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상태들에 대해서는 단지 ‘좋았더라(good)고만 하시는 반면, 이 상태를 가리켜서는 ‘심히 좋았더라(very good)고 하시는 이유는, 지금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마치 서로 결혼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31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60

앞의 상태들에 대해서는 단지 ‘좋았더라(good)고만 하시는 반면, 이 상태를 가리켜서는 ‘심히 좋았더라(very good)고 하시는 이유는, 지금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마치 서로 결혼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This state is called “very good,” 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 “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Posted by bygracetistory
,

위 말씀의 속뜻은,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바로잡으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생명은 오직 거짓과 탐욕밖에 없기 때문인데, 만일 이때 이 유일한, 비록 악하고 거짓되더라도, 생명을 건드리게 되면, 더 이상의 생명이 없어 사람은 바로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대신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와 동행, 그가 자의로 주님의 선과 진리 쪽으로 돌이키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역량에 맞춰 강약을 조절하시면서 말이지요.

 

창세기 1장 30절 말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에 관한, 다음과 같은 속뜻 역시 그렇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 갈 때, 그는 끊임없이 영적 전투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의 교회를 ‘전투적(militant)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거듭남 이전엔 탐욕(cupidities)이 지배적(the dominion)이기 때문인데요, 사람은 그 자체가(the whole man) 그저 탐욕과 탐욕에서 나오는 거짓으로만 되어 있기(composed of)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거듭나는 동안 이들 탐욕과 거짓이 순간적으로 폐지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 자체가(the whole man) 파괴되기 때문인데요, 이들 탐욕과 거짓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습득한(has acquired)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일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악한 영들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게 되는데요, 즉 그들은 일단 그의 탐욕을 자극하여 그를 흥분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계속 그러다 보면 사람은 나중엔 이런 탐욕의 추구에도 지루해하며, 싫증을 느끼고 느슨해지게 마련이며, 그 결과, 결국엔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기울어질 정도가 되고, 그러면 이제 이 사람에게는 개혁될 나름의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섬세하시며, 사람 일생의 모든 악과 거짓조차 이런 섭리 가운데 허락하심을 볼 수 있지요. 우리 주님의 이런 모습은 현재 거듭남의 과정 중인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자녀, 성도는 물론, 기타 모든 사람을 향해서도 우리가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하는지 하는 근본적인 방향과 관점을 제공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다음과 같은 주님 말씀이 생각나는데요,

 

1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2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18-20)

 

그러므로 우리 역시, 어떠한 경우에도 이러한 주님의 성품, 곧 사랑과 온유, 겸손이라는 안전하고 온전한 울타리 안에서 행해야 하겠습니다.

 

가령 아이 훈육의 경우, 이렇습니다. 아, 그전에 먼저 천국 천사들 중 어린아이를 훈육하는 천사들은 어떤 태도와 자세로 하는지를 보겠습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7장, '천국의 어린이들'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천사들의 훈육을 보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지상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훈육해야 하는지 하는 귀한 통찰력을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죽으면 바로 내세에서 깨어나고(부활하고), 깨어나자마자 천국으로 인도되며, 육신을 입고 살 때, 아이들을 인자하게 사랑하고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한 여성 천사들에게 맡겨진다. 그 천사들은 세상에 살 때, 모든 아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맡겨진 아이들을 자기 아이로 여기고, 어머니의 인자함으로 받아들이며, 아이들도 타고난 성향에 의해 그 천사들을 자기 어머니처럼 사랑한다. 그 천사들은 영적 모성애로 원하는 만큼 아이들을 돌본다. 이 천국은 천사들의 이마 앞쪽, 그들이 주를 바라보는 일직선 상에 있다. 모든 아이들이 주의 직접적인 보호의 눈길 아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위치하는 것이다. 순진함의 천국, 즉 삼층천이 그들에게 유입된다...

 

...아이들은 주로 그들의 특성에 알맞는 표상으로 교육을 받는다. 그 표상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내면에서 나오는 아름다움과 지혜로 가득하다. 선함을 본질로 하는 지성이 이런 방법을 통해 아이들에게 점진적으로 심어진다. 이제 내가 허락하심 하에 보게 된 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이로써 나머지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심과 동시에 주의 인성과 신성이 합일되는 것을 표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은 사람의 모든 지혜를 초월하면서 동시에 아이들의 순진함에 맞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떤 무덤이라는 개념이 연출되고 나서 그 안에 주님이라는 개념이 나타났는데, 아주 멀리서 보는 것처럼 어렴풋하게 표현하여 전혀 주님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무덤이라는 개념에는 뭔가 죽음이란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고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 다음 어떤 공기 같은 것, 아주 옅은 액체 같은 것이 조심스럽게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적절한 거리에서 보면 이것은 세례가 상징하는 영적 삶을 표상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서 '결박된 자들'에게 내려가시고, 그들과 함께 천국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표상이 보였는데, 그 장면은 극도의 조심성과 경의로 연출되었다. 또 아이들 마음의 수준에 맞추어 거의 안 보이는 가느다란 실들이 내려와 승천하시는 주님을 지극히 부드럽고 섬세하게 거들어드리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혹시라도 영적이지 않거나 천국적이지 않은 것에 그 표상들이 닿지 않게 하려는 경건한 두려움 속에 진행되었다. 거기 다른 표상들도 연출되었다. 아이들 마음에 적합한 놀이들을 통해 아이들은 진리를 알게 되고, 선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된다...

 

...나는 아이들의 사고가 얼마나 부드러운가도 알게 되었다. 내가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을 때, 그들의 사고가 내 사고의 개념들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흐름은 거의 애정으로만 이루어졌다고 할 만큼 온화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동시에 그들의 사고가 주님께로부터 직접 열려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마치 그들을 그냥 통과해 흐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주께서는 가장 내적 차원에서 어린아이들의 생각 안으로 유입하시는데, 그것은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처럼 생각을 닫아버리고, 진리를 이해하는 길을 막아버리는, 그릇된 가치관이나, 선을 받고 그에 따라 지혜를 받는 길을 막아버리는 악한 생활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아이들이 죽은 후, 바로 천사의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알아감에 따라 점차적으로, 천국의 모든 질서에 따라서 천사의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아이들의 특성을 낱낱이 아시며, 따라서 그들 성향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맞추어 선의 진리와 진리의 선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많은 내용들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이들을 돌보는 천사들은 아이들에게 일체의 영적이지 않거나 천국적이지 않은 것들이 닿지 못하도록, 즉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극도로 조심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네,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아이를 훈육하면서 아이를 주님께 맡긴다는 건, 아이에게 무슨 예외를 허용했다가 아이에게 그동안 기울인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리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에 계속 강행, ‘맞을래?’ 하며 아이를 위협, 끝까지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혹시 그럴지라도, 즉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날지라도 아이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을 의지, 주님의 사랑과 온유하심으로 아이를 훈육하는 것이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그 순간, 방법론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영적으로 악한 기운이 아이와 엄마를 삼키지 못하도록 시급히 그 기운을 끄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들과 악령들이 둘씩 와 있다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또 사람의 연령대에 따라 그에 맞는 영들로 임무 체인지가 되는데요, 대략 영유아들에게는 삼층천 천사들이, 초중고에겐 일층천 천사들이, 청장년에겐 이층천 천사들, 그리고 다시 노년에겐 삼층천 천사들이 오며, 이에 대응하는 악한 영들 또한 그렇게 임무 교대합니다.

 

이런 아르카나에 관한 지식은 지금 훈육 중인 어린아이 앞에서도 무척 유용합니다. 이때 영안이 열려 아이 안에 와있는 악령들이 보이면 더 좋겠지만, 비록 안 보이더라도 부모가 깨어 있어 그 영적 기운, 아우라의 변화, 그 영적 감각을 느낄 수 있었으면 참 다행스럽겠습니다. 그러면 바로 ‘아, 지금 아이 안에서 악령, 이 경우는 어린 악령이겠지요, 악령이 활동하며, 내가 화를 내고, 아이를 위협할수록 더욱 사실은 내 머리 꼭대기에서 나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고 있구나! 그리고 내 안에서도...’ 간파하고, 즉시 영적 기운을 변화시키기 위해, 즉 아이 안에 역시 와있는 삼층천 천사들이 일하실 수 있도록, 나의 인간적인 훈육을 중단, 천사들을 통해 주님께 맡기는 물러남이 필요합니다.

 

이 물러남은 뭐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대체로 바로 회개 기도를 하며, 주님의 임재를 구하는 게 좋겠습니다. 상황 전개에 대한 주도권을 천사들에게, 곧 그렇게 해서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영유아 아이라 하더라도 아이를 윽박지르고, 사납게 대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를 하여 어찌하든지 지금까지 활활 타오르던 악한 기운을 시급히 끄는 게 중요합니다. 부모의 이런 태도는 절대 수치스러운 게 아니며, 우리가 즉시 이런 조치를 취하면 오히려 상황의 중대성을 감안, 삼층천 천사들이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상황을 수습하실 겁니다.

 

이 지경까지 안 가도록 그냥 삼층천 천사들이 바로 개입하시면 되지 않느냐 하시겠지만, 주님은 절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자유를 일방적으로 침해하시지 않으며, 그래서 이럴 경우, 즉 끝까지 쌩고생을 하면서도 회개하지도 않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경우, 삼층천 천사들은 그냥 안타까워하며, 가까이 오지도 못하시고, 그저 저만치 물러나 그 상황에서 하실 수 있는 최소한의 것만 하실 뿐입니다.

 

두 가지, 곧 사람의 안에 있는 악한 생명조차 주님은 함부로 건드리시지 않는다는 사실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은 사랑으로 온유하게 대처하신다는 거! 이 두 가지를 꼭 기억하여 아이 훈육을 비롯, 모든 상황에서 대처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절대로 어떤 걸 이루시기 위해 악한 기운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교육 및 훈육 방식이 무조건 나쁘다, 악하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크게 유용하지요. 하지만 그조차도 주님의 성품, 주님의 사랑과 온유하심 가운데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2024-02-04(D1)-주일예배(2528, 눅16,14-18), '바리새인들은 왜 주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pdf
0.38MB
축도.2024-02-04(D1)-주일예배(2528, 눅16,14-18), '바리새인들은 왜 주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pdf
0.21MB
성찬.pdf
0.14MB

 

 

 

 

 

바리새인들은 왜 주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것을 듣고 비웃거늘 1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눅16:14-18)

 

 

(선이라는 것은 쓰임새이며, 인간이란 본래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 지음받은 존재인데) 만일 쓰임새가 끊임없이 행해지지 않고 중단되게 되면, 이 기간 그는 모든 (악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강한 욕정으로 돌이킬 수 있게 되며, 그건 곧 그렇게 해서 그는 체어리티의 중단뿐 아니라 심지어 선행들로부터도 떠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이런 식으로 자기와 반대되는 것들로 인해 소멸되며, 그렇게 해서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애의 교리 156) And if uses are not done perpetually there is an interruption, and in this interval he may turn aside into all loves and the concupiscences therefrom, and so not only intermit his charity, but even depart from good works. Charity thus perishes from its opposites, and the man serves two lords. (C.156)

 

※ 위 글은 스베덴보리 저, ‘The Doctrine of Charity’(1766) 중 여섯 번째 소주제인, ‘Man is born that he may become charity’(126-157)에 나오는 글이며, 본래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 지음받은 인간이 체어리티의 삶, 곧 쓰임새의 삶을 멈추면, 그 결과, 어떻게 두 주인을 섬기게 되는지를 말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입으로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실제 삶에 있어서는 주님보다는 자기 자신과 세상 재물을 더 믿거나, 또는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듭나기 전 신앙인들은 보통 이렇게 두 얼굴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다가 사후, 영계에 가면 감춰진 본래의 얼굴이 드러나는데요, 그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그가 그동안 어떤 주인을 섬기며 살았는지를 알게 되지요. 어떤 사람은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사람 같은데 의외로 주님과 이웃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른 이유가 뭘까요? 새 교회에서는 그것을 사람마다 주도적인 사랑, 우세한 사랑(dominant love)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수많은 종류의 애정, 또는 사랑이 있는데, 그것을 크게 나누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고, 자아와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랑은 이 두 가지 큰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렇다면 주도적 사랑이란 뭘까요? 각 사람에게 있는 수많은 사랑 중에 으뜸이 되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도적 사랑이 무엇이냐에 따라 개인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즉 주님과 이웃을 위한 천국적인 삶이 될 수도 있고, 자아와 세상을 좇는 지옥적인 삶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하시는 것은 주도적 사랑은 둘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그것들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크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이 주된 사랑이 되어야 하고, 나머지 사랑은 보조적인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반대가 된다면, 그 사랑의 끝에는 세상의 온갖 탐심과 정욕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교회 가르침 “인애의 교리” 156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이라는 것은 쓰임새이며, 인간이란 본래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 지음받은 존재인데) 만일 쓰임새가 끊임없이 행해지지 않고 중단되게 되면, 이 기간 그는 모든 (악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강한 욕정으로 돌이킬 수 있게 되며, 그건 곧 그렇게 해서 그는 체어리티의 중단뿐 아니라 심지어 선행들로부터도 떠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이런 식으로 자기와 반대되는 것들로 인해 소멸되며, 그렇게 해서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애의 삶, 체어리티의 삶을 그치는 순간 주도적인 사랑이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잠시도 체어리티의 삶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 말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것을 듣고 비웃거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세상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주도적 사랑은 주님이 아니라 세상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미워하고,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세상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바리새인이야말로 두 주인을 섬기는 자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위선자의 말로에 대해 마태복음 24장 50절에서 51절까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50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엄히 때린다 했는데 이것은 한글 성경 번역이구요, 원문에는 ‘그를 갈라놓는다(divide)라고 되어 있습니다. 갈라놓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주님께서 그들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모두 빼앗으시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위선자들에게서 선과 진리를 빼앗는 이유는 그대로 두면 선과 진리를 더럽힐 것이고,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를 알면서 더럽힐 바에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가 하나도 없고, 악과 거짓만 남아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나 연민 따위는 없고, 오로지 자기만 아는 사람, 어떻게 해서든지 이웃을 짓밟고 올라서기를 바라는 사람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는 위선자들이 받을 벌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비웃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1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들은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사람인지를 모르고 오히려 높아지기를 바라고 존경받기를 원합니다. 또 자기 생각과 다르면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비웃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관련해 “천국의 비밀” 9264번 글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적 진리와 선이 부인될 때, 이 선은 파괴되며, 그 경우, 사람 안에 있는 것 역시 끝나고,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해서 주님 역시 그렇습니다. 주님은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비롯되는 분이십니다. and this good is destroyed when the Divine truth and good which are from the Lord are denied, in which case this is extinguished in the man, and consequently so is the Lord himself, from whom proceed all good which is good and all truth which is truth.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비웃을 때, 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인 선을 파괴하고, 그렇게 해서 자기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끝냈다, 더 이상 주님이 자기들 안에서 역사하시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16절에서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들이 부인하고 비웃는 그 말씀이 바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의 말씀을 의미하고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주님이 직접 전하시는 진리의 말씀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새로운 천국과 새로운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오셔서 직접 전하신 말씀은 지상에 세워질 마지막 교회를 위한 말씀이며, 또한 그 교회를 바탕으로 하늘에 세워질 새로운 천국을 위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신 것은 요한의 때까지의 말씀, 즉 구약의 말씀들이 주님이 오실 것을 예언한 말씀이라면, 그 후의 말씀은 세상에 오신 주님이 직접 전하시는 영원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그 신성한 말씀을 비웃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주님은 인간이 각자의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되 온전하게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지성에 비춰 어떤 말씀은 임의로 버리고, 어떤 말씀은 왜곡하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율법의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뜨리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세워지는 교회는 신성하고 완전한 말씀으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하신 것은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천지는 하늘의 천국과 지상의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주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남용, 말씀을 왜곡하여 이른바 장로의 전통이라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말씀보다 더 높였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18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주님이 갑자기 간음을 하지 말라 하십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고, 그것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걸 상기시키신 후, 그러므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는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뜨리지 말라 하신 주님께서 갑자기 간음을 하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은 왜 이 시점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말씀에서 결혼은 선과 진리의 순수한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 전체를 통해 가르치시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이요, 믿음과 믿음에 따른 삶의 결합입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세워진 모든 교회들은 마지막에 가서는 선과 진리, 또는 믿음과 삶을 분리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왜곡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이 아니며, 그러므로 영적인 간음입니다. 왜냐하면 간음의 영적인 의미는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을 뒤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것은 간음이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말씀을 임의로 왜곡하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임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하실 때,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 중요하고, 삶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잘못된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말씀을 임의로 왜곡, 믿음과 삶을 분리시켰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 희생시킴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 믿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누가복음 24장 47절에는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라고 말합니다. 또 마가복음 1장 15절은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믿을 뿐 아니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생각이나 애정을 면밀히 살펴 악하고 거짓된 것이 있으면 주님 앞에 고백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 고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빼고,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 가르칩니다. 이런 것이 영적인 간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는 일이고, 그러므로 진리에다가 거짓을 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각자에게 맞는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처럼 모든 진리와 선은 각기 맞는 진리와 선을 만나 결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부 간의 선과 진리가 있고, 부모 자식 간의 선과 진리가 있습니다. 교사와 학생 간의 선과 진리가 있고, 회사에서 상사와 부하직원 간의 선과 진리가 있습니다. 선과 진리가 같은 것 같지만 이렇게 모두 다릅니다. 쓰임새가 다르고 형태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쪽의 진리가 저쪽에서는 거짓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말씀의 외적이고 내적인 의미들을 통해 우리는 그런 지혜를 깨우쳐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각자의 삶 속에서 선과 진리의 순수한 결합이 일어나고 천국의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 체어리티의 행위를 멈추지 말고, 꾸준히 계속하라고 하십니다. 멈추는 순간, 불순한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의 바다로 떠내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즐거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관심을 잊을 정도로 과도하면 안 됩니다.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5:17)

 

아멘

 

원본

2021-06-2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2-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