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과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16-24)

 

 

보통은 성탄절을 앞둔, 그러니까 오는 목요일(25)이지요, 오늘 같은 주일은 성탄 관련 본문으로 주일 설교를 준비하는데요, 저도 이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AC에 헌신하기로 한 이상, 앞으로는 거의 모든 절기 설교들조차 꾹 참고 가급적 오직 한 우물만 파는 게 맞는 것 같아 오늘도 창세기 본문을 준비했습니다. 이점 다들 양해 바라며, 다만 성탄 당일은 따로 성탄 축하 예배를 오전 10시에 드리겠습니다. 성탄 설교는 그때 나누기로 하지요.

 

 

오늘 본문은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고, 성을 쌓고, 족보는 계속 이어지며, 문화와 기술은 발전하고, 음악과 금속 가공까지 등장합니다. 겉으로 보면 문명은 전진하고, 삶은 풍요로워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흐름을 ‘’이 아니라, ‘황폐(荒廢, vastation)로 향하는 길로 묘사합니다. 왜일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문명이 발전하면 교회도 살아 있는가? 외적 번영이 곧 영적 생명인가?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그 한가운데서도, 즉 상황이 가장 안 좋을 때도 그 가운데에서 어떻게 새 교회를 준비하시는지를 다음 세 가지로 보여 줍니다.

 

 

첫째, 여호와 앞을 떠난 신앙은 성까지 쌓지만 결국 생명을 잃는다 (16-18)

 

16절은 오늘 본문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말씀입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4:16)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는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상태’를 뜻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하는데, 가인은 그 앞을 떠났기 때문이지요. 즉, 신앙은 남아 있으되, 사랑과 생명에서 분리된, 떨어져 나간 상태인 것입니다.

 

그 결과 가인은 ‘놋 땅에 거주’, 곧 진리와 선의 바깥에서 살며, ‘성을 쌓고’, 즉 성읍을 세웁니다. 성경에서 ‘(, city)은 언제나 ‘교리 체계’를 뜻하는데요, 가인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리로 자신을 방어하는 구조’를 만듭니다. 이것이 ‘성을 쌓는’ 것이며, 그래서 성경에서 ‘에녹(Enoch)은 ‘신앙을 교리화하여 체계적으로 정돈하는 사람’을 표상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창4 가인 계보와 나란히 진행되는 창5(Seth) 계보에서도 동명이인인 ‘에녹’이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의 속뜻이 바로 이런 건데요, 그러니까 당시 에녹이 힘쓴 나름의 ‘신앙의 조직화’, 즉 오늘날 조직신학 같은 정돈을, 그러나 주님은 이런 건 태고교회에 맞지 않기 때문에 홍수 후 세대를 위해 잠시 보류하시는데, 그걸 저렇게,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처럼 점잖게 표현하신 것이지요. 그동안 우리는 저 본문을 ‘에녹이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셨을까... 우리도 저런 에녹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라며 설교했고, 그리고 ‘아멘!’하며 받아들였지요. 우리가 성경을 겉으로만 읽어도 웬만하면 충분하지만, 가끔 이렇게 전혀 엉뚱한 삼천포로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가급적 속뜻도 함께 알 수만 있으면 아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그럼, 스베덴보리는 이런 걸 어떻게 알았던 걸까요? 주님이 스베덴보리 곁에서 불러주는 걸 그는 그저 딕테이션(dictation), 그러니까 받아적기만 한 건가요? 전에 제가 잘 모르고 이렇게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오늘 이 부분을 좀 바로잡고자 합니다.

 

설교 중이니 짧게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없던 새로운 의미를 발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의 속뜻은 이미 하늘(영계)의 질서 안에 존재하며, 그 질서가 문자 속에 ‘상응’(correspondence)으로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영계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질서와 구조가 성경의 이름과 계보, 배열 속에 상응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나는 성경을 새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스스로 사용해 온 언어를 끝까지 따라갔을 뿐이다. 나는 영계에서 천사들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듣고, 보고, 검증하도록 허락받았다.” 즉, 그는 새 내용을 받아 적은 예언자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영적 의미를 관찰하고 확인한 증인’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점 하나는, 스베덴보리는 자기 개인의 생각이나 계시를 성경 위에 두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일관성과 맞는가?”, “다른 본문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하는가?”, “교회의 역사 전체와 어긋나지 않는가?” 이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면 아르카나로 제시하지 않았지요. 결론적으로, 스베덴보리는 ‘새 계시의 전달자가 아니라 계시의 구조를 열어 보인 사람’입니다. 비유하자면, 그는 새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연주되고 있던 음악의 악보를 보여 준 사람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이 참인지 아닌지는 내 말을 믿지 말고, 성경과 삶에서 직접 시험해 보라”고 말이지요. 거듭 말씀드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새로 쓰거나 받아 적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이 하늘에서는, 그러니까 천사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오랫동안 보고 확인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고, 그 이해가 성경 전체와 일치할 때만 주석으로 남겼습니다.

 

네, 우선 이 정도로만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이런 아르카나를 알 수 있었나에 대해 그동안 제가 잘못 전달한 부분을 바로잡습니다.

 

오늘 본문 관련, 계속해서 말씀드리면,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신앙이 사랑을 잃으면, 반드시 체계를 강화한다’는 사실과, ‘살아 있는 관계 대신, 안전한 구조를 선택한다’는 사실입니다. 8백 년 전 사람인 성 프란체스코도 그의 열두 명의 제자 중 이 가인 같은 제자, 에녹 같은 제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프란체스코 말년에 큰 어려움은 물론 훗날 크게 변질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체어리티가 안 보이는 신앙생활의 맹점이며, 초래하는 무서운 사실입니다.

 

그 이후 이어지는 족보는, 생명의 계보가 아니라 ‘이단(異端, heresy)의 계보입니다. 한 오류는 또 다른 오류를 낳고, 신앙은 점점 추상화되고, 삶과 분리됩니다. 가인의 길은 단절되지 않고 계속 확장되어 가지만, 안타깝게도 그 확장은 생명의 확장이 아니며, 그 끝은 황폐함, 곧 종말입니다.

 

 

둘째, 그러나 ‘황폐’(荒廢, vastation)의 끝에서도 주님은 새 교회의 씨앗을 심으신다 (19-22)

 

19절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라멕에게 두 아내, ‘아다(Adah)와 ‘씰라(Zillah)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을 신앙이 거의 완전히 사라진 황폐의 극점(極點)으로 보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주님은 새 교회의 윤곽을 보여 주십니다.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 영적 차원’을, 씰라는 ‘자연적 차원’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지요, 먼저 ‘야발(Jabal), 아다의 아들인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곧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을 의미하고, 다음은 그의 아우 ‘유발(Jubal)입니다.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 즉 신앙의 정서와 질서를 의미합니다. 다음은 씰라의 아들 ‘두발가인(Tubal-Cain),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 곧 자연적 삶의 기술과 질서를 의미합니다. 그의 누이 ‘나아마(Naamah)는 유사한 교회, 즉 그 교회 밖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문명의 발전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가 회복될 때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이 새 교회는 황폐가 끝나기 전에 싹으로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시대를 바꿀 힘은 없고, 여전히 가인의 계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완성된 새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 미리 심어 두신 씨앗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로를 받는데요, 그것은 가장 어두운 때에도, 주님은 결코 손 놓고 계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문화가 극에 달할수록, 교회는 침묵하고 홍수는 가까워진다 (23, 24)

 

23, 24절은 충격적입니다. 라멕이살인을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4:23)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신앙’, ‘소년’은 ‘체어리티’입니다. 이는 더 이상 싸움이 아니라, 영적 생명의 완전한 붕괴를 뜻합니다. 라멕은 신앙도, 사랑도 모두 죽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절망이 아니라 ‘자기 확신’입니다. 절망을 해도 모자랄 판에 확신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이지요.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4:24)

 

이는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는 말이 아니라, 심판마저 상대화하는 교만이요, 거룩한 것을 숫자로 계산하는 상태입니다. 이미 선을 넘은 것이며,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문명은 최고조에 이르렀지만, 교회는 완전히 황폐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홍수’가 필요했습니다. 홍수는 벌이 아니라, ‘시대 전환’입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뒤섞이는 상태를 끊고, 주님께서 보존하신 ‘노아’, 곧 리메인스를 통해 완전히 다른 방식의 교회인 양심의 교회를 시작하시기 위함입니다. 퍼셉션(perception)의 교회가 더 이상 존재, 존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늘 주님과 연결되어야 있어야 살 수 있는데, 인류의 첫 연결 방식인 퍼셉션이 막을 내렸기 때문에 주님은 부득이하게 그보다는 못하지만 새로운 방식인 ‘양심’이라는 연결 방식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바로 ‘노아’ 때부터 말이지요. 이 둘의 차이는 전자인 퍼셉션 방식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앙하는 반면, 후자인 양심 방식은 주님 사랑을 신앙을 통해 배워서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모독(冒瀆, profanation)을 이토록 엄중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죄나 오류가 아니라 인간의 영적 구조 자체를 파괴하여 회복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독’이란, 사람이 주님의 진리와 선을 알고 인정하며 어느 정도 믿기까지 한 뒤에, 그것을 삶에서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자기 욕망, 자기 영광, 권력, 이익을 위해 왜곡하여 사용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때 일어나는 가장 심각한 결과는, 인간 안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분리되지 못한 채 강제로 결합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 사람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 곧 선과 진리의 흔적이 저장되어 있고, 겉 사람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악과 거짓이 자리 잡고 있는데, 모독은 이 둘을 억지로 섞어 버립니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은 어느 한쪽으로도 돌아설 수 없는 상태, 즉 선을 완전히 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악으로 완전히 떨어질 수도 없는 ‘내적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영혼이 찢어진다’는 표현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사후 세계에서 그 사람이 극심한 고통과 혼란 속에 놓이게 됨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므로, 선을 사랑하는 부분과 악을 사랑하는 부분이 동시에 활성화되어 서로를 끊임없이 공격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 상태에 놓인 영들은 가장 깊은 불안과 자기혐오, 분노와 절망 속에 머물게 되는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옥 가운데서도 가장 참혹한 상태’라고까지 말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모독이 반복될 경우, 주님께서 인간 안에 보존하신 리메인스 자체가 훼손될 위험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리메인스는 거듭남의 유일한 토대이기에, 이것이 손상되면 주님께서 더 이상 그 사람을 새로운 상태로 인도하실 길이 거의 사라집니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은 사람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상태로라도 머물게 하시고, 심지어는 신앙 자체를 거의 잃게 되는 황폐를 허락하시면서까지 모독만은 피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차라리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상태는, 새 빛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알고 믿으면서도 거부하고 뒤섞는 모독의 상태는 그 가능성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독은 단순히 ‘나쁜 죄’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 내적 구조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정적 단절’이며,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듯, 주님께서 모독을 무엇보다 엄중히 금하시고, 역사 전체를 통해서까지 그것을 막으시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거울’입니다.

 

우리는 성을 쌓고 있습니까, 아니면 장막에 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신앙을 방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랑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문화와 성취가 커질수록, 우리는 더 겸손해지고 있습니까?

 

주님은 황폐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모독을 막기 위해 황폐를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언제나 ‘새 교회의 씨앗을 숨겨 두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너는 가인의 성에 살 것인가, 아니면 노아의 방주로 들어올 것인가?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겉으로는 풍요로워 보이나 속으로는 사랑을 잃은 신앙이 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성을 쌓는 교회가 아니라, 장막에 거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옵소서.

 

황폐의 시대에도 주님께서 숨겨 두신 리메인스를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새 교회의 씨앗을 알아보는 눈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참된 체어리티를 다시 살리시고, 노아의 방주와 같은 양심으로 이 시대를 건너가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

2025-12-2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3. 창4.4, 2025-12-21(D1)-주일예배(창4,16-24, AC.397-433), ‘라멕과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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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12/28, 창4:25-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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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12/14, 창4:13-15), '가인에게 표를 주사'

가인에게 표를 주사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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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에게 표를 주사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3-15)

 

 

계속해서 창세기 4장, 오늘은 세 번째 본문인 13절로 15절입니다. 창세기 4장은 총 다섯 편으로 준비했습니다.

 

요즘 틈틈이 창세기 전체 장별 단락별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속뜻 흐름에 따라 단락 구분을 하는 정도인데, 현재 창세기 26장 이삭이 여러 우물을 얻은 장면까지 나갔고, 20284월쯤이면 이 부분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지난 7월, 창세기 1장을 시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를 참조, 대략 8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스베덴보리는 주석서로는 창세기와 출애굽기, 그리고 계시록을 남겼는데, 그래서 이 계시록까지 해서 10년 정도로 수정, 오늘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이 제게 기력을 주시는 대로 힘을 내어 번역 및 블로그 작업과 함께 올해부터 10년 동안 달려갈 이 일에 성도 여러분의 동행이 꼭 필요합니다. 저를 위해, 그리고 우리 교회를 위해 힘을 다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를 이 일에 부르시는 주님의 어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신 경륜과 섭리 있으실 줄 믿습니다.

 

지난 2012525일, 당시 저는 주님과 저만 아는 어떤 일을 생전 본 적도 없는 어떤 미국 목사님의 입을 통해 들으면서 너무 놀라 기절할 뻔했는데, 그때 주님은 그의 입을 통해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다. 너는 5성 장군, 총사령관이다.’ 하셨지요. 그날 저는 개척 전 섬기던 교회 단상에 올라 많은 회중 앞에서 그 안수기도를 받으면서 큰 위로를 받았는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무척 어리둥절했습니다. 마치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의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는 중에 속으로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1:29) 어리둥절해하던 것처럼 말이지요. 당시 제 처지는 너무 막막해서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오늘까지 13년이 흐르는 동안 저는 그때 주님 말씀을 간간이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 하면서 말이지요. 제가 지금 스베덴보리 9년 차인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그것도 6학년 중반이 되어가는 시점에 시작하는 제 모습이 역시 어리둥절합니다만,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때 하신 주님 말씀이 생각나 잠자코 묵묵히 주님의 인도를 따르게 됩니다.

 

네, 시작이 좀 길었습니다. 그럼 본문 들어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13)

 

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을 가인이 자기 죄를 변명하거나 두려움에 빠진 모습으로만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사랑을 잃은 신앙이 처음으로 자기 상태를 자각하는 순간’으로 읽습니다.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창세기 4장의 가인은 신앙(faith)을, 아벨은 체어리티(charity)를 각각 상징함을 드러내셨지요. 원래 이 둘은 하나로 가야 하는데 창세기 3장까지는 그랬다가 4장에 들어오면서 이 둘이 분리가 됩니다. 8절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바로 그런 분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랑을 잃은 신앙이 처음으로 자기 상태를 자각하는 순간’이라는 것은 이런 배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영적 통증(internal pain), 곧 속 사람에서 일어나는 깊은 아픔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가인의 절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왜 주님께서 가인을 죽이지 않으시고, 오히려 ‘’를 주셨는지를 깊이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13)

 

즉, 사랑을 잃은 신앙의 자각이지요. AC.383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고백을 외적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내적 상태에 대한 자각에서 나온 고백’이라고 말합니다. 가인은 이미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살인이지만, 영적으로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억압하고 제거한 상태’를 뜻합니다. 이 체어리티라는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은 어떻게 될까요? 진리는 남아 있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교리는 남아 있지만 따뜻함이 없고, 정답은 말할 수 있지만 사람을 살릴 힘은 없습니다. 사람은 오직 이 체어리티라는 사랑, 즉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 이것이 ‘이웃’인데요, 이 ‘이웃’을 향한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주님과 결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연결되어 그분의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사랑, 곧 이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인이라는 신앙은 그런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그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 안에 생긴 ‘텅 빈 공간’, 곧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상태를 느끼게 됩니다. 이 공허가 바로 가인이 말한 ‘무거움’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이 고백은 아직 회개는 아니지만, ‘회개로 나아갈 수 있는 첫 문턱’이라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가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안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어떤 선의 흔적’, 곧 리메인스(remains)가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말입니다. 사랑이 완전히 사라진 영혼은 자기 상태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가인의 고백은 무너진 신앙이 마지막으로 내는 ‘영적 신음’입니다.

 

 

둘째,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14)

 

분리에서 오는 두려움과 방황입니다. 가인은 이어서 말합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이 고백 안에는 네 겹의 영적 상태가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교회의 진리로부터 분리됨을 뜻합니다 (AC.386). 사랑이 사라지면 진리는 더 이상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주님은 쫓아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초하는 겁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더 이상 못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두 번째,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자비, 곧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신앙의 선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뜻합니다 (AC.387). 하나님이 숨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랑을 잃어 하나님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세 번째,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더 이상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AC.388). 지식은 있지만 방향이 없고, 신앙은 있지만 인도가 없는 상태입니다.

 

네 번째, 끝으로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모든 악과 거짓이 그 사람을 파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AC.389).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주님과의 결합이 끊어지고, 사람은 자기 자신, 곧 자신의 고유 본성에 맡겨지는데, 그 결과 생각은 점점 거짓으로, 의지는 점점 악으로 기울게 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사랑 없는 신앙이 겪는 ‘끝없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자들은 ‘마른 잎사귀 소리에도 도망한다(26:36)는 레위기 말씀을 인용합니다 (AC.390).

 

 

셋째, ‘그렇지 아니하다(15)

 

가인의 표와 보존의 섭리입니다. 이 절망의 고백 위에 주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매우 놀라운 장면을 봅니다. 주님은 가인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보존’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AC.392–394). 가인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을 상징하지만, 그 신앙을 폭력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신성모독(sacrilege)에 해당한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비록 생명을 잃었을지라도, ‘거듭남으로 나아갈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신앙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면 사람은 다시 사랑으로 돌아올 길조차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표를 주시고’, 악과 거짓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하도록 섭리 가운데 보호하십니다.

 

이 표는 가인을 옳다고 인정하는 표가 아닙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는 표도 아닙니다. 이 표의 뜻은 분명합니다. 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네 안에 남아 있는 회복의 가능성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도 가인이 있습니다. 사랑보다 옳음을 앞세우는 신앙’, ‘사람보다 교리를 앞세우는 신앙’, ‘따뜻함은 없고 판단만 남은 신앙’ 그때 우리도 가인처럼 말합니다. 너무 무겁습니다’, ‘나는 주님의 얼굴을 느낄 수 없습니다’, ‘나는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아니하다

 

주님은 우리를 즉시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진리, 작은 갈망, 작은 리메인스를 붙드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다시 체어리티로, 다시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는 심판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타락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보존의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무너진 자리에서도 주님은 구원의 길을 남겨두십니다. 신앙이 메말랐을 때에도 주님은 그 신앙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가인의 표는 하나님의 인내의 표이며, 하나님의 섭리의 표이며, 거듭남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의 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희 안에 있는 가인의 마음을 봅니다. 사랑보다 옳음을 앞세웠던 신앙, 체어리티 없이 판단했던 말과 생각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저희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렇지 아니하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신앙의 불씨를 주님께서 붙드셔서 다시 사랑으로, 다시 체어리티로, 다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가인의 표와 같은 은혜로 저희를 보존하시고, 마침내 참된 거듭남에 이르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

2025-12-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2. 창4.3, 2025-12-14(D1)-주일예배(창4,13-15, AC.388-396), ‘가인에게 표를 주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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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12/21, 창4:16-24), '라멕과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

라멕과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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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AC.359-387, 창4.2,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4:6-12, 성찬), 2025/12/07(D1)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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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4:6-12)

 

 

오늘 본문은 겉으로는 인류 최초의 형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바인 그 속뜻으로는 ‘우리 내면에서 매일 일어나는 영적 사건’입니다. 여기 가인(Cain)과 아벨(Abel)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겉 사람과 속 사람의 두 상태’, 즉 ‘신앙과 체어리티’를 상징하는데요, 곧 가인은 진리, 또는 ‘신앙(faith)이라는 개념을, 아벨은 사랑, 선함, 자비, 곧 ‘체어리티(charity)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잠깐, 이 ‘체어리티’, 곧 ‘이웃 사랑’과, 이 이웃 사랑이 말미암는 ‘주님 사랑’ 이야기를 먼저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은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좀 다른데요,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사랑’의 영어 표현은 ‘love to the Lord’이지만, ‘이웃 사랑’은 ‘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바로 전치사 ‘to’와 ‘toward’의 차이이지요.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 영어 전치사 ‘to’는 ‘직접적, 수직적’, ‘toward’는 ‘파생적, 수평적’입니다. 즉, ‘주님 사랑’은 가장 내적, 가장 직접적이며, 영혼의 중심에서 일직선으로 주님께 향하는 사랑, 즉, 본원적, 수직적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은 이 역시 방향을 나타내지만, ‘to’와는 달리 여전히 과정 중에 있는, 완전히 도달한 것이 아닌, 흐름, 움직임, 지향을 나타내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은 누구일까요? 스베덴보리에게서 ‘이웃(neighbor)은 단지 사람(person)만이 아니라, 공동선, 공동체, 나라, 교회, 진리, 선의 영역, 그리고 그 모든 선의 질서 등, 이 전부를 포괄하는 ‘더 넓어지는 사랑의 활동 범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밖으로 흘러나가 확장되는’ 방사형 구조를 갖습니다. 고정된 대상에게 일직선으로 닿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흘러 나가며 확장되는 것, 네, 그것이 바로 ‘toward’이며, 이런 것이 바로 ‘체어리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 ‘아벨’의 속뜻이고 말입니다. ‘주님 사랑’이 나를 통해 ‘이웃’으로 흘러 나가는 사랑이 ‘체어리티’입니다.

 

참고로, 스베덴보리는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에서 이 ‘이웃’의 개념을 더욱 깊이 설명하는데요, 거기서 그는 ‘이웃이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 안에 있는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라고 합니다. 이 개념에 의하면, 결국 ‘이웃 사랑’, 즉 ‘체어리티’란 이웃 안에 있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말 그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그 원수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 사람이 이뻐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 곧 그 주님께 예의를 갖추는 것이 되겠지요. 우리가 일상 중에 이런 관점을 굳게 붙들 수만 있다면 우리를 긁는 많은 어려움의 순간들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저 사람을 부추기는 악한 영들이 나쁜 것이다. 저 사람 안에는 주님이 계시다. 나는 그 주님만 바라보아야 한다’면서 말이죠.

 

이런 배경을 가지고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었을 때, 인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구조도’와 같습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7)

 

이 한 구절 안에 인간의 자유, 유혹의 본질, 사랑 없는 신앙의 내적 위기, 그리고 회복의 길까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이 말씀의 속뜻을 펼쳐보며, 우리가 일상 속에서 갑자기 맞닥뜨리는 이 ‘가인’이라는 상태를 그때그때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할지 함께 살펴보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의 내면

 

주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 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이 분노는 단순한 기분 변화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가진 필연적 결과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자기 의에 빠지고, 비교 의식에 떨어지며, 인정받지 못하면 분노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관한 지식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원래 사랑에서 나오는 빛이며, 그러므로 사랑 없이는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가인의 분노는 결국, ‘너의 신앙이 사랑을 잃었구나’ 하시는 주님의 은밀한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만일 지식 중심이 되고, 교리 중심이 되고,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태도로 굳어진다면, 틀림없이 가인과 같은 불안과 분노가 나타날 것입니다.

 

둘째, 죄가 문에 엎드려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7)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풀이합니다.

 

‘문’은 마음의 입구이고, ‘죄’는 사랑이 없는 곳으로 들어오려는 악의 기운이며, ‘엎드려 있다’는 말은 우리가 문만 열면 곧장 들어올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동일한 구절에서 굉장히 중요한 영적 진리를 선언하십니다. 바로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말입니다. 여기 드러나는 세 가지는 이렇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는 항상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따를지, 분노를 따를지 선택할 자유 말입니다. 또 하나는, ‘리메인스(remains), 곧 속 사람 안에 주님이 보관하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있어 언제든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주님은 절대 인간에게 ‘어쩔 수 없는 죄’를 허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지만, 그 문을 여는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영적 인간학에서 핵심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셋째, 체어리티를 죽이는 신앙의 비극과 그 결과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은 역사적 살인이 아니라 ‘신앙이 체어리티를 억압할 때 벌어지는 영적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교리가 사랑을 누르고, 지식이 겸손을 누르며, 그리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부정하는 순간, ‘아벨이 우리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모든 종교 타락의 첫 번째 징조’라고 말합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9)

 

주님이 모르셔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을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사랑은 어디 있느냐?

너의 겸손은 어디 있느냐?

너의 체어리티, 곧 너의 아벨은 어디 있느냐?

 

이런 질문들은 가인처럼 사랑을 외면한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0)

 

피는 선의 생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억압된 선(사랑)은 천적 나라에서 ‘실제로 울림을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의 사랑, 우리의 체어리티가 죽으면 우리의 영혼도 함께 울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2)

 

’은 인간의 속 사람, 선의 자리입니다. 사랑, 곧 체어리티가 사라진 신앙은 이 속 사람과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영적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말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듯, ‘사랑 없이 진리만 붙들 때, 인생과 신앙은 언제나 방황하게 된다’는 뜻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매일 문을 열 것인지, 혹은 닫을 것인지 선택합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 작은 판단, 미묘한 교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내가 옳다는 주장 등... 우리는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랑을 잃을 때가 문제입니다. 교리적 신앙, 지적 신앙, 정답 신앙은 사랑 없이 독립될 때, 즉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가인이 됩니다. 가인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지식 중심의 신앙’입니다. 반면, 아벨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사랑의 선함’이고요. 참 신앙은 사랑으로 말미암으므로 아벨을 잃으면 그 어떤 교리도, 성경 지식도, 예배 습관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영혼의 생명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9)

 

우리의 연약함으로, 우리의 비겁함으로 정작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외면했던, 그래서 원치 않게 가인이 되고만 우리를 향해, 그래서 이상하게 아무리 애를 써도 무슨 영적 열매와 성장 없이 방황하는 인생, 유리하는 신앙 가운데 고생하는 우리를 향해 오늘 주님이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7)

 

주님은 우리에게 죄를 이기라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길 수 있는 힘과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언제든 사랑, 곧 체어리티(아벨)를 다시 살릴 수 있는 길을 열어두시면서 말이지요.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의지, 의뢰하면서 우리는 다시 힘을 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체어리티의 사람, 선을 행하는 사람, 삶이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세요. 지식과 교리로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가인의 마음을 버리고, 겸손과 체어리티로 우리 안의 아벨을 지키게 하여 주세요. 죄가 문 앞에 엎드릴 때, 제가 그 문을 열지 않게 하시고, 대신 주님이 주신 리메인스로 말미암아 선한 선택을 하도록 인도하여 주세요. 제 안에서 죽어가는 체어리티를 다시 살려 주시고, 제 안 영혼의 땅이 다시 열매 맺게 하여 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

2025-12-0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1. 2025-12-07(D1)-주일예배(창4,6-12, AC.359-382), 창4.2,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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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12/14, 창4:13-15), '가인에게 표를 주사'

가인에게 표를 주사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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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AC.338-358, 창4.1, ‘가인의 예배, 아벨의 예배’(창4:1-5), 2025/11/30(D1)

가인의 예배, 아벨의 예배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a man [vir])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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