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07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고해성사를 통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죄를 용서받는다’ - 죄를 용서하는 권세는 사제에게 있는가, 오직 주님께 있는가?

 

해설

‘고해성사를 통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죄를 용서받는다.’ 이것은 천주교의 ‘고해성사’(告解聖事, Sacrament of Penance and Reconciliation)에 관한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세례 이후에 지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및 교회와 화해하기 위하여 사제를 찾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사제는 고백을 듣고 필요한 권고와 보속을 제시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죄경을 선언합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성사적 과정을 통하여 신자가 실제로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과 이웃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경을 듣는 일과 주님께서 실제로 죄를 용서하시는 일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사죄의 선언이 이루어진 순간 인간의 내적 악도 제거되는 것일까요? 사제에게 고백하는 행위는 참된 회개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죄 사함의 통로이기도 할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죄의 용서를 주님에 의한 실제적 거듭남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사제의 직무를 존중하면서도 주님께만 속한 죄 사함의 권능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이번 문제는 죄를 고백하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과 회개, 사죄 선언과 실제적 죄의 용서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별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422–1424항은 고해성사를 회개와 참회, 고백과 용서, 화해의 성사로 설명합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교회의 친교를 손상시켰을 때 이 성사를 통하여 용서와 화해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사제에게 하나님과 독립된 죄 사함의 권능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서 1441항은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명시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직무를 맡기셨으며, 그 직무가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1461항은 사제가 성품성사에 따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죄의 권한을 행사한다고 가르치며, 1466항은 고해 사제가 하나님의 용서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그 용서를 섬기는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사제가 자신의 능력으로 죄를 없애는 제도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의 공식적인 이해에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사제는 그 용서를 성사적으로 전달하는 직무를 수행합니다. 두 전통의 실제적인 차이는 사제가 독립적인 신적 권능을 소유하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만 속한 죄 사함의 권능이 사제의 사죄 선언을 통하여 성사적으로 행사된다는 천주교의 이해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또한 천주교는 입술로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아무런 회개 없이 자동으로 용서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448항은 참회자의 통회와 고백, 보속, 그리고 교회의 직무를 통한 사죄를 고해성사의 중요한 요소로 설명합니다. 특히 1451항은 ‘통회’(痛悔, contrition)를 자신이 지은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1452항은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완전한 통회가 대죄의 용서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가능한 한 빨리 성사적 고백을 하겠다는 결심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1456항은 양심 성찰을 통하여 기억해 낸 중대한 죄들을 사제에게 고백하도록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고해성사에는 죄의 인정과 진정한 뉘우침, 새로운 삶에 대한 결심이 함께 포함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외면하거나 정당화하지 말고 그것을 인정하고 돌이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실제적인 회개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과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절차를 죄의 용서를 얻는 통상적인 성사적 통로로 규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천주교는 두 요소를 하나의 성사 안에서 연결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각각의 영적 의미를 구별하여 살펴야 합니다.

 

천주교가 사제의 사죄권을 설명할 때 중요하게 제시하는 성경은 요20:22-23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마16:18-19에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천국 열쇠와 매고 푸는 권세, 마18:18에서 제자들에게 주어진 권세도 교회의 화해와 사죄 직무에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죄의 용서와 교회의 책임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후대에 발전한 개별 고백 및 성사적 사죄 제도가 모든 세부 내용에서 동일한 것인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447항 역시 교회 역사에서 참회의 구체적인 방식이 달라졌으며, 오늘날과 같은 사제와 신자 사이의 개별적인 고백 방식이 오랜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고해성사의 모든 절차가 요20에 직접 명시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사도적 직무와 교회의 전통을 통하여 이러한 제도가 발전했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권위에 관한 말씀을 인간에게 독립적인 죄 사함의 권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에게서 천국 열쇠와 매고 푸는 권세의 근원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믿음과 진리입니다.

 

이 문제에서 중요한 직접적인 근거는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9410항입니다. 그는 마16:18-19와 마18:18의 말씀을 해설하면서, 베드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을 표상하며 천국 열쇠는 진리에서 비롯되는 권능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을 열고 닫는 권능은 어떤 인간이 자신의 지위에 따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과 진리에 속하며, 궁극적으로 주님 자신에게만 있습니다. AC.9410:2–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기 권한으로 다른 사람을 천국에 들이거나 천국에서 제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어 4절에서는 어떤 인간도 스스로 죄 하나를 풀어 줄 수 없으며, 죄가 풀리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이루시는 거듭남을 통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사제의 사죄권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직접 근거입니다. 다만 이 본문에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특히 인간이 자신에게 주님 고유의 구원 권능이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천주교가 사제에게 하나님과 독립된 권능이 있다고 가르친다는 증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정확한 논점은 천주교가 인정하는 사제의 종속적인 성사적 권한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유일한 죄 사함의 권능 사이에 어떤 신학적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죄의 실제적인 제거는 사제의 직무나 선언 자체보다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행위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보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539항이 매우 중요한 답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의 짐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교회의 성직자에게 자신의 죄를 하나하나 고백하고 사죄를 받아 마음의 부담을 덜어 내는 것이 해롭지 않다고 명시합니다. 그러한 실천이 자신을 성찰하고 날마다 저지르는 악을 돌아보는 습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연적 고백’(natural confession)이라고 부르며,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영적 고백’(spiritual confession)과 구별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는 사제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모든 행위를 무가치하거나 해로운 것으로 규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죄를 받는 행위가 양심의 안정을 돕는 유익한 쓰임을 지닐 수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또한 TCR.567:7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을 성찰하고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실천을 언급하면서, 그러한 자기 성찰조차 회피하는 개혁교회 신자들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 두 본문을 스베덴보리가 가톨릭의 성사적 사죄권 전체를 승인했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사제 앞에서 이루어지는 고백의 자연적·목회적 유익을 인정하면서도, 실제적인 죄의 용서와 거듭남은 주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분명히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TCR.528–531과 538–539항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회개의 가르침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회개가 자신의 죄를 막연하게 인정하거나 입술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먼저 자신을 성찰하여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악을 이길 힘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탐욕과 거짓말, 분노와 교만을 고백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러한 악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면 참된 회개의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TCR.538항은 죄의 고백을 구주이신 주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한다고 명시하며, 539항은 자기 성찰 후에 주님께 악을 물리칠 능력과 선을 행할 마음을 구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이미 인간의 죄를 알고 계시므로 죄를 일일이 열거하여 알려 드릴 필요가 없으며, 주님은 자비 자체이시므로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인간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는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만큼 제거됩니다. 따라서 참된 고백은 단순히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말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 그 악을 인정하고 실제로 돌이키는 영적 과정입니다. 사제 앞에서의 고백이 이러한 성찰을 도울 수는 있지만, 그 고백 자체가 내적인 회개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죄의 용서와 거듭남의 관계는 AC.9444–9449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저지른 죄가 그 사람의 생명에 뿌리내려 있으므로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지 않는 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AC.9445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을 행하거나 진리를 생각할 수 없으며, 오직 주님만이 인간을 죄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AC.9448에서는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 안에 머물게 하시고 악과 거짓에서 멀어지게 하시는 것이 죄의 용서라고 정의합니다. 또한 AC.9449는 죄가 용서된 상태의 표지로 하나님을 하나님 때문에 예배하고, 이웃을 이웃 때문에 섬기며, 악을 피하고 미워하는 삶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의 용서가 단순히 어떤 선언에 따라 인간의 법적 상태가 바뀌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사랑과 의지, 이해와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시는 역사와 관계됩니다. 물론 천주교도 사죄 이후의 회개와 성화를 중요하게 가르치므로, 이 차이를 천주교는 삶의 변화를 불필요하게 여기고 스베덴보리만 삶의 변화를 강조한다는 식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두 전통의 차이는 회개의 필요성 자체보다, 사제의 성사적 사죄 선언에 어떠한 영적 효력을 부여하며 그것을 주님의 실제적인 죄 사함과 어떻게 연결하는가에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죄의 고백이 실제 목회 현장에서 어떤 쓰임을 지녀야 하는가를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혼자 인정하기 어려울 수 있으며, 신뢰할 수 있는 영적 지도자에게 죄를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는 가운데 양심의 깨달음과 위로를 얻기도 합니다. 약5:16은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또한 자신의 죄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그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피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진정한 회개의 중요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고백하거나 영적 지도자의 조언을 받는 일과, 주님께서 인간의 악을 실제로 제거하시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목회자나 사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죄를 성찰하도록 도우며 회개와 화해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위로 인간의 내적인 악을 없애거나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사죄경을 듣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의 모든 악한 성향이 이미 제거되었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반대로 그가 여전히 자신의 약함과 싸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회개가 무가치하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점진적으로 거듭나게 하시며,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악을 반복해서 돌아보고 다시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적 지도자의 참된 역할은 자신에게 죄 사함의 권능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실제적인 회개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해성사의 참된 가치를 판단하려면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눅15의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아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어떤 인간적인 중재자가 아들의 죄를 제거하는 데 있지 않고, 돌아온 아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이 죄를 고백하기 전부터 그의 모든 내적인 상태를 알고 계시며, 그가 악에서 벗어나 선의 삶으로 돌아오기를 언제나 원하십니다. 따라서 참된 죄의 고백은 주님의 마음을 설득하여 원래 베풀지 않으려 하셨던 용서를 얻어 내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 그 악에서 돌이키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사제나 목회자, 신앙 공동체는 이러한 회개의 과정에서 귀중한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스베덴보리 역시 사제 앞에서의 고백과 사죄가 양심의 부담을 덜어 주는 자연적인 쓰임을 지닐 수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움을 주님께서 이루시는 실제적인 죄의 제거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가톨릭의 고해성사를 모든 경우에 무의미한 종교 의식으로 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안에는 자기 성찰과 죄의 인정, 뉘우침과 화해라는 중요한 선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은 그러한 유익과 사제의 성사적 사죄권에 관한 신학적 주장 사이의 차이입니다. 참된 죄의 용서는 오직 주님의 자비에서 비롯되며, 인간이 그분의 도움으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갈 때 실제적인 구원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결국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며, 고백과 회개의 궁극적인 목적은 용서를 선언받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이 실제로 새롭게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RC.007 해설)

 

요약

‘고해성사를 통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라는 명제에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인정하며 뉘우치고 하나님과 이웃에게 화해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고해성사를 단순히 사제에게 죄를 말하면 자동으로 용서받는 절차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참된 통회와 고백, 보속과 사죄를 함께 강조하며,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사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의 직무를 수행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구별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AC.9410:2–4에서 천국 열쇠와 매고 푸는 권세가 인간에게 독립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과 진리에 속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AC.9444–9449에서는 죄의 용서가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멀어지게 하시고 선과 진리 안에 머물게 하시는 실제적인 거듭남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사제 앞에서의 고백과 사죄를 모두 부정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TCR.539에서는 양심의 짐을 덜기 위하여 교회의 성직자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행위가 해롭지 않으며, 자기 성찰의 습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명시합니다. 그러나 이를 자연적 고백으로 구별하고,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실제로 돌이키는 영적 고백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TCR.567:7 역시 가톨릭 신자들의 자기 성찰과 고백 관행을 언급하면서 실제적인 회개를 회피하는 개혁교회 신자들을 비판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거나 성직자의 조언과 위로를 받는 행위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사제의 성사적 사죄 선언을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이루시는 실제적인 죄의 제거와 어떠한 관계로 이해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천주교는 사제의 권한을 주님에게서 받은 종속적인 직무로 설명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죄의 실제적인 제거가 오직 주님에 의한 회개와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사제의 고백 청취와 사죄가 목회적인 유익을 지닐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죄의 용서를 성사적으로 성립시키는 권능이라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고백은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그 악에서 돌이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며, 모든 죄의 용서와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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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6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신적 인격이시다’ - 성령은 또 한 분의 하나님인가,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역사인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구별되는 신적 인격이십니다. 성령은 단순한 능력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생각하시고 말씀하시며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근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성령께서 자신 안에 거하시며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죄를 책망하시며, 기도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신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신앙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직접 역사하신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사실이, 반드시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신적 인격이 존재한다는 뜻일까요? 성령의 역사가 인격적이라는 사실과 성령이 독립적으로 구별되는 신적 위격이라는 주장은 과연 같은 의미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성령의 신성과 그분이 인간 안에서 이루시는 모든 역사를 인정하면서도, 성령을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세 번째 신적 위격으로 이해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에 따르면 성령은 한 분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이며, 그 진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신적 능력과 역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성령의 존재와 활동을 인정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신성과 인격적 활동을 어떻게 이해하며 그 근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성령론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성령을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이후 서방 기독교 전통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신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3항 역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의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지니신 세 위격이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위격’(person)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 신이나 세 개의 개별 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뜻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세 위격이 동일한 신적 본질을 지니며, 하나의 신적 뜻과 능력 안에서 역사하신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성령론을 단순히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주장’으로 소개한다면 그 신학의 실제 내용을 왜곡하게 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영원부터 구별되는 세 신적 위격으로 생각하는 것이 신자들의 실제 사고 안에서는 세 하나님에 대한 관념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비판합니다.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기독교가 의도적으로 세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영원한 세 위격의 구별이 필요한가를 검토하는 일입니다.

 

성령을 구별되는 신적 인격으로 이해하는 중요한 성경적 근거는 요14장부터 16장에 나타나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요14:16에서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구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요14:26에서는 보혜사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요16:13에서는 진리의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스스로 말씀하지 않고 들은 것을 말씀하실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행13:2에서는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자신이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해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등장하고, 엡4:30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전통적인 성령론은 이러한 본문들이 성령의 인격성과 성부 및 성자와의 구별을 보여 준다고 이해합니다. 실제로 성령께서 가르치고 말씀하시며 인도하신다는 표현들은 성령을 단순한 비인격적 에너지나 추상적인 힘으로만 이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이 곧바로 성령이 주님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신적 위격이라는 결론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지는 별도의 신학적 질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말씀과 영이 활동의 주체처럼 묘사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격적인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사실과 별도의 신적 위격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구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46항에서 성령이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성이며, 이것이 바로 주님 자신이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발출하는 신성’(Divine Proceeding)이란 주님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신적 실체가 아닙니다. 한 분 주님에게서 나와 인간과 천국에 작용하는 신적 생명과 진리의 역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인간의 영혼과 몸, 그리고 그에게서 나타나는 활동에 비유합니다. 사람에게 영혼과 몸이 있고 그 사람에게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타나지만, 그것들이 서로 다른 세 사람을 이루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분 주님 안에는 성부라 불리는 신성 자체와 성자라 불리는 신적 인성, 그리고 성령이라 불리는 발출하는 신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하나님을 인간의 구성 요소로 환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구별이 하나의 신적 생명 안에서 성립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DL.46-54에서 성령이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성이라는 가르침을 성경의 여러 표현과 연결하여 설명하며, 특히 성령을 주님의 신적 생명과 신적 진리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론에서 성령은 주님과 구별되는 별도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신성이 인간에게 실제로 다가오고 역사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139항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성령을 신적 삼위일체가 계신 한 분 하나님, 곧 주 하나님 구주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이며 신적 능력과 역사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세 가지 표현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적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지혜와 진리 자체를 가리키며, 신적 능력은 그 진리가 실제로 역사할 수 있는 신적 힘을 뜻하고, 신적 역사는 그 힘이 인간의 개혁과 거듭남, 성화와 구원에 실제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신성이 아니라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성의 여러 측면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단순히 어떤 힘이나 영향력이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합니다. 성령은 주님과 분리된 비인격적인 자연 에너지나 우주적 생명력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인격적이시고 살아 계신 한 분 주님 자신이며,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지혜가 성령으로 표현되는 신적 역사를 통하여 인간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성령의 별도 위격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성령의 신성과 인격적인 역사까지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의 모든 신적 활동을 바로 주님 자신의 활동으로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요한복음의 보혜사 약속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다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요14:16에서 주님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를 말씀하셨지만, 이어 요14:18에서는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자신이 그들에게 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또한 요14:26에서는 성령께서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시고, 요16:14-15에서는 성령께서 주님의 것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알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본문들을 성령이 주님과 분리된 또 하나의 신적 존재라는 증거로 읽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부활과 영화를 완성하신 뒤 자신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발출하는 신적 진리를 통해 제자들에게 함께하신다는 약속으로 이해합니다. ‘주의 교리’ 51항은 특히 진리의 성령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관계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은 이러한 본문들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구별되는 위격적 관계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한 분 주님 안에서 신적 생명이 발출하고 전달되는 관계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두 해석은 동일한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성령의 정체와 신적 삼위일체의 구조를 서로 다르게 설명합니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성경의 특정 표현 하나만으로 모든 논쟁을 끝낼 수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성경 전체에서 한 분 하나님과 주님의 신성, 그리고 성령의 역사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일관되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실제로 인간 안에서 이루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 142-145항에서 성령의 신적 능력과 역사가 일반적으로 인간의 개혁과 거듭남을 이루며, 그에 따라 새롭게 함과 생명 주심, 성화와 칭의, 악에서의 정화와 죄 사함, 마침내 구원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령의 역사가 단순히 특별한 영적 체험을 일으키거나 종교적인 감동을 주는 일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본질적인 역사는 인간의 이해를 진리로 밝히고, 의지를 선으로 변화시키며,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교만을 깨닫고 그것을 버리려고 노력하며, 이웃을 미워하던 마음에서 돌아서고, 주님의 진리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변화는 성령의 신적 역사와 깊이 관계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그 변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말은 주님과 구별되는 별도의 신적 존재가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발출하는 신적 진리와 능력을 통하여 그 사람의 생명을 새롭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성령의 은사와 영적 체험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강렬한 감정이나 방언, 예언, 신유, 특별한 영적 감동과 연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개신교 전통이 그러한 체험을 동일하게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특별한 현상과 지나치게 결부하면, 사람의 실제 사랑과 삶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령의 신적 역사가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새로운 생명을 이루는 데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강렬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특별한 체험이 없더라도 자신의 악을 살피고 정직하게 살아가며 이웃을 위해 선한 쓰임을 행하려는 사람에게서는 주님의 진리가 실제로 생명과 결합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이 얼마나 극적으로 드러나는가가 아니라, 그 능력을 받아들이는 인간이 실제로 어떤 사람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을 특별해 보이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더욱 참된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성령을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역사라고 설명한다고 해서, 성령을 인간의 의식이나 양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능력이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에서 비롯되는 이기적인 욕망과 잘못된 판단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 강하게 떠올랐거나 마음에 특별한 평화가 찾아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성령께서 주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71-99항은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존중하시며 그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이성을 제거하거나 의지를 강제로 움직이시는 방식으로 거듭남을 이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며,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멀리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때에도 강렬한 느낌이나 특별한 현상보다 그 생각이 주님의 말씀과 조화되는지,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도록 이끄는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를 깊어지게 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인간의 도덕적 판단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진리가 인간의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통해 그 역사의 방향을 살피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성령께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전통적인 개신교 신자는 성부께 기도하고, 성자의 이름으로 간구하며, 성령께서 자신을 도우시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단정하거나, 그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실제로 세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정통 삼위일체 신앙은 분명히 한 하나님을 고백하며, 그 안에는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신뢰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서로 떨어진 존재들처럼 마음속에 그리기보다, 모든 신적 충만함이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바로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골2:9는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씀하며, 요14:9에서는 주님께서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신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한 분 하나님 자신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는 것은 주님과 별개의 신적 인격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아니라, 한 분 주님께서 자신의 신적 사랑과 지혜를 우리 안에 부어 주시고 우리의 이해와 의지를 새롭게 하시기를 구하는 일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바로 그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실제로 함께하시는 역사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신적 인격이십니까? 전통적인 개신교는 그렇다고 고백하며, 이러한 가르침에는 성령의 신성과 인격적인 역사,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인간 안에서 실제로 활동하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진리를 보존하면서도 성령을 영원부터 구별되어 존재하는 세 번째 신적 위격으로 이해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에게 성부는 주님의 신성 자체이며, 성자는 그 신성에서 비롯된 신적 인성이고,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와 능력과 역사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그분의 역사를 단순한 자연적 힘으로 낮추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밝히고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모든 역사가 바로 한 분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하게 물어야 할 질문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 외에 또 하나의 신적 인격이신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실제로 나에게 하시는 일은 무엇이며, 그 역사를 통해 나는 누구를 만나고 있는가? 내 이해를 밝히고 내 의지를 새롭게 하시며, 악을 멀리하고 선을 사랑하도록 인도하시는 분은 과연 누구이신가?’를 물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분은 한 분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발출하는 신적 진리와 능력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가르치고 새롭게 하시고 마침내 자신의 사랑과 지혜 안에서 거듭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성령의 신성과 발출, 그리고 성령께서 인간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의 참된 의미입니다. (PR.006 해설)

 

요약

전통적인 개신교는 성령을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세 번째 신적 위격으로 고백하며, 성령께서 가르치고 인도하시며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성령의 신성과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서 실제로 역사하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령을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별도의 신적 위격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의 교리’ DL.46-54와 ‘참된 기독교’ TCR.139-145에 따르면 성령은 한 분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이며, 그 진리를 통해 나타나는 신적 능력과 역사입니다. 성부는 주님의 신성 자체이고, 성자는 그분의 신적 인성이며, 성령은 그 신성과 인성으로부터 발출하여 인간에게 역사하는 신성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인격적 활동을 인정하는 것과 성령을 별도의 영원한 위격으로 이해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령의 역사는 추상적인 에너지나 단순한 종교적 감동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새롭게 하며 악을 멀리하도록 인도하시는 실제적인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령의 역사는 특별한 체험이나 신비로운 현상만으로 판단할 수 없으며, 주님의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실제 삶에서 체어리티와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가를 통해 살펴야 합니다. 성령을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이 바로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거듭남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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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6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세례는 원죄를 씻어 주고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 물로 씻는 의식과 실제적인 거듭남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해설

‘세례는 원죄를 씻어 주고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이것은 천주교의 ‘세례성사’(洗禮聖事, Sacrament of Baptism)에 관한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천주교는 세례를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첫 번째 성사이며,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의 통로라고 가르칩니다. 아직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아기에게도 세례를 베푸는 것은 이러한 이해와 관계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의 상태에 있으므로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죄에서 벗어나거나 구원받을 수 없으며, 오직 주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세례를 받는 순간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의지가 실제로 변화되는 것일까요? 아직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는 아기도 세례를 받으면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세례를 주님께서 제정하신 중요한 성례로 인정하면서도, 참된 거듭남은 주님의 능력으로 인간의 악이 제거되고 선과 진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세례의 성사적 의미와 실제 거듭남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이번 명제는 세례의 필요성을 단순히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의 본질과 주님의 은총, 그리고 인간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이해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213항은 세례를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의 기초이자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인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결합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1262–1263항은 세례의 중요한 효과가 죄의 정화와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출생이며, 세례를 통하여 원죄와 이전의 개인적인 죄가 용서된다고 설명합니다. 1265항은 세례받은 사람이 은총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는 세례를 단순히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거나 교회에 가입하는 의식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은총을 베푸시는 성사이며, 그 안에서 인간에게 새로운 영적 생명이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세례를 받는 순간 인간의 모든 악한 성향이 사라지고 이후에는 죄를 지을 위험도 없어진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서 1264항은 세례 이후에도 죄로 기우는 성향인 ‘사욕편정’(邪慾偏情, concupiscence)이 남는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272항은 세례의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표지가 남더라도 죄로 인하여 그 구원적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입장을 ‘세례만 받으면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역시 세례 이후의 회개와 영적 성장, 사랑의 실천을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세례 자체를 통하여 죄의 용서와 은총에 의한 새로운 출생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원죄’(原罪, original sin)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천주교는 원죄를 각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실제로 저지른 개인적인 죄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404–405항은 원죄를 원래의 거룩함과 의로움이 결핍된 상태로 설명하며, 그것은 자신이 직접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 본성 안에서 전해진 상태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동시에 천주교는 이러한 상태가 인류 최초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합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차이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520항에서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모든 후손에게 전달되었다는 전통적인 설명을 비판합니다. 그는 아담을 인류 최초의 한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를 나타내는 표상적 인물로 해석하며, 에덴동산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말씀도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설명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악한 성향을 지니는 이유를 아담 한 개인의 범죄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 선천적인 악의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설명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악을 향한 성향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사실과, 그 성향을 아담 한 사람에게서 유전된 원죄의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21에서 인간이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악을 ‘유전악’(遺傳惡, hereditary evil)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유전되는 것은 인간 자신이 실제로 저지른 죄가 아니라 악을 향한 성향입니다. 인간은 부모와 조상에게서 여러 가지 악한 성향을 물려받지만, 그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 모든 악을 자신이 실제로 행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후에 유전악 자체로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받아들이고 행한 악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의 성향은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을 통하여 제어되고 변화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유전된 죄책을 어떤 의식으로 제거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존재하는 악의 성향이 어떻게 주님의 능력으로 다스려지고 그 사람이 실제적인 선의 삶으로 나아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천주교 역시 원죄를 물로 씻어 내는 물질적인 오염처럼 이해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세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원죄의 상태가 제거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두 전통의 차이는 물에 어떤 물리적 능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의 기원과 세례의 성사적 효력, 실제적인 거듭남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신학적 차이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천주교의 원죄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거나,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타락한 성향 자체를 부정했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가 세례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TCR.667–691에서 세례를 하나의 독립된 장으로 다루며 그 영적 의미와 쓰임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세례를 무의미한 종교 의식으로 여기거나 폐기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세례를 성찬과 함께 주님께서 제정하신 중요한 성례로 인정합니다. 다만 TCR.670–673에서 세례의 물로 씻는 행위가 나타내는 것은 악과 거짓에서 정화되는 ‘영적 씻음’(spiritual washing)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물은 인간의 몸을 씻을 수 있지만, 인간의 마음과 의지에 자리 잡은 악을 직접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몸을 아무리 씻어도 그 사람 안에 있는 도둑질과 강도질의 성향까지 씻겨 나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673에서는 내면이 악과 거짓에서 정화되지 않는다면 외적인 씻음만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그의 비판은 세례를 베푸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외적인 의식이 인간의 내적 변화와 관계없이 죄를 제거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세례의 참된 의미는 물에 어떤 독립적인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화하시고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례가 단순히 인간의 결심을 보여 주는 상징에 불과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가 영계의 질서와 연결되는 실제적인 쓰임을 지닌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677–687에서 세례의 세 가지 쓰임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첫째, 세례는 사람을 기독교회에 입문시키며 동시에 영계의 기독교인들과 연결되게 합니다(TCR.677–680). 둘째, 세례는 사람이 구속주이자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그분을 따르도록 하는 쓰임을 지닙니다(TCR.681–683). 셋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그 사람이 주님에 의하여 거듭나는 것입니다(TCR.684–687). 이 세 가지는 서로 독립된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연결됩니다. 교회에 입문하는 것은 주님을 알고 인정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주님을 인정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거듭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단순히 교회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의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 자연계와 영계가 연결되는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러한 쓰임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세례를 받는 순간 인간의 내적인 악이 제거되어 거듭남이 완성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특히 TCR.684–685에서는 세례의 궁극적인 목적이 주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통하여 실제로 거듭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세례의 세 가지 쓰임은 바로 이러한 목적을 향하여 연결되며, 앞선 두 가지 쓰임은 궁극적인 거듭남 안에서 그 의미를 완성합니다. 따라서 세례의 가치는 외적인 의식이 지닌 영적 질서와 그 의식이 가리키는 실제적인 거듭남을 함께 이해할 때 분명해집니다.

 

이러한 이해는 유아세례에서 더욱 중요해집니다. 천주교는 가톨릭교회 교리서 1250항에서 유아도 원죄의 상태로 태어나므로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TCR.677에서 유아가 아직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 믿음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유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의 내적인 이해와 의지가 이미 새로워졌으며 거듭남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유아세례를 무의미하게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세례를 통하여 유아가 기독교회에 입문하고 영계의 기독교인들과 연결되며, 주님께서 천사들을 그 아이에게 배정하여 주님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보호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세례를 단순한 인간의 종교적 선언보다 깊은 영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영계의 연결이 장래의 구원과 거듭남을 자동으로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게 될 때에는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거듭남을 위한 중요한 시작이 될 수 있지만, 그 시작을 곧 완성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천주교의 성사적 새 출생과 스베덴보리의 실제적인 거듭남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성경 역시 세례의 외적인 씻음과 실제적인 영적 출생의 관계를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요3:3-8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세례성사의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말씀에서 ‘물’은 진리를 나타내며, ‘성령’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의 역사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씀은 외적인 물의 의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진리와 사랑으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영적 과정을 드러냅니다. 행2:38에서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며, 벧전3:21은 세례를 단순히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와 연결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세례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세례가 외적인 씻음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도 성경 본문과 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석을 구별해야 합니다. 요3장의 물과 성령을 영적인 진리와 주님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에 근거한 해석이며, 그 자체가 천주교의 세례 해석을 역사적으로 반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의 외적인 표지가 실제로 악과 거짓에서 정화되는 내적인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죄의 용서와 거듭남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611–614에서 죄의 용서와 제거가 거듭남의 과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죄의 용서는 인간이 행한 모든 악이 단순히 사라져 과거의 상태와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에서 멀어지게 하시고 선 안에 머물게 하시는 과정과 관계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피하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만큼 그 악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유 가운데 진리를 받아들이고 마치 자기 자신이 행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며 선을 실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죄의 용서와 거듭남은 인간의 사랑과 의지, 이해와 삶이 실제로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천주교 역시 세례 이후에 회개와 성화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세례 때 원죄와 이전의 죄가 실제로 용서되고 은총에 의한 새 출생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죄의 제거와 영적 출생의 실제적인 성취를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지속적인 과정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두 전통의 차이는 세례 이후에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보다, 세례 자체에 어떤 영적인 효력을 부여하고 그 효력과 실제 거듭남을 어떻게 연결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세례 이후의 신앙생활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자신의 악을 돌아보거나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세례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교만과 탐욕, 이기심과 분노를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같지만,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러한 차이는 중요합니다. 참된 거듭남은 과거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현재 그 사람 안에서 어떤 선과 진리의 삶을 이루고 계시는가와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례를 받은 사람의 내면을 다른 사람이 임의로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과 영적인 상태는 주님께서 아십니다. 다만 세례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이미 모든 영적 과정을 완성했다고 생각하기보다, 주님께서 자신을 어떤 삶으로 부르셨는지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례는 주님을 알고 인정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부르는 거룩한 시작입니다. 그 시작이 참된 열매를 맺으려면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삶이 뒤따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세례의 참된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를 주님께서 제정하신 중요한 성례로 인정하며, 그 안에 교회로의 입문과 영계의 질서, 주님을 인정하고 거듭남으로 나아가는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세례를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 낸 형식이나 불필요한 의식으로 여기는 것은 그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례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 세례를 받는 순간 인간의 모든 악이 제거되고 거듭남이 완성된다고 믿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외적으로 깨끗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내적으로 선과 진리를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마23:25-26에서 주님께서는 잔과 대접의 겉만 깨끗하게 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시면서 먼저 안을 깨끗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세례의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도 적용됩니다. 겉 사람의 씻음은 속 사람의 정화를 가리켜야 하며, 그 외적인 표지는 실제로 거듭나는 삶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세례받은 사람은 자신의 과거 세례를 구원의 완성으로 여기기보다, 주님께서 자신을 악과 거짓에서 정화하시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참된 가치는 물로 씻는 외적인 행위와 그 행위가 나타내는 영적인 정화를 구별하면서, 그 둘을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 안에서 함께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세례는 거듭남의 길을 가리키는 거룩한 입문이며, 그 길에서 실제로 인간을 정화하고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RC.006 해설)

 

요약

‘세례는 원죄를 씻어 주고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라는 명제에는 인간이 주님의 은총으로 죄에서 정화되고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세례를 통하여 원죄와 이전의 개인적인 죄가 용서되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출생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세례 후에도 죄로 기우는 성향이 남으며 지속적인 회개와 성화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므로, 이를 세례만 받으면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천주교의 원죄는 개인이 직접 저지른 죄가 아니라 원래의 거룩함과 의로움이 결핍된 상태를 의미하므로, 스베덴보리의 유전악과 동일한 개념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20–521에서 아담 한 개인의 죄가 모든 인간에게 전달되었다는 전통적인 설명을 비판하며, 인간이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것은 자신이 실제로 저지른 죄가 아니라 악을 향한 성향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670–673에서는 세례의 물로 씻는 행위가 악과 거짓에서 정화되는 영적 씻음을 나타내지만, 외적인 씻음 자체가 인간의 내적인 악을 제거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세례를 무의미한 의식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TCR.677–687에서 세례의 첫째 쓰임은 기독교회로의 입문과 영계의 기독교인들과의 연결, 둘째 쓰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따르는 것, 셋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주님에 의한 거듭남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세례가 거듭남과 관계된다는 사실이나 세례를 통하여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지 않습니다. 세례의 외적인 의식 자체에 원죄의 제거와 새로운 영적 출생을 직접 성립시키는 성사적 효력을 부여하고, 그것을 실제적인 악의 제거와 구별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천주교가 세례에 의한 은총의 새 출생과 그 이후의 지속적인 성화를 구별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세례는 거듭남의 시작과 목적을 가리키며 영계와 연결되는 실제적인 쓰임을 지니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세례받은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죄의 용서와 거듭남은 주님께서 인간의 이해와 의지, 사랑과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시는 과정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참된 가치는 외적인 의식의 효력만이 아니라 그 의식이 가리키는 영적 정화와 거듭남의 삶에 있으며, 인간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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