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 심화

2.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를 한 문장 안에서 연결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한 이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다는 것,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라는 것, 그리고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으며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읽으면 사랑이 적은 것과 아르카나가 가려지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을 이해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AC.32가 말하는 아르카나의 내용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추어져 있었다는 아르카나는 추상적인 비밀 지식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한 사랑과 신앙의 질서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광명체들이라 하고, 사랑을 더 큰 광명체, 신앙을 더 작은 광명체라 하며, 사랑은 낮을, 신앙은 밤을 다스린다는 것이 그 아르카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를 이해하려면 신앙을 사랑과 독립된 별도의 종교적 능력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30부터 계속되는 논리는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더 작은 광명체인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신앙도 살아 있으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본래의 생명을 잃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사랑 자체가 거의 사라지면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진리도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신앙을 교리의 인정, 지적 동의, 종교적 주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워지고, 사랑은 신앙과 나란히 놓이는 하나의 덕목 정도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이 광명체이고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질서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아르카나가 가려져 있음사랑이 거의 없음이 연결됩니다. 아르카나가 말씀 안에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의 참된 관계가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알려지거나 인정되지 않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던 것을 이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설명하도록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는 표현에서 순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어서 사랑이 없다고 하지 않고, 사랑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30부터 이어진 광명체의 질서와 정확히 같습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더 작은 광명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2에서 세 가지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세대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졌고, 사랑이 거의 없으므로 살아 있는 신앙도 거의 없어졌으며, 그 결과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 자체가 교회에서 가려졌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시대에 해는 사랑이고 달은 신앙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아르카나를 다시 밝혀야 했다는 것이 AC.32의 논리입니다. (AC.32 심화 2)

 

 

 

AC.32 심화 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 심화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가리켜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라고 말합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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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심화

1. 세대의 종말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가리켜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AC가 쓰인 때로부터 이미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세계와 기독교회는 계속 존재하고 있으니,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이 질문은 세대의 종말을 현대적인 시간 개념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영적 상태로 읽을 것인가와 관계됩니다.

 

우선 AC.32 자체가 세대의 종말을 무엇과 연결하는지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종말의 핵심은 몇 년 뒤 세상이 사라진다는 시간표가 아니라, 한 교회가 그 본래의 사랑과 신앙을 거의 잃어버린 영적 상태에 있습니다.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살아 있는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를 스베덴보리는 세대의 종말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세대(age)를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 인간 세대, 20년이나 30년 정도의 기간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복음서의 consummation of the age 역시 한 사람의 세대가 끝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교회적 시대의 완결과 관계된 표현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18세기에 세대의 종말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몇십 안에 지상 세계가 끝난다는 예언을 한 것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종말이라는 말을 어떤 상태가 마지막 단계에 이른 것으로 이해하면 시간이 오래 흐른다는 사실 자체가 곧 모순이 되지는 않습니다. 한 교회가 그 본래의 사랑과 신앙을 잃었다고 해서 지상의 조직과 제도, 예배와 교리, 교회 건물과 이름이 그 즉시 모두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형태는 남아 있으면서도 그 교회의 내적 생명은 크게 쇠퇴한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AC.32의 관심은 바로 그 내적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2026년이라는 현재 시점에서 아직 종말이 끝나지 않았는가?라고 묻기 전에,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종말이라고 불렀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32에서 그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물리적 소멸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질서가 소진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이 단락의 문맥에 가장 잘 맞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는 최후의 심판과 새 교회에 관하여 훨씬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그 후 수백 년의 교회사를 정확히 어떤 단계의 과도기라고 이름 붙일 것인지, 또는 현재가 그 과정의 어느 지점인지를 AC.32만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자기 시대의 교회를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종말 상태로 보았다는 사실까지만 분명히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세대의 종말이 수백 년 동안 계속된다고 생각하기보다, 먼저 종말이 달력상의 짧은 기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AC.32에서 그 상태를 판단하는 기준은 매우 분명합니다. 사랑이 살아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이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2 심화 1)

 

 

 

AC.32 심화 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심화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를 한 문장 안에서 연결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한 이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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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다 : 마지막 시대에 드러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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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있었을까?’

 

AC.31 [3]에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하신 규례를 언급합니다. 27:20-21에는 순수한 감람유를 가져다가 등불을 켜고 회막 안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그것을 보살피도록 하는 명령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등불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로 지켰지만, 그 규례가 표상하는 천국의 내적 의미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자기가 하는 행위의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행위를 통하여 거룩한 것을 표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표상 표상을 행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 자신도 그 거룩한 상태 안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제사, 절기, 성막과 성전, 제사장 직무와 의복 등은 주님과 천국과 교회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표상의 거룩함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깊은 영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느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제도와 말씀에 부여하신 표상적 질서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제사장이 등불의 내적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해서 등불의 표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그 제물과 제단과 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적 의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표상의 의미는 사람의 주관적인 해석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표상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의미를 몰라야 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를 아는 것 자체가 표상을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더 오래된 교회들에서는 자연계의 사물들이 무엇을 상응하고 표상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해야 표상이 가능하다는 것이 영적 원리는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특별한 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많은 사람이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강하게 기울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율법과 규례를 주셨고, 그 외적 예배가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도록 질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내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정해진 규례를 수행하는 동안 그 외적 행위는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의미를 모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지킬 있었는가?라는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명령의 모든 깊은 의미를 알아야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외적 명령을 준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들의 무지를 그 자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표상 교회가 있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은 그 자체로 더 높은 영적 상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러한 인간의 상태 속에서도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시고, 외적인 예배를 통하여 천국의 것들이 표상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이상적이어야만 주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태를 아시고, 그 상태에 맞추어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십니다. 유대교회의 외적 예배 역시 그런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내적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규례를 통하여 주님과 천국에 관한 표상들이 역사 속에 계속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AC.31에서 말하는 항상 타는 등불은 무엇을 표상했을까요?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만큼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규례가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상의 세부적인 의미는 적절한 곳에서 설명하겠다고 여기서 유보합니다. 그러므로 AC.31만을 가지고 저녁은 반드시 이런 상태이고, 등불이 밤새 타는 것은 반드시 이런 교회사적 보존을 뜻한다는 식으로 세부 상응을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밝힌 만큼과 우리가 그 원리를 따라 추론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심화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이렇습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이 모든 규례의 내적 의미를 알아야만 그 규례가 표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표상의 근거는 인간의 이해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영적 질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의미를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표상을 가능하게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내적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외적 예배까지 사용하여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고 보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타는 등불은 유대인들이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보다, 그 규례를 통하여 주님께서 무엇을 표상하도록 하셨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31에서는 그것이 바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신앙이며, 주님께서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고 다시 겉 사람의 삶에까지 나타나게 하시는 질서입니다. (AC.31 심화 3)

 

 

 

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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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심화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 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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