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Mahalalel were eight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he died. (5:16, 17)

 

AC.512

 

이 말씀도 앞에 나온 유사한 말씀들과 동일합니다. It is the same with these words as with the like words before.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앞에서 반복되어 온 해석 원리를 다시 한번 분명히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기보다 이미 제시된 틀 안에서 이 구절을 읽어야 함을 조용히 상기시켜요. 즉, 여기서 언급되는 표현들도 모두 시간이나 사건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퍼셉션의 변화를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앞선 구절들에서 ‘’, ‘’의 숫자, ‘자녀들’, 그리고 ‘죽음’이 모두 상태의 언어였던 것처럼, 이 구절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반복은 설명의 부족이 아니라, 독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붙들어 주는 장치예요. 성경을 다시 문자적 이해로 끌어당기려는 유혹을 차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해석의 속도를 잠시 늦추라고 말해 주는 것처럼도 들립니다. 새롭고 인상적인 해석을 계속 덧붙이기보다, 이미 밝혀진 원리가 지금 읽는 말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라는 초대라는 말입니다. 말씀의 힘은 새로운 정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진리가 상태에 따라 반복해서 작동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이 글은 태고교회의 흐름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마할랄렐 이후의 교회 상태도 앞선 단계들과 동일한 법칙 아래 놓여 있으며, 퍼셉션의 일반화와 쓰임새의 변화라는 큰 흐름 속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결국 AC.512는 해설을 멈추는 글이 아니라, 해석의 방향을 고정시키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읽어 온 방식 그대로, 상태를 중심에 두고, 퍼셉션과 사랑의 생명, 그리고 쓰임새의 변화를 함께 보라는 조용한 확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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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창세기 본문 중 에서가 자기 아내들을 구하는 장면들입니다.

 

34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35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26:34, 35)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27:46)

 

6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7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8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9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28:6-9)

 

그리고 아래는 이에 대한 해설입니다.

 

에서의 두 결혼(헷 족속 유딧, 바스맛)과 그로 인한 이삭, 리브가 마음의 ‘근심’, 그리고 리브가가 ‘내 삶이 싫어졌다’고까지 말하는 탄식은, 문자 그대로만 보면 ‘이방(헷)과의 혼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창세기 속뜻의 흐름에서는 ‘가정 내 갈등’ 자체가 핵심이라기보다 ‘교회 안에서의 선과 진리의 결합(혼인)’이 어떻게 흐트러지는가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혼인’은 단지 가족사(史)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신앙/교리)가 결합하여 생명이 생겨나는 상태’를 대표적으로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딸(아내)을 맞이했는가’는 ‘어떤 종류의 정서, 욕구, 교리, 삶의 방식과 결합했는가’를 드러냅니다.

 

에서(자연적 선, 혹은 자연인의 강건한 에너지에 가까운 것)는 본래 ‘야곱(진리의 차원, 교리, 질서, 분별)’과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있어야 합니다. 즉 ‘자연의 힘(에서)’은 ‘진리의 인도(야곱)’를 받아 ‘선의 도구’가 될 때 복된 자리에 놓입니다. 그런데 창26–28의 이 결혼 장면들은, ‘자연적 힘이 진리의 인도를 싫어하거나(혹은 무시하거나)’, 그 대신 ‘바깥의 것(외적 매력, 세상적 기준, 감각적, 자기중심적 기쁨)’과 결합해 버릴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입니다. 속뜻으로 말하면, ‘속 사람(이삭의 선, 리브가의 진리)’이 ‘겉 사람(에서의 삶)’의 잘못된 결합과 선택으로 인해 깊은 불일치와 불쾌, 곧 ‘양심의 고통’과 같은 상태를 겪는 것입니다.

 

특히 ‘헷 족속’은 단순히 ‘민족이 이방이다’라는 표지가 아니라,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주님과의 결합에 어긋나는 어떤 요소’—다시 말해 ‘내적 예배(주님 사랑)와 연결되지 않은 외적 예배’, 혹은 ‘진리의 빛이 아닌 감각과 습관이 주도하는 삶의 방식’ 같은 것을 대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헷 족속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는 것은, ‘자연적 삶이 자기에게 편하고 좋아 보이는 방식(외형상 그럴듯한 것)과 결합하는데, 그것이 주님께로 향한 내적 결합을 깨뜨리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겉으로는 결혼이요 가정의 확장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생명(선과 진리의 혼인)이 아닌 다른 결합’이 됩니다. 그러니 리브가가 ‘내 삶이 싫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된 감정 표출이 아니라, ‘진리(리브가)의 입장에서 보아, 선과 진리의 계승이 끊어질 수 있다는 절박함’을 드러내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이라는 대목은, ‘진리의 계열(야곱)이 외적, 감각적 결합을 택하면, 교회(한 사람 안의 교회)의 미래가 사라진다’는 두려움입니다.

 

이때 중요한 포인트는 ‘리브가가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아내를 맞게 하려는 것’이 단지 ‘민족 순수성’이나 ‘좋은 혼처 찾기’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진리가 자기에게 합당한 정서, 선의 바탕을 얻어와야 한다’는 원리를 보여 준다는 점입니다. 밧단아람(아람, 라반의 집)은 흔히 ‘외적 지식들, 기억-지식들, 교리적 재료들’이 모여 있는 영역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즉 야곱이 그곳으로 가서 아내를 맞는다는 것은, ‘진리(야곱)가 주님께서 쓰실 수 있는 선의 바탕(애정, 삶의 습관, 실천의 토양)을 얻어와 결합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가나안 사람의 딸’과 ‘헷 사람의 딸’은 ‘겉은 종교, 도덕, 문화로 포장되었으나 내적이 주님께로 열려 있지 않은 결합’을 대표할 수 있고, 반대로 ‘밧단아람에서의 결합’은 ‘진리가 주님의 섭리 아래서 순서를 갖추어 선과 결합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상징이 됩니다.

 

28:6-9에서 에서가 보이는 반응은 아주 인간적으로도 설득력 있습니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아버지가 기뻐하지 못하네. 그럼 다른 방식으로라도 맞춰볼까?’ 그래서 에서는 ‘가나안 딸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 못함’을 보고, 이번에는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겉으로는 ‘수정’이고 ‘효도’ 같은 동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더 섬세한 진단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에서가 깨달은 것’은 ‘주님의 뜻(내적 이유)’이 아니라 ‘아버지의 기분(외적 신호)’에 머무를 위험이 큽니다. 즉 ‘내적 회개’가 아니라 ‘외적 처방’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드러납니다. ‘가나안이 안 된다면 이스마엘 쪽은 어떨까?’ 하는 선택은, ‘내적 진리의 인도’가 아니라 ‘대안 탐색’으로 움직이는 자연인의 전형적인 움직임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마엘 계열은 성경 전체 상징 흐름에서 종종 ‘영적인 것과 분리된 합리성/지식, 혹은 외적 신앙과 내적 사랑의 불일치’ 같은 것을 대표하는 방향으로 읽힙니다(물론 문자적으로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그 자체로 단순 악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본처들 외에’ 또 더한다는 표현까지 보면, 이것은 ‘정리와 순서의 회복’이 아니라 ‘혼합의 확대’에 가깝습니다. 속뜻에서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둔다’는 표상은, ‘한 삶이 여러 종류의 애정/교리를 뒤섞어 품는 상태’, 곧 ‘일관된 중심이 없는 결합’을 드러내기 쉽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시도는 ‘근본 문제의 치유’가 아니라 ‘겉모양의 조정’에 머물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그 기쁨이 ‘주님 안에서의 질서’가 아니라 ‘관계의 표면’에서만 판단되면, 결과적으로 ‘내적 사람의 근심’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이 대목들을 설교자의 관점으로 풀어내면, 성도들에게는 꽤 현실적인 거울이 됩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며 감각적 선택을 밀어붙이는 것도 문제이지만, ‘눈치 보고 반응 보고, 다른 처방을 덧대는 방식’도 동일하게 문제의 뿌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주님이 다루시는 것은 ‘내가 누구를 기쁘게 했는가’가 아니라 ‘내 안에서 무엇과 결합했는가’입니다. 즉 ‘내 삶(자연적 욕구, 일상 습관, 즐거움, 자존심, 효율, 성공욕)’이 ‘주님의 진리’와 결합해 주님께로 향하는가, 아니면 ‘겉으로 그럴듯한 외적 기준’과 결합하여 내적 생명을 갉아먹는가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삭, 리브가의 ‘근심’은 단지 부모 마음이 상한 정도가 아니라, ‘내적 교회가 외적 삶의 결혼 선택 때문에 숨이 막히는 상태’를 그립니다.

 

정리하면, (1) 에서의 헷 족속 결혼은 ‘자연적 힘이 외적, 감각적 삶의 방식과 결합하여 내적 선, 진리와 어긋나는 상태’를 보여주고, 그 결과가 (2)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곧 ‘내적 양심의 고통,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불쾌’로 나타납니다. (3) 리브가의 탄식과 야곱의 파송은 ‘진리가 합당한 선의 바탕과 결합하도록 주님이 순서를 세우시는 섭리’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4)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을 추가로 맞이하는 장면은 ‘내적 변화가 아닌 외적 보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연인의 움직임’과 ‘혼합의 확대’라는 위험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단락들은 ‘가정사’라기보다 ‘한 사람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어떤 길로 가는가’—‘주님 중심의 결합인가, 외형 중심의 결합인가’를 깊이 묻는 본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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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첫 주일입니다. 보통은 신년 주일이라 하여 설교도 그에 맞게 준비하지만, 저희는 당분간 아주 특별한 절기 외에는 오직 이 AC에만 전념하기로 한 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창세기 5장입니다. 오늘부터 6주에 걸쳐 창세기 5장을 살피게 되며,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 1절로 3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1-3)

 

위 본문을 아래

5 아담 계보의 속뜻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겉으로 보면 무슨 가계 족보의 서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경 전체에서 인간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장 압축적으로 선언하는 대목입니다. ‘아담의 계보’라는 말로 시작하지만, 이는 한 개인의 혈통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최초의 교회 상태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다음 상태로 넘어갔는지를 말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인간의 기원이 아니라, ‘사람됨의 기원’, 곧 교회의 기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혀 새로울 수 있는 이 관점을 아래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이 말하는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본문은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떤 한 사람의 족보를 떠올리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은 그 기대를 깨뜨립니다.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람’을 뜻하는 말이며, 성경은 이 ‘사람’을 단수로 말하면서도 동시에 복수로 취급합니다. 이는 분명히 어떤 한 개인,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류 최초의 인간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 것이지요.

 

성경에서 ‘사람’은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된 상태를 뜻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상태, 다시 말해 교회가 존재할 때, 그 상태를 성경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곧 ‘사람’이었고, 그 교회에 속한 이들은 개인이기 이전에 교회의 일부였습니다. 그들의 사고, 사랑, 퍼셉션(perception), 삶 전체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아담의 계보’로 시작하는 것은, 인간 개인의 계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상태의 계승’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다, ‘그 이름으로 불리던 교회가 어떤 상태로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가’를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며, 나 자신을 한 개인으로 보기보다, 지금 나는 어떤 교회 상태에 서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모양은 즉각적 퍼셉션의 삶을 뜻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외적으로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살도록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참인지를 배움과 학습을 통해서 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인식, 곧 지각(perception,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이라 부릅니다. 아래는 관련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483에서 창세기 5장에 나열된 이름들, 곧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에녹’(Enoch), ‘므두셀라’(Methuselah), ‘라멕’(Lamech), ‘노아’(Noah)라는 이름들을 다시 한번 분명히 정리합니다. 셋에서 노아에 이르는 모든 이름들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각각 하나의 ‘교회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들 가운데 첫째이자 중심이 되는 교회를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는 앞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태고교회가 주님의 모양과 형상을 가장 온전하게 반영했던 교회였기 때문이지요. 이후에 나오는 모든 교회들은 이 ‘사람’의 상태에서 파생된 변형들이었습니다.

 

이 교회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 특징은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이란, 지식이나 판단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내적 지각’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를 배워서 알지 않았고, 명령을 통해 분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곧바로 퍼셉션, 곧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 교회들 사이의 차이는 교리의 차이나 제도의 차이가 아니라, ‘퍼셉션의 차이’였습니다.

 

이 퍼셉션의 삶은 율법 이전의 삶이었고, 교리 이전의 삶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로 계산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직관적으로 알았던 삶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규범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사랑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인간이 그와 같은 질서 안에 놓였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모양은 자동적으로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 퍼셉션의 삶은 점차 약해졌고, 결국 다른 방식의 교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먼저 이 가장 완전한 상태를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상태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성경은 여전히 그 방향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셋째, ‘셋을 낳았다는 것은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음을 뜻합니다

 

본문 3절에서 갑자기 시간이 흐르고, 아담이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Seth)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오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한 사람이 나이 들어 아들을 낳은 것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새로운 교회 상태의 출현’을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완전한 퍼셉션의 상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주님께서는 그 리메인스(remains)를 보존하시어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으로 대표, 표상됩니다. 이 교회는 태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동일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이 여전히 중요했으나, 더 이상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했고, 신앙이 점점 더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순수한 상태가 지나가도, 주님은 언제나 그다음 상태를 준비하십니다. 셋은 타락의 결과가 아니라, ‘섭리의 응답’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교회는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 역시 셋의 교회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즉각적 퍼셉션의 삶을 살지 못하지만, 사랑과 신앙의 결합 안에서 여전히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결합입니다. 사랑이 신앙과 분리되지 않을 때, 교회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지 존재하게 하시기 위해 창조하지 않으셨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무너져도 끝나지 않고, 언제나 다음 상태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계보 위에 서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삶은 다음 상태를 낳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이 말씀 앞에서 함께 돌아보게 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속 사람의 상태’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모두 이 속 사람의 상태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무슨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무엇보다도 자기 속 사람의 상태 관리에 매진해야 합니다. 대신 ‘나는 교회 몇 년 다녔어’, ‘나는 예수님 영접 기도한 지 벌써 30년이나 된 사람이야’, ‘나는 교회에서 목사로, 장로로, 권사, 집사로 평생 섬겼어’ 등등 이런 다분히 겉 사람에 치우친 공로에 의지하시다가는 나중에 큰일 납니다.

 

동일한 원리로 우리는 성경도 이제는 겉이 아닌 속으로, 아니 겉도 보고 속도 보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엉뚱하게 해석하는 바람에 삼천포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겉도 중요하지만, 속으로 읽는 훈련, 곧 천사들이 읽는 방식으로 읽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사랑의 주님,

 

오늘 신년을 맞아 창세기 5장 첫 본문으로 주님 음성에 귀 기울였습니다. 다소 생소하고 낯선 내용들이 혹시 있었을지라도 반발심 대신 주님을 사랑하는 애정 어린 마음으로 저마다 자기 내면을 들을 귀 있는 상태로 유지하고자 힘써 노력하는 심령들에게는 주님, 아낌없이 놀라운 하늘의 계시를 부어주시옵소서. 그래서 놀라운 일, 곧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결실의 기적들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렇지 못한 심령들에게도 주님, 저들을 어루만지사 부드러운 심령들 되게 하시기를, 그래서 다들 올 한 해 능히 주님의 계시를 받기에 합당한 심령들 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다음 본문은 창5:4-20(AC.486-515)입니다.

 

 

 

설교

2026-01-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2, 25. 창5.1, 2026-01-04(D1)-주일예배(창5,1-3, AC.469-485, 성찬), ‘창5 아담 계보의 속뜻’.pdf
0.33MB
성찬.pdf
0.14MB

 

 

 

 

주일예배(2026/01/11, 창5:4-20),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오늘은 창세기 5장 두 번째 시간, 4절로 20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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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12/28, 창4:25-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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