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33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37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38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눅21:29-38)
마태복음 21장 18, 1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8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21:18, 19)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려 하셨을까요?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위에 세워진 자연적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잎이 무성하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인 지식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이고요, 열매가 없다는 것은 그럼에도 말씀에 따른 삶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은 말세에 사랑, 즉 삶이 없는 교회는 결국 스스로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걸 뜻합니다. 말씀에는 주님의 저주로 인해 나무가 말라 죽은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교회가 자신의 악과 거짓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그렇게 무너졌고, 그 후에 세워질 교회들도 마지막에는 그렇게 무너질 것이라는 걸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예언하고 계십니다. 마지막 때 타락한 교회들이 무너지고, 새 교회가 나타나는 것을 오늘 본문 29절로 3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9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여기 무화과나무는 낡은 교회를 대신해 주님께서 새로 세우시는 새 교회를 뜻합니다. 새 교회는 말씀의 내적 의미 위에 세워진 내적인 교회, 즉 영적인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교회인 새 교회를 왜 자연적 교회를 표상하는 무화과나무에 비유했을까요? 새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는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 교회는 본래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다음에 그 진리를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다 보니 초기의 새 교회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애정은 있지만, 삶에 있어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각박할 때가 많습니다. 따지기를 좋아하고, 옳으니 그르니 하며 자주 다툽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아들 이스마엘처럼 말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이스마엘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처음 생기는 합리성(合理性, rationality)을 표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에서 비롯한 합리성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합리성이며, 들나귀처럼 다투기를 좋아하는 합리성입니다. 그것이 새 교회의 처음 상태입니다.
※ 실제로 한국 새 교회의 경우(대략 한 8, 90년?)도 그렇고, 미국 새 교회의 경우(대략 한 200년?)도 그렇고,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런 내부 다툼과 그로 인한 혼란의 시간들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따로 무슨 여러 분파를 만들어 갈라져 나가지는 않은 걸 보면 개신교와는 좀 다르구나 싶습니다. 새 교회 신앙은, 구원론 하나만 가지고 비교해 볼 때,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는 같이 간다는 것, 즉 신앙 고백이 그럴듯해도 삶이 안 받쳐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신앙인 반면, 개신교 신앙은, 물론 신앙 고백과 삶이 같이 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러나 ‘오직 믿음’이라는 신앙 고백만 분명하면 일단 구원은 받는다는, 사람이 무엇이며, 영이라고도 하는 속 사람에 관한 바른 지식이 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이상한 신앙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무화과나무에 싹이 난다는 것은 처음 새 교회에 주어지는 내적 진리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인애(charity), 곧 체어리티의 신앙을 뜻합니다. 이전 교회의 신앙이 믿음만의 신앙이었다면, 새 교회의 신앙은 체어리티의 신앙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을 통해 새 교회인들은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타적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신앙은 그 자체로 능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체어리티라는 선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무화과나무에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깝다고 했습니다. 여름은 선한 삶이라는 신앙의 열매를 맺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하십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말세에 낡은 교회의 심판과 새 교회의 출현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교회에 대한 심판이 먼저 이루어진다면, 새 교회가 나타나기도 전에 인류는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한편으로는 타락한 교회를 심판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것이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하실까요? 심장이 병들었다고 아무 대책도 없이 바로 심장부터 떼어내 버리면, 그 사람은 수습할 겨를도 없이 사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편으로 새 교회라는 새로운 심장을 준비하시고, 한편으로는 병든 심장에 손을 대십니다. 그렇게 해서 새 교회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렇지 않고 낡은 교회에 남아서 새 교회를 배척하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
※ 이와 관련, 제가 고민한 아래 제 블로그 글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Sola Fide),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시는,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의 사람들에 관한 네 가지 경우 (2024/8/22)
제가 위와 같은 글을 준비한 이유는 제 오랜 개신교 경험에 의하면, 여러 가지 이유로 개신교 교회를 다니시고는 있지만, 그 안에서 분명 체어리티의 삶을 사시는 분들도 다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금 하신 위 말씀 중, ‘그렇게 해서 새 교회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렇지 않고 낡은 교회에 남아서 새 교회를 배척하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라는 위 말씀은 개신교회를 다니신다고 무조건 저렇게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 가운데 아주 악한 사람들, 즉 삶은 나 몰라라 하시면서 ‘오직 믿음’만 주장, 그걸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시는 분들과, 교리도 대충, 체어리티도 대충, 그저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이라는 걸 하는 이유가 그래도 복은 받고 싶고, 어두운 기운들은 또 피하고 싶은, 거의 기복 신앙과 다름없는, 이렇게 두 경우 다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의 분들한테만 해당되는 말씀이지 싶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무자비하게 지옥으로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참된 진리를 밝히 열어 보여 주시고, 그 진리를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 당시 유대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모욕하고,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주님도 어쩌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임재와 심판에 대해 ‘계시록 해설’ 414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악한 사람에게는 사망이 있고, 선한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다. (AE.414)
그러니까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생명의 길로,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세에 이루어지는 심판입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인류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심판의 날에 대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까? 34절, 35절입니다.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심판의 날은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며, 그날에는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가 덫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마지막 때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존 교회에 속한 사람이든 새 교회에 속한 사람이든 모두가 각자의 신앙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말씀에서 방탕하고 술에 취하는 것은 자아와 세상에 속한 욕망을 좇는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며,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보다는 세상의 악과 거짓을 생명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본래 말씀에서 마시거나 먹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으로는 의지라는 생명을 만들고, 진리를 가지고는 이성이라는 생명을 만듭니다. 말세에는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닌, 세상 것에 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말하고, 진실을 거짓으로 몰아 공격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내면에 있는 악으로부터 오로지 거짓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방탕하고 술취한 것이며, 지옥이 놓은 덫에 걸려든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런 상태가 되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6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자아의 욕망과 세상 욕망이라는 덫에 걸리면 악의 유혹을 거절할 힘을 잃게 되고, 나중에는 악과 거짓을 즐기게 됩니다. 계시록 6장 16절에서는 그런 사람들의 심판 때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계6:16)
여기서 산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악을 뜻하고, 바위는 그런 악에서 비롯한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악한 사람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두려워하고, 오히려 자아의 악과 거짓에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십니다. 말씀에서는 주님을 인자라고 부르기도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인자라고 할 때는 거룩한 인간이신 주님 안에 있는 진리의 속성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는 주님 안에 있는 선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시험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선으로서의 주님은 대적할 수 없지만, 진리로서의 주님은 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자는 진리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는 것은, 심판 때에 진리와 함께 있음에 기뻐하고 평안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소에 늘 기도하고 깨어 있었던 사람들만이 느끼는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기도하는 것과 깨어 있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기도하는 것은 외적으로 경건한 삶을 뜻합니다. 이를테면 경건한 말과 행동, 기도와 예배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에 비해 깨어 있는 것은 내적으로 경건한 삶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주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것이 신앙인의 정신적 활동이라면 기도는 육신의 활동이며 둘은 언제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혼탁하고 유혹이 많은 시대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에 관한 염려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만 바라보다 보면 금방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일을 할 때도 언제나 주님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에게서 멀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볼 때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의 삶은 신앙인들에게 어떤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주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서 쉬셨다고 합니다. 낮은 진리의 지각이 밝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때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의 외적인 삶은 그때 이루어져야 합니다. 반면에 밤은 진리의 지각이 흐릿할 때입니다. 그때는 말씀을 읽더라도 깨달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럴 때 말을 많이 하거나 왕성한 활동을 하면 실수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때는 조용히 주님께 마음을 모으고 주님의 사랑으로 내면을 채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낮이 되었을 때 더욱 밝은 진리의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서 쉬셨습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이 외적인 경건의 상태이며 기도하시는 상태라면, 감람산에서 쉬시는 것은 내적인 경건의 상태요 깨어 있음의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도 당신의 그런 삶을 따르기를 원하시고, 친히 모범을 보여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이 많고 때로는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주님이 가르쳐주시고 삶으로 보여 주신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둠이 걷히고 혼란한 일들도 정리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말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