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

‘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입니다. 체어리티는 천적인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희생 제사에서 여러 종류의 기름으로 표상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간을 덮는 기름 또는 간에 붙은 꺼풀,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과 내장 위의 기름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것들은 거룩한 것이었으며 제단 위에서 번제로 드려졌습니다. (출29:13, 22; 레3:3-4, 14; 4:8-9, 19, 26, 31, 35; 8:16, 25) By “fat” 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is also of the Lord. The celestial is all that which is of love. Faith also is celestial when it is from love. Charity is the celestial. All the good of charity is the celestial. All these were represented by the various kinds of fat in the sacrifices, and distinctively by that which covered the liver, or the caul; by the fat upon the kidneys; by the fat covering the intestines, and upon the intestines; which were holy, and were offered up as burnt offerings upon the altar. (Exod. 29:13, 22; Lev. 3:3, 4, 14; 4:8–9, 19, 26, 31, 35; 8:16, 25)

 

13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위에 있는 꺼풀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2또 너는 그 숫양의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그것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간 위의 꺼풀과 두 콩팥과 그것들 위의 기름과 오른쪽 넓적다리를 가지라 이는 위임식의 숫양이라 (출29:13, 22)

 

3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4그는 그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레3:3-4, 14)

 

8또 그 속죄 제물이 된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낼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9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되, 19그것의 기름은 다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르되, 26그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 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31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35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떼 낸 것 같이 떼 내어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레4:8-9, 19, 26, 31, 35)

 

16또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과 그 기름을 가져다가 모세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5그가 또 그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과 그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를 떼어내고 (레8:16, 25)

 

그러므로 이것들을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의 음식’(bread of the offering by fire for a rest unto Jehovah)이라 했습니다. (레3:14, 16) They were therefore called the “bread of the offering by fire for a rest unto Jehovah.” (Lev. 3:14, 16)

 

14그는 그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6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레3:14, 16)

 

같은 이유로 유대 백성은 짐승의 어떤 기름도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었으며, 이것을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a perpetual statute throughout your generations)라 하였습니다. (레3:17; 7:23, 25) For the same reason the Jewish people were forbidden to eat any of the fat of the beasts by what is called “a perpetual statute throughout your generations.” (Lev. 3:17; 7:23, 25)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레3:17)

 

23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 것이요, 25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레7:23, 25)

 

그 이유는 그 교회가 내적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천적인 것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 그러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This was because that church was such that it did not even acknowledge internal, much less celestial things.

 

[2] ‘기름’(fat)이 천적인 것들과 체어리티의 선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선지서에서도 분명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at “fat” 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the goods of charity, is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사55:2) Wherefore do ye weigh silver for that which is not bread, and your labor for that which satisfieth not? Attend ye diligently unto me, and eat ye that which is good, and let your soul delight itself in fatness. (Isa. 55:2)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eremiah: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14) I will fill the soul of the priests with fatness, and my people shall be satiated with my good, (Jer. 31:14)

 

여기서 ‘기름진 것’이 문자 그대로의 기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적·영적 선을 뜻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시편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where it is very evident that fatness is not mea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 So in David:

 

8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9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36:8-9) They are filled with the fatness of thy house, and thou makest them drink of the river of thy deliciousnesses. For with thee is the fountain of lives; in thy light we see light. (Ps. 36:8–9)

 

여기서 ‘살진 것’(fatness)과 ‘생명의 원천’(fountain of lives)은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하고, ‘복락의 강물’(river of deliciousnesses)과 ‘빛’(light)은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Here “fatness” and the “fountain of lives” signify the celestial, which is of love; and the “river of deliciousnesses,” and “light,” the spiritual, which is of faith from love. Again in David: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시63:5) My soul shall be satiated with marrow and fatness, and my mouth shall praise thee with lips of songs, (Ps. 63:5)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름진 것’(fat)은 천적인 것을, ‘찬송하는 입술’(lips of songs)은 영적인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영혼을 만족하게 한다고 하였으므로 천적인 것을 뜻한다는 것이 매우 분명합니다. 같은 이유로 땅의 처음 난 것인 첫 열매들도 ‘기름’(fat)이라고 합니다. (민18:12) where in like manner “fat” denotes the celestial, and “lips of songs” the spiritual. That it is what is celestial is very evident, because it will satiate the soul. For the same reason the first fruits, which were the firstborn of the earth, are called “fat.” (Num. 18: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민18:12)

 

[3]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부 종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모세가 백성 앞에서 읊은 노래에서는 그것들을 다음과 같이 총괄적으로 묘사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of innumerable genera, and still more innumerable species, they are described in general in the song which Moses recited before the people: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신32:14) Butter of kine, and milk of the flock, with fat of lambs and of rams, the sons of Bashan, and of goats, with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and thou shalt drink the blood of the grape, unmixed. (Deut. 32:14)

 

이러한 표현들의 의미는 속뜻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속뜻이 없다면 ‘소의 엉긴 젖’(butter of kine), ‘양의 젖’(milk of sheep), ‘어린 양의 기름’(fat of lambs), ‘숫양과 염소의 기름’(fat of rams and goats), ‘바산의 아들들’(sons of Bashan), ‘밀의 콩팥의 기름’(fat of the kidneys of wheat), ‘포도의 피’(blood of the grape)와 같은 표현들은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표현 하나하나는 천적인 것들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의미합니다. 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know the signification of these expressions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Without the internal sense, such expressions as the “butter of kine,” the “milk of sheep,” the “fat of lambs,” the “fat of rams and goats,” the “sons of Bashan,”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and the “blood of the grape,” would be words and nothing more, and yet they all and each signify genera and species of celestial things.

 

해설

AC.353은 앞의 AC.350에서 아벨이 드린 ‘기름진 것’이 ‘천적인 것 자체이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다’고 한 내용을 자세히 풉니다. 첫 문장부터 핵심은 분명합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단순히 풍요롭고 좋은 것을 막연하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속한 천적인 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앞 AC.352의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라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의 생명도 인간 자신의 선함이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에 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매우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살펴본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리해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을 낮추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반대로 신앙이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 신앙 역시 천적인 성질을 가집니다. 이어 ‘체어리티는 천적인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사랑,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 체어리티, 체어리티의 선은 서로 경쟁하는 별개의 종교 요소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졌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희생 제사에서는 여러 종류의 기름이 특별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출29장과 레3장, 4장, 8장에는 간을 덮는 기름,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 등이 매우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문자만 보면 왜 이런 신체 부위의 기름까지 세세하게 구별하는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3은 그 기름들이 천적인 것과 체어리티의 선을 표상했기 때문에 거룩하게 여겨졌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 번호만을 근거로 간의 기름은 정확히 어떤 사랑이고 콩팥의 기름은 또 어떤 선이라고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범위는 여러 종류의 기름이 천적인 것들을 표상했으며, 그것들이 거룩하여 제단 위에 드려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 기름들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의 음식’이라고 불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연적인 음식이나 기름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인 제사가 내적인 사랑과 선을 표상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AC.349에서 이미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단 위 기름의 거룩함은 물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천적인 사랑과 선에 있습니다. 자연적인 제물은 그 내적 실재를 담아 보여 주는 표상적 그릇입니다.

 

같은 이유로 유대 백성이 기름을 먹지 못하도록 한 규례도 설명됩니다. AC.353은 그 이유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 교회가 ‘내적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천적인 것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 성격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유대인 개인의 내면을 일률적으로 단정하는 말로 확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표상교회로서의 그 교회의 일반적 성격과 기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내적인 사랑의 선을 표상하는 기름을 인간이 자기 것으로 취하는 대신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구별한 규례는, 표상적으로 보아 천적인 선이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다는 질서를 보존합니다.

 

[2]에서 스베덴보리는 제사법에서 선지서와 시편으로 이동하여 ‘기름진 것’이 천적인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사55:2에서는 ‘기름진 것’으로 영혼이 즐거움을 얻고, 렘31:14에서는 제사장의 마음이 ‘기름’으로 흡족해지는 것이 주님의 선으로 백성이 만족하는 것과 나란히 놓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문자적인 지방이나 풍성한 음식만을 뜻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연이어 인용하는 목적은 각각의 구절에 별개의 교리를 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 안에서 ‘기름’과 ‘기름진 것’이 영혼을 만족시키는 천적·영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을 하나의 논증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시36:8-9은 그 관계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살진 것’과 ‘생명의 원천’을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 ‘복락의 강물’과 ‘빛’을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서로 끊어진 두 세계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비롯되는 질서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라는 말씀은 이 문맥에서 인간의 신앙과 진리의 빛이 독립적인 자기 지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는 AC.353 첫머리의 선언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시63:5에서도 ‘기름진 것’은 영혼을 만족시키는 천적인 것을, ‘찬송하는 입술’은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민18:12에서는 땅의 첫 열매까지 ‘기름’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52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처음 난 것이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의미했고, 여기서는 기름이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그 기름진 것’을 드렸다는 짧은 표현 안에는 두 가지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거룩한 것도 주님께 속하고, 그 거룩함 안에 있는 사랑의 선과 생명도 주님께 속합니다. 아벨의 예배는 인간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낸 선을 주님께 자랑스럽게 내놓는 예배가 아니라, 자기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사랑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예배입니다.

 

[3]에서 신32:14가 인용되면서 AC.353은 한 단계 더 넓은 원리를 밝힙니다.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부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에는 ‘소의 엉긴 젖’, ‘양의 젖’, ‘어린 양의 기름’,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 ‘밀의 콩팥의 기름’, ‘포도의 피’와 같이 매우 다양한 자연적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각각이 천적인 것들의 서로 다른 종류와 세부 종류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AC.353은 각각이 정확히 어느 종류의 천적 선을 뜻하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소의 엉긴 젖은 이것’, ‘양의 젖은 저것’, ‘바산의 숫양은 이것’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상응표를 더 만들어 붙이는 것은 스베덴보리보다 앞서 나가는 해석이 됩니다.

 

오히려 여기서 붙들어야 할 더 큰 원리는 천적인 사랑과 선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입니다. 우리는 ‘사랑’, ‘선’, ‘체어리티’라는 말을 하나의 단순한 성질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실제 삶에서 무수한 형태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한 사람을 위로하는 선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선, 어린아이를 돌보는 선과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는 선, 진리를 가르치는 선과 말없이 필요한 일을 감당하는 선은 모두 선에 속하면서도 그 질과 쓰임은 서로 다릅니다. 이것은 AC.353이 직접 각각의 사례를 열거한 것은 아니지만, ‘천적인 것들의 헤아릴 수 없는 종류와 세부 종류’라는 원리를 우리의 삶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예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획일적인 하나의 행동 양식이 아니라 각 사람과 공동체의 상태와 쓰임에 따라 무수한 형태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는 방법에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기름 = 사랑’, ‘빛 = 신앙’과 같은 기본적인 대응을 아는 것은 유익하지만, 상응을 단순한 암호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53 자체가 기름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천적인 것에는 헤아릴 수 없는 종류와 세부 종류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연물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다른 표상들과 함께, 어떤 교회적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상응은 자연물에 영적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무수한 질서와 인간의 내적 상태가 자연계의 형상 안에 표현되는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신32:14의 표현들을 두고 ‘속뜻이 없다면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밀의 콩팥의 기름’이나 ‘포도의 피’와 같은 표현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3은 그러한 낯선 세부조차 말씀 안에서 무의미하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천적인 실재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문자적 의미가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문자 안에 속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문자적 형상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속뜻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담긴 천국의 실재를 열어 보여 줍니다.

 

다시 창4:4의 아벨에게 돌아오면 이 긴 설명의 목적이 선명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양 떼의 처음 난 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이며, ‘기름’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선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물은 ‘내가 좋은 것을 만들어 주님께 드린다’는 인간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사랑과 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배를 나타냅니다. 가인에게도 소산과 제물이 있었지만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행위와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에는 체어리티와 사랑의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인정이 있습니다. 두 제물의 차이는 자연적인 재료가 아니라 내적 생명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AC.353의 핵심을 단지 ‘기름은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상응 하나로만 기억해서는 부족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천적인 것이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이며, 그 사랑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신앙도 사랑에서 비롯될 때 살아 있고 천적이며,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모든 선 역시 그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과 예배와 행위 안에 ‘기름’이 있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예배를 충실히 드리며 많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안에서 주님의 사랑이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살아 움직이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은 바로 그 살아 있는 사랑의 생명을 보여 줍니다.

 

 

 

AC.354, 창4:4,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신 이유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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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양 떼의 처음 난 것’(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이 오직 주님께만 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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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말씀에서 아주 익숙하게 사용하는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shepherd)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양 떼’(flock)라고 합니다.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것을 가르치지도 않는 사람은 참된 목자가 아니며, 선으로 인도받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지 않는 사람은 양 떼에 속하지 않습니다. ‘목자’와 ‘양 떼’가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말씀의 인용으로 확증할 필요는 거의 없지만, 다음 구절들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에서, That a “shepherd of the flock” i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must be obvious to everyone, for this is a familiar figure in the Word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s. He who leads and teaches is called a “shepherd,” and those who are led and taught are called the “flock.” He who does not lead to the good of charity and teach it, is not a true shepherd; and he who is not led to good, and does not learn what is good, is not of the flock. It is scarcely necessary to confirm this signification of “shepherd” and “flock” by quotations from the Word; but the following passages may be cited. In Isaiah: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사30:23) The Lord shall give th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owest the ground, and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in that day shall he feed thy cattle in a broad meadow, (Isa. 30:23)

 

여기서 ‘땅의 소산의 양식’(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다시 이사야에서, where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denotes charity. Again: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사40:11) The Lord Jehovih shall feed his flock like a shepherd; he shall gather the lambs into his arm, and carry them in his bosom, and shall gently lead those that are with young. (Isa. 40:11)

 

시편에서, In David: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시80:1) Give ear, O Shepherd of Israel, thou that leadest Joseph like a flock; thou that sittest on the cherubim, shine forth. (Ps. 80:1)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2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내가 멸절하리니 3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렘6:2, 3) I have likened the daughter of Zion to a comely and delicate woman; the shepherds and their flocks shall come unto her, they shall pitch tents near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everyone his own space.(Jer. 6:2, 3)

 

에스겔에서, In Ezekiel:

 

37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38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겔36:37, 38) Thus saith the Lord Jehovih, I will multiply them as a flock of man, as a hallowed flock, as the flock of Jerusalem in her appointed times; so shall the waste cities be filled with the flock of man. (Ezek. 36:37–38)

 

이사야에서, In Isaiah: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사60:7) All the flocks of Arabia shall be gathered together unto thee, the rams of Nebaioth shall minister unto thee. (Isa. 60:7)

 

양 떼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양 떼를 모으는’(gather the flock) 사람들이며,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양 떼를 흩는’(scatter the flock) 사람들입니다.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ey who lead the flock to the good of charity are they who “gather the flock”; but they who do not lead them to the good of charity “scatter the flock”; for all gathering together and union are of charity, and all dispersion and disunion are from want of charity.

 

해설

AC.343은 앞의 AC.341-342에서 아벨을 ‘양 치는 자’라고 한 이유를 말씀 전체에 익숙한 ‘목자와 양 떼’의 표상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AC.341에서는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AC.342에서는 체어리티를 의미하는 레위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 치는 자’를 표상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3은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하면서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양 떼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목자=가르치는 사람, 양 떼=배우는 사람’이라는 대응 관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것을 가르치지도 않는 사람은 참된 목자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AC.343 전체를 여는 핵심 질문은 ‘목자가 얼마나 많이 가르치는가?’가 아니라 ‘목자가 사람들을 어디로 인도하는가?’입니다. 그 목적지는 분명히 ‘체어리티의 선’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2의 ‘신앙 →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 체어리티’라는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참된 목자는 사람에게 무엇이 참인지를 알려 주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그 신앙이 실제 삶으로 나타나고, 마침내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이루시도록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렇다고 ‘진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목자는 분명히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며, 양 떼 역시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참된 선을 행하려면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를 진리를 통하여 배워야 합니다. 다만 진리는 그 자체에 사람을 붙잡아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가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세운 데 있었다면, 참된 목자의 역할은 정반대로 진리를 통하여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의미가 말씀 전체에서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사실 많은 인용으로 확증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면서도 여러 구절을 제시합니다. 이 구절들을 각각 독립된 주제로 확장하기보다 하나의 공통된 그림으로 읽는 것이 AC.343의 의도에 더 잘 맞습니다. 사30:23에서는 주님께서 비를 주시고 땅이 양식을 내며 가축이 넓은 목장에서 먹는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땅의 소산의 양식’을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시80:1에서는 주님을 ‘이스라엘의 목자’, 곧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라고 부릅니다. 렘6:2-3에서는 목자들과 양 떼가 나타나고, 겔36:37-38에서는 사람들을 ‘양 떼’와 ‘제사 드릴 양 떼’로 표현하며, 사60:7에서도 양 무리가 모여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모든 인용의 중심은 목자와 양 떼라는 말이 말씀에서 사람을 영적으로 인도하고 선으로 이끄는 관계를 나타내는 익숙한 표상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40:11은 이 전체 의미를 가장 아름답게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주 여호와께서 친히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십니다.’ 여기서는 참된 목자의 원형이 결국 주님 자신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신다’는 일련의 모습은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영적 생명을 위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흩어진 것을 모으시며, 연약한 것을 품으시고, 각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사람인 목자가 참된 목자인 것은 자기에게서 목자직의 능력이나 선이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 쓰임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사람들을 자기에게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로 인도하며, 자기 생각으로 먹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하여 사람들이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AC.343은 목회와 가르침을 바라보는 상당히 엄중한 기준도 제시합니다. 성경을 많이 가르치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많은 사람을 이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참된 목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이 사람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배우면서 자기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선을 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 가르침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지식은 많아지는데 자기 교리의 우월성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며, 끊임없이 편을 나누고 적을 만들어 간다면 그 가르침이 정말 AC.343이 말하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사람을 인도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체어리티를 강조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흐리거나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가르치는 일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목자는 진리를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양 떼의 편에서도 똑같이 강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선으로 인도받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지 않는 사람은 양 떼에 속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양 떼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회에 등록되어 있거나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듣는다는 외적인 소속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된 양 떼는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고 그 선으로 인도받으려 합니다. 목자가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해야 한다면 양 떼 역시 그 선을 배우고 받아들여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결국 목자와 양 떼 모두의 중심에는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목자는 자기 권위와 지식을 세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양 떼도 단지 종교적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하시고, 사람은 그 인도를 받아 실제 삶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AC.343의 마지막은 이 모든 설명을 ‘모임과 결합’이라는 매우 중요한 원리로 모읍니다.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임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한 장소에 모여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교회에 속하고 같은 예배에 참석하며 같은 교리를 고백한다고 해서 반드시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결합을 이루는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반대로 외적인 생각과 판단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더라도 서로의 참된 선을 바라며 주님 안에서 이웃의 유익을 구한다면 더 깊은 차원에서 결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리적 차이가 모두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를 보여 주고 체어리티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다만 진리가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생명을 가지려면 체어리티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마지막 원리에서 가인과 아벨의 대비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의 길은 분리의 길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세우고,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며, 마침내 자기 ‘형제’인 아벨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양 치는 자’입니다. 체어리티는 양 떼를 선으로 인도하고, 모으고, 결합합니다. 특히 사40:11의 주님은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는’ 목자로 나타나시므로, 가인이 보여 주는 분리와 목자이신 주님이 보여 주시는 모음은 서로 정반대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가인은 나쁜 사람, 아벨은 착한 사람’이라는 도덕적 대비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는 신앙의 질서를, 아벨은 신앙이 본래 결합되어야 할 체어리티의 선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신앙이 단지 하나의 덕목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자신이 사람을 선으로 인도해야 하는 목적과 생명을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결국 AC.343은 ‘참된 목자는 어디로 인도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답은 ‘체어리티의 선으로’입니다. 참된 목자는 진리를 가르치지만 사람을 지식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 진리가 삶이 되고 선이 되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참된 인도의 근원은 사람인 목자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십니다. 사람은 그 주님의 목자직에 쓰임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AC.343은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진리를 전하고, 가르치고, 권면하고, 돌보는 모든 자리에서 우리는 같은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전하는 진리는 이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 자신이 양 떼의 자리에서는 ‘나는 단지 진리를 듣고 아는 데 머무르는가, 아니면 주님의 인도를 받아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고 그 선을 행하려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체어리티가 있는 곳에서는 모이고 결합하며, 체어리티가 사라지는 곳에서는 흩어지고 분리됩니다. 이것이 ‘양 치는 자’ 아벨을 통하여 AC.343이 보여 주는 참된 목자의 모습입니다.

 

 

 

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 그리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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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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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아벨’(Abel)과 ‘형제’(brother)가 이를 의미합니다.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나타내고,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는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비록 그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signified by “Abel” and “brother”; a “shepherd of the flock” denote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and a “tiller of the 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해설

AC.341은 매우 짧지만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핵심 구조를 한 문장 안에 압축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AC.338-340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을 ‘신앙’이라고 하고 그것을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이제 창4:2로 넘어오면서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그것을 ‘아벨’과 ‘형제’가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속뜻에서 처음부터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를 ‘아벨’뿐 아니라 ‘형제’도 의미한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남남인 두 가지가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이며, 체어리티는 신앙의 ‘형제’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결국 신앙이 자신과 결합되어 있어야 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첫 번째 자손은 신앙이고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라는 말을 시간적 또는 영적 우선순위로 곧바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태고교회에서 먼저 신앙이 생긴 뒤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37에서 이미 살펴보았듯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을 받는 질서였습니다. AC.338의 ‘첫 번째 자손’과 AC.341의 ‘두 번째 자손’은 그 본래의 천적 질서를 뒤집어 신앙이 본질적으로 체어리티보다 먼저라는 교리를 세우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AC.339에서 설명한 것처럼 교회에 속한 것들이 서로 어떻게 파생되고 관계를 이루는지를 출생과 계보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태고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의 질서와 후대 영적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를 뒤섞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였는데, 스베덴보리는 이를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체어리티의 매우 중요한 성격이 담겨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이웃에게 좋은 감정을 품는 데 머물지 않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를 단순한 외적 선행과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행동이 겉으로 선해 보인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곧 체어리티인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실제 쓰임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양 치는 자’라는 표현에서 AC.341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양이나 목축에 관한 세부 상응보다 ‘체어리티의 선을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는 살아 움직이고 실제 삶으로 나타나는 선입니다.

 

반면 가인은 ‘농사하는 자’인데,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강하게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농사 자체가 부정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땅’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되며, 이후 AC에서는 그 의미가 훨씬 세밀하게 설명됩니다. AC.341에서 중요한 것은 ‘농사하는 자’라는 표현이 가인이라는 상태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가인은 앞에서 보았듯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구별하여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교리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제 그 신앙이 체어리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들어가 있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다면 결국 체어리티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AC.341의 가장 중요한 문장이 나옵니다.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단순히 ‘불완전한 신앙’이나 ‘조금 부족한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을 잃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참된 의미에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AC.340에서는 본래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상태를 보았습니다. 그때에는 아직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지 쉽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1은 그 분리의 본질을 이미 드러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순간, 사람이 붙들고 있는 것은 이름으로는 신앙일 수 있어도 생명을 가진 참된 신앙은 아닙니다.

 

이것은 교리나 신앙고백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앞의 AC.337에서도 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신앙이 먼저 배워지는가?’가 아니라 ‘그 신앙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와 결합하며, 마침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불필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의 진리를 통하여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배우고 분별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경쟁시키면서 ‘신앙이 중요한가, 사랑이 중요한가?’라고 묻는 것 자체가 이 둘의 본래 관계를 놓치게 할 수 있습니다. 둘은 ‘형제’이며,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 약속과 원칙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고 서로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은 사랑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 자체는 사라지고 ‘나는 정해진 규칙을 모두 지켔으므로 좋은 배우자다’라는 주장만 남는다면, 규칙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관계의 생명은 크게 훼손된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교리를 알고 그것을 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신앙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된 채 자기 완결적인 것으로 남는다면 교리적 형식은 유지되어도 신앙의 생명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41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도 신앙이기는 하지만 조금 부족하다’고 하지 않고 단호하게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 기준은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정하기 위한 잣대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신학적인 오류를 잘 찾아내는 것 자체는 귀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신앙인지는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어떤 생명을 이루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더 알수록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고, 자기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며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며 실제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이웃의 선에는 무관심하고, 그 지식을 자기 우월성과 정당성을 세우는 데 사용한다면 ‘나는 무엇을 믿는가?’뿐 아니라 ‘내 신앙은 지금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1은 앞으로 펼쳐질 가인과 아벨의 비극을 이미 한 문장으로 예고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형제’ 역시 체어리티이며,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가인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단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분리된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때 죽는 것은 아벨만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 역시 자기 생명을 잃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 짧고 단호한 선언이 AC.341의 핵심이며, 앞으로 이어지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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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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