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합니다. 그의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anger was kindled, and that his countenance fell) 앞에서와 같이 체어리티가 떠났으며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합니다. Jehovah said unto Cain,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that hisanger was kindled, and that his countenance fell,signifies as before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해설

AC.359는 짧은 글이지만 매우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바로 앞 AC.357-358에서 가인의 ‘분하여 ’은 체어리티가 떠난 것을, ‘안색이 변함’, 원어로는 ‘얼굴이 떨어졌다’는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을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직 아벨을 죽이기 전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그 상태가 최종적으로 굳어지기 전에 주님의 경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가 ‘양심이 말해 주었다(conscience dictated)는 뜻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이것은 얼핏 보면 지금까지 배운 내용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인은 홍수 이전 태고교회의 후손을 다루는 계열에 속하는데, 태고교회의 특징은 양심이 아니라 퍼셉션이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과 진리를 외부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양심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선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는 이러한 퍼셉션 대신 진리의 지식을 기초로 양심이 형성됩니다. AC.310은 이 차이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359의 ‘conscience’를 곧바로 홍수 후 고대교회에 속한 영적 인간의 양심과 똑같은 것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conscience’라는 말을 임의로 ‘perception’으로 고쳐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분명히 ‘conscience dictated’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가인이라는 상태가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도 다르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과도 다르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가인은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를 표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과 하나였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구별되고, 점차 분리되어 독립적인 교리가 되어 가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시대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온전히 보존된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 점차 쇠퇴하고 무너져 가는 과정에 속합니다. 앞서 창3을 살펴볼 때에도 타락한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퍼셉션이 크게 약해졌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이 점에서 AC.359의 ‘양심이 말해 주었다’는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에게 아직 홍수 후 영적 인간에게 주어질 새로운 질서의 양심이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체어리티에서 벗어나고 있는 그에게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내적으로 알리고 제지하는 어떤 딕테이트(dictate)가 있었다는 뜻으로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실제로 앞의 AC.224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와 평화와 모든 선이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내적 딕테이트의 원인이 되고,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가 인간의 서로 다른 영적 상태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짐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4:6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가인의 상태를 모르셔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의 내적 상태가 잘못된 방향으로 변하고 있음을 스스로 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분노가 일어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지만, 그에게는 아직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고 돌이킬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가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분노하지 못하도록 그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그가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아무 말씀 없이 내버려 두시지도 않습니다. 분노가 일어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라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악이 실제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AC.359의 중심은 ‘가인에게 양심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체어리티에서 떠나고 있는 가인에게도 주님의 내적 경고가 계속되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 경고는 더욱 구체적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가인은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결정적인 틈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여기서 시대적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이 아니므로 그들의 퍼셉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를 통하여 형성하시는 양심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분노와 질투와 자기 의가 일어날 때, ‘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가?’, ‘지금 내가 지키려는 것이 주님의 진리인가, 아니면 나의 proprium인가?’, ‘ 안에서 체어리티가 떠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묻게 하는 양심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다만 이것은 AC.359의 가인이 오늘날 우리와 동일한 종류의 양심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말씀의 원리를 오늘날 우리의 영적 구조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AC.359는 매우 중요한 순간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떠났습니다.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해서 주님의 자비와 섭리가 먼저 그를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을 선택하기 전에 그것을 보게 하시고 돌이킬 길을 마련하십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바로 이제 그 경고를 받아들일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의 갈림길에 들어섭니다.

 

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

 

AC.359, 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

AC.359.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 AC.359를 읽다가 상당히 중요한 의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6의 ‘여호와께서 가

bygrace.kr

 

 

 

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다시 확인되는 양심의 딕테이트’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가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bygrace.kr

 

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얼굴(face) 얼굴이 떨어짐(falling)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얼굴은 내적인 것들을 의미했는데,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하여 빛나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얼굴이 내적인 것들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이어서, 누구든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가 어떤 성품과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를 있었습니다. 그들은 얼굴로는 가지를 나타내면서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일을 괴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가장과 기만은 당시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러므로 내적인 것들이 얼굴 의미되었습니다. 체어리티가 얼굴에서 빛날 때에는 얼굴이 들렸다(lifted up) 하였고, 반대의 경우에는 얼굴이 떨어졌다(fall)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말씀에서처럼 주님께서도 사람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lifts up his faces upon man) 표현됩니다. That by thefaces falling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faceand of itsfalling. The face, with the ancients, signified internal things, because internal things shine forth through the face; and in the most ancient times men were such that the face was in perfect accord with the internals, so that from a mans face everyone could see of what disposition or mind he was. They considered it a monstrous thing to show one thing by the face and think another. Simulation and deceit were then considered detestable, and therefore the things within were signified by the face. When charity shone forth from the face, the face was said to belifted up”; and when the contrary occurred, the face was said tofall”; wherefore it is also predicated of the Lord that helifts up his faces upon man,as in the benediction (Num. 6:26; and in Ps. 4:6),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6:26)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6)

 

말씀들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굴이 떨어진다(face falling)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예레미야에서 있습니다. by which is signified that the Lord gives charity to man. What is meant by theface falling,appears from Jeremiah: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2)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 for I am merciful, saith Jehovah. (Jer. 3:12)

 

여호와의 얼굴(face of Jehovah) 자비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lifts up his face) 것은 자비로 그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반대가 얼굴을 떨어뜨리는 (makes the face to fall), 인간의 얼굴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Theface of Jehovahis mercy, and when helifts up his faceupon anyone, it signifies that out of mercy he gives him charity; and the reverse when hemakes the face to fall,that is, when mans face falls.

 

해설

AC.358은 창4:5안색이 변하니를 설명합니다. 개역개정의 안색이 변하다는 자연스러운 번역이지만,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표현은 훨씬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faces falling’, 얼굴이 떨어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먼저 왜 얼굴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얼굴이 들리는 떨어지는 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로 앞 AC.357에서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AC.358은 그 결과를 한 단계 더 깊이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떠나자 단순히 감정 하나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들자체가 변했고, 그것이 얼굴이 떨어졌다는 말씀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고대인들에게 얼굴이 내적인 것들을 의미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하여 빛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태고교회 사람들은 얼굴과 내적인 것이 완전히 일치하여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어떤 성품과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이 표정을 잘 읽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천적 상태에서는 내적 사랑과 외적 표현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분리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얼굴로는 한 가지를 나타내면서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가장과 기만을 괴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날의 사회생활에 그대로 적용하여 속에 있는 감정을 무엇이든 얼굴과 말로 드러내야 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감정을 절제하는 것과 상대를 속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된 모습을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거듭남의 목표도 악한 속마음을 그대로 외부에 표출하여 속과 겉을 일치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면 자체를 변화시키셔서 속에서 선을 사랑하고 겉에서도 그 선을 행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이 배경에서 얼굴이 들린다얼굴이 떨어진다는 표현의 의미가 열립니다. 체어리티가 얼굴에서 빛날 때에는 얼굴이 들렸다고 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얼굴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단순히 화가 나서 얼굴빛이 어두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가인의 진행 과정이 보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가 생기며,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납니다. 이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가 분노로 드러나고, 이제 그 결과 내적인 것들이 변합니다. 곧이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이러한 내적 변화가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의 소멸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 줍니다.

 

6:26과 시4:6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분명해집니다.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자연적인 의미에서 얼굴을 든다고 하면 자신감이나 당당함을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서는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인간의 얼굴이 참으로 들리는 것은 자기 사랑으로 자신을 높일 때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그의 내적인 것들 안에 받아들여져 그것이 외적인 삶을 통하여 빛날 때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기도 역시 주님께서 우리를 외면하고 계시다가 마음을 바꾸어 다시 바라봐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가 받아들여 그것이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렘3:12은 같은 사실을 반대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개역개정은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표현은 문자적으로 얼굴을 너희에게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라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얼굴자비를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간결하게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이고, 얼굴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그 반대의 외관을 나타냅니다. 6:26과 시4:6, 3:12은 서로 따로 떨어진 증거 구절들이 아니라 얼굴’, ‘자비’, ‘체어리티’, ‘들림과 떨어짐의 상응을 하나로 밝혀 주는 인용들입니다.

 

여기서 바로 앞 AC.357여호와의 진노와 동일한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AC.357에서는 말씀에서 여호와께 분노와 진노가 돌려지지만 실제 분노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가운데 주님의 질서에 반발할 때 마치 주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처럼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AC.358에서도 주님의 얼굴 자체가 실제로 들렸다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떤 때에는 자비로운 얼굴로 인간을 바라보다가 인간이 잘못하면 노한 얼굴로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그 반대가 얼굴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한 뒤 곧바로 인간의 얼굴이 떨어지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이며 그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그의 내적인 것들이 달라집니다.

 

이 점은 가인의 경우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주님께서 먼저 가인에게 얼굴을 떨어뜨리셨기 때문에 가인의 얼굴이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그 체어리티에 반발합니다. 따라서 한쪽에는 주님께서 얼굴을 드심’, 곧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시는 끊임없는 신적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인간의 얼굴이 떨어짐’, 곧 그 체어리티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내적인 것들이 변하는 상태가 있습니다. 이 대비를 붙들면 하나님께서 가인을 외면하셨는가?라는 질문의 방향도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랑을 거두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질서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AC.358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의 얼굴과 내면의 일치를 설명하는 것도 이런 점에서 중요합니다. 다만 여기서 태고교회 전체가 지점에서 곧바로 속과 겉이 완전히 분리된 인간 상태로 바뀌었다고 너무 크게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58이 직접 말하는 것은 고대인들에게 얼굴이 내적인 것을 의미했던 이유와 태고시대의 특별한 상태입니다. 가인은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무너져 가는 특정 계열과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 체어리티가 떠남으로 내적인 것들이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이후 태고교회의 쇠퇴 과정과 연결되지만, 이 한 번호만으로 당시 모든 사람의 내적·외적 상태를 동일하게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얼굴의 상응은 거듭남을 생각할 때에도 아름다운 방향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그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내적인 것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변화하고, 그 선이 말과 행동과 관계와 일상의 쓰임을 통하여 외적으로 나타납니다. 태고교회에서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하여 빛났듯이, 거듭나는 인간에게서도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은 외적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선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proprium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인간의 얼굴이 들리는것도 결국 자기 힘으로 자신을 높인 결과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를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결국 AC.358의 핵심은 얼굴은 내적인 것들이 빛나는 자리라는 데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있을 때 얼굴은 들리고, 체어리티가 떠날 때 얼굴은 떨어집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이며, 주님의 얼굴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얼굴, 곧 인간의 내적인 상태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안색이 변함은 단순한 표정 변화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57분노를 통하여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보여 주었다면, AC.358은 그 결과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그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고 말씀하십니다. 내적인 것들이 이미 변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주님의 부르심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 (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

bygrace.kr

 

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서 그가 그의 아우 아벨을 죽였다고 기록된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분노는 자기 사랑과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일반적인 결과입니다. 이것은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 분명하게 지각됩니다. 그곳에는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존재하는데, 이유는 악한 영들에게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amori proprio)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반발을 일으키며, 이것이 분노로 나타납니다. 말씀에서는 분노(anger), 진노(wrath), 심지어 격노(fury)까지도 여호와께 자주 돌려지지만, 그것들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Cains anger was kindledsignifies that charity had departed is evident from what is afterwards related of his killing his brother Abel, by whom is signified charity. Anger is a general resulting from whatever is opposed to self-love and its cupidities. This is plainly perceived in the world of evil spirits, for there exists there a general anger against the Lord, in consequence of evil spirits being in no charity, but in hatred, and whatever does not favor self-love [amori proprio] and the love of the world, excites opposition, which is manifested by anger. In the Word, “anger,” “wrath,and evenfury,are frequently predicated of Jehovah, but they are of man, and are attributed to Jehovah because it so appears, for a reason mentioned above. Thus it is written in David: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78:49-50) He sent against them the anger of his nostril, and wrath, and fury, and trouble, and an immission of evil angels;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he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Ps. 78:4950)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의 노여움이 나아갈 길을 닦으시고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셨다(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덧붙여 말한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Not that Jehovah ever sends anger upon anyone, but that men bring it upon themselves; nor does he send evil angels among them, but man draws them to himself. And therefore it is added, that he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and therefore it is said in Isaiah,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45:24) To Jehovah shall he come, and all that were incensed against him shall be ashamed(Isa. 45:24),

 

이로부터 분노(anger) 악을 의미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whence it is evident thatangersignifies evils, or what is the same, a departure from charity.

 

해설

AC.357은 앞의 AC.355에서 짧게 제시했던 분노는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한다는 말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번호는 가인의 분노만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악한 분노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악한 영들이 왜 주님께 분노하는지, 더 나아가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께 왜 말씀에서는 분노진노격노가 있는 것처럼 기록되는지까지 하나로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뜻한다는 근거를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서 찾습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이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분노했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이미 떠난 상태가 드러나고 있으며,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를 내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인정되며,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생기고, 이제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가 분노로 나타난 뒤 마침내 아벨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노의 근원을 자기 사랑과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에서 찾습니다. 이것을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자연적인 분노가 곧 자기 사랑이라는 일반 공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불의와 악에 대한 정당한 분개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357이 직접 다루는 것은 가인이 표상하는 악한 상태에서 나오는 분노입니다. 자기 사랑이 지배적 사랑이 되면 자기 뜻, 자기 이익, 자기 명예, 자기 판단이 관철되기를 원하고, 그것에 반대되는 것이 나타날 때 반발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가인에게 적용하면 그의 분노는 단순히 동생의 제물은 받아 주셨는데 것은 받아 주지 않으셨다는 형제간의 질투를 넘어섭니다. 가인이 의미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우위를 차지하려 하지만, 주님의 질서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입니다. 바로 그 질서가 가인의 자기주장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 곧 체어리티 자체가 가인에게 불편한 것이 되고 마침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까지 나타납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분노를 살필 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진리를 지키기 위해분노한다고 생각할 때에도 실제로 지키려는 것이 주님의 진리인지, 아니면 자기의 교리적 위치와 명예와 판단인지 자기 안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원리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미워하거나 공격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것이 그들에게 반발을 일으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사랑과 선도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의 상태가 다릅니다. 주님과 천국의 질서를 사랑하는 천사에게는 그 질서가 기쁨과 평안이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지배적으로 삼은 악한 영에게는 같은 질서가 자기 욕망을 제한하는 것으로 경험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주님과 그분의 질서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AC.357은 말씀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진노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나아갑니다.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며 심지어 격노하시는 것처럼 표현된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돌려지는 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돌아서 악 가운데 들어가면 그 결과로 고통과 심판을 경험하며, 인간의 관점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벌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씀의 문자에는 이러한 외관에 따라 주님께서 행하시는 것처럼 표현되는 경우가 있지만, 속뜻에서는 악의 원인이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질서에서 돌아선 데 있음을 밝혀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시78:49-50을 인용한 이유가 중요합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여호와께서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를 보내시고 심지어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인용 직후 이것을 직접 해석합니다.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따라서 이 시편 인용은 단순한 보조 구절이 아니라 여호와의 진노라는 말씀의 외관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사45:24에서는 오히려 그에게 노하는 가 부끄러움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시편의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노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사야에서는 인간이 여호와께 노합니다. AC.357은 이 두 표현을 통하여 실제 분노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긴다는 말도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악한 영을 불러들인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의 성질에 따른 영적 결합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는 같은 성질의 사랑이 서로 결합합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증오와 복수와 기만 같은 악을 자기 삶의 지배적 사랑으로 받아들일수록 그와 같은 사랑 가운데 있는 악한 영들과 내적으로 가까워집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고 체어리티 가운데 살수록 천국의 질서와 가까워집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악을 방치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악을 제한하시고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여 선을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 가운데 선택한 사랑의 결과가 허용되는 것과 주님께서 악 자체를 만들어 보내시는 것은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시78: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라는 표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진노가 나아갈 길을 직접 마련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을 주님께서 악과 형벌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선택한 악의 결과가 진행되도록 허용되는 것이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직접 행하신 것처럼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기원은 결코 주님에게 있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것이 악의 결과나 심판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악은 실제 결과를 낳습니다. 다만 그 결과의 원인을 주님의 보복적 분노에서 찾지 않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설명은 결국 다시 가인의 분노로 돌아옵니다. 4:5에서 먼저 분노하는 분은 여호와가 아니라 가인입니다. 주님의 질서가 가인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가인이 나타내는 자기중심적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반발합니다. 앞의 AC.352-354에서 아벨의 기름은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했고, 그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57에서는 자기 사랑(amori proprio)이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자기를 중심에 두는 사랑이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갈등은 단순한 형제간의 갈등을 넘어, 무엇이 신앙과 삶을 지배할 것인가 하는 서로 반대되는 사랑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357 마지막에서 분노을 의미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 결론은 이 번호 전체를 압축합니다. 체어리티가 떠난 자리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자기 욕망에 반대되는 것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상태가 생깁니다. 가인의 분노는 바로 그 내적 상태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다른 사람의 분노를 판정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살피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이 안에서 거슬렸기에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가? 내가 지키려는 것은 주님의 선과 진리인가, 아니면 뜻과 명예와 판단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분노는 때때로 자기 안에서 무엇이 지배적 사랑이 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C.357은 동시에 주님에 관한 매우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악을 보내시는 분이 아니며, 악한 천사를 보내어 인간을 괴롭히시는 분도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과 선 자체이십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자기 사랑으로 돌아설 때 자기와 같은 악과 결합하고 그 결과를 경험하면서, 변함없는 주님의 질서조차 자기에게 대적하는 진노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분노하시는 하나님과 반항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서 인간이 체어리티를 떠나 자기 사랑으로 향할 때 그의 내면과 영적 환경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bygrace.kr

 

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과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