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7)



AC.270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eat of the ground in great sorrow)는 것이 비참한 삶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뒤 문맥으로부터 분명하며, 더구나 먹는다는 것은 내적 의미, 곧 속뜻으로는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이러한 삶의 상태는 악한 영들이 공격하기 시작하고, 함께 있는 천사들이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애쓰게 될 때 뒤따른다는 사실로도 분명합니다. 이러한 삶의 상태는 악한 영들이 점차 우세해지기 시작할 때 더욱 비참해집니다. 그들은 겉 사람을 지배하게 되고, 천사들은 속 사람만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속 사람 안에는 이미 남아 있는 것이 너무 적어서, 천사들은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을 그곳에서 거의 찾아낼 수 없게 됩니다. 이 때문에 사람 안에는 비참함과 불안이 생겨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이러한 비참함과 불안을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참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짐승들만큼도 알지 못합니다. 그들 역시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땅의 것만 바라보고, 세상 것만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own만을 사랑하며, rational까지 완전히 동의한 가운데 자기 욕망과 감각을 마음껏 따릅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 싸움이나 유혹을 거의 경험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러한 유혹에 노출된다면, 그들의 생명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스스로를 더욱 깊이 저주받은 상태에 이르게 하고, 더욱 깊은 지옥의 정죄 속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이 이러한 상태를 이 세상에서는 겪지 않도록 허락하십니다. 대신 그들은 다른 삶, 곧 영계에 들어간 뒤에 그러한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유혹이나 고난 때문에 영적으로 죽을 위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매우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상태가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으로 뜻하는 바입니다. That to “eat of the ground in great sorrow” signifies a miserable state of life is evident from what precedes and follows, not to mention that to “eat,” in the internal sense, is to live.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fact that such a state of life ensues when evil spirits begin to fight, and the attendant angels to labor. This state of life becomes more miserable when evil spirits begin to obtain the dominion; for they then govern the external man, and the angels only the internal man, of which so little remains that they can scarcely take anything thence with which to defend the man; hence arise misery and anxiety. Dead men are seldom sensible of such misery and anxiety, because they are no longer men, although they think themselves more truly so than others; for they know no more than the brutes of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and what is eternal life, and like them they look downward to earthly things, or outward to worldly ones; they favor only their own, and indulge their inclinations and senses with the entire concurrence of the rational. Being dead, they sustain no spiritual combat or temptation, and were they exposed to it their life would sink under its weight, and they could thereby curse themselves still more, and precipitate themselves still more deeply into infernal damnation: hence they are spared this until their entrance into the other life, where, being no longer in danger of dying in consequence of any temptation or misery, they endure most grievous sufferings, which likewise are here signified by the ground being cursed, and eating of it in great sorrow.

 

 

해설

 

이 글은 창3:17의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을 영적 차원에서 설명하면서, 유혹과 영적 죽음의 차이를 매우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먹는다’는 것이 말씀에서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가 아니라 ‘산다’, 곧 어떤 상태 안에서 살아간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것은 고통스럽고 비참한 영적 상태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뜻합니다.

 

이러한 비참함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떠날수록 점점 심해집니다. 악한 영들은 겉 사람을 더욱 강하게 지배하려 하고, 천사들은 속 사람을 통하여 사람을 보호하려 애씁니다. 그러나 사람이 오랫동안 own과 감각만을 따라 살아오면, 속 사람 안에서 천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줄어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속 사람을 떠나시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이 그 생명의 흐름을 계속 거부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리메인스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암시합니다. 천사들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속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해 두신 선과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끊임없이 그것을 거부하면, 천사들이 작용할 수 있는 기반은 점점 약해집니다. 그래서 영적 싸움은 점점 더 힘겨워지고, 사람은 깊은 불안과 공허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이러한 불안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평안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영적 생명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병이 너무 깊어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듯이,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오히려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현실적이고, 더 현명하다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관심이 오직 세상과 자기 자신에게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나 천국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며, 자신의 own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rational까지 동의한 가운데 당연한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창3에서 rationalown에 동의한 결과이며,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계속 설명해 온 타락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는 깊은 유혹을 거의 겪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강한 영적 유혹을 받게 되면, 그것을 이겨 낼 리메인스와 영적 생명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깊은 악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유혹을 허락하시며,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유혹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러한 섭리가 사후에도 계속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세상에서 유혹을 충분히 겪지 않았던 사람들은 영계에서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면서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의 고통은 더 이상 거듭남을 위한 유혹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삶과 사랑의 결과를 온전히 마주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창3:17의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의 더 깊은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AC.270은 영적 유혹과 영적 죽음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주는 중요한 글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유혹을 통하여 괴로움을 겪지만, 그 유혹은 거듭남을 위한 주님의 역사입니다. 반대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그러한 유혹조차 거의 느끼지 못하는데, 그것은 건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영적 감각이 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은 단순한 육체적 노동의 어려움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비참한 영적 삶과, 동시에 그 가운데서도 사람을 끝까지 보존하시려는 주님의 깊은 섭리를 함께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71, 창3:17, ‘네 평생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71‘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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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9, 창3:17,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69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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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7)



AC.269

여호와 하나님, 곧 주님께서 (ground), 곧 겉 사람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겉 사람이 스스로 속 사람으로부터 돌아서고 분리됨으로써 스스로 저주받은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AC.245 참조). That Jehovah God (that is, the Lord) did not “curse the ground,” or the external man, but that the external man averted or separated itself from the internal, and thus cursed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previously shown (n. 245).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창3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 원리를 다시 한번 선언하는 중요한 결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반복해서 강조해 온 사실을 다시 확인합니다. 곧, 사람의 타락과 저주의 원인은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섭리론과 구원론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3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시고, 땅을 저주하시며,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사실이 드러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시거나 저주를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에 ‘주님께서 저주하셨다’고 기록된 것은, 인간 편에서 일어난 영적 상태의 변화를 인간의 언어에 맞추어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여기서 ‘겉 사람이 스스로 속 사람으로부터 돌아섰다’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속 사람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통로입니다. 반면 겉 사람은 그 생명을 받아 실제 삶으로 나타내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겉 사람이 own과 감각을 따라 독립하려 할 때, 주님께서 관계를 끊으시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이 스스로 그 생명의 흐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돌아섬(aversion)입니다.

 

따라서 ‘저주’도 하나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저주는 주님께서 적극적으로 내리시는 형벌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마치 햇빛을 등지고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어둠을 경험하는 것은 태양이 어둠을 보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빛을 등졌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의 모든 저주를 이러한 원리로 이해합니다.

 

이 점에서 AC.269는 앞의 AC.267AC.268을 자연스럽게 이어 줍니다. AC.267에서는 rationalown과 감각에 동의함으로써 겉 사람이 타락하였다고 설명하였고, AC.268에서는 그 결과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제 AC.269에서는 그 상태를 ‘저주’라고 부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저주는 주님의 행동이 아니라, 분리의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가 AC.245를 다시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이미 AC.245에서 주님은 아무도 저주하지 않으시며, 악인은 스스로 악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저주받은 상태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AC.269는 그 원리를 다시 적용하여, 창3:17의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는 말씀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말씀은 사람의 입장에서 표현되었지만, 실제 영적 원인은 언제나 사람 자신의 돌아섬에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면 흔히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셨다’거나 ‘하나님께서 복을 거두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언제나 같은 사랑으로 사람에게 생명을 흘려보내십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면 그 생명을 더욱 풍성히 받고, 스스로 등을 돌리면 그 생명을 충분히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세계의 변하지 않는 질서입니다.

 

AC.269는 창3의 ‘저주’를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라 영적 인과관계로 이해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겉 사람을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겉 사람이 own과 감각을 따라 스스로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될 때, 그 결과로 생명의 흐름이 막히고 영적 황폐가 찾아옵니다. 이것이 성경이 ‘저주’라고 부르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창3의 심판 기사를 하나님의 진노의 기록이 아니라, 사랑이신 주님의 질서를 떠난 사람이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영적 결과에 대한 계시로 읽어야 함을 가르쳐 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AC.270, 창3:17,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70‘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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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8, 창3:17, ‘땅’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68‘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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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8.심화

 

1. ‘AC.118

 

스베덴보리가 AC.268에서 AC.118을 인용한 이유는, 방금 설명한 ‘rational은 겉 사람에 속하지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라는 가르침이 이미 창2의 에덴동산 해설에서 밝혀졌던 내용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AC.268의 설명은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이미 제시한 인간의 영적 구조를 타락의 문맥에 적용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AC.118에서 스베덴보리는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네 강을 사람의 내적 구조와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그 가운데 ‘힛데겔’은 rational의 밝은 통찰을, ‘앗수르’는 rational 자체를 의미합니다. 특히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라는 표현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rational에 이르는 진리의 유입(influx)을 나타냅니다. 즉, rational은 스스로 빛을 내는 기관이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작용하는 기관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AC.268의 핵심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AC.268에서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은 rational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18에서 이미 ‘강이 속에서 밖으로 흘러간다’는 상징으로 설명했던 동일한 원리입니다. 따라서 AC.118의 인용은, 속 사람에서 rational을 거쳐 겉 사람으로 이어지는 질서가 창조 때부터 주어진 본래의 질서임을 확인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AC.118 rational의 위치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rational은 속 사람도 아니고, 가장 바깥의 감각적인 차원도 아닙니다. 그것은 양자를 이어 주는 중간 영역입니다. 그래서 AC.268에서 rational을 ‘일종의 매개체(medium)’라고 부르는 것도 AC.118의 설명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의 모든 작용이 주님 → 속 사람 → rational → 겉 사람이라는 질서를 따라 이루어진다고 이해합니다.

 

이 때문에 rational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본래 rational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 겉 사람을 인도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창3에서처럼 rational이 감각과 own의 편에 서게 되면, 더 이상 속 사람의 빛을 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AC.268에서 ‘rational이 동의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된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AC.118 rational이 본래 어떻게 기능하도록 창조되었는지를 보여주고, AC.268은 그 기능이 어떻게 손상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AC.118에서 ‘유브라데(Phrath, Euphrates)를 기억 지식(memory-knowledge)의 경계라고 설명한 것도 AC.268과 연결됩니다. 속 사람의 빛은 rational을 거쳐 기억과 감각, 그리고 행동에까지 흘러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흐름이 중간에서 막히면 기억 지식은 더 이상 영적 생명을 담지 못한 채 단순한 지식으로 남게 됩니다. 이것이 창3 이후 인간에게 나타나는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가 AC.268에서 AC.118을 인용한 이유는, 인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다시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창조의 본래 질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rational에 빛이 흘러들고, rational은 다시 그 빛을 겉 사람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나 rational own과 감각에 동의하는 순간 그 흐름은 차단되고, 겉 사람은 속 사람과 분리됩니다. 따라서 AC.118은 인간의 본래 구조를 설명하는 본문이고, AC.268은 그 구조가 타락으로 어떻게 손상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연결함으로써, 창2은 창조의 질서를, 창3은 그 질서의 붕괴를 보여주는 서로 대응되는 기록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AC.268, 창3:17, ‘땅’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68‘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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