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학교’를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출발의 계기와 초기 과정을 직접 설명하는 기록입니다. 앞선 영상들이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일화, 아토스 체험, 수도 영성의 가치 등을 소개했다면, 이번 영상은 그 관심이 어떻게 한국 개신교 안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교육 과정으로 발전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에는 수도학교라는 제도 자체를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보다, 그 출발점에 있었던 ‘거룩한 삶을 배우고 전하고 싶다’는 열망과 그것이 실제로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학교의 직접적인 계기로 제시하는 것은 세겜의 야곱의 우물에 세워진 수도원에서 만난 한 수도사입니다. 영상의 자동자막은 지명과 상황을 상당히 흐트러뜨리고 있어 세부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확정하기 어렵지만, 메시지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사라진 지역에서 홀로 수도원을 지키던 노수도사가 ‘내가 떠나면 이곳에서 예수님이 없어진다’는 취지로 말하고, 이어 강문호 수도사에게 ‘수도사를 양성해서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 말을 자신의 표현대로 ‘5만 볼트의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받아들였고, 여기에서 수도학교에 대한 구상이 시작되었다고 회고합니다.

 

이 대목에는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반드시 많은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떠나지 않는 것’ 자체가 증언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교회의 생명은 외적 규모나 사람의 수에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 안에라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 그리고 그 선을 밝혀 주는 진리가 살아 있다면 그곳에 교회의 본질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떠나면 이곳에서 예수님이 없어진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그 지역에 그 수도사 한 사람만이 주님을 대표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는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신앙적 고백으로 읽으면 상당히 울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은 특정 수도원이나 수도사에게만 계시는 분이 아니며, 어떤 지역에서 마지막 기독교인이 떠났다고 해서 그곳에서 주님까지 떠나시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볼 수 있는 교회의 경계보다 훨씬 넓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양심과 선을 향한 애정이 남아 있고,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려는 삶이 있다면 주님은 그 사람에게도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일화의 가장 깊은 의미는 ‘그 수도사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다’기보다, ‘그 수도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끝까지 살고자 했다’는 데서 찾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강문호 수도사가 곧바로 ‘수도사 파송’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간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선교사 파송에는 교통비와 생활비, 활동비 등 많은 지원이 필요하지만 이미 형성된 수도원에 수도사를 보내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 가능하다는 현실적인 장점을 이야기합니다. 이 발상에는 실제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선교의 효율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파송하는가?’입니다. 수도복을 입은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안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수도사라는 외적 신분을 얻는 것과 그 사람의 속 사람이 실제로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어쩌면 ‘수도학교를 만들자’가 아니라 그보다 앞에 있는 ‘거룩한 영을 전하고 싶다’는 열망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거룩’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은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 자체도 아니고, 금욕의 강도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며, 수도원이라는 특별한 공간에 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거룩은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께로 향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조금씩 물러가며,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가 실제 이웃 사랑의 삶으로 나타나는 데 있습니다. 수도생활은 그것을 돕는 하나의 외적 형식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룩은 아닙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처음 열두 명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열두 사도를 훈련하여 보내셨다는 데서 착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틀 만에 열두 명이 모이고, 계속 지원자가 생겨 스물넷, 마침내 서른여섯 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과정을 하나님의 인도로 받아들입니다. 이 부분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일이 예상보다 빠르게 이루어지고 사람이 많이 모였다는 사실은 감사할 일이지만, 그것 자체가 곧 하나님의 뜻을 확증하는 표지는 아닙니다. 반대로 사람이 적게 모였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외적 성공보다 그 일을 움직이는 ‘목적’과 그 목적에서 나오는 ‘수단’, 그리고 마침내 맺히는 ‘쓰임(use)’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분별 기준입니다. ‘사람이 몇 명 모였는가?’보다 ‘그 사람들이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수도사가 몇 명 배출되었는가?’보다 ‘그들의 proprium이 얼마나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몇 기까지 이어졌는가?’보다 ‘그 과정을 통하여 주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수도학교에만 적용되는 기준이 아닙니다. 신학교도, 교회도, 선교단체도, 수도원도,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공부하는 모임도 똑같습니다. 지식과 제도가 커졌는데 자기 사랑도 함께 커진다면 외적 성장은 내적 성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사도 없고, 교수도 없고, 교재도 없고, 공부할 교실도 없었다’며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했다고 회고하는 부분은 그 자체로 존중할 만합니다. 아무 기반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교육 과정을 만들고 교재와 커리큘럼을 마련한다는 것은 상당한 수고를 요구합니다. 고대·중세·현대 수도원, 수도원의 역사와 영성, 아토스와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공부하도록 구성한 것도 개신교 목회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기독교 수도 전통을 다시 들여다보게 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의 중심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수도원의 역사와 위대한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수록 자칫 ‘비범한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얼마나 금식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는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얼마나 혹독하게 자신을 절제했는지가 수도 영성의 중심이 되기 시작하면 복음의 중심이 조금씩 이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계속해서 우리를 되돌려 놓는 곳은 ‘사람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 주님’입니다. 수도사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 아름다움의 근원은 수도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강문호 수도사가 영상 말미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며, 젖지 않고 마르는 빨래가 어디 있느냐’는 취지로 초기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대목은 오히려 수도학교의 본질을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영적 훈련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흔들릴 때 무엇을 붙드는 사람인가를 드러냅니다. 시행착오가 없다는 것이 반드시 영적 성숙의 증거도 아닙니다. 자신의 오류를 보고 인정하며 돌이키는 과정까지도 주님은 거듭남의 재료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것을 이루었다’는 결론이 아니라 ‘이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우리 안의 무엇을 보여 주시고 고치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영상은 이후 수도학교가 어떤 모습으로 발전했는지를 미리 가져와 판단하지 않고, ‘출발 당시의 영상’ 자체로 읽는 것이 가장 공정하겠습니다. 이 영상 속 강문호 수도사에게서는 분명한 열망이 보입니다. 자신이 해외 수도원들을 다니며 받은 충격과 감동을 한국 개신교 안에 소개하고 싶었고, 그것을 일회성 세미나로 끝내지 않고 사람을 훈련하는 과정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 열망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출발점에 조용히 하나의 문장을 덧붙인다면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수도사를 만드는 것보다 먼저, 주님께서 사람의 속을 새롭게 하시도록 하라.’ 수도복도, 수도학교도, 커리큘럼도, 금욕도, 공동생활도 모두 외적 그릇입니다. 좋은 그릇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그릇 안에 담겨야 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이며, 그것이 일상의 체어리티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가장 정교한 수도 제도도 외적 형식에 머물 수 있고, 이것이 있다면 수도원 밖에서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도 주님 앞에서 깊은 거듭남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에서 시작된 ‘수도학교’의 꿈을 가장 아름답게 완성하는 길은 수도사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이 자기 공로를 낮추고, 자신의 악과 거짓을 살피며, 주님께 모든 선의 근원을 돌리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수도학교의 진정한 열매는 졸업생 명단이나 수도원 숫자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거룩한 영을 전하는 학교’라는 강문호 수도사의 처음 소망도 가장 깊은 의미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SY.92, 강문호 수도사, ‘게라시모스 수도원’ (20200114)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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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4, 강문호 수도사, 수도원 7년, ‘청빈·거룩·오직 예수’를 다시 생각하다 (2026082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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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고, 수도학교와 잇사갈 성경대학, 봉쇄학당, 수도 영성가 연구, 방문객 교육과 부흥회 사역 등을 소개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수도원 운동의 방향을 ‘청빈, 거룩, 오직 예수’라는 세 가지 말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편은 하나의 수도 일화라기보다 강문호 수도사가 생각하는 ‘개신교 수도원 운동의 자기소개와 비전’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도 개별 사실 하나하나를 따지는 것보다 이 세 축이 과연 사람을 어디로 이끌려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다.

 

영상은 은퇴를 앞두고 ‘후반전이 더 아름답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는 고백에서 시작합니다. 이 출발점에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은퇴를 인생의 퇴장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은 생애를 어떻게 주님께 드릴 것인가를 묻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의 영적 성장은 특정 나이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평생 계속되며, 이 세상에서 시작된 변화는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노년은 단순히 지난 업적을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을 더욱 내려놓고 주님께로 향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후반전이 더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소망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아름다운 후반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나 더 던집니다. 많은 일을 이루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아니면 사람이 점점 더 주님 앞에서 작아지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물론 둘은 서로 배척되지 않습니다. 수도원을 세울 수도 있고, 학교를 만들 수도 있고, 수백 권의 자료를 집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외적 성취가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거듭남의 관점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루었는가?’보다 ‘그 일을 하는 동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얼마나 주님의 질서 아래 놓였는가?’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수도원을 알기 위해 이스라엘의 수많은 수도원을 방문하고 여러 나라의 수도원을 답사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도원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이 깨졌다고 고백합니다. 이 대목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개신교 전통 밖으로 나가 오래된 기독교 수도 전통을 직접 보고 배우려 했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에게 없는 것이 다른 전통에는 있을 수 있다’는 열린 태도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개신교가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 제도와 상당히 멀어진 것을 생각하면, 오래된 기독교 전통 안에서 기도와 절제, 침묵, 공동생활, 노동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려는 시도 자체는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도 외적 수도생활과 내적 거듭남을 구별합니다. 수도원을 많이 방문했다고 수도의 본질을 아는 것은 아니며, 수도복을 입었다고 수도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봉쇄된 공간에 오래 머물렀다고 내면의 자기 사랑까지 봉쇄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과의 접촉을 줄이면 이전에는 외부 활동에 가려져 있던 proprium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수도의 시험은 ‘얼마나 세상을 떠났는가?’가 아니라 ‘세상을 떠난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얼마나 떠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영상에 나오는 새벽 4시의 기도실 이야기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연 속 작은 기도실에 들어가 예수의 형상 아래 머리를 대고 ‘오늘 안수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모습에는 주님께 의탁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어떤 형상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마음을 주님께 향하게 하는 외적 도움으로 사용된다면 그 자체를 굳이 문제 삼을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상이 아니라 그 순간 마음이 향하는 대상입니다. 더 나아가 아침에 주님의 인도를 구했다면 하루 동안 실제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님의 계명 아래 두려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도실에서의 ‘주님, 저를 지켜 주세요’가 생활 속에서는 ‘주님, 제 뜻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해 주세요’가 되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수도학교 이야기는 강문호 수도사의 사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개신교 안에 수도사를 양성하는 학교를 만들고, 그 가운데 일부가 실제 수도사의 길을 택하고, 다시 일부가 수도원을 세우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도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무조건 긍정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도제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기도와 자기 성찰, 절제와 쓰임을 훈련하는 환경이 될 수는 있습니다. 반대로 수도제도 자체가 영적 우월감이나 특별한 신분의식으로 변한다면 오히려 거듭남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제도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 안에서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따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선을 행할 때 거룩함이 형성됩니다.

 

성경 연구에 대한 열정도 이번 영상의 큰 축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한번 성경만 깊이 파보자’, ‘오직 예수 공부만 해 보자’며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여 수백 권의 소책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경이 놀라울 정도로 깊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고백합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은 인간이 그 문자만 읽어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으며, 그 안에는 천국과 연결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다’는 발견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안다는 것은 희귀한 자료를 많이 알고, 고대 문헌을 많이 읽고, 사람들이 처음 듣는 정보를 많이 찾아낸다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깊이는 궁극적으로 ‘얼마나 놀라운 정보를 발견했는가?’에 있지 않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을 더 알고,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그토록 방대하게 펼쳐 보인 목적도 지적 경탄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거듭남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경악할 만큼 새로운 성경 지식’은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그 지식이 사람의 생명을 바꾸지 못한다면 아직 말씀은 머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강문호 수도사가 마지막 때를 대비하는 수도원 영성을 ‘청빈, 거룩, 오직 예수’라는 세 가지로 정리하는 대목입니다. ‘돈 대신 청빈, 음란 대신 거룩, 배교 대신 오직 예수’라는 구도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강렬하고 기억하기 쉬운 표어입니다. 그리고 각각에는 분명 기독교적 가치가 있습니다. 재물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고, 성적 욕망의 무질서를 다스리며, 주님에게서 떠나지 않으려는 삶은 모두 중요한 영적 과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세 가지를 조금 다르게 깊이 들어갑니다. 먼저 ‘청빈’의 반대는 단순히 돈이 아닙니다. 돈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재물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는 사랑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그것을 주님의 질서에 따라 선한 쓰임에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 재산이 없어도 돈을 몹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청빈보다 더 깊은 것은 ‘소유에 대한 내적 자유’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 힘과 내 영광의 증거로 붙들지 않고, 주님에게서 맡겨진 것으로 보며 쓰임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음란 대신 거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적 절제는 중요하지만, 거룩은 단순한 금욕보다 훨씬 큽니다. 외적 행동을 억제했다고 내적 욕망까지 정돈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혼애의 질서는 오히려 매우 중요하며, 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 거룩은 아닙니다. 거룩은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도자의 독신도 그 자체가 더 높은 거룩함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욕망을 중심에 놓지 않고 사랑을 주님의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배교 대신 오직 예수’는 세 표어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구호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를 반복한다고 주님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말씀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은 결국 삶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의 가장 깊은 형태는 ‘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내 지식이 아니라 주님, 내 업적이 아니라 주님, 내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주님, 내가 세운 제도와 내가 만든 책과 내가 이룬 결과가 아니라 그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신 주님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영상에는 ‘내가 방문했다’, ‘내가 수도원을 세웠다’, ‘내가 자료를 만들었다’, ‘내가 학교를 세웠다’는 식의 개인적 경험과 성취가 자연스럽게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 자체를 곧바로 자기 자랑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는 영상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한 일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보다 한 단계 안쪽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 모든 일을 누가 이루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많이 할수록 더욱 깊어져야 할 고백은 ‘내가 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셨으며, 나는 쓰임을 위해 사용된 도구일 뿐이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 처음의 ‘후반전이 아름답게 해 달라’는 기도와 마지막의 ‘오직 예수’는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후반전은 앞선 전반전보다 더 많은 업적을 쌓는 후반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참으로 아름다운 후반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이야기는 조금씩 작아지고 주님 이야기가 점점 커지는 후반전일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내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가 중요했다면, 영적 노년에는 ‘주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셨으며, 나는 얼마나 그분 앞에서 비워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수도원의 존재 이유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수도원은 세상에서 도망치는 장소도 아니고, 특별히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장소도 아닐 것입니다. 수도원이 참으로 교회를 섬기려 한다면, 그곳은 사람이 조용히 자기 proprium을 직면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내려놓으며, 다시 세상 속 이웃을 더 잘 사랑하고 섬기도록 준비되는 장소여야 합니다. 외적 침묵이 내적 침묵으로, 외적 청빈이 내적 자유로, 외적 독신과 절제가 사랑의 질서로, 성경 연구가 삶의 거듭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제시된 ‘청빈, 거룩, 오직 예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다듬어 다시 말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소유하지 않는 것’보다 ‘소유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욕망을 억누르는 것’보다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 그리고 ‘오직 예수라고 말하는 것’보다 ‘자기 대신 주님이 중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진다면 수도원은 교회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귀한 영적 훈련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붙들 만한 말은 처음에 나왔던 ‘후반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인생의 후반전은 단순한 제2의 성공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점점 더 ‘나’에게서 ‘주님’으로 중심이 옮겨가는 시간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가 크게 보이고, 내가 얼마나 알려졌는가보다 내가 얼마나 주님의 선한 쓰임에 사용되었는지가 중요해지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가장 아름다운 수도의 열매는 수도원 숫자도, 제자의 숫자도, 책의 숫자도 아닐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한 사람의 말과 표정과 삶에서 ‘그 사람’보다 ‘주님’이 더 잘 보이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직 예수’라는 고백이 마침내 한 인간 안에서 이루어 낸 가장 아름다운 후반전일 것입니다.

 

 

 

SY.87, 강문호 수도사, ‘수도학교 이야기’ (2020011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학교’를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출발의 계기와 초기 과정을 직접 설명하는 기록입니다. 앞선 영상들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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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3,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 이비론 수도원,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 (2020010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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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한 러시아 수도사의 삶을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에는 이름이 ‘티흔’, ‘티온’ 등으로 흔들려 나오지만, 생애의 연대와 특징을 대조해 보면 인물은 러시아 출신의 아토스 수도자 ‘티혼 골렌코프’(Tikhon Golenkov, 1884-1968), 흔히 ‘캅살라의 티혼’ 또는 ‘아토스의 티혼’이라 불리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는 1884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수많은 수도원을 순례했고, 이후 아토스산에 정착하여 수십 년 동안 매우 엄격한 금욕과 기도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훗날 아토스의 성 파이시오스에게 영적 지도를 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영상 초반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이 머문 수도원을 아토스에서 매우 오래되고 큰 수도원 가운데 하나로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의 ‘이비로 수도원’은 아마 ‘이비론 수도원’(Iviron Monastery)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비론은 10세기 말 조지아계 수도사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오늘날 아토스산 20개 주요 수도원 가운데 서열상 세 번째에 해당하는 유서 깊은 수도원입니다. 다만 티혼이 평생 이비론 수도원의 대표 수도사였다고 이해하기보다는, 아토스산 여러 지역에서 수행하다가 특히 캅살라와 카룰리아 등 은수 지역에서 살았던 러시아 수도자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티혼의 삶에서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그의 극단적인 금욕입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고, 졸음을 이기기 위해 몸을 불편하게 하며, 딱딱한 곳에서 잠을 자고, 매우 적은 음식을 먹고,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옷도 최소한으로 소유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전승에서도 티혼은 매우 엄격한 금욕가로 묘사됩니다. 긴 시간 기도하고,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으며, 단순한 음식으로 살고, 거친 환경에서 수행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삶을 접하면 자연스럽게 ‘저 정도로 자신을 절제해야 진정한 수도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외적 금욕과 내적 거듭남을 반드시 구별하게 합니다. 금식과 절제, 그리고 고독은 인간의 욕망을 돌아보고 마음을 주님께 집중시키는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게 먹는 것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딱딱한 침대에서 잔다고 자기 사랑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추위를 견딘다고 proprium이 자동으로 죽는 것도 아닙니다. 외적 절제는 내적 사랑의 질서가 바뀌도록 돕는 수단일 때 비로소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영상에서 티혼은 ‘탐식은 모든 죄가 들어오는 현관’이라는 취지로 말하며, 먹는 것을 극도로 줄였다고 소개됩니다.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는 뜻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적 욕망에 끌려갈수록 그것이 다른 욕망과 결합하여 삶 전체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연적 욕구 그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쉬고 몸을 돌보는 것은 창조질서에 속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목적이 되어 사람을 지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음식 자체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쾌락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무질서한 사랑을 바른 위치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극도로 금식하면서도 ‘나는 이렇게 절제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좋은 음식을 감사히 먹으면서도 탐욕에 지배되지 않고 이웃과 나누며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성의 척도는 얼마만큼 먹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인가에 있습니다. 금욕은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천국의 상태는 아닙니다.

 

그런데 영상이 중반으로 들어가면서 티혼의 모습 가운데 훨씬 따뜻한 부분이 나타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티혼이 동물들을 매우 사랑했다고 전합니다. 쥐가 많은 곳에서 살면서도 동물들을 해치지 않고, 여우와 가까이 지내며, 멧돼지가 와서 새끼를 낳으면 보호하고, 사냥꾼이 오면 다른 곳으로 보내어 동물을 지켜 주었다는 일화들입니다. 실제 티혼의 전승에서도 그가 산짐승들과 친숙하게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동물 세계 역시 인간의 애정과 상응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의 동물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애정과 성향을 표상하며, 창조세계 전체는 영적 세계의 질서를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이 곧 높은 영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창조된 존재를 사랑과 책임으로 돌보는 태도에는 분명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특히 티혼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동물을 단순한 방해물로 여기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대했다는 전승은 그의 금욕과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 줍니다. 영성이 자기 몸을 혹독하게 다루는 데만 머문 것이 아니라 주변 생명을 부드럽게 바라보는 방향으로 나타났다면, 바로 그 부분에서 우리는 금욕의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영성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다른 존재를 더 거칠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온유하게 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가 영상에서 ‘하나님과 합일의 관계’라고 표현하는 대목과도 연결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는 식의 ‘합일’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고, 주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의지(will)와 이해성(understanding)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주님과 ‘결합’(conjunction)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 그분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의 목표도 특별한 황홀경이나 신비체험 자체라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을 실제로 다스리게 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결합이 깊어지면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진실해지고, 더 온유해지며,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됩니다. 결국 주님과의 결합은 삶의 열매로 드러나야 합니다.

 

영상에는 티혼의 초상화를 마른 우물에 던져 넣고 기도했더니 샘물이 솟아올라 초상화가 물 위로 떠올랐다는 기적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는 수도원 전승에서 성인의 거룩함을 기억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런 기적담을 굳이 하나하나 해부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오히려 그 이야기의 중심이 무엇인지 보면 됩니다. 수도원 공동체가 자신들이 존경하던 수도자의 삶을 기억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했고, 그 경험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보여 주듯, 기적 자체가 영성의 증거는 아닙니다. 물이 솟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수도자의 삶에서 어떤 선이 흘러나왔는가입니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기적과 연결되어 있어도 자기 사랑과 지배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이 천국적인 상태를 보증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무 기적도 없지만 일평생 조용히 악을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했다면 그 삶은 주님 앞에서 훨씬 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기적담은 사람을 숭배하게 하기보다 그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할 때, 가장 건강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영상 후반에는 아토스 수도원의 식사 장면이 소개됩니다. 여러 수도사가 함께 앉고, 수도원장이 기도한 뒤 식사를 시작하며, 식사 중에는 말을 하지 않고 한 사람이 성경을 읽는다고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를 ‘입으로는 육신의 양식을 먹고, 귀로는 영의 양식을 먹는다’고 표현합니다. 이 모습은 수도생활의 한 가지 아름다운 질서를 보여 줍니다. 자연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서로 적대시키지 않고, 한 식탁 안에서 함께 놓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본래 서로 적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 표현되고 실현되는 바탕입니다. 육체가 음식을 먹는 동안 마음이 말씀을 듣는다는 장면은 그래서 상징적으로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식사시간에 반드시 성경을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는 형식이 아니라, 자연적 삶이 영적 삶의 질서 아래 놓여 있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먹고 일하고 쉬고 대화하는 평범한 일상 자체가 주님의 선과 진리를 표현하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는 포도주를 마시는 수도사들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아 옆의 미국인에게 잔을 건네주었다는 일화를 웃으며 소개합니다. 이 장면은 오히려 수도 전통을 지나치게 엄숙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게 해 줍니다. 수도자들도 먹고 마시고 웃고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영성은 인간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인 삶을 바른 질서 안에 두는 것입니다.

 

이번 영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티혼의 극단적인 수행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오히려 더 오래 붙들고 싶은 것은 그 뒤에 나타나는 온유함입니다. 밤을 새워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보다 동물을 어떻게 대했는가, 얼마나 적게 먹었는가보다 다른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얼마나 많이 고행했는가보다 자기 삶에서 주님을 어떻게 드러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금욕은 겉사람을 다루지만 거듭남은 속 사람의 사랑을 바꿉니다.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도 다시 등장합니다. 수도생활은 세상의 재산과 명예를 버리는 삶이지만, 그것만으로 proprium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수행을 한다’, ‘나는 평생을 수도에 바쳤다’, ‘나는 특별한 영적 경험을 했다’는 형태로 proprium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깊은 수도는 외적인 소유를 버리는 것보다 자신이 행한 선과 수행을 자기 공로로 소유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힘써 살아야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선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티혼의 삶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도 ‘얼마나 대단한 수도를 했는가?’가 아니라 ‘그 수행을 통해 자기 자신은 얼마나 뒤로 물러나고, 주님의 선이 얼마나 드러났는가?’일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을 직접 방문한 경험 자체에도 큰 감동을 표현합니다. 다른 문화와 전통 속에서 오랜 세월 수도생활을 이어 온 사람들을 직접 보고, 함께 먹고, 이야기하고, 그들의 기도와 생활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기독교 전통을 이렇게 직접 만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개신교가 익숙하게 여겨 온 방식만이 기독교 영성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발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래된 전통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더 깊은 것은 아니며, 극단적인 수행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더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같은 기준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사람 안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자라게 하는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바른 위치로 돌려놓는가? 선과 진리가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나는가?’ 이것이 수도원이든 교회든, 금식이든 기도든, 설교든 신학이든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티혼의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혹독한 금욕의 정도만은 아닐 것입니다. 젊은 시절 수많은 수도원을 찾아다니면서도 단순히 ‘좋은 수도원’을 찾기보다 자신을 제대로 지도해 줄 영적 스승을 찾았고, 이후 오랜 수도생활을 거쳐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위치에 이르렀다는 점 역시 중요합니다. 실제 자료에서도 티혼은 훗날 아토스의 성 파이시오스에게 영적 영향을 준 인물로 기억됩니다.

 

이것은 영적 성숙이 개인의 완성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는 결국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쓰임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혼자 깊은 동굴에서 기도하는 시간도 귀할 수 있지만, 그 기도가 사람을 더 부드럽고 지혜롭게 만들어 다른 사람을 선으로 이끄는 쓰임으로 이어질 때 그 열매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번 영상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티혼의 엄격한 금욕은 그 자체가 거룩함의 척도라기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께 더 온전히 향하려는 하나의 수도적 수단이었으며, 그 수행의 참된 열매는 극단적인 고행보다 온유함과 사랑, 그리고 다른 존재를 위한 쓰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극한의 수도’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깊은 금식은 음식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proprium이 먹고 싶어 하는 자기 명예와 자기 공로를 줄이는 것이며, 가장 깊은 청빈은 물건을 적게 갖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외적 금욕이 내적 거듭남으로 이어질 때, 수도는 특별한 사람들의 기이한 삶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걸을 수 있는 ‘내적 수도’의 길을 보여 주게 됩니다.

 

 

 

SY.83,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 이비론 수도원,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 (2020010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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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0, 강문호 수도사, ‘그리심산 수도원, 예수님의 길을 걸으며 비로소 나그네를 보다’ (20191231)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니던 중 그리심산의 수도원을 방문했던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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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니던 중 그리심산의 수도원을 방문했던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영상은 앞선 수도사 전승들과 조금 다릅니다. 다른 수도사의 특별한 삶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강문호 수도사 자신의 체험이 중심입니다. 그리심산에서 나사렛과 예루살렘 방향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이 길을 얼마나 많이 걸으셨을까?’ 생각했고, 그 생각이 결국 자신도 예수님의 길을 몸으로 한번 걸어 보고 싶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걷기가 단순한 순례 체험을 넘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이후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영상 초반의 ‘사람이 계획을 세운다 할지라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고백은 이 이야기 전체를 여는 좋은 문장입니다. 수도원으로 향하던 중 자동차가 고장 나 계획이 두 시간가량 어그러졌는데, 강문호 수도사는 그 작은 사건을 통해 ‘아무리 내가 서둘러도 하나님의 속도에 맞추어야 한다’고 깨닫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섭리는 단순히 내가 세운 일정이 잘 풀리게 해 주시는 주님의 도움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길을 통해 주님께서 사람을 선으로 이끄시는 신적 질서에 가깝습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도 섭리 안에 있지만, 지연되고 막히고 예상과 달라지는 것 역시 섭리 안에서 쓰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차를 고장 나게 하셨는가?’를 섣불리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내가 무엇을 배우고 어떤 선으로 인도되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심산 꼭대기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께서 걸으셨을 것으로 생각되는 길을 바라보다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이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은 평생 수없이 들었는데 ‘강문호 목사, 예수님 닮았구나’라는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얼마나 닮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수도생활을 하든 하지 않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닮는다’는 말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게 합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외적으로 주님이 걸으셨던 길을 걷거나, 주님처럼 가난하게 살거나, 주님께서 겪으셨던 육체적 고생을 비슷하게 경험하는 것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외적 실천은 귀한 영적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삶 속으로 들어와 그 사람의 사랑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어디를 걸으셨는가?’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주님께서는 왜 그 길을 걸으셨는가? 누구를 사랑하셨고, 누구를 섬기셨으며, 무엇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는가?’를 묻게 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그래서 서울의 아직은 섬기시던 갈보리교회에서 충주봉쇄수도원까지 거리를 재어 봅니다. 약 146킬로미터였습니다. 예수께서 걸으셨던 길을 생각하며 이 정도 거리를 자신도 한번 걸어 보겠다고 결심합니다. 더욱이 일부러 더운 7월을 택하고 돈도 없이 길을 나섭니다. 배낭에는 빈 양재기와 잠잘 때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을 넣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행동 자체를 일반적인 신앙의 모범으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나 돈 없이 146킬로미터를 걸어야 예수님을 닮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 하나의 수도적 훈련입니다. 외적인 수도 훈련의 가치는 그 외형의 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속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느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변화가 뜻밖에도 첫날부터 시작됩니다.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파졌지만 아무 집에나 들어가 ‘밥 좀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음식점들이 즐비해 있는데도 돈이 없으니 들어갈 수 없습니다. 빈 양재기를 가지고 나왔지만 막상 그것을 내밀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 안의 무언가가 깨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평생 목회자로서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그것도 보통 극진히 대접받던 자리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제 자신이 누군가에게 한 끼를 부탁해야 하는, 그러니까 구걸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처음 몸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주목할 만한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가난이 잠시나마 내적인 proprium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지위와 역할, 평판과 대우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벗겨지는 상황에 놓이면 미처 알지 못했던 자기 모습이 드러납니다. ‘밥 한 끼를 달라는 말을 못 하겠더라’는 고백은 사소해 보이지만 오히려 매우 정직합니다. 평생 베푸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 받는 위치에 서 보는 순간입니다. 베푸는 사람에게는 아직 자존심을 유지할 여지가 있지만, 도움을 청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길가에서 절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 앞에는 ‘식사 제공합니다’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목사가 배고프다고 절에 들어가 밥을 먹을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 뒤로 교회들도 몇 곳 지나쳤지만 ‘식사 제공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건 교회는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이 장면은 굳이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낫다고 판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라는 관점에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돌리는 편이 훨씬 유익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배고픈 사람이 실제로 들어와 밥을 먹을 수 있는 신앙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단순한 호의나 감정이 아닙니다. 선은 반드시 쓰임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을 내어주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이해 속에 있는 진리이고, 후자는 삶이 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절 앞의 ‘식사 제공합니다’라는 작은 문구가 강문호 수도사에게 남긴 인상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은 결국 사람에게 어떤 선을 행하고 있는가를 통해 그 생명력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저녁이 되고 어두워지면서 문제는 더욱 현실적으로 변합니다. 이제 배고픔뿐 아니라 ‘오늘 밤 어디에서 자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다가 멀리 교회 십자가가 보이고, 그곳에서 아는 후배 목사를 만나 숙식의 도움을 받습니다. 하루 종일 굶은 뒤 먹은 그 밥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평소라면 평범했을 한 끼가 그날은 잊을 수 없는 은혜가 되었습니다. 대상은 똑같은 밥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삶을 이해할 때 ‘상태’(state)를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같은 말씀을 읽어도 사람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같은 선물을 받아도 자기 충족 속에 있을 때와 궁핍 속에 있을 때 그 의미가 다릅니다. 배고픔을 경험하기 전에는 ‘밥을 대접한다’는 것이 하나의 친절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루 종일 굶고 나면 밥 한 그릇이 사람을 살리는 체어리티라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됩니다. 지식이 경험을 통과하면서 삶의 인식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하루 약 14시간씩 사흘을 걸어 충주봉쇄수도원에 도착했다고 회고합니다. 그리고 잔디밭에 엎드려 한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눈물이 ‘내가 해냈다’는 성취의 눈물이 아니었다는 그의 설명입니다. 한번 걸었을 뿐인데 이렇게 힘든데 예수께서는 얼마나 많이 걸으셨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영상은 외적인 순례에서 내적인 성찰로 들어갑니다.

 

바로 이 지점은 매우 소중하면서도 동시에 조심해서 붙들어야 할 지점입니다. 수도적 훈련에는 언제나 두 방향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내가 이만큼 걸었다, 내가 이만큼 금식했다, 내가 이만큼 버텼다’는 자기 공로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경험을 통하여 ‘나는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주님께서는 얼마나 낮아지셨는가’를 깨닫는 길입니다. 똑같이 146킬로미터를 걸어도, 아니 정확히는 그보다는 많이 적은, 왜냐 하면, 서울 갈보리교회에서 인도로 걸을 수 있는 데가 근처에는 없어 할 수 없이 차로 이동, 좀 서울 외곽에서 출발해야 해서... 전자는 proprium을 키우고 후자는 proprium을 낮춥니다. 외적인 행위가 영적 가치를 자동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어떤 사랑이 형성되느냐가 결정적입니다.

 

이 점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내가 승리했다고 하는 기쁨의 눈물은 아니었다’고 굳이 말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수도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서 얼마나 멀어지고 주님과 이웃에게 얼마나 가까워졌는가?’입니다. 수행의 양보다 애정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 후 강문호 수도사는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800킬로미터의 순례길도 걸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 영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몇 킬로미터를 걸었느냐가 아닙니다. 그가 그 경험의 결과로 무엇이 달라졌다고 말하느냐입니다. 그는 ‘자아가 깨집니다. 인생은 나그네라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말이 오히려 이번 영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뒤부터는 누가 찾아오면 밥을 주고 싶고, 잘 곳이 없는 사람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고, 돈이 없는 사람을 보면 여관비라도 주고 싶어졌다는 것입니다. 집에 빈방이 있으면 집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입지 않는 옷이 있으면 헐벗은 사람을 생각하고, 지갑에 돈이 있으면 돈 없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순례’가 ‘체어리티’로 바뀝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것이야말로 이 영상에서 가장 귀한 대목입니다. 146킬로미터를 걸었다는 사실보다 ‘배고픈 사람을 보게 되었다’는 변화가 더 중요합니다. 800킬로미터를 걸었다는 사실보다 ‘빈방을 보면 집 없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변화가 더 중요합니다. 외적 수도가 내적 체어리티로 열매 맺은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적 삶을 세상을 떠나는 삶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기 직업과 가정과 사회적 책임을 버리는 것이 그 자체로 더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가운데서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행하면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이 천국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순례길에서 받은 감동이 참으로 영적인 것이었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좋은 기준은 ‘그 뒤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입니다. 이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들려주는 후반부의 변화는 바로 그 기준에 상당히 잘 부합합니다.

 

특히 ‘빈방이 있으면 집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입지 않는 옷이 있으면 헐벗은 사람을 생각하고, 지갑에 돈이 있으면 돈 없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고백은 단순하지만 깊습니다. 사람의 시선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내가 가진 것이 누구에게 쓰일 수 있는가?’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소유를 버리는 것보다 더 깊은 변화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재산 그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재산을 사랑하는 질서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자기만족과 지배를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영상 마지막에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어떤 가정에서는 밥을 조금 넉넉하게 지어 놓고 식사 전에 자녀에게 문밖에 나가 지나가는 가난한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게 하며, 있다면 불러 함께 먹는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사실관계의 일반화 여부는 별도로 확인할 필요가 있겠지만, 이 일화가 전달하려는 영적 뜻은 아름답습니다. ‘내 식탁에 아직 한 자리가 남아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체어리티는 거창한 사업에서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내 밥상 한 자리, 내 방 한 칸, 내 옷 한 벌, 내 지갑의 얼마가 다른 사람을 위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면, ‘예수님을 닮는다’는 영상 초반의 질문과 후반부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강문호 수도사가 ‘나는 예수님 닮았다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며 예수께서 걸으셨던 거리를 실제로 걸어 보려 합니다. 그러나 영상이 끝날 무렵에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 ‘예수님이 걸으신 거리를 걷는 것’에서 ‘예수님이 바라보셨던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동합니다. 저는 이것이 이번 영상의 가장 아름다운 흐름이라고 봅니다.

 

주님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걷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갈 수도 없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수도 없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에게 다가가고, 내게 있는 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고,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쓰임을 감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을 따라 걷는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예수님의 이동 경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향했던 방향으로 우리의 사랑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살펴본 크리스토포로스 이야기와도 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그리스도를 찾다가 강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을 등에 업어 주는 쓰임 속에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님의 길을 몸으로 따라가려다가 자신이 배고파 보고, 잘 곳이 없어 보고, 도움받아 보고 나서 비로소 배고픈 사람과 나그네를 새롭게 보기 시작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결국 ‘주님을 찾는 길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열린다’는 곳에서 만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묻게 합니다. 이런 체험은 한 번의 감동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삶에서 계속 검증되어야 합니다. 순례 중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소중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것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순간의 감동보다 반복되는 선택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내 proprium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자기 명예와 편안함과 이익을 앞세우려 할 때마다 그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선을 선택하는 일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수도는 어떤 특별한 장소나 특별한 며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매 순간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번 영상은 그래서 외적인 수도 훈련의 한계를 보여 주기보다는, 오히려 외적인 수도 훈련이 제대로 쓰였을 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로 읽고 싶습니다. ‘걷기’가 목적이 아니라 ‘눈이 열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고생’이 목적이 아니라 ‘이웃의 고생을 알아보게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나는 이만큼 했다’가 목적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이제 누구를 섬길 것인가?’가 목적입니다. 외적인 훈련이 여기까지 사람을 데려간다면 그 훈련은 귀한 쓰임을 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분이 걸으셨던 거리를 재현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서 주님께서 바라보셨던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나도 바라보고 사랑하며, 내게 맡겨진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그 속뜻을 얻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상 초반의 ‘강문호 목사, 예수님 닮았구나 하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는 고백에 대한 답이 어쩌면 영상 후반부에 이미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닮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굳이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닮았다’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던 눈이 그를 돌아보는 눈으로 바뀌고, 내 빈방이 나만의 여분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보이며, 내 지갑 속 돈이 내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쓰임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런 변화 속에서 주님의 형상이 조금씩 사람 안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SY.81,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의 티혼 수도사, 금욕과 거듭남’ (20200105)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한 러시아 수도사의 삶을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에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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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76, 강문호 수도사, ‘크리스토포로스, 그리스도를 업고 강을 건넌 수도사’ (20191229)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여덟 번째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성 크리스토포로스에 관한 오래된 기독교 전승을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성 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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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여덟 번째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성 크리스토포로스에 관한 오래된 기독교 전승을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성 크리스토포로스, 곧 영어권에서 ‘Saint Christopher’라고 부르는 인물입니다. 그의 전승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강을 건너려는 어린아이를 등에 업었다가 그 아이가 점점 세상보다 무거워지고, 마침내 그 아이가 그리스도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역사적 사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방식보다는 오랜 기독교 전승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중심으로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전하는 이야기에서 크리스토포로스는 처음부터 ‘가장 강한 존재’를 섬기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이 왕이라고 생각하여 왕을 찾아가 섬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이 사탄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렇다면 사탄이 왕보다 강하구나’ 하고 사탄을 찾아갑니다. 다시 사탄을 섬기다가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강한 분이구나’ 하며 그리스도를 찾아 나섭니다. 이 전승의 첫 부분만으로도 한 인간의 영적 여정을 상징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선한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을 하나씩 넘어가면서 마침내 참된 주권자를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과정은 인간이 외적인 힘에서 내적인 힘으로 옮겨가는 과정처럼 보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먼저 눈에 보이는 힘을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권력, 재산, 지위, 명예, 육체적 능력 같은 것들입니다. 크리스토포로스가 처음 왕을 찾아간 것도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럽습니다. 왕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왕조차 두려워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그의 생각은 흔들립니다. 눈에 보이는 권력이 절대적인 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사탄을 찾아갔다는 대목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인간은 선의 능력보다 악의 능력이 더 강해 보이는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것 같고, 탐욕과 폭력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으며, 자기 욕망을 거리낌 없이 좇는 사람이 오히려 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악이 선보다 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악에는 자체적인 생명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악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그것을 뒤틀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그것은 궁극적인 힘일 수 없습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마침내 사탄마저 두려워하는 그리스도를 찾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이 이야기는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그는 지금까지 ‘가장 강한 자가 누구인가?’를 찾아다녔지만, 정작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은 더 강한 권력자를 찾아가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한 수도사가 그에게 뜻밖의 길을 알려 줍니다. 강가에서 강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을 업어 건네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섬기다 보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다.’ 가장 높은 분을 만나려는 사람에게 주어진 길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을 섬기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오래된 전승은 놀랍도록 복음적입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세상 끝까지 여행해야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찾아오는 사람을 등에 업으면 되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한 ‘쓰임’(use)과 연결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종교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 사랑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되고, 체어리티는 구체적인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길을 잃은 사람을 인도하며, 내가 가진 힘과 지식과 능력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특히 크리스토포로스에게는 큰 체격과 강한 육체가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그 힘을 ‘가장 강한 자’를 섬기는 데 사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 힘의 참된 목적을 발견합니다. 그의 힘은 강한 자 곁에 서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강을 건너지 못하는 약한 사람을 등에 업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의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재능과 능력은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의 선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될 때 본래의 질서를 찾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아이 하나가 나타나 자신을 강 건너편으로 데려다 달라고 합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평소처럼 아이를 등에 업고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아이가 점점 무거워집니다. 강 가운데에 이르자 마치 온 세상을 등에 짊어진 것처럼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집니다. 가까스로 강을 건넌 크리스토포로스가 어떻게 어린아이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느냐고 묻자 아이는 자신이 세상의 죄를 짊어진 그리스도임을 밝힙니다.

 

이 장면은 전승 전체의 중심입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을 찾아다녔지만, 정작 그분은 힘센 왕이나 위엄 있는 정복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등에 업을 수 있는 작은 어린아이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아이 안에 세상을 짊어진 무게가 있었습니다. 외적으로 가장 작은 모습 안에 내적으로 가장 큰 능력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보여 주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은 외형의 크기와 화려함을 보고 힘을 판단하지만 천국의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주님께 가까운 천사일수록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지혜가 깊을수록 자신의 지혜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압니다. 선이 많을수록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가장 높은 것은 지배하려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오셨다는 복음의 질서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토포로스라는 이름 자체도 이 이야기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Christophoros’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나르는 자’, 곧 ‘그리스도를 짊어진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조금 더 깊이 읽으면 단지 어느 날 어린 예수를 등에 업었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자기 삶 안에 모시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세상으로 운반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크리스토포로스’가 되도록 부름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아름다운 역설이 있습니다. 크리스토포로스가 그리스도를 업고 강을 건넜지만, 실제로는 누가 누구를 지탱하고 있었겠습니까? 겉으로 보면 크리스토포로스가 어린 그리스도를 등에 업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크리스토포로스의 생명과 힘 자체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내가 주님을 위해 이것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더 깊이 깨달으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를 붙들고 계셨던 분도 주님이셨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선을 행할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선의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이웃을 도왔고, 내가 봉사했고, 내가 헌신했고, 내가 복음을 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이 자유롭게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마친 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선한 것은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공로가 끼어들지 않는 선입니다.

 

이 대목은 수도와 헌신을 생각할 때 더욱 중요합니다. 수도생활이 깊어지고 희생이 커질수록 인간에게는 아주 미묘한 시험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버렸다’, ‘나는 이렇게 희생했다’, ‘나는 평생을 바쳤다’, ‘나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했다’는 자기 공로입니다. 외적으로는 모든 것을 버렸는데 내적으로는 오히려 더 큰 ‘나’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이 지점을 매우 엄격하게 봅니다. 참된 자기 부인은 단순히 재산과 지위와 세상의 즐거움을 버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이 행한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마음까지 내려놓는 데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토포로스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사가 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자신의 힘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발견했다는 데 있습니다. 가장 강한 자의 곁에서 힘을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등에 업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이것은 ‘주님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아름다운 답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말씀과 예배와 기도 가운데 만나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쓰임 가운데서도 만나십니다.

 

영상 후반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크리스토포로스가 박해를 받아 신앙을 포기하라는 요구와 여러 유혹을 받았으나 끝까지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다는 순교 전승도 소개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칼과 화살 등의 기적적 세부는 성인전의 전승적 성격을 감안하여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영적 중심은 분명합니다. 한번 참된 주인을 발견한 사람은 다시 이전의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 역시 거듭남의 과정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강렬한 체험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이 진리를 발견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했을 때 오히려 그 진리가 실제로 자기 삶의 사랑이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시험들이 찾아옵니다. 진리를 알고 있을 때와 그 진리 때문에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는 다릅니다. 선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와 자기 욕망을 포기해야 선을 선택할 수 있을 때도 다릅니다. 시험은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있는 지식에서 삶에 속한 것으로 옮겨 가게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 이야기에서 ‘세상의 지배자는 왕도 사탄도 아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결론을 끌어냅니다. 이것은 이번 이야기의 중심을 잘 짚은 말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라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단순히 입으로 ‘예수님이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 의지와 판단과 욕망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실제 삶을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의 계명이 충돌할 때 계명을 선택하고, 내 이익과 이웃의 유익이 충돌할 때 체어리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실제로 그 사람의 삶을 다스리는 왕이 되십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장면은 저는 오히려 화살도, 기적도, 순교도 아니라 ‘강가에서 사람을 업어 건네주는 크리스토포로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특별한 계시도 없었고 천국이 열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기 앞에 온 사람을 자기 힘으로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평범한 쓰임 속으로 그리스도가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아주 특별한 체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맡기신 사람을 사랑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정직하게 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맡겨진 직분과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그곳이 바로 ‘강가’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뒤돌아보면 ‘그때 내가 업고 건넌 사람이 바로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이웃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앞선 영상들과 연결해서 보면 흐름도 흥미롭습니다. ‘연못 이야기’에서는 주님 안에 있어야 산다는 것을 보았고, ‘사과나무 이야기’에서는 자기 지혜보다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을 보았으며, ‘수도사 싸움’에서는 ‘내 것’을 내려놓을 때 싸움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토포로스 이야기’에서는 주님께 받은 힘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돌릴 때 그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모습을 봅니다. 서로 다른 수도사 이야기들이지만 ‘주님으로부터 받아 이웃을 향하여 흘려보내는 삶’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모입니다.

 

이번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가장 강한 분을 섬긴다는 것은 가장 강한 자의 곁에 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힘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이웃의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며, 바로 그 체어리티의 길에서 인간은 자신이 찾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크리스토포로스가 평생 찾아다닌 ‘가장 강한 분’이 마침내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그의 등에 올라왔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세상은 힘을 ‘얼마나 많은 사람을 내 아래 둘 수 있는가’로 측정하지만, 주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으로 받쳐 줄 수 있는가’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크리스토포로스가 그리스도를 등에 업었던 그날, 그의 큰 몸과 힘은 비로소 자기에게 주어진 참된 쓰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거듭남의 중요한 한 모습일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내가 얼마나 커질 것인가?’에서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누구를 건너게 할 것인가?’로 삶의 질문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SY.80, 강문호 수도사, ‘그리심산 수도원, 예수님의 길을 걸으며 비로소 나그네를 보다’ (20191231)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니던 중 그리심산의 수도원을 방문했던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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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74, 강문호 수도사, ‘싸움을 할 수 없었던 두 수도사 - 하나님의 씨와 거듭남’ (20191224)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집트 사막의 어느 수도 공동체에 전해지는 두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강문호 수도사 자신도 이 수도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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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집트 사막의 어느 수도 공동체에 전해지는 두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강문호 수도사 자신도 이 수도원을 직접 방문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수도원 밖 세상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 두 수도사가 어느 날 화면을 통해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싸움이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두 사람은 호기심이 생겨 ‘우리도 한번 싸워 보자’고 합니다.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지갑 하나를 가운데 놓고 한 사람이 ‘내 것이다’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내 것이다’라고 맞서면서 다투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자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한 수도사가 지갑을 집어 들고 ‘내 거다’라고 하자 다른 수도사가 ‘그래, 네 거다. 가져가라’고 해버린 것입니다. 싸움이 시작될 수가 없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여기에서 요한일서 3장 9절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를 인용하고, 이 두 수도사가 싸울 수 없었던 까닭을 ‘그 속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소와 말이 저마다 타고난 방식으로 일어나고 병아리가 물을 마신 뒤 본능적으로 머리를 드는 모습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씨가 사람 안에 자리 잡으면 선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 점차 그 사람의 ‘본질’처럼 된다고 말합니다.

 

이 짧은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이 보입니다. 무엇보다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는 대목입니다. 싸움에는 반드시 두 개의 ‘내 것’이 필요합니다. 한쪽이 ‘내 것이다’라고 할 때 다른 쪽에서도 ‘아니다, 내 것이다’라고 해야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수도사가 ‘그래, 네가 가져라’ 하는 순간 싸움의 재료 자체가 사라집니다. 이 작은 이야기는 인간의 proprium이 어떻게 갈등을 만들어 내는지를 아주 단순하면서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단순히 물건에 대한 소유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 것’, ‘내 생각’, ‘내 판단’, ‘내 공로’, ‘내 지위’, ‘내 명예’, ‘내가 옳다’는 데 집착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모두 여기에 연결됩니다. 실제로 우리의 싸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질 때문인 경우보다 ‘내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누군가 내 의견을 무시했다고 느끼고, 내 체면을 손상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여기면서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결국 겉으로는 여러 이유가 있어 보여도 그 깊은 곳에는 ‘나’와 ‘내 것’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두 번째 수도사가 ‘그래, 네 거다’라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그는 논쟁에서 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논쟁 자체를 필요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과 맞설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질서와도 매우 잘 연결됩니다. 천국에서는 각자가 자기 자신만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유익을 기뻐합니다. 자신이 가진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움켜쥐기보다 그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알고 서로 나누기를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적 삶의 중심에는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서로에게 쓰임이 될 것인가’가 놓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는 조금 더 깊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요한일서의 ‘하나님의 씨’를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새로운 본질처럼 설명합니다. 이 방향에는 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거듭남이 깊어지면 사람은 단지 ‘죄를 지으면 안 되니까 참는 상태’를 넘어 ‘그 악 자체를 싫어하는 상태’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계명이 ‘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악을 피하지만, 나중에는 그 악이 주님을 거스르고 이웃을 해친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에서 싫어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동 교정이 아니라 애정의 변화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은 강문호 수도사의 ‘본질이 달라진다’는 표현을 더욱 깊게 열어 줍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죄를 모르는 존재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도움을 받아 악과 싸우고 그것을 피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애정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하면 안 되니까 하지 않는 것’이었던 일이 어느 순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됩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억지로 행하던 선이 점차 좋아지고 기뻐집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놀라운 변화입니다. 선이 의무에서 기쁨으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죄를 피하는 게 아니라 죄를 모르는’ 삶이라는 표현은 그 의도를 잘 살려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거듭난 사람이 죄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악을 너무 멀리하여 그것을 자기 삶의 선택지로 삼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들은 악이 무엇인지 모르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과 진리 안에 있기 때문에 악과 거짓을 더욱 분명하게 분별합니다. 다만 그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악을 모른다’기보다 ‘악을 원하지 않는다’가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번 영상의 ‘하나님의 씨’라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요한일서의 ‘씨’를 곧바로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보존하시며, 훗날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점에서는 아름다운 접점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받은 사랑, 말씀을 들으며 느꼈던 거룩한 정서, 양심을 따라 선을 행했을 때의 기쁨, 주님과 이웃을 향했던 순수한 마음 등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에서 그것들을 불러내어 사용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씨가 있으면 범죄하지 못한다’는 말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면 자칫 신앙생활의 실제 모습을 놓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도 시험은 있고 proprium은 계속 고개를 듭니다. 천적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 인간에게는 끊임없는 내적 싸움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악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물러서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선한지를 자랑하기보다 자기 안에는 선한 것이 없고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이 점은 이번 이야기의 핵심과도 맞닿습니다. ‘내 거야’라고 주장하지 않았던 수도사의 모습은 단지 물질에 욕심이 없는 모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더 어려운 내려놓음은 ‘내가 선하다’는 생각까지 내려놓는 것입니다. 재산을 내려놓는 것은 눈에 보이지만 자기 공로를 내려놓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수도복을 입고 청빈하게 살면서도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더 거룩하다’, ‘나는 이것을 이루었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많은 재산과 책임을 가지고 세상 한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과 능력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며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적 형식보다 그 형식 안에 있는 사랑의 질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이라는 환경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싸움을 보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속의 싸움까지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악은 단순히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한 내면의 애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참된 수도는 장소의 격리가 마음의 변화로 이어질 때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보다 자기 안의 ‘내 것’을 얼마나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싸움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두 수도사’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영적 비유로서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싸움을 멈추는 가장 깊은 방법은 싸움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일으키는 자기중심적 애정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 것이다’라고 할 때 언제나 ‘그래, 네가 가져라’라고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불의 앞에서는 진리를 말해야 하고, 약자를 보호해야 하며, 맡겨진 것을 책임 있게 지켜야 합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적인 양보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사랑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자기 자존심과 승리를 위해 하느냐, 아니면 선과 진리와 이웃의 유익을 위해 하느냐입니다.

 

따라서 참된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평화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내적 질서입니다. 사람 안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바른 질서 아래 둘 때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때 사람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저 사람이 인정해야 한다’, ‘내가 한 일을 사람들이 알아줘야 한다’, ‘내가 받아야 할 몫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이전에는 싸움거리가 되었던 것들이 더 이상 싸움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앞선 ‘사과나무 이야기’가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는 자기 지혜를 내려놓고 주님의 섭리에 맡기는 이야기였다면, 이번 ‘수도사 싸움’은 ‘내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싸움 자체가 사라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영상 모두 깊은 곳에서는 proprium을 다룹니다. 하나는 ‘내가 안다’는 proprium이고, 다른 하나는 ‘내 것이다’라는 proprium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이 ‘내가 안다’와 ‘내 것이다’가 조금씩 ‘주님께서 아십니다’와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로 바뀌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인용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라는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끝나기보다 훨씬 아름다운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여 삶으로 살아갈수록 선은 점차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이 됩니다. 처음에는 싸우고 싶은데 참습니다. 그다음에는 싸워서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의 유익을 자기 유익처럼 기뻐할 수 있는 상태를 향해 갑니다. ‘죄를 참는 사람’에서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번 ‘수도사 싸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거듭남이란 죄를 짓고 싶은 자신을 억지로 눌러 놓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심으신 선과 진리가 삶의 사랑이 되어 마침내 이전에 좋아하던 악을 싫어하고 이전에 힘들어하던 선을 기뻐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그리고 두 수도사가 싸움에 실패한 이유를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이렇습니다. ‘싸울 줄 몰라서 싸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싸움을 만들어 낼 “내 것”이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싸움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해야 할 것도 어쩌면 ‘평생 아무와도 부딪치지 않게 해주십시오’가 아니라 ‘부딪치는 순간에도 제 안의 proprium이 주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선과 진리와 체어리티가 저를 이끌게 해주십시오’일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한복판에서도 가능한 수도이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신 ‘씨’가 마침내 삶의 열매가 되어 가는 길일 것입니다.

 

 

 

SY.76, 강문호 수도사, ‘크리스토포로스, 그리스도를 업고 강을 건넌 수도사’ (20191229)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여덟 번째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성 크리스토포로스에 관한 오래된 기독교 전승을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성 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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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73, 강문호 수도사, ‘사과나무와 하나님의 섭리’ (2019122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한 수도사와 사과나무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수도사는 사과를 먹고 싶어 작은 묘목 하나를 심고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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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한 수도사와 사과나무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수도사는 사과를 먹고 싶어 작은 묘목 하나를 심고 정성껏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연약한 사과나무가 잘 자라도록 이슬비를 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다음에는 햇볕을, 또 적당한 바람을, 나무가 커진 뒤에는 충분한 소낙비를 구합니다. 가을이 되어 열매가 맺힐 무렵에는 서리가 알곡을 여물게 한다고 생각하여 적당한 서리까지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수도사는 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자기가 판단하여 그때그때 하나님께 요청했고, 하나님께서 그대로 응답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서리를 맞은 사과나무가 얼어 죽어 버립니다. 수도사는 실망합니다. 자신은 사과나무가 잘되기를 바라며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하나님께 구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이 수도사가 이웃 수도원에 갔더니 그곳에는 사과나무 한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놀란 수도사가 어떻게 이렇게 잘 길렀느냐고 묻자 다른 수도사는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사과나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사과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 제일 잘 아십니다. 가장 적당한 때에, 가장 적당한 것을, 가장 적당한 양만큼 주셔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시오.’ 그는 이슬비와 햇볕과 바람과 소낙비와 서리의 시기와 양을 자신이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사과나무를 만드신 분이 사과나무를 자신보다 더 잘 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려는 핵심도 분명합니다.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짧은 이야기는 놀랍도록 깊은 ‘신적 섭리’의 문제를 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수도사의 잘못은 기도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아주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사과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은 이슬비가 필요하고, 다음에는 햇볕이 필요하며, 이제는 바람이 필요하고, 이만큼 자랐으니 소낙비가 필요하고, 가을에는 서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정한 순서대로 하나님께 그것을 요청합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인데,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계획은 이미 사람이 세워 놓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실행해 주시는 분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서도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이미 가장 좋은 결과를 정해 놓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 일이 이렇게 풀려야 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변해야 하며, 이 문은 열리고, 저 문제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기도가 점점 깊어진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 받아 내는 것’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원하게 되는 것’으로 중심이 이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두 번째 수도사의 기도가 아름답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과나무를 심었고 돌보았으며 열매를 기다렸습니다. 다만 자기가 알지 못하는 영역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 나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이 나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체념이 아닙니다. 창조주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이 태도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그림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지금 보고 있는 한순간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적 삶에서 영원한 삶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를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의 평안과 성공과 문제 해결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보십니다. 우리는 ‘이 일이 잘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일이 잘되는 것이 과연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에 유익한지를 보십니다. 우리는 오늘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영원을 보십니다. 바로 이 시야의 차이가 첫 번째 수도사와 두 번째 수도사의 차이 속에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우리가 구한 ‘햇볕’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비’가 내릴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바람이 불고, 생각하지 못했던 겨울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주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을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맑은 날만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도, 기다림도, 좌절도, 때로는 우리의 계획이 무너지는 경험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쓰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난 자체가 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악과 고통을 만들어 우리를 교육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자연계의 질서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주님께서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향하도록 끊임없이 굽혀 이끄신다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에 더 가깝습니다.

 

여기에서 사과나무는 인간의 거듭남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상징이 됩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열매를 맺기까지 햇빛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비도 필요하고 바람도 필요하며 계절의 변화도 필요합니다. 인간의 영적 성장 역시 한 가지 경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위로받을 때도 있고, 시험을 통과해야 할 때도 있으며, 말씀의 진리가 밝게 이해될 때도 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을 조금씩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어느 한순간만 떼어 놓고 ‘이것은 왜 필요합니까?’라고 묻지만, 주님께서는 한 사람의 거듭남 전체를 보고 계십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시험을 거듭남의 중요한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사람 안에 깊이 숨어 있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평온할 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잘될 때에는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의지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길이 막히며, 내 판단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오면, 비로소 내 안의 proprium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왜 내 뜻대로 되지 않는가?’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도의 응답보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험이 우리 자신을 더 깊이 보여 주기도 합니다.

 

첫 번째 수도사의 사과나무가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나무를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 목적 자체는 선합니다. 그러나 그 선한 목적 속에도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는 자기 지혜가 숨어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proprium은 노골적인 악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일과 선한 일 속에도 아주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위해 이것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내가 계획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과까지 결정한 다음 주님께 그 계획을 승인하고 도와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단순히 악한 욕망만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안다’는 자기 지혜까지 조금씩 내려놓게 됩니다.

 

그렇다고 두 번째 수도사의 태도를 ‘아무 계획도 세우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섭리를 믿는 삶은 수동적인 삶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혜를 사용해야 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농부라면 계절을 살펴야 하고, 병이 나면 의사를 찾아야 하며, 맡은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과나무를 심었다면 물도 주고 가지도 돌봐야 합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면서 ‘결과까지 내가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섭리를 믿는다’는 말의 가장 실제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내일의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실하게 판단하되 내가 알 수 없는 것까지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되 ‘반드시 이것이어야 합니다’라고 주님의 손을 묶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내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도 즉시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결론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장면을 보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전체 이야기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 이야기에 이어 요한복음 15장 16절, 곧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앞선 다섯 번째 ‘연못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포도나무와 가지의 말씀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지난 영상의 중심이 ‘주님 안에 거하라’였다면 이번 영상은 ‘그 안에서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목적은 단순히 살아남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열매’는 특히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열매는 삶으로 나타나는 선, 곧 선한 행위와 쓰임에 상응합니다. 신앙은 머릿속에서 진리를 많이 아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삶이 되고, 이웃을 향한 선한 행위로 나타날 때 비로소 열매가 됩니다. 따라서 ‘열매를 많이 맺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교회가 커지고, 사역의 결과가 많아진다는 의미보다 훨씬 깊습니다. 한 인간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실제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더 정직해지고, 더 온유해지고, 자기 욕심을 덜 따르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열매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과나무 이야기의 마지막 열매는 단순히 ‘사과’가 아닙니다. 주님께 맡긴 삶에서 맺히는 선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맺게 하시는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나무를 심고 돌보지만,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많이 맺힐수록 인간이 해야 할 고백은 ‘내가 이렇게 훌륭한 열매를 맺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 일을 이루셨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와도 다시 연결됩니다. 기도의 가장 깊은 목적은 세상의 조건을 내 뜻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기도하는 나 자신이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 이슬비를 주십시오. 햇볕을 주십시오. 바람을 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면서 기도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지금 제게 무엇이 필요한지 저는 다 알지 못합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충실히 행하게 하시며, 제가 알 수 없는 것은 주님의 섭리에 맡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기도를 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걱정, 근심,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 알아서 해주십시오’라는 말도 이런 의미에서 들으면 참 편안합니다. ‘알아서 해주십시오’는 무책임의 말이 아니라 신뢰의 말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붙들고 염려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몫과 주님의 몫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내게 주어진 선을 행하고, 전체의 결과는 주님의 섭리에 맡깁니다.

 

어쩌면 우리의 많은 근심은 미래에 대한 지식까지 가지려 하기 때문에 생기는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일이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저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 하며 아직 오지 않은 날의 짐까지 오늘 짊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 전체를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필요한 만큼의 빛을 주십니다. 그것으로 오늘의 한 걸음을 걷게 하십니다. 내일이 오면 내일 필요한 빛을 다시 주십니다. 이것이 섭리 아래 사는 사람의 평안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수도사의 차이는 ‘기도한 사람과 기도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아닙니다. 둘 다 기도했습니다. 차이는 ‘내가 알고 있으니 그대로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기도와 ‘주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시니 저는 제 몫을 행하며 주님께 맡깁니다’라는 기도 사이에 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결과를 자기 손에 쥐고 싶어 하는 기도이고, 후자는 결과를 주님의 지혜에 맡기는 기도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기도 역시 전자에서 후자로 조금씩 옮겨갈 것입니다.

 

이번 ‘사과나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해야 할 선을 충실히 행하면서, 내가 볼 수 없는 내일과 영원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의 지혜와 사랑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수도사의 기도와 두 번째 수도사의 기도를 나란히 놓으면 아주 짧은 차이가 보입니다. ‘주님, 제가 보기에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에서 ‘주님, 주님께서 보시기에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로 바뀌는 것입니다. 말은 몇 글자밖에 달라지지 않지만 그 사이에는 proprium에서 섭리로, 자기 지혜에서 주님의 지혜로 옮겨가는 긴 거듭남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사과나무 한 그루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그 나무를 만드신 분이 가장 잘 아신다면, 하물며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보고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얼마나 더 잘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참된 기도는 결국 주님께 무엇을 알려드리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아시는 그 선한 뜻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여는 일이 되어 갑니다.

 

 

 

SY.74, 강문호 수도사, ‘싸움을 할 수 없었던 두 수도사 - 하나님의 씨와 거듭남’ (20191224)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집트 사막의 어느 수도 공동체에 전해지는 두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강문호 수도사 자신도 이 수도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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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72, 강문호 수도사, ‘수도와 연못 - 주님 안에 거하기’ (20191217)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앞선 몇 편처럼 오래된 수도사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강문호 수도사가 충주봉쇄수도원에서 직접 겪은 아주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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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은 앞선 몇 편처럼 오래된 수도사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강문호 수도사가 충주봉쇄수도원에서 직접 겪은 아주 작은 일상에서 시작합니다. 수도원에는 금붕어와 비단잉어 백여 마리가 사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어느 목사님의 제안으로 연못 바닥에 자갈을 깔고 정비하기로 했습니다. 포클레인을 불러 연못을 수리하려면 먼저 그 안의 물고기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강문호 수도사가 직접 연못 안에 들어가 물고기들을 손으로 잡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물고기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자신들을 잡으려는 손이 죽이려는 손이 아니라 살리려는 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도망가는 물고기들을 보며 속으로 ‘야, 이놈들아. 잡혀라. 안 잡히면 포클레인에 깔려 죽는다’고 합니다. 이 짧은 장면이 이번 영상 전체를 여는 하나의 영적 비유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장면을 바라보면 먼저 ‘섭리’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의 섭리라 하면 내가 원하는 일이 잘 풀리고, 위험에서 벗어나며,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붙잡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내가 원하는 방향과 반대로 끌려가는 것처럼 느껴지며, 지금까지 편안하게 살던 자리에서 갑자기 옮겨지는 것처럼 경험되기도 합니다. 연못 속 물고기의 눈으로 보면 자기를 붙잡는 손은 위협입니다. 그러나 연못 밖에서 전체 상황을 보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그 손이 생명을 살리는 손입니다. 물고기는 곧 포클레인이 들어온다는 것을 모르지만 사람은 압니다. 이 작은 차이에서 인간과 주님의 시야가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눈앞의 순간을 보지만 주님은 영원을 보십니다. 우리는 지금 나에게 좋은 것을 구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라고 묻는 순간에도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먼 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고난과 실패를 단순히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선을 위하여 사용하실 수 있으며, 우리가 자유롭게 주님을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물고기에게는 붙잡힘이었지만 실상은 구원이었던 그 순간처럼 말입니다.

 

연못을 수리하는 동안 물고기들은 수도원에서 가장 큰 물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목욕탕에 임시로 옮겨집니다. 그런데 넓은 연못에서 살던 물고기들에게 목욕탕은 답답했는지 자꾸 물 밖으로 뛰쳐나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닥에 떨어진 물고기들을 다시 주워 넣으며 또 말합니다. ‘나오면 죽어. 물 안에 있어.’ 여기서 두 번째 영적 그림이 생겨납니다. 처음에는 ‘잡혀야 산다’였고, 이제는 ‘안에 있어야 산다’입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는 자연스럽게 요한복음 15장의 주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인간도 주님 안에 거하지 않고서는 참된 영적 생명을 가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매우 깊이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인간은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입니다.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사랑도, 생각도,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그 근원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생명을 인간에게 주시면서 마치 그것이 인간 자신의 것인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우리가 ‘내가 생각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살아간다’고 느끼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래야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날수록 사람은 한 가지를 점점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참된 생명은 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아르카나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지는 실제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가지가 스스로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줄기와 뿌리에서 생명을 받아 열매를 맺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선을 행해야 하고, 실제로 악을 피해야 하며,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맡겨진 쓰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이 선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라고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을 설명하면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중요한 질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하지만, 동시에 선을 행할 힘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의 ‘잡혀서 살아라’라는 표현도 아름답게 들립니다. 물론 주님께 붙잡힌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강제로 끌고 가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지극히 존중하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억지로 붙잡혀 있는 인간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그것이 생명의 길임을 깨달아 자유롭게 주님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인간입니다. 처음에는 계명이 나를 붙잡는 울타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 말라’, ‘용서하라’, ‘사랑하라’, ‘거짓을 버려라’, ‘탐욕을 버려라’ 하는 말씀들이 자유를 제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그 계명들이 자신을 가두는 울타리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지켜 주는 울타리였음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물 밖으로 뛰쳐나온 물고기를 생각하면 이것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물고기에게 물은 속박이 아닙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 그 존재가 살아갈 수 있는 질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주님의 계명은 생명을 억압하는 규칙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질서입니다. 악을 마음껏 행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고기가 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처음 몇 순간은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생명 자체를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자유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하는 자유가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 점에서 proprium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끊임없이 ‘내가 내 삶의 주인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자유다’, ‘내 판단이 옳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태가 주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지의 모습입니다. 가지가 ‘나는 이제 줄기가 필요 없다’며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다면 그것은 독립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주님 없이 자기 지혜와 자기 능력과 자기 의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할수록 영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인간의 개성이 없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어 한 사람의 인상적인 목회 현장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교회에서 어떤 오해가 생겨 약 십 년 동안 교회를 떠나 있던 사람이 어느 날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무당이 굿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는데, 굿을 하던 무당이 갑자기 ‘여기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이 사람의 마음에 놀라운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나는 십 년 동안 주님을 떠나 있었는데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셨구나. 나는 주님을 버렸는데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그리고 그는 그 일을 계기로 다시 교회로 돌아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고백일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떠났지만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리메인스’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남겨 두시고 보존하십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 말씀을 들으며 느꼈던 거룩한 감동,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순간, 잘못을 뉘우치며 주님을 찾았던 경험 등은 모두 단순히 사라져 버리는 과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사람의 깊은 내면에 보존하시며, 훗날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의 신비입니다.

 

사람은 때로 아주 멀리 떠날 수 있습니다. 십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앙과 아무 관계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과거에 심어 두신 선과 진리를 함부로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어느 날 한 말씀을 듣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다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겪다가 오래전에 묻혀 있던 것이 갑자기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래, 나에게도 주님을 사랑했던 때가 있었지.’ 그렇게 사람의 마음이 다시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화의 중심은 기이한 현상 자체보다 ‘십 년 동안 기다리신 주님’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강문호 수도사의 메시지가 참 따뜻해집니다. 인간은 주님을 놓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을 쉽게 놓지 않으십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끝까지 거절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끊임없이 구원하시려는 사랑이 흘러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주님의 신적 섭리는 모든 순간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인간이 돌아설 수 있는 길을 남겨 두시고, 선을 선택할 가능성을 보존하시며, 때가 되면 다시 부르십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을 버렸는데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이 사람의 고백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아주 아름답게 표현하는 말로 들립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어 태양을 예로 듭니다. 지구와 태양의 관계가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질서 안에 있듯이 인간도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 역시 스베덴보리의 세계에서는 더욱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태양에 관하여 매우 중요하게 말합니다. 천국의 태양은 주님의 신적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며, 그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열은 사랑에, 빛은 지혜와 진리에 상응합니다. 자연계에서 태양의 열과 빛이 생명을 가능하게 하듯, 영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인간의 영적 생명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연못의 물과 포도나무와 가지와 태양이 모두 하나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물고기에게 물이 생명의 환경이고, 가지에게 포도나무가 생명의 근원이며, 자연계의 생명에게 태양의 열과 빛이 필요하듯, 인간의 영적 생명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핵심은 얼마나 많은 것을 ‘내가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가는가에 있습니다.

 

영상 마지막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수도사의 삶을 ‘하나님만 붙잡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거룩한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이 말이 전체 이야기를 잘 정리해 줍니다. 수도생활의 본질이 반드시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에서 사는 데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된 수도는 결국 매일의 삶에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에 있는 사람도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고, 시장과 직장과 가정 한복판에 있는 사람도 주님 안에 깊이 거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사랑의 방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붙잡는다’는 말 역시 다른 모든 인간관계를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참으로 붙잡을수록 이웃을 더 바르게 사랑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흘러갈 때 그것이 체어리티가 되고,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살아 있다는 증거는 줄기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의 신앙은 결국 그의 삶에서 선한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영상의 핵심을 ‘잡혀서 살아라’라는 강렬한 표현에서 시작하여 ‘붙어 있어라’, 그리고 마지막에는 ‘열매를 맺어라’로 이어서 읽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나를 붙드시는 은혜를 깨닫습니다. 다음에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이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붙잡힘 → 거함 → 열매 맺음’입니다. 이 셋이 함께 있을 때 신앙은 단순한 고백을 넘어 삶이 됩니다.

 

연못에서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금붕어에게 자신을 붙잡는 손이 살리는 손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말씀을 주셨고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으며, 그 진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거듭남은 물고기처럼 억지로 붙잡혀 옮겨지는 일이 아니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주님의 손길이 사실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 가며 스스로 그 손을 신뢰하게 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연못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고기가 물 안에서 살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열매를 맺듯, 인간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며, 거듭남이란 그 생명이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점점 더 깊이 인정하면서 받은 사랑과 진리를 이웃을 위한 선한 열매로 돌려드리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의 ‘잡혀서 살아라’라는 말을 그대로 마음에 담으면서 한마디를 덧붙인다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 사는 것보다 먼저인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연못 속에서 주님의 손을 피해 달아나는 동안에도, 좁고 답답하다며 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동안에도, 심지어 십 년 동안 주님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주님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우리를 붙잡아 당신에게 예속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려 참으로 자유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작은 연못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님의 섭리이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신 말씀의 깊은 위로이기도 합니다.

 

 

 

SY.68, 강문호 수도사, ‘시오도르 수도사’ (20191215)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https://youtu.be/ycpr_QuUjbc?si=heNUWptbnsCcOZsH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동방정교회에 전해 내려오는 ‘시오도르’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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