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

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또 저도 그들과 말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지금까지 어떤 사람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고, 사람의 생각 속에조차 들어온 적이 없는 사후세계의 놀라운 것들을 듣고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죽음 이후 영혼들의 상태에 관하여, 지옥 곧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의 비참한 상태에 관하여, 천국 곧 신앙 안에 있는 자들의 복된 상태에 관하여, 그리고 특히 온 천국에서 인정되고 있는 신앙의 교리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is is really the case no one can possibly know except from the Lord. It may therefore be stated in advance t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ranted me now for some years to be constantly and uninterruptedly in company with spirits and angels, hearing them speak and in turn speaking with them. In this way it has been given me to hear and see wonderful things in the other life which have never before come to the knowledge of any man, nor into his idea. I have been instructed in regard to the different kinds of spirits; the state of souls after death; hell, or the lamentable state of the unfaithful; heaven, or the blessed state of the faithful; and especially in regard to the doctrine of faith which is acknowledged in the universal heaven; on which subjects,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AC.5는 짧은 서문 AC.1-5의 마지막 글이면서, 앞의 네 글과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속뜻이 있으며,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고, 문자와 내적 의미의 관계가 인간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와 같으며, 창세기 첫 장들이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AC.5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그의 첫 번째 대답입니다.

 

첫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관한 지식의 궁극적인 출처를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학문적 연구만으로 발견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앞으로 밝히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해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알게 된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AC.5는 단순한 영계 체험담의 서두라기보다, 앞으로 자신이 말할 것의 출처에 관한 선언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지는 표현에서도 같은 태도가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능력을 얻었다고 말하기보다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경험이 실제적이었다는 매우 강한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경험의 원인을 자기 능력이나 공로에 돌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주님의 신적 자비’라는 표현은 이 짧은 AC.5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여 사실상 글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이’라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어느 날 잠깐 환상을 보았거나 꿈속에서 영적인 광경을 경험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상당한 기간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하며 듣고 말하는 상태가 계속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후 AC에 등장하는 영계에 관한 수많은 기록을 이해할 때에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단편적인 환상이나 상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므로 그의 모든 주장은 참이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과 ‘그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AC.5는 독자에게 자신의 경험을 강제로 증명하려는 단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근거로 말하는지를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 읽는 독자는 이 단계에서 그의 영계 경험을 즉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보다, 우선 ‘저자는 자신이 이런 경험을 주님으로부터 허락받았다고 주장하며 이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후의 내용을 따라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보고 들었다고 하는 내용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천국을 보았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여러 종류의 영들’, ‘죽음 이후 영혼들의 상태’, ‘지옥’, ‘천국’, 그리고 ‘온 천국에서 인정되고 있는 신앙의 교리’를 차례로 열거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AC 곳곳에 삽입될 영계 기록들의 주요 주제를 미리 보여 주는 작은 목차와도 같습니다. 실제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해설하는 글 사이사이에 사후세계와 영들, 천국과 지옥, 인간의 영적 구조 등에 관한 기록을 광범위하게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죽음 이후 영혼들의 상태’라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만 떼어 읽으면 인간이 지상에서는 단지 물질적인 존재였다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을 따라가면 인간에게는 지상생활 중에도 영적인 내면이 있으며,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통하여 살아간다는 설명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은 인간의 생명이 끝나거나 전혀 다른 존재가 새로 생기는 사건이라기보다, 물질적인 몸을 벗고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생명을 계속 살아가는 전환입니다. 따라서 AC.5의 ‘souls after death’는 그 이후의 가르침 전체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옥을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의 비참한 상태’, 천국을 ‘신앙 안에 있는 자들의 복된 상태’라고 표현한 것도 이후 AC를 읽으면서 점차 깊어질 부분입니다. 여기서 ‘신앙’을 단순히 어떤 교리를 머리로 인정하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신앙과 체어리티, 진리와 선의 관계를 계속 설명하며,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신앙이 참된 신앙일 수 있는지를 매우 깊이 다룹니다. 따라서 이 짧은 서문의 ‘신앙 안에 있는 자’와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를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종교적 소속이나 교리 동의 여부로 미리 고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온 천국에서 인정되고 있는 신앙의 교리’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제시할 신앙의 교리를 자기 개인의 신학 체계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이 ‘온 천국에서 인정되고 있는’ 교리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매우 큰 주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문장을 과장해서 확대하기보다, 그가 이후 실제로 무엇을 ‘신앙의 교리’라고 설명하는지 AC를 따라가며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5에서는 그 내용을 아직 상세하게 제시하지 않고 앞으로 더 말하겠다고만 예고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AC.5가 말씀의 속뜻에 관한 계시와 영계 경험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해서 ‘천사들에게 창세기의 속뜻을 배워 적었다’고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의 첫 문장은 지식의 궁극적인 출처를 ‘주님으로부터’라고 밝히고,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을 통하여 사후세계에 관한 여러 사실을 듣고 보았으며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천사들이 스베덴보리에게 가르쳐 준 신학’으로 압축하는 것은 이 단락 자체보다 더 나아간 설명이 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그의 영계 경험을 흥미로운 초자연적 현상 자체로 소비하면 AC의 중심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영계에 관한 모든 기록을 주변적인 장식으로 제거해 버려도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놓치게 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기록을 그가 제시하는 전체 질서 안에서 읽는 것입니다. 영계에 관한 지식 역시 결국 주님과 말씀, 천국과 교회, 인간의 거듭남과 영원한 삶을 이해하는 데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AC.5에서 가장 먼저 기억할 말은 ‘영들과 천사들’보다 오히려 ‘주님의 신적 자비’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놀라운 경험을 말하면서도 그 경험의 출처와 허락을 주님께 돌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 말하려는 사후세계의 여러 사실과 신앙의 교리 역시 자기 자신을 중심에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알려지고 허락된 것을 전하려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5는 하나의 짧지만 잘 짜인 서문을 이룹니다. AC.1은 말씀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AC.2는 그 말씀의 생명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온다고 밝힙니다. AC.3은 문자와 속뜻의 관계를 몸과 영혼에 비유합니다. AC.4는 그 원리를 창세기에 적용하여 창세기 1장이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AC.5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그 지식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자신에게 영적 세계와의 특별한 교통이 허락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이제 서문은 끝나고 AC.6부터 창세기 1장의 실제 해설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조의 여섯 날을 인간의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인 상태로 개관한 뒤, 창1:1부터 말씀의 표현 하나하나를 풀어 갑니다. 따라서 AC.5는 단순히 ‘스베덴보리가 영계를 보았다’는 놀라운 이야기로 서문을 끝내는 글이 아닙니다. 독자가 이제부터 읽게 될 방대한 해설이 어떤 주장 위에 서 있는지를 밝히고, 그 문턱에서 다시 한번 모든 것의 근원을 ‘주님의 신적 자비’에 두는 글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AC.5 해설)

 

심화

1.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AC.5 심화 1,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AC.5 심화1.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AC.5에서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는 독자에게 가장 놀라운 문장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bygrace.kr

 

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 심화 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 심화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처음 이 표현을 읽으면 영계에 여러 종류의 영적 존재가

bygrace.kr

 

 

 

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bygracetistory.tistory.com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

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창조와, 낙원이라 불리는 에덴동산과, 처음 창조된 사람으로서의 아담에 관한 것뿐입니다. 누가 그 밖의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이 내용들이 지금까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아르카나(arcana)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될 것입니다. 실제로 창세기 1장은 그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그의 거듭남을 다루며,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를 다룹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이러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안에 품고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 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 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 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 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 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 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 Who supposes anything else? 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 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 or of his regeneration, 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해설

AC.4는 앞선 AC.1-3에서 제시한 말씀에 관한 원리를 실제 성경 본문에 처음 적용합니다. AC.1에서는 구약의 겉 글자 안에 하늘의 깊은 아르카나가 있다고 했고, AC.2에서는 말씀의 가장 작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AC.3에서는 이러한 내적인 생명과 분리된 문자를 영혼 없는 몸에 비유했습니다. 이제 AC.4에서는 독자가 실제로 읽게 될 창세기의 첫 장들을 가리키며, 앞에서 말한 원리가 바로 이 본문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처음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문자적 의미에서 독자가 실제로 무엇을 볼 수 있는지를 인정합니다. 창세기의 첫 장들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세상의 창조와 에덴동산, 그리고 처음 창조된 사람으로서의 아담이 보입니다. 그래서 ‘누가 그 밖의 것을 생각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자적 의미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으면 그 안에 있는 다른 것들을 볼 수 없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AC.3에서 문자와 내적인 생명의 관계를 몸과 영혼에 비유했던 것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창세기 1장에 대한 AC의 첫 번째 결정적인 해석이 제시됩니다. 창세기 1장은 속뜻으로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그의 거듭남’을 다루며,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 그리고 여섯 날의 질서가 하나씩 해설되면서 이것이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따라서 AC.4에서는 그 세부 내용을 미리 설명하기보다, 창조 이야기가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는 큰 방향을 정확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와 ‘구체적으로’의 구별도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의 속뜻은 한 인간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는가, 곧 어떻게 거듭나는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구체적으로는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라고 부르는 교회의 상태를 다룹니다. 따라서 앞으로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개인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AC.4에서 두 방향을 함께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태고교회가 정확히 어떤 교회이며 그 상태가 어떠했는지는 이후 해당 번호들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앞으로 AC 전체의 해설 방식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창세기 1장은 대략적으로만 거듭남을 상징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이러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안에 품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AC.2에서 말씀의 모든 것이 가장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다고 한 선언이 창세기 1장에 직접 적용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후 스베덴보리가 단어 하나와 표현 하나까지 세밀하게 해설하는 것은 부수적인 관심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개별적인 것들에도 속뜻이 있다는 그의 말씀 이해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마지막 표현 때문에 ‘표상’과 ‘상응’이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AC.4 원문에는 실제로 ‘표상하고’(represent), ‘의미하며’(signify), ‘그 안에 품는다’(enfold)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 자연적인 사람과 사물과 사건이 어떻게 영적인 것을 표상하고 의미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만나게 됩니다. 그 관계를 이해하는 데 ‘표상’과 ‘상응’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됩니다. 다만 AC.4 자체는 아직 그 두 개념의 전체 교리를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그 질문을 심화로 넘기고 본문에서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까지도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을 품고 있다는 선언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AC.4는 AC 서문에서 하나의 중요한 경계선입니다. 앞의 세 번호가 ‘말씀에는 속뜻과 생명이 있다’는 원리를 세웠다면, 이제 AC.4는 그 원리를 창세기 1장에 직접 적용하여 ‘이 창조 이야기는 속뜻으로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선언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충분히 입증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펼쳐질 창세기 1장의 세밀한 해설 자체가 바로 그 입증 과정입니다. (AC.4 해설)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AC.4 심화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나 행위가 그 자체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

bygrace.kr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 심화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 천국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

bygrace.kr

 

 

 

AC.5, 서문,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린 영계의 증언’

AC.5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

bygrace.kr

 

AC.3, 서문, ‘문자는 몸이고, 속뜻은 생명이다’

AC.3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은 기독교 세계에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속 사람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은 기독교 세계에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속 사람과 분리되면 겉 사람은 몸일 뿐이며, 그러므로 죽은 것입니다. 살아 있으며 겉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속 사람이기 때문이며, 속 사람은 영혼입니다. 말씀도 이와 같아서, 문자만으로 보자면 영혼 없는 몸과 같습니다. Without such a life, the Word as to the letter is dead. The case in this respect is the same as it is with man, who—as is known in the Christian world—is both internal and external.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man, the external man is the body, and is therefore dead; for it is the internal man that is alive and that causes the external man to be so, the internal man being the soul. So is it with the Word, which, in respect to the letter alone, is like the body without the soul.

 

해설

AC.3은 AC.1과 AC.2에서 말한 ‘말씀의 생명’을 인간의 몸과 영혼이라는 매우 선명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AC.1에서는 말씀의 겉 글자 안에 내적인 것들이 있다고 했고, AC.2에서는 말씀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에서는 그 내적인 생명과 겉 글자의 관계를 ‘속 사람과 겉 사람’, 더 직접적으로는 ‘영혼과 몸’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첫 문장인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에서 ‘이러한 생명’은 바로 앞 AC.2와 연결됩니다. AC.2에서는 말씀의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고 그분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3의 ‘이러한 생명’은 막연히 성경을 읽을 때 느끼는 감동이나 교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 있는 내적인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향하는 데서 오는 생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인간에게 비유합니다. 인간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고,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몸일 뿐이며 죽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속 사람이고 겉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것도 속 사람이며, 여기서 그는 속 사람을 영혼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이 구조를 그대로 말씀에 적용하여 ‘문자만으로 보자면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AC.3의 핵심은 문자와 속뜻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만을 그것을 살리는 내적인 것과 분리하여 볼 때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문자적 의미를 낮추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영혼 없는 몸’이라고 한 것은 몸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유의 초점은 몸 자체의 무가치함이 아니라 영혼과 분리된 몸의 죽음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의 문자도 버려야 할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의 내적인 것과 함께 읽혀야 합니다. 이후 AC 전체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문자를 한 구절씩 붙들고 그 속뜻을 해설하는 것 자체가 이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는 문자를 떠나 속뜻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문자 안에서 내적인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따라서 AC.3은 AC.1-3의 흐름을 매우 간결하게 완성합니다. AC.1은 ‘겉 글자 안에 내적인 것들이 있다’고 했고, AC.2는 ‘그 내적인 것들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고 했으며, AC.3은 ‘그 생명과 분리된 문자는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합니다. 이제 독자는 왜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문자에만 머물지 않고 그 안의 속뜻을 열어 가려 하는지 이해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말씀의 문자는 몸과 같고,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내적인 것은 영혼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앞선 AC.2에서 밝힌 대로 주님이십니다. (AC.3 해설)

 

심화

1. ‘속 사람’(internal man)

 

AC.3 심화 1, ‘속 사람’(internal man)

AC.3 심화1. ‘속 사람’(internal man) AC.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에게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에서

bygrace.kr

 

 

 

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bygracetistory.tistory.com

 

AC.2, 서문, ‘말씀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

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그 안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구약 성경은 거의 소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참으로 그러한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은 단 한 가지 숙고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천국과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에 속한 것들을 그 안에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라 불릴 수 없을 것이며,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이 생명에 속한 것들에서 오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오는 것이겠습니까? 곧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그 말씀에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으며, 말씀 가운데 어떤 표현이든 그 안에 그분을 품고 있지 않다면, 다시 말해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분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고 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The Christian world, however, is as yet profoundly unaware of the fact that all things in the Word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nay, 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 signify and enfold within them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nd therefore the Old Testament is but little cared for. Yet that the Word is really of this character might be known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being the Lord’s and from the Lord it must of necessity contain within it such things as belong to heaven, to the church, and to religious belief, and that unless it did so it could not be called the Lord’s Word, nor could it be said to have any life in it. For whence comes its life except from those things that belong to life, that is to say, except from the fact that everything 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so that anything which does not inwardly regard him is not alive; and it may be truly said that any expression in the Word that does not enfold him within it, that is, which does not in its own way bear reference to him, is not Divine.

 

해설

AC.2는 AC.1의 선언을 한층 더 강하게 밀고 나갑니다. AC.1에서는 구약의 겉 글자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으며,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등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2에서는 그 범위를 더욱 분명히 하여, 말씀의 모든 것이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그 안에 품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가 이것을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거의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진단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어떤 부분에는 속뜻이 있고 어떤 부분에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주장은 훨씬 철저합니다. 말씀은 전체적으로뿐 아니라 개별적으로도, 심지어 가장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주장을 자신의 영계 체험부터 내세워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 한 가지 숙고’만으로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숙고란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말씀이 참으로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 안에는 반드시 천국과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에 속한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AC.1이 ‘말씀 안에 내적인 것들이 있다’고 선언했다면, AC.2는 그 내적인 것들이 있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말씀의 근원, 곧 주님에게서 찾습니다.

 

여기서 AC.2의 중심어인 ‘생명’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생명은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는 데서 온다고 답합니다. 따라서 말씀의 생명은 단지 오래 살아남은 종교 문헌이라는 데 있지 않고, 문장이 아름답거나 인간에게 감동과 교훈을 준다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말씀의 가장 깊은 지향이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주님에게서 왔고, 그 안의 모든 것은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다시 주님을 가리킵니다.

 

이 때문에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그분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다’고 하고, 말씀 가운데 어떤 표현이든 그 안에 주님을 품고 있지 않으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신성한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구절의 문자적 표면에 주님의 이름이 직접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구약의 족보와 역사, 율법과 전쟁, 지명과 숫자처럼 겉으로는 주님과 직접 관계없어 보이는 표현들까지도 내적으로는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킨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주장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후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가장 세밀한 표현들까지 속뜻을 따라 읽어 갑니다.

 

그러므로 AC.2는 앞으로 펼쳐질 방대한 AC 해설의 중요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왜 단어 하나, 이름 하나, 숫자 하나까지 그렇게 세밀하게 살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생명은 일부 유명한 구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그 안에 있으며, 그 생명의 근원은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AC.1에서 ‘말씀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다’는 문을 열었다면, AC.2에서는 왜 그 비밀들이 말씀의 가장 작은 것에까지 있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말씀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왔고, 그 안의 모든 것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AC.2 해설)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 심화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의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는 얼핏 보면 단순한 강조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

bygrace.kr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 심화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단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

bygrace.kr

 

 

 

AC.3, 서문, ‘문자는 몸이고, 속뜻은 생명이다’

AC.3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은 기독교 세계에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속 사람

bygrace.kr

 

AC.1, 서문, ‘말씀 안에 담긴 하늘의 비밀들’

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

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 곧 겉 글자만으로는, 일반적으로 말해 그 안의 모든 것이 단지 유대교회의 외적 의식들과 규례들만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말씀 곳곳에 내적인 것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외적인 것들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극히 일부는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드러내시고 설명하셨는데, 예를 들면 희생 제사들은 주님을 상징하며,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천국을 상징하므로 ‘천국의 가나안’, ‘하늘의 예루살렘’이라 불리고, 낙원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From the mere letter of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no one would ever discern the fact that this part of the Word contains deep secrets of heaven, and that everything with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to his heaven, to the church, to religious belief, and to all things connected therewith; for from the letter or sense of the letter all that anyone can see is that—to speak generally—everything therein has reference merely to the external rites and ordinances of the Jewish church. Yet the truth is that everywhere in that Word there are internal things which never appear at all in the external things except a very few which the Lord revealed and explained to the apostles; such as that the sacrifices signify the Lord; that the land of Canaan and Jerusalem signify heaven—on which account they are called the heavenly Canaan and Jerusalem—and that paradise has a similar signification.

 

해설

AC.1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를 여는 첫 문장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창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곧바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독자가 앞으로 말씀을 어떤 눈으로 읽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구약의 말씀을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 의미가 잘못되었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 전체가 문자에서 출발합니다. 다만 말씀은 문자에 보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으며, 그 외적인 것들 안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이 AC.1의 첫 선언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 가운데 하나가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큰 이야기나 몇몇 특별한 예언에만 더 깊은 뜻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앞으로 AC에서 인물과 장소뿐 아니라 이름과 숫자와 방향, 행동과 반복되는 표현까지 세밀하게 다루게 되는 출발점이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은 문자 가운데 몇몇 부분에서만 발견되는 특별한 교훈이 아니라, 그 말씀의 개별적인 것들 안에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첫자리에 ‘주님’이 계신다는 사실은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인 것들을 인간의 내면이나 거듭남에 관한 이야기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주님을 말하고, 이어 주님의 천국과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앞으로 창세기의 창조와 에덴동산, 가인과 아벨, 노아와 홍수 등이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로 열리더라도, 그 속뜻의 중심에서 주님을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내 안에서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 말씀이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관하여 무엇을 담고 있는가?’라는 방향이 AC.1에서부터 주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내적인 것의 존재가 전혀 낯선 주장이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이미 밝혀 주신 예들을 듭니다. 희생 제사들은 주님을 상징하고,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천국을 상징하며, 낙원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희생 제사는 실제 의식이고 가나안과 예루살렘은 실제 장소이지만, 말씀 안에서는 그것들이 그 외적 대상에만 머물지 않고 내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AC.1은 아직 그 관계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우리는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이것이 ‘상응’과 ‘표상’이라는 거대한 말씀 이해로 펼쳐지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첫 번호에서는 상응의 체계를 미리 완성하기보다, 외적인 것 안에 내적인 것이 있다는 첫 문을 통과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문자와 그 안의 내적인 것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입니다. 현행 해설에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 ‘층위’라는 말을 사용했고, 바로 그 때문에 기존 심화 2와 심화 3이 생겼습니다. 이 표현 자체를 없앨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AC.1 원문이 직접 ‘degree’나 ‘gradus’를 사용하여 말씀의 의미들을 단계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층위’는 우선 외적인 것과 그 안의 내적인 것이 동일한 평면의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는 해설상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말씀의 문자와 내적인 의미의 더 정확한 관계는 이후 스베덴보리 자신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점차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AC.1에서 독자가 먼저 붙들 것은 복잡한 상응표나 의미의 단계 체계가 아닙니다. 구약의 겉 글자 안에는 문자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무엇보다 주님을 향하고, 주님의 천국과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 및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선언 하나를 먼저 세운 뒤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말씀을 하나씩 열어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AC.1은 이후 10,837개 번호 전체를 읽게 하는 첫 문이며,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는 대작이 왜 쓰였는지를 한 문장 안에 압축해 놓은 서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 해설)

 

심화

1. ‘religious belief’를 왜 ‘종교적인 믿음’으로 번역하는가?

 

AC.1 심화 1, ‘religious belief’를 왜 ‘종교적인 믿음’으로 번역하는가?

AC.1 심화1. ‘religious belief’를 왜 ‘종교적인 믿음’으로 번역하는가? AC.1에서 ‘religious belief’는 말씀의 내적인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열거하는 가운데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

bygrace.kr

 

2. ‘층위’란 무엇인가?

 

AC.1 심화 2, ‘층위’란 무엇인가?

AC.1 심화2. ‘층위’란 무엇인가? AC.1 해설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말씀의 겉 글자와 그 안의 내적인 것이 단순히 같은 평면에 놓인 두 가지 설명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표현하기 위

bygrace.kr

 

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심화 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심화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해설과 심화 2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원어에서는 층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bygrace.kr

 

4. ‘신적 진리’(Divine Truth)란 무엇인가?

 

AC.1 심화 4, ‘신적 진리’(Divine Truth)란 무엇인가?

AC.1 심화4. ‘신적 진리’(Divine Truth)란 무엇인가? AC.1 해설을 읽다가 ‘신적 진리’(Divine Truth)라는 표현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AC.1 원문 자체에는 ‘Divine Truth’

bygrace.kr

 

 

 

AC.2, 서문, ‘말씀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

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