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면무조건지옥에간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신중하지 못한 말입니다. 자살은 분명 생명을 스스로 끊는 매우 비극적인 행위이며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그의 생애 마지막 한 행위만 떼어 놓고 자동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인간은 다른 사람의 내면 전체를 알 수 없으므로, 특정한 사람이 자살했다는 사실만으로 ‘그사람은지옥에갔다’고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근본적인 기준은 ‘어떤방식으로죽었는가’가 아니라 ‘어떤사랑을자신의삶으로만들었는가’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난 뒤 자신이 지상에서 형성한 ‘지배적인사랑’에 따라 살아갑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람은 천국의 질서와 결합하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모든 것 위에 두며 악을 기꺼이 선택해 온 사람은 그와 상응하는 지옥의 질서에 이끌립니다. 따라서 죽음의 순간만으로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기계적으로 판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관과 맞지 않습니다.
특히 자살이라는 외적인 행위가 같아 보여도 그 내면의 상태는 매우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타인에게 복수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자신의 생명을 끊을 수 있고, 누군가는 극심한 절망과 공포, 판단력의 붕괴 속에서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심각한 정신적 고통이나 질환으로 현실을 정상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크게 손상된 경우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모두 ‘자살’이라는 한 단어로 기록되지만, 주님 앞에서는 그 사람의 자유와 이성, 의도와 책임의 정도가 똑같을 수 없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악이 진정으로 사람의 것이 되려면 단순히 어떤 행동이 발생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것이 악임을 알고도 자유롭게 원하고 선택하여 자기 삶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문제가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자유와 합리적 판단 능력이 크게 훼손된 상태에서 일어난 행동과, 충분한 자유 속에서 악을 사랑하여 의도적으로 선택한 행동을 동일한 영적 책임으로 다룰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바로 그 내면을 보십니다.
성경에도 ‘자살한사람은반드시지옥에간다’는 교리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사울, 아히도벨, 시므리, 가룟 유다처럼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이 사례들로부터 ‘자살 = 자동적 지옥행’이라는 보편적 구원론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특히 어떤 죄 하나가 죽기 직전에 발생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평생의 내적 삶과 주님과의 관계를 모두 지워 버린다는 식의 교리는 성경이 직접 가르치는 내용이 아닙니다.
흔히 ‘자살하면회개할시간이없으므로지옥에간다’는 설명도 듣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구원을 지나치게 법률적이고 시간적인 공식으로 만드는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평생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섬기다가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판단력을 잃고 자신의 생명을 끊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마지막 몇 분 동안의 행위가 그 사람 안에서 오랫동안 형성된 모든 사랑을 자동적으로 뒤집어 놓는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마지막 순간에 특정한 말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평생 자발적으로 사랑해 온 악이 기계적으로 사라진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상태는 그렇게 형식적인 계산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대편으로 지나가서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자살해도괜찮다’는 결론은 전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의 생명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이며, 이 세상에서 사람은 자유롭게 선과 진리를 선택하면서 자신의 영원한 인격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끊는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자살을 낭만화하거나 고통에서 벗어나 영계로 옮겨 가는 하나의 방법처럼 생각하는 것은 특히 위험합니다. 죽음은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 아니며,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역시 현세의 고통을 피해 가는 ‘비상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주님의심판은인간의심판보다훨씬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행동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그 행동이 나온 사랑과 의도, 그 순간의 자유, 이성의 상태, 그 사람이 감당했던 고통, 그리고 평생 형성되어 온 내면 전체를 아십니다. 따라서 유가족에게 ‘자살했으니지옥갔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판단할 권한도 없는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앞서 살펴본 ‘부자는지옥에가는가?’라는 질문과도 뜻밖에 같은 원리로 연결됩니다. ‘부자 = 지옥’, ‘가난한사람 = 천국’, ‘자살 = 지옥’처럼 하나의 외적 조건으로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판정하려는 것은 모두 지나치게 단순한 공식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계속해서 외적인 모습에서 그 사람의 ‘사랑’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사람이무엇을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깊이 ‘그사람은무엇을사랑했고, 무엇을의도했으며, 얼마나자유롭게그것을자신의것으로삼았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살하면무조건지옥에가는가?’라는 질문에는 분명하게 ‘그렇다고말할수없다’고 답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러므로자살은영적으로아무문제가없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자살이라는 행위의 심각성과 자살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판정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전자는 생명의 거룩함 때문에 엄중하게 보아야 하지만, 후자는 그 사람의 내면 전체를 아시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자살이라는마지막행위하나가그사람의영원한운명을자동으로결정하는것이아니라, 주님께서는그사람이평생어떤사랑을형성했는지와그행위가일어날당시의자유와의도와내면의상태까지완전하게보시고판단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태도도 정죄보다는 경외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자살이라는 비극을 가볍게 여기지 않되,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까지 대신 판결하지 않습니다. ‘그사람의모든사정을아시는주님께맡긴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것이 생명을 엄중하게 여기면서도 주님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성경은 결혼을 매우 귀하게 말합니다. 창2에서 주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혼자사는것이좋지아니하니내가그를위하여돕는배필을지으리라’고 말씀하시고(창2:18), 남자와 여자가 ‘한몸’을 이루는 질서를 세우십니다(창2:24). 스베덴보리 역시 결혼을 단순히 인간 사회를 유지하거나 자녀를 낳기 위한 제도로 보지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참된 결합에는 더 깊은 영적 원형이 있으며, 그것은 ‘선’(good)과 ‘진리’(truth)의 결합이고, 가장 높은 차원에서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에 그 근원을 둡니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은 인간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사회제도가 아니라 창조 질서 안에 놓인 매우 깊고 거룩한 결합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결혼이창조질서에속한다’는 것과 ‘모든사람이이세상에서반드시결혼해야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모든 개인에게 결혼을 의무로 부과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이유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말씀하셨고(마19:12), 바울도 고전7에서 독신의 삶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주님께서 세우신 선하고 귀한 질서이지만, 결혼 여부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서 창조 질서에서 벗어난 사람도 아니며, 결혼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더 온전한 영적 상태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결혼애’(ConjugialLove, 1768)를 통해 보면 이 문제는 한층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단순히 ‘남자와여자가함께산다’는 외적 형태가 아니라 두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결합’입니다. 선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는 선을 표현합니다. 참된 결혼 사랑도 이와 상응하여 두 사람이 서로를 소유하거나 이용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선을 원하고, 서로의 행복에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며, 점점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결혼의 영적 의미는 단순히 배우자를 ‘얻는것’보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참으로 결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결혼은 ‘거듭남’(regeneration)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 산다는 것은 낭만적인 감정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자기 뜻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고, 상대방의 필요를 자신의 필요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때도 있으며, 용서하고 기다리고 책임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결혼이 실제로 이런 모습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결혼이라는 외적 형태 안에서도 지배욕, 소유욕, 자기 사랑이 더욱 강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혼인신고가 두 사람의 내면을 자동으로 하나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은 참된 결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귀한 질서이지만, 그 질서 안에서 실제로 어떤 사랑을 형성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이 ‘결합’의 질서에서 제외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직분에서 선한 쓰임을 행하며,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혼자가편하니까’, ‘누구에게도맞추고싶지않으니까’, ‘내자유를침해받고싶지않으니까’라는 이유로 모든 깊은 관계와 책임을 거부한다면 그 내면의 동기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결혼했는가,하지않았는가’보다 어떤 사랑을 선택하며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도 드러납니다. 인간의 프로프리움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끌어당기려 합니다. 배우자마저 ‘나를행복하게해줄사람’, ‘내필요를채워줄사람’으로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결혼했어도 참된 결합과는 멀어집니다. 반대로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이웃을 위한 선과 유용한 일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 안에는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 토대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 여부라는 외적 상태만으로 한 사람의 영적 성숙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 관한 설명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참된 결혼 사랑이 자연계에서 몇십 년 함께 사는 사회적 계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결혼하지 못했다고 해서 결혼 사랑의 가능성이 영원히 닫히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 적합한 내적 삶을 형성한 사람은 사후에도 자신과 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배우자와 결합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현세에서결혼하지않아도천국에가서짝을만나면된다’는 식으로 가볍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현세에서 배우자를 확보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성경적 질문이 따라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에 관하여 ‘부활때에는장가도아니가고시집도아니가고하늘에있는천사들과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30). 그렇다면 천국에는 결혼이 없다는 뜻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천국에서 남녀의 결합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문맥은 일곱 형제와 차례로 혼인한 한 여인이 부활 후 ‘누구의아내가되겠느냐’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입니다. 곧 지상의 혈통과 법적 관계를 그대로 영계에 옮겨 놓으려는 사고방식을 주님께서 바로잡으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혼인제도와 천국에서의 내적이고 영적인 결합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천국에도결혼이있는가?’라는 문제는 별도로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지만, 적어도 마22:30하나만으로 천국에서 모든 남녀의 결합이 사라진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결혼을꼭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결혼은 주님께서 세우신 매우 귀한 창조 질서이며, 참된 결혼 사랑은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깊은 영적 질서에 상응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연계에서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결혼 여부가 구원을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배우자를 소유하거나 이용하지 않고 서로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며 참된 결합을 이루어 가는 길이 있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선한 쓰임을 행하며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반드시결혼해야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누군가와참으로하나될수있는사람으로거듭나고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혼의 궁극적인 의미는 단순히 배우자를 얻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가 결합하듯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오늘(2026/10/18)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찬양하자’, 찬131, ‘다나와찬송부르세’입니다.
오늘은창5절별 주석 그 두 번째, 6절로 14절, AC글 번호로는 496번에서 509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5: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