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은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좀 풀어 설명해 주세요.

 

AC.33에서 갑자기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처음 읽으면 다소 뜬금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문장은 앞에서 말한 ‘광명체’, 곧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그 빛이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빛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빛이 사람 안에서 이루어 내는 생명의 상태’를 말하기 위해 이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앞의 문맥을 잠깐 정리해 보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창세기 1장에서 넷째 날에 나타나는 ‘광명체들’은, 문자적으로는 해와 달과 별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랑과 신앙의 빛’으로 설명합니다.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 안에서 진리가 빛처럼 드러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 빛이 단순히 지식의 빛인가, 아니면 생명의 빛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지점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참된 빛은 사랑에서 나오는 빛’이며, 그 사랑이 바로 참된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3에서는 ‘사랑이 생명이다’라는 원리를 강조합니다. 사람은 흔히 생각을 자신의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생각은 생명의 중심이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인간의 진짜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 사람의 삶 전체를 결정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을 사랑하면 그의 생각과 계획과 행동은 모두 돈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사람이 명예를 사랑하면 그의 생각과 삶도 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그의 생각과 삶도 자연스럽게 그 사랑을 이루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랑이 곧 기쁨의 근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할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어떤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는 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밤잠을 못 자고 힘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그것을 단순한 고통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자연스럽게 기쁨이 따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기쁨과 행복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쁨은 사랑의 감각이고, 행복은 사랑의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제 AC.33의 흐름을 다시 보면 왜 이 이야기가 여기서 나오는지 이해됩니다. 넷째 날의 ‘광명체’는 인간 안에 진리의 빛이 나타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빛이 진짜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이 사랑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만약 진리의 빛이 사랑과 결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차가운 지식의 빛’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대목에서 강조합니다. 진리의 빛이 참된 빛이 되려면 그것이 사랑에서 나와야 하고, 그 사랑이 바로 인간의 생명이며 기쁨의 근원이라고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앞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멈춘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히 생각의 원동력이기 때문인가? 그래서 그는 바로 이어서 설명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생각을 움직이는 힘일 뿐 아니라 ‘인간의 생명 자체이며,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살아 있다는 느낌, 기쁨을 느끼는 경험, 행복을 맛보는 상태는 모두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보면 결국 ‘사랑하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옵니다. 가족을 사랑하면 가족과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끼고, 일을 사랑하면 그 일을 할 때 기쁨을 느끼고,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을 따르는 삶에서 깊은 평안을 느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행복도 결국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상태’에서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AC.33에서 갑자기 참된 사랑과 참된 행복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사실 문맥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넷째 날의 빛, 곧 사랑과 신앙의 빛이 인간 안에 나타나면 그 결과로 ‘참된 생명이 시작되고, 그 생명 속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의 광명체 이야기는 단순히 빛의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안에 사랑의 생명이 깨어나는 이야기’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 설명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AC.33, 창1:14-17, ‘사랑이 곧 생명이다 : 참된 사랑과 거짓 사랑의 결정적 분별’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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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심화 1, ‘생각이 즉시 멈춘다’

AC.33.심화 1. ‘생각이 즉시 멈춘다’ 위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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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심화

 

1. 생각이 즉시 멈춘다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것을 생생히 본 적이 있습니다.’(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말인데요,이 사례에 대한 좀 더 생생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AC.33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 이해의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그는 인간의 ‘생각(thought)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love) 또는 욕망(desire)’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영계에서 관찰된 현상이라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먼저 일상적인 경험에서 비슷한 현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에 매우 관심이 있을 때는 생각이 끊임없이 돌아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한다면,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도 그 생각을 하고, 운전하면서도 생각하고, 잠들기 전에도 그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그 일을 향한 강한 사랑 혹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전혀 관심이 없는 주제에 대해서는 생각이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누가 어려운 수학 이론을 설명해도 그 분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몇 분 지나지 않아 생각이 멈추고 다른 생각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이미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원리입니다. ‘생각은 사랑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흐릅니다.’

 

좀 더 극단적인 예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사람이 깊은 우울 상태에 들어가면 종종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거나 ‘머리가 텅 빈 것 같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런 상태에서는 생각이 거의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뇌 기능이 완전히 멈춘 것이 아니라, ‘사람을 움직이던 욕망이나 관심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 생기면 생각이 폭발적으로 많아집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나 큰 기회를 잡았을 때, 사람의 생각이 매우 빠르게 돌아가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원리를 영계에서 더 분명하게 보았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영계에서는 각 영이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완전히 움직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에게서 특정한 사랑이나 욕망을 잠시 제거하면, 그 영의 생각이 실제로 멈추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그 영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생각이 흐르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마치 기계에서 동력이 빠진 것처럼 움직임이 멈춘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상태를 ‘마치 죽은 사람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인간 구조를 떠올리면 좋습니다. 그는 인간을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사랑하는 존재’로 봅니다. 사랑이 중심이고, 생각은 그 사랑을 섬기는 기능입니다. 그는 이것을 여러 번 이렇게 설명합니다. 의지는 사랑의 자리이고, 이해는 생각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해는 항상 의지를 섬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 생기면, 이해가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한 생각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을 얻는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방법을 생각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은 사랑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멈춘다’고 말합니다. 생각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힘을 받기 때문입니다. 마치 불이 연료 없이 탈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연료가 사랑이라면 불꽃이 생각입니다. 연료가 없으면 불꽃이 사라지는 것처럼, 사랑이 없으면 생각도 흐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흔히 자신을 ‘생각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결국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생각도 그 방향으로 흐르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중심이 되면 생각도 그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랑이나 욕망이 완전히 제거된다면, 그것을 따라 움직이던 생각도 함께 멈추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본 장면은 바로 이 원리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였습니다. 어떤 영에게서 사랑이 잠시 제거되자 그 영의 생각이 흐르지 않았고, 마치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생각이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이 구절이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의 진짜 생명은 생각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생각은 사랑이 움직이는 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고, 사랑이 사라지면 생각도 멈춥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강한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AC.33, 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AC.33.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은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좀 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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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사랑이 곧 생명이다 : 참된 사랑과 거짓 사랑의 결정적 분별’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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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심화

 

5. ‘17: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17:2) His face did shine as the sun, and his raiment was white as the light (Matt. 17:2).

 

이 구절이 AC.32에 인용된 이유는, 앞에서 해와 달과 별이 사랑과 신앙과 진리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 후, 그 상응의 가장 완전한 실체가 바로 주님 자신 안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예언서들에서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는 모습이 교회의 황폐를 뜻했고, 반대로 해와 달이 빛나는 모습은 교회의 회복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변화산에서는 그 모든 상징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십니다.

 

본문에서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났다’고 하는데, 스베덴보리에게 얼굴은 사람의 가장 내적인 것을 드러내는 표상입니다. 그리고 해는 사랑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다는 것은 주님 안에 있는 신적 사랑 자체가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천국의 해가 주님이라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매우 깊은 영적 사실의 표현입니다. 주님의 신적 사랑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또한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는 말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옷은 내적인 것을 덮고 표현하는 외적인 진리, 곧 신적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얼굴은 사랑을, 옷은 진리를 나타냅니다. 얼굴이 해처럼 빛난 것은 신적 사랑을, 옷이 빛처럼 희어진 것은 신적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는 AC.30-32에서 설명하는 해와 빛의 관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랑은 해이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는 빛입니다.

 

따라서 변화산 사건은 단순히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잠시 나타난 사건이 아니라, 창세기 넷째 날의 영적 의미를 살아 있는 모습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와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장 완전하게 보여 주는 장면인 것입니다. 해는 주님의 신적 사랑이며, 빛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입니다.

 

특히 AC.32의 문맥에서는 해와 달과 별이 교회와 인간 안에 존재하는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뜻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는데, 변화산에서는 그 상징들이 더 이상 인간 안의 상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원천이신 주님 안에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사람 안의 사랑은 주님의 신적 사랑에서 오고, 사람 안의 진리는 주님의 신적 진리에서 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말씀에서 ’가 단순한 자연계의 태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 자신 안에 있는 신적 사랑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변화산에서 주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다는 것은 주님이 곧 사랑의 태양이심을 보여 주는 것이며, 따라서 창세기와 선지서와 복음서에 나오는 해에 대한 상응 해석이 모두 하나의 동일한 진리 위에 서 있음을 증명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AC.32, 창1:14-17,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다 : 마지막 시대에 드러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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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심화 4, ‘마24:29’

AC.32.심화 4. ‘마24:29’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24:29) The sun shall be darkene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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