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1 심화

2. 60  교회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 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교회라는 표현을 보면 자연스럽게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 말하는 교회(New Church), 곧 새 예루살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1의 이 한 문장만 놓고 그것을 곧바로 특정한 역사적 교회나 교단으로 한정하는 것은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같은 문장에서 범위를 함께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먼저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을 말하고, 그 결과로 교회를 언급한 뒤, 곧바로 특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을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심은 어떤 조직의 명칭보다 어둠 가운데 빛이 임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영적 상태가 시작되는 에 있습니다.

 

60의 본문 자체도 이 문맥과 잘 맞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빛이 이르렀고,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그리고 여호와가 영원한 빛이 된다는 말씀은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을 묘사합니다. AC.31에서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해와 달의 밝아짐을 통해 사랑과 신앙이 주님에게서 다시 살아나는 상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교회는 우선 주님의 오심과 빛의 유입으로 새롭게 세워지는 교회의 상태를 뜻한다고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그와 같은 질서가 한 개인의 거듭남에도 적용된다고 직접 말합니다.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이 주님의 빛을 받아 사랑과 신앙이 살아나기 시작할 때, 그 사람 안에서도 일종의 새로운 교회의 상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교회를 단순히 건물이나 조직의 이름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교회가 참으로 교회가 되려면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라는 말의 핵심도 외적 명칭의 새로움보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빛과 생명이 들어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 말하는 예루살렘과 전혀 관계없다고 미리 선을 그을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AC.31은 여기서 그 역사적·교회사적 동일성을 논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을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범위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곧 사60은 주님의 강림으로 어둠 가운데 빛이 임하고, 그로 인해 새 교회가 일어나며, 개별적으로는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이 빛을 받아 거듭나는 상태를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60 교회가 어느 교회인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AC.31에서는 특정한 후대 교단명을 먼저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기보다, 주님의 강림과 빛의 유입으로 새롭게 세워지는 교회의 상태를 뜻하며, 그와 같은 새로움은 거듭나는 각 사람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이 자리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고 있는 범위입니다. (AC.31 심화 2)

 

 

 

AC.31 심화 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수 있었을까?’

AC.31 심화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수 있었을까?’ AC.31 [3]에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하신 규례를 언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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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것은?’

AC.31 심화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것은?’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와 애굽에 관하여 ‘단지 감각과 단지 기억 지식의 원리’(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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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것은?’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와 애굽에 관하여 단지 감각과 단지 기억 지식의 원리(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를 뜻하며, 여기서는 그것들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을 읽을 때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감각이나 기억 지식 자체를 나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감각을 통하여 자연세계를 접하고, 기억 지식을 통하여 배우고 생각합니다. 앞의 AC.24-29에서도 기억 지식은 거듭남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다루어졌습니다. 문제는 감각과 기억 지식이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믿을 없다고 하면서 영적인 모든 것을 감각적 증거 아래에 두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천국, 영혼, 주님의 섭리와 같은 것을 오직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는지 없는지로만 판단하는 것입니다. 질문하고 검토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연적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실재의 전부로 정하고, 그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태도입니다. 감각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는 자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의 재판관이 될 때 질서가 뒤집힙니다.

 

기억 지식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과 신학과 교리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지식 자체는 귀중하며,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참이다, 이성이 납득하지 못하면 주님의 말씀도 받아들일 없다는 식으로 기억 지식을 가장 높은 자리에 놓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지식이 사랑과 신앙을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신앙의 가능 여부를 판정하는 지배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 삶에서는 이런 모습이 아주 미묘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리에는 매우 정확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사랑과 자비가 사라질 수 있고, 말씀의 구절을 많이 알면서도 그 지식을 상대방을 판단하고 이기는 데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식이 많아서 사랑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지식이라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쓰이면 매우 유익합니다. 문제는 지식이 자기 지성에 대한 신뢰와 결합하여 사랑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입니다.

 

감각적인 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 세계를 자세히 관찰하고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 자체는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통하여 주님의 지혜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사실만을 전부라고 여기고 영적인 원인이나 목적 자체를 배제할 때, 감각은 더 이상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지배하는 원리가 됩니다. AC.31에서 경고하는 것은 바로 이런 질서의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감각과 단지 기억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말을 과학이나 지식이 신앙을 파괴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지식과 이해를 거듭남의 중요한 단계로 봅니다. 오히려 사람의 감각과 지식이 자기보다 높은 것, 곧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섬길 때에는 그것들이 거듭남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AC.31의 표현은 결국 무엇이 무엇을 다스리는가?의 문제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중심이 되고 감각과 기억 지식이 그것들을 섬기면 질서가 바르게 서지만, 감각과 기억 지식만이 최종 기준이 되어 사랑과 신앙을 재단하기 시작하면 영적 빛은 점차 가려질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서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은 바로 이런 상태를 나타냅니다. 자연적인 것 자체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영적인 것 위에 올라가 지배할 때 사랑과 신앙의 빛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AC.31 심화 1)

 

 

 

AC.31 심화 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심화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 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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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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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AC.30 [3]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라는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중요한 원리를 아주 압축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그것들은 바로 앞에서 말한 사랑과 신앙이며, 특히 중요한 표현은 in its recipient objects, 빛을 받아들이는 대상 안에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태양빛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태양빛이 물이나 나뭇잎, 창문이나 돌에 비치면 빛은 각각의 대상 안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빛 자체의 근원은 아닙니다. 빛의 근원은 태양이고, 대상은 그 빛을 받아 그것이 나타나게 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의지와 이해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비유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사람 안에서 사랑은 의지에,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은 내가 사랑한다, 내가 진리를 이해한다, 내가 이것을 믿는다고 느낍니다. 실제로 그것들은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서 일어나며, 사람은 자유 가운데 그것을 받아들이고 행합니다. 그러나 AC.30이 강조하는 것은 그 생명의 최초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라고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인다는 말은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용체는 실제로 받아들이며, 사람은 자유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은 생각하고 선택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만 그 모든 과정에서 참된 사랑과 참된 신앙의 생명 자체를 자기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핀 AC.29생명 없는 상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사람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면서도 처음에는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행하고 선택하면서도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 자신의 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근원을 올바르게 구별하게 합니다.

 

실제 삶에서도 이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기로 결정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는 실제로 상황을 판단하고, 도울 것을 선택하며, 자신의 손과 시간과 재물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참된 선, 곧 이웃을 위하는 사랑의 생명까지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냈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태양빛이 물체 안에 실제로 나타나면서도 그 빛의 근원이 그 물체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AC.30 [3]의 이 비유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가짜이고 주님만 모든 것을 하신다는 식의 인간 부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의지와 이해는 사랑과 신앙을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수용체이며,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그 수용체 안에 사랑을 일으키시고 진리로 비추십니다. 이것이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라는 비유의 핵심입니다. (AC.30 심화 1)

 

 

 

AC.30, 창1:14-17(AC.30-37),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 : 사랑으로 생명을 얻는 신앙의 넷째 날’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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