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19 심화

1. ‘신앙의 선을 아는 것과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AC.419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곧이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두 문장을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신앙에 선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면, 그 선대로 살아가는 일을 왜 다시 천적인 것으로 구별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스베덴보리가 ‘무엇이 선한지 이해하는 일’과 ‘그 선대로 살아가는 일’을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이 참된지 배울 수 있고, 무엇이 선한지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이해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의 지식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명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려 줍니다.

 

그러나 무엇이 선한지 아는 것과 실제로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동의하면서도 정작 이웃을 대할 때에는 자신의 이익이나 감정만을 앞세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웃에게 선하게 대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경우의 차이는 선에 관한 지식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이라고 구별한 이유를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별을 ‘신앙은 지식에 불과하고 사랑만 중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AC.419는 신앙에 진리와 선이 모두 포함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는 일은 그 자체로 신앙에 속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다만 그러한 이해가 실제 삶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선을 가르친다는 사실과, 사람이 그 선대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418에서 스베덴보리는 마음의 애정이 천적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노래가 영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신앙에 관한 지식이 진리와 선을 포함하지만,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호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관계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애정과 그 표현의 관계를, 여기서는 신앙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일과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을 설명합니다. 이 두 설명을 하나의 기계적인 공식으로 합치기보다는, 각각의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구별하는지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이 구별은 신앙생활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어떤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그 교리가 자신의 삶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실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진리와 선을 배우는 일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신앙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가르치며, 사람은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문제 앞에 서게 됩니다. AC.419는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않도록 돕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천적인 것이라는 설명을, 사람이 자신의 힘만으로 선을 실천하면 천적인 상태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가르침에서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이번 번호 역시 인간의 독립적인 선행 능력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지식과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을 구별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을 때에는 선한 삶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AC.419는 신앙의 선을 아는 것과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신앙은 진리와 선을 모두 가르치지만, 그 가르침을 이해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은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의 지식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그 지식이 자신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선을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여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AC.419 심화 1)

 

 

 

AC.419, 창4:21, ‘수금은 신앙의 진리를, 퉁소는 신앙의 선을 의미하는 이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9천적인 것들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인 것처럼,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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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0

‘동산’(garden)이 지성을 뜻하고, ‘에덴’(Eden)이 사랑을 뜻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도 나타납니다. That a “garden” signifies intelligence, and “Eden” love, appears also from Isaiah: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51:3) Jehovah will comfort Zion, he will comfort all her waste places, and he will make her wilderness like Eden, and her desert like the garden of Jehovah; joy and gladness shall be found therein, confession and the voice of singing (Isa. 51:3).

 

이 구절에서 ‘광야’(wilderness), ‘기쁨’(joy),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사랑에 관계되는 것들을 나타내는 표현들이며, ‘사막’(desert), ‘즐거움’(gladness), ‘노랫소리’(the voice of singing)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는 표현들입니다. 앞의 것들은 ‘에덴’(Eden)에, 뒤의 것들은 ‘동산’(garden)에 관계됩니다. 이 선지서에서는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 끊임없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에덴에 있는 동산’(garden in Eden)이 더 나아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뒤의 10절에 관한 설명에서 볼 수 있습니다. In this passage, “wilderness,” “joy,” and “confession” are terms expressive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relate to love; but “desert,” “gladness,” and “the voice of singing,” of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belong to the understanding. The former have relation to “Eden,” the latter to “garden”; for with this prophet two expressions constantly occur concerning the same thing, one of which signifies celestial, and the other spiritual things. What is further signified by the “garden in Eden,” may be seen in what follows at verse 10.

 

해설

AC.100은 AC.98에서 밝힌 ‘동산’과 ‘에덴’의 뜻을 이사야의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사51:3에는 황폐해진 시온을 여호와께서 회복하실 때 ‘그 광야를 에덴 같게, 그 사막을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에덴’과 ‘동산’이 단순히 같은 아름다운 장소를 반복해서 표현한 말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도 함께 하나를 이루는 두 종류의 것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그는 먼저 ‘광야’, ‘기쁨’, ‘감사함’을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사랑에 관계되는 것들로 보고 이것들을 ‘에덴’과 연결합니다. 반면 ‘사막’, ‘즐거움’, ‘노랫소리’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로 보고 이것들을 ‘동산’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AC.98의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이라는 설명이 이사야의 병행 표현에서도 같은 질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서로 분리된 두 종류의 신앙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번호가 직접 밝히는 구별은 앞의 것들이 사랑에 관계되고 뒤의 것들이 이해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99에서 천적 인간에게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한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사랑과 이해는 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함께 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사야에서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 끊임없이 나타난다고 말하는 점입니다. 그는 성경의 이러한 병행 표현을 단순한 문학적 반복으로만 읽지 않고, 한 표현은 천적인 것을, 다른 표현은 영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광야와 사막’, ‘기쁨과 즐거움’, ‘감사함과 노랫소리’, 그리고 ‘에덴과 동산’이라는 짝은 같은 말을 아무 뜻 없이 되풀이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관계되는 것과 이해에 속한 것이 함께 말씀 안에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다만 AC.100은 ‘에덴에 있는 동산’의 의미를 여기서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 더 나아간 의미는 뒤의 10절에 관한 설명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에덴’은 사랑에, ‘동산’은 지성에 관계되며, 이 둘의 결합이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를 나타낸다는 데까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AC.100 해설)  

심화

1. ‘왜 같은 것을 말하는 두 표현을 하나는 천적, 다른 하나는 영적이라고 하는가?’

 

AC.10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51:3의 말씀을 매우 독특하게 읽습니다. ‘광야를 에덴 같게, 사막을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신다는 말씀에서 ‘광야’, ‘기쁨’, ‘감사함’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사랑에 관계되는 것들을 나타내고, ‘사막’, ‘즐거움’, ‘노랫소리’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사야에서는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 끊임없이 나타나며, 그중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것을 말하는 두 표현에 서로 다른 속뜻이 있다고 보는 것일까요?

 

먼저 AC.100이 말하는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라는 말을 ‘두 표현의 뜻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의미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표현은 하나의 주제를 함께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 서로 구별되는 두 측면을 봅니다. 하나는 사랑에 관계되는 천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에 속한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과 ‘동산’도 서로 떨어진 두 주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사랑과 지성을 각각 나타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98-99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에덴’은 사랑이고 ‘동산’은 지성이며,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듭니다. 따라서 사랑과 지성은 하나를 이루지만 그렇다고 서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이고 지성은 지성이며,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도 구별됩니다. 하나를 이루는 것 안에 이러한 구별이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도 같은 하나의 주제를 말하면서 서로 다른 표현을 통하여 그 구별되는 측면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AC.100을 읽는 중요한 실마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 나오는 모든 병행 표현을 우리가 임의로 둘씩 짝지어 ‘첫째 표현은 천적, 둘째 표현은 영적’이라고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AC.100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은 이사야에서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 끊임없이 나타나며 그중 하나가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가 영적인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실제 말씀의 문맥과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을 따라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을 독자가 마음대로 적용할 수 있는 기계적인 해석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구별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말씀의 속뜻에서 사랑과 이해, 선과 진리,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서로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AC.100의 이사야 인용에서도 ‘광야’와 ‘사막’, ‘기쁨’과 ‘즐거움’, ‘감사함’과 ‘노랫소리’가 하나의 회복을 함께 묘사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 사랑에 관계되는 것과 이해에 속한 것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앞의 것은 ‘에덴’에, 뒤의 것은 ‘동산’에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100은 단순히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이라는 두 단어의 상응을 증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서로 나란히 놓인 표현들이 하나의 내용을 풍성하게 말하면서도 그 속에서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랑에 관계되는 것과 이해에 속한 것이 서로 구별되어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반복을 단순한 중복으로만 보지 않고 그 안의 구별과 결합을 함께 읽고 있다는 데까지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이후 AC에서 이러한 병행 표현들이 다시 나타날 때마다 실제 본문 안에서 그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하나씩 확인해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00 심화 1)

 

 

 

 

AC.101, 창2:8, ‘동쪽은 주님을 뜻하며, 기도할 때 동쪽을 향한 표상적 관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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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창2:8, ‘영적 인간에게 뒤집혀 있던 생명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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