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5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성부께 중보하신다’ - 주님의 중보는 성부를 향한 간청인가, 인간을 향한 신적 자비인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신 뒤에도 성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에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께서 지금도 하늘에서 자신을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죄와 연약함 속에서도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게 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성부께 중보하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부 하나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진노하시지만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근거로 성부께 용서를 간청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인간을 용서하기 원하시는 분은 성자이시고, 그 간청을 받아들여 용서하시는 분은 성부이신 것입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전통적인 중보 이해를 다시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그는 주님의 중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중보가 서로 구별된 두 신적 존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간청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신적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전달되는 역사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중보와 간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주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중보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딤전2:5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히7:25는 예수님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므로 자신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롬8:34 역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개신교는 예수님의 중보가 십자가에서 끝난 과거의 사건만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 이후에도 계속되는 구원 사역이라고 고백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 설명하며, 제8장 8항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시고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에게 구원을 적용하신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개신교 신학 자체가 성부는 사랑이 없고 성자만 인간을 사랑하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한 신적 본질과 뜻을 지니신다고 고백합니다. 다만 신자들의 실제적인 사고 속에서는 성부는 심판하시고 성자는 용서를 간청하시는 분처럼 서로 다른 역할이 지나치게 분리되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문제는 바로 이러한 분리된 하나님 이해입니다.
중보라는 개념에는 본래 서로 떨어져 있거나 직접 관계를 맺기 어려운 두 편을 연결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서도 중재자는 서로 갈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해를 돕거나, 한쪽의 사정을 다른 쪽에 전달하며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부르면 자연스럽게 그분이 인간의 사정을 성부 하나님께 전달하고 용서를 요청하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특히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고 말씀하는 장면은 이러한 상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성부 하나님께서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 오른편에 앉으신 성자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이름을 하나씩 언급하며 자비를 간청하시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표현을 지상의 왕궁과 재판정에 비추어 이해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편’은 지위와 권능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말씀을 곧바로 성부와 성자가 서로 다른 두 보좌에 앉아 대화하신다는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신적 권능과 영광 안에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중보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경의 문자적 표현과 그 표현이 전달하는 신적 현실을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8573항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룹니다. 그는 사람들이 주님의 중보를 생각할 때 흔히 예수님께서 성부 곁에 앉아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성부께 용서와 자비를 간청하시는 모습을 떠올린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인간적인 관계를 신적 관계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의 중보에는 모든 사랑과 자비 안에 존재하는 끊임없는 간구라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고, 어려움에서 벗어나며, 선한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자녀에게 좋은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역시 그 이웃이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사랑 안에는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을 위한 지속적인 마음이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런 사랑의 성향을 통해 신적 중보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주님의 중보는 성부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반복되는 말의 간청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가 끊임없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중보가 계속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계속해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구원하기 위해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AC.8705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주님의 중보와 간구를 이해하려면 ‘성부’와 ‘성자’가 속뜻에서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해석에서 성부는 신적 선을, 성자는 신적 진리를 가리킵니다. 신적 선은 주님의 사랑 자체이며, 신적 진리는 그 사랑에서 발출하여 인간에게 다가오는 신적 지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태양의 불과 빛에 비유합니다. 태양 자체의 불은 인간의 눈으로 직접 바라보기 어렵지만, 그 태양에서 나오는 빛을 통해 우리는 사물을 보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무한한 신적 선 자체는 유한한 인간이 직접 파악할 수 없지만, 그 신적 선에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적 진리가 신적 선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두 하나님 사이에서 누군가가 설득하고 간청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분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 진리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때문에 주님께서 성부와 중보하신다는 표현의 속뜻을, 한 분 주님 안에서 신적 진리가 신적 선과 관계하며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보는 두 신적 인격 사이의 협상이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의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실제로 성부께 기도하신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겟세마네에서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고, 요17에서는 제자들과 장차 자신을 믿을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성부와 성자가 구별되는 신적 위격이라는 전통적인 이해의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지상 생애에 낮아지심의 상태와 영화의 상태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AC.2250은 주님께서 지상에서 낮아지심의 상태에 계실 때에는 여호와께 다른 분을 향하듯 기도하고 중보하셨지만, 인성이 완전히 영화되어 신성과 하나가 되신 뒤에는 그러한 방식으로 중보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성에서 직접 자비를 베푸시고 구원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지상에서 기도하신 것은 외적으로 꾸며진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 안에서 실제로 시험과 고난을 겪으셨으며, 그 인성이 영화되는 과정에서 내적인 신성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는 그 인성 자체가 신성하게 되어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중보를 지상에서의 낮아지심과 동일한 방식의 간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별은 주님의 중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이전과 이후의 중보가 어떻게 다르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135항은 이러한 중보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중재와 중보기도, 속죄와 화목에 관한 성경의 표현들이 한 분 하나님의 신적 인성에서 나타나는 은혜의 역사와 관계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중재는 인간이 신적 인성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께서도 그 인성을 통해 인간에게 가까이 오셔서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일을 뜻합니다. 또한 중보기도는 그러한 중재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으로서, 사랑 자체에서 나오는 자비와 용서와 은총의 지속적인 역사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적 인성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직접 파악할 수 없는 무한한 신성을 인간에게 드러내시기 위해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성을 영화하심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과 결합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사정을 별도의 하나님께 전달하는 중간적인 신적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성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인간에게 실제로 다가오는 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보는 바로 이 신적 인성을 통하여 한 분 주님께서 인간과 결합하시는 역사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보면 중보를 둘러싼 가장 깊은 오류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신자는 자신이 죄를 지었을 때 성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벌하시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공로를 내세워 성부의 진노를 가라앉히시므로 용서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에는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사랑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듯한 인상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성부는 주님의 신성 자체이며, 성자는 그 신성에서 비롯된 인성입니다. 그러므로 성부께서 인간을 멸하려 하시고 성자께서 인간을 보호하려 하신다는 식의 대립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요3:16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려는 인간의 노력도 아니고, 성자가 성부의 마음을 바꾸는 일도 아닙니다.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자체입니다. 또한 요14:9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신적 사랑이 인성을 통해 드러난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사랑이 부족한 신적 존재를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지금도 인간을 위해 중보하신다는 말의 실제적인 의미를 더욱 깊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누군가가 하늘의 법정에서 대신 변호해 준다는 뜻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악에서 돌아설 수 있도록 인도하시며, 자신의 자유 안에서 선을 선택하도록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악을 죄로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과정에도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가 역사합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과 감정 하나하나가 곧바로 주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욕망과 잘못된 판단도 존재하므로 진리의 분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인간을 선과 진리의 방향으로 인도하시고 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보존하신다는 사실은 스베덴보리의 중보 이해와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의 중보는 인간을 대신하여 성부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계속 역사하시는 구원의 활동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님의 중보는 과거에 끝난 것도 아니며, 인간이 죄를 지을 때에만 특별히 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무한한 사랑이 인간을 향해 계속되는 한, 그 중보의 역사 역시 끊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표현은 성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으므로 성자에게 대신 부탁한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주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분의 성품과 권능, 그리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모든 선과 진리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며,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여 간구하는 것입니다. 요14:13-14에서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자신이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도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또한 요16:26-27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구할 것이며, 아버지께서 친히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부가 인간을 사랑하시도록 성자가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과 구별됩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학 역시 성부의 사랑을 인정하지만,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그 신적 사랑 자체를 만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두 신적 존재 사이에 우리의 요청을 전달하는 절차가 아니라, 한 분 주님께 직접 나아가 그분의 선과 진리 안에서 자신의 삶이 변화되기를 구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기도와 회개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바꾸어 놓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은 뒤 ‘예수님께서 성부께 잘 말씀해 주실 테니 나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악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중보의 의미를 지나치게 외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인간이 자신의 악을 계속 사랑하도록 허락하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용서하시기 원하시며,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도록 끊임없이 도우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죄 사함을 단순히 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없애는 선언으로 이해하지 않고, 주님께서 인간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선 안에 머물도록 보존하시는 역사와 결합하여 설명합니다(TCR.611-614). 따라서 참된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악을 죄로 여기고 멀리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려는 실제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의 중보는 인간이 아무런 변화 없이 용서받은 상태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점점 더 천국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돕는 역사입니다. 이때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 역사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성부께 중보하고 계십니까? 전통적인 개신교는 그렇다고 고백하며, 그 고백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인간을 위해 역사하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주님의 중보가 계속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중보를 성부와 성자가 서로 다른 두 신적 존재로서 대화하고 간청하는 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는 낮아지심의 상태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셨지만, 인성이 완전히 영화된 뒤에는 신성과 인성이 한 분 주님 안에서 완전하게 하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계속되는 중보는 주님께서 자신의 신적 인성을 통해 인간에게 사랑과 진리를 전달하시고, 인간을 악에서 구원하며, 자신과 결합하도록 끊임없이 역사하시는 신적 자비를 뜻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더 이상 성부의 진노와 성자의 자비 사이에서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기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성부를 설득해 줄 또 하나의 신적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직접 다가오셔서 사랑과 지혜를 베푸시는 한 분 주님 자신입니다. 결국 참된 중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도록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신적 인성을 통하여 인간에게 다가오시고 그 인간을 자신과 결합시키시는 영원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PR.005 해설)
요약
전통적인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과 승천 이후에도 성부 하나님 앞에서 신자들을 위해 중보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에는 주님께서 지금도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기 위해 역사하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중보를 성부와 성자가 서로 다른 두 신적 존재로서 대화하고 간청하는 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비밀’ AC.8573과 AC.8705에 따르면 성부는 신적 선을, 성자는 신적 진리를 가리키며, 중보는 신적 사랑에서 발출하는 진리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는 역사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지상에서 낮아지심의 상태에 계실 때에는 아버지께 기도하셨지만, 인성이 영화된 뒤에는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셨으므로 이제 자신의 신성에서 직접 자비를 베푸시고 구원하십니다(AC.2250). ‘참된 기독교’ TCR.135 역시 중보기도를 한 분 하나님의 신적 인성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사랑과 자비의 역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중보는 지금도 계속되지만, 그 의미는 성부의 마음을 바꾸기 위한 간청이 아니라 인간에게 신적 사랑과 진리를 전달하고 그를 악에서 구원하여 주님과 결합시키는 데 있습니다. 참된 중보의 목적은 인간이 변화되지 않은 채 용서받았다고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받아들여 실제로 회개하고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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