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4:14)

 

AC.385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은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됨을,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hid from thy faces)는 사랑의 신앙의 모든 선(all the good of faith of love)으로부터 분리됨을,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는 무엇이 참이요 선인지를 모르는 것을,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을 의미합니다. To be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faith of love;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signifies that all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해설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은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됨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성경의 ‘(ground)은 단순한 자연적 토양이 아니라, 교회의 진리가 뿌리를 내리는 영적 기반을 상징합니다. “지면”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속 사람의 영역을 뜻하고,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말은 진리와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 즉 교회의 외적 형태는 남아 있어도 그 안에서 길을 잃어 진리의 빛을 더 이상 인지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가인은 사랑, 곧 체어리티 없이 신앙만을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진리의 토대에서도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으로부터 분리됨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AC 전반에서 항상 “하나님의 선(특히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즉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숨겨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숨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체어리티를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선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선에 대한 지각(good perception)의 상실”이라 부르며, 이는 영적 생명력을 잃어가는 가장 명백한 징후라고 설명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모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단절”로 풀이합니다. 속 사람(내적 의지)에서 오는 선의 인도함이 없으므로, 사람이 무엇이 올바른지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지식은 남아 있지만 그 지식이 방향성을 잃어 무작위로 흩어지며, 신앙의 진리들은 더 이상 길을 안내하는 빛이 되지 못한 채 고립된 정보처럼 남아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방랑”입니다.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가인이 사랑과 선을 잃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진리를 보호할 내적 힘이 없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만나는 자들”을 외부의 사람이나 존재가 아니라, “가인의 내적 상태에서 생겨난 왜곡된 신앙, 잘못된 개념들, 자기모순, 내적 거짓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사랑이 없는 신앙은 자기 내부에서 발생하는 악과 거짓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를 갖게 됩니다. 선이 없는 진리는 생명력을 잃고, 생명력을 잃은 진리는 악과 거짓의 공격 앞에서 방어할 힘이 없습니다.

 

결국 AC.385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없이 분리된 신앙은 교회의 진리와 선에서 분리되고, 그 결과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며, 자연스럽게 자신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의 힘에 의해 붕괴되는 운명에 놓인다.’ 이 말은 하나님이 가인을 벌하신 것이 아니라, ‘가인이 사랑을 잃음으로써 스스로 그런 상태에 들어간 것’임을 밝혀 주는 중요한 아르카나입니다.

 

 

 

AC.386,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 ‘이 지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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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4, 창4: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AC.383-384)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 그런 걸 보면, 가인 안에 아직 뭔가 선한 것이 남아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은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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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4:13)

 

AC.384

 

그런 걸 보면, 가인 안에 아직 뭔가 선한 것이 남아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은 사라졌는데, 그건 뒤에 나오는 라멕이 한 말을 보면 분명합니다. 19절하고, 23, 24절입니다. Hence it appears that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 in Cain; but that all the good of charity afterwards perished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Lamech (verses 19, 23–24).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19, 23-24)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라고 고백한 사실을 통해, 가인 안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선의 흔적(리메인스)’이 남아 있었다고 말합니다. 사랑(체어리티)을 이미 억압하고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인식하고 고통을 느끼는 것 자체’가 그 안에 ‘미세한 선(어떤 최소한의 선한 감수성)’이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이 남아 있던 선도 결국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후 등장하는 ‘라멕(19, 23–24)에 대한 묘사 때문입니다. 라멕은 가인의 계열이 도달한 ‘최종적 타락 상태’를 대표하는 인물로,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사라지고, 신앙의 진리마저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왜곡으로 변질된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AC.384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가인(사랑을 잃은 신앙) 안에는 처음에는 아주 약한 선이 남아 있었으나, 그 선이 보존되지 못하고 결국 후손(라멕)의 시대에 이르러 ‘체어리티의 선이 완전히 사라진 교회의 상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AC.385,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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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3, 창4: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AC.383-384)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자기가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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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4:13)

 

AC.38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자기가 악 가운데 있었다는 어떤 고백을, 이 고백은 무슨 내적 고통(internal pain)으로 나온 것입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는 그로 인한 절망(despair)을 의미합니다. Cain said unto Jehovah” signifies a certain confession that he was in evil, induced by some internal pain;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signifies despair on that account.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는 구절을 매우 깊은 영적 장면으로 해석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대화를 나누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어떤 ‘자백(confession)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진리(신앙)가 사랑(체어리티)을 떠나 버린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내적 통증(internal pain)에 의해 일어난 고백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가인이 아직 회개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체어리티라는 사랑을 죽인 신앙”이라는 자신의 상태를 처음으로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의식을 “고통을 동반한 자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고통은 외적 형벌의 두려움이 아니라 ‘영적 생명(아벨)이 사라진 데서 오는 내적 비어 있음’이며, 이것이 가인으로 하여금 여호와 앞에 입을 열게 만든 것입니다.

 

이어서 가인은 말합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단순히 죄책감의 표현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 말은 ‘절망(despair)을 뜻합니다. 즉, 자신의 상태가 너무 깊이 무너져서 ‘하나님께 돌아갈 길이 없다고 느끼는 영적 절망감’입니다.

 

여기에는 사랑 없이 존재하려는 신앙의 비극적 논리가 나타납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은, 하나님과의 연결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기 존재의 토대가 무너졌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순간 인간은 하나님께 버려졌다고 느끼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실제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체어리티라는 사랑을 잃어 하나님을 인식할 능력을 스스로 차단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절망은 신앙의 붕괴라기보다, 사실은 ‘회복의 첫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절망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보게 되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AC.383은 바로 이 점을 드러냅니다. 가인의 고백은 아직 회개는 아니지만, ‘하나님을 향한 첫 미세한 움직임’, 즉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리는 ‘영적 통증의 인정’입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움직임을 통해 회복의 길을 여시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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