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love to the Lord’와 ‘love toward the neighbor’의 차이는 단순한 번역상의 문제가 아니라,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떠받치는 구조적 차이입니다. 이 두 표현에서 전치사가 다른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것으로, 사랑의 방향과 작동 방식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to’는 직접적인 향함, 곧 근원으로의 수직적 방향을 나타내고, ‘toward’는 어떤 방향을 따라 나아가는 움직임, 곧 삶 속에서 전개되는 수평적 흐름을 나타냅니다.
‘love to the Lord’는 사람의 사랑이 직접 주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경외, 신뢰, 의존, 순종, 예배를 포함하는 사랑으로, 인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 안에 심어 주셔야만 가능한 사랑이며, 그래서 이 사랑은 언제나 위로부터 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랑을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보며, 모든 참된 사랑의 방향을 정하는 원천으로 이해합니다.
반면 ‘love toward the neighbor’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삶의 관계 속으로 흘러나오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이 사랑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며, 이웃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돕는 실제 삶의 행위 속에서 드러납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단순한 인간적 친절이나 도덕적 선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이웃 사랑은 언제나 주님 사랑에서 비롯된 결과이며, 그래서 직접적인 향함이 아니라 ‘toward’, 곧 방향성을 지닌 흐름으로 표현됩니다.
이 두 사랑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주님 사랑은 근원이고 이웃 사랑은 그 근원에서 흘러나온 결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참으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의 이웃 사랑은 결국 자기 만족이나 인정 욕구, 혹은 도덕적 우월감으로 변질됩니다. 반대로, 이웃 사랑 없이 주님 사랑을 말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말이나 생각에 머무를 뿐,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두 사랑을 결코 분리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동일시하지도 않습니다. 주님 사랑은 사랑의 방향을 결정하고, 이웃 사랑은 그 방향이 올바른지를 검증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이웃 사랑은 반드시 보입니다. 이웃 사랑은 주님 사랑의 시험대이며, 그 사랑이 실제로 살아 있는지를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삶의 차원에서 보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그 고백이 실제 관계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어느 하나도 홀로 설 수 없습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love to the Lord’는 사랑의 근원이고, ‘love toward the neighbor’는 그 사랑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 AC의 언어로 말하면, 주님 사랑은 하늘을 향한 방향이고, 이웃 사랑은 그 하늘이 땅 위에 세워지는 방식입니다.
이 구분을 붙들고 계시면, 신앙과 사랑, 그리고 행위의 관계가 구조적으로 정리되어 더 이상 혼동되지 않을 것입니다.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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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인 오늘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한, 어떤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을 어떻게 아나요? 보통은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 금식을 하거나 안수를 받거나, 아니면 여러 날 산에 올라 소위 산기도를 하거나 합니다. 성경 읽기도 하고,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을 하거나 무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라는 책도 보고, 유튜브 등을 찾아보는 등 사안의 중요성이나 심각성에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걸 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것들이지요, 보통 결혼에 대하여, 직장, 직업에 대하여, 거주지에 대하여 등 말입니다. 비슷한 노력을 비기독교인들은 점집을 찾거나 사주를 보는 등 저마다 자기들의 방식으로 애들을 씁니다. 왜들 이럴까요? 잘 모르겠어서이지요 주님의 뜻을 잘 모르겠어서 그러는 겁니다. 비기독교인들의 경우는 신의 뜻을 잘 모르겠어서라고 하겠네요. 이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독교인인데 왜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분의 뜻을 잘 모르는 걸까요?
한편으로, 그런데 여러분, 좀 우스갯소리일 수도 있지만, 그럼 천국 천사들도 주님 뜻 알기 위해 우리처럼 금식기도 하고 그럴까요? 이건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하지요? 네, 맞습니다. 천사들은 지상에 사는 우리가 하는 이런 거 안 할 거 같아요. 아니, 안 합니다. 왜죠? 천사들은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또렷이 알기 때문입니다. 안 그러면 그건 천사가 아니지 않을까요? 네, 맞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우리처럼 이런 거 안 합니다. 안 하고도 늘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또렷이 압니다. 그리고 우리와는 다르게 그들은 알게 된 그 주님의 뜻을 마음을 다해 즉시 기쁘고 즐겁게 실행에 옮깁니다. 그들이 주님의 뜻을 순종, 즉시 실행에 옮길수록 그만큼 더 그들은 더욱더 주님의 뜻을 더 잘 알게 됩니다. 그들은 100% 주님 뜻대로만 삽니다. 그것도 기쁘고 즐겁게 자원하여 삽니다. 천사들과 주님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쌍방은 내 것이 모두 네 것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천사들의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즉 천사들은 즉시 아는데 우리는 왜 모를까요?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차이입니다. ‘퍼셉션’(perception)이란, 어떤 일과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 곧 그 일, 그 상황에 대한 그분의 선과 진리를 아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알게 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실천, 거기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 안에 머무르는 능력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주님의 뜻을 안다는 건, 그 일을 주님의 진리 안에서 실천하여 주님의 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주님이 기뻐하실까? 내가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일까? 를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주님의 이 마태복음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퍼셉션 능력입니다. 우리와 천사의 차이가 바로 이 차이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능력은 각 사람의 ‘착한 행실’만큼 생깁니다. 그리고 이 ‘착한 행실’은 세상 속에서,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즉, 세상을 향해 주님의 빛을 비추며, 세상에 필요한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우리가 감당하면 할수록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뜻을 천사들처럼 쉽게 알게 하십니다. 퍼셉션이 또렷해지는 것이지요. 우리와 천사들의 퍼셉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주님 뜻을 알면 즉시 순종하는 반면, 우리는 그러지 않거든요. 저들은 주님 뜻 실천하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거나 망설임이 없는데 우리는 안 그러거든요. 그래서 저들은 또렷하지만 우리는 희미하며, 저들은 생생하지만 우리는 흐릿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퍼셉션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저 이름들의 순서는 바로 이 퍼셉션이 또렷한가, 흐릿한가의 순서입니다. 저 이름들, 그러니까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이라는 이름은, 그리고 뒤에 더 나오는 므두셀라, 라멕, 그리고 노아까지, 이 이름들은 사실은 어느 한 개인들의 이름이 아니라 해당 시대를 관통하던 퍼셉션의 이름들입니다. 즉 첫 사람 아담 시대를 이끌던 퍼셉션을 일컬어 ‘아담’(Adam, 사람)이라 이름한 것이며, 이런 퍼셉션으로 살던 사람들을 가리켜 ‘아담’ 교회라고 하는 것이지요. ‘셋’(Seth), ‘에노스’(Enosh)도... 등등,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첫 교회인 아담의 퍼셉션만 제일 온전했고, 이후 갈수록 점점 더 모호하고 흐릿해져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으로 갈수록 퍼셉션은 온전하여 어떤 일에 대한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분명하게 알은 반면, 반대로 에녹, 므두셀라를 거쳐 라멕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이 중 이 에녹은 특별한데, 이 에녹 이야기는 다음 주에 다룰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이런 퍼셉션의 온도차는 비유하자면, 한 가운데 씨앗이 있는 과일과도 같고, 방 한가운데 전구가 환하게 켜져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과일의 중심으로 갈수록 근원이지만, 반대로 바깥 껍질 쪽으로 갈수록 근원에서 멀어지는 것과 같고, 방 한가운데로 갈수록 빛이 환하지만, 반대로 멀어질수록 빛이 흐릿해지는 것과도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천적 인간이요, 안식일이고, 일곱째 날이었던 아담으로 갈수록 퍼셉션은 온전한 반면, 반대로, 즉 후손, 후대로 갈수록 흐릿해진 이유는, 아담으로 갈수록 선과 진리는 하나, 곧 앎은 삶을 섬겼던 반면, 그 반대 순서로 갈수록 진리는 선에서 분리되어 앎이 삶을 누르고 머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faith)이 체어리티(charity)의 머리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원래대로라면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 체어리티가 입고 다니는 옷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신앙은 단지 그릇일 뿐이고, 정작 중요한 건 거기 담긴 내용인 체어리티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세상 종말은 다른 게 아닙니다. 세상을 떠받치는 건 창조주이신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인데 이것이 남김없이 다 사라진 상태, 그래서 더 이상 퍼셉션이 없는, 완전히 끊긴 상태가 바로 끝, 곧 종말이요, 최후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주님은 항상 각 교회 시대든, 한 국가, 한 개인이든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무슨 새로운 걸 시작하시지 않습니다. 완전히 황폐해져야, 그래서 완전히 자기를 비워내야 그 빈 그릇에 주님의 새것을 담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누가복음 둘째 아들 이야기는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13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15:13-20)
우리는 우리의 무슨 신앙 연수와 상관없이 갈수록 주님의 선과 진리를 즉시, 그리고 생생하게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굳이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깨닫지 말고 웬만하면 그런 무슨 조짐이 보이면 얼른 돌이켜 그 무한 루프, 그 끝없이 되풀이되는 그 악한 패턴에서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탈출이란, 위 누가복음 본문 맨 마지막 말씀처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 곧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선택 등 내가 끌어다 쓸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바닥난 후, 드디어 주님을 찾는 것이지요. 이때 반드시 위 둘째 아들처럼 ‘스스로 돌이키는’ 시간, 곧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는 시간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저는 오늘 설교로 여러분께 드리고 있지만, 사실은 지난날 제 얘기를 주님 앞에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Mahalalel were eight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he died.(창5:16, 17)
AC.512
이 말씀도 앞에 나온 유사한 말씀들과 동일합니다.It is the same with these words as with the like words before.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앞에서 반복되어 온 해석 원리를 다시 한번 분명히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기보다 이미 제시된 틀 안에서 이 구절을 읽어야 함을 조용히 상기시켜요. 즉, 여기서 언급되는 표현들도 모두 시간이나 사건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퍼셉션의 변화를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앞선 구절들에서 ‘날’, ‘해’의 숫자, ‘자녀들’, 그리고 ‘죽음’이 모두 상태의 언어였던 것처럼, 이 구절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반복은 설명의 부족이 아니라, 독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붙들어 주는 장치예요. 성경을 다시 문자적 이해로 끌어당기려는 유혹을 차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해석의 속도를 잠시 늦추라고 말해 주는 것처럼도 들립니다. 새롭고 인상적인 해석을 계속 덧붙이기보다, 이미 밝혀진 원리가 지금 읽는 말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라는 초대라는 말입니다. 말씀의 힘은 새로운 정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진리가 상태에 따라 반복해서 작동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이 글은 태고교회의 흐름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마할랄렐 이후의 교회 상태도 앞선 단계들과 동일한 법칙 아래 놓여 있으며, 퍼셉션의 일반화와 쓰임새의 변화라는 큰 흐름 속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결국 AC.512는 해설을 멈추는 글이 아니라, 해석의 방향을 고정시키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읽어 온 방식 그대로, 상태를 중심에 두고, 퍼셉션과 사랑의 생명, 그리고 쓰임새의 변화를 함께 보라는 조용한 확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