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존버리즘’ 영상의 제목은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남자들 국제결혼 좀 그만해 - 국제결혼 때문에 분노하는 한국 여자들의 진짜 현실.’ 영상은 40대 중반의 지방 중소기업 직장인 남성이 한국에서 여러 차례 결혼 상대자로 선택받지 못하다가 베트남 파견근무 중 한 여성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결혼을 반대했던 세 여성, 곧 친누나와 결혼정보회사 매니저와 직장 여성 동료가 사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마지막에는 ‘국제결혼을 그만하라고 하기 전에 왜 이 남자들이 한국에서는 한 번도 선택받지 못했는지부터 물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합니다.

 

영상이 던지는 문제에는 분명 생각할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결혼정보회사에서 ‘지방, 중소기업, 40대’라는 조건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상대 여성들이 그를 거절할 자유가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어느 순간부터 ‘한 사람’을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의 직장, 거주지역, 주택 소유 여부, 연봉, 나이 같은 조건표부터 읽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상에서 그는 자신의 전세보증금이 스스로 모은 돈이라고 설명하지만 상대방에게 돌아오는 말은 ‘그럼 결혼하면 대출부터 시작이네요’였습니다. 그 한마디에는 오늘날 결혼시장이 사람을 바라보는 한 단면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보다 ‘당신은 내 삶에 무엇을 제공할 수 있습니까?’가 먼저 묻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영상의 편을 그대로 들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여성들은 조건만 따지고 베트남 여성들은 사람 자체를 본다’고 결론 내린다면 영상 속 결혼정보회사가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다시 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개인을 ‘한국 여자’, ‘베트남 여자’라는 다른 조건표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영상이 보여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상이 구성한 몇 사람의 사례입니다. 그것을 ‘한국 여자들의 진짜 현실’ 전체로 확대할 근거는 이 자료 안에는 없습니다. 국제결혼에도 진실한 사랑이 있고 이해관계로 맺어진 결혼이 있으며, 국내결혼에도 조건 중심의 결혼과 깊은 인격적 사랑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렌즈가 물어야 할 것은 ‘어느 나라 여자가 더 좋은가?’가 아니라 ‘나는 배우자를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상 속 린이라는 여성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 계기는 처음부터 결혼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직장에서 주인공이 잘못 작성한 주문서의 숫자 하나를 그녀가 발견하면서 서로의 능력과 성품을 알기 시작했고, 함께 일하고 식사하고 이야기하면서 관계가 자라났습니다. 더욱 인상적인 장면은 주인공이 한국의 18평 전세집을 영상통화로 보여 주며 ‘이게 지금 내 전부예요’라고 말했을 때입니다. 이전 만남에서 약점처럼 취급되었던 바로 그 집을 보고 린은 ‘둘이 살기에 딱 좋네요. 커튼만 바꾸면 돼요’라고 대답합니다. 이 장면이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는 베트남 여성이어서가 아닙니다. 한쪽은 ‘이것밖에 없습니까?’라고 보았던 것을 다른 한쪽은 ‘여기서 함께 시작할 수 있겠네요’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결혼애의 관점에서 보면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결혼은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획득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거래가 아니라 두 사람의 내면이 서로에게 열리고, 상대의 선을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점차 하나를 이루어 가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조건을 살피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직업, 경제력, 건강, 나이, 가족환경은 실제 결혼생활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조건을 보는 것’과 ‘조건으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지혜의 문제가 될 수 있지만 후자는 인간을 수단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영상에는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린의 아버지가 결혼을 앞둔 한국인 사위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한국에 가면 내 딸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돈을 얼마나 벌며 집이 있는지를 먼저 묻지 않고, 자기 딸이 결혼 후에도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주인공은 ‘린 씨가 원하는 일을 하게 돕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영상의 서술에 따르면 결혼비용도 두 사람이 나누어 부담합니다. 이 대목은 국제결혼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합니다. 참된 혼인은 ‘한 나라의 남자가 다른 나라의 여자를 데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각자의 자유와 인격을 가진 채 함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상 속 국제결혼을 둘러싼 편견 역시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친누나는 ‘국적 따면 끝이야’라고 말하고, 직장에서는 ‘1,500 주고 데려온다’, ‘국적 받으면 바로 이혼한다’는 소문이 돕니다. 물론 실제 국제결혼에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 경제적 격차, 체류자격 문제 등 국내결혼과 다른 현실적인 위험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살피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직 만나 보지도 않은 한 사람을 국적 하나만으로 ‘돈 받고 온 여자’, ‘국적을 따면 떠날 여자’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분별이 아니라 편견입니다. 한 인간의 내면을 국적으로 대신 판단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친누나가 결혼을 반대한 이유가 뒤늦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영상에 따르면 누나는 베트남 여성 자체가 싫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미혼이던 남동생이 어머니를 주로 돌봐 왔는데, 동생이 결혼하면 그 부담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결국 누나는 ‘국제결혼’이라는 명분 뒤에 자신의 부담과 두려움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인간의 겉으로 드러난 주장과 그 주장을 움직이는 내적 동기가 항상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는 저 사람을 걱정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내 편안함, 내 이익, 내 체면이 위협받는 것이 싫어서 반대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결혼정보회사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매니저는 국제결혼은 문화가 달라 후회한다며 주인공을 말렸지만, 회사 홈페이지에는 ‘베트남 국제결혼 전문 상담’ 상품이 걸려 있었다고 영상은 말합니다. 이것이 영상의 서술대로라면 ‘국제결혼이 위험하다’는 원칙 자체보다 자기 회사를 통한 거래인가 아닌가가 판단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에서도 문제는 국제결혼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마치 객관적인 원칙인 것처럼 포장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영적 분별에서는 ‘저 말이 옳은가?’뿐 아니라 ‘나는 왜 이 말을 하고 있는가?’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직장 동료 소영의 경우 영상은 더 노골적인 해석을 내놓습니다. 과거에는 지방 중소기업에 다니며 전세에 산다는 이유로 주인공을 배우자로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 몇 년 뒤 ‘괜찮은 사람은 다 베트남, 일본 가서 결혼한다’, ‘남자들이 그렇게 다 외국으로 가 버리면 여기 남은 여자들은 어떡하느냐’고 말합니다. 영상은 이를 ‘우리가 거절한 남자들이 다른 데서 행복해지지 말라’는 심리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렌즈는 한 걸음 멈춰야 합니다. 그 해석은 영상 제작자의 해석이지 모든 국제결혼 비판자나 모든 미혼 여성의 내면을 설명하는 사실은 아닙니다.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은 주님만 아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영상이 제시한 말과 행동의 모순을 살피는 데까지입니다.

 

그럼에도 이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적 문제는 있습니다. 그것은 ‘소유하지 않았으면서도 소유권을 주장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사람이 다른 곳에서 사랑받고 행복해졌을 때 불편해지는 마음이 실제로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애에 더 가깝습니다. 사랑은 ‘내가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애는 ‘나는 당신을 원하지 않지만 당신이 나 없이 행복해지는 것도 싫다’는 모순된 감정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남녀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 역시 자신이 거절했던 여성이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며 같은 질투와 소유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국 여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프로프리움의 문제입니다.

 

앞서 마태복음 19장을 통해 살펴본 ‘둘이 한 몸’이라는 말씀과 연결하면 이번 영상은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조건 묶음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할 사람을 ‘연봉 얼마’, ‘집 몇 평’, ‘직업 무엇’, ‘나이 몇 살’, ‘국적 어디’로 분해하는 순간 우리는 아직 ‘한 사람’을 보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조건은 필요하지만 조건들의 합계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한 인간은 그런 외적 조건보다 훨씬 깊은 존재입니다.

 

이것은 국제결혼을 생각하는 남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한국 여성은 조건을 따지니 순종적인 동남아 여성을 만나겠다’는 식으로 국제결혼을 선택한다면 그것 역시 참된 결혼애와 거리가 멉니다. 그런 사람은 한국 여성을 조건으로 판단하는 문화를 비판하면서 자신도 외국 여성을 ‘젊음, 순종, 저렴한 결혼비용’ 같은 다른 조건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경제적·연령적 격차가 큰 국제결혼에서는 상대방의 자유가 실제로 존중되고 있는지 더욱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영상 속 린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도 ‘베트남 여자라서 순종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뛰어난 한국어 능력과 전문성을 갖추었으며, 한국에 온 뒤에도 일을 계속하고 싶어 했고, 남편 역시 그것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영상에서 그녀는 수동적으로 ‘데려온 여성’이 아니라 자기 선택을 하는 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국적 취득이나 새 아파트 당첨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집의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때 린이 서비스센터에 연락하고 전기장판과 핫팩을 들고 찾아가 밤까지 곁을 지키는 장면, 그리고 가족센터에서 다른 베트남 결혼이민자들의 병원과 관공서 일을 통역해 주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한 사람의 가치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가’가 아니라 ‘어떤 선을 사랑하고 실제 삶에서 행하는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사람의 영적 품질을 드러내는 것은 국적도 학력도 재산도 아닌 그 사람이 사랑하는 선과 그것을 삶으로 행하는 방식입니다.

 

동시에 이 장면은 앞서 살펴본 ‘이혼, 책임, 자유 그리고 주님의 섭리’와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참된 혼인은 한쪽이 다른 쪽의 삶을 대신 살아 주는 관계도 아니고, 한쪽이 다른 쪽을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는 관계도 아닙니다. 서로 독립된 자유로운 두 사람이 상대의 선을 기뻐하며 점차 하나를 이루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린의 아버지가 ‘내 딸이 한국에서도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은 단순한 취업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결혼한 뒤에도 내 딸은 한 사람으로 존중받을 것인가?’라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번 ‘존버리즘’ 영상의 제목인 ‘국제결혼 때문에 분노하는 한국 여자들의 진짜 현실’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조금 다른 질문으로 바뀝니다. ‘왜 한국 남자들이 국제결혼을 하는가?’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는 결혼할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한국 여자들은 왜 그러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사람을 조건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주인공에게 ‘지방, 중소기업, 40대’라는 세 개의 조건표가 붙었습니다. 직장 사람들은 린에게 ‘베트남 여자, 돈 받고 온 여자, 국적 따면 떠날 여자’라는 또 다른 조건표를 붙였습니다.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양쪽 모두 한 인간을 만나기 전에 먼저 ‘라벨’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실제로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한 곳에는 그런 라벨이 없었습니다. 주문서에 잘못 붙은 ‘0’ 하나를 발견해 준 사람, 자기의 실수를 고맙게 받아들인 사람, 야근 뒤 함께 쌀국수를 먹은 사람, 작은 전세집을 보여 주며 ‘이게 내 전부’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 그리고 그 집을 보고 ‘둘이 살기에 딱 좋네요. 커튼만 바꾸면 돼요’라고 대답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참된 결혼애는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내 조건에 얼마나 맞습니까?’가 아니라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묻는 데서 말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어떤 선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마지막에 남겨야 할 질문은 ‘한국 여자와 결혼할 것인가, 외국 여자와 결혼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국적을 바꾼다고 자기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국제결혼을 한다고 참된 결혼애가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는 한국인과 베트남인이라는 구별보다 훨씬 깊은 구별이 있습니다. 상대를 이용하려는 사랑인가, 상대의 선을 기뻐하는 사랑인가. 상대를 내 삶의 조건으로 보는가, 주님 앞에 선 하나의 영혼으로 보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번 영상에서 발견하는 핵심은 그래서 국제결혼의 승리도, 한국 여성에 대한 비판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조건표’로 바꾸어 버리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람을 조건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면 한국 남성도 상품이 되고 한국 여성도 상품이 되며 베트남 여성도 상품이 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하면 결혼은 시장에서 다시 관계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을 향해 가는 가장 첫걸음인지도 모릅니다. 한 몸이 되기 전에 먼저 상대를 ‘한 사람’으로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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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존버리즘’의 이번 영상은 서로 다른 세 부부의 파탄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아내는 자기 생활의 책임을 남편에게 떠넘기고, 두 번째 아내는 분노와 모욕적인 말을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쏟아붓고, 세 번째 아내는 자기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12년 동안 남편 탓으로 돌립니다. 영상은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을 ‘자기 몫을 자기가 책임지지 않는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어지른 집도, 터뜨린 화도, 꼬인 인생도 결국 다른 사람이 대신 치우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에는 한 단계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게으른 아내’, ‘화를 잘 내는 아내’, ‘남 탓하는 아내’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관계 안에서 상대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사랑하는 대신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버리는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바로 이혼의 허용 범위를 논하지 않으시고 창조의 처음으로 돌아가십니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그리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편리하기 때문에 유지하는 계약에 그치지 않고, 본래 ‘둘이 한 몸’이 되는 결합을 지향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결합은 더욱 깊습니다. 참된 결혼애(conjugial love)의 근원에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고, 그러므로 부부가 서로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면서 상대의 선을 자기의 선처럼 기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혼인의 내적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관점에서 첫 번째 사례를 보면 문제는 집안일의 분담 비율 자체가 아닙니다. 아내가 힘들거나 무기력해서 일시적으로 집안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혼인이 파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남편이 아파 열이 39도까지 올랐는데도 결국 남편 자신이 설거지하고 쓰레기를 버려야 했다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남편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가 쓰러져도 이 집 쓰레기는 내가 버리는구나’라고 깨닫습니다. 여기서 무너진 것은 가사분담표가 아니라 ‘상대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는 관계’입니다. 참된 결혼애라면 상대가 쓰러질 때 자기 편의를 잠시 내려놓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아파도 ‘나가는 김에 쓰레기 좀 버려 줘’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면, 몸은 한 집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한 몸’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례는 더욱 심각합니다. 아내의 분노는 물병, 수건 접는 방법, 주차 같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머리는 왜 달고 다녀?’, ‘너희 집은 그런 것도 안 가르쳤어?’, ‘내가 너랑 결혼한 게 미친 거지’라는 인격적 모욕으로 확대됩니다. 특히 여섯 살 딸이 곰 인형을 향해 엄마의 말을 그대로 흉내 내는 장면은 이 문제가 부부 두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이는 ‘이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해. 머리는 왜 달고 다녀?’라고 인형을 야단칩니다. 악은 이렇게 전염됩니다. 부모 사이에서 반복되는 멸시와 모욕은 아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는 관계의 문법으로 내면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아이를 위해서라도 참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부모가 한 주소에 사는 모습이 아니라, 사랑과 존중과 안전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사례는 영적으로 더욱 미묘합니다. 아내는 12년 동안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발견된 사직서에는 남편이 지방 발령 소식을 전하기 3주 전에 이미 회사를 그만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영상 자체가 제시하는 사례이므로 실제 사건의 모든 사정을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남편에게도 잘못은 있었습니다. 영상 역시 남편이 승진 후 주말 골프 등으로 아내의 외로움을 충분히 돌보지 못했다고 인정합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남편을 선인, 아내를 악인으로 단순 분류하려는 렌즈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는가, 아니면 자신의 모든 불행을 끊임없이 상대에게 전가하는가입니다. 회개는 언제나 ‘내 안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주님 앞에서 보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책임전가는 이 문을 닫습니다.

 

여기서 아까 살펴본 마19:3-12가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혼인의 신성함과 영속성을 먼저 선언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영상을 보고 쉽게 ‘저런 배우자는 빨리 이혼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달려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 모세가 이혼을 허용한 이유를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라고 하신 말씀도 보아야 합니다. ‘완악함’은 결혼의 이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악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관계를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속적인 폭력, 모욕, 방치, 책임전가가 계속되고 그것을 인정하거나 돌이키려는 의지마저 사라져 혼인의 실질과 자녀의 삶까지 파괴되는 경우, 단지 법률상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주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몸’은 주민등록상의 주소가 같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이혼장을 먼저 내밀었느냐만으로 ‘누가 혼인을 깨뜨렸는가’를 판단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영상의 첫 남편은 이혼 상담을 먼저 받았고, 두 번째 남편도 결국 이혼을 선택했으며, 세 번째 경우에는 오히려 아내가 먼저 이혼소장을 내밉니다. 그러나 외적인 마지막 행동만 보면 혼인의 실제 파괴 과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상대를 하인처럼 여기고, 인격을 모욕하고, 자신의 삶 전체를 상대에게 책임지우면서도 변화하기를 거부했다면, 법원에 제출된 이혼장은 이미 오래전에 내적으로 진행되어 온 분리의 ‘마지막 문서’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불행한 결혼에서 이혼이 정답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속성’, ‘심각성’, ‘회개의 여부’, ‘변화하려는 실제 의지’, ‘배우자의 안전’,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결혼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악을 끝없이 허용하는 것과 결혼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상 마지막의 ‘결혼은 사람을 바꾸지 않아요. 원래 있던 모습을 매일 보게 만들 뿐입니다’라는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보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결혼은 오히려 사람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변화는 배우자가 나를 대신 살아 줌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자기 안의 이기심과 지배욕과 책임전가를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과정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래서 결혼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단순히 집안일을 못하는 사람도, 성격이 급한 사람도,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으며 문제는 언제나 당신에게 있다’고 굳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 상대는 더 이상 사랑해야 할 배우자가 아니라 내 불행을 설명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영상의 세 사례를 ‘이런 여자와 결혼하면 안 된다’는 남녀 갈등의 소재로 소비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렌즈를 우리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나는 배우자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해야 할 몫을 배우자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떠넘기고 있지는 않은가?’, ‘내 분노를 정당한 충고라고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선택한 삶의 결과를 배우자 탓으로 돌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나는 결혼을 지킨다는 이유로 상대의 악을 계속 대신 치워 주고 있지는 않은가?’도 물어야 합니다. 참된 결혼애는 한 사람이 끝없이 희생하고 다른 사람이 그 희생을 소비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각자의 악을 내려놓고 서로의 선을 기뻐하면서 점점 ‘한 몸’이 되어 가는 관계입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말씀은 그래서 단순히 ‘이혼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신’ 창조의 질서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를 먼저 깨뜨리는 것은 때로 법원의 이혼장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무관심과 멸시, 지배와 책임전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어려운 질문이 남습니다. 파괴적인 혼인관계에서 한 사람이 결국 떠났고, 그 뒤 남겨진 사람이 삶이 무너질 정도로 파탄에 이르렀다면, 떠난 사람에게는 어디까지 책임이 있을까요? ‘혼인의 울타리를 끝까지 지켜 주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 섭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다음 심화에서 ‘혼인이 무너진 뒤에도 사랑은 계속되는가 - 이혼, 책임, 자유 그리고 주님의 섭리’라는 제목으로 조금 더 깊이 살펴봅니다.

 

 

SY.111 심화, ‘혼인이 무너진 뒤에도 사랑은 계속되는가 - 이혼, 책임, 자유 그리고 주님의 섭리’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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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

‘부모를 떠나는 것’(leave father and mother)은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 사람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속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는 것’(cleave unto his wife)은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한 몸이 되는 것’(be one flesh)은 그 둘이 거기에서 함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되게 되었습니다. To “leave father and mother” is to recede from the internal man, for it is the internal whi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the external; to “cleave unto his wife” is that the internal may be in the external; to “be one flesh,” that they are there together;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해설

AC.160은 창2:24의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을 앞에서 계속되어 온 속 사람, 겉 사람, proprium의 변화라는 흐름 안에서 해설합니다. AC.159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으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것을 천적 인간이 퍼셉션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겉 사람에 속한 proprium을 원하면서 이 구별을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AC.160은 바로 그 변화된 상태를 창2:24의 세 표현을 따라 설명합니다.

 

먼저 ‘부모를 떠나는 것’은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속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부모는 자연적인 부모에 관한 교훈에 머무르지 않고, 겉 사람의 근원이 되는 속 사람을 가리킵니다. 앞 번호에서 천적 인간은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는 질서를 퍼셉션했다고 했는데, 이제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면서 그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아내와 합하는 것’은 속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겉 사람과 관계가 끊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속 사람에게서 물러났다고 해서 속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내’는 AC.156에서 설명했듯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받게 된 표현입니다.

 

‘한 몸이 되는 것’은 그 둘이 거기에서 함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되어 구별이 사라졌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의 AC.159가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명시했고, 이번 번호의 마지막도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한 몸’은 구별 자체의 소멸보다, 변화된 상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있게 된 것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이 되었다’는 문장은 특별히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처음에는 영적이었지만 이제 타락하여 육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일반적인 도식으로 바꾸어 버리면 현재 문맥의 세밀한 흐름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천적 인간의 후손들이 proprium을 원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에서 ‘육’으로의 변화도 그 상태 변화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그 의미를 붙들어 줍니다. ‘이렇게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proprium은 천적·영적 생명 자체가 아닙니다.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둘이 완전히 동일한 하나가 되었다고 하지 않고 ‘하나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도 생명의 근원과 그것을 받아 자기 삶처럼 누리는 proprium 사이의 구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AC.135와 매우 밀접하게 이어집니다. AC.135에서도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도 중요한 것은 ‘결합’과 ‘하나처럼 보임’을 ‘동일해짐’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AC.160은 이제 창2:24의 ‘한 몸’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같은 내용을 다시 설명합니다. 천적·영적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그것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됨으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생명과 하나처럼 경험되는 상태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AC.160은 ‘부모를 떠남’, ‘아내와 합함’, ‘한 몸이 됨’을 각각 떨어진 상응어로 읽기보다 하나의 상태 변화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고,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며, 그 둘이 함께 있게 되고,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되는 흐름입니다. 이것은 AC.131부터 시작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 가는 과정의 한 단계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그 proprium을 단순히 버려 두지 않으시고 생명과 결합시키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AC.160)

 

 

 

AC.161, 창2:24,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스며들게 하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이 태고교회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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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 창2:23,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을 잃어버린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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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re adjoined to the man’s own, so that they appear as a one (verse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해설

AC.135는 창2:24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의 속뜻을 미리 요약합니다. AC.132-134에서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으며, 마침내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는 과정이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AC.135에서는 그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지가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proprium이 주어졌다고 해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앞의 AC.124에서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고, AC.129에서는 출발점이 주님이면 생명이고 자기 자신이면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진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을 갖게 된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AC.135는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된다고 말합니다.

 

특히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는 표현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영적 생명과 인간의 proprium이 그 근원에서 실제로 하나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사랑하고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경험됩니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밝혀 온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인간이 자기의 것으로 느끼는 삶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이 점에서 AC.135는 ‘허락된 proprium’이라는 AC.132의 표현도 조금씩 이해하게 합니다. 만일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진다는 것이 단순히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면, 이어서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된다는 설명은 나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자기의 것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이 주어지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거기에 결합됨으로써 인간에게는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가 형성됩니다. 다만 이 결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아직 이 한 문장만으로 더 나아가 규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 때문에 창2:24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도 이 문맥에서는 먼저 자연적인 부부의 결합을 넘어 인간의 proprium과 천적·영적 생명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앞에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것이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것을 묘사한다고 했으므로, 이제 ‘한 몸’이 되는 것은 그 proprium에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인 각 표현의 상응은 이어지는 번호에서 설명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 전체 구조만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AC.135는 또한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을 엽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행한다’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AC.135의 표현을 따르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이 가능하다고 이해할 여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자유와 책임의 관계까지 여기서 완성해서 설명하기보다는, 현재 본문이 직접 말하는 범위 안에서 그 가능성만 열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AC.135는 proprium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한 문장을 제공합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별도의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오며, 그것들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인간에게는 하나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창2:24를 해설하면서 중요한 것은 ‘하나가 된다’는 말만이 아니라 ‘하나처럼 보인다’는 스베덴보리의 섬세한 구별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AC.135)

 

 

 

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이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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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4, 창2:18-25 개요,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다 -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짐’ (21-23절)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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