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가끔(?) 보내드리는 글에 대하여 굳이 이단 대하듯 마음 문을 철컹 닫아걸고 경계하시며, 불편해들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혹시 주님이 말씀하심인가 하시며, 마음을 넓히시길 권합니다. 우리 인생에 주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데, 이런 두 눈을 질끈 감고, 두 귀를 틀어막는 행위는 본의 아니게 주님을 제한하실 수 있어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 제가 보내드리는 글은,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사람의 영 얘기를 한다고 무슨 경계하고 피하고 하지 않는 것처럼, 네, 딱 그렇게만 생각해 주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도저히 와닿지 않으시면 말입니다.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 걸 잘 아는 우리이기 때문인데요, 사람처럼 주님의 말씀 또한 영과 육으로, 그러니까 겉뜻과 속뜻, 속뜻과 겉뜻으로 되어 있음을 저는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주님이 주시는 부담 때문이기도 하고요.
말씀을 기록된 겉 글자의 뜻으로만 읽어온 우리는 내적 존재인 천사들처럼 말씀을 속뜻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신체, 몸에 대해서는 나름 지식이 있지만, 영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치 무지한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겉뜻으로만 읽어도 그 내면,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만 있으면 됩니다. 속 사람의 상태라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여 그 사랑으로 주님 말씀을 실천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이럴 때, 우리 안에 천국이, 그러니까 주님이 임하십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그냥 제 글은, 말씀을 영으로도 읽을 수 있구나, 즉 천사들은 말씀을 이렇게도 읽는구나 정도로만 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힘드시면 말입니다. 괜히 제 글로 시험에 드실 필요는 절대로들 없으십니다. 여기 ‘천사들은 말씀을 이렇게도 읽는구나’에 대해서는 아래글을 참고하세요.
개인적으로 감사한 것은, 점점 더 많은 분의 마음이 오픈, 그러니까 좌우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 말씀에 겉뜻이 있는 것처럼 속뜻도 있었구나!’ 하신다는 것이지요. 참 감사하지요. 저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것 같아서입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6:1-2)
이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the sons of God, the daughters of man)이라는 표현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조금은(?) 알쏭달쏭한 표현입니다. 오늘은 이와 관련한 말씀을 먼저 좀 드리고, 이어 ‘백이십 년’(a hundred and twenty years) 및 ‘네피림’(the Nephilim)에 관하여도 준비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창세기 6장, 특히 1절로 8절은 홍수 전 사람들의 상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요약, 정리되고 있는 아담 교회, 곧 아담(man)으로부터 시작,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에녹(Enoch), 므두셀라(Methuselah), 그리고 라멕(Lamech)을 끝으로 하는, 인류 첫 번째 교회인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는 홍수로 표현된 큰 시프트(shift)를 통해 마감되고, 이후 노아(Noah) 교회, 곧 인류 두 번째 교회인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가 일어납니다.
아, 참고로 늘 말씀드리지만, 창세기 아브람 등장 전까지는 등장하는 이름들이 어느 한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닌, 그 시절 존재했던, 그리고 주도적이었던 교회, 즉 교리를, 신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참고하세요. 고대에는 이런 식의 스토리 텔링, 즉 의인화를 통한 드라마 기법 스피칭을 아주 즐거워했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해선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잠깐 의인화 관련, 재미있는(?) 예로, 창3:26,‘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에 나오는‘그룹들’(cherubim)을 들 수 있는데요, 겉 글자의 뜻에 익숙한 우리는 그룹들을 다른 좀 특별한 천사들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룹은 사실은 주님의 섭리(the providence of the Lord), 곧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그래서 다시 창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상태로 돌아간, 그런 인간이 더 이상 거룩한 주님 신앙과 관련된 것들 안으로 다시 들어오는 걸 일체 금하시는, 그래서 비록 안타까운 상태로 돌아갔지만, 더 악화되지 않도록 인간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의미하며, 그것을 이렇게 아주 멋지게 의인화하여 표현하신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 지상에 머물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걸 잃어버린, 노아 이후 지금까지 우리 인류는 이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 무슨 말로도 설명이 안 되고, 또 설령 그 어떤 말로 설명을 한다 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 그저 관련 글을 읽고, 여러 해 고민, 그리고 살짝 ‘아, 이런 건가?’ 체험한 걸 가지고 말씀드리는데요, 이마저도 그러나 감사하게도 지금도 주님을 사랑하여 천국을 향한 내면의 창을 활짝 여는 사람들한테는 즉시 이 퍼셉션을 허락하시는 주님이시라는, 참으로 감사한 글에 힘입어 주님의 붙드심 가운데 어린아이같이 구할 수 있었던 덕분이지요.
오늘 글은 퍼셉션 관련 글이 아니기 때문에 아주 살짝만(?) 말씀드리면, 천국은 퍼셉션으로 충만한 나라이며, 천국 모든 구성원은 주님과 이걸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합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으로 이루어진 나라인데, 주님의 신성은 신적 사랑(Divine Love)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선(Divine Good)과 신적 진리(Divine Truth)이며, 그래서 천국 모든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이 둘을 즉시 아는 능력, 곧 퍼셉션 역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 퍼셉션을 많이 받는 천사일수록 그는 주님의 신성을 더욱 내적으로 이해,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주님의 신적 선에 특화된, 그러니까 주님의 신성을 이루는 두 가지인 선과 진리 중 선에 더 끌리는 천사들을 삼층천, 곧 천적(celestial) 천사, 진리에 더 끌리는 천사를 이층천, 곧 영적(spiritual) 천사라고 합니다.
주님의 신성을 천사들은 지상에 사는 우리처럼 무슨 공부를 통해서, 학습을 통해서 배우는 게 아니라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이 퍼셉션으로 그냥 압니다. 직감이라고 해야 하나요? 천사들이 뭐가 궁금해서 주님께 구하면, 그 즉시 그냥 어떤 답이 내적으로 들린답니다. 참 신기하지요? 그만큼 주님과 늘 막힘없이 커뮤니케이션하는 천사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저는 아주 사소한 것 하나도 주님 뜻 알기 위해 여러 번 이랬다저랬다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를 빌어 특별히 용서를 구해야 할 분이 계시는데요, 지금 그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과거 어느 세미나, 아마 그 주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었던 것 같은데, 그 강사는 일상의 모든 것, 심지어 아침에 오늘은 어떤 넥타이를 맬까요? 하는 것까지도 주님께 물어 맨다고 하더군요. 한 이십 년 된 기억인데요,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그런 그의 강의가 매우 거슬렸고, 맘에 안 들어 끝내 끝에 가서 무슨 말 한 마디를 하는 바람에 전체적인 강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분은 아마도 이런 퍼셉션이 이미 가능하셨던, 내면이 천국을 향해 활짝 열렸던 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정말 그분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만에 하나,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시고 생각나신다면,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시길 원합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태고교회가 이런 퍼셉션을 지상에서도 누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할렐루야! 지금까지 인류는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현 기독교회를 지나가고 있으며, 그 각각, 또 그 안에 수많은 교회가 부침(浮沈)을 거듭했는데요, 그 가운데 주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교회가 바로 태고교회의 첫 출발인 아담(man)이라는 교회였습니다. 그 이유는, 지상에서도 천국을 온전히 그대로 수용할 수 있었던 교회였기 때문인데요, 그때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했으며, 주님도 자주 지상에 오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마치 천국에서처럼 말입니다!
아, 참고로 주님은 사람 따로, 천사 따로 지으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천사는 천사가 되기 이전에 지상에서 사람으로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주님 자신, 먼저 참 사람(The Man)이신 주님은 심지어 천국 전체도 사람 모습(The Grand Man)으로 지으셨고, 천국 내 수많은 공동체들 역시 멀리서 보면 사람 모습인데요, 이런 주님이 굳이 사람 아닌 제 삼의 무엇을 지으실 이유가 없으신 것입니다. 지옥의 악령들 역시 모두 생전에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은 아래 책, ‘천국과 지옥’에 자세히, 아주 자세히 나옵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총 63장으로 구성된 제목들 중 이와 관련된 앞부분 제목들만 조금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장 주님이 천국의 하나님이시다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2장 주의 신성이 천국을 이룬다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3장 천국 안의 주님의 신성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In Heaven the Divine of the Lord Is Love to Him and Charity toward the Neighbor
4장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
5장 세 천국이 있다There Are Three Heavens
6장 천국은 무수한 공동체들로 이루어져 있다The Heavens Consist of Innumerable Societies
7장 각 천사는 가장 작은 천국이다Each Society Is a Heaven in a Smaller Form, and Each Angel in the Smallest Form
8장 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
9장 천국의 각 공동체는 한 사람으로 보인다Each Society in Heaven Reflects a Single Man
10장 천사는 완전한 사람 형태로 있다Therefore Every Angel Is in a Complete Human Form
11장 천국이 사람 모습임은 주의 신적 인성에서 비롯된다It Is from the Lord’s Divine Human That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Reflects Man.
이 중 천국이 사람 모습이라는 주제와 관련되는 장들만 위와 같이 링크를 연결했습니다. 혹시 종이책이 없지만 당장 좀 읽어보고픈 분들은 이렇게라도 내용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네, 어쨌든 이런 퍼셉션이, 그러나 세상 모든 교회가 그렇듯 태고교회 역시 뒤로 갈수록 그들의 선조와는 달리 각 교회의, 이 퍼셉션 수용 능력이 약화되다가 거의 소멸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이때가 바로 이 창세기 6장 1절로 8절 상태인 것입니다. 교회의 상태가 거의 늘 항상 이렇게 되는 이유는,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charity toward the neighbor)보다는 자아 사랑(love of self), 세상 사랑(love of the world)에 더 기울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신앙의 하나 됨, 즉 신앙으로 사랑을 실천하기보다는 사랑 따로, 신앙 따로, 즉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려는 경향이 갈수록 지배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인데요, 그러니까 가인처럼 말입니다. 아벨은 하나 됨을 추구하는 교회였지만, 가인은 분리를 추구하는 교회였고,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건 그때 교회의 상태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홍수 전 상태 또한 이랬는데요, 이때는 창세기 3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최악이었다고 합니다. 3장에서는 그래도 ‘리메인스’(remains)라는 것이 남아 있었지만, 이 6장 홍수 전 교회에는, 그러니까 교회 구성원들 하나 하나에게는 이것이 거의 소멸되었기 때문인데요, 이 리메인스에 관해서는 요 다음 글인 ‘백이십 년’에서 충분히(?) 다룰 예정입니다. 이 리메인스라는 것은, 그러니까 모든 교회, 모든 사람에게 주님이 은밀히 보관해 오고 계시는, 주님의 신성과 관련된 지식입니다. 우리 사람과 짐승을 구분하는 것도 이 리메인스의 유무입니다. 사람이, 그리고 교회가 아무리 악하여 황폐해져도 이것만 남아 있으면 주님이 좀 어떻게 해보실 수가 있는데, 이마저도 없어지면 그때가 바로 개인으로서도 끝이요, 교회적으로도 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후 지옥 가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이 리메인스가 소멸된 상태였기 때문임을 유추할 수 있지요. 앞에 세 번의 교회 시대가 있었고, 지금 네 번째 교회 시대인 기독교회 시대라는 것은, 앞서 세 번의 종말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인류가 늘 주님과 연결되어 있게 하시려고, 매번 각 교회 시대의 종말 때마다 소위 이 리메인스의 역할을 하는 교회들을 준비하셔서 다음번 새 교회 시대를 일으키곤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남은 자’, ‘남은 그루터기’, ‘십일조’, ‘소돔과 고모라 의인 열 명’ 등이 모두 이와 관련된 것들이며, 6장 후반 노아 역시 그 시대의 리메인스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 제목인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the sons of God, the daughters of man)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이미 어느 정도 배경 설명을 드렸기 때문에 간단히 정리만 해도 되겠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앙과 관련된 교리적인 것들(the doctrinal things of faith)을, 그리고 ‘사람의 딸들’은 거의 욕망이 되어버린 갈망(yearnings)을 말합니다.
태고인들은 그들이 지각하는, 즉 퍼셉션으로 아는 진리와 선(the truths and goods)을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이라 하였습니다. 창5: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인류 역사상, 그러니까 지상에 교회가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주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태고교회, 그중에서도 주님이 안식하실 수 있으셨던 ‘일곱째 날’이었으며,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이었던 이 아담 교회 이후, 셋, 에노스를 거쳐 후대로 갈수록 점점 주님 사랑보다는 자아 사랑을, 이웃 사랑보다는 세상 사랑으로 더 기울더니 급기야 마지막 교회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퍼셉션도, 리메인스도 거의 사라진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안에 주님의 것인 이 리메인스가 있어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과 짐승을 구분하는 이것이 없게 되면, 겉은 사람 모습이어도 결코 사람이라 할 수 없는데, 이때, 즉 이 홍수 전 시대가 바로 이런 상태였으며, 또 그 시절엔 인류가 주님과 퍼셉션으로 연결되어 있어 주님의 신성을 호흡하던 시대였는데, 그 호흡에 필요한 퍼셉션이 흐릿, 희미, 거의 희박해지는 바람에, 홍수 전 인류, 곧 교회가 주님의 신성에 대해, 그러니까 무엇이 주님의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 수 없는, 거의 질식 상태가 된 것입니다.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가 있어 또한 사람입니다. 신성(神性, The Divine), 곧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은 사람의 의지 안으로는 직접 들어가시고, 사람의 이해 안으로는 의지를 거쳐 간접적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온전한 상태인 게 정말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태고교회의 끝에 가서는 퍼셉션도, 리메인스도 거의 소멸,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의 의지도 더 이상 의지가 아니요, 사람의 이해 역시 더 이상 이해가 아닌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홍수 전 사람들은 ‘이건 내 의지야’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 욕심, 욕망에 가까운 갈망이었던 것이고, 그래서 ‘더럽다’(filthy)고 하는데,그 이유는, 그것의 출발이 주님 아닌 사람이기 때문에, 곧 자기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매 교회 시대마다 갈수록 사람들의 상태, 곧 교회의 상태가 이렇게 되며, 이렇게 그 의지가 고장 나 버린다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그러니까 창6:1, 2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의 속뜻, 그 아르카나(arcana)는, 그 시절 존재하던 세상 모든 교회가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멀어져 주님의 선과 진리 대신 더러운 것들을 갈망하는 욕망 상태가 되었고, 그 결과 주님 신앙에 관련된 모든 교리적인 것들, 곧 주님의 거룩한 것들을 자신들의 더러운 갈망과 결합(conjoin)시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뭘 의도하든 모두 악했다는 말씀입니다. 뒤에 나오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6:5)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 상태, 완전 맛이 간 상태를 ‘네피림’이라 하는데, ‘백이십 년’과 함께 곧 올리겠습니다.
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34–43)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많은 사람이 주님을 비웃고 희롱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교회가 주님에게서 멀어질 때는 언제나 말씀을 왜곡했고, 그렇게 해서 말씀의 내적인 것, 곧 내용물인 사랑은 없애고, 외적인 것, 곧 그릇인 신앙만 남겨 놓았습니다. 아담의 태고교회가 그랬고, 노아의 고대교회와 모세의 유대교회가 그랬습니다. 그 결과 주님이 오셨을 때, 유대교회 사람들은 외적으로만 경건할 뿐 내적으로는 아주 부패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23:25)라 하시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4절 후반,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는 유대인들이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는 걸 의미하는데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황이 요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23, 24절입니다.
23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요19:23, 24)
여기 겉옷은 나눠 가지고, 호지 아니하고 통으로 짠 속옷은 찢지 말고 제비를 뽑아 갖기로 했다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옷의 속뜻이 진리임을 생각하면, 여기 주님의 겉옷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속옷은 그 문자적 의미 안에 감춰진 내적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겉옷만 나누어 갖고, 속옷은 제비 뽑아 한 사람이 가지는 건, 마지막 때 교회들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만 훼손하고, 내적 의미는 훼손하지 못하는 걸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말씀의 내적인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허락되지 않아 모르는 걸 훼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참고로 성서 시대 ‘옷’에 대한 말씀을 잠깐 드리면, 오늘날 우리와는 달리 이때는 샌들, 터번, 겉옷, 허리띠 및 속옷을 함께 ‘옷’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겉옷’은 여러 히브리 표현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입는 옷’이 아니라 ‘덮는 옷’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룻3:9,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등에 나오는 옷에 대한 표현들이 그렇습니다. 특히 이 룻이 말한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의 의미가 현대 유대인 예배에도 그대로 이어져 예배 중 겉옷을 펼쳐서 가족을 보호하는 의미의 순서가 있습니다. 예배 중, 하잔이라 하는 찬양 인도자가 민6:24-26, 제사장의 축복을 낭송하면, 각 가정의 가장들은 그들 어깨에 걸친 기도 숄, 즉 탈릿을 펼치며, 이때 아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 가장의 보호 아래 들어간다는 그런 순서가 있습니다.
※ 여기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속옷은 씨줄과 날줄로 불리는 두 줄의 실로 짠 옷감으로 만들어졌는데, 두 개의 옷감을 붙여 끝에 솔기를 대어 꿰매면 완성되었다. 그런데 ‘호지 않고’(솔기를 대지 않고, seamless)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은 분명 특별한 옷이었다. 이것은 ‘날줄’로만 짜서 만든 한 개의 옷감으로 된 옷으로, 실밥을 뜯어서 계속 풀다 보면 기다란 한 개의 실로 풀렸을 것이다. 이처럼 씨줄이 없이 ‘끝없는 날줄’로만 만들어진 옷은 고대의 여러 문화에서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대제사장의 속옷은 호지 않고 통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끝없는 날실로 만들어진 옷을 강제로 찢는다는 것은 ‘신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고대인들의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옷’에 대한 개념으로 인해 로마 군인들도 함부로 이 옷을 찢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선교사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풍습 이야기’)
그 밖에도 오늘 본문을 보면, 군인들이 주님께 신 포도주를 드렸다고 했는데, 그것 또한 진리를 왜곡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본래 포도주는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 신 포도주는 말씀을 왜곡하고 조작해 만든 거짓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주님이 주신 진리를 실천, 진실한 삶으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부패한 교회들은 말씀 안에 담긴 신앙과 사랑, 진리와 선을 서로 분리, 말씀을 변질시켰습니다. 그것이 이들이 주님께 신 포도주를 드리는 것입니다.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주님이 고초를 당하시는 동안, 백성은 서서 구경하고, 관리들과 군인들은 비웃고 희롱했습니다. 백성과 관리, 군인은 각각 어떤 사람들일까요? 백성(people)은 영적 의미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주님을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을까요? 대중은 보통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리의 편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회를 이끄는 진리, 또는 질서가 와해 된다면 그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구성원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중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장 자신의 안전만 생각합니다. 바로 그들이 십자가 위의 주님을 구경만 하는 백성입니다. 백성이 그러고 있을 때, 관리들과 군인들은 주님을 비웃고 희롱했습니다. 여기서 관리(ruler)는 교회의 지도자인 성직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군인은 교리에 밝은 사람, 이를테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입니다. 교리에 밝은 사람, 또는 추상적인 의미로 교리를 군인으로 표현하는 것은, 교회가 진리 아닌 것과 맞서 싸울 때 교리를 내세워 싸우기 때문입니다. 유대교회의 마지막 때 교회가 주님과 사도들을 핍박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진리에 대한 핍박은 여전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라고 비웃고 희롱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을 믿는 우리에 대한, 말씀을 겉뜻으로만 믿어 온 기존 교회들의 태도가 저런 것입니다.
군중들이 주님을 비난하는 가운데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가 붙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3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8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이에 대해 요한복음 19장에서는
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요19:19-20)
유대인의 왕이라고 할 때, 유대는 선을 뜻하고, 왕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왕은 주님은 선에서 비롯한 진리이며, 그러므로 신적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신적 진리는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탕에 선이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곧 신적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히브리어와 헬라어, 로마, 즉 라틴어로 패에 적어 십자가 위에 붙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신 주님의 섭리는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성(聖) 문서에 특별한 설명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구약과 신약의 말씀과 그 내적 의미를 통해 신적 진리이며 말씀 자체이신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그렇게 해서 영화롭게 되신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말씀은 히브리어로 처음 기록되었고, 신약의 말씀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말씀의 내적 의미는 라틴어로 처음 기록된 후 나중에 다른 여러 언어로 옮겨 퍼져나갔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대의 관리들 말고도 주님을 비웃는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 중 한 사람인데요, 그에 대해 39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중 하나는 끝내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조롱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할 뿐 아니라 주님 앞에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가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며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전하시고, 병을 고치셨으며, 때로는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위로하시고, 함께 우시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데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모두가 주님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그 많은 사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 오늘 설교는 전반적으로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께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까지도 전부 포함해서 결국은 주님을 배반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은데요, 그러나 저는 이 부분에서 좀 한 번 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영육 간 치유하시는 능력이 흘러 들어가 병 고침의 효력이 발생했다는 것은 고침 받은 사람의 내면이 어떠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중에 배신할, 그런 사람에게 주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갈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지요.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육안으로 보고 구경했지만, 복음서에 기록된 고침 받은 사람의 수는 극히 제한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들은 끝까지 주님을 배신하지 않았을 것으로 저는 보고요, 그러므로 유대인 전체, 유대교회 전체를 거론할 때, 가급적 이들은 빼고 언급해야 하지 않나 저는 생각합니다.
새 교회 가르침 ‘참된 기독교’ 539번은 신앙인의 의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지워진 두 가지 의무가 있으니, 그것은 자기 자신을 검토한 다음 (주님께) 간구하고 고백하는 일이다. 간구는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고, 자기가 뉘우치는 악에 대항할 힘과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과 애정을 구하는 것이다.... 고백은 자신의 악을 보고,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자기가 비천한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 539, 이순철 역) There are two duties incumbent on man, to be done after examination, namely, supplication and confession. The supplication should be that the Lord may be merciful, that he may give power to resist the evils that have been repented of, and that he will provide inclination and affection for doing good,
Since apart from the Lord man can do nothing (John 15:5).
The confession will be that he sees, recognizes, and acknowledges his evils, and finds himself to be a miserable sinner. (TCR.539)
신앙인이라면 늘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살피면서 잘못이 있으면 반성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대교회 사람들은 그런 면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주님에게서 멀어졌고, 끝내는 주님을 대적하고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반성이나 회개 같은 신앙의 습관이 나중에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단순히 기적을 보이시려는 게 아닙니다.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거듭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22:31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은 사후에 영으로 부활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또 눅16:22절 이하에서도 거지 나사로는 사후에 천국에 있고, 부자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사후에 영으로 부활하는 것과 영생이 있다는 걸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의 왼편에 있던 행악자가 죽음의 문턱에서도 주님을 조롱한 것은 신앙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완고하게 진리를 대적하는지를 나타냅니다. 반면에 주님의 오른편에 있던 행악자는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하는 것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의 간구와 고백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화답하셨습니다. 주님의 오른편에 있었던 행악자처럼 우리도 진실한 간구와 고백으로 매일 살아나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4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