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의 모든 것, 곧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요소들, 그러니까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그 안에 그런 것들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거의 돌보아지지 않는 상황이지요. 그러나 말씀의 성격이 본래 이러하다는 사실은 단 한 가지 사실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인 것이, 곧,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그 안에는 천국과 교회, 그리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라 불릴 수 없고,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요. 말씀의 생명은 오직 생명에 속한 것들에서만 옵니다. 즉, 그 안의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생명이신 주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말씀 중 어떤 표현이든 그 안에 주님을 품고 있지 않은 것, 곧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분을 가리키지 않는 것은 ‘신성하다’(Divine) 할 수 없습니다. The Christian world, however, is as yet profoundly unaware of the fact that all things in the Word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nay, 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 signify and enfold within them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nd therefore the Old Testament is but little cared for. Yet that the Word is really of this character might be known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being the Lord’s and from the Lord it must of necessity contain within it such things as belong to heaven, to the church, and to religious belief, and that unless it did so it could not be called the Lord’s Word, nor could it be said to have any life in it. For whence comes its life except from those things that belong to life, that is to say, except from the fact that everything 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so that anything which does not inwardly regard him is not alive; and it may be truly said that any expression in the Word that does not enfold him within it, that is, which does not in its own way bear reference to him, is not Divine.  

 

 

해설

 

스베덴보리는 이 단락에서 기독교 세계가 아직도 거의 알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그것은 말씀의 모든 요소—큰 구조에서 작은 세부, 심지어 가장 미세한 철자 하나(iota)에 이르기까지—모두가 영적·천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안에 그것들을 내포한다는 진리입니다. 문자만 보면 구약은 고대 유대교의 율례와 역사로 보이기에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을 경시하거나 덜 중요한 책으로 취급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관점이 말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오해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그 안에는 필연적으로 하늘과 교회, 그리고 신앙에 속한 것—즉 영원한 생명과 직결되는 실체들—이 담겨 있어야 하고, 만일 그것이 없다면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이라 부를 수도,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생명은 어디서 오는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나오므로, 말씀 안의 모든 것이 내적으로 주님을 바라볼 때만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각 구절, 단어, 표현 하나라도 주님을 향한 내적 의미를 담지 않으면 신적이라고 할 수 없고,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는 죽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이는 스베덴보리가 앞선 글에서 말한 “문자주의의 한계”를 더욱 분명히 하면서, 왜 말씀의 내적 의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를 신학적 논리로 정초(定礎)하는 설명입니다. 곧, 말씀은 본질적으로 ‘주님을 담은 책’이며,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부분은 더 이상 영적 효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을 덜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문자적 이해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면, 스베덴보리는 그 시각을 뒤집어 “바로 그 문자 너머에 천국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구약은 더없이 중요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생명은 신학적 사유나 학문적 연구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 시야가 열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상태에서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Arcana Coelestia 전체가 이 감추어진 생명—말씀 속에 감추어진 주님—을 밝히 드러내기 위한 작업임을 이 단락을 통해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육체와 영' (AC.1-5)

본문AC.3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말씀은 글자(letter)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상태는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알고 있듯이, 사람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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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을 시작하며' (AC.1-5)

본문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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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리고 그와 연결된 모든 걸 가리킨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 곧 겉 글자만으로는, 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저 유대교회의 외적 의식들과 규례들만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실상은 그 말씀 전체 곳곳에는 외적인 것들, 곧 그런 겉 글자 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어떤 내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다만 극히 일부만이 주님에 의해 사도들에게 드러나고 설명되었을 뿐인데요, 예를 들면, 희생 제사들은 주님을 상징하며,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천국을 상징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천국의 가나안’, ‘하늘의 예루살렘이라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낙원도 그렇고요. From the mere letter of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no one would ever discern the fact that this part of the Word contains deep secrets of heaven, and that everything with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to his heaven, to the church, to religious belief, and to all things connected therewith; for from the letter or sense of the letter all that anyone can see is that—to speak generally—everything therein has reference merely to the external rites and ordinances of the Jewish church. Yet the truth is that everywhere in that Word there are internal things which never appear at all in the external things except a very few which the Lord revealed and explained to the apostles; such as that the sacrifices signify the Lord; that the land of Canaan and Jerusalem signify heaven—on which account they are called the heavenly Canaan and Jerusalem—and that paradise has a similar signification.

 

 

해설

 

구약의 글자적 의미만으로는 그 안에 하늘의 비밀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볼 수 없다는 스베덴보리의 진술은, 말씀의 두 층위—겉의 문자와 속의 내적 의미—사이의 극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구약은 유대 교회의 의식, 규례, 제사, 절기 등 외적 종교 형식에 관한 책으로만 보입니다. 독자는 그 안에서 주님에 관한 것, 천국의 질서, 교회의 본질, 신앙의 실제, 영적 삶의 내면 구조를 발견할 단서를 거의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런 점이 말씀의 신적 성격을 증명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인간의 문헌이 아니라, 신성한 생명을 품은 계시이므로, 그 속에는 반드시 천국의 것들—주님, 그의 왕국, 교회, 신앙, 영적 삶—이 담겨 있어야 하며, 그것이 없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내적 의미가 ‘글자’라는 외적 옷 안에 완전히 감추어져 있어서, 주님이 직접 일부를 드러내신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제사가 주님을 의미한다”,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이 천국을 의미한다”, “낙원이 천적 상태를 의미한다”라고 밝히신 것은 내적 의미의 ‘조각들’에 해당하지만, 전체 구조는 여전히 은폐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주장하는 핵심은, ‘말씀은 본래부터 이중 구조를 가진 신적 책이며, 문자만 보면 인간, 역사, 의식 규례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하늘의 실체—주님과 인간 거듭남의 모든 질서—가 완전한 체계를 이루며 침잠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내적 의미가 직접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영적 상태가 되지 않으면 그것을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말씀을 참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자에서 내적으로, 역사에서 영적으로, 사건에서 주님을 향한 내적 질서로 들어가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결국 이 글은, “말씀 전체가 천국을 품고 있다”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핵심 명제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며, Arcana Coelestia 전권이 왜 ‘하늘의 비밀(arcana)을 풀어내는 작업인지 설명하는 서문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 서문, '말씀은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들이 들어 있다' (AC.1-5)

본문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의 모든 것, 곧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요소들, 그러니까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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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기존 교회, 그러니까 천주교든 개신교든, 더 나아가 정교회든 다니시던 분들이 우리 교회를 다니겠다 하시면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된 저와 저희 교인들이 조심하고, 또 지혜롭게 행해야 할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적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 공동체가, 기존 교회 출신 성도들을 어떻게 지혜롭고 안전하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매우 실제적이고 깊은 목회적 질문입니다. 천주교 · 개신교 · 정교회 등 전통 교회 출신 성도들이 새로 오게 되면, 그분들이 느낄 수 있는 심리적 충격, 익숙한 언어 체계의 변화, 기존 교회와의 갈등 불안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아래는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 교회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핵심 항목들을 매우 실천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안전지대(Safe Zone)를 먼저 만들어라

 

기존 교회에서 오시는 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감정은 이질감입니다. 따라서 첫 단계는 너무 낯설지 않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가령, 익숙한 용어를 우선 존중하기 같은 건데요, 보통 하나님에 익숙하신 분들에게 주님을 강조한다든지, 성경 말씀말씀(Word)이라고 은근히 구별하신다든지, 그 밖에도 은혜’, ‘믿음’, ’성령’, ‘십자가 등, 그분들에겐 매우 익숙한 이런 용어들을 억지로 스베덴보리식으로 바로 바꾸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의 언어를 먼저 허용해야 마음이 열립니다. 하나 더 살펴보자면, 기존 교회의 신앙고백을 부정하는 듯한 표현 금지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스베덴보리가 더 깊습니다라든지, “기존 교회는 피상적입니다와 같은 이런 말은 절대 금물입니다. 사람은 기존 신앙의 명예를 건드리면 마음을 닫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개종(Secondary Conversion) 을 강요하지 말라

 

다른 교회 출신 분들에게 무심코 하는 가장 위험한 실수는, 이제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말씀하신 이 모든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같은 분위기를 직, 간접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분들의 기존 신앙을 부정하는 듯한 태도 대신, 기존에 믿으신 것 위에 덧붙여,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는 차원으로 안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도 새 신앙을 요구하지 않았고, 단지 기존 신앙의 내적(內的) 이해를 열어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존 신앙이 말씀의 이쪽 면만 보았다면,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통해 말씀의 저쪽 면도 보게 한 것이지요. 마치 사람을 영과 육, 육과 영, 양쪽 면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심한 교리 충돌 관리가 필요함

 

기존 교회 출신이 가장 충격받는 지점이 교리의 충돌입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이해라든지 대속론이나 지옥 이해, 죽음 후 즉시 심판/부활, 천국과 지옥의 구조나 예배, 성례전, 재림 이해 등인데요, 이 차이를 절대 한 번에 좌악 꺼내시면 안 됩니다. 그러지 마시고, 먼저 공통분모를 말해준 다음, 이런 차이는 있지만, 그러나 충돌하는 게 아니라는 설명과 함께, 나중에 내적 의미와 구조를 조심스럽게 소개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도 처음에 이랬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세심하고 따뜻한 맞춤식 보살피심을 통해 우리도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존 교회에 대한 존중의 톤을 확실히 유지하기

 

천주교, 개신교, 정교회, 루터교 등 모두 주님 안에서 존재하는 교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허락, 인도하심으로 생겨난 교회들이라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들을 비판보다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 내에서도 다른 교회는 다 틀렸다라든지 스베덴보리가 더 우월하다, 혹은 이제는 제대로 믿자 같은 이런 말들이 나오지 않도록 잘 지도해야 합니다. 새로 오신 분들의 마음은 존중 → 평안 → 신뢰 → 배우려는 마음이라는 순서로 열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내 편을 만드는 게 아니라 말씀의 다른 편을 볼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입니다.

 


새 신자 교육은 삼중 구조로 운영해야 함

 

기존 신앙을 부정하지 않는 설교

 

예를 들면, 창세기 해설이나 산상수훈, 혹은 시편 등 기존 개신교, 천주교와 크게 갈등 없는 본문들 위주로 설교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점진적 스베덴보리 소개

 

스베덴보리 교회이니 스베덴보리에 대한 소개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때 영적 세계나 말씀의 내적 의미, 즉 속뜻, 선과 진리의 결합이나 인간, 자유, 양심 등, 이런 부분은 기존 신앙과 충돌이 거의 없으므로 먼저 소개하기 좋습니다.

 

고급 교리 교육은 사적, 개별적으로

 

좀 깊고 무거운 주제들, 가령 대속론 이해라든가 부활과 심판, 동일 인격과 영적 인격, 결혼의 속뜻 같은 이런 주제는 3~6개월이나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사적으로, 혹은 전체 프로그램 가운데 특별반 같은 걸 만들어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참고로, 여기 동일 인격이란 사람은 사후에도 생전의 모든 것, 즉 성격, 애정, 사고 구조 등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생전과 사후의 인격이 동일해야 상벌이 가능합니다.

 


기존 교회 배경 성도들의 감정을 이해해야 함

 

기존 교회 출신은 종종 이런 마음입니다. 여기가 너무 좋아. 하지만 내 신앙 전부가 뒤집히는 건 아닐까? 같은 마음 말이죠그러므로 목회자와 선배 성도들의 역할은, 천천히 오셔도 되요. 급할 것 없습니다라든지, 기존 신앙도 귀하지요. 주님도 그 신앙으로 당신을 여기까지 인도하셨잖아요? 우리는 그 위에 더 풍성한 것을 드릴 뿐이에요, 혹은 무엇이든 편하게 물어보셔요 와 같은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항상 잘 모르겠을 땐, 나는 처음 왔을 때 어땠나를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교인들의 언행을 세심하게 지도해야 함

 

스베덴보리 전통은 지식적 깊이 때문에 기존 교회 출신에게 우월감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표현을 금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그건 내적 의미로 보면 달라요”, 원래 이 구절의 참뜻은 …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읽으면 이런 오해는 없어집니다” 같은 표현들인데요, 이런 말은 상대방에게 “나는 그동안 잘못 믿어왔다”라는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 구절을 이런 시각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나 새로운 관점이 조금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처럼 겸손한 태도가 수반되어야 함을 지도하셔야 합니다.

 


일상 신앙에서 먼저 신뢰를 얻게 해야 함

 

기존 교회 출신은 새로운 교리에 대해선 아직 조심스러워도 사람들의 삶과 사랑의 분위기를 보고 마음을 엽니다. 예를 들면, 교인끼리의 친절과 진리 사랑뒷말이 없는 공동체말씀이 중심에 있는 예배기도와 말씀 생활의 균형겸손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와 같은 이런 것에서 먼저 감동합니다. 삶의 향기 → 교리에 대한 신뢰 → 마음의 개방이라는 이런 흐름이 필수적입니다.

 


기존 교회와의 갈등을 절대 유발하지 않도록 지도

 

새로 오시는 분이 기존 교회와 갈등하면 그분도 상처받고, 우리 교회도 오해받습니다. 따라서 기존 교회를 헐뜯는 발언이라든지, 이제 그 교회 가지 마세요” 같은 말, 그리고 기존 목회자를 비판하는 태도 등은 금지하셔야 합니다. 모두가 기억하셔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적 영성은 부정적 결별이 아니라 긍정적 성숙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 교회의 본질은 포용임을 기억하기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각 사람을 그가 알고 있는 진리의 경로 안에서 이끄십니다. 따라서 다른 교단에서 오시는 분들을 그들이 믿어온 길에서 부정하거나 뜯어고치려 들지 말고, 그 길을 더 깊고 더 밝게 해주면 됩니다. 스베덴보리 교회는 폐쇄적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열린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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