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station’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 단순히 ‘타락’이나 ‘심판’으로 번역하면 그 깊이가 사라집니다.

 

vastation’(황폐, 荒廢)이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전문 용어로, 한 사람이나 한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곧 체어리티와 신앙이 점진적으로 소멸되어 가는 영적 과정’을 뜻합니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파괴나 외적 심판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사랑을 버리고 거짓과 악을 선택함으로써 ‘내면이 비워지고 메말라 가는 상태의 누적’입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듯이, 황폐 역시 단계적으로 진행되며, 처음에는 선이 약해지고 진리가 흐려지다가, 나중에는 참과 선이 더 이상 인식되지 않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중요한 점은 황폐가 단순한 끝이나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되는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사람 안에 남아 있는 거짓과 악이 드러나고 제거되지 않으면 새로운 선과 진리를 심으실 수 없기 때문에, 먼저 기존의 왜곡된 신앙과 사랑을 비워내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황폐는 종종 포로기, 광야, 어둠, 밤, 침묵, 일곱 번의 징계 같은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창세기에서 가인의 계보가 라멕에 이르러 황폐의 극점에 도달하는 것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더 이상 생명을 낳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뜻하며, 동시에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교회의 씨앗이 준비되는 전환점’이 됩니다. 즉 vastation은 파괴 그 자체가 아니라, ‘거짓된 것을 비워 새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 정화의 과정’이며, 주님께서 결코 방임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사용하시는 깊은 섭리의 방식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기 창4에 나오는 가인 계보인 이단의 범주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통일교,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JMS 같은 이단들을 포함해도 되나요? 한국에서 스베덴보리 오래 하신 분들 보면 이 부분이 좀 선명하지가 않은 느낌들을 받았거든요...

 

이 질문은 ‘목회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포함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는 ‘예, 그러나 방식이 중요하다’가 정확한 답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틀은 ‘특정 단체 낙인찍기가 아니라 영적 구조 분별’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단’은 ‘교리 구조’이지 ‘명단’이 아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AC.399-403에서 말하는 ‘이단(heresy)은 특정 조직이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스스로를 체계화한 교리 구조’를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단이란 ‘틀린 주장을 하는 집단’이 아니라, ‘사랑보다 신앙, 지식, 교리, 계시 체계를 우위에 두고, 그 체계를 ‘성읍’처럼 방어, 확장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어떤 단체가 이 범주에 들어가는지는 ‘이름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 단체의 중심 동력이 체어리티인가, 아니면 분리된 신앙과 지식인가’로 판단해야 합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오용됩니다.

 

둘째, 대한민국의 주요 이단 단체들은 ‘가인의 성읍’ 구조에 해당하는가?

 

질문하신 통일교,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JMS 등은 ‘스베덴보리적 범주에서 ‘가인의 계열’로 분류할 수 있는 구조적 특징’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특별한 계시자, 중개자, 시대적 선택을 강조하고, 교리를 단계화, 교육화하며 (에녹의 의미), 내부 논리를 외부 비판으로부터 방어하는 체계를 강하게 구축합니다. 특히 ‘구원, 진리, 종말, 하나님의 역사’를 특정 교리 구조 안에 가두고, 체어리티(이웃 사랑, 자유, 양심, 겸손)를 ‘교리 복종의 하위 개념’으로 전락시킬 때, 이는 AC.402에서 말하는 ‘성읍으로 조직된 이단적 교리’의 전형적 모습과 정확히 겹칩니다. 이런 의미라면 ‘구조적으로는 포함해도 무방’합니다.

 

셋째, 그러나 ‘모든 구성원’을 동일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균형점은 여기입니다. 그는 ‘이단적 교리 구조’와 ‘그 안에 있는 개인의 영적 상태’를 철저히 구분합니다. AC 전반에서 반복되듯, 어떤 사람은 이단적 체계 안에 있으면서도 ‘체어리티의 선을 따라 살고’, 주님에 대한 단순한 신앙과 양심을 지닌 채 보호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가인의 표’와 직접 연결됩니다. 즉, ‘잘못된 성읍 안에 있어도, 주님은 그 사람 안의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십니다. 따라서 목회적으로는 ‘그 단체는 가인의 성읍적 구조를 가졌다’라는 진단과,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동일하다’라는 판단을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넷째, 한국 스베덴보리 연구에서 이 부분이 흐릿한 이유

 

목사님이 느끼신 ‘한국에서 오래 하신 분들조차 이 부분이 선명하지 않다’는 인상은 매우 정확합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세 가지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를 ‘영적 체험가’나 ‘신비주의자’로만 읽고, 그의 ‘교회론, 이단론, 교리 비판의 날카로움’을 의도적으로 완화시켜 온 경향이 있습니다. 둘째, 한국 교회 현실에서 ‘이단’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정치화, 감정화되어 있기 때문에, 반대로 ‘침묵이나 모호성으로 회피’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셋째, 스베덴보리의 이단 비판은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구조 분석’이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려면 최소한 AC.1번 글부터 AC.400번 대 글까지를 읽고 거기 나오는 교회론을 충분히 소화해야 하는데, 그 작업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 결과 핵심을 흐리는 설명들이 반복되어 온 것입니다.

 

다섯째, 목회적으로 어떻게 말하는 것이 가장 스베덴보리적인가?

 

가장 스베덴보리적인 방식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단은 특정 단체 명단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와 체계로 굳어진 상태’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여러 이단 단체들은 이 구조적 특징을 분명히 보여주지만, 주님은 그 안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동일하게 보지 않으시며, 각 사람 안의 신앙과 체어리티의 가능성을 구별하여 다루십니다.

 

이렇게 말할 때, ‘분별은 분명하고, 정죄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표를 주신 주님의 방식이며, 스베덴보리의 길입니다. ‘단체와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지요.

Posted by bygracetistory
,

 

가인에게 표를 주사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3-15)

 

 

계속해서 창세기 4장, 오늘은 세 번째 본문인 13절로 15절입니다. 창세기 4장은 총 다섯 편으로 준비했습니다.

 

요즘 틈틈이 창세기 전체 장별 단락별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속뜻 흐름에 따라 단락 구분을 하는 정도인데, 현재 창세기 26장 이삭이 여러 우물을 얻은 장면까지 나갔고, 20284월쯤이면 이 부분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지난 7월, 창세기 1장을 시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를 참조, 대략 8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스베덴보리는 주석서로는 창세기와 출애굽기, 그리고 계시록을 남겼는데, 그래서 이 계시록까지 해서 10년 정도로 수정, 오늘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이 제게 기력을 주시는 대로 힘을 내어 번역 및 블로그 작업과 함께 올해부터 10년 동안 달려갈 이 일에 성도 여러분의 동행이 꼭 필요합니다. 저를 위해, 그리고 우리 교회를 위해 힘을 다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를 이 일에 부르시는 주님의 어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신 경륜과 섭리 있으실 줄 믿습니다.

 

지난 2012525일, 당시 저는 주님과 저만 아는 어떤 일을 생전 본 적도 없는 어떤 미국 목사님의 입을 통해 들으면서 너무 놀라 기절할 뻔했는데, 그때 주님은 그의 입을 통해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다. 너는 5성 장군, 총사령관이다.’ 하셨지요. 그날 저는 개척 전 섬기던 교회 단상에 올라 많은 회중 앞에서 그 안수기도를 받으면서 큰 위로를 받았는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무척 어리둥절했습니다. 마치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의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는 중에 속으로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1:29) 어리둥절해하던 것처럼 말이지요. 당시 제 처지는 너무 막막해서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오늘까지 13년이 흐르는 동안 저는 그때 주님 말씀을 간간이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 하면서 말이지요. 제가 지금 스베덴보리 9년 차인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그것도 6학년 중반이 되어가는 시점에 시작하는 제 모습이 역시 어리둥절합니다만,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때 하신 주님 말씀이 생각나 잠자코 묵묵히 주님의 인도를 따르게 됩니다.

 

네, 시작이 좀 길었습니다. 그럼 본문 들어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13)

 

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을 가인이 자기 죄를 변명하거나 두려움에 빠진 모습으로만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사랑을 잃은 신앙이 처음으로 자기 상태를 자각하는 순간’으로 읽습니다.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창세기 4장의 가인은 신앙(faith)을, 아벨은 체어리티(charity)를 각각 상징함을 드러내셨지요. 원래 이 둘은 하나로 가야 하는데 창세기 3장까지는 그랬다가 4장에 들어오면서 이 둘이 분리가 됩니다. 8절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바로 그런 분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랑을 잃은 신앙이 처음으로 자기 상태를 자각하는 순간’이라는 것은 이런 배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영적 통증(internal pain), 곧 속 사람에서 일어나는 깊은 아픔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가인의 절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왜 주님께서 가인을 죽이지 않으시고, 오히려 ‘’를 주셨는지를 깊이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13)

 

즉, 사랑을 잃은 신앙의 자각이지요. AC.383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고백을 외적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내적 상태에 대한 자각에서 나온 고백’이라고 말합니다. 가인은 이미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살인이지만, 영적으로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억압하고 제거한 상태’를 뜻합니다. 이 체어리티라는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은 어떻게 될까요? 진리는 남아 있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교리는 남아 있지만 따뜻함이 없고, 정답은 말할 수 있지만 사람을 살릴 힘은 없습니다. 사람은 오직 이 체어리티라는 사랑, 즉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 이것이 ‘이웃’인데요, 이 ‘이웃’을 향한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주님과 결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연결되어 그분의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사랑, 곧 이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인이라는 신앙은 그런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그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 안에 생긴 ‘텅 빈 공간’, 곧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상태를 느끼게 됩니다. 이 공허가 바로 가인이 말한 ‘무거움’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이 고백은 아직 회개는 아니지만, ‘회개로 나아갈 수 있는 첫 문턱’이라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가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안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어떤 선의 흔적’, 곧 리메인스(remains)가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말입니다. 사랑이 완전히 사라진 영혼은 자기 상태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가인의 고백은 무너진 신앙이 마지막으로 내는 ‘영적 신음’입니다.

 

 

둘째,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14)

 

분리에서 오는 두려움과 방황입니다. 가인은 이어서 말합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이 고백 안에는 네 겹의 영적 상태가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교회의 진리로부터 분리됨을 뜻합니다 (AC.386). 사랑이 사라지면 진리는 더 이상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주님은 쫓아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초하는 겁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더 이상 못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두 번째,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자비, 곧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신앙의 선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뜻합니다 (AC.387). 하나님이 숨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랑을 잃어 하나님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세 번째,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더 이상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AC.388). 지식은 있지만 방향이 없고, 신앙은 있지만 인도가 없는 상태입니다.

 

네 번째, 끝으로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모든 악과 거짓이 그 사람을 파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AC.389).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주님과의 결합이 끊어지고, 사람은 자기 자신, 곧 자신의 고유 본성에 맡겨지는데, 그 결과 생각은 점점 거짓으로, 의지는 점점 악으로 기울게 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사랑 없는 신앙이 겪는 ‘끝없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자들은 ‘마른 잎사귀 소리에도 도망한다(26:36)는 레위기 말씀을 인용합니다 (AC.390).

 

 

셋째, ‘그렇지 아니하다(15)

 

가인의 표와 보존의 섭리입니다. 이 절망의 고백 위에 주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매우 놀라운 장면을 봅니다. 주님은 가인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보존’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AC.392–394). 가인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을 상징하지만, 그 신앙을 폭력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신성모독(sacrilege)에 해당한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비록 생명을 잃었을지라도, ‘거듭남으로 나아갈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신앙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면 사람은 다시 사랑으로 돌아올 길조차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표를 주시고’, 악과 거짓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하도록 섭리 가운데 보호하십니다.

 

이 표는 가인을 옳다고 인정하는 표가 아닙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는 표도 아닙니다. 이 표의 뜻은 분명합니다. 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네 안에 남아 있는 회복의 가능성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도 가인이 있습니다. 사랑보다 옳음을 앞세우는 신앙’, ‘사람보다 교리를 앞세우는 신앙’, ‘따뜻함은 없고 판단만 남은 신앙’ 그때 우리도 가인처럼 말합니다. 너무 무겁습니다’, ‘나는 주님의 얼굴을 느낄 수 없습니다’, ‘나는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아니하다

 

주님은 우리를 즉시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진리, 작은 갈망, 작은 리메인스를 붙드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다시 체어리티로, 다시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는 심판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타락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보존의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무너진 자리에서도 주님은 구원의 길을 남겨두십니다. 신앙이 메말랐을 때에도 주님은 그 신앙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가인의 표는 하나님의 인내의 표이며, 하나님의 섭리의 표이며, 거듭남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의 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희 안에 있는 가인의 마음을 봅니다. 사랑보다 옳음을 앞세웠던 신앙, 체어리티 없이 판단했던 말과 생각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저희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렇지 아니하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신앙의 불씨를 주님께서 붙드셔서 다시 사랑으로, 다시 체어리티로, 다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가인의 표와 같은 은혜로 저희를 보존하시고, 마침내 참된 거듭남에 이르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

2025-12-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2. 창4.3, 2025-12-14(D1)-주일예배(창4,13-15, AC.388-396), ‘가인에게 표를 주사’.pdf
0.33MB

 

 

 

주일예배(2025/12/21, 창4:16-24), '라멕과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

라멕과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bygrace.kr

 

21. AC.359-387, 창4.2,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4:6-12, 성찬), 2025/12/07(D1)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