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9 심화

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의 문맥을 처음 읽으면 앞에서는 식물 이야기—‘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를 하다가 갑자기 ‘회개의 상태’라는 말이 등장하기 때문에 논리 점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창1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은 갑작스러운 전환이 아니라 ‘앞 단계에서 준비된 상태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 연결을 이해하려면 창1에서 말하는 거듭남의 초기 단계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의 첫 부분을 인간 거듭남의 초기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대략 이런 흐름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완전히 혼돈과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다음 진리의 빛이 조금씩 들어옵니다. 그리고 진리와 거짓이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면 사람 안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 곧 식물로 상징되는 단계가 나타납니다. 바로 여기서 ‘풀’과 ‘나무’가 등장합니다. 즉 사람 안에 처음으로 선과 진리의 싹이 나타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회개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자신의 생각과 삶이 괜찮다고 여겼던 것들이 진리의 빛 속에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바꾸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입니다.

 

여기서 ‘회개’라는 말을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의미—큰 죄를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연결이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훨씬 더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돌아본 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고, 그것을 바꾸려는 의지’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맞추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의 식물 비유와 회개는 실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풀’은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듣고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씨 맺는 채소’는 그 진리가 생각 속에서 자라 다른 진리를 낳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열매 맺는 나무’는 그 진리가 실제 삶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진리에 따라 삶을 바꾸기 시작하는 바로 그 과정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식물 단계 전체를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다가 ‘나는 지금까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듭니다. 이것이 풀입니다. 그다음 그는 말씀을 더 배우면서 자신의 행동들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 행동은 옳았을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것이 씨 맺는 채소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실제 행동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쉽게 화를 냈다면 이제는 참아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전에는 남을 비판했다면 이제는 말을 조심합니다. 이것이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바로 이 전체 과정이 회개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에서 회개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식물의 성장 비유가 바로 회개의 실제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할 때, 그 순간이 바로 회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회개를 거듭남의 매우 초기 단계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거듭난 상태는 아니지만,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삶을 진리의 빛 속에서 고치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떤 특별한 감정 사건이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 ‘자기 삶을 그 진리에 맞추어 바꾸기 시작하는 과정’입니다. 창1에서 식물이 처음 자라는 장면이 바로 그 회개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AC.29 심화 3)

 

 

 

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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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 심화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을 읽다 보면 조금 이상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연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가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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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을 읽다 보면 조금 이상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연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가 나오며, 마침내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까지 등장합니다. 단순히 진리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열매’까지 맺는 단계라면 상당히 깊은 거듭남에 들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것을 아직 ‘생명 없는 것들’(inanimate things)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열매를 맺고 있는데도 ‘생명 없는’ 상태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AC.29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생명’을 말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생명 없는’이라는 표현은 식물이 자연계에서 생물인가 무생물인가를 말하는 생물학적 구분이 아닙니다. 또한 이 단계의 사람에게 선도 진리도 전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아 무엇인가가 돋아나고 자라며 열매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을 사람이 아직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아직 이것을 진정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단계는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전의 준비 상태입니다. 따라서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만으로 생명의 유무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선한 열매가 나타나고 있어도, 사람이 그 선의 생명을 여전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있다면 AC.29의 의미에서는 아직 다음 단계의 생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반드시 되갚아 주었는데, 말씀을 배우고 회개하면서 이제는 보복하지 않으려고 애쓴다고 해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겨우 분노를 억제하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험담도 삼가고, 마침내 상대방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실제로 도와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열매’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전에는 없던 선한 행동이 실제 삶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전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많이 변했다. 예전 같으면 절대 이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이제는 저 사람까지 도와주었다.’ 이것이 반드시 노골적인 교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실제로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선의 근원까지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바로 이 상태에서부터 이끌어, 나중에는 자기가 행하는 모든 참된 선의 생명과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AC.29의 ‘생명 없는’ 상태를 ‘가짜 선’, ‘쓸모없는 선’, 혹은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선’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단계는 거듭남에서 반드시 필요한 준비 과정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먼저 선과 진리에 관한 것을 배우게 하시고, 그것에 따라 실제로 행동하게 하시며, 그 과정 가운데 점차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셋째 날의 식물들은 바로 이러한 준비가 실제 삶에서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라는 표현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열매가 있다는 것은 선과 진리가 단지 기억 속의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실제 삶에서 무엇인가를 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나무’는 셋째 날 안에서는 매우 발전한 모습이지만, 전체 거듭남의 여섯 상태를 놓고 보면 여전히 다음 단계의 생명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점은 ‘내가 선을 행하는가?’와 ‘그 선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가 서로 다른 질문임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질문에서는 셋째 날에도 분명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악한 행동을 멈추고 선한 일을 시작하며 진리에 따라 살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서는 아직 더 깊은 변화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안의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여기지 않고,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오는 것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는 사람이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니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거듭남의 질서가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선택하고 싸우고 행해야 합니다. 다만 점차 깊어지는 거듭남 속에서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능력으로 이렇게 하고 있으며, 선 자체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라는 인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셋째 날의 ‘생명 없음’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죽은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을 향하여 준비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씨앗은 이미 뿌려졌고, 연한 것이 돋았으며, 씨를 맺고, 마침내 열매까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직 그 모든 것의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참으로 인정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것을 ‘생명 없는 것들’이라고 하고, 다음에 비로소 ‘살아 있는 것들’이 등장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열매를 맺는데도 왜 생명 없는가?’라는 역설은 오히려 AC.29의 핵심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거듭남은 단지 ‘나쁜 행동이 좋은 행동으로 바뀌는 것’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곳에서는 선의 근원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주님에게 있던 그 근원을 사람이 인정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여기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더 깊이 이끄실수록 그는 자기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셋째 날의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는 결코 하찮은 단계가 아닙니다. 실제 열매가 나타나는 귀중한 회개의 상태입니다. 다만 그 열매를 바라보며 ‘이것은 나의 선이다’라고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가능하게 한 씨앗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알아 가야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셋째 날의 준비는 다음 단계의 ‘참된 신앙의 생명’을 향하여 열리기 시작합니다. (AC.29 심화 2)

 

 

 

AC.29 심화 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 심화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의 문맥을 처음 읽으면 앞에서는 식물 이야기—‘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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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1,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실제 예

AC.29 심화1.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실제 예 AC.29의 ‘연한 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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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1.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실제 예

 

AC.29의 ‘연한 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는 실제 거듭남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서 어떻게 나타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세 표현을 통하여 셋째 날에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처음 싹트고 점차 자라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다만 한 가지를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 단계는 아직 거듭남이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AC.29은 이때 나타나는 것들을 아직 ‘생명 없는 것들’이라고 부르며, 이 사람은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실제 예도 완성된 천적·영적 인간의 모습이라기보다, 회개 가운데 선과 진리가 처음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사람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평소 직장에서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동료를 몹시 싫어합니다. 상대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면 며칠 동안 분을 품고,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흠을 말하면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거나 읽는 가운데 ‘나는 저 사람이 잘못한 것만 보고 있는데, 내 안의 미움은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이 처음 생깁니다. 전에는 상대의 잘못만 보였는데 이제 처음으로 자기 안의 악을 조금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처음 돋아나는 것이 ‘연한 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아직 매우 약합니다. 그날은 ‘미워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상대가 다시 자기를 자극하면 곧 화가 납니다. 그래도 이전과 다른 것이 하나 생겼습니다. 전에는 자기 분노를 당연하게 여겼지만 이제는 ‘내가 이 사람을 이렇게 미워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진리가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행동 전체를 바꿀 만큼 강하지 않고, 그 진리가 자기 삶을 지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씨앗으로부터 이전에는 없던 무엇인가가 연한 싹처럼 돋아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은 말씀을 더 배우고 자신의 상태도 조금씩 살펴봅니다. 단지 ‘미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 상황에서 자기 분노를 억제하려고 합니다. 상대방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을 때 말을 멈추어 보기도 하고, 상대에게 일부러 차갑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 평소처럼 대하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실패할 때도 많지만 이제 진리가 단순히 머릿속에 머물지 않고 실제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태를 ‘씨 맺는 채소’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연한 풀보다 한 단계 더 진행된 것입니다. 선과 진리가 조금 더 형태를 갖추고, 사람의 실제 삶 속에서 쓰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내가 참 많이 변했다’, ‘나는 이제 저 사람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분노를 참은 자기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선한 행동이 나타난다고 해서 아직 그 선의 근원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깊이 인정하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의 행동에는 이전보다 분명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전에는 상대가 잘못하면 즉시 보복하거나 험담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멈추는 일이 많아집니다. 상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필요한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이라도 공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음속에서 미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미움이 행동 전체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진리가 실제 선한 행동이라는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한 실제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 사람이 이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므로 이미 참된 신앙의 생명에 들어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AC.29은 오히려 이 단계에서도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셋째 날의 식물들은 아직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선한 열매가 실제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마음 깊이 인정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다음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않은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교회에서의 봉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설교를 듣다가 ‘나도 어려운 사람을 좀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직 실제 행동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을 ‘연한 풀’과 같은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는 실제로 시간을 내어 누군가를 돕고, 자기 편의를 조금 포기하면서 봉사하기 시작합니다. 선에 관한 진리가 행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씨 맺는 채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선한 행동이 일회적인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생활 가운데 반복되어 실제 유익을 만들어 낸다면 ‘열매 맺는 나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동기는 아직 혼합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기쁠 수도 있고, ‘나는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만족이 있을 수도 있으며, 자기가 선한 일을 했다는 생각을 붙들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불완전한 상태 때문에 시작된 선을 모두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계속 이끄시면서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차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이 앞의 AC.25에서 살펴본 ‘꺾지 않고 굽히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따라서 ‘연한 풀 → 씨 맺는 채소 →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단순히 ‘좋은 생각 → 진리 이해 → 완성된 선한 성품’이라는 세 단계로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AC.29의 중심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아 사람 안에서 처음 연약한 것이 돋아나고, 그것이 점차 더 유용한 것이 되며, 마침내 실제 열매를 맺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아직 셋째 날, 곧 ‘회개의 상태’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큰 위로가 됩니다. 자기 안에 겨우 ‘연한 풀’ 같은 변화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악을 오늘 처음 악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면 이미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직 자주 실패하더라도 진리에 따라 실제 행동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면 그 연한 것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삶에서 실제 선한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주님께서 그 사람을 더 깊은 단계로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든 과정에서 사람은 한 가지를 배워 가야 합니다. ‘땅’인 사람이 씨앗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은 씨앗을 받아 싹을 내고 열매를 맺지만, 천적 씨앗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내가 이렇게 선해졌다’는 데 머물지 않고, 자기 안에서 나타나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셋째 날의 식물들은 바로 그 더 깊은 생명을 향하여 자라고 있는 거듭남의 첫 열매들입니다. (AC.29 심화 1)

 

 

 

AC.29 심화 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 심화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을 읽다 보면 조금 이상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연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가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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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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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창1:11-13)

 

AC.29

‘땅’(earth), 곧 사람이 이렇게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들을 받을 준비가 되고, 선과 진리에 속한 어떤 것을 산출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주님께서는 먼저 어떤 연약한 것이 돋아나게 하시는데, 이것을 ‘연한 풀’(tender herb)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더 유용한 것이 나오는데, 이것은 다시 그 안에 씨를 지니고 있어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라고 합니다. 마침내 선한 어떤 것이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것을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라고 하며, 이 모든 것은 각기 자기 종류대로입니다. 거듭나는 중인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주님에게서 나오므로, 그것들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나중에 그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다만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상태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는 여기서 생명 없는(inanimate) 것들로 표상되고, 그다음에 오는 신앙의 생명 상태는 생명 있는(animate) 것들로 표상됩니다. When the “earth,” or man, has been thus prepared to receive celestial seeds from the Lord, and to produce something of what is good and true, then the Lord first causes some tender thing to spring forth, which is called the “tender herb”; then something more useful, which again bears seed in itself, and is called the “herb yielding seed”; and at length something good which becomes fruitful, and is calle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each according to its own kind. The man who is being regenerated is at first of such a quality that he supposes the good which he does, and the truth which he speaks, to be from himself, when in reality all good and all truth are from the Lord, so that whosoever supposes them to be from himself has not as yet the life of true faith, which nevertheless he may afterwards receive; for he cannot as yet believe that they are from the Lord, because he is only in a state of preparation for the reception of the life of faith. This state is here represented by things inanimate, and the succeeding one of the life of faith, by animate things.

 

[2] 씨를 뿌리는 이는 주님이시며, ‘씨’(seed)는 그분의 말씀이고, ‘땅’(earth)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친히 밝혀 주셨습니다. (마13:19-24, 37-39; 막4:14-21; 눅8:11-16) The Lord is he who sows, the “seed” is his Word, and the “earth” is man, as he himself has deigned to declare (Matt. 13:19–24, 37–39; Mark 4:14–21; Luke 8:11–16).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마13:19-24, 37-39)

 

14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막4:14-20)

 

11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눅8:11-15)

 

같은 뜻으로 주님께서는 이렇게도 설명하십니다. To the same purport he gives this description: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4:26-28) So is the kingdom of God, as a man when he casteth seed into the earth, and sleepeth and riseth night and day, and the seed groweth and riseth up, he knoweth not how; for the earth bringeth forth fruit of herself, first the blade, then the ear, after that the full corn in the ear (Mark 4:26–28).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전체 천국을 뜻하고, 덜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주님의 참된 교회를, 개별적인 의미에서는 참된 신앙에 속한 모든 사람, 곧 신앙의 삶으로 거듭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을 ‘천국’(heaven)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천국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누가복음에서 친히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By the “kingdom of God,” in the universal sense, is meant the universal heaven; in a sense less universal, the true church of the Lord; and in a particular sense, everyone who is of true faith, or who is regenerate by a life of faith. Wherefore such a person is also called “heaven,” because heaven is in him; and likewise the “kingdom of God,”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in him,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Luke: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 21) Being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Luke 17:20–21).

 

이것이 사람의 거듭남에서 세 번째로 이어지는 단계이며, 곧 그의 회개(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 역시 그늘에서 빛으로, 곧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13절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 and in like manner proceeding from shade to light, or from evening to morning; wherefore it is said (verse 13),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해설

AC.29에서는 셋째 날의 거듭남이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앞의 AC.27-28에서는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마른 땅이 드러나는 장면을 통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모이고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체가 준비되는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준비된 ‘땅’에서 처음으로 무엇인가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큰 나무와 풍성한 열매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연한 풀’이 나오고, 다음으로 ‘씨 맺는 채소’가 나오며, 마지막으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나옵니다. 이것은 거듭남이 단번에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점차 자라게 하시는 질서 있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땅, 곧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씨앗의 근원’입니다. 땅이 씨앗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받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기 안에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셋째 날에 비로소 무엇인가 자라기 시작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땅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은 ‘연한 풀’(tender herb)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처음 돋아나게 하시는 ‘어떤 연약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거듭남의 처음에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이 아직 매우 미약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조금 알게 되고 그것에 따라 살고자 하지만 이전의 습관과 자기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도 여전히 강합니다. 그러므로 처음 나타나는 변화는 연한 풀처럼 작고 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작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는 없었던 무엇인가가 주님에게서 오는 씨앗으로부터 사람 안에 돋아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씨 맺는 채소’입니다. 여기서는 처음의 연약한 상태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더 유용한 것’이라고 표현하며, 그 안에 다시 씨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나옵니다. 이제 선한 것이 실제로 열매를 맺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따라서 이 세 표현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을 처음 싹트게 하시고, 그것을 점차 자라게 하여 마침내 열매를 맺게 하시는 진행을 보여 줍니다.

 

본문은 이 모든 것이 ‘각기 종류대로’ 이루어진다고 덧붙입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 1장에서 계속 반복되지만 AC.29은 여기서 ‘종류’의 세부적인 속뜻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그것을 선과 진리의 모든 질서, 영계의 분류, 선과 악의 분리 같은 넓은 교리 전체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소한 AC.29의 문맥에서는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무질서한 혼합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각기 자기 고유의 성질을 따라 산출된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더 넓은 의미는 이 표현이 이후 다시 나타날 때 함께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29의 매우 중요한 반전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이 싹트고 열매까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사람에게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이 단계의 사람은 아직 그것을 진정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완성된 영적 생명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상태’에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해야 왜 식물들이 여기서 ‘생명 없는 것들’(inanimate things)로 표상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자연계의 식물이 문자 그대로 생명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구별하는 것은 거듭남의 상태입니다. 셋째 날에는 선과 진리에 속한 무엇인가가 사람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사람은 아직 그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참으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다음 단계에서 등장하는 ‘생명 있는 것들’은 신앙의 생명을 실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나무’까지 왔다고 해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셋째 날 전체는 여전히 다음 생명의 단계를 위한 준비입니다.

 

그렇다고 이때 사람이 행하는 선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바로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사람을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 ‘내가 악을 버린다’고 느끼며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남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과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AC.29의 셋째 날은 바로 그 인정에 이르기 전의 중요한 준비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씨 뿌리는 비유를 함께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 복음서에서 주님께서는 씨와 말씀, 뿌리는 자와 씨를 받는 땅, 그리고 결실을 서로 연결하여 설명하십니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라고 직접 밝히고, 마가복음에서는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고 하며, 마태복음에서는 좋은 씨를 뿌리는 이를 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창1의 씨와 땅을 거듭남의 말씀으로 읽는 것은 식물 이미지에 임의로 의미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사용하신 씨 뿌림의 언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좋은 땅의 차이도 같은 말씀이 사람에게 주어져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보존하며 삶에서 결실하는가가 중요함을 보여 줍니다.

 

막4:26-28의 비유는 이 성장의 또 다른 면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린 뒤 밤낮 자고 깨는 동안 씨는 자라지만 그는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됩니다. 창1:11의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와 각각을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AC.29에서 이 비유가 보여 주는 것은 주님의 나라가 씨 뿌림에서 시작하여 사람이 그 내적 진행을 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 점차 결실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거듭남도 사람의 눈앞에서 단번에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생명이 점차 자라는 과정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 범위로 설명합니다.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전체 천국이고, 덜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주님의 참된 교회이며, 개별적인 의미에서는 참된 신앙에 속한 사람, 곧 신앙의 삶으로 거듭난 각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지 개인의 도덕적 개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 안에 천국에 속한 질서를 이루시는 일입니다. 눅17:20-21의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이 이 문맥에서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AC.29은 하나님의 나라를 먼 외적 장소에만 두지 않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된 신앙의 삶으로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 셋째 단계를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AC.29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여기서 회개를 단지 죄를 슬퍼하거나 잘못을 후회하는 감정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앞에서 기억 속에 받아들인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이제 실제 삶에서 무엇인가를 산출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따라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만 아직 사람은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 회개 역시 완성된 거듭남이 아니라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기 위한 준비 상태입니다.

 

그래서 셋째 날에도 다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됩니다’. 사람은 아직 그늘 속에 있지만 빛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으며,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던 선과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더 깊은 인식을 향하여 인도받고 있습니다. 연한 풀에서 씨 맺는 채소로, 다시 열매 맺는 나무로 나아가는 성장도 바로 이 저녁에서 아침으로의 진행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완성된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현재 상태에서 시작하여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을 싹트게 하시고 점차 다음 단계로 이끄십니다.

 

AC.29의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날의 사람은 아직 자기 선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참된 신앙의 생명에도 완전히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 불완전한 상태를 버리지 않으시고 거듭남의 과정으로 사용하십니다. 사람에게서 겨우 ‘연한 풀’만 돋아나는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작은 시작을 다음 단계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성장의 근원은 땅인 사람에게 있지 않고 씨를 주시는 주님에게 있습니다. 결국 거듭남은 사람이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기 안에서 자라며 열매 맺도록 주님께 이끌리는 과정입니다. (AC.29 해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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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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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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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 창1:10, ‘물과 바다와 땅 : 지식이 모이고, 생명을 받아들일 거듭남의 그릇’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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