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9-17(D1)-주일예배(2504, 눅12,54-59),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며,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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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hWBCaaU_YM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며,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54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 하리라 하시니라 (눅12:54-59)

 

 

하나님의 신성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흘러들어온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의 쪽이어야 하며,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인 것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받아들이는 능력이 사람에게 끊임없이 주어지며, 사람이 악을 제거하는 만큼 그 능력은 비록 주님의 것이지만 사람의 것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for the Divine proceeding which is “the Father in the heavens,” flows in with the evil equally as with the good, but the reception of it must be on man’s part, yet not on man’s part as from man, but as if from man, for the ability to receive is given to man continually, and it also flows in to the extent that man removes the evils that oppose, and does this also from the ability that is continually given, the ability itself appearing to be man’s, although it is of the Lord. (AE.644:23)

 

 

※ 오늘로 누가복음 12장을 마칩니다. 지난 7월 30일 주일부터 시작, 오늘까지 8주에 걸쳐 다루었는데요, 늘 이렇게 원고를 프린트하여 나누어드렸으니 수시로 다시 여러 번 읽으시고 확실히 자기 걸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겉 육을 입고 사는 사람들은 이 속뜻 설교를 결코 한번 듣고 완전히 자기 걸로 소화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렇게 속, 곧 내적(內的, internal)으로 말씀 읽기를 연습하다 보면 어느덧 우리도 천사들처럼 내적으로, 영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이 세상과 세상 모든 일, 곧 주변 일상을 비롯,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것에서 한발 물러나 그 영적 의미들을 천국, 천사들 관점, 곧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며, 그렇게 되면서 우리 모두 세속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되어, 이 세상 사는 동안 주님을 향해 우리를 정결하게 보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세상을 위해서가 아닌,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몸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서 천국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복음서에는 외식하는 자에 대한 에피소드가 자주 나옵니다. 외식(外飾)이라는 말은 한글 성경의 번역이고, 영어 성경 표현은 위선(僞善)입니다. 위선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겉으로는 진실한 듯하나 속으로는 속이는 것, 겉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증오하거나 멸시하는 것이지요. 복음서에 위선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람들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왜곡, 말씀 속에 있는 내적이고 거룩한 것들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겉으로만 경건할 뿐, 속에는 악의와 교활한 속임수가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 비난하셨던 것입니다. 겉은 그럴듯하게 꾸몄지만 그 속은 죽은 자들의 해골과 뼈로 가득한 무덤처럼 말이지요. 교회의 교리가 잘못될 경우, 그 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바리새인들 같은 위선자가 됩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공간 안에 있으면 누구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 여기 ‘감염(感染)이라고 했는데요, 출애굽, 즉 애굽을 나오다, 애굽에서 출발하다 하는 출애굽 모든 여정은 그 속뜻으로는, 악과 거짓에 감염된 상태에서 우리를 구원, 천국을 향해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자, 그렇다면 참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위선자가 아닐까요? 비록 참된 신앙 안에 있다 하더라도 거듭나기 전에는 위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영적 상태에 따라 누구나 조금씩은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위선을 얼마나 아느냐 하는 것이고, 거기서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떻게 하면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또한 각 사람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 54절과 5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54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구름이 서쪽에서 일면 소나기가 온다고 합니다. 이는 주님 활동하신 유대 땅의 지형적 특성 때문인데요, 그러나 그 속뜻으로도, 서쪽은 해가 지는 방향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사랑이 없는 때, 즉 교회의 마지막 때를 나타내며, 또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가리키고, 소나기는 진리를, 그러므로 구름이 서쪽에서 일면 소나기가 온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절에는 남풍이 불면 심히 더울 거라는 것 역시 그 지역 지형적 특성이지만, 역시 그 속뜻으로도, 남풍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을 뜻하며, 그러므로 남풍이 불면 덥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선으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합해 보면,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이 말씀의 진리와 선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자아의 욕망을 좇을 때 교회는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때 주님은 천사들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 신앙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서지 않으면, 석양에 해 기울듯 교회 안에는 사랑이 식어갑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타락한 교회를 정리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여시지요. 교회는 세상의 심장과 폐와 같아서 한순간도 없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말씀의 진리와 선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소나기는 바로 그 진리이고, 남풍은 그 선을 뜻합니다.

 

서쪽에서 구름이 일면 소나기가 올 것을 아는 것처럼 진실한 신앙인들은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통해 주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자기 안의 악과 거짓에 맞서 싸웁니다. 마치 노아 시대에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이 세상을 덮은 거짓의 홍수와 맞서 싸우듯 그렇게 싸웁니다. 진실한 신앙인들은 그런 방법으로 시험을 딛고 한 단계 한 단계 거듭납니다. 하지만 반대로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들 내면의 교회에 오신 주님, 자신들을 찾아오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박해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 644번 글 20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면의 악과 거짓으로 인해 눈이 어두운 자들은 진리를 보지 못하고 주님의 임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럴 경우,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 시험을 이기지 못하면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56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그래서 주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한탄하신 것입니다. 시대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를 생각할 때는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외부의 교회든 내면에 있는 교회든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는 누구나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때는 영이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영이 순수하다는 것은 진리를 위해 진리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해 마지막 때가 되면 신앙인들은 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타인의 판단을 믿습니다. 자신의 순수한 영으로 진리를 바라보지 않고 타락한 교회의 교리를 통해 진리를 바라보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말씀에서 ‘베드로’는 교회의 신앙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으로부터 진리를 생각하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은 스스로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 즉 잘못된 교리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신앙인들이 스스로 진리를 판단하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자유이며,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은 노예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위선자가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면 스스로의 판단으로 진리를 믿을 수 있을까요?

 

58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주님께서는 그 대답으로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글 성경 번역이고, 영어 성경의 번역은 이렇습니다. ‘네가 원수와 함께 행정관에게 갈 때 길에서 근면하여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넘겨 옥에 갇히지 않도록 하라’입니다. 말씀에서 ‘감옥에 갇히는 것’은 신앙인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악과 거짓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가 있어야 악과 거짓을 물리칠 수 있는데 진리가 없으니 악과 거짓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의 삶이 아니라 죽은 자의 삶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길에서 근면하라, 즉 진리 안에서 근면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 안에서 근면한 것일까요? 진리가 명령하는 일은 적극적으로 행하고 진리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끝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9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 하리라 하시니라

 

말씀에서 ‘갚는 것’은 진리를 가지고 잘못된 습관을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주님 앞에 큰 빚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깨닫고 고쳐나간다면 그것은 주님의 빚을 갚는 일이며,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한 푼도 남김없이 갚으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교회가 아무리 죄를 짓더라도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악이 선을 넘게 되면, 다시 말해서 그대로 두면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 같으면 지체 없이 오셔서 낡은 교회를 폐하시고 교회 안의 남은 자를 데리고 새 교회를 여십니다.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오랜 섭리이며 방법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낡은 교회를 폐하시고 새 교회를 세우시는 이 섭리는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신앙인들이 주님의 질서에 반하는 삶을 살 때 주님은 어느 정도는 허용하시지만, 도를 넘으면 직접 그의 내면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임재하실 때 진실한 사람들은 주님을 받아들여 주님과 함께 내면의 악과 거짓을 몰아내는 싸움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한 번 더 거듭납니다. 반대로 진리보다는 세상에 뜻을 둔 위선자들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시험에서 이길 수 없으며 결국 점점 더 깊이 악의 수렁 속으로 빠져듭니다. 주님은 위선자가 되기 쉬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첫째는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겉 사람의 자아로부터 진리를 바라보지 말고 속 사람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며, 그를 붙잡고 있는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진리 안에서 근면하라 하십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진리 안에서 근면한 것은 진리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고 진리에 합당한 일은 게으름 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게으름 부리지 않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지는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진리의 명령 앞에서 게으름을 부릴 때 어둠이 내려앉는 것처럼 악하고 거짓된 것이 삶 가운데 은밀하게 내려앉습니다. 신앙인들은 그렇게 해서 지옥에 갇히게 되는데요,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근면해야 합니다. 항상 속 사람으로부터 진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6:3)

 

아멘

 

 

 

원본

2020-09-2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9-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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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드린 것처럼,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사람들은 특별히 무슨 신학교육 같은 거를 받지 않아도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처럼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것을 받아 모든 걸 통찰, 지각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시대에는 주님에 관한 진리들을 오늘날처럼 신학적 교리로 정돈하는 걸 무척 꺼리며 삼가던, 불편해 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는 예를 들면, 선하고 착한 사람들한테 주님을 생활과 삶으로 보여주지는 않고, 대신 교리교육으로만 가르치려 할 때, 그들이 낯설어 하고 힘들어 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 그 시대에 벌써 주님에 관한 진리들을 수집, 체계화된 교리로 정돈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요, 이들이 바로 에녹이라 하는 사람들, 혹은 교회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인류는 나중에는 결국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교리로 주님과 연결될 것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므로 그들을 잠시 따로 떼어 보관하시는데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말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4)

 

의 배경, 속뜻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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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9-10(D1)-주일예배(2503, 눅12,49-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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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9o9EVXAqlLQ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눅12:49-53)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교회 안에 거짓과 악밖에 없어서 분쟁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진리와 선이 밝혀지자 비로소 분쟁이 일어났다. 진리와 거짓, 선과 악 간의 분쟁이 없으면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 (계시록 해설 504:31) for before the Lord came into the world there were in the church nothing but falsities and evils, consequently there was no combat between these and truths and goods; but when truths and goods had been unveiled by the Lord, then it was possible for combats to exist, and without combats between these there can be no reformation; (AE.504:31)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가나안 원주민들, 즉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그리고 여부스 족속이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그 땅에서 모두 몰아내라 하셨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가나안 도착과 함께 주님 명하신 대로 처음 땅 분배를 받아 흩어진 후, 자기 땅에 있는 가나안 사람들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완전히는 몰아내지들을 못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그동안 너무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고, 사람이 주님을 끝까지 의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였는데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 끊임없이 이 남은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악과 타협할 때가 있는데요, 그렇게 악과 타협할 때는 일시적으로는 평화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전보다 더 큰 악에 시달리게 되는데요, 그리고 그렇게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나서야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영적 전쟁에서는 어느 한쪽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둘 사이에는 싸움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누구나 다 이렇게 내적 싸움을 하는데요, 그런데 이런 내적 싸움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경우인데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아와 세상의 욕망을 좇아 사는 것이 악이며 거짓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내적 싸움이 없다는 게 오히려 참 씁쓸한 케이스가 되겠네요. 그런가 하면 진리를 알면서도 내적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 유혹을 이기지 못해 습관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의 경우인데요, 죄를 반복해서 짓다 보면 나중에는 죄를 지으면서도 수치심이나 굴욕감,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거짓을 진실이라 하고 진실을 거짓이라 뒤집기도 합니다. 내적 싸움이 없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자유롭고 평온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평화도 아니고 자유도 아닙니다. 지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 뿐이지요.

 

그러면 진정한 평화,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와 관련해 오늘 본문 4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주님께서는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하십니다. 불은 무슨 뜻일까요?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사이에 벌어지는 내적 싸움을 뜻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이든 사회든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사이에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 오시기 전 이 세상에는 그런 내적 싸움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참된 진리가 없었기 때문인데요, 진리라는 게 있어야 거짓을 볼 수 있고, 그것과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세상은 악과 거짓으로 가득했고, 그러므로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붙잡혀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지요. 그때 참된 진리이신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첫째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해 존재하셨던 여호와께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같은 논리로, 그동안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내적 진리가 주님이 오심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진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누구나 내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인데요, 왜냐하면 아래 요한복음 1장 3절 이하의 증언처럼 주님은 곧 말씀이시며,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가 되었을 때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내적 진리가 충만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3-14)

 

그러니까 주님의 인성이 문자로 된 성경이라면 내적 진리는 주님 안의 신성, 곧 문자 안에 담긴 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신 세 번째 의미는, 인간에게 거듭남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세상에서 인성과 신성을 하나로 만드시는 과정은 사실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여 하나 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치열한 내적 싸움 없이는 거듭남도 없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주님께서는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 하십니다. 말씀에서 세례는 거듭남을 의미하는데요, 그렇다면 주님이 받을 세례는 어떤 것입니까?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으신, 유전된 인성(human)을 벗으시고, 당신 안의 여호와께서 주시는 거룩한 인성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옥과의 치열한 싸움과 승리로만 이루어지는데요, 그래서 인간이 거듭나는 모습과 흡사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받으실 세례는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임과 동시에, 주님에 의해 인간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공간 속에서 주님 자신에게 일어나는 세례임과 동시에, 시간을 초월해 모든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분쟁하는 것은 곧 내적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적 싸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것에 대해 52절과 5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오신 다음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운다고 합니다. 여기서 숫자 셋은 진리는 진리인데 선이 없는 진리를, 그리고 숫자 둘은 선은 선인데 진리가 없는 선을 말합니다. 선 없는 진리나 진리 없는 선은 둘 다 온전한 것이 아니며, 둘 다 진정한 진리와 선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진리는 이웃을 화합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시키는데요, 교회 안에서, 아니면 개인의 마음속에서 이렇게 진리를 가장한 거짓, 또는 선을 가장한 악이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놓을 때가 아주 많습니다. 이것이 한 집에 다섯 사람이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제게 성경이 우선이냐 성문서, 즉 스베덴보리가 쓴 글이 우선이냐 라는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하기를,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주님의 인성에 해당하고, 성문서에서 밝히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주님 안에 있는 신성과 통합니다.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이듯 그 둘은 하나이며, 똑같이 중요합니다 라고 말이지요. 만약 교회 안에서 어떤 이는 성경이 우선이라 하고, 어떤 이는 성문서가 우선이라 한다면 그런 것이 바로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런 생각은 진리를 가장한 거짓입니다.

 

또 한 번은 새 교회에서는 진리 진리 하는데 진리보다는 사랑이 먼저가 아니냐고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먼저이지만 진리를 알아야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으니 진리나 사랑이나 똑같이 소중합니다 말씀드렸는데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말씀드려도 듣지 않는 분은 안 듣습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교회 안에 이런 분쟁이 가끔 생기는데요, 이걸 잘 관리하지 못하면 자칫 교인들 간 분열이 일어나고 맙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분쟁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아버지는 자아의 악을 뜻하고 아들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분쟁하는 것은 자아의 악이 진리를 대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어머니는 자아의 욕망을 뜻하고 딸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딸이 싸우는 것은 자아의 욕망과 진리에 대한 애정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언제나 이런 내적 갈등을 경험합니다. 자아가 원하는 것들은 대개 세상 물질과 쾌락, 명예 같은 것인데 하나님의 진리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싸움이 있어야 우리는 영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오시기 전 당시 세상은 암흑 상태였습니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자기 욕심껏 사는 것이 선이며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거짓말을 하면서도 양심의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상태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완전한 진리의 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셨을 때, 말씀의 문자적 의미 또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자연계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가지 과정이 필요했는데요, 먼저, 문자로 된 신구약 성경이 인류에게 주어졌고, 그 다음에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진 것입니다. 그래야 온전한 말씀이신 주님이 오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1500년이 지난 후, 가톨릭 사제들에 의해 독점되었던 성경이 평신도에게 돌아옴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그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자의 일은 그로부터 250년 후에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250년이 흘러 극동의 한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에까지 이 말씀의 내적 의미가 전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인류가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기독교’ 508번 글은 지금은 누구나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시대라고 선언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내적 의미로 인해 이제 완전하고 거룩한 말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진리가 바로 그 완전하고 거룩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이 주신 이 진리를 가지고 각자 내면의 악과 싸워야 할 때입니다. 주님이 인성을 거룩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원본

2020-09-0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9-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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