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드린 것처럼,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사람들은 특별히 무슨 신학교육 같은 거를 받지 않아도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처럼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것을 받아 모든 걸 통찰, 지각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시대에는 주님에 관한 진리들을 오늘날처럼 신학적 교리로 정돈하는 걸 무척 꺼리며 삼가던, 불편해 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는 예를 들면, 선하고 착한 사람들한테 주님을 생활과 삶으로 보여주지는 않고, 대신 교리교육으로만 가르치려 할 때, 그들이 낯설어 하고 힘들어 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 그 시대에 벌써 주님에 관한 진리들을 수집, 체계화된 교리로 정돈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요, 이들이 바로 에녹이라 하는 사람들, 혹은 교회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인류는 나중에는 결국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교리로 주님과 연결될 것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므로 그들을 잠시 따로 떼어 보관하시는데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말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4)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눅12:49-53)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교회 안에 거짓과 악밖에 없어서 분쟁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진리와 선이 밝혀지자 비로소 분쟁이 일어났다. 진리와 거짓, 선과 악 간의 분쟁이 없으면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 (계시록 해설 504:31) for before the Lord came into the world there were in the church nothing but falsities and evils, consequently there was no combat between these and truths and goods; but when truths and goods had been unveiled by the Lord, then it was possible for combats to exist, and without combats between these there can be no reformation; (AE.504:31)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가나안 원주민들, 즉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그리고 여부스 족속이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그 땅에서 모두 몰아내라 하셨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가나안 도착과 함께 주님 명하신 대로 처음 땅 분배를 받아 흩어진 후, 자기 땅에 있는 가나안 사람들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완전히는 몰아내지들을 못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그동안 너무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고, 사람이 주님을 끝까지 의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였는데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 끊임없이 이 남은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악과 타협할 때가 있는데요, 그렇게 악과 타협할 때는 일시적으로는 평화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전보다 더 큰 악에 시달리게 되는데요, 그리고 그렇게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나서야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영적 전쟁에서는 어느 한쪽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둘 사이에는 싸움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누구나 다 이렇게 내적 싸움을 하는데요, 그런데 이런 내적 싸움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경우인데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아와 세상의 욕망을 좇아 사는 것이 악이며 거짓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내적 싸움이 없다는 게 오히려 참 씁쓸한 케이스가 되겠네요. 그런가 하면 진리를 알면서도 내적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 유혹을 이기지 못해 습관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의 경우인데요, 죄를 반복해서 짓다 보면 나중에는 죄를 지으면서도 수치심이나 굴욕감,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거짓을 진실이라 하고 진실을 거짓이라 뒤집기도 합니다. 내적 싸움이 없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자유롭고 평온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평화도 아니고 자유도 아닙니다. 지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 뿐이지요.
그러면 진정한 평화,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와 관련해 오늘 본문 4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주님께서는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하십니다. 불은 무슨 뜻일까요?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사이에 벌어지는 내적 싸움을 뜻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이든 사회든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사이에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 오시기 전 이 세상에는 그런 내적 싸움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참된 진리가 없었기 때문인데요, 진리라는 게 있어야 거짓을 볼 수 있고, 그것과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세상은 악과 거짓으로 가득했고, 그러므로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붙잡혀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지요. 그때 참된 진리이신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첫째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해 존재하셨던 여호와께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같은 논리로, 그동안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내적 진리가 주님이 오심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진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누구나 내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인데요, 왜냐하면 아래 요한복음 1장 3절 이하의 증언처럼 주님은 곧 말씀이시며,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가 되었을 때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내적 진리가 충만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3-14)
그러니까 주님의 인성이 문자로 된 성경이라면 내적 진리는 주님 안의 신성, 곧 문자 안에 담긴 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신 세 번째 의미는, 인간에게 거듭남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세상에서 인성과 신성을 하나로 만드시는 과정은 사실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여 하나 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치열한 내적 싸움 없이는 거듭남도 없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주님께서는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 하십니다. 말씀에서 세례는 거듭남을 의미하는데요, 그렇다면 주님이 받을 세례는 어떤 것입니까?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으신, 유전된 인성(human)을 벗으시고, 당신 안의 여호와께서 주시는 거룩한 인성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옥과의 치열한 싸움과 승리로만 이루어지는데요, 그래서 인간이 거듭나는 모습과 흡사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받으실 세례는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임과 동시에, 주님에 의해 인간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공간 속에서 주님 자신에게 일어나는 세례임과 동시에, 시간을 초월해 모든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분쟁하는 것은 곧 내적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적 싸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것에 대해 52절과 5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오신 다음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운다고 합니다. 여기서 숫자 셋은 진리는 진리인데 선이 없는 진리를, 그리고 숫자 둘은 선은 선인데 진리가 없는 선을 말합니다. 선 없는 진리나 진리 없는 선은 둘 다 온전한 것이 아니며, 둘 다 진정한 진리와 선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진리는 이웃을 화합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시키는데요, 교회 안에서, 아니면 개인의 마음속에서 이렇게 진리를 가장한 거짓, 또는 선을 가장한 악이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놓을 때가 아주 많습니다. 이것이 한 집에 다섯 사람이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제게 성경이 우선이냐 성문서, 즉 스베덴보리가 쓴 글이 우선이냐 라는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하기를,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주님의 인성에 해당하고, 성문서에서 밝히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주님 안에 있는 신성과 통합니다.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이듯 그 둘은 하나이며, 똑같이 중요합니다 라고 말이지요. 만약 교회 안에서 어떤 이는 성경이 우선이라 하고, 어떤 이는 성문서가 우선이라 한다면 그런 것이 바로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런 생각은 진리를 가장한 거짓입니다.
또 한 번은 새 교회에서는 진리 진리 하는데 진리보다는 사랑이 먼저가 아니냐고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먼저이지만 진리를 알아야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으니 진리나 사랑이나 똑같이 소중합니다 말씀드렸는데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말씀드려도 듣지 않는 분은 안 듣습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교회 안에 이런 분쟁이 가끔 생기는데요, 이걸 잘 관리하지 못하면 자칫 교인들 간 분열이 일어나고 맙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분쟁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아버지는 자아의 악을 뜻하고 아들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분쟁하는 것은 자아의 악이 진리를 대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어머니는 자아의 욕망을 뜻하고 딸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딸이 싸우는 것은 자아의 욕망과 진리에 대한 애정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언제나 이런 내적 갈등을 경험합니다. 자아가 원하는 것들은 대개 세상 물질과 쾌락, 명예 같은 것인데 하나님의 진리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싸움이 있어야 우리는 영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오시기 전 당시 세상은 암흑 상태였습니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자기 욕심껏 사는 것이 선이며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거짓말을 하면서도 양심의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상태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완전한 진리의 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셨을 때, 말씀의 문자적 의미 또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자연계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가지 과정이 필요했는데요, 먼저, 문자로 된 신구약 성경이 인류에게 주어졌고, 그 다음에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진 것입니다. 그래야 온전한 말씀이신 주님이 오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1500년이 지난 후, 가톨릭 사제들에 의해 독점되었던 성경이 평신도에게 돌아옴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그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자의 일은 그로부터 250년 후에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250년이 흘러 극동의 한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에까지 이 말씀의 내적 의미가 전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인류가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기독교’ 508번 글은 지금은 누구나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시대라고 선언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내적 의미로 인해 이제 완전하고 거룩한 말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진리가 바로 그 완전하고 거룩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이 주신 이 진리를 가지고 각자 내면의 악과 싸워야 할 때입니다. 주님이 인성을 거룩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지난 주일(9/3) 오후, 둘째와 저 아랫동네 어느 까페에서 대화하던 중 창립 10주년에 대한 둘째의 반응이 계속 마음에 남아 이렇게 몇 자 적어봅니다.
둘째는 자기는 결코 이런 모양의 창립 10주년을 원하지 않았다며, 몹시 실망한 듯 고개를 돌리더군요. 자기는 그래도 번듯한, 최소한 무슨 상가 건물에 사람들도 좀 북적이고, 화환이며, 무슨 그럴듯한 감사예배 식순도 있고... 하여튼 자기는 이건 아닌 것 같다며, 강하게 부정을 하더군요...
다음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면서, 즉 주님이 그를 통해 허락하신 글들 중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번역을 하게 되면서 접하게 된 아래 내용들을 통해, ‘아, 그래서 이상하게 나는 이런 예배, 이런 교회가 더 좋았던 거구나...’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로, 위 주석은 총 10,837개의 글로 되어 있는데요, 그 중 414번 글의 3번, 4번 항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 그리고 이 글은 창세기 4장 20절,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중 ‘장막에 거주하며’에 대한 주석입니다.
414. [3] 말씀(the Word)에서 이 ‘장막’(tent)이라는 용어를 채택, 사랑에 속한 천적(天的, celestial)인 것들과 거룩한 것들을 표현하는 이유는, 고대에는 예배의 거룩한 의식들(儀式, rites)을 그들의 장막에서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러 신성모독스런 예배들을 통해 장막을 신성모독하기(to profane) 시작했을 때, 세워진 게 순서대로 성막(the tabernacle)이고, 나중에는 성전(the temple)입니다. 이런 이유로, 장막은 성막과 성전이 가리키는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같은 이유로, 거룩한 사람을 가리켜 주님의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라 하는 것입니다.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 같은 걸 상징한다는 것은, 시편을 보면 분명한데요,The reason why the term “tent” is employed in the Word to represent the celestial and holy things of love is that in ancient times they performed the holy rites of worship in their tents. But when they began to profane the tents by profane kinds of worship, the tabernacle was built, and afterwards the temple, and therefore tents represented all that was subsequently denoted first by the tabernacle, and afterwards by the temple. For the same reason a holy man is called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of the Lord. That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s evident in David: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27:4-6) One thing have I asked of Jehovah,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remain in the house of Jehovah all the days of my life, to behold Jehovah in sweetness, and to visit early in his temple; for in the day of evil he shall hide me in his tabernacle; in the secret of his tent shall he hide me; he shall set me up upon a rock. And now shall my head be lifted up against mine enemies round about me, and I will offer in his tent sacrifices of shouting. (Ps. 27:4–6)
[4] 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은 그의 인성(人性, human essence)과 관련하여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천인(天人, celestial man, 천적 인간, 천적 천사, 삼층천 천사)을 그렇게 부르며, 모든 천적이며 거룩한 것들 또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는 그 뒤에 일어난 교회들(고대교회, 유대교회, 기독교회 등)보다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고,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혼자, 즉 자신들의 가정에서 살면서 자신들의 장막에서 지극히 거룩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장막은 신성모독을 당한 성전보다 훨씬 더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를 기념하고자 초막절(草幕, the feast of tabernacles)이 제정된 것이며, 이때 그들은 땅의 소산물을 거두고, 그 기간,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자기들도 장막에서 지낸 것입니다. (레23:39-44; 신16:13; 호12:9)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as to his human essence is the “tent,” the “tabernacle,” and the “temple”; hence every celestial man is so called, and also everything celestial and holy. Now as the most ancient church was better beloved of the Lord than the churches that followed it, and as men at that time lived alone, that is, in their own families, and celebrated so holy a worship in their tents, therefore tents were accounted more holy than the temple, which was profaned. In remembrance thereof the feast of tabernacles was instituted, when they gathered in the produce of the earth, during which, like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dwelt in tents. (Lev. 23:39–44; Deut. 16:13; Hosea 12:9)
39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40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42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43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44모세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레23:39-44)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신16:13)
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호12:9) (AC.414:3, 4)
이상, 윗글을 통해 저는 왜 그동안 규모 큰 교회들과 그 예배들을 힘들어했는지, 그리고 왜 집에서 하는 교회와 이런 가정 예배에 오히려 끌렸는지를 알게 되었는데요, 이는 다음에 소개할 정말 놀라운 내용으로 이어지며,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참고로, 아래 내용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 4장,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21.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神性, the Divine)을 더 내적으로(內的, interiorly) 받는 천사들이 있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이 있다. 더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이라 하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을 영적 천사들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는 것이다.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the spiritual kingdom)라 한다.
22. 천적 나라를 이루는 천사들은, 그들이 주님의 신성을 보다 깊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더 내적인 천사, 또는 더 높은 천사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천국도 더 내적이고, 더 높은 천국이라고 한다. 더 높다, 더 낮다고 말하는 이유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그렇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23. 천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인 천적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love to the Lord)이다. 영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은 영적 사랑이라 부르며, 이는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다. 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선(좋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선은 사랑에 속한다. 따라서 그 두 나라의 선도 하나는 천적 선, 다른 하나는 영적 선이라 한다. 이로 보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 사랑과 구분되는 것처럼, 그 두 나라가 구분되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선은 보다 내적인 선이고, 그 사랑도 보다 내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천적 천사들은 더 내적인 천사들이고, 더 높은 천사들이라 부르는 것이다.
24. 천적 나라는 주의 성직의 나라(the Lord’s priestly kingdom)라고도 불린다. 말씀에서는 ‘주의 처소’(his dwelling place)라고 한다. 영적 나라는 주의 왕권의 나라(his royal kingdom)라고도 하며, 말씀에 ‘주의 보좌’(his throne)라고 표현되어 있다. 또 이 세상에 계실 때의 주님을 신성의 천적 측면에서 ‘예수’(Jesus)라 했고, 신성의 영적 측면으로는 ‘그리스도’(Christ)라고 칭했다.
25. 주님의 천적 나라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의 신성을 보다 내적으로 받기 때문에, 영적 나라의 천사들보다 지혜와 영광에 있어 훨씬 뛰어나다.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므로 더욱 주님과 가깝고 친밀하게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들이 신적 진리(Divine truths)를 계속 그들의 생활 속에 직접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를 먼저 그들의 기억과 사고(thought) 속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천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어 진리를 직관하며, 진리를 마치 자기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본다. 그들은 진리가 옳은지 그른지 추론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이 바로 이들에 대한 말씀이다.
33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렘31:33-34)
이상, 저는 그 성향이 천적 나라, 천적 천사가 더 끌리고 좋습니다. 물론 제 착각일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굳이 가슴 신앙, 머리 신앙으로 이해하자면, 저는 가슴 신앙에 더 기울어지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이유로, 저는 조용히 아내와 함께 집에서 주님을 거룩하게 예배하는 편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들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천적 나라로, 어떤 사람은 영적 나라로 올라가듯, 그렇게 누구는 이렇게, 또 누구는 저렇게 타고나는 것이며,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