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이단’은 누구인가
교회 안에서 ‘이단’이라는 말은 매우 무겁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이단으로 규정되면 그 순간부터 그가 하는 말은 거의 들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 심지어 영원한 구원까지 이미 판정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교회가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하고 성도들을 위험한 교리로부터 보호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진리와 거짓은 아무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느냐, 인간과 죄와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방향과 삶이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착하게만 살면 된다’고 말하는 것도 스베덴보리의 관점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교리가 참인가 거짓인가’를 판단하는 것과 ‘그 교리를 가진 사람이 주님 앞에서 어떤 영원한 상태에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고백하는 교리와 외적인 행동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왜 그것을 믿게 되었는지, 어떤 빛을 받았는지, 진리를 알 기회가 얼마나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를 보십니다.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교리적 판정과 주님께서 내리시는 영적 심판 사이에는 우리가 함부로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거짓을 가지고 있는 것’과 ‘거짓을 사랑하는 것’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태어난 환경과 교육, 교단과 문화의 영향으로 잘못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은 그것이 진리라고 진심으로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더 밝은 진리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내면을 단순히 현재의 교리적 오류만으로 판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매우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면서도 진리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보호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신조를 정확히 암송하며, 이단과 정통을 능숙하게 구별하면서도 그 진리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지키고, 자신에게 불리한 진리는 의도적으로 외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문제는 단순히 머릿속에 어떤 문장이 들어 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진리를 무엇을 위해 사용하느냐에 있습니다.
이 점을 잘 보여 주는 사람이 회심 전의 사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버리려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고 교회를 박해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행8:1-3). 훗날 그는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행26:9).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진실하게 믿고 있다는 사실과 그가 진리를 믿고 있다는 사실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야기는 동시에 우리에게 또 하나의 경고를 줍니다. 우리는 회심 전의 사울을 보고 ‘저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했으니 본질적으로 악한 사람이다’라고 최종 판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서 그를 만나셨을 때 사울은 자신의 확신을 내려놓고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잘못이 사소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볼 수 있었던 사울의 외적 모습만으로 그의 최종적인 내면까지 알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울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위험이 드러납니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종교 안에서도 작동합니다. ‘내가 믿는 교리가 참되다’는 고백이 어느 순간 ‘그러므로 나는 옳은 사람이다’로 바뀌고, 다시 ‘나와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내가 옳다는 사실’을 사랑하는 것은 겉으로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진리 쪽으로 움직이려 하지만, 자기의 옳음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조차 자기 입장을 지키기 위해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교리적 오류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짓은 실제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잔인하고 보복적인 분으로 이해하면 사람도 종교적 이름으로 잔인해질 수 있고, 구원을 한 번의 고백으로만 이해하면 거듭나는 삶을 가볍게 여길 수 있으며, 자신이 속한 집단만 하나님께 선택받았다고 믿으면 다른 사람을 멸시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길을 비추는 빛이며, 거짓은 그 길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분별하고 오류를 바로잡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거짓 교리를 가진 사람과 거짓 자체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 가운데 있으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선을 사랑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많은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악한 사랑을 섬기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이 진리를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선을 보고, 그 선을 사랑하며, 실제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진리가 삶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인간의 내면을 온전히 변화시킨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사람에게 붙이는 최종적인 낙인으로 사용하기보다 먼저 나 자신에게 돌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거짓을 가지고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더 깊은 질문은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가?’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나를 더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며 악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내 우월함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을 읽을 때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나는 이제 스베덴보리를 알았으니 기존 교회 사람들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순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마저 종교적 프로프리움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AC와 HH를 많이 읽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천국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깊이 알고, 자신의 악을 더 분명히 보며,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체어리티(charity)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위험한 가르침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면서도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까지 대신 판결해서는 안 됩니다. ‘이 가르침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이 사람은 지옥에 갈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판단입니다. 전자는 우리가 진리를 분별하면서 해야 할 수 있는 일이고, 후자는 사람의 내면 전체를 아시는 주님께 속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어느 교단의 명부에 이름을 올렸는지, 어떤 신조를 정확하게 암송했는지, 사람들에게 정통이나 이단이라는 평가를 받았는지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받은 진리를 어떻게 대했는지, 더 밝은 진리가 왔을 때 받아들이려 했는지, 진리를 이용하여 자신을 높였는지 아니면 진리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는지, 그리고 결국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교리적 오류는 분명히 분별해야 하지만, 한 사람이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영원한 내면까지 우리가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더 깊이 남겨 두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가?’
주님 앞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사람들이 나를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그 진리가 요구하는 선한 삶을 거부하고, 결국 내 자기 사랑을 지키기 위해 진리마저 이용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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