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은 ‘창세기 족보 구조’, ‘스베덴보리의 표상적 역사 읽기’, 그리고 ‘시간 개념 자체’를 함께 풀어야만 비로소 답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라멕 이후 곧바로 노아가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AC.407의 설명은, ‘창세기 본문의 문자적 시간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내적 상태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겹치는지를 설명하는 영적 서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족보들을 연대기적 역사로 보지 않고, ‘동시에 존재하며 병행했던 영적 상태들의 계보’로 읽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는 ‘앞뒤로 교대하는 한 줄의 역사’가 아니라, ‘같은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두 흐름’입니다. 가인의 계보는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점점 황폐(vastation)에 이르는 흐름’을 표상하고, 셋의 계보는 같은 태고교회 안에서 ‘주님에 의해 보존된 리메인스가 이어지는 흐름’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라멕은 가인의 계보에서 나타나는 황폐의 최종 상태를 상징하지만, 그 시점에 셋의 계보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라멕으로 대표되는 황폐가 극에 달할수록, 그와 병행하여 주님께서 보존하신 작은 핵(nucleus), 곧 리메인스의 중요성은 더욱 커집니다.’

 

이 점에서 노아는 ‘라멕 다음에 새로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 오던 보존된 교회의 대표 이름’입니다. 창5에서 노아가 라멕의 아들로 등장하는 서술은, 자연적 시간 순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존된 리메인스가 이제 더 이상 숨겨진 상태로 머물 수 없고, 새로운 시대의 대표, 표상으로 전면에 나서야 할 시점이 되었음’을 보여 주는 문학적, 표상적 장치입니다. 다시 말해, 가인의 계보가 라멕에서 완전히 황폐되었기 때문에, 그와 병행하여 존재하던 셋의 계보 중에서 ‘노아로 대표되는 흐름만이 다음 시대(홍수 이후의 교회)로 이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라멕 이후 노아’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동시적으로 존재하던 두 흐름 중 하나가 종결되고, 다른 하나가 역사 전면으로 부각되는 전환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창세기 족보가 왜 그렇게 길고 반복적으로 보이는지도 풀립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는 생물학적 기록이 아니라, ‘한 교회 안에서 어떤 영적 성향이 지속되었고, 어떤 성향이 단절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지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라멕에서 노아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AC.407의 서술은, 시간의 점프가 아니라 ‘시대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장면’이며,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가 병행했다는 이전 설명과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설명이 있어야만, 라멕–노아 연결이 정확히 이해됩니다.

 

요약하면, ‘가인의 계보는 황폐의 계보로서 라멕에서 끝나고’, ‘셋의 계보는 보존의 계보로서 노아를 통해 다음 시대를 잇습니다’. 두 계보는 순차가 아니라 병행이었고, 창세기의 서술은 이를 시간의 언어로 배열했을 뿐, 실제 영적 역사에서는 ‘항상 황폐와 보존이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사 이해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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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07

 

일반적으로 어떤 교회의 상태는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참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다가 ‘황폐해졌다’(vastated)라고 하는, 결국 신앙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런 일이 태고교회의 경우는 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Cainites) 사이에서, 또 홍수 후 고대교회와 유대교회의 경우에서도 있었습니다. 주의 강림(降臨, the Lord’s advent)의 때, 종말이 바로 이런 황폐한 상태였는데요,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시기로 예정되어 있던 주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몰랐으며, 그분을 향한 신앙에 대해서는 더욱더 아는 게 없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 곧 주님 강림 후 있었던 교회 역시 그랬으며, 오늘날(※ 1750년대 유럽)교회도 그 안에 아무런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철저하게 황폐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핵은 언제나 늘 조금은 남아 있는데, 이것은 신앙에 관해 황폐해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태고교회의 경우가 그랬는데, 그 남은 자들은 홍수 때와 홍수 후까지도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이들 그 교회의 남은 자들이 바로 ‘노아’(Noah)입니다. The state of a church in general is thus circumstanced. In process of time it departs from the true faith until at last it comes to be entirely destitute of faith, when it is said to be “vastated.” This was the case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among those who were called Cainites, and also with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s well as with the Jewish church.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this last was in such a state of vastation that they knew nothing about the Lord, that he was to come into the world for their salvation, and they knew still less about faith in him. Such was also the case with the primitive Christian church, or that which existed after the Lord’s advent, and which at this day is so completely vastated that there is no faith remaining in it. Yet there always remains some nucleus of a church, which those who are vastated as to faith do not acknowledge; and thus it was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of which a remnant remained until the time of the flood, and continued after that event. This remnant of the church is called “Noah.”

 

 

해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겪는 영적 흐름을 설명하며, 모든 교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참된 신앙에서 점차 이탈하여 마침내는 ‘신앙이 거의 혹은 완전히 소멸된 황폐(vastation)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가인의 계보에서 나타난 태고교회의 황폐가 그 첫 사례이며,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 그리고 유대교회 역시 동일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특히 주님의 강림 당시 유대교회는 극도의 황폐 상태에 있었기에, 메시아가 오신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고, 주님을 믿는 신앙이 무엇인지도 거의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흐름이 초대 기독교회에도 반복되었으며, 더 나아가 오늘날의 교회 역시 신앙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되었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교회가 황폐되었다고 해서 주님의 구원 역사가 완전히 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교회의 중심부에는 ‘보이지 않는 핵(nucleus)’, 곧 주님께서 직접 보존하시는 ‘리메인스’가 남아 있으며, 황폐된 다수는 이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태고교회 역시 전반적으로는 가인의 계열로 황폐되었지만, 그 안에 남아 있던 이 리메인스가 홍수까지 이어졌고, 그 보존된 핵이 바로 ‘노아’로 상징됩니다. 따라서 AC.407은 교회의 황폐를 비관적으로만 보지 않고, ‘황폐 한가운데서도 주님은 항상 다음 시대를 위한 씨앗을 숨겨 두신다’는 섭리의 원리를 분명히 보여 주며, 이것이 역사 속에서 교회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새롭게 일어날 수 있는 근거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AC.408, 창4:19, '모독'(冒瀆, profanation)의 속뜻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하나의 교회가 더 이상 그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지면, 전과 다르게 새로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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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6, 창4:19, 라멕의 상태, ‘황폐’(vastation)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 ‘라멕’이 황폐함, 즉 어떤 신앙도 없는 상태와 상응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23, 24절을 보면 분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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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station’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 단순히 ‘타락’이나 ‘심판’으로 번역하면 그 깊이가 사라집니다.

 

vastation’(황폐, 荒廢)이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전문 용어로, 한 사람이나 한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곧 체어리티와 신앙이 점진적으로 소멸되어 가는 영적 과정’을 뜻합니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파괴나 외적 심판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사랑을 버리고 거짓과 악을 선택함으로써 ‘내면이 비워지고 메말라 가는 상태의 누적’입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듯이, 황폐 역시 단계적으로 진행되며, 처음에는 선이 약해지고 진리가 흐려지다가, 나중에는 참과 선이 더 이상 인식되지 않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중요한 점은 황폐가 단순한 끝이나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되는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사람 안에 남아 있는 거짓과 악이 드러나고 제거되지 않으면 새로운 선과 진리를 심으실 수 없기 때문에, 먼저 기존의 왜곡된 신앙과 사랑을 비워내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황폐는 종종 포로기, 광야, 어둠, 밤, 침묵, 일곱 번의 징계 같은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창세기에서 가인의 계보가 라멕에 이르러 황폐의 극점에 도달하는 것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더 이상 생명을 낳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뜻하며, 동시에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교회의 씨앗이 준비되는 전환점’이 됩니다. 즉 vastation은 파괴 그 자체가 아니라, ‘거짓된 것을 비워 새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 정화의 과정’이며, 주님께서 결코 방임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사용하시는 깊은 섭리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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