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4:22)

 

AC.422

 

이 새 교회가 어땠는지는 유대 교회를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유대 교회는 속(internal)과 겉(external), 그러니까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함께 있었습니다. 천적, 영적인 것들로 구성된 내적 교회와 자연적인 것들로 구성된 외적 교회 말입니다. 내적 교회는 라헬로, 외적 교회는 레아로 표현되었지요. 그러나 야곱으로, 즉 말씀에서 ‘야곱’(Jacob)의 후손으로 이해되는 그들은 외적인 것만을 원하는, 그러니까 예배에서도 겉만 원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래서 라헬에 앞서 레아가 주어진 것이고, 그래서 눈이 침침한 레아로는 유대 교회를, 라헬로는 이방인들의 새 교회를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야곱’은 선지서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요, 하나는 왜곡된, 비뚤어진 상태 가운데 있는 유대 교회를,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의 참된 외적 교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야곱이 내적 교회와 상응할 때는 특별히 ‘이스라엘’(Israel)이라 합니다만,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 나중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How the case was with this new church may be seen from the Jewish church, which was both internal and external; the internal church consisting of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the external church of natural things. The internal church was represented by Rachel, and the external by Leah. But as Jacob, or rather his posterity understood by “Jacob” in the Word, were such as to desire only external things, or worship in externals, therefore Leah was given to Jacob before Rachel; and by blear-eyed Leah was represented the Jewish church, and by Rachel a new church of the gentiles. For this reason “Jacob” is taken in both senses in the prophets, in one denoting the Jewish church in its perverted state, and in the other the true external church of the gentiles. When the internal church is signified, he is called “Israel”; but of these matters,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more will be said hereafter.

 

해설

 

AC.422에서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유대 교회(Jewish church)의 예를 들어, 내적 교회와 외적 교회의 관계를 분명히 합니다. 그는 유대 교회가 겉으로는 하나의 교회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내적 차원(천적, 영적)과 외적 차원(자연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내적 교회는 사랑과 신앙의 내면적 실재로 이루어지고, 외적 교회는 의식, 규례, 행위와 같은 자연적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둘이 결합될 때 교회는 온전해지지만, 겉만 남고 속이 사라질 때, 교회는 형식만 유지하는 상태로 기울게 됩니다.

 

이 내적–외적 구조는 ‘라헬(Rachel)과 ‘레아(Leah)의 표상으로 설명됩니다. 라헬은 내적 교회, 곧 천적, 영적 실재를 대표하고, 레아는 외적 교회, 곧 자연적 예배와 삶의 형식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레아가 먼저 야곱에게 주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당시 교회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섭리적 배열입니다. 곧 사람들은 내적 실재보다 외적 형식과 보이는 예배를 더 원했고, 그 결과 외적 교회가 먼저 서게 된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는 레아를 ‘시력이 약한(blear-eyed, 29:17) 인물로 묘사한 점에 주목합니다. 이는 단순한 외모 묘사가 아니라, 진리를 보는 영적 시야가 흐릿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렇게 레아로 표상된 유대 교회는 외적 예배와 규례에는 열심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신앙의 내적 의미는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라헬은 새 교회, 곧 이방인 가운데 세워질 교회를 표상하는데, 이는 외적 형식이 아닌 내적 실재를 중심으로 세워질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 대조는 ‘야곱(Jacob)이라는 인물의 이중적 의미에서도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언서에서 ‘야곱’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는 왜곡된 상태의 유대 교회, 곧 외적 예배만을 추구한 교회를 뜻하고, 다른 하나는 참된 외적 교회, 곧 이방인 가운데 세워진 교회를 뜻합니다. 같은 이름이 서로 다른 교회를 가리키는 것은, 외적 형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외적 형식이 내적 실재와 결합되어 있는가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스베덴보리는 내적 교회가 강조될 때 야곱은 ‘이스라엘(Israel)로 불린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진리와 선이 내적으로 결합된 상태, 곧 내적 교회가 살아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같은 인물, 같은 공동체라도 내적 실재가 있을 때는 ‘이스라엘’로, 외적 형식만 남았을 때는 ‘야곱’으로 불립니다. 이는 성경의 명칭 사용이 얼마나 정밀한 상응의 질서 위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결국 AC.422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새 교회는 유대 교회의 외적 형식을 단순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적 형식에 내적 실재를 다시 결합시키는 교회입니다. 라헬과 레아는 서로 대립하는 두 교회가 아니라, 한 교회의 두 차원이며, 문제는 순서와 중심입니다. 외적이 먼저 서더라도, 그것이 내적을 향해 열려 있을 때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참된 교회는 언제나 내적 사랑과 신앙을 중심에 두고, 외적 삶과 예배를 그 열매로 삼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함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AC.423, 창4:22, '두발가인이 father가 아닌, instructor인 이유'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3 두발가인을 일컬어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instructor of ev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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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1, 창4: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AC.421-426)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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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4:22)

 

AC.421

 

‘씰라’(Zillah)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the mother of the natural things of the new church)와, ‘두발가인,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와 상응합니다. 여기서 ‘구리’(brass)는 자연적 선을, ‘쇠’(iron)는 자연적 진리를 가리킵니다. ‘나아마, 두발가인의 누이’(Naamah, the sister of Tubal-Cain)는 유사한 교회, 즉 그 교회 밖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a similar church, or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outside of that church)와 상응합니다. By “Zillah” is signified, as previously stated, the mother of the natural things of the new church; by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brass” denoting natural good, and “iron” natural truth. By “Naamah, the sister of Tubal-Cain” is signified a similar church, or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outside of that church.

 

해설

 

AC.421에서 스베덴보리는 ‘씰라(Zillah)를 새 교회에서 자연적 차원의 어머니로 규정합니다. 앞서 아다가 천적인 것(사랑의 거룩함)과 그로부터 나온 선을 낳는 어머니였다면, 씰라는 그 사랑과 신앙이 자연계의 삶과 행위 속으로 내려와 구체화되는 차원을 낳는 어머니입니다. 이는 새 교회가 내적 차원(천적, 영적)에만 머무르지 않고, 일상의 판단, 행위, 도덕, 질서로까지 확장됨을 뜻합니다. 교회는 마음과 생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연적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Tubal-Cain)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장인과 기술을 물질문명의 진보로 보지 않고,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의 형성으로 해석합니다. ‘구리(brass, )는 성경 전반에서 자연적 선을, ‘(iron, )는 자연적 진리를 표상합니다. 자연적 선이란 외적 삶에서 실천되는 선한 행위와 유익함이며, 자연적 진리란 그 행위를 올바르게 인도하는 도덕적, 합리적 진리입니다. 두발가인이 ‘스승(instructor)으로 불린 것은, 이러한 선과 진리가 무질서한 관습이 아니라 가르쳐지고 전수되는 교리의 형태로 정착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구분이 나타납니다. 자연적 선과 진리는 천적, 영적 선과 진리의 단순한 복제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더 거칠고, 더 외적이며, 감각과 경험에 가까운 형태를 띱니다. 그러나 새 교회에서는 이 자연적 차원조차도 천적 사랑과 영적 신앙에서 내려온 질서 안에 놓입니다. 두발가인이 놋과 철을 다룬다는 표현은, 인간의 외적 삶이 선과 진리라는 재료로 형성되고 단련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즉, 자연적 삶 역시 교회의 일부로 회복됩니다.

 

또한 두발가인의 누이로 소개되는 ‘나아마(Naamah)는, 그 교회 밖에 있는 유사한 교회, 혹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표상합니다. ‘누이(sister)라는 표현은 동일한 본질을 지니되, 직접적인 계보 안에는 속하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새 교회 밖에서도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가르침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대목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교회가 아닌 곳에도 도덕, 정직, 질서, 유익함에 관한 참된 가르침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들 역시 자연적 차원에서는 진리와 선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유사성’과 ‘동일성’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나아마로 표상된 교리는 새 교회와 유사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리는 천적 사랑과 영적 신앙으로부터 직접 흘러내린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이성과 경험의 차원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이’로 불린 것은, 그러한 교리들 역시 주님의 섭리 안에서 교회와 접촉하고 연결될 수 있는 여지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결국 AC.421은 새 교회의 구조가 천적(아다)–영적(야발, 유발)–자연적(씰라, 두발가인)으로 온전히 갖추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사랑과 신앙의 내적 차원에서 시작되어, 자연적 삶의 선과 진리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이 자연적 차원은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나, 참된 생명은 언제나 위로부터 내려오는 질서 안에서만 온전히 유지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새 교회가 결코 관념적이거나 내면에만 머무는 종교가 아니라, 삶 전체를 형성하는 전인적 질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AC.422, 창4:22, '아다와 씰라, 라헬과 레아, 유대 교회의 속과 겉'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2 이 새 교회가 어땠는지는 유대 교회를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유대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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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창4:21, '말씀에 나오는 다양한 악기들이 가지는 상응'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 말씀에는 다양한 악기들이 나오는데요, 저마다 나름의 상응을 가지지요. 이 저마다의 상응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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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4:21)

 

AC.420

 

말씀에는 다양한 악기들이 나오는데요, 저마다 나름의 상응을 가지지요. 이 저마다의 상응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를 따라 적절한 데서 보시게 됩니다. 여기선 단지 시편에 언급된 것들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In the Word mention is made of various instruments, each having its own signification, as will be shown, of the Lord’s Divine mercy, in its proper place; here however we shall adduce only what is said in David: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27:6) I will sacrifice in the tent of Jehovah sacrifices of shouting, I will sing, yea, I will sing praises unto Jehovah, (Ps. 27:6)

 

여기 ‘장막’(tent)은 천적인 것을, ‘즐거운’(shouting), ‘노래하며’(singing), 그리고 ‘찬송하리로다’(singing praises)는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걸 표현합니다. 계속해서 where by “tent” is expressed what is celestial, and by “shouting,” “singing,” and “singing praises,” 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Again:

 

1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2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3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4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33:1-4) Sing unto Jehovah, O ye righteous, for his praise is comely for the upright; confess ye to Jehovah on the harp, sing unto him with the psaltery, an instrument of ten strings. Sing unto him a new song, play skillfully with a loud noise; for the Word of Jehovah is right, and all his work is in the truth, (Ps. 33:1–4)

 

신앙의 진리들을 가리키는데요, 다음은 그 내용입니다. denoting the truths of faith, concerning which these things are said.

 

[2] 영적인 것들, 즉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은 하프와 수금 및 노래와 비슷한 악기들을 가지고 축하한 반면, 신앙의 거룩한 것들, 곧 천적인 것들은 관악기, 그러니까 트럼펫 같은 걸로 축하했는데요, 이것이 성전에서, 그리고 왜 그렇게나 자주, 그렇게나 많은 악기가 사용되었는지 하는 이유, 즉 이런저런 주제를 해당 특정 악기로 축하하기 위해서였으며, 그 결과 ‘아, 이런 주제를 축하하기 위해 이런 악기를 선택한 것이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Spiritual things, or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the harp and psaltery, with singing and analogous instruments, but the holy or celestial thing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wind instruments, such as trumpets and the like; and this was why so many instruments were used about the temple and so often, in order that this or that subject might be celebrated with certain instruments; and in consequence of this the instruments came to be taken and understood for the subjects that were celebrated with them.

 

[3] 계속해서 Again:

 

2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23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71:22, 23) I will confess to thee with the psaltery, even thy truth, O my God; unto thee will I sing praises with the harp, O thou holy one of Israel; my lips shall sing when I sing praises unto thee, and my soul which thou hast redeemed, (Ps. 71:22–23)

 

여기 또한 신앙의 진리들과 상응하는 내용입니다. 계속해서 where also the truths of faith are signified. Again: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147:7) Answer to Jehovah in confession, sing praises upon the harp unto our God; (Ps. 147:7)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에 관한 것이고, 그래서 그 언급에 ‘여호와’(Jehovah)가 나오는 것이며,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sing praises upon the harp)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God)이 나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confession” has respect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 therefore mention is made of “Jehovah”; and to “sing praises upon the harp” has reference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wherefore “God” is spoken of. Again: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149:3) Let them praise the name of Jehovah in the dance, let them sing praises unto him with the timbrel and harp, (Ps. 149:3)

 

여기 ‘소고’(timbrel, 탬버린)는 선에, ‘수금’(harp)은 진리, 곧 그들이 찬양하는 진리에 각각 상응합니다. where the “timbrel” signifies good, and the “harp” truth, which they praise.

 

[4] 계속해서 Again:

 

3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150:3-5) Praise God with the sound of the trumpet; praise him with the psaltery and harp; praise him with the timbrel and dance; praise him with stringed instruments and the organ; praise him upon the loud cymbals; praise him upon the cymbals of shouting. (Ps. 150:3–5)

 

이 악기들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모두 찬양에 관한 여러 주제였습니다. 굳이 이렇게 죽 나열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각각의 악기들이 무슨 저마다 구별되는 상응 없이도 이렇게 쓸데없이 언급되었다고 믿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계속해서 다음은 선과 진리의 지식에 관한 언급입니다. These instruments denote the goods and the truths of faith which were the subjects of praise; for let no one believe that so many different instruments would have been here mentioned unless each had a distinct signification. Again, referring to the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3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43:3, 4) O send out thy light and thy truth, let them lead me, let them bring me unto the mountain of thy holiness, and to thy habitations, and I will go in to the altar of God, unto God, the gladness of my exultation; yea, I will confess unto thee upon the harp, O God, my God. (Ps. 43:3, 4)

 

[5] 이사야에서는, 신앙과 그 지식에 속한 것들을 언급하면서 In Isaiah, referring to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and the knowledges thereof:

 

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23:16) Take a harp, go about the city, play well, sing many songs, that thou mayest be called to remembrance. (Isa. 23:16)

 

같은 내용이 계시록에서는 좀 더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The same is expressed still more plainly in John: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5:8) The four animals and the four and twenty elders fell down before the lamb, having every one of them harps, and 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 which are the prayers of the saints, (Rev. 5:8)

 

여기서 분명한 건, 생물들과 장로들이 가진 건 거문고가 아니라 ‘거문고’(harps)가 상응하고 있는 신앙의 진리들과, 그리고 ‘향이 가득한 금 대접’(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이 상응하고 있는 신앙의 선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시편에서는 악기 연주를 일컬어 ‘찬송’(praises)과 ‘감사함’(confessions)이라 하고 있습니다. where it must be evident to everyone that the animals and elders had not harps, but that by “harps” are signified the truths of faith, and by “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 the goods of faith. In David the performances on the instruments are called “praises” and “confessions.” (Ps. 42:5; 69:3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5)

 

30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31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69:30, 31)

 

계시록 또 다른 데서는 And in another place in John:

 

2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3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14:2, 3) I heard a voice from heaven as the voice of many waters, and I heard the voice of harpers harping with their harps, and they sang a new song. (Rev. 14:2–3)

 

계속해서 또 다른 데서 And in another place: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15:2) I saw them standing by the sea of glass having the harps of God. (Rev. 15:2)

 

다음 사실도 말씀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천사들과 영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자신들의 차이점을 따라 소리를 구분하는데요, 노래와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뿐 아니라 목소리에서 나오는 소리로도 구별합니다. 그들은 조화를 이루는 소리만 받아들이는데요, 그렇게 해서 소리의 일치, 그리고 그 결과 악기의 일치가 있게 됩니다. 선과 진리의 본성(nature)과 본질(essence)을 유지하면서 말이지요. It is worthy of mention that angels and spirits distinguish sounds according to their differences with respect to good and truth, not only those produced in singing and by instruments, but also those of voices; and they admit none but such as are in accord, so that there may be a concord of the sounds, and consequently of the instruments, with the nature and essence of the good and the true.

 

 

해설

 

AC.420에서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악기들이 결코 우연적이거나 장식적인 요소가 아니라, 각각 서로 다른 영적 실재를 표상하고 있음을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먼저 다윗의 시편(27:6)을 인용하여, ‘여호와의 장막(the tent of Jehovah)에서 드려지는 제사와 노래를 통해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별을 제시합니다. ‘장막(tent)은 사랑의 거룩한 것, 곧 천적인 영역을 표상하고, 그 장막 안에서 터져 나오는 ‘즐거운(shouting), ‘노래하며(singing), ‘찬송하리로다(singing praises)는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의 영적인 표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근원이 되고, 신앙의 진리와 선은 그 사랑을 노래로 표현하는 결과가 됩니다.

 

시편 33편에서 ‘수금(harp), ‘비파(psaltery), ‘새 노래(new song), ‘즐거운 소리(loud noise)가 언급되는 것은, 예배의 풍성함을 단순히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백되고 찬양됨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특히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the Word of Jehovah is right)라는 구절과 함께 음악이 언급되는 점에서, 이 악기들은 신앙의 진리와 그 질서를 표상합니다. 즉, 악기는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진리와 선이 조화롭게 배열된 상태를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중요한 구분을 합니다. 현악기와 노래는 주로 영적인 것들, 곧 신앙의 진리와 선을 기념하는 데 사용되었고, 나팔과 같은 관악기는 천적인 것들, 즉 사랑의 거룩함을 기념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 때문에 성전 예배에는 매우 다양한 악기들이 사용되었으며, 각각의 악기는 기념되는 주제에 따라 선택되었습니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나면서 악기 자체가 곧 그것으로 기념되던 영적 실재의 표상으로 인식되게 되었습니다. 이는 상응의 질서가 예배 문화 속에 깊이 스며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시편 71편과 147편에서는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confess to thee with the psaltery),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sing praises upon the harp)는 표현이 반복되는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여호와(Jehovah)와 ‘하나님(God)이라는 명칭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여호와’는 사랑의 천적인 것을 가리키고, ‘하나님’은 신앙의 영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고백(confession)이 여호와를 향할 때는 천적인 것을, 수금으로 노래하며 하나님께 찬송할 때는 영적인 신앙의 진리와 선을 의미합니다. 이 미묘한 구분은 성경 언어가 얼마나 정밀한 상응의 체계 위에 놓여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시편 149편과 150편은 이러한 구조를 극적으로 확장합니다. ‘소고(timbrel), ‘(dance), ‘수금(harp), ‘현악(stringed instruments), ‘퉁소(organ), ‘큰 소리 나는 제금(loud cymbals), ‘높은 소리 나는 제금(cymbals of shouting)까지 나열되는 것은, 예배의 흥을 돋우기 위한 장황한 수사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모든 종류가 주님을 찬양하는 상태를 총체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만일 각각의 악기가 서로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성경이 이렇게 많은 악기를 굳이 구분하여 언급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의 모든 세부가 의미 없는 장식이 아님을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이사야 23장과 시편 43편에서도 수금은 신앙의 진리, 빛과 진리는 영적 인도를 표상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이르면 이 상징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four animals and the four and twenty elders)가 각기 ‘수금(harps)을 들고 있으며, ‘향이 가득한 금 대접(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을 가진 장면은, 문자 그대로 천상 존재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향을 들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수금은 신앙의 진리, 향은 신앙의 선, 곧 체어리티의 기도를 표상합니다. 이는 상응을 모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으로 매우 중요한 증언을 덧붙입니다. 천사들과 영들은 소리를 단순한 음향으로 듣지 않고, 그 소리 안에 담긴 선과 진리의 성질에 따라 즉각적으로 분별합니다. 노래의 음성, 악기의 울림, 말의 소리까지도 그 배후의 영적 상태에 따라 받아들여지며, 선과 진리에 합당하지 않은 소리는 자연스럽게 배제됩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언제나 소리의 조화, 곧 선과 진리의 조화가 있으며, 이 조화가 곧 하늘의 질서입니다.

 

결국 AC.420은 음악과 악기가 단순한 예배 도구가 아니라, 천적인 사랑과 영적인 신앙이 어떻게 표현되고 결합되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표상임을 밝혀 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악기 하나하나는, 교회와 인간 내면에서 사랑과 신앙이 울리는 방식을 드러내는 상응의 언어이며, 이를 통해 말씀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AC.421, 창4: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AC.421-426)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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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9, 창4:21, '영적인 것' - 신앙의 진리와 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9 천적인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 인한 선이듯, 영적인 것은 신앙의 진리와 선입니다. 참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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