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10-29(D1)-주일예배(2510, 눅13,31-35), '오늘과 내일, 그리고 제삼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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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9(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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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_MKK8PXysU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31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13:31-35)

 

 

※ 다음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과 새 교회 이야기입니다.

 

새 교회(new church)는 특히 시험이 많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요,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도 그렇습니다. 제가 처음 스베덴보리를 알게 된 것은 젊은 시절 직장에 다닐 때였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의욕이 많이 떨어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가족 중에 한 분이 ‘천국과 지옥’ 책을 읽어보라고 권해서 읽게 됐는데, 새 교회의 진리가 매우 합리적인 진리임을 알았습니다.

 

※ 여기서 잠깐, 이런 경우, 즉 이 ‘천국과 지옥’ 책을 읽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입니다. 그나마 읽어보겠다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있어도 천 명 중 한 명꼴일까요? 거의 99.99%가 읽어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다 하거나 읽으면서 자기가 아는 교리와 달라 속에서 불이 난다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괜히 속에서 화가 난다 하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 지난 일지를 보니, 5년 전인 2018년 10월에 이 책을 처음 접했습니다. 저는 당시만 해도 ‘새 교회’라는 게 뭔지도 몰랐고, 수도원 수도사 공부, 한밭제일교회 이영환 목사의 40일 금식 훈련, 서사라 목사의 천국과 지옥 간증 및 공영복 선생의 핵심진리 등에 사로잡혀 있던 때였지요. 즉 천국과 지옥에 관한 수많은 견해와 입장, 간증, 풀이 등에 둘러싸여 있던 상황이었는데요, 그래서 책을 접하면서도 무슨 또 하나의 입장이 등장함인가 싶었지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는 난생처음 접하는 내용이었지만 그럼에도 저는 아, 맞다. 바로 이것이다! 싶었습니다. 뭔가 뿌옇던 시야가 바람에 걷혀 갑자기 확 밝아지는 그런 느낌, 백두산 천지가 구름과 안개로 안 보이다가 바람에 걷혀 갑자기 확 드러날 때의 그 숨이 막힐 듯한 위용과 장관같이 말이지요! 저는 특히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첫째, 이 책의 풀이를 가지고는 그동안 석연찮던 거의 모든 신학적 궁금점들이 거의 다, 적어도 제 수준에서는 말이지요, 설명이 된다는 것이었고, 둘째,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기록을 통해 오직 주님만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입장과 견해가 사사로운 것이었다면, 분명 어딘가에 그 흔적이 교묘히 숨어있을 텐데도 추호도, 그리고 지난 5년간 저는 이 책 말고도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 번역을 해오고 있는데요, 그 10,837개나 되는 글 어디에도 스베덴보리는 오직 주님만 높이며, 허락하신 것만 밝히고 있는 걸 볼 때, 이는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았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셋째는, 이 새로운 계시를 통해 저는 참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나아가 어떤 신(神, The Divine)이신지 어렴풋이라도 알게 되었으며, 참으로 천국을 사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바울 서신에 뿌리를 둔 현 기독교, 그리고 개신교의 입장에서 물러나되 마치 지상에서 발사된 로켓이 죽을힘을 다해 중력을 거슬러 올라 궤도 위에 안착하듯 그렇게 물러날 수 있었고, 지금은 남은 생애를 오직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들을 번역,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 것입니다. 이상 잠깐 제 얘기였습니다. 그럼, 계속해서 이순철 목사님 얘깁니다.

 

처음 세례를 받고 한동안은 아내와 함께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참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말씀에 따라 생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시험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않은 목회를 하게 되고, 교인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저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인들은 대개 말씀을 읽는 중에, 또는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 진리의 영감을 얻습니다. 그리고 각자 삶으로 돌아가 진리를 실천하게 되는데, 그러나 막상 실천하려고 하면 뜻대로 잘 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첫째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모르고요, 그래서 고쳐야 할 점이 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고쳐야 할 점이 뭔지는 아는데, 의지가 약해서 고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의 나라에 둬야 하는데, 주님의 나라보다 세상에 두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결국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부족해서 생기는 일입니다. 영적인 시험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즉 시험을 통해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고요, 믿음과 사랑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시험이 없으면 이런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새 교회인들에게 특히 시험이 많은 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거룩하게 되셨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인간은 주님의 능력에 의지해 거듭나지만, 주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거룩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은 주님이 거룩하게 되시는 과정과 인간이 거듭나는 과정을 대비해 볼 수 있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31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어떤 바리새인이 주님께 헤롯이 죽이려고 하니 이곳을 떠나시라고 말합니다. 헤롯은 주님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 분봉왕으로, 세례 요한을 죽였던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예수님 탄생 시 헤롯은 이 헤롯 안티파스의 아버지인 헤롯 대왕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주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헤롯이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당시 유대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유대교회의 거짓 교리가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는 영적으로 교회를 뜻하고, 왕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왜 그렇게 진리를 미워할까요? 그 이유에 대해 요한복음 3장 20절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이렇게 말합니다. 악하고 거짓된 자들은 진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밝은 빛 아래 자신의 악과 거짓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헤롯은 주님만 죽이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안에도 진리를 위협하는 헤롯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불순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들입니다. 진리 때문에 욕망을 눌러야 할 때, 또는 참된 진리 안에 들어왔는데도 질병이나 시험이 그치지 않을 때, 그때 진리가 불편하고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새 교회 말고도 진실한 교회는 얼마든지 있다 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때가 헤롯과 바리새인이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죽이려고 하는 때입니다. 바리새인의 그와 같은 말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2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주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십니다. 그렇게 부르시는 이유는 헤롯으로 표상되는 거짓 진리나 지옥의 거짓 영들의 교활함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짐승은 우리 안에 있는 애정을 나타내는데, 특히 여우나 뱀은 교활한 애정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거짓 영들은 다양한 욕망과 거짓말로 신앙인들을 끊임없이 공격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진리를 의심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진리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주님은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오늘과 내일과 모레, 삼일 동안 주님께서 하실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오늘과 내일과 모레, 삼일은 한편으로는 주님의 인간성이 거룩해지는 과정을 나타내며, 또 한편으로는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완전해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이 세 단계는 어떤 것입니까? 먼저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귀신(demon)이란 진리를 마음대로 추론해 거짓으로 만들게 하는 영을 말합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악과 거짓이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온전한 거울 역할을 할 진실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주님이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자주 말씀하신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늘 하실 일은 귀신을 쫓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의 두 번째 단계는 뭘까요? 주님에 의해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병을 고친다는 것은 진리에 따라 악을 끊을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믿음의 상태에서 사랑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병에 걸려 있을 때는 몸이 마치 족쇄에 매여 있는 것처럼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악을 끊으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셔서 병을 고쳐주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삼 일째, 즉 거듭남의 세 번째 단계는 비로소 완전하게 거듭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거듭나는 것처럼, 주님도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은 육신을 통해 들어오는 지옥의 악과 거짓을 단계적으로 극복하셔야 했고, 사흘째 되는 날 지옥을 완전히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3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주님께서는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한다 말씀하십니다. 신앙인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진리를 붙잡고 있는 한, 언젠가는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주님의 손길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주님의 나라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도 도우실 수가 없습니다. 그럴 경우,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 귀신에게 사로잡혀 꼼짝 못 하게 되고, 병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명예나 재물을 얻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기 위해 진리를 탐구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총명을 앞세워 진리를 마음대로 왜곡, 파괴하는 사람이 됩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에서는 그들을 바벨론이라고 불렀습니다. 교회 안의 바벨론에 의해 진리가 변질, 파괴되는 모습을 말씀에는 유대교회가 선지자를 죽이고, 주님을 죽이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선지자는 진리를 뜻하고, 가장 높은 의미로는 주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하신 것은 교회 밖의 이방인들은 진리를 파괴할 수 없고, 오직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진리를 파괴하고 죽인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욕심 때문에 거룩한 진리를 파괴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께서는 암탉이 새끼를 품듯 교회의 진리로 믿는 자들을 지켜주셨습니다. 아담교회(태고교회)를 통해 지켜주셨고요, 아담교회가 무너졌을 때는 노아교회(고대교회)를 통해 지켜주셨습니다. 노아교회가 무너졌을 때는 히브리교회와 유대교회(모세교회, 표상교회)를 통해 인류를 지옥으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그때마다 주님의 보호를 내팽개쳤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 진리를 더럽히고 파괴했습니다. 그것이 선지자를 죽이고 돌로 치는 것입니다. 돌은 본래 진리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인간의 생각으로 조작, 손을 댄 거짓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35절에서,

 

35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집은 사람의 마음을 뜻하기도 하고 교회를 뜻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속에 가장 작은 교회가 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황폐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집이 황폐하다는 것은 교회, 또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 안에 진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스스로 진리를 파괴해 버렸으며, 또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서 나오는 진리와 선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 계신 여호와가 겉으로 드러나신 모습이며, 그러므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 말씀에서 ‘이름’은 그 사람, 또는 사물의 퀄리티(quality), 그 사람, 또는 사물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말합니다.

 

그러면 찬송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나 교회는 진정한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속으로는 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진정한 진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인이란 진리를 통해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기를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 가운데로 오셔서 구원을 위해 섭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작게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고, 크게는 그들이 모인 외부의 교회에도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교회들은 말씀의 진리를 끊임없이 파괴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을 죽이려는 헤롯과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는 바리새인은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 진리이며, 동시에 지옥의 거짓 영들입니다. 지옥의 영들은 스스로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회 안의 믿는 자들을 이용해 오랫동안 그렇게 말씀의 진리를 파괴하고 교회를 무너뜨렸습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유대인들이 선지자를 죽이고 돌로 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온갖 술수를 꾸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과 그들을 사주하는 지옥의 거짓 영들을 향해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하십니다. 선지자, 즉 진리를 죽인 자들은 진리를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의 믿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신앙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바벨론, 즉 자기를 높이는 마음을 경계하라 하십니다. 그것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 앞에서 낮아지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 언젠가는 그들의 마음속에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오셔서, 오늘과 내일의 일을 하시고, 삼 일째 되는 날 그들과 함께 완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얼마나 시험이 많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진리가 완전해지는 만큼 시련이 줄어들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도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시며 절망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시험이라는 것을 믿으시고, 시험을 꼭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견뎌내시는 모든 성도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분에게 주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오늘로 누가복음 13장을 마치고, 11월 첫 주인 다음 주부터는 14장을 들어갑니다.

 

 

16너를 보는 이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 17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아니하던 자가 아니냐 하리로다 (사14:16-17)

 

아멘

 

원본

2021-01-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0-2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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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태, 올해로 44주기(1979년)를 맞이하며’ (2023/10/27)

 

44년 전인 지난 1979년 10월 27일 오늘, 지금의 대전 전민동 사시는 형님(일오, 53생)과 수원 한일합섬 옆 송죽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당시 수원 유신고 2학년이었던 나는 아침 기상 전, 이른 아침 이 작은 동네에 웬 갑자기 난데없는 호외 소리에, 형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의 간밤 갑작스런 서거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아니, 육영수 여사,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 총탄에 역시 갑자기 돌아가신 지가 이제 겨우 5년 전인데, 왜 또? 하는 어리둥절과 함께 그 어린 고등학생 마음에도 나라의 앞날이 어찌 되는가 불안하고 어지러웠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는 나라의 큰 국장으로 청와대를 출발, 동작동 국립현충원까지 이어지는 큰 도로변을 가득 채운 국민은 모두 크게 울었고, 그때 영상을 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지금도 울게 된다...

 

이후 일어난 군부 쿠데타와 이듬해 광주 5.18 사태, 그리고 그해 가을, 어머니의 교통사고로 인한 갑작스런 사별, 그리고 아주대 전자공학 입학, 남성합창단 Glee의 추억, 서울침례교회 대학부에서 엄마를 만나 교제, 22사 군 입대, 전역 후 복학하면서 학교 앞 아파트에서 네비게이토식 홈 생활 시작, 계속되는 대학가 데모로 연일 최루탄으로 자욱했던 시절, 아버님 별세, 삼성 입사, 결혼(1989), 이듬해 우석, 3년 후 준석 ^^ 등...

 

참 예사롭지 않았던 이 10월 27일의 아침, 당시를 생각하니 무슨 기억의 실타래처럼 좌악 풀려나오는구나. 어찌 보면 참 격동의 세월이었다 싶다.

 

부디 너희 세대는 이런 비극 없이 평화롭고 복된 시간들 보낼 수 있기를!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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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2, AC.151-155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Verse 22.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 22절 속뜻

 

주님은 사람의, 생명 없는 본성을 일으키셔서 대신 주님의 생명으로 생생하게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본성으로 만드십니다.

 

 

151. 만드시고(to build)는 쓰러져있던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갈빗대(the rib)는 생명 없는 상태에 있는(not vivified) 사람의 본성을, ‘여자(a woman)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갖게 된(vivified) 사람의 본성을,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he brought her to the man)는 그의 본성인 것(what is his own)을 그에게 승인하였음(was granted him)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의 후손은 그들의 선조처럼 천적 인간 되는 걸 원치 않고, 대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살아가고자(to be under their own self-guidance) 하였고,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본성 쪽으로 기울어졌는데, 결국은 그런 본성이 그들에게 승인, 곧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it was granted to them). 하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갖게 된 본성 역시 여전히 허락되었고, 그래서 이것을 여자(a woman), 나중에 아내(a wife)라고 하였습니다. By to “build” is signified to raise up what has fallen; by the “rib,” man’s own not vivified; by a “woman,” man’s own vivified by the Lord; by “he brought her to the man,” that what is his own was granted him. The posterity of this church did not wish, like their parents, to be a celestial man, but to be under their own self-guidance; and, thus inclining to their own, it was granted to them, but still an own vivified by the Lord, and therefore called a “woman,” and afterwards a “wife.”  

 

※ 지금까지 ‘본성’으로 번역해오고 있는 ‘own’을 NCE 역에서는 ‘a sense of self’, ‘selfhood’, ‘a sense of autonomy’, 혹은 ‘identity’ 등으로도 옮기고 있다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52.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woman was not formed out of the rib of a man)과 지금까지 사람들이 알아차렸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깊은 아르카나(deeper arcana)가 여기 들어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봐도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the woman)가 사람의 본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속아 넘어간 사람이 다름 아닌 여자였다(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속일 수 있는 건 사람의 본성밖에는, 즉 자기 사랑, 세상 사랑(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It requires but little attention in anyone to discern that woman was not formed out of the rib of a man, and that deeper arcana are here implied than any person has heretofore been aware of. And that by the “woman” is signified man’s own may be known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 or what is the same,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3:1-6)

 

 

153. 갈빗대를 가리켜 여자를 만드시고(to be built into a woman)라고는 하시지만, 전에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창조하다’(created), ‘짓다’(formed), ‘만들다’(made)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만드는 것’(to build)은 쓰러져 있는 걸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이 뜻으로 쓰이는 곳마다, ‘만드는 것’(to build)은 주로 악에 관한, ‘일으켜 세우는 것’(to raise up)은 거짓에 관한, 그리고 새롭게 하는 것’(to renew)는 둘 다에 관한 서술일 때입니다. 이사야입니다. The rib is said to be “built into a woman,” but it is not said that the woman was “created,” or “formed,” or “made,” as before when treating of regeneration. The reason of this is that to “build” is to raise up that which has fallen; and in this sense it is used in the Word, where to “build” is predicated of evils; to “raise up,” of falsities; and to “renew,” of both; as in Isaiah: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61:4) They shall build the wastes of eternity, they shall set up again the ancient desolations, and they shall renew the cities of the waste, 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Isa. 61:4)

 

이 구절과 다른 구절에서 황폐함(Wastes)는 악을, ‘무너짐(desolations)은 거짓을 의미하며, ‘쌓는 것(to build)은 전자, ‘다시 일으키는 것(to set up again)은 후자에 적용됩니다. 선지서 이곳저곳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이런 구분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예레미야입니다. Wastes” in this and other passages signify evils; “desolations,” falsities; to “build” is applied to the former, to “set up again” to the latter, and this distinction is carefully observed in other places by the prophets, as where it is said in Jeremiah: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렘31:4) Yet still will I build thee, and thou shall be built, O virgin of Israel. (Jer. 31:4)

 

 

154. 사람의 본성이 아니면서, 그리고 사람의 본성에서 나온 것도 아니면서(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악하고 거짓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악 그 자체이며, 그 결과, 사람이라는 것은 악과 거짓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사실임을 저는 영들의 세계에서 계속 보고 있어서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게 제시되는데(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그때 그것들은 너무나 기형적이어서 어떻게 형용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추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본성의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그때 자신의 본성에 속한 것들을 자기 눈으로 보는 사람은 그 실제 모습을 보고는 공포에 휩싸일 정도로 충격을 받아 마치 악마로부터 도망가듯 자신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소생한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들(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은 반대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주님께 속한 천적 특성들(the celestial of the Lord)이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삶을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체어리티를 받거나 체어리티로 소생한 사람들(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소년, 소녀처럼 보입니다. 또 벌거벗은 유아처럼 이노센스 가운데 있는 사람들(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은 가슴과 머리 위 왕관을 두른 꽃 화환으로 다양하게 장식되어 있는데요, 다이아몬드 같은 오로라 가운데서 즐겁게 지내며(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가장 내적인 데서 오는 행복에 관한 퍼셉션(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을 갖고 살아가지요. Nothing evil and false is ever possible which is 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This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en the things of man’s own are 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they appear so deformed that it is impossible to depict anything more ugly, 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so that he to whom the things of the own are visibly exhibited is struck with horror, and desires to flee from himself as from a devil. But 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 appear beautiful and lovely, with variety according to the life to which the celestial of the Lord can be applied; and indeed 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 appear like boys and girls with most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 variously adorned with garlands of flowers encircling their bosoms, and diadems upon their heads, 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and having 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

 

 

155.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a rib was built into a woman)라는 이 말에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글자로 된 겉뜻만 가지고 발견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깊이 감추어져 있는데요,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깊은 뜻에 있어 주님 자신과 주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며, 이 사실에서 말씀의 모든 생명이 나오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보고 있는 이 본문에서 그 가장 핵심은 바로 천국의 결혼(the heavenly marriage)입니다. 천국 결혼은 그 본성에 있어 주님에 의해 소생될 때, 주님의 신부요 아내(the bride and wife)라 일컬음을 받는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소생된 인간 본성은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관한 퍼셉션을 가지며, 그 결과, 표현 불가한 행복과 함께 모든 지혜와 지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부요 아내라고 하는, 이 소생된 본성은 어떻게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천사들한테서 관찰할 수 있는 사실, 곧 자신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걸 지각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천사들한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비록 그들일지라도 이런 주제를 벗어나 한눈파는 순간, 그들 역시 순전히 자신들 힘으로 살아간다는 생각밖에는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럴지라도 그들에게는 어떤 것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살짝만 벗어나도 그 변화를 지각하는, 그런 본성에 관한 어펙션(a general affection of such a nature)이 일반적으로 있는데요,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퍼셉션 가운데 누구나 있는 동안,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의 즐거움이 그들 가운데에는 존재합니다. 아래 예레미야에서 말하는 바 역시 바로 이런 본성을 의미합니다. The words “a rib was built into a woman” have more things inmostly concealed in them than it is possible for anyone ever to discover from the letter;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uch that its inmost contents regard the Lord himself and his kingdom, and from this comes all the life of the Word.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regarded in its inmost contents. The heavenly marriage is of such a nature that it exists in the own, which, when vivified by the Lord,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Man’s own thus vivified has a perception of all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and consequently possesses all wisdom and intelligence conjoined with inexpressible happiness. But the nature of this vivified own, which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cannot be concisely explained. Suffice it therefore to observe that the angels perceive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although when not reflecting on the subject they know no other than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but there is a general affection of such a nature that at the least departure from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they perceive a change, and consequently they are in the enjoyment of their peace and happiness, which is inexpressible, while they are in their general perception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It is this own also that is meant in Jeremiah, where it is said: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렘31:22) 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compass a man. (Jer. 31:22)

 

이 구절에서도 여자(a woman)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소생된 본성을 의미하며, 이것을 둘러싸리라(to compass)라는 표현으로 서술한 것은, 이 본성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 마치 갈비뼈가 심장을 둘러싸 보호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signified in this passage also, where by a “woman” is meant the own vivified by the Lord, of which woman the expression “to compass” is predicated, because this own is such that it encompasses, as a rib made flesh encompasses the heart.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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