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가 ‘모독(冒瀆, profanation)을 이토록 엄중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죄나 오류가 아니라 ‘인간의 영적 구조 자체를 파괴하여 회복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독이란, 사람이 ‘주님의 진리와 선을 알고 인정하며 어느 정도 믿기까지 한 뒤에, 그것을 삶에서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자기 욕망, 자기 영광, 권력, 이익을 위해 왜곡하여 사용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때 일어나는 가장 심각한 결과는, 인간 안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분리되지 못한 채 강제로 결합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 사람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 곧 선과 진리의 흔적이 저장되어 있고, 겉 사람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악과 거짓이 자리 잡고 있는데, 모독은 이 둘을 억지로 섞어 버립니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은 어느 한쪽으로도 돌아설 수 없는 상태, 즉 선을 완전히 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악으로 완전히 떨어질 수도 없는 ‘내적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영혼이 찢어진다’는 표현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사후 세계에서 그 사람이 극심한 고통과 혼란 속에 놓이게 됨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므로, 선을 사랑하는 부분과 악을 사랑하는 부분이 동시에 활성화되어 서로를 끊임없이 공격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 상태에 놓인 영들은 가장 깊은 불안과 자기혐오, 분노와 절망 속에 머물게 되는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옥 가운데서도 가장 참혹한 상태’라고까지 말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모독이 반복될 경우, 주님께서 인간 안에 보존하신 리메인스 자체가 훼손될 위험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리메인스는 거듭남의 유일한 토대이기에, 이것이 손상되면 주님께서 더 이상 그 사람을 새로운 상태로 인도하실 길이 거의 사라집니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은 사람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상태로라도 머물게 하시고, 심지어는 신앙 자체를 거의 잃게 되는 황폐(vastation)를 허락하시면서까지 ‘모독만은 피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차라리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상태는, 새 빛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알고 믿으면서도 거부하고 뒤섞는 모독의 상태는 그 가능성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독은 단순히 ‘나쁜 죄’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 내적 구조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정적 단절’이며,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듯, 주님께서 모독을 무엇보다 엄중히 금하시고, 역사 전체를 통해서까지 그것을 막으시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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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08

 

하나의 교회가 더 이상 그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지면, 전과 다르게 새로움이 시작, 즉 새 빛이 발(發)하는데요, 말씀에서는 이걸 ‘아침’(morning)이라고 합니다. 이 새 빛, 곧 ‘아침’이 왜 교회가 황폐해질 때까지는 발하지 않는지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동안 신앙과 체어리티의 일들은 모독의 일들과 뒤엉킨 상태로 지내왔는데요, 계속 이런 상태에 있는 한, 무슨 빛이나 체어리티의 일이 시작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잡초들’(tares)이 모든 ‘좋은 씨’(good seed)를 파괴하기 때문이지요. When a church has been so vastated that there is no longer any faith, then and not before, it begins anew, that is, new light shines forth,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morning.” The reason why the new light or “morning” does not shine forth until the church is vastated, is that the things of faith and of charity have been commingled with things profane; and so long as they remain in this state it is impossible for anything of light or charity to be insinuated, since the “tares” destroy all the “good seed.”

 

※ 주님의 비유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13:24-30)

 

그러나 신앙이라는 게 전혀 없으면, 신앙은 더 이상 모독(冒瀆, profaned)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선포된 걸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이며, 시인도 안 하고 믿지도 않는, 대신 알기만 하는 사람들은 위에서 관찰한 것처럼, 모독이라는 걸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가 바로 오늘날 유대인들의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시인하는 주님이 바로 그동안 자기들이 그토록 고대하며 기다려 왔고, 지금도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이 사실을 시인하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실을 모독할 수 없습니다.그리고 주님에 대하여 들은 모하메드인들(무슬림)과 이방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 교회가 아무것도 시인하지도, 믿지도 않을 때까지는 주님이 세상에 오실 수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But when there is no faith, faith can no longer be profaned, because men no longer believe what is declared unto them; and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but only know, cannot profane, as was observed above. This is the case with the Jews at the present day, who in consequence of living among Christians must be aware that the Lord is acknowledged by Christians to be the messiah whom they themselves have expected, and still continue to expect, but yet they cannot profane this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it. And it is the same with the Mohammedans and gentiles who have heard about the Lord. It was for this reason that the Lord did not come into the world until the Jewish church acknowledged and believed nothing.

 

 

해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완전히 황폐(vastation)’되어 더 이상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지며, 이때 비추기 시작하는 새 빛을 성경이 ‘아침(morning)이라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 이유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것이 ‘속된 것과 섞여 있는 상태’, 곧 거룩한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이용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참된 빛이나 사랑도 사람 안에 스며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혼합 상태에서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도, 비유에서 말하는 ‘가라지’가 좋은 씨를 질식시키듯, 참된 신앙과 체어리티가 자라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는 더 이상 신앙을 ‘모독(profanation)할 위험이 없게 되는데, 이는 사람들이 무엇이 참이라고 선언되는지를 알기만 할 뿐, 그것을 인정하고 믿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안다(knowing)는 것과 ‘믿는다(believing)는 것을 엄격히 구분하며, 믿지 않는 사람은 모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원리를 그는 유대인과 무슬림, 그리고 이방인들의 사례로 설명하는데,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으나, 그것을 자신들의 신앙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기 때문에, 그 지식이 거룩한 것을 훼손하는 모독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는 유대교회가 이미 메시아에 대한 참된 신앙을 완전히 상실한 시점, 곧 더 이상 거룩한 것을 모독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일 그 이전에 오셨다면, 그들은 알면서도 왜곡하고 이용함으로써 가장 깊은 모독에 빠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408이 말하는 황폐는 단순한 타락이나 심판이 아니라, ‘새 교회와 새 빛을 가능하게 하는 필연적 정화 과정’입니다. 신앙이 어설프게 남아 있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뒤섞여 있을 때보다, 차라리 신앙이 전무한 상태가 되어 새롭게 주어지는 진리와 체어리티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주님의 빛은 다시 ‘아침’으로 떠오릅니다. 이로써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역사와 개인의 영적 여정 모두에서, ‘완전한 황폐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조건’임을 분명히 하며, 라멕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전환의 신학적 근거를 이 단락에서 결정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AC.409, 창4:19, '라멕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9 시간이 가면서 황폐해진, ‘가인’(Cain)이라 하던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이들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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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7, 창4:19, 라멕의 상태, ‘황폐’(vastation)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7 일반적으로 어떤 교회의 상태는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참 신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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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창세기 족보 구조’, ‘스베덴보리의 표상적 역사 읽기’, 그리고 ‘시간 개념 자체’를 함께 풀어야만 비로소 답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라멕 이후 곧바로 노아가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AC.407의 설명은, ‘창세기 본문의 문자적 시간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내적 상태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겹치는지를 설명하는 영적 서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족보들을 연대기적 역사로 보지 않고, ‘동시에 존재하며 병행했던 영적 상태들의 계보’로 읽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는 ‘앞뒤로 교대하는 한 줄의 역사’가 아니라, ‘같은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두 흐름’입니다. 가인의 계보는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점점 황폐(vastation)에 이르는 흐름’을 표상하고, 셋의 계보는 같은 태고교회 안에서 ‘주님에 의해 보존된 리메인스가 이어지는 흐름’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라멕은 가인의 계보에서 나타나는 황폐의 최종 상태를 상징하지만, 그 시점에 셋의 계보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라멕으로 대표되는 황폐가 극에 달할수록, 그와 병행하여 주님께서 보존하신 작은 핵(nucleus), 곧 리메인스의 중요성은 더욱 커집니다.’

 

이 점에서 노아는 ‘라멕 다음에 새로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 오던 보존된 교회의 대표 이름’입니다. 창5에서 노아가 라멕의 아들로 등장하는 서술은, 자연적 시간 순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존된 리메인스가 이제 더 이상 숨겨진 상태로 머물 수 없고, 새로운 시대의 대표, 표상으로 전면에 나서야 할 시점이 되었음’을 보여 주는 문학적, 표상적 장치입니다. 다시 말해, 가인의 계보가 라멕에서 완전히 황폐되었기 때문에, 그와 병행하여 존재하던 셋의 계보 중에서 ‘노아로 대표되는 흐름만이 다음 시대(홍수 이후의 교회)로 이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라멕 이후 노아’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동시적으로 존재하던 두 흐름 중 하나가 종결되고, 다른 하나가 역사 전면으로 부각되는 전환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창세기 족보가 왜 그렇게 길고 반복적으로 보이는지도 풀립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는 생물학적 기록이 아니라, ‘한 교회 안에서 어떤 영적 성향이 지속되었고, 어떤 성향이 단절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지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라멕에서 노아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AC.407의 서술은, 시간의 점프가 아니라 ‘시대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장면’이며,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가 병행했다는 이전 설명과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설명이 있어야만, 라멕–노아 연결이 정확히 이해됩니다.

 

요약하면, ‘가인의 계보는 황폐의 계보로서 라멕에서 끝나고’, ‘셋의 계보는 보존의 계보로서 노아를 통해 다음 시대를 잇습니다’. 두 계보는 순차가 아니라 병행이었고, 창세기의 서술은 이를 시간의 언어로 배열했을 뿐, 실제 영적 역사에서는 ‘항상 황폐와 보존이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사 이해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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