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2를 처음 읽을 때 가장 어리둥절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단8:14, 26의 인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라고 설명한 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때는 신앙이 없었으므로 ‘저녁’이며 주님의 오심 자체는 ‘아침’이라고 말하면서 다니엘서를 인용합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다니엘서에도 ‘저녁’과 ‘아침’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가져온 것일까요? 그렇게 보기에는 스베덴보리의 논지가 너무 깊습니다.
먼저 개역개정만 읽으면 이 연결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단8:14은 ‘이천삼백주야까지니그때에성소가정결하게되리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에는 ‘저녁’과 ‘아침’에 해당하는 말이 실제로 들어 있으며, Potts번역도 AC.22에서 이를 ‘Evenuntoeveningwhenitbecomesmorning’이라는 형태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저녁-아침’이라는 표현 자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단어가 같다는 사실만으로 인용 이유가 모두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단8의 문맥입니다. 단8에서는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며, 진리가 땅에 던져지는 황폐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일정한 ‘저녁-아침’후에 성소가 정결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이 구절에는 단순한 하루의 반복만이 아니라 거룩한 것들이 훼손된 상태와 그 뒤의 정결 및 회복이라는 구조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AC.22에서 말하는 ‘저녁’과 ‘아침’의 영적 의미와 만납니다.
AC.22에서 ‘저녁’은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이며, 일반적으로는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상태입니다. ‘아침’은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이며 주님께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니엘에서 성소와 진리가 황폐해진 상태는 AC.22의 언어로 보면 ‘저녁’의 성격을 가지며, 성소가 다시 정결하게 되는 것은 ‘아침’의 성격과 연결됩니다. 이것은 단8의 문자적 역사 의미를 지워 버리고 다른 뜻을 임의로 덧씌운다는 뜻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문자적 사건 안에서 동시에 영적 상태를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께서오시는때는저녁이고,주님의오심은아침이다’라는 다소 역설적인 표현도 이해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야 할 만큼 신앙이 쇠퇴하고 교회가 황폐해진 상태는 ‘저녁’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저녁 가운데 주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되기 때문에 주님의 오심은 ‘아침’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시점에 저녁과 아침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기 전의 영적 상태와 그분의 오심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상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8:14, 26은 AC.22에서 매우 적절한 인용이 됩니다. ‘저녁-아침’이라는 표현뿐 아니라 황폐에서 정결로 나아가는 문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이천삼백’이라는 숫자의 구체적인 속뜻까지 AC.22에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락에서 그 숫자를 해설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저녁’과 ‘아침’이 시간의 이름을 넘어 영적 상태의 변화를 나타낸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이것을 ‘창세기에서저녁은언제나무조건A,아침은언제나무조건B라고정의되었으므로말씀어디에서나기계적으로같은뜻을대입하면된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를 사전처럼 치환하는 방식이 아니라 문맥과 연결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AC.22에서 단8의 인용이 설득력을 갖는 것도 단지 같은 단어가 있어서가 아니라, 신앙과 거룩한 것들의 황폐 그리고 그 뒤의 회복이라는 문맥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단8:14, 26을 인용하는 이유는 ‘저녁과아침’이라는 두 단어의 일치보다 더 깊습니다. ‘신앙이없는저녁의상태가운데주님이오심으로아침이시작된다’는 AC.22의 영적 질서가 다니엘의 ‘황폐와정결’이라는 구조 속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8의 인용은 창1의 저녁과 아침을 단순한 자연의 하루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창조의 상태로 이해하게 해 주는 중요한 보조 본문이 됩니다. (AC.22심화1)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창1:5)
AC.22
이제‘저녁’(evening)이무엇을뜻하고,‘아침’(morning)이무엇을뜻하는지를분별할수있습니다.‘저녁’은모든이전의상태를의미하는데,그것은그늘의상태,곧거짓의상태이며신앙이없는상태이기때문입니다.‘아침’은모든이후의상태를의미하는데,그것은빛의상태,곧진리의상태이며신앙의지식들이있는상태이기때문입니다.일반적으로말해‘저녁’은사람자신의것에속한모든것을의미하지만,‘아침’은주님께속한모든것을의미합니다.이는다윗을통해하신다음말씀과같습니다. What is meant by “evening” and what by “morning” can now be discerned. “Evening” means every preceding state,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or of falsity and of no faith;“morning” is every subsequent state,being one of light,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Evening,” in a general sense,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but “morning,” whatever is of the Lord,as is said through David:
2여호와의영이나를통하여말씀하심이여그의말씀이내혀에있도다3이스라엘의하나님이말씀하시며이스라엘의반석이내게이르시기를사람을공의로다스리는자, 하나님을경외함으로다스리는자여4그는돋는해의아침빛같고구름없는아침같고비내린후의광선으로땅에서움이돋는새풀같으니라하시도다(삼하23:2-4)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and his word was on my tongue;the God of Israel said,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when the sun ariseth,even a morning without clouds,when from brightness,from rain,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2 Sam.23:2–4).
신앙이없을때가‘저녁’이고신앙이있을때가‘아침’이므로,주님께서세상에오신것을‘아침’이라하며,그분이오시는때는신앙이없기때문에‘저녁’이라고합니다.이는다니엘에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and the time when he comes,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이와같이말씀에서‘아침’은주님의모든오심을의미하며,그러므로그것은곧새로운창조를의미하는표현입니다. In like manner “morning” 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해설
AC.22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을 단순한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언어로 해석하는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저녁’은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은 그늘의 상태, 곧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아침’은 이후의 상태로, 빛의 상태, 곧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루가 지나갔다는 뜻을 넘어, 거듭남 가운데 한 상태에서 그 다음 상태로 나아가는 영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AC.20에서 처음 빛이 나타났고 AC.21에서 빛과 어둠이 구별되었다면, AC.22에서는 그 변화의 방향이 ‘저녁에서아침으로’표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대비를 더욱 일반적인 원리로 확장하여 ‘저녁’은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21의 ‘주님께속한모든것은낮에비유되고,사람자신의모든것은밤에비유된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사람 자신의 것이란 단순히 인간의 개성이나 자연적인 능력 전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여기는 proprium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서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인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가 나온다고 여기던 질서에서 그것들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질서로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 원리를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먼저 인용하는 말씀이 삼하23:2-4입니다. 여기서 ‘돋는해의아침빛’, ‘구름없는아침’, ‘비내린후의광선으로땅에서움이돋는새풀’이라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AC.22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직접적인 이유는 ‘아침’이 빛과 생명이 나타나는 상태를 표현한다는 것을 말씀 자체에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아침의 빛 아래 새 풀이 돋아나는 모습은 빛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이 나타나는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만을 근거로 ‘새풀’을 퍼셉션이나 특정한 영적 기능에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붙드는 중심은 ‘아침’입니다. 아침은 주님께 속한 빛이 나타나는 상태이며, 그 빛 아래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상태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개인의 거듭남을 넘어 주님의 세상 오심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이라 하고, 그분이 오시는 당시의 상태는 신앙이 없었으므로 ‘저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같은 사건을 모순되게 저녁과 아침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기 직전의 상태를 그 근본적인 신앙의 결핍 때문에 ‘저녁’이라 하고, 바로 그 상태 가운데 주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된 것을 ‘아침’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녁에서아침으로’라는 질서는 한 개인의 거듭남뿐 아니라 교회의 황폐와 주님의 오심이라는 더 큰 차원에서도 적용됩니다.
이 대목에서 단8:14, 26이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이천삼백주야까지니’라고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표현에는 ‘저녁’과 ‘아침’이 들어 있으며 Potts역시 ‘Evenuntoeveningwhenitbecomesmorning’이라고 옮겨 AC.22의 논지를 드러냅니다. 더구나 단8의 문맥에서는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며 진리가 땅에 던져지는 황폐의 상황과, 이후 성소가 정결하게 되는 회복이 함께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단순히 ‘저녁’과 ‘아침’이라는 단어가 우연히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신앙과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상태와 그 뒤의 회복이라는 문맥이 ‘저녁에서아침으로’라는 영적 질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다만 단8의 ‘이천삼백’을 AC.22에서 별도의 예언 시간표로 풀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기서는 그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초점은 신앙이 없는 상태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는 상태가 ‘아침’이라는 데 있으며, 이를 통해 주님의 오심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22에서 단8:14, 26을 읽을 때도 숫자의 계산보다 ‘저녁에서아침으로’, 곧 황폐한 상태에서 주님의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되는 구조를 붙드는 것이 본문의 논지에 더 충실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AC.22전체를 하나로 묶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아침’이 ‘주님의모든오심’을 의미하며, 따라서 ‘새로운창조’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의모든오심’은 주님의 역사적 성육신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오심으로 이전의 어두운 상태에 빛이 시작되고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모든 경우에 ‘아침’이라는 영적 표현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아침은 새로운 창조의 표현이 됩니다. 창1의 창조가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설명과도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22에서 ‘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는 단순히 어두웠다가 밝아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 자신의 것에서 주님께 속한 것으로,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에서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로 나아가는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의 오심이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밤을 아침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심으로 아침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교회의 회복에서도 ‘아침’이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이유입니다. (AC.22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