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428
이절과다음절의내용에서‘라멕’(Lamech)이황폐를뜻한다는사실이매우분명하게드러납니다.그가‘한사람을죽였다’(slainaman)고하고,‘어린아이’(littlechild)를죽였다고하며,가인은일곱배로보복을받겠지만라멕은‘일흔일곱배로’(seventyandsevenfold)보복을받을것이라고말하기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and the following verse, it is very evident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for he says that he had “slainaman,” and a “littlechild,” and that Cain should be avenged sevenfold, and Lamech “seventyandsevenfold.”
해설
AC.428은 앞의 AC.427에서 풀이한 라멕의 고백을 다음 절까지 연결하여, 라멕이 왜 ‘황폐’를 나타내는지 확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새로운 상응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라멕이 직접 한 말들을 근거로, 그가 나타내는 상태가 황폐라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핵심은 창4:23의 ‘죽였다’는 표현과 창4:24의 ‘일흔일곱배’라는 표현을 함께 읽는 데 있습니다.
앞의 AC.427에서 ‘한사람을죽였다’는 말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었고,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두 표현을 다시 언급합니다. 라멕의 황폐는 단순히 신앙이 약해진 상태나 체어리티가 잠시 부족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앞 번호에서 설명했듯이,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와 관련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음 절의 ‘가인은일곱배,라멕은일흔일곱배’라는 말까지 함께 제시합니다. 창4:24는 가인에게 적용된 ‘일곱배’와 라멕에게 적용된 ‘일흔일곱배’를 대비합니다. 이 대비가 라멕의 황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이 이번 번호의 설명입니다. 다만 AC.428자체는 일곱과 일흔일곱의 속뜻을 아직 풀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흔일곱 배를 황폐의 정도를 나타내는 단순한 수치로 계산하거나, 가인보다 라멕이 정확히 열한 배 더 악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표현을 곧바로 주님께서 분노하여 가인이나 라멕에게 복수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보복의 성격을 설명하기보다,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두 죽음과 두 수치의 대비를 통해 황폐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보복과 숫자의 속뜻은 다음 절에 관한 설명을 살피면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처럼 AC.428은 짧지만 앞뒤 번호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AC.427은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밝히고, AC.428은 그 말과 다음 절의 보복에 관한 선언을 함께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라멕의 황폐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창4:24의 ‘일곱배’와 ‘일흔일곱배’에 관한 해설로 독자를 이끕니다.
결국 라멕이 황폐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그가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고백하는 말에서 드러나며, 다음 절에서 가인과 라멕의 보복을 대비하는 표현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428은 이 두 절을 하나의 문맥으로 읽게 하면서, 라멕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뿐 아니라 이어지는 ‘일흔일곱배’의 의미도 살펴야 함을 보여 줍니다. (AC.428해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창4:23)
AC.427
‘라멕’(Lamech)은앞에서와같이황폐를뜻합니다.그가‘자기아내들인아다와씰라에게말하기를,너희귀로내말을들으라’(saiduntohiswivesAdahandZillah, Withyourearsperceivemyspeech)고한것은고백을뜻합니다.이러한고백은교회가있는곳에서만이루어질수있는데,앞에서말했듯이그의‘아내들’(wives)은교회를나타냅니다. ‘내가한사람을죽여내게상처를입혔다’(Ihaveslainamantomywounding)는그가신앙을소멸시켰음을뜻합니다.‘사람’(man)은신앙을나타내기때문입니다.‘어린아이를죽여내게해를입혔다’(alittleonetomyhurt)는그가체어리티를소멸시켰음을뜻합니다. ‘상처’(wound)와‘타박상’(bruise)은더이상온전함이남아있지않음을뜻합니다.‘상처’는신앙이황폐해졌음을,‘해’(hurt)는체어리티가황폐해졌음을나타냅니다.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as before; that he “saiduntohiswivesAdahandZillah,Withyourearsperceivemyspeech” signifies confession, which can only be made where there is a church, whic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by his “wives.” “Ihaveslainamantomywounding”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faith, for by a “man” is signified faith; “alittleonetomyhurt”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charity.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no more soundness;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by a “hurt,” that charity was devastated.
해설
AC.427은 창4:23에 나오는 라멕의 말을 풀이합니다. 앞의 AC.421-426에서는 라멕의 아내들과 자녀들을 통해 새 교회의 내적·외적 요소, 그리고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다시 라멕 자신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앞에서와 같이 ‘황폐’를 나타낸다고 밝히며, 그의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에 관한 고백이라고 설명합니다.
라멕은 먼저 자기 아내들인 아다와 씰라에게 말을 듣도록 요청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을 ‘고백’으로 풀이합니다. 그가 아내들에게 말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아내들이 교회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고백이 교회가 있는 곳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고백은 단순히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드러내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어 라멕은 자신이 ‘한사람’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사람’이 신앙을 나타내므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창4:23의 살인에 관한 표현을 문자적 사건의 차원에서만 읽지 않고, 교회 안에서 신앙이 소멸된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라멕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신앙을 소멸시켰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은 앞뒤의 황폐에 관한 설명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다른 표현으로 구별됩니다.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두 죽음을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에 연결함으로써, 이 고백이 교회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모두에 관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구별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와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4장의 앞부분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그리고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를 다루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라멕의 고백을 통해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연결을 근거로 가인과 라멕의 상태가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427이 직접 밝히는 것은 라멕이 황폐를 나타내며, 그의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라멕은 이 두 죽음을 말하면서 자신에게 ‘상처’와 ‘해’가 생겼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상처’와 ‘타박상’이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상처는 신앙의 황폐를, 해는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들은 라멕이 입은 육체적 부상의 정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어 교회 안에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황폐’라는 말도 단순히 신앙생활이 잠시 약해지거나 체어리티를 충분히 실천하지 못한 상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말하며,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읽고 자신의 일시적인 연약함을 곧바로 라멕의 황폐와 동일한 상태로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는 라멕이 표상하는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AC.427에서 라멕의 말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에 관한 고백입니다. 아다와 씰라는 교회를 나타내며, 그들에게 말을 듣도록 요청하는 것은 고백을 뜻합니다.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신앙의 소멸을,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상처와 해는 그 결과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의 황폐가 단순히 외적인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생명에 관한 문제임을 살펴보게 됩니다. (AC.427해설)
AC를 영어로 읽다 보면 오늘날에는 다소 낯선 ‘vastation’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AC.18에서 Potts는 ‘선지자들이자주말하는인간의황폐’라는 대목에 ‘vastation’을 사용합니다. 현대 영어 독자에게는 ‘devastation’이나 ‘desolation’이 훨씬 익숙하기 때문에, 왜 이런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정확히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하는지가 자연스럽게 문제가 됩니다. 이 경우에는 영어 단어 자체에서 의미를 추측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라틴어와 AC안에서의 용례를 함께 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원문에서 중요한 말은 ‘vastatio’입니다. 이것은 황폐하게 함, 비워짐, 황폐 상태와 관련된 말이며, 영어 번역의 ‘vastation’은 이 라틴어를 형태상 매우 가깝게 따라간 번역어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일반 영어에서 ‘vastation’이 얼마나 흔한가만 가지고 그 뜻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Potts번역에서 이 단어를 만날 때는 일상 영어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전문 개념을 가능한 한 일관되게 전달하려는 번역어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vastatio’를 한국어로 무엇이라 해야 할까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황폐’가 가장 적절합니다. ‘황폐’는 무언가가 비어 가고 이전의 것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AC의 여러 문맥을 비교적 폭넓게 담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일상 한국어에서 ‘황폐’라고 하면 전쟁으로 도시가 파괴되거나 마음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처럼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먼저 떠올릴 수 있으므로, AC에서의 뜻은 반드시 문맥을 통해 이해해야 합니다.
AC.18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출발점을 직접 제공합니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의유입을방해하고거스르는것들이제거되어야한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황폐는 단순한 파괴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이루시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처리되고 물러나는 과정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AC.18에서는 ‘깊음이마르거나황폐해진다’는 표현과 ‘옛사람은새사람이잉태되기전에죽어야한다’는 표현이 서로 연결됩니다.
이 때문에 ‘vastatio’를 단순히 ‘고난’이나 ‘시련’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큰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AC가 말하는 황폐인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황폐의 과정이 반드시 눈에 띄는 외적 재난의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황폐의 핵심은 외적인 사건의 종류보다 사람의 영적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전에 의지하던 것, 선과 진리를 방해하던 것, 거짓이라고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그 힘을 잃고 사람이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는 과정입니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황폐’를 곧바로 ‘악이완전히제거되는것’이라고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AC.18의 표현은 분명 강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 전체에서 사람의 proprium과 유전적 악이 단순히 소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가입니다. 주님께서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는 것을 물리치시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심에 따라, 이전에 사람을 지배하던 것이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황폐’는 파괴보다 ‘새질서를위한비움과준비’라는 방향에서 이해할 때 AC.18의 문맥에 더 잘 맞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vastatio’의 용례를 하나의 간단한 정의로 고정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을 개인의 거듭남뿐 아니라 교회의 상태, 진리와 선의 결핍, 시험과 준비 등 여러 문맥에서 사용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AC에서 ‘vastatio’가 나올 때마다 무조건 ‘악의지배력이약화되는과정’이라고 기계적으로 대입하기보다 그 번호의 문맥에서 무엇이 황폐해지고 있으며 왜 그런 상태가 필요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한국어 용어는 ‘황폐’로 일관되게 유지하되, 그 구체적인 의미는 각 문맥에서 해설하는 방식이 가장 안전합니다.
‘desolation’이나 ‘devastation’과의 관계도 이 관점에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현대 영어에서 이 단어들은 ‘vastation’보다 훨씬 익숙하지만, 단어 하나하나의 현대적 뉘앙스를 가지고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개념을 역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Potts가어떤특별한신학적뉘앙스를살리기위해의도적으로vastation을창안하거나선택했다’고 단정할 근거가 없다면 그런 설명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우리 번역의 최종 기준은 Potts의 영어 단어 자체가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원문과 그가 AC전체에서 그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번역 원칙도 비교적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라틴어 ‘vastatio’와 Potts의 ‘vastation’은 기본적으로 ‘황폐’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독자가 ‘완전한파괴’나 단순한 ‘고난’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는 해설을 통해 그 문맥의 뜻을 밝혀 줍니다. AC.18에서는 특히 ‘참된것과선한것의유입을방해하고거스르는것들이제거되어새사람이잉태될준비가이루어지는상태’라는 설명이 그 의미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결국 AC.18의 ‘vastatio’는 절망의 단어가 아닙니다. 그 자체만 보면 무너짐과 비어짐을 말하지만, 거듭남의 전체 질서 안에서는 그 뒤에 올 새 생명을 위한 준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깊음이 마르는 것은 그곳에 아무것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이 나게 하기 위해서이고, 옛사람이 죽는 것은 죽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새 사람이 잉태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황폐’라는 말을 만날 때 우리는 무엇이 사라지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빈자리에서 무엇을 새롭게 시작하시려 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AC.18심화2)
AC.18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깊음’이 마르고 황폐해져야 하며,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먼저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거듭남이진행되면사람안의욕정과거짓이실제로없어지는것인가?악한성향이완전히사라져다시는나타나지않게되는것인가?’실제 삶을 돌아보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에게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이나 잘못된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 때가 있기 때문에, AC.18의 ‘제거’와 ‘황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먼저 AC.18은 인간 안의 모든 악한 성향이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소멸한다고 설명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참된 것과 선한 것이 사람에게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고거스르는것들’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황폐의 핵심은 사람 안에 있던 모든 악의 흔적이 사라지는가보다, 지금까지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고 있던 것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사람 안에 이루시려면 옛 질서가 주도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AC.18마지막의 ‘옛사람은새사람이잉태되기전에죽어야한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표현도 조심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자연적 인간 자체가 없어지거나 사람의 개성과 기억과 감정이 파괴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악에 대한 모든 가능성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나’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삶의 질서가 더 이상 절대적인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서 올라오는 욕망과 생각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을 곧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여 따르지 않고 주님의 진리 앞에서 분별하고 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거듭남은 자연적 인간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질서 아래 두는 일입니다.
이 점에서 눅15장의 돌아온 아들을 떠올려 보는 것은 좋은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비유가 AC.18의 ‘황폐’를 직접 해설하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둘 사이에는 구조적으로 생각해 볼 만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자기 뜻대로 살다가 모든 것을 허비하고 궁핍해집니다. 마침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해도 주는 자가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그때 비로소 ‘이에스스로돌이켜’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자기 힘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여겼던 이전의 질서가 무너지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아들의 궁핍 자체가 그를 자동적으로 거듭나게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누구나 주님께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같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더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태에서 사람이 무엇을 보고 어떻게 응답하는가입니다. 그러므로 탕자의 궁핍을 AC.18의 황폐와 비교한다면 ‘고난=황폐’라는 공식으로 연결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지하던 것이 무너지고 이전의 삶의 방식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면서 새로운 방향이 열리는 모습에서 유사성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 삶에서 겪는 실패와 상실을 해석할 때도 중요합니다. 질병, 경제적 어려움, 관계의 파탄, 계획의 실패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주님께서나를황폐하게하신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18의 황폐는 단순히 외적인 고통의 크기로 판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선과 진리의 유입을 방해하던 것이 약화되고, 사람이 이전에 붙들고 있던 거짓과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되는가에 있습니다. 외적 고난이 그런 과정에 사용될 수도 있지만, 고난 그 자체와 황폐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과정이 필요한 것일까요? 사람은 자기 욕정과 거짓이 자신에게 생명과 행복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쉽게 내려놓지 않습니다. 머리로 진리를 배우는 것과 실제로 그것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여 악을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붙들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보고 그것에서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욕망이나 생각이 더 이상 생명으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선과 진리를 방해하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황폐가 거듭남을 준비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욕정과거짓이제거된다’는 말을 ‘나는거듭났으므로이제내안에는악한욕망이전혀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은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더 분명히 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지배하는가입니다. 욕정과 거짓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주님의 진리로 분별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과 진리가 삶의 중심을 차지하도록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 거듭남의 실제적인 싸움입니다.
AC.18의 마지막 표현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옛사람은새사람이잉태되기전에반드시죽어야한다.’아직 ‘새사람이완성된다’거나 심지어 ‘태어난다’고 하지 않고 ‘잉태된다’고 합니다. 황폐는 완성이 아니라 준비입니다. 주님께서 새 생명을 시작하실 수 있도록 옛것의 지배가 물러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황폐의 목적은 사람을 빈자리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잉태될 자리를 마련하는 데 있습니다. 깊음을 마르게 하시는 것도 주님이시고, 그 깊은 곳에 길을 내시는 것도 주님이시며, 그 길을 통하여 사람을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AC.18심화1)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AC.19
‘하나님의영’(spiritofGod)이란주님의자비(mercy)를뜻하며,이를가리켜‘운행하시니라’(move),또는암탉이자기알을품듯이‘품는다’(brood)고합니다.그것이운행하는대상은주님께서사람안에숨겨두시고보존해두신것들인데,말씀전체에서이것들을가리켜‘리메인스’(remains),또는‘남은자’(remnant)라고하는것입니다.이것들은참된것과선한것에관한지식들로이루어져있으며,겉의일들이황폐해지기전까지는결코빛이나낮가운데나오지않습니다.여기나오는‘수면’(thefacesofthewaters)은바로이러한지식들을말합니다. By the “spiritofGod” is meant the Lord’s mercy,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facesofthewaters.”
해설
AC.19는 창1:2의 마지막 말씀, ‘하나님의영은수면위에운행하시니라’의 속뜻을 밝힙니다. 앞선 AC.17-18이 거듭남 이전의 인간을 ‘혼돈과공허’, ‘흑암’, ‘깊음’으로 묘사했다면, 여기서는 그처럼 어두운 상태의 인간에게 이미 주님의 자비가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의영’(spiritofGod)을 ‘주님의자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출발점은 사람이 먼저 자신을 고치거나 주님께 올라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버리지 않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자비에 있습니다.
‘운행하다’(move), 또는 ‘품다’(brood)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암탉이 자기 알을 품는 모습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세부적인 상응을 임의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사람 안에 보존해 두신 것들 위에서 계속 역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현재 상태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아무것도 없는 존재처럼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이 아직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 그 안에 감추어 두시고 보존하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1:2의 마지막 장면은 단순히 흑암 가운데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다는 모습이 아니라,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생명을 자비로 품고 계시는 주님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그것이 바로 ‘리메인스’(remains), 또는 ‘남은자’(remnant)입니다. AC.19는 여기서 그것을 ‘참된것과선한것에관한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는 우선 그 직접적인 설명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동시에 리메인스를 단순히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좋은 추억이나 종교 지식 전체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사람이 자기 힘으로 모아 둔 영적 자산이 아니라 ‘주님께서사람안에숨겨두시고보존해두신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후 AC에서는 리메인스가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 순진함과 체어리티에 속한 상태들까지 포함하는 훨씬 깊은 개념으로 펼쳐지지만, AC.19에서는 그 전체 교리를 미리 끌어오기보다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람 안에 무엇인가를 이미 보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수면’(thefacesofthewaters)은 무엇일까요? AC.19는 여기의 ‘수면’이 바로 이러한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창1:2의 문자에서는 흑암 아래의 물과 그 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 안에 주님께서 감추어 보존하신 것들과 그 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자비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알고 다시 ‘하나님의영은수면위에운행하시니라’를 읽으면, 이 말씀은 창조 이전의 한 장면을 넘어 주님께서 사람의 거듭남을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AC.19에는 리메인스가 ‘겉의일들이황폐해지기전까지는결코빛이나낮가운데나오지않는다’는 중요한 말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18의 ‘황폐’와 연결됩니다. 아직 사람의 겉에 속한 것들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들이 거듭남의 새로운 생명으로 전면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고도 그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선한 것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공로나 명예로 돌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AC.19가 직접 제시한 사례는 아니지만, 왜 사람에게 속한 것이 물러나는 과정과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이 빛 가운데 나오는 과정이 서로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리메인스 자체가 불안정하거나 쉽게 오염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낼 사람의 외적 상태가 아직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그러나 ‘황폐해질때까지리메인스가빛이나낮가운데나오지않는다’는 말을 주님께서 그 이전에는 사람 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창1:2의 그림은 정반대입니다. 아직 ‘빛’도 ‘낮’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영은 이미 수면 위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직 자기 안에서 분명한 영적 빛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주님의 자비는 이미 그 사람 안에 보존된 것들 위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AC.18의 황폐를 단순히 버림받음이나 파괴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쪽에서는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는 것들이 물러나는 과정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모든 과정 가운데 주님의 자비가 이미 사람 안에 보존하신 것들 위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9는 리메인스 교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현재 모습만 보고 ‘저사람안에는아무런선도남아있지않다’고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다고 해서 그 모든 세월 동안 주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리메인스가 있다는 사실이 사람의 거듭남을 자동적으로 보장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그 사람이 훗날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을 자비로 준비하고 보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AC.19의 중심은 리메인스라는 개념 자체보다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자비’입니다. 리메인스가 존재하는 것도 주님께서 감추어 보존하셨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훗날 거듭남에 사용되는 것도 주님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1:2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어두우면서도 동시에 희망적입니다. 아직 빛은 나타나지 않았고 사람은 여전히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흑암 속에서도 주님의 자비는 이미 사람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 보존하신 것들 위에서 운행하며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말씀에서 마침내 ‘빛이있으라’는 새로운 상태가 시작됩니다. (AC.19해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AC.18
‘깊음’(facesofthedeep)은거듭나지않은사람의욕정(cupidities)과,그로말미암는거짓(falsities)을뜻하며,사람은전적으로이런것들로이루어져있고,또한그것들속에완전히잠겨있습니다.이상태에서그는빛이없으므로,‘깊음’(deep),곧어둡고혼란한어떤것과같습니다.이러한사람들을말씀여러곳에서‘깊음’(deeps),‘바다깊은곳’(depthsofthesea)이라하는데,사람의거듭남이전에그것들은‘마르거나’(driedup)‘황폐해집니다’(wasted).다음이사야말씀처럼말입니다. The “facesofthe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of which he wholly consists,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having no light,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ofthesea,” in many parts of the Word,which are “dried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이러한사람은또한천국에서볼때,생명없는검은덩어리처럼보입니다.이와같은표현들은일반적으로선지자들에의해자주언급되는인간의황폐(thevastationofman)를포함하는데,이는거듭남에앞서일어나는것입니다.왜냐하면사람이참된것을알수있고,선한것에의해감동될수있기전에,그것들의유입을방해하고거스르는것들이제거되어야하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옛사람은새사람이잉태되기전에반드시죽어야합니다. Such a man also,when seen from heaven,appears like a black mass,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which precedes regeneration;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해설
AC.18은 창1:2의 ‘흑암이깊음위에있고’에서 ‘깊음’(deep)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 AC.17에서 ‘혼돈’은 선이 없음, ‘공허’는 진리가 없음, ‘흑암’은 주님 신앙과 영적, 천적 삶에 대한 어리석음과 무지를 뜻한다고 했다면, AC.18은 그 어둠 아래에 있는 사람의 상태를 한층 더 깊이 들여다봅니다. 스베덴보리는 ‘깊음’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 욕정에서 생겨나는 거짓(falsities)이라고 설명하며, 사람은 이것들로 전적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속에 완전히 잠겨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빛이 없는 이 상태의 사람은 ‘깊음’, 곧 어둡고 혼란한 어떤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깊음’은 단순히 사람에게 몇 가지 나쁜 욕망이나 잘못된 생각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 이전에는 욕정과 거짓이 그의 삶과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 주는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AC.18의 초점은 인간의 어두운 상태를 묘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여러 곳에서 이러한 사람들을 ‘깊음’또는 ‘바다깊은곳’이라고 하며,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이 깊음이 ‘마르거나’(driedup)‘황폐해진다’(wasted)고 말합니다. 여기서 ‘황폐’(vastation)는 AC.18을 이해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 자체를 파괴한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것과 선한 것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 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서 직접 말하듯,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으려면 먼저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저항하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황폐는 거듭남과 별개의 파괴 과정이 아니라, 새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람을 준비시키시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이것을 악한 성향의 흔적이 사람에게서 완전히 소멸한다는 뜻으로까지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더 이상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고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물러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사51:9-11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에는 ‘바다를,넓고깊은물을말리시고바다깊은곳에길을내어구속받은자들을건너게하신’여호와의 역사가 나옵니다. AC.18의 문맥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깊은물’, ‘바다깊은곳’, ‘말리다’, 그리고 그곳에 ‘길을내다’라는 표현입니다. 앞에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과 거짓을 ‘깊음’이라고 했는데, 이사야에서는 바로 그 깊은 물이 말라 길이 열리고 구속받은 자들이 그 길을 건너갑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깊음’이 그대로 보존된 채 그 위에 새 생명이 덧붙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구속의 길을 가로막는 것을 처리하시고 그 가운데 길을 내신다는 AC.18의 설명을 뒷받침합니다. 거듭남의 길은 사람이 자기 욕정과 거짓을 스스로 헤쳐 나와 만드는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깊음을 마르게 하시고 길을 내심으로 열리는 길입니다.
사51:9-11의 앞뒤 흐름도 AC.18의 논지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여호와의팔이여깨소서깨소서능력을베푸소서’라는 부르짖음 뒤에 바다와 큰 깊음을 말리시는 주님의 능력이 나오고, 그 결과 ‘여호와께구속받은자들이돌아와노래하며시온으로돌아오는’장면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한 목적은 단지 ‘깊음’이라는 같은 단어가 성경 다른 곳에도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깊음이 마르고 길이 열리며 구속받은 자가 돌아오는 전체 그림이, 황폐가 왜 거듭남에 앞서 필요한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황폐의 목적은 황폐 그 자체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욕정과 거짓 가운데 버려두시는 것도 아닙니다. 깊음 가운데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가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인용은 AC.18에서 ‘황폐’를 단순한 파괴나 절망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러한 상태의 사람이 천국에서 볼 때 ‘생명없는검은덩어리’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자연적 생명이나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천국의 빛에서 볼 때 아직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생명이 그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음을 매우 강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황폐’가 등장합니다. 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인간의 황폐는 거듭남에 앞서며, 그 이유는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되기 전에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8에서 황폐는 단순히 사람이 고난이나 실패를 겪는다는 말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모든 고통을 자동으로 황폐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핵심은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던 것들이 그 지배력을 잃어,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사람 안에 이루실 수 있도록 길이 열리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 ‘옛사람은새사람이잉태되기전에반드시죽어야한다’는 AC.18전체를 압축합니다. 여기서 옛사람의 죽음은 육체적 죽음도 아니고, 인간의 개성이나 자연적 삶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사람을 지배하며 선과 진리의 유입을 거슬러 온 옛 질서가 더 이상 주도권을 쥐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새사람이태어나기전에’가 아니라 ‘새사람이잉태되기전에’라고 한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AC.18은 아직 거듭남의 완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새 생명이 시작될 수 있도록 먼저 길이 준비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창1:2의 ‘깊음’은 절망의 마지막 자리가 아니라 주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기 직전의 자리입니다. 깊음을 마르게 하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옛사람이 물러나고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AC.18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