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5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성부께 중보하신다’ - 주님의 중보는 성부를 향한 간청인가, 인간을 향한 신적 자비인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신 뒤에도 성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에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께서 지금도 하늘에서 자신을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죄와 연약함 속에서도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게 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성부께 중보하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부 하나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진노하시지만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근거로 성부께 용서를 간청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인간을 용서하기 원하시는 분은 성자이시고, 그 간청을 받아들여 용서하시는 분은 성부이신 것입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전통적인 중보 이해를 다시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그는 주님의 중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중보가 서로 구별된 두 신적 존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간청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신적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전달되는 역사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중보와 간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주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중보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딤전2:5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히7:25는 예수님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므로 자신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롬8:34 역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개신교는 예수님의 중보가 십자가에서 끝난 과거의 사건만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 이후에도 계속되는 구원 사역이라고 고백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 설명하며, 제8장 8항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시고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에게 구원을 적용하신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개신교 신학 자체가 성부는 사랑이 없고 성자만 인간을 사랑하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한 신적 본질과 뜻을 지니신다고 고백합니다. 다만 신자들의 실제적인 사고 속에서는 성부는 심판하시고 성자는 용서를 간청하시는 분처럼 서로 다른 역할이 지나치게 분리되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문제는 바로 이러한 분리된 하나님 이해입니다.

 

중보라는 개념에는 본래 서로 떨어져 있거나 직접 관계를 맺기 어려운 두 편을 연결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서도 중재자는 서로 갈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해를 돕거나, 한쪽의 사정을 다른 쪽에 전달하며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부르면 자연스럽게 그분이 인간의 사정을 성부 하나님께 전달하고 용서를 요청하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특히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고 말씀하는 장면은 이러한 상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성부 하나님께서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 오른편에 앉으신 성자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이름을 하나씩 언급하며 자비를 간청하시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표현을 지상의 왕궁과 재판정에 비추어 이해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편’은 지위와 권능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말씀을 곧바로 성부와 성자가 서로 다른 두 보좌에 앉아 대화하신다는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신적 권능과 영광 안에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중보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경의 문자적 표현과 그 표현이 전달하는 신적 현실을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8573항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룹니다. 그는 사람들이 주님의 중보를 생각할 때 흔히 예수님께서 성부 곁에 앉아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성부께 용서와 자비를 간청하시는 모습을 떠올린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인간적인 관계를 신적 관계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의 중보에는 모든 사랑과 자비 안에 존재하는 끊임없는 간구라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고, 어려움에서 벗어나며, 선한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자녀에게 좋은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역시 그 이웃이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사랑 안에는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을 위한 지속적인 마음이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런 사랑의 성향을 통해 신적 중보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주님의 중보는 성부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반복되는 말의 간청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가 끊임없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중보가 계속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계속해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구원하기 위해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AC.8705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주님의 중보와 간구를 이해하려면 ‘성부’와 ‘성자’가 속뜻에서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해석에서 성부는 신적 선을, 성자는 신적 진리를 가리킵니다. 신적 선은 주님의 사랑 자체이며, 신적 진리는 그 사랑에서 발출하여 인간에게 다가오는 신적 지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태양의 불과 빛에 비유합니다. 태양 자체의 불은 인간의 눈으로 직접 바라보기 어렵지만, 그 태양에서 나오는 빛을 통해 우리는 사물을 보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무한한 신적 선 자체는 유한한 인간이 직접 파악할 수 없지만, 그 신적 선에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적 진리가 신적 선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두 하나님 사이에서 누군가가 설득하고 간청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분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 진리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때문에 주님께서 성부와 중보하신다는 표현의 속뜻을, 한 분 주님 안에서 신적 진리가 신적 선과 관계하며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보는 두 신적 인격 사이의 협상이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의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실제로 성부께 기도하신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겟세마네에서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고, 요17에서는 제자들과 장차 자신을 믿을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성부와 성자가 구별되는 신적 위격이라는 전통적인 이해의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지상 생애에 낮아지심의 상태와 영화의 상태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AC.2250은 주님께서 지상에서 낮아지심의 상태에 계실 때에는 여호와께 다른 분을 향하듯 기도하고 중보하셨지만, 인성이 완전히 영화되어 신성과 하나가 되신 뒤에는 그러한 방식으로 중보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성에서 직접 자비를 베푸시고 구원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지상에서 기도하신 것은 외적으로 꾸며진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 안에서 실제로 시험과 고난을 겪으셨으며, 그 인성이 영화되는 과정에서 내적인 신성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는 그 인성 자체가 신성하게 되어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중보를 지상에서의 낮아지심과 동일한 방식의 간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별은 주님의 중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이전과 이후의 중보가 어떻게 다르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135항은 이러한 중보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중재와 중보기도, 속죄와 화목에 관한 성경의 표현들이 한 분 하나님의 신적 인성에서 나타나는 은혜의 역사와 관계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중재는 인간이 신적 인성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께서도 그 인성을 통해 인간에게 가까이 오셔서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일을 뜻합니다. 또한 중보기도는 그러한 중재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으로서, 사랑 자체에서 나오는 자비와 용서와 은총의 지속적인 역사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적 인성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직접 파악할 수 없는 무한한 신성을 인간에게 드러내시기 위해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성을 영화하심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과 결합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사정을 별도의 하나님께 전달하는 중간적인 신적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성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인간에게 실제로 다가오는 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보는 바로 이 신적 인성을 통하여 한 분 주님께서 인간과 결합하시는 역사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보면 중보를 둘러싼 가장 깊은 오류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신자는 자신이 죄를 지었을 때 성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벌하시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공로를 내세워 성부의 진노를 가라앉히시므로 용서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에는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사랑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듯한 인상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성부는 주님의 신성 자체이며, 성자는 그 신성에서 비롯된 인성입니다. 그러므로 성부께서 인간을 멸하려 하시고 성자께서 인간을 보호하려 하신다는 식의 대립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요3:16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려는 인간의 노력도 아니고, 성자가 성부의 마음을 바꾸는 일도 아닙니다.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자체입니다. 또한 요14:9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신적 사랑이 인성을 통해 드러난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사랑이 부족한 신적 존재를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지금도 인간을 위해 중보하신다는 말의 실제적인 의미를 더욱 깊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누군가가 하늘의 법정에서 대신 변호해 준다는 뜻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악에서 돌아설 수 있도록 인도하시며, 자신의 자유 안에서 선을 선택하도록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악을 죄로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과정에도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가 역사합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과 감정 하나하나가 곧바로 주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욕망과 잘못된 판단도 존재하므로 진리의 분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인간을 선과 진리의 방향으로 인도하시고 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보존하신다는 사실은 스베덴보리의 중보 이해와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의 중보는 인간을 대신하여 성부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계속 역사하시는 구원의 활동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님의 중보는 과거에 끝난 것도 아니며, 인간이 죄를 지을 때에만 특별히 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무한한 사랑이 인간을 향해 계속되는 한, 그 중보의 역사 역시 끊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표현은 성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으므로 성자에게 대신 부탁한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주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분의 성품과 권능, 그리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모든 선과 진리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며,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여 간구하는 것입니다. 요14:13-14에서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자신이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도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또한 요16:26-27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구할 것이며, 아버지께서 친히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부가 인간을 사랑하시도록 성자가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과 구별됩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학 역시 성부의 사랑을 인정하지만,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그 신적 사랑 자체를 만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두 신적 존재 사이에 우리의 요청을 전달하는 절차가 아니라, 한 분 주님께 직접 나아가 그분의 선과 진리 안에서 자신의 삶이 변화되기를 구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기도와 회개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바꾸어 놓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은 뒤 ‘예수님께서 성부께 잘 말씀해 주실 테니 나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악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중보의 의미를 지나치게 외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인간이 자신의 악을 계속 사랑하도록 허락하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용서하시기 원하시며,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도록 끊임없이 도우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죄 사함을 단순히 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없애는 선언으로 이해하지 않고, 주님께서 인간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선 안에 머물도록 보존하시는 역사와 결합하여 설명합니다(TCR.611-614). 따라서 참된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악을 죄로 여기고 멀리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려는 실제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의 중보는 인간이 아무런 변화 없이 용서받은 상태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점점 더 천국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돕는 역사입니다. 이때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 역사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성부께 중보하고 계십니까? 전통적인 개신교는 그렇다고 고백하며, 그 고백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인간을 위해 역사하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주님의 중보가 계속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중보를 성부와 성자가 서로 다른 두 신적 존재로서 대화하고 간청하는 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는 낮아지심의 상태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셨지만, 인성이 완전히 영화된 뒤에는 신성과 인성이 한 분 주님 안에서 완전하게 하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계속되는 중보는 주님께서 자신의 신적 인성을 통해 인간에게 사랑과 진리를 전달하시고, 인간을 악에서 구원하며, 자신과 결합하도록 끊임없이 역사하시는 신적 자비를 뜻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더 이상 성부의 진노와 성자의 자비 사이에서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기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성부를 설득해 줄 또 하나의 신적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직접 다가오셔서 사랑과 지혜를 베푸시는 한 분 주님 자신입니다. 결국 참된 중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도록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신적 인성을 통하여 인간에게 다가오시고 그 인간을 자신과 결합시키시는 영원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PR.005 해설)

 

요약

전통적인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과 승천 이후에도 성부 하나님 앞에서 신자들을 위해 중보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에는 주님께서 지금도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기 위해 역사하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중보를 성부와 성자가 서로 다른 두 신적 존재로서 대화하고 간청하는 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비밀’ AC.8573과 AC.8705에 따르면 성부는 신적 선을, 성자는 신적 진리를 가리키며, 중보는 신적 사랑에서 발출하는 진리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는 역사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지상에서 낮아지심의 상태에 계실 때에는 아버지께 기도하셨지만, 인성이 영화된 뒤에는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셨으므로 이제 자신의 신성에서 직접 자비를 베푸시고 구원하십니다(AC.2250). ‘참된 기독교’ TCR.135 역시 중보기도를 한 분 하나님의 신적 인성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사랑과 자비의 역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중보는 지금도 계속되지만, 그 의미는 성부의 마음을 바꾸기 위한 간청이 아니라 인간에게 신적 사랑과 진리를 전달하고 그를 악에서 구원하여 주님과 결합시키는 데 있습니다. 참된 중보의 목적은 인간이 변화되지 않은 채 용서받았다고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받아들여 실제로 회개하고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PR.006,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신적 인격이시다’

SL.PR.006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신적 인격이시다’ - 성령은 또 한 분의 하나님인가,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역사인가?

bygrace.kr

 

PR.004,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한 인격 안에 있지만 서로 섞이지 않는 두 본성이다’

SL.PR.004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한 인격 안에 있지만 서로 섞이지 않는 두 본성이다’ - 주님의 인성은 영원히 인간적인가, 아니면 완전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L.RC.040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의 발현과 메시지는 신자들의 회개와 신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 영적 체험의 유익함은 그 메시지가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왔다는 증거인가?

 

해설

‘마리아의 발현과 메시지는 신자들의 회개와 신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이것은 천주교의 마리아 신앙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성모 발현’(聖母發現, Marian apparition)과 ‘사적 계시’(私的啓示, private revelation)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천주교에는 마리아가 특정한 사람들에게 나타나 기도와 회개, 평화와 보속을 권고했다는 오랜 전승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루르드와 포르투갈의 파티마는 널리 알려진 사례이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메주고리예 역시 많은 신자가 순례하는 장소입니다. 이러한 발현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리아가 자신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증언하며, 그 메시지를 접한 신자들 가운데 신앙을 회복하고 회개와 기도생활에 새로운 열정을 갖게 되었다는 사례들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메시지를 통하여 회개했다는 사실이 그 메시지를 전한 존재가 실제로 마리아였다는 증거가 될까요? 특별한 모습이나 음성을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현상이 객관적인 영계의 사건이라고 확정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 역시 영계를 보고 천사와 영들을 만났다고 기록했는데, 그의 영적 경험과 천주교의 성모 발현을 어떤 기준으로 비교해야 할까요? 이번 명제는 영적 체험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부정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체험의 진실성과 메시지의 신학적 정확성, 그리고 그로부터 나타나는 회개와 사랑의 열매를 구별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67항은 교회 역사에서 여러 사적 계시가 보고되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인정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적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공적 계시와 동일한 권위를 지니지 않으며, 새로운 구원의 진리를 추가하거나 기존의 계시를 완성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사적 계시는 특정한 시대에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마리아의 모든 발현과 메시지를 성경과 동일한 신적 권위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교회가 어떤 발현과 관련된 신심을 인정하더라도 모든 신자가 그 발현을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구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진리는 이미 주님의 계시 안에 있으며, 특별한 체험이나 새로운 메시지가 그 계시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별도의 질문이 남습니다. 어떤 메시지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메시지를 실제로 마리아가 전달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적 계시의 권위를 성경보다 낮게 인정하더라도, 그 발현의 초자연적 출처가 실제로 확인되었는지는 다시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2024년 5월 17일 바티칸 신앙교리부가 발표한 ‘초자연적 현상으로 추정되는 사건의 판별을 위한 규범’(Norms for Proceeding in the Discernment of Alleged Supernatural Phenomena)은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 규범은 발현이나 환시, 특별한 메시지를 검토할 때 그 내용이 신앙과 도덕에 부합하는지, 체험자의 진실성과 태도는 어떠한지, 그리고 회개와 기도, 이웃 사랑과 같은 실제적인 열매가 나타나는지를 살피도록 합니다. 특히 ‘장애 없음’(Nihil obstat)이라는 긍정적인 결론은 관련 신심과 순례를 허용하거나 장려할 수 있다는 의미이지, 그 발현이 실제로 하늘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확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는 천주교가 스스로 긍정적인 영적 열매와 초자연적 출처의 진실성을 구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원칙은 2024년 9월 19일 발표된 메주고리예 관련 문서 ‘평화의 모후’(The Queen of Peace)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신앙교리부는 메주고리예를 통한 회개와 화해, 기도와 신앙의 회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발현 자체의 초자연적 진실성을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메시지라고 전해지는 내용 가운데 일부에는 신학적으로 부정확하거나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신자가 특정한 순례지에서 참된 회개를 경험했다는 사실과 그곳에서 보고된 모든 발현과 메시지가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왔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적 유익함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발현의 모든 세부 내용과 초자연적 출처를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역시 특별한 영적 현상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분별하도록 가르칩니다. 요일4:1은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라고 권합니다. 살전5:20–21은 예언을 멸시하지 말되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마24:24에서 주님께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며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어떤 현상이 놀랍고 특별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출처를 신적으로 확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영적 현상을 분별한다는 것이 그와 관련된 사람을 곧바로 거짓말쟁이나 악한 사람으로 규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체험자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진실하게 증언할 수 있지만, 그 체험의 원인과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기억과 감각, 기대와 신앙적 배경은 체험을 해석하는 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험자의 진실성과 체험의 객관적인 사실 여부, 메시지의 신학적 타당성을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특별한 체험 안에 참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그 전체를 참되다고 인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분별은 놀라운 현상 자체에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주님의 진리와 일치하며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지 살피는 데 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영적 발현의 가능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에서 인간이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영계에서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영계의 천사와 영들은 서로 보고 듣고 말하며 실제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계의 인간이 영적인 존재를 지각하거나 영계와 관계된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 자신은 오랫동안 영계의 여러 존재와 만나고 대화한 경험을 기록했으며,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827항에서는 자신이 영계에서 마리아를 보았다고도 전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을 따른다는 이유로 모든 영적 발현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직접적인 기록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능성과 실제적인 진실성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마리아를 보았다고 기록했다는 사실이 후대에 보고된 모든 성모 발현의 진실성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빛나는 여인의 모습을 보았거나 자신을 마리아라고 소개하는 존재의 말을 들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경험만으로 실제로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나타났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존재의 모습과 정체, 그 존재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출처는 각각 검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HH.249는 중요한 직접 근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인간이 영들과 직접 대화하도록 허락되는 일이 드물며, 그러한 교통에는 위험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영들이 자신이 인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특히 악한 영들이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종교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몰두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내적인 체험에 사로잡히는 상태도 주의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적 환시나 특별한 체험이 반드시 악령에게서 비롯된다고 판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특별한 모습을 보거나 메시지를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참된 천국의 계시라고 받아들이는 일에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영계와의 교통은 인간의 호기심이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허락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모 발현을 신앙의 특별한 은총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 현상을 어떤 근거로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체험을 추구하는 태도 자체가 올바른 영적 질서에 속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특별한 체험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그 체험을 무조건 추구하거나 신적 진리의 확실한 근거로 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적 일기’(Spiritual Diary, SD) 1647항은 이 문제를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그는 자신이 표상과 환시, 영들과 천사들의 대화를 통하여 여러 가지를 경험했지만, 실제로 자신에게 진리를 가르치신 분은 영이나 천사 자체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영들이 여러 가지를 가르치려 할 때 거짓된 내용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진술은 스베덴보리가 영적 체험을 했다는 사실보다 더욱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영계의 존재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해서 그 말이 곧바로 신적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TCR.779에서 그는 새 교회의 교리를 어떤 천사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말씀을 읽는 가운데 받았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영적 경험을 근거로 성모 발현의 메시지 역시 특별한 신적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적용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나타났으며 얼마나 놀라운 체험이 일어났는가보다, 그 경험을 통하여 주장되는 진리가 실제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의 기록에서도 영적 경험과 그 안에서 받아들이는 신적 진리는 구별되며, 모든 참된 진리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이 원칙은 발현 메시지의 내용을 검토할 때도 중요합니다. 성모 발현으로 전해지는 메시지들에는 기도와 회개, 죄에서 돌아서는 삶, 사랑과 평화, 이웃을 위한 희생을 강조하는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권고는 그 자체로 성경의 가르침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메시지 안에 참된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과 그 메시지가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왔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내용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으며, 어떤 체험에 대한 해석이 부정확하더라도 그 안에 성경과 일치하는 진리가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회개와 사랑을 권고하는 메시지 안에 특정한 발현 장소나 발현자에게 지나친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거나, 주님께 직접 나아가는 신앙을 흐리게 하는 내용이 함께 들어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메시지를 통째로 받아들이거나 통째로 부정하기보다 개별적인 내용을 분별해야 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은 특별한 감동이나 종교적 열정을 경험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참된 거듭남은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배우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발현 메시지를 듣고 눈물을 흘리거나 특별한 평안을 느낀 것이 회개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실제적인 영적 변화는 그 이후의 삶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체험의 감동보다 그 체험 이후에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거듭남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 문제는 발현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그 메시지를 따르는 신자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도 이어집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마리아를 보았다고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반드시 거짓말을 하거나 사람들을 속이려 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매우 경건하고 겸손하며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체험을 신적인 사건이라고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일을 진실하게 설명하면서도 그 의미나 원인을 잘못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발현과 관련된 신심 가운데 실제적인 회개와 사랑의 열매가 나타났더라도, 그러한 열매가 발현의 모든 세부 내용과 메시지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의 진실성과 메시지의 정확성, 그리고 영적 열매의 가치를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과 의도를 완전하게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그가 전하는 내용 가운데 말씀의 진리와 일치하는 것은 인정하고 일치하지 않는 것은 분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요구하는 태도는 모든 특별한 체험을 조롱하거나 무조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에 과도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존재할 수 있는 진리와 선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는 주님께 맡기되, 그가 전하는 메시지와 신학적 주장은 말씀에 따라 검토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특별한 영적 현상에 대한 관심이 말씀 자체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어떤 신자는 성경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보다 새로운 발현과 메시지에 더 큰 열정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또한 특정한 시기와 장소에 주어진 경고나 약속을 신앙의 중심에 놓고,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중요한 영적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적 생명을 위한 가장 중요한 진리는 이미 주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가르치시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 살아가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더라도 그것이 말씀을 대신하거나 말씀보다 높은 권위를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영적 체험이라면 인간의 시선을 체험 자체나 특정한 전달자에게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향하게 해야 하며, 새로운 신비에 대한 호기심보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마리아가 요2:5에서 하인들에게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권한 것처럼, 신앙의 올바른 방향은 특별한 전달자에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결국 발현과 메시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은 그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놀라운가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에 부합하며 인간을 회개와 사랑, 거듭남의 삶으로 이끄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한 열매가 나타났더라도 발현의 초자연적 진실성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특별한 체험을 성급하게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그것을 말씀보다 높은 권위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참된 신앙은 새로운 메시지를 찾아다니는 데 있지 않고,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SL.RC.040 해설)

 

요약

‘마리아의 발현과 메시지는 신자들의 회개와 신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라는 명제는 그 가능성 자체에서 반드시 오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발현과 관련된 메시지나 신심을 통하여 신자가 자신의 악을 돌아보고 기도생활을 회복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역시 사적 계시를 그리스도의 완성된 공적 계시와 동일한 권위로 가르치지 않으며, 2024년의 판별 규범에서는 긍정적인 영적 열매와 발현 자체의 초자연적 진실성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모든 성모 발현을 반드시 믿어야 할 신앙의 진리로 선언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어떤 메시지가 신자들에게 유익했다는 사실만으로 실제로 마리아가 나타나 그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HH.249에서 영들과 직접 교통하는 일의 위험을 경고하며, SD.1647에서는 영들이 전달하는 내용을 그대로 믿지 않고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779에서는 새 교회의 교리를 천사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말씀을 통하여 받았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통하여 회개와 신앙의 회복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발현의 초자연적 출처를 충분한 근거 없이 확정하거나, 그 메시지를 말씀과 동일하거나 더 높은 권위로 받아들이며, 특정한 발현자나 장소에 특별한 영적 권능을 부여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모든 성모 발현이 실제로 거짓이거나 악한 영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별적인 체험의 출처와 성격은 충분한 근거 없이 단정해서는 안 되며, 그 안에 담긴 진리와 오류도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와 거듭남은 특별한 현상을 경험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실천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성모 발현과 메시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은 체험자의 확신이나 현상의 신비로움보다, 그 내용이 주님의 말씀에 부합하며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모든 영적 체험과 메시지는 말씀의 진리 아래에서 분별해야 하며,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유일한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SL.RC.039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을 드리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 – 공경과 흠숭의 구별은 실제 신앙의 내면에서도 유지되는가?

 

해설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을 드리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 이것은 천주교가 마리아 신심을 설명할 때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천주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성인들에게 표하는 공경을 구별하며, 마리아에게는 다른 성인들보다 특별한 공경을 드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 기도를 청하거나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그것만으로 그 사람이 마리아를 하나님과 동등한 신으로 숭배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흠숭과 공경의 차이는 사용하는 명칭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누구를 모든 생명과 구원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는가에 있는 것일까요? 특별 공경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적 행위가 올바른 것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예배가 외적인 의식보다 그 안에 담긴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마리아 공경의 의미와 한계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이 문제는 단순히 천주교의 종교적 관습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인간에 대한 존경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그리고 그 구별이 실제 신앙의 삶에서도 유지되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에서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欽崇, latria), 천사와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恭敬, dulia), 그리고 마리아에게 드리는 ‘특별 공경’(特別恭敬, hyperdulia)을 구별합니다. 흠숭은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모든 생명과 구원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그분께 드리는 예배를 뜻합니다. 공경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베푸신 은총과 그들이 보여 준 거룩한 삶을 존중하는 것이며, 특별 공경은 주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의 독특한 역할과 복됨을 특별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흠숭과 공경이 단순히 경배의 강도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에게 드리는 공경이 아무리 특별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흠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공경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창조주나 신적 존재로 인정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천주교의 특별 공경은 일반적인 역사적 인물에 대한 존경보다 넓은 종교적 의미를 지니며, 성모 축일과 묵주기도, 전구 요청 등의 신심 행위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공경과 흠숭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원칙을 인정하는 것과 그 원칙 아래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적 행위가 올바르다고 판단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66항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 항목은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공경을 받지만, 그 공경은 성육신하신 말씀과 성부와 성령께 드리는 흠숭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오히려 그 흠숭을 증진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67항은 마리아에 관한 가르침과 신심에서 지나친 과장과 편협한 축소를 모두 피하고, 참된 신앙에 근거하지 않은 헛된 믿음을 경계하도록 권고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971항 역시 마리아에 대한 특별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1997년 10월 22일의 교리교육에서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다른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보다 특별하지만,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가르침에는 인정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속하는 영광과 권능이 있으며, 아무리 복된 인간이라도 창조주와 동일한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이러한 구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실제 신심 행위가 언제나 그 원칙에 일치한다고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의 내용과 개인의 신앙적 이해, 그리고 구체적인 종교 행위는 각각 살펴야 합니다.

 

성경 역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와 인간에게 표할 수 있는 존경을 구별합니다. 출20:3–5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고 우상을 만들어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며, 마4:10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분만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모든 참된 예배의 궁극적인 대상이 하나님 한 분이심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에 대한 존경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과 신앙의 선배들을 기억하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는 히13:7의 권고는 인간에게 표할 수 있는 올바른 존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마리아 역시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었으며, 눅1:48에서 이후의 모든 세대가 자신을 복되다고 일컬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복되다고 인정하고 그의 믿음과 순종을 존중하는 일 자체를 우상숭배라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복되다고 일컫는 것과 그에게 기도하며 특별한 영적 보호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동일한 행위가 아닙니다. 성경이 어떤 사람을 존경하도록 가르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종교적 청원을 드려도 된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공경과 흠숭을 구별하는 문제는 외적인 명칭을 넘어 실제로 누구에게 어떤 종류의 영적 권능을 기대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차이는 성모상과 성화 앞에서 이루어지는 신심 행위를 살펴볼 때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천주교는 성모상 자체를 신으로 섬긴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모상과 성화는 마리아의 믿음과 주님의 성육신을 기억하도록 돕는 종교적 표상이며, 형상에 표하는 존경은 궁극적으로 그 형상이 나타내는 인물을 향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어떤 신자가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외적인 모습만으로 그가 실제로 마리아를 하나님처럼 섬긴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무릎을 꿇거나 절하는 행위는 문맥에 따라 예배뿐 아니라 존경과 간청을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상이 기억과 묵상의 도구라는 설명과 그 형상에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특정한 성모상이나 성지에 독립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 형상 앞에서 기도하면 마리아가 자신의 필요를 특별하게 해결해 준다고 기대한다면 그 믿음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형상이나 몸의 자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에게 능력을 기대하고 그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겉으로 비슷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믿음과 의도는 다를 수 있으며, 인간은 다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완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외적인 신심 행위의 의미를 검토하되,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까지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문제를 더욱 깊이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그는 참된 예배가 단순한 기도문이나 찬송, 몸의 자세와 종교적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적인 행위 안에 담긴 사랑과 신앙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구별은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의 관계와 연결됩니다. 인간은 겉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영광과 이익을 추구할 수 있으며, 반대로 짧고 단순한 기도 안에서도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믿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종교 행위의 영적 가치를 판단하려면 그 행위가 겉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뿐 아니라 무엇을 향하여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2–12에서 천국의 하나님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며, 천국의 모든 선과 진리가 그분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천사들은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성인의 믿음과 사랑을 존중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그들에게 주님께만 속한 신적 권능을 기대하거나 그들을 구원의 근원처럼 의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참된 공경은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선과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참된 예배는 그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께 자신을 열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존경과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원칙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마리아 신심에 대하여 강한 비판도 남겼습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94에서 마리아를 다른 모든 성인보다 높이고 여신이나 성인들의 여왕처럼 받드는 신심을 비판합니다. 또한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기보다 마리아의 아들로 이해하는 경향이 주님의 참된 신성에 관한 이해를 흐리게 한다고 지적합니다. 다만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평가와 천주교의 공식 교리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실제로 여신이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마리아에게 드리는 특별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TCR.94를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여신으로 인정했다는 증거처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비판은 마리아의 자연적인 모성을 지나치게 높이는 과정에서 주님의 유일한 신성이 흐려지고, 인간이 주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과 의존을 피조물에게 옮길 위험에 관한 것입니다. 그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마리아에게 어떤 명칭을 사용하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실제적인 중심이 주님께 있는가, 아니면 마리아라는 특별한 피조물에게 옮겨 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특별 공경이라는 명칭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신심의 모든 내용과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앞서 살펴본 마리아의 전구 및 묵주기도와도 연결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에게 드리는 특별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그에게 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청하는 행위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공경과 흠숭이 교리적으로 구별된다는 사실과 그러한 청원이 실제 영계의 질서에 부합한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4–825에서 지상의 사람들이 천국의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그 성인들이 알고 듣는다는 생각을 직접 비판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 드리는 청원을 흠숭이 아니라 특별 공경이라고 부른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타당성이 입증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천주교는 모든 전구와 은총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속에 종속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2025년 바티칸 신앙교리부의 ‘신자들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 역시 마리아를 그리스도와 나란히 서는 구원자처럼 이해하거나, 주님의 자비가 부족하므로 마리아가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경계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구별은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설명을 넘어, 천국의 특정한 인간에게 직접 종교적 청원을 드리는 행위 자체가 참된 영적 교통의 질서에 부합하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이처럼 마리아를 존중하는 일반적인 태도와 마리아에게 직접 기도를 청하는 구체적인 행위는 구별하여 평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를 특별히 존중한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할까요? 성경은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을 중요한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요2:5에서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권합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마리아는 자신에게 특별한 신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사람들이 자신에게 머물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권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존중하는 가장 분명한 길은 그가 보여 준 믿음과 순종을 기억하고 본받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존중이 그에게 독립적인 영적 권능을 기대하거나 직접적인 종교적 청원을 드려야 한다는 뜻으로 확대될 필요는 없습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운 믿음을 인정하는 것과 그 인간을 영적인 의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위대함은 특별한 호칭이나 독립적인 거룩함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의 복됨 역시 이러한 영적 원리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공경과 흠숭의 구별을 실제 신앙의 내면에 적용해야 합니다. 어떤 신자가 하나님께만 흠숭을 드린다고 고백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마리아가 주님보다 더 자비롭고 자신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며 특별한 능력으로 자신을 보호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신앙에는 공식적인 교리와 실제적인 의존 사이의 긴장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을 근거로 모든 천주교 신자가 마리아를 하나님처럼 섬긴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마리아를 기억함으로써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더욱 깊이 묵상하고 그분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주님께 직접 나아가는 신앙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구별하되 다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강조하는 참된 예배의 중심은 주님 한 분을 향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인간에게 표하는 공경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 구별은 이름을 다르게 붙이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실제 기도의 대상과 영적 의존의 방향에서도 유지되어야 합니다. 결국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을 올바르게 존중하는 길은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선과 진리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모든 예배와 구원의 소망을 주님 한 분께 돌리는 데 있습니다. (SL.RC.039 해설)

 

요약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을 드리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라는 명제의 기본적인 구별 자체는 오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과 인간에게 표하는 존경은 본질적으로 달라야 하며, 이러한 원칙은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도 부합합니다. 천주교는 ‘흠숭’(latria), ‘공경’(dulia), ‘특별 공경’(hyperdulia)을 구별하고, 마리아를 하나님과 동등한 신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모든 마리아 공경을 신적 숭배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적 구별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마리아에게 드리는 모든 종교적 청원과 신심이 자동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HH.2–12에서 천국의 모든 생명과 권능이 주님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치며, TCR.94에서는 마리아를 지나치게 높이는 당시의 신심을 비판합니다. 또한 TCR.824–825에서는 천국의 성인들에게 직접 기도를 드리는 관행이 영계의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기억하고 그의 믿음과 순종을 존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특별 공경이라는 이름 아래 그에게 주님께만 속한 영적 권능을 기대하거나, 주님께 돌려야 할 실제적인 신앙적 의존을 다른 피조물에게 옮기는 데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모든 마리아 공경을 반드시 우상숭배라고 판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의 내면은 주님께 맡기되, 그가 믿고 실천하는 교리와 행위는 말씀의 진리에 따라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명제는 ‘공경과 흠숭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원칙에서는 참되지만, ‘따라서 마리아에게 드리는 모든 특별 공경과 종교적 청원은 올바르다’는 결론으로 확대할 때에는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정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인간에게 표하는 존경을 구별하고, 모든 선과 진리와 구원의 근원을 주님 한 분에게서 찾으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RC.040. ‘마리아의 발현과 메시지는 신자들의 회개와 신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SL.RC.040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의 발현과 메시지는 신자들의 회개와 신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 영적 체험의 유익함은 그 메시지가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왔다

bygrace.kr

 

RC.038. ‘묵주기도를 바치며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는 것은 올바른 신심이다’

SL.RC.038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묵주기도를 바치며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는 것은 올바른 신심이다’ –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기도와 마리아에게 청원하는 기도는 같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