의 혼인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인간 사회의 편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특별히 혼인의 법이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혼인은 단순한 사회 제도나 생활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질서가 지상에서 표상되는 매우 중요한 형식입니다.

 

이 설명의 중심에는 ‘천적 혼인’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상의 모든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그리고 그 혼인에 따라 파생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천적 혼인을 설명하면서 먼저 ‘한 분 주님과 하나의 천국’을 말하고, 이어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를 말합니다. 따라서 혼인의 하나 됨을 이해하는 가장 깊은 기준은 두 인간이 서로에게만 집중하여 하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 됨의 근원이 한 분 주님에게 있다는 데 있습니다. 천국도 교회도 그분을 머리로 할 때 하나이며, 지상의 혼인도 이 천적 질서를 표상합니다.

 

바로 여기서 한 남편과 한 아내라는 혼인의 법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당시의 관습이나 인간이 만들어 낸 윤리 규정에서 도출하지 않고 천적 혼인으로부터 도출합니다. 한 남편과 한 아내가 혼인을 이룰 때 그들은 천적 혼인을 표상하고 천적 인간의 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부일처는 이 단락에서 단순히 허용된 여러 결혼 형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천적 혼인에서 파생되는 혼인의 질서로 제시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이 법이 외적으로 계시되었을 뿐 아니라 속 사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이 한 남자와 한 여자로 하나의 집을 이루었던 것은 단지 외적인 명령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가 그 질서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부의 사랑은 ‘일종의 천국이자 천국의 행복’이었습니다. 혼인의 외적 형태와 그들의 내적 생명의 질서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혼인에서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들은 더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다수에게서 오는 쾌락, 곧 겉 사람의 즐거움에서 그것을 퍼셉션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아내의 수가 바뀌었다는 외적 사실보다 행복을 어디에서 퍼셉션하게 되었는가 하는 내적 변화입니다. 혼인의 외적 변화는 이미 일어난 인간 내면의 변화를 드러내는 결과였습니다.

 

이 때문에 AC.162가 막10:5-9를 인용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모세가 허용한 것을 곧바로 창조의 본래 질서와 동일시하지 않으시고,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신 뒤 ‘창조 때로부터’의 질서로 돌아가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한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수의 아내가 허락되었다는 사실이 혼인의 본래 법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허용된 것이 있었지만, 혼인의 기원과 기준은 여전히 천적 혼인에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마음의 완악함’을 단순히 고집이 세거나 잔인하다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AC.162 자체의 흐름에서 보면,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었으며, 부부의 사랑에서 누리던 천국의 행복을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된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막10장에서 모세의 허용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창조의 처음을 다시 가리키신 것은, 인간의 변화된 상태와 혼인의 본래 질서를 구별하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AC.162는 이렇게 창2:24를 천적 혼인에서 지상의 혼인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질서 안에 놓습니다. 한 분 주님, 하나의 천국과 교회, 한 남편과 한 아내, 그리고 하나의 집이라는 흐름의 중심에는 단순한 숫자상의 ‘하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 됨이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부부의 사랑이 천국의 행복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혼인이 이 천적 질서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혼인의 법’은 결혼생활에 관한 하나의 규칙을 넘어, 지상의 혼인이 어디에서 그 본과 질서를 받아야 하는지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AC.162 해설)

 

심화

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 심화 2,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 심화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에 느껴지는 문장이 있습니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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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창2:24,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스며들게 하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이 태고교회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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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를 쉽게 퍼셉션할 수 없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구별되며, 참으로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 그리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어떻게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이 천적 인간의 후손들의 상태는 겉 사람에게 속한 그들의 proprium을 원한 결과 너무나 달라져, 그들은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이러한 퍼셉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not easy to perceive how the case is with these things unless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is understood.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 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 and what to the external, 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But the state of the posterity of this celestial man, in consequence of desiring their own, which belongs to the external man, was so changed that they no longer perceived the internal man to be distinct from the external, but imagined the internal to be one with the external, for such a perception takes place when man inclines to his own.

 

해설

AC.159는 앞에서 다루어 온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할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AC.156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을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결합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사라져 둘이 뒤섞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159는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교리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 가운데 무엇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결합’이 함께 존재하는 질서였습니다.

 

특히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주도권의 근원은 겉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겉 사람이 스스로를 다스리면서 속 사람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창2 전반에서 계속되어 온 천적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와 모든 능력이 주님께 속한 것임을 퍼셉션했습니다. 이제 같은 질서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의 후손들에게서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이었습니다. 이 점은 AC.131 이후 계속된 흐름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으며, 마침내 그 proprium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C.159는 이러한 변화가 단지 ‘자기 것을 갖고 싶어 했다’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퍼셉션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후손들은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는 AC.156에서 말한 올바른 결합과 구별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면서도 주님의 질서 안에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후손들은 그 구별 자체를 잃어버리고 둘을 하나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참된 결합은 구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를 다시 proprium과 연결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는 이러한 지각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설명입니다.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을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서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를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겉 사람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곧 자기 존재 전체의 생명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AC.159는 AC.147-155에서 계속 다루어 온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AC.155의 천사들도 특별히 그 근원을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반면 여기의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그 질서를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AC.159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는 열쇠는 ‘구별되어 있으면서 결합되어 있음’에 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다른 것에 속하지만 분리되어 제각기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심으로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으로 기울면 이 질서에 대한 퍼셉션이 흐려지고, 사람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AC.159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이 단순한 도덕적 타락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생명의 근원과 내적 질서를 퍼셉션하는 방식의 변화이기도 했음을 보여 줍니다. (AC.159)

 

 

 

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다 -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됨’ (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부모를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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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 창2:23, ‘사람 - 지혜롭고 지성 있는 속 사람’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8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곧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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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짓는 것’(build)은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하고, ‘갈빗대’(rib)는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을,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며, ‘그 여자를 사람에게로 이끌어 오신 것’(he brought her to the man)은 그의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의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천적 인간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proprium으로 기울었고, 그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었으며, 그러므로 ‘여자’(woman)라 하고, 뒤에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By to “build” is signified to raise up what has fallen; by the “rib,” man’s own not vivified; by a “woman,” man’s own vivified by the Lord; by “he brought her to the man,” that what is his own was granted him. The posterity of this church did not wish, like their parents, to be a celestial man, but to be under their own self-guidance; and, thus inclining to their own, it was granted to them, but still an own vivified by the Lord, and therefore called a “woman,” and afterwards a “wife.”

 

해설

AC.151은 창2:22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는 말씀의 주요 표현들을 하나씩 풀이하면서, AC.131부터 이어져 온 proprium의 논의를 중요한 지점까지 정리합니다. 특히 이제 ‘갈빗대’와 ‘여자’의 차이가 명확하게 제시됩니다. 갈빗대는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입니다.

 

먼저 ‘짓는 것’(build)은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여자를 지으신다는 것은 속뜻에서 전혀 없던 어떤 독립적인 proprium을 새로 만들어 인간에게 붙여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의 인도를 원하며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 있는 인간을 그대로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짓는다’는 것은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의미를 가집니다.

 

‘갈빗대’(rib)는 AC.147-149에서 설명한 것처럼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는 이것이 매우 소중하고 심지어 모든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AC.149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이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뼈처럼 보이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갈빗대에서 여자가 지어지는 장면은 그 자체로 죽어 있는 proprium이 그대로 존속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로 생명을 얻는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여자’(woman)는 이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이 대목은 앞의 AC.138을 읽을 때 우리가 조심스럽게 유보했던 부분을 본문 자체가 확정해 줍니다. AC.138에서는 ‘그를 돕는 배필’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고 뒤에서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라고 한다는 정도까지만 설명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때에는 ‘여자’를 문맥과 관계없이 언제나 proprium을 뜻하는 고정된 상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AC.151에 이르러서야 현재 창2:22의 문맥에서 ‘여자’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직접 밝혀집니다. 곧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입니다.

 

‘그 여자를 사람에게로 이끌어 오신 것’(he brought her to the man)은 그의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 역시 AC.132 이후 반복되어 온 ‘허락된 proprium’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욕구 자체를 인간 안에 악으로 주입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원하는 proprium을 그 자체로 죽어 있는 상태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proprium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둘째 문단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역사적·교회적 배경을 다시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사람들은 태고교회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조상들처럼 천적 인간이 되어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이 욕구 때문에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기울어진 상태에서조차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지만, 그것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었습니다. 이 점이 창2의 이 장면을 단순한 타락의 묘사로만 읽을 수 없게 합니다.

 

여기서 AC.147의 ‘깊은 잠’도 다시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기며, 자기에게 속한 것을 가진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AC.149-150에서 밝혀졌듯 실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제 AC.151은 인간이 원했던 바로 그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어 그에게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역사는 인간에게 자기 경험을 빼앗아 자기 자신이 없는 존재로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자기 것으로 경험하는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을 ‘여자’(woman)라 하고 뒤에는 ‘아내’(wife)라고 한다고 말합니다. 현재 번호에서는 아직 ‘여자’와 ‘아내’라는 두 표현 사이의 차이를 자세히 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 차이에 별도의 의미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문맥의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이며, 그 proprium이 인간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설명에서 이 여자가 사람과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가 더 밝혀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51)

 

 

 

AC.152, 창2:22, ‘여자가 proprium을 의미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2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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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 창2:21, ‘깊은 잠 -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50인간이 자신의 proprium 안에 있을 때, 곧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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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93

이와 같이 평화의 평온을 부여받고, 비로 새롭게 되며, 악하고 거짓된 것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주님께서는 에스겔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thus gifted with the tranquility of peace—refreshed by the rain—and delivered from the slavery of what is evil and false,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in Ezekiel:

 

25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31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겔34:25-27, 31) I will make with them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beast to cease out of the land, and they shall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and sleep in the woods; and I will make them and the places round about my hill a blessing; and I will cause the rain to come down in his season; rains of blessing shall they be. And the tree of the field shall yield its fruit, and the earth shall yield its increase, and they shall be upon their ground in confidence, and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when I have broken the reins of their yoke, and delivered them out of the hand of those that make them to serve them; and ye my flock, the flock of my pasture, ye are a man, and I am your God (Ezek. 34:25–27, 31).

 

그리고 이것이 ‘셋째 날’(third day)에 이루어지며, ‘셋째 날’은 말씀에서 ‘일곱째’(seventh)와 같은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호세아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And that this is effected on the “third day,” which in the Word signifies the same as the “seventh,” is thus declared in Hosea: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6:2, 3) After two days will he vivify us; 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 and we shall live before him and we shall know, and shall follow on to know Jehovah: his going forth is prepared as the dawn, and he shall come unto us as the rain, as the late rain watering the earth (Hos. 6:2–3).

 

그리고 이 상태가 ‘들의 성장’(growth of the field)에 비유된다는 것을 고대교회에 관하여 말씀하는 에스겔에서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And that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growth of the field” is declared by Ezekiel, when speaking of the ancient church: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겔16:7) I have caused thee to multiply as the growth of the field, and thou hast increased and hast grown up, and hast come to excellent ornaments (Ezek. 16:7).

 

또한 다음과 같은 것에도 비유됩니다. And it is also compared to: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사60:21) A shoot of the Lord’s planting, and a work of the hands of Jehovah God (Isa. 60:21).

 

해설

AC.93은 AC.90-92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여러 선지서의 말씀으로 확증합니다. 앞에서는 싸움이 그치면서 평화의 평온이 오고, 그 평온이 ‘비’와 ‘안개’로 나타나며,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생명이 흘러들어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에스겔, 호세아, 이사야의 말씀 안에서 평화와 비, 땅과 들의 성장, 생명과 주님의 손으로 하신 일이 서로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먼저 겔34의 ‘화평의 언약’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매우 풍성하게 보여 줍니다. 악한 짐승이 그치고, 사람이 평안히 거하며, 복된 비가 내리고,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냅니다. 또한 멍에가 꺾이고 종으로 삼던 자의 손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이것은 AC.93의 첫 문장이 말한 ‘악하고 거짓된 것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상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평화는 단순히 위험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열매를 맺는 상태입니다.

 

특히 ‘복된 소낙비’는 앞의 AC.90-92와 직접 연결됩니다. AC.91에서는 ‘비’와 ‘안개’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는 평화의 평온이라고 했고, AC.92에서는 그것이 단순한 싸움의 그침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에서 비가 내리자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고 땅이 소산을 내는 것은, 평화의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쳐 거기에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생명을 얻어 산출되는 앞의 설명을 성경 본문으로 보여 줍니다.

 

호6:2-3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상태가 ‘셋째 날’에 이루어지며,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셋째 날’이 ‘일곱째’와 같은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앞에서 일곱째 날은 싸움이 그치고 주님께서 쉬시는 천적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에서도 셋째 날에 사람이 살아나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살며, 주님의 나타나심은 새벽과 같고 비와 같이 임합니다. 따라서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은 숫자 자체가 같다는 뜻이 아니라, 이 문맥에서 생명과 완성 및 새로운 상태에 들어감을 함께 가리키는 말씀의 표현으로 제시됩니다.

 

호세아의 ‘새벽’은 AC.86에서 보류했던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안식일의 저녁’이라 하고, 천적 인간은 곧 설명할 ‘아침’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호세아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을 살리시고 일으키시는 것과 함께 그분의 나타나심이 ‘새벽빛’에 비유되고, 이어서 땅을 적시는 비가 나옵니다. 따라서 ‘아침’은 밤이라는 시간대가 끝나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나타나고 평화의 비가 내려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것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93은 ‘아침’의 상응을 독립적으로 정의하는 번호는 아니므로 그 이상의 세부 의미를 여기서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들의 성장’과 ‘여호와께서 심으신 가지’, ‘여호와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이라는 표현들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앞의 관목과 초목이 천적 인간의 겉 사람에서 산출되는 것이라는 설명과 연결되는 동시에, AC.88의 ‘새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의 일’이라는 원리도 다시 확인합니다. 사람이 생명을 얻고 자라며 열매 맺는 모든 과정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93에 인용된 여러 성경 구절은 서로 흩어진 증거 구절들이 아닙니다. ‘평화의 언약’, ‘복된 비’, ‘땅의 소산’, ‘셋째 날’, ‘새벽’, ‘들의 성장’, ‘주님의 심으심과 손으로 하신 일’이 모두 앞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줍니다. 싸움과 종살이가 그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이 겉 사람을 적시며, 그 생명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자라나는 상태가 바로 여기서 묘사되는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AC.93 해설)

 

 

 

AC.92, 창2:5-6, '평화는 싸움의 그침만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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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창2:4)

 

AC.89

‘하늘과 땅의 내력’(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은 천적 인간의 형성을 뜻합니다. 여기서 그의 형성을 다룬다는 것은 뒤이어 나오는 모든 세부 사항에서 매우 분명합니다. 아직 초목이 자라지 않았고, 지면을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형성하셨고, 그 후에 모든 짐승과 하늘의 새를 만드셨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의 형성은 앞 장에서 이미 다루었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여기서는 다른 사람을 다룬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처음으로 주님을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이라 한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을 다루는 구절들에서는 주님을 단지 ‘하나님’(God)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이제는 ‘지면’(ground)과 ‘들’(field)을 말하지만, 앞에서는 오직 ‘땅’(earth)만을 말하였습니다. 이 절에서는 또한 ‘하늘’(heaven)을 먼저 ‘땅’(earth) 앞에 말하고, 그 뒤에는 ‘땅’(earth)을 ‘하늘’(heaven) 앞에 말합니다. 그 이유는 ‘땅’(earth)은 겉 사람을, ‘하늘’(heaven)은 속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의 경우에는 개혁이 ‘땅’(earth), 곧 겉 사람에서 시작하지만, 여기서 다루는 천적 인간의 경우에는 속 사람, 곧 ‘하늘’(heaven)에서 시작합니다.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are the formations of the celestial man. That his formation is here treated of is very evident from all the particulars which follow, as that no herb was as yet growing; 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s well as that Jehovah God formed man, and afterwards, that he made every beast and bird of the heavens, notwithstanding that the formation of these had been treated of in the foregoing chapter; from all which it is manifest that another man is here treated of. This however is still more evident from the fact that now for the first time the Lord is called “Jehovah God,” whereas in the preceding passages, which treat of the spiritual man, he is called simply “God”; and, further, that now “ground” and “field” are mentioned, while in the preceding passages only “earth” is mentioned. In this verse also “heaven” is first mentioned before “earth,” and afterwards “earth” before “heaven”; the reason of which is that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 and “heaven” the internal, and in the spiritual man reformation begins from “earth,” that is, from the external man, while in the celestial man, who is here treated of, it begins from the internal man, or from “heaven.”

 

해설

AC.89는 창2:4부터 왜 다시 사람과 땅과 동식물의 형성을 말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창1에서 이미 이러한 것들의 창조를 다루었는데도 창2에서는 아직 초목이 자라지 않았고 지면을 경작할 사람도 없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형성하시고 다시 짐승과 새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영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었고, 이제는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늘과 땅의 내력’도 천적 인간의 형성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이라는 표현은 역사적으로 또 하나의 별개의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상태가 달라졌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앞에서 ‘여섯째 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한다고 했고, 이제 창2:4 이하에서는 그 천적 인간의 형성을 더욱 자세히 다룹니다. 따라서 창1과 창2의 차이는 동일한 창조 이야기를 단순히 두 번 되풀이한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 서로 다른 상태의 인간을 다룬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전환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증거로 하나님의 호칭에 주목합니다. 영적 인간을 다루던 앞부분에서는 주님을 ‘하나님’이라 하였지만, 이제 천적 인간을 다루면서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라 합니다. AC.89은 이 호칭의 변화가 우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지만, 여기서는 아직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유를 미리 고정하여 설명하기보다, 우선 이 호칭의 변화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주제가 전환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지라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습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땅’뿐 아니라 이제 ‘지면’과 ‘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가 직접 지적하는 본문의 변화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들을 모두 같은 말처럼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AC.89은 여기서 ‘지면’과 ‘들’ 각각의 속뜻을 아직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 의미를 앞질러 정하지 않고 뒤의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절의 어순도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하늘과 땅’이라 하여 하늘이 먼저 나오고, 뒤에는 ‘땅과 하늘’이라 하여 순서가 바뀝니다. 스베덴보리는 ‘땅’이 겉 사람을, ‘하늘’이 속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하면서 이 순서의 변화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형성 질서의 차이를 보여 준다고 합니다. 영적 인간의 개혁은 ‘땅’, 곧 겉 사람에서 시작하지만, 천적 인간의 형성은 ‘하늘’, 곧 속 사람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89는 창1에서 창2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이미 다룬 사람과 피조물의 형성이 다시 등장하는 것,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호칭이 달라지는 것, ‘땅’뿐 아니라 ‘지면’과 ‘들’이 등장하는 것, 그리고 ‘하늘과 땅’의 순서가 달라지는 것 모두가 이제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영적 인간의 개혁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고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한다는 마지막 설명은, 두 상태의 차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AC.89 해설)

 

심화

1. 왜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뀌는가?

 

AC.89 심화 1, 왜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뀌는가?

AC.89 심화1. 왜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뀌는가? AC.89에서 스베덴보리는 창2부터 나타나는 한 가지 중요한 변화를 지적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을 다루는 구절들에서는 주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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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0, 창2:5-6, ‘땅에서 지면과 들로, 싸움이 그친 뒤의 평화의 평온’ (AC.90-93)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there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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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8, 창2:2-3, ‘새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의 일이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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