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2(D1)-주일예배(2514, 눅14,1-6),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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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9KrXJTXEo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신 주님

 

 

1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2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3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눅14:1-6)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주님에 대한 표상(表象)이 끝났을 때, 안식일은 신성한 것을 가르치는 날이 되었고, 그러므로 일에서 벗어나 휴식하는 날, 구원과 영생에 대해 묵상하는 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날이 되었다. (참된 기독교 301)

 

 

오늘부터 누가복음 14장을 들어갑니다. 원래 11월 첫 주인 지난주부터였는데 지난주는 저의 장인, 장모 이장(移葬) 날짜가 갑자기 주일로 앞당겨 잡히는 바람에 주일예배를 이장 예배로 대신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장 예배는 개장(開葬), 화장(火葬) 및 납골(納骨), 이렇게 세 번의 예배로 드렸는데, 모두 교회 유튜브와 블로그에 올렸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COVID-19이 지속되던 시절, 코로나가 가져온 많은 변화 중 가장 두드러졌던 한 가지는 바로 많은 일들이 비대면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는데요, 물건을 구입할 때도 인터넷으로, 사람들끼리의 모임도 인터넷 공간에서 말이지요. 심지어 예배도 각자의 집에서 인터넷으로 드리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었지요. 세월이 그렇다 보니 이제 본격적으로 비대면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냐 하고 우려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가장 작은 천국이나 교회는 개인의 마음속에 있다 가르치는데요, 그렇다면 꼭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시죠? 그러나 ‘천국의 비밀’ 3147번 글의 10번 항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외적 예배 의식에 묶어두시는 이유는 그 의식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들을 통해 주님과의 교류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배 의식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들을 통해 주님과의 교류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이 내적인 것들을 표상하는 예배 의식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예를 들면, 주님 친히 침례 요한에게 받으셨던 침례 의식이라든가,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손수 포도주를 따라 주시고, 떡을 떼어주시면서 이 일을 오랫동안 기억하라 하신 성찬 의식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외적 예배를 통해 주님과의 교류가 계속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다 하십니다. 주님은 또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 하셨는데요, 여기서 ‘두세 사람’은 사람의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그리고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란 사랑과 신앙으로 예배드리는 곳, 즉 교회를 뜻합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정기적으로 만나 예배를 드릴 때, 영적으로 더 많은 성장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의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다양한 선과 진리를 통해 서로 배우는 것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밤에는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고, 아침이 되면 직접 사람들을 만나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안식일에 어떤 바리새인의 집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십니다. 본문 1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주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을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께서는 자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외식(外飾)하는 자들이라 하셨는데요, 외식하는 자들은 겉으로는 경건하게 행동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혐오하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외식하는 자는 위선자입니다. 위선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의 위선이 있고, 교회 안의 사람들의 위선이 있습니다. 주님 당시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위선은 교회 안의 사람들의 위선입니다. 그들은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그와는 정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교회 밖의 사람이라고 해서,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다 위선자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중 많은 분이 진실한 삶,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다. 여기서는 그러나 그 가운데 그렇지 못한 분들, 위선의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새 교회인들의 위선도 있습니다. 입으로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말하면서 정작 행하지는 않는 경우입니다. 어쩌면 본문에서 말하는 바리새인의 지도자는 바로 그런 새 교회인들을 나타내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가장 높은 차원의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위선 중에서도 아주 큰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 교회 사람들의 위선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제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며칠 전 밤, 아내의 부탁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한 봉지 버리러 날이 꽤 춥지만 내려갔습니다. 우리 208동은 가장 산 쪽이라 특히나 더 바람이 불고 춥습니다. 음식물 쓰레기통을 여는데 세상에! 그 안에 커다랗고 하얀 비닐봉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별생각 없이 꺼내는데 잘 들리질 않아요. 봤더니 아이고, 그 안에 종류별로 담아 묶은 작은 여러 봉지가 예닐곱 개 정도 들어있어 무거워서 그랬던 거지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툭 던져버리고 가면 어쩌라고... 어찌어찌 쏟아 큰 비닐은 꺼내 저쪽 비닐들만 넣는 통에 넣을 수 있었는데, 이 쏟아진 작은 비닐들은... 아... 어찌해야 하나, 이미 음식물에서 흘러나온 액체들로 뒤범벅이 되어 하나하나 뒤적이며 그 짜맨 걸 풀어 비닐들만 따로 버리기가 쉽지 않더군요. 옷도 가볍게 입고 나와 벌써 굉장히 춥기도 하고 말이지요... 그러다가 에이, 뭐 나중에 저쪽 검사 과정에서 걸러지겠지 하고는 내가 들고 간 것만 한쪽에 쏟아버리고는 돌아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찝찝합니다.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양심의 소리! 그래도 애써 무시하고 그냥 들어와 버렸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이런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음, 이런 게 한두 번 반복되다가 그만 딱딱해지고 익숙해질 텐데... 큰일났습니다.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제 일상이 이렇게 큰 구멍이 쑹쑹 나고 있어서인지 제 삶에 능력이 사라지는 걸 느낍니다. 저는 이렇게 비겁한 사람입니다. 말씀의 속뜻이니 아르카나니 하고 있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저는 이렇게 말씀의 속뜻을 모르는 사람들, 아니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도 더 비겁하고 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의 집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집은 사람의 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집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주님이 위선자의 마음속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떡을 잡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위선자에게 선한 애정을 심어주시고, 그 애정을 통해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위선자와 함께 떡을 드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떡은 선, 또는 선한 애정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위선자는 겉과는 달리 속으로는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을 말하는데요, 그럼에도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으로 들어가실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이 본질적으로 진리를 거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그는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으로 위선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집으로 들어가실 수가 있었고, 그와 함께 떡을 드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을 주시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위선자의 내면에서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들입니다. 우리도 가끔 그런 경험을 합니다. 시험에서 넘어져 주님,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데 문득 주님의 손길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어떻게 나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지 지켜 보자.’라는 마음이 듭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엿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2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그런데 그때 주님 앞에 수종(水腫)병 걸린 어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수종병은 혈액에 문제가 생겨서 몸이 붓는 질병입니다. 속뜻으로는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는 질병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의 집에서 수종병 든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은 위선자에게 진리를 왜곡하는 버릇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언제 진리를 왜곡할까요? 진리를 이용해 거짓된 생각을 관철하려고 할 때이거나, 또는 자아로부터 오는 악한 욕망을 정당화하려고 할 때입니다. 예를 들면, 대면 예배보다 비대면 예배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앞에서 말씀드린 성도들끼리의 만남이나 예배 의식으로 표상되는 내적인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말씀의 다른 구절들을 왜곡, 그것으로 자신의 생각을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아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참된 진리 안에 들어오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릇된 지식이나 신념들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붙잡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럴 경우, 그 지식이나 신념에 맞지 않는 진리는 버리고 맞는 것만 받아들이며,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진리를 왜곡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 술은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낡은 지식을 가지고는 새로운 진리를 담아낼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왜곡하는 병과 바리새인의 위선은 서로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진리를 왜곡하는 것은 결국 진리 앞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진리 앞에 굴복하지 않으면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넘어집니다. 그러다 보면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면서 행동은 마치 진리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결국 위선자가 됩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기 전에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3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여기서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은 누굴까요? 그들 역시 위선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인데, 이를테면 스스로 진리를 많이 안다 자부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그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물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따라 진리 앞에 굴복하는지, 굴복하지 않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이 합당합니다”라고 하면, 그는 그동안의 생각을 버리고 진리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합당치 않습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진리 앞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며, 만약 그렇다면 주님은 그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없습니다. 그가 진리이신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시기 전에,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물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었던 이유는, 십계명에 6일 동안은 힘써 일하되 7일째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6일 동안은 일하고 7일째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6일 동안 일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의 내적 싸움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7일째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거듭난 다음의 상태, 즉 내적 싸움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누구나 내적 싸움을 합니다. 그 이유는 그때에는 말로는 주님을 의지한다 하면서 사실은 자기가 가진 것들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란 신앙의 진리라든가 선한 애정 같은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와 선은 모두 주님이 주신 것이지만, 그럼에도 거듭나기 전 사람들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올 때, 마치 빛이 매질을 통과할 때 굴절되는 것처럼 굴절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나기 전 선과 진리는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주님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와 선이 순수하지 않으면 그 능력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지옥의 영들이 아직 거듭나기 전인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그들의 순수하지 않은 진리와 선으로는 지옥을 압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다음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전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서 인도하시는 주님을 지옥이 감히 대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다음에는 싸움이 없고 항상 평화롭습니다.

 

4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과연 합당하냐 물으시자 본문에는 그들이 아주 잠잠했다고 말합니다. 잠잠하다는 것은 한글 성경 번역이고요, 영어 성경에는 그들이 계속해서 평화의 상태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평화는 속뜻으로는 순진함(이노센스, innocence)에서 오는 기쁨을 뜻합니다. 그러면 순진함은 뭘까요? 어린아이와 같이 전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잠잠했다는 것은 그 위선자가 자신의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주님만을 믿고 따르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순진하게 주님을 믿고 따를 때 마음의 평화가 있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수종병 든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5절에서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5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이 말씀을 영어 성경의 번역으로 옮기면 ‘너희 중에 누가 나귀나 소가 구덩이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아들이라 하지 않고 나귀라고 했고요, 우물이라 하지 않고 구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말씀에서 나귀는 겉 사람의 진리를 뜻하고, 소는 겉 사람의 선을 뜻합니다. 겉 사람의 진리는 신앙인들이 일상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겉 사람의 선은 그러한 말과 행동의 바탕에 깔려 있는 선한 애정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나귀와 소가 구덩이에 빠졌다 했습니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은 진리와 선이 왜곡되거나 더럽혀지는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인들이 자아의 욕망에 빠져있을 때는 진리를 왜곡하기도 하고, 진리에 반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진리를 더럽히기도 합니다. 그것이 자기의 나귀와 소를 구덩이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귀와 소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는 것은 왜곡되거나 더럽혀진 진리와 선을 주님께서 회복시키시는 것을 의미하며, 그 일을 안식일에 하시는 것은 안식일은 완전한 진리와 선을 통해 주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태복음 12장 8절에서 주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완전히 거듭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자는 신성한 진리를 뜻하고, 안식일은 주님과 인간이 하나 되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새 교회 교인들은 모두 주님의 진리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 믿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렇게 믿으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생각을 믿을 때가 많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우월감을 가지기도 하고, 자아와 세상의 유혹들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시험에서 넘어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생각들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그렇게 자주 넘어지고 실패가 반복될 때, 그는 점점 위선자가 됩니다.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거짓말을 하고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안식일에 찾아가신 바리새인의 지도자는 어쩌면 시험을 극복하지 못하고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왕래하는 위선적인 새 교회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새 교회인들은 누구보다 높은 차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여러모로 서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바리새인의 위선이 영적인 수종병에서 온다 진단을 하시고 그의 병을 고쳐 주시려고 합니다. 영적 수종병이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진리를 왜곡하는 병입니다.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밀어내며, 또 어떤 것은 자신의 생각대로 고치면서 그렇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병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아와 세상에 속한 욕망들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불순한 욕망들을 버리고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요? 안식일의 주인인 나를 믿느냐 하고 주님께서 물으실 때 “네, 주님만이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백에 진정성이 담길 때, 주님은 우리의 영적 수종병을 고쳐 주시고요, 나아가서 위선의 병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시면서 나는 어느 때 주님을 믿지 않는지, 어느 때 주님 앞에 꼿꼿이 머리를 드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병을 아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수종병과 위선을 치유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와 또한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겔20:12)

 

아멘

 

 

원본

2021-02-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1-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창2:25, AC.163-167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Verse 25.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 25절 속뜻

 

천적 인간의 본성은 주님의 손길로 이노센스의 상태 가운데 있을 수 있었습니다.

 

 

163. 그들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naked and not ashamed)이라는 것은 그들이 순진무구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그들의 본성 안으로 오랫동안 순진무구함을 스며들게 하셨기(had instilled) 때문인데요, 그들의 본성이 이런 순진무구함(innocence, 이노센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걸(being unacceptable) 방지하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입니다. Their being “naked and not ashamed” signifies that they were innocent, for the Lord had instilled innocence into their own, to prevent its being unacceptable.

 

 

164. 인간의 본성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그저 악할 뿐이며, 만일 눈으로 볼 수 있게 드러날 경우, 그야말로 기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체어리티와 이노센스가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들면(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the Lord are instilled into the own), 그때는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데요, 앞서 154번 글에서 보신 것과 같습니다. 체어리티와 이노센스는 그 본성, 즉 사람 안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을 안 보이게 가릴 뿐 아니라(not only excuse the own) 마치 없어진 것 같게도 하는데요(as it were abolish it), 마치 유아들한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유아들한테서는 악과 거짓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즐거운 무슨 놀이처럼 보이기까지도 하는데요(in whom what is evil and false is not merely concealed, but is even pleasing), 그들이 자기들의 부모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한, 그리고 자기들의 유아적 이노센스가 드러나는 한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처럼, 왜 사람이 어느 정도의 이노센스를 소유하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지 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The own of man, as before stated, is mere evil, and when exhibited to view is most deformed,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the Lord are instilled into the own, it then appears good and beautiful (as before observed, n. 154). Charity and innocence not only excuse the own (that is, what is evil and false in man), but as it were abolish it, as may be observed in little children, in whom what is evil and false is not merely concealed, but is even pleasing, so long as they love their parents and one another, and their infantile innocence shows itself. Hence it may be known why no one can be admitted into heaven unless he possesses some degree of innocence; as the Lord has said: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10:14-16) Suffer the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he shall not enter therein. And he took them up in his arms, put his hands upon them, and blessed them. (Mark 10:14–16)

 

 

165.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벌거벗음(the nakedness of which they were not ashamed)이 이노센스를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증명되는데요, 온전함(integrity)과 이노센스가 떠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었음을 부끄러워했고,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수치를 느꼈으며, 그래서 자신들을 숨겼다는 사실입니다. 영들의 세계에 있는 표상(表象, the representations in the world of spirits)으로도 마찬가지인데요, 영들이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하고, 죄 없음을 증명하고 싶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이노센스를 증언하기 위해 스스로 벌거벗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국에 있는 순진무구한 사람들한테서 이런 게 두드러지는데요, 그들은 그들의 이노센스한 본성에 따라 화환으로 장식된 벌거벗은 유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 정도의 이노센스까지는 아닌 사람들은 선지자들이 이따금 보았던 천사들처럼 다이아몬드 실크라 할 수 있는 빛나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That the “nakedness of which they were not ashamed” signifies innocence is proved by what follows, for when integrity and innocence departed they were ashamed of their nakedness, and it appeared to them disgraceful, and they therefore hid themselves.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representations in the world of spirits, for when spirits wish to exculpate themselves and prove their guiltlessness, they present themselves naked in order to testify their innocence. Especially is it evident from the innocent in heaven, who appear as naked infants decorated with garlands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ir innocence; while those who have not so much innocence are clad in becoming and shining garments (of diamond silk as you might say), as the angels were occasionally seen by the prophets.

 

 

166. 이런 것이 본 장 말씀에 들어있는 일부인데요, 그러나 이것들은 사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었는데요, 사실 오늘날 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여기서 다룬 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조차 어떤 사람들한테는 모호하고 흐릿하게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Such are some of the things contained in this chapter of the Word, but those here set forth are but few. And as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who at the present day is known to scarcely anyone, even these few things cannot but appear obscure to some.

 

 

167. 만일 누군가 말씀 각 구절마다 얼마나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있는지를 안다면 그는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과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들이 엄청나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인데요(for the number of arcana contained is past telling), 이런 사실이 겉 글자 상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and this is very little shown in the letter). 이걸 좀 간단히 말씀드리면,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에서는 말씀의 겉 글자들은 정확히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질서정연하게, 생생하게 표현, 표상됩니다. 영들의 세계는 표상의 세계(a world of representatives)이기 때문인데요, 거기서 생생하게 표상되는 것은 무엇이든 이번에는 이층천 천사적 영들(the angelic spirits who are in the second heaven)에 의해 그 표상들에 들어있는 아주 세밀한 것들에 대해서까지 지각되며, 그리고 그렇게 이층천 천사적 영들에 의해 지각된 것들은 이번에는 삼층천 천사들(the angels who are in the third heaven)에 의해 도저히 표현 불가한 천사적 아이디어로 풍성하게, 그리고 꽉 차게 지각됩니다. 최종적으로 이것은 주님의 선하신 즐거움(the Lord’s good pleasure)에 따라 무한히 다양하게 지각되기 때문인데요, 이런 게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If anyone could know how many arcana each particular verse contains, he would be amazed, for the number of arcana contained is past telling, and this is very little shown in the letter. To state the matter shortly: the words of the letter, exactly as they are, are vividly represented in the world of spirits, in a beautiful order. For the world of spirits is a world of representatives, and whatever is vividly represented there is perceived, in respect to the minute things contained in the representatives, by the angelic spirits who are in the second heaven; and the things thus perceived by the angelic spirits are perceived abundantly and fully in inexpressible angelic ideas by the angels who are in the third heaven, and this in boundless variety in accordance with the Lord’s good pleasure. Such is the Word of the Lord.  

 

※ 각 천국의 역량마다 감당할 수 있는 지혜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상 언어로 기록된 말씀 안에는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이 다 들어있지만, 지상에서 육체로 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지혜는 가장 낮은 등급인 요만큼인 반면, 사후 일층, 이층, 삼층천 천국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확장되고, 더욱 크게 초월적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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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4, AC.160-162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Verse 24.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 24절 속뜻

 

주님의 허락으로 천적 인간의 속 사람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즉 겉 사람과 함께 있게 되었는데, 같이 있는 그 둘의 모습이 마치 ‘한 몸을 이룬’ 것처럼 보였습니다.

 

 

160. 부모를 떠나(To leave father and mother)는 속 사람(the internal man)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인데요, (the external)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속(the internal)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여(to cleave unto his wife)는 속이 겉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to be one flesh)는 그들, 곧 겉과 속이 거기 같이 있는 것입니다. 전에는 속 사람과 속에서 나온 겉이 영이었지만(were spirit), 지금은 이 둘은 육이 되었기(have become flesh) 때문입니다. 그렇게 천적, 영적 생명은 하나처럼 보이는 본성(the own)에 인접해 있게 되었습니다. To “leave father and mother” is to recede from the internal man, for it is the internal whi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the external; to “cleave unto his wife” is that the internal may be in the external; to “be one flesh,” that they are there together;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161. 이들 태고교회의 후손은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는데요, 그렇지만 그들은 그러면서도 겉 사람 안, 즉 그들의 본성 가운데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님은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의 자비로 그런 그들 안으로 영적, 천적인 것들이 스며들듯 심어지면서 말입니다. 속과 겉이 어떻게 하나로 움직이는지, 어떻게 하나로 나타나는지 하는 건 이쪽에서 저쪽으로의 인플럭스(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入流)라는 걸 모르면 알 수 없는데요, 이걸 알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하나 생각해 보면, 어떤 행위에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즉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한,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일, 즉 신앙의 열매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 but was still good; 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 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what is spiritual celestial, however, being mercifully instilled therein.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 or how they appear as a one, 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 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 that is, love and faith, and in these the Lord, 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 or the fruit of faith.  

 

※ 주님, 사랑, 신앙은 속(the internal), 그것이 체어리티의 행위로 표현되는 건 겉(the external)이라는 뜻입니다.

 

 

162.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은 그 기원이 천적이거나(from celestial beginnings) 천적 인간의 생활 질서에(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있습니다. 천국 전체가 천적 인간이기 때문인데, 이는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모든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것 되시기 때문에, 그래서 이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을 천적이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이 천적 기원, 즉 천적 인간의 생활 질서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결혼의 법(the law of marriages) 역시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그렇습니다. 이는 지상의 모든 결혼이 그 기원을 두거나 따라야 하는 천적(혹은 천국적 heavenly) 결혼인데, 이는 한 분 주님과 하나의 천국, 즉 한 분 주님과 하나의 교회, 주님을 머리로 하는 하나의 교회가 있는 그런 결혼입니다. 여기서 비롯되는 결혼의 법은 한 남편과 한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럴 경우, 그 부부는 천적 결혼(the celestial marriage)을 표상하며, 천적 인간의 한 전형이 됩니다. 이 법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계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속 사람에게 새겨져 있었는데요, 그래서 그때는 한 남자는 한 명의 아내만 가졌고, 그렇게 그들은 한 가정을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속 사람 되기를 중단, 겉 사람이 되면서 그들은 여러 명의 아내와 결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결혼에 있어 천적 결혼을 표상했기 때문에,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가 그들에게 일종의 천국과 천국적 행복이었지만, 그 교회가 기울어졌을 때, 즉 쇠퇴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결혼애가 주는 행복 대신, 숫자, 곧 겉 사람의 쾌락인 숫자가 주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마음의 완악함(hardness of heart)이라 하셨는데요, 주님 친히 가르치시기를, 이것이 그들이 여러 명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모세로 하여금 허락하게 하신 이유라 하셨습니다. 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 flow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 and as he is the all in all of heaven and the celestial man, they are thence called celestial. As every law of truth and right descends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so in an especial manner does the law of marriages. It is the celestial (or heavenly) marriage from and according to which all marriages on earth must be derived; and this marriage is such that there is one Lord and one heaven, or one church whose head is the Lord. The law of marriages thence derived is that there shall be one husband and one wife, and when this is the case they represent the celestial marriage, and are an exemplar of the celestial man. This law was not only revealed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as also inscribed on their internal man, wherefore at that time a man had but one wife, and they constituted one house. But when their posterity ceased to be internal men, and became external, they married a plurality of wives. Becaus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ir marriages represented the celestial marriage, conjugial love was to them a kind of heaven and heavenly happiness, but when the church declined they had no longer any perception of happiness in conjugial love, but in pleasure from a number, which is a delight of the external man. This is called by the Lord “hardness of heart,” on account of which they were permitted by Moses to marry a plurality of wives, as the Lord himself teaches: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막10:5-9) For the hardness of your heart Moses wrote you this precept,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twain shall be one flesh; wherefore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 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t man put asunder. (Mark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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