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천국과 지옥, 고통과 구원, 그리고 삶의 의미

이번 영상은 앞의 영상보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훨씬 더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한 내용입니다. 천국과 지옥, 사후세계, 예수를 알지 못한 사람의 구원, 양심, 하나님의 섭리, 고통과 악, 부활,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까지 다루기 때문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김학철 교수가 전통적인 한국 개신교의 천국·지옥 이미지를 해체하려는 과정에서 제시하는 몇몇 통찰이 스베덴보리와 놀라울 만큼 가까워지는 한편, 결정적인 몇 지점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멀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은 단순히 ‘맞다, 틀리다’로 평가하기보다, 김학철 교수가 무엇을 해체하려 하는지 먼저 이해하고, 그 해체 이후 스베덴보리가 어떤 더 넓은 그림을 제시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담의 출발점은 ‘익숙함을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오랫동안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성경을 잘 아는 것도 아니며,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기독교를 잘 아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능력이 사라지는 순간 종교와 고전은 생명력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이 태도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경험 자체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읽어 온 창세기의 익숙한 문장들이 전혀 다른 깊이를 가진 말씀으로 다시 열립니다. ‘’, ‘’, ‘’, ‘나무’, ‘동산’, ‘’, ‘여자’, ‘가인’, ‘아벨’ 같은 너무나 익숙한 말들이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의 질서를 담은 말씀으로 새롭게 읽힙니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을 안다’는 확신보다 말씀 앞에서 계속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김학철 교수의 지적은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해집니다. 김학철 교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당과 지옥’의 이미지 상당 부분이 성경 자체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문화적·종교적 번역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천당’이나 ‘지옥’이라는 한국어 자체가 동아시아 종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말이며, 단테의 ‘신곡’ 같은 작품이 서구인의 지옥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바실레이아’를 오늘날의 영토적 국가 개념보다 ‘통치’ 또는 ‘질서’로 이해해야 한다면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주로 ‘죽어서 가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 임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는 스베덴보리와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단순히 우주의 어느 장소에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핵심 가운데 하나는 천국이 본질적으로 ‘상태’라는 것입니다. 물론 영계에는 공간처럼 경험되는 질서가 있습니다. 천국의 공동체들이 있고, 집과 길과 산과 정원 같은 것들도 실제적으로 지각됩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자연계의 공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영들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김학철 교수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김학철 교수가 ‘신약 성서는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이 사실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이 아니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분명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단지 사후세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사후세계의 실재가 기독교에서 주변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을 인간의 종교적 상상이나 후대 문화가 만들어 낸 이미지로 보지 않고, 자연계와 함께 창조 질서를 이루는 실제 영계로 설명합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천국은 장소인가, 상태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천국은 ‘상태가 공간으로 나타나는 세계’라고 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자연계에서는 서로 미워하는 두 사람도 같은 방에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내적 상태가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영들이 지속적으로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공간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단순히 ‘죽어서 올라가는 저 위의 장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은유나 현재적 하나님의 통치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 세계이되 자연계와 전혀 다른 법칙, 곧 사랑과 애정과 상응에 따라 형성되는 세계입니다.

 

이 차이는 지옥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게헨나’가 힌놈의 골짜기와 관련된 말이며, 고대의 우상숭배와 인신공양, 부정함과 죽음의 이미지가 지옥의 표현과 결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역사적·언어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의미 있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서 다시 ‘상응’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불, 유황, 어둠, 구더기, 악취 같은 지옥의 표현이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연계의 물리적인 불과 유황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단순한 고대인의 문학적 상상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지옥적 사랑과 거짓의 실제 상태에 ‘상응’하는 표현입니다.

 

가령 천국의 불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에 상응하지만, 지옥의 불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과 증오에 상응합니다. 같은 ‘’이라는 이미지가 사랑의 성질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문자적 지옥 이미지를 그대로 물질화하지도 않고, 반대로 그것을 신화나 은유로 해체해 버리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불지옥이 아니다’와 ‘지옥은 실재하지 않는다’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라는 질문입니다. 김학철 교수는 로마서 2장의 양심을 이야기하고, 유스티누스의 ‘로고스의 씨앗’을 소개하며, 마태복음 25장의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주님께 행한 것이라는 말씀을 들어 ‘예수를 역사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지옥에 간다고 말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설명합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한국 개신교의 구호가 성경 전체의 구원론을 정확하게 압축한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스베덴보리와의 접점이 매우 큽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독교 세계 밖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는가, 악을 악으로 여기고 선을 행하려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선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사후에 천사들에게 진리를 배우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반대로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성경과 교리를 많이 알고 있어도 실제 삶의 지배적 사랑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었다면, 그 외적 신앙고백 자체가 천국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이 예수를 몰랐으므로 지옥에 갔다’는 식의 단순한 판정은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와도 맞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선행을 많이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핵심은 행위의 외형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양심을 따라 선을 사랑하고 행했다면, 그 선의 근원은 본인이 당시 명시적으로 알지 못했더라도 궁극적으로 주님께 있습니다. 사후에는 그 선 안에 있는 사람에게 진리가 주어지고, 그는 자신이 이미 사랑하고 있었던 선의 근원이 주님이셨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최근 ‘아벨’과 체어리티를 읽으며 살펴보고 있는 내용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이름으로만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구원의 자격증처럼 될 때, 바로 가인으로 상징되는 문제가 시작됩니다. 반대로 사람이 가진 진리의 양은 제한되어 있더라도 그가 선을 사랑하고 양심에 따라 살고 있다면, 그 안에는 주님께서 이후 진리와 결합시키실 수 있는 토대가 있습니다.

 

그다음 ‘고통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설명하지 말라’는 부분도 매우 귀합니다. 김학철 교수는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울부짖음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을 향한 탄원과 절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시편의 탄원을 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고통받는 사람의 질문을 억압하는 책이 아니라 때로는 그 사람과 함께 울어 주는 책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부분은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와도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섭리를 안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조심해야 할 말이 바로 ‘다 뜻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신적 섭리의 개별적인 연결고리를 현재의 시점에서 모두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건 하나만 보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과 자유, 수많은 사람의 관계와 선택,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까지 동시에 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왜 이 일을 허용하셨는지 제가 압니다’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섭리를 깊이 이해한 태도와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스베덴보리적 구별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과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악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것으로 생각하면 신적 사랑의 본질과 충돌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오직 선만을 의도하시며, 악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악이 허용될 수밖에 없고, 주님의 섭리는 허용된 악에서 가능한 한 선을 끌어내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역사합니다.

 

이 점에서 영상의 ‘고양이 스케일링’ 비유처럼 ‘우리가 악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은 더 큰 하나님의 선일 수도 있다’는 설명은 일정 부분 도움이 되지만, 모든 고통에 그대로 적용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의 스케일링은 보호자가 직접 의도한 고통이며 그 자체가 치료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살인, 학대, 전쟁, 배신 같은 악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익을 위해 직접 계획한 ‘영적 스케일링’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이 매우 섬세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악을 선을 위한 수단으로 창조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이 자유 속에서 일으킨 악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악이 영원한 파괴로 끝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선한 방향으로 굽히십니다.

 

영상에서 하나님의 전능을 ‘사랑의 전능성’이라고 표현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프로그램해 놓고 인간을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파트너로 불러 혼돈에 질서를, 어둠에 빛을, 눈물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시는 분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가운데 ‘사랑의 전능성’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신관과 상당히 잘 어울립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사랑, 신적 지혜, 신적 능력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사랑과 반대되는 자의적인 힘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 원하고 지혜가 아는 것을 능력으로 이루십니다.

 

다만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세계를 만들어 가는 파트너’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주님과 동등한 창조의 공동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선을 행할 능력과 진리를 이해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야 자유로운 응답이 가능하지만, 실제 선과 진리의 생명은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내가 선을 행한다’고 느끼면서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선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자유와 겸손이 동시에 보존됩니다.

 

영상에서 부활을 ‘사후 정산’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역사적 배경을 따라 유대교의 부활 신앙이 불의하게 죽은 의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결국 정의를 회복해 주신다는 신정론적 희망과 연결되어 발전했다고 설명합니다. 역사학적 설명으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후생을 단순히 역사적 종교관념의 발전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육체가 죽은 직후에도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 있으며, 의식과 사고와 기억과 애정을 가지고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사후세계는 먼 미래에 이루어질 추상적인 ‘정산’이 아니라 죽음 직후부터 이어지는 실제적인 인간 생명의 연속입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AC.320 이후에서 읽었던 내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끼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며, 감각과 사고와 언어가 자연계에서보다 오히려 더 분명해진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에서 ‘성경의 사후세계 관심은 거의 없다’는 진술과 AC.320 이하에서 스베덴보리가 증언하는 영계의 모습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 관점을 억지로 일치시키기보다 그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보다 그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것이 먼저’라는 김학철 교수의 강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두고 ‘이 사람의 죄인가, 부모의 죄인가?’라는 인과관계의 질문에 매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일이 나타날 방향을 바라보셨다는 설명, 그리고 불교의 ‘독화살 비유’를 가져와 원인을 모두 알아낸 뒤에야 사람을 도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은 앞 영상에서 말한 ‘사랑의 급진성’과도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바꾸면 이것은 ‘쓰임’과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받고 있을 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신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지금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선한 쓰임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설명보다 함께 앉아 있는 것이 쓰임이고, 때로는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이 쓰임이며, 때로는 그의 말을 판단하지 않고 듣는 것이 쓰임입니다. 진리는 쓰임을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를 가지고 고통받는 사람을 압도한다면 진리의 목적을 거꾸로 사용하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영상 후반의 아우슈비츠와 하나님의 고통에 관한 부분에서는 조금 더 신학적 주의가 필요합니다. 김학철 교수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이 전능한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같이 고통당하면서 죽는다’는 발상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현대 신학의 특정한 문제의식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전능을 포기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보존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과 신적 전능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우리가 ‘전능’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전능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악을 강제로 제거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려는 인간의 자유를 매 순간 물리적으로 차단하신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 없으며, 사랑도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유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전능은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인간을 가능한 한 악에서 선으로 이끄시고, 지옥이 인간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질서를 유지하시는 전능입니다. 이것은 힘이 부족해서 악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목적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행복을 추구하지 말라’는 부분은 이번 영상 가운데 스베덴보리와 가장 아름답게 만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김학철 교수는 ‘인간은 행복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직접 추구하면 오히려 행복을 얻기 어렵고, 자신이 삶을 지속할 만한 가치를 실제로 행할 때 행복은 ‘선물처럼’ 따라온다고 말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돕고 돌보고 사랑하며 자신의 가치가 누군가에게 실제 기쁨이 될 때 삶의 의미가 발생하고, 그 의미가 고난을 견디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쓰임(use)이라는 개념과 매우 가까이 놓아볼 수 있습니다. 천국의 행복은 천사들이 ‘행복해지고 싶다’고 끊임없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은 선한 쓰임을 사랑하고, 그 쓰임을 행하는 기쁨 가운데 삽니다. 그 결과로 천국의 기쁨이 흘러듭니다. 행복은 목적이라기보다 사랑이 올바른 방향으로 흐를 때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김학철 교수가 소개한 ‘너는 살면서 기쁨을 발견했느냐, 그리고 그 기쁨이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이 되었느냐?’라는 이야기는 비록 성경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아니지만,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고립된 개인의 쾌락이 아니라 서로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느끼는 사랑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복만을 추구할수록 천국의 질서에서 멀어지고, 다른 사람의 선과 행복을 기뻐할수록 천국적 사랑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들어가야 합니다. ‘타인에게 기여하면 삶의 의미가 생긴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에 완전히 이른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타인을 도우면서도 자기 공로를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의 선함을 확인하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쓰임의 가장 깊은 질은 ‘무엇을 했느냐’뿐 아니라 ‘무엇을 사랑해서 그것을 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결국 다시 지배적 사랑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영상에는 매우 흥미로운 흐름이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익숙한 관념을 의심하라’고 말하고, 중간에서는 ‘예수를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도 양심과 사랑에 따라 살았다면 하나님의 구원에서 배제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하며, 후반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모두 설명하려 하기보다 함께 울고 사랑하라’고 하고, 마지막에는 ‘행복을 직접 추구하지 말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은 ‘종교적 관념보다 삶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이번 영상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이 옵니다. 스베덴보리도 끊임없이 삶을 봅니다. 무엇을 믿는다고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했는가, 무엇을 알았는가보다 그것으로 어떻게 살았는가를 봅니다. 사후에 사람을 천국이나 지옥으로 이끄는 것도 외적인 종교 명칭이 아니라 그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죽음은 그 사랑을 갑자기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계의 외적 제약이 벗겨지면서 사람이 실제로 사랑했던 것이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이 대담과 스베덴보리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도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사후세계에 대한 전통적 이미지를 해체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로 관심을 돌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의 오류를 해체하면서도 사후세계 자체를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영원히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사후세계가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의 삶은 영계와 분리된 별개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첫 단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영상의 천국과 지옥에 관한 핵심을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착하면 천국 가고 나쁘면 지옥 간다’는 말은 너무 단순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사후세계 이미지일 뿐이다’라는 방향 역시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한 것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를 자유롭게 형성하고 있으며, 죽음 뒤에는 그 사랑에 상응하는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선행에 대한 외적 상금이 아니며 지옥은 잘못에 대한 외적 형벌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판결하여 강제로 지옥에 던지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평생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사후에 그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과 같은 생명을 가진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와 같은 사랑을 가진 이들에게 끌립니다. 천국과 지옥은 그래서 ‘상벌’이기 전에 ‘사랑의 귀결’입니다.

 

이 점을 알면 영상의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도 훨씬 깊은 답이 가능해집니다. 핵심은 그가 지상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들었느냐 듣지 못했느냐만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양심으로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따라 어떻게 살았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내면을 완전히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정인의 사후 운명을 함부로 판정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무엇을 믿어도 상관없다’는 상대주의도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며, 사후에 선한 사람은 그 근원을 더 분명하게 배우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남겨 둘 만한 질문은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습니까?’보다 마지막에 나온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두 질문이 사실 하나라고 할 것입니다. 천국은 죽은 뒤 갑자기 시작되는 낯선 삶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사랑하고 선택하고 행하는 것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진실보다 체면을 사랑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내 우월함을 사랑하고 있는지, 용서보다 복수를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조금씩이라도 진실과 선과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는지, 그것이 천국과 지옥의 질문입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지식이 중요한 이유도 죽은 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다면 나는 오늘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담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김학철 교수가 말하듯 천국을 단순한 사후의 보상 장소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도 시작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끝나지도 않습니다. 자연계에서 시작된 인간의 내적 생명은 죽음을 넘어 계속되며, 여기에서 형성된 사랑은 영계에서 더욱 분명한 자신의 형체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있습니다’라고만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묻도록 우리를 이끌 것 같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천국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그것과 영원히 함께 살아도 좋습니까?’ 천국과 지옥을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는 방법은 사후세계의 지도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안에서 어떤 사랑이 나의 주인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천국과 지옥은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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