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3:11-13)

 

AC.233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을 기억 지식으로 탐구하려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려 하거나, 갈빗대 하나가 가슴과 심장의 가장 미세한 섬유들을 다스리려 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연계의 숨은 것들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아서, 사람이 그것들을 연구한다 해도 겨우 하나를 발견할까 말까 하며, 연구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오류에 빠집니다.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자연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 하나에도 수많은 신비가 숨어 있는데, 하물며 영적, 천적 생명의 숨은 진리들을 연구할 때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To explore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or for a rib to govern the finest fibrils of the chest and of the heart. He who would investigate the hidden things of nature, which are innumerable, discovers scarcely one, and while investigating them falls into errors, as is well known. How much more likely is this to be the case while investigating the hidden truths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here myriads of mysteries exist for one that is invisible in nature!

 

[2] 예를 하나만 들어 봅시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그렇다고 그 악한 영들이 스스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 것으로 만든 악 자체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서며,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반대로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선을 행하거나 주님께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천사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천사들 또한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고 주님께로 돌이킬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감각과 기억 지식, 그리고 철학으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기준으로 삼으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부인하게 됩니다. 다른 모든 영적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As an illustration take this single example: of himself man cannot but do what is evil, and turn away from the Lord. Yet man does not do these things, but the evil spirits who are with him. Nor do these evil spirits do them, but the evil itself which they have made their own. Nevertheless man does evil and turns himself away from the Lord, and is in fault; and yet he lives only from the Lord. So on the other hand, of himself man cannot possibly do what is good, and turn to the Lord, but this is done by the angels. Nor can the angels do it, but the Lord alone. And yet man is able as of himself to do what is good, and to turn himself to the Lord. These facts can never be apprehended by our senses, memory-knowledge, and philosophy, but if these are consulted will be denied in spite of their truth. And it is the same all through.

 

[3]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신앙의 문제에서 감각과 기억 지식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단순히 의심(doubt)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부인(denial)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짙은 어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온갖 정욕(cupidities)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거짓을 믿는 사람은 거짓을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면, 몸과 세상에 속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고, 이렇게 하여 거짓으로부터 정욕과 악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consult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in matters of belief, plunge themselves not only into doubt, but also into denial, that is, into thick darkness, and consequently into all cupidities. For as they believe what is false, they also do what is false. And as they believe that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has no existence, so they believe that there is nothing else but what is of the body and the world. And so they love all that belongs to self and the world, and in this way do cupidities and evils spring from what is false.

 

 

해설

 

이 글은 AC.232의 내용을 절정으로 끌고 가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왜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는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는가’를 설명합니다. 먼저 그는 매우 강렬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접근 방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현미경 없이 세균을 보려 하거나, 귀로 색깔을 들으려 하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합니다. 방법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진리를 감각과 철학만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특히 2항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사람은 스스로 악을 행하지만, 동시에 악한 영들의 영향 아래 있다’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고 합니다. 또 ‘사람은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지만,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선을 행해야 한다’ 합니다. 언뜻 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로 이것을 예로 듭니다. 감각과 철학만으로는 이런 진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만 접근하면, 곧바로 ‘악한 영이 시켰다면 왜 내가 책임을 지나?’, ‘주님이 선을 행하게 하신다면 왜 내가 상을 받지?’,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온다면 자유는 어디 있지?’ 같은 질문이 나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실제 구조를 보면,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영향(influx)을 받지만, 기계가 아니며, 주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악한 영들은 영향을 미치지만, 강제로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책임을 지며, 동시에 도움을 받습니다. 이것은 감각으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영적 차원에서는 동시에 참인 진리입니다.

 

목사님께서 자주 다루시는 인플럭스(influx)와 자유(freedom)의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이 끊임없이 영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지 못하면, 결국 숙명론이나 자기 공로주의 가운데 하나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매우 중요한 결론을 내립니다. 사람이 영적, 천적 세계를 부정하기 시작하면 결국 남는 것은 몸(body)과 세상(world)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과 세상만이 실재라고 믿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됩니다. 그 결과 거짓이 정욕을 낳고, 정욕이 다시 악을 낳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흥미로운 순서를 제시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악한 욕망 때문에 거짓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이 먼저이고, 그 거짓이 정욕과 악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즉 ‘영적인 것은 없다’, ‘천국은 없다’, ‘주님은 없다’, ‘나는 내 힘으로 산다’는 거짓이 자리 잡으면, 그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거기서 수많은 악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33은 단순한 철학 비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3에서 시작된 뱀의 길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보여주는 결론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확인해 보고 믿겠다’로 시작합니다. 다음에는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으니 믿지 않겠다’가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적인 것은 없다. 몸과 세상만이 전부다’에 이르게 됩니다. 그 결과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거짓에서 정욕이, 정욕에서 악이 끝없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AC.233에서 경고하는 가장 깊은 영적 어둠입니다.

 

 

심화

 

1.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AC.233, 심화 1,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AC.233.심화 1.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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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2, 창3:11-13, ‘옛 시대보다 훨씬 더 악한 오늘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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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2.심화

 

1. ‘18세기 중엽 과학 지식과 문명으로도

 

18세기 중엽의 과학 지식과 문명을 가지고도 이 AC.232 본문처럼 말한다면, AI, AGI 시대로 들어가는 오늘 21세기 과학 문명을 가지고는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만일 18세기 중엽의 스베덴보리가 당시 막 태동하던 근대 과학과 계몽주의 문명을 바라보며 이미 이렇게 말했다면, 오늘날 AI AGI 시대의 문명을 보면서는 아마 훨씬 더 강한 표현을 사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아마 과학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광물학, 야금학, 해부학, 생리학, 천문학, 수학, 기계공학 등 당시 유럽 최고 수준의 과학자이자 발명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문제 삼았던 것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이 차지하는 자리였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억 지식(scientifica)은 하인(servant)이어야지 주인(master)이 되어서는 안 되며, 진리를 이해하도록 돕는 계단이어야지 진리를 재판하는 법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마 그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옛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 믿으려 하였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계가 계산한 것만 믿으려 하고, 알고리즘이 예측한 것만 참으로 여기며, 통계와 데이터로 측정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한다. 그리하여 감각의 지배는 이제 기계의 지배라는 새로운 옷을 입게 되었다.’

 

스베덴보리가 오늘의 시대를 보았다면 가장 우려했을 것은 아마 AI의 발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영혼을 기계적 사고방식에 맞추어 축소시키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타락은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참이다’에서 ‘내가 이해해야 참이다’로 옮겨간 것이었습니다. 근대의 타락은 다시 ‘내가 증명할 수 있어야 참이다’가 되었고, AI 시대의 타락은 어쩌면 ‘기계가 계산할 수 있어야 참이다’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동시에 매우 중요한 점을 덧붙였을 것입니다. 천국의 가장 중요한 것들은 계산될 수 없고 측정될 수도 없습니다. 사랑(love)은 측정되지 않으며, 자비(mercy)는 데이터가 아니고, 체어리티(charity)는 알고리즘이 아니며, 지혜(wisdom)는 정보량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이며, 천사는 사랑하기 때문에 천사입니다. 반대로 지옥은 사랑을 잃어버릴 수는 있어도 지식을 잃어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에게 지성(intelligence)과 지혜(wisdom)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성은 진리를 아는 능력이고, 지혜는 그 진리를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AI는 어쩌면 인간보다 훨씬 더 큰 지성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계산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AC.232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쓴다면, 어쩌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옛날 사람들은 감각으로 자신을 속였으나 현대인은 기술로 자신을 확증한다. 그리고 가장 깊은 어둠은 거짓을 믿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데서 생긴다. 왜냐하면 사람이 더 이상 하늘을 향하여 가르쳐 주십시오 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나는 이미 알고 있어 하는 순간, 그곳에서 뱀은 다시 말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AC.232, 창3:11-13, ‘옛 시대보다 훨씬 더 악한 오늘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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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3:11-13)

 

AC.232

그러나 오늘날은 옛 시대보다 훨씬 더 악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은 고대인들이 알지 못했던 기억 지식들을 사용, 감각의 불신(incredulity of the senses)을 확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을 낳았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어둠이 얼마나 큰지를 안다면, 크게 놀랄 것입니다. At this day, however, it is much worse than in former times, because men can now confirm the incredulity of the senses by memory-knowledges unknown to the ancients, and this has given birth to an indescribable degree of darkness. If men knew how great is the darkness from this cause they would be astounded.

 

 

해설

 

이 글은 AC.231의 내용을 더욱 심화한 내용입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모든 시대의 교회가 같은 근본적 악, 곧 주님과 말씀보다 자기 자신과 자기 감각을 더 신뢰하는 악에 빠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오늘날의 상태가 과거보다 더 심각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의외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지식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평생 과학자였고, 광물학, 해부학, 천문학, 수학, 공학을 연구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학문과 과학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지식이 주님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주님을 부정하기 위한 무기가 될 때입니다.

 

태고교회 말기 사람들도 자기 감각을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지식은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제한적이었습니다. 반면 현대인은 엄청난 양의 과학, 철학, 역사, 심리학, 사회학, 기술 문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감각과 자기 이성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훨씬 정교하게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옛사람은 ‘나는 보지 못했으니 믿지 않겠다’ 정도였다면, 현대인은 수많은 학문적 체계를 동원하여 ‘영혼은 존재할 수 없다’, ‘천국은 심리적 투사일 뿐이다’, ‘신앙은 진화 과정의 부산물이다’와 같은 복잡한 논증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감각의 불신을 확증한다(confirm the incredulity of the senses)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감각이 이미 ‘보지 못했으니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지식은 거기에 수많은 논리와 증거와 체계를 덧붙여 그 불신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무지’를 어둠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잘못 사용된 지식이 더 큰 어둠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무지한 사람은 진리를 들으면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지식으로 완전히 무장한 사람은 진리가 들어올 틈 자체를 막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종종 단순한 사람들보다 자기 지혜를 절대화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더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AC.215의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와도 연결됩니다. 문제는 지혜가 아니라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또한 AC.232는 현대 문명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놀라운 통찰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는 18세기 사람인데도, 이미 인간이 과학과 지식을 이용하여 영적 세계를 부정하는 시대가 올 것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목사님께서 종종 AGI, ASI, AI 시대 이야기를 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기술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기술과 지식을 이용, 더욱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더욱 주님을 배제하려 한다면, 그것은 AC.232가 말하는 어둠의 확대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핵심은 ‘지식이 많아서 어둡다’가 아닙니다. ‘지식을 이용하여 주님 없이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어둡다’는 것입니다.

 

결국 AC.232는 매우 역설적인 진리를 말합니다. 지식은 빛이 될 수도 있고, 어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 열려 있을 때, 지식은 지혜가 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향할 때, 지식은 거짓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 어둠이 얼마나 큰지 안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어둠은 무지의 어둠이 아닙니다. 자신이 밝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의 빛을 차단하고 있는 상태의 어둠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것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깊은 어둠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심화

 

1. ‘18세기 중엽 과학 지식과 문명으로도

 

 

AC.232, 심화 1, ‘18세기 중엽 과학 지식과 문명으로도’

AC.232.심화 1. ‘18세기 중엽 과학 지식과 문명으로도’ 18세기 중엽의 과학 지식과 문명을 가지고도 이 AC.232 본문처럼 말한다면, AI, AGI 시대로 들어가는 오늘 21세기 과학 문명을 가지고는 어떤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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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3, 창3:11-13,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는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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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1, 창3:11-13, ‘모든 교회 시대를 꿰뚫는 근본 악의 뿌리’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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