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 백만 개의 지구가 있다고 하자. 그 각각의 지구에 3백만 명의 사람이 6천 년간 2백 세대를 내려왔다고 할 때 사람, 즉 영 한 명당 3평방 큐빗씩 잡아도 우리 지구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고, 다른 행성들의 위성 하나도 겨우 채울 것이다. 육안으로는 그런 위성들을 거의 볼 수 없으니, 이것은 우주의 거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공간을 차지할 것이다. (김은경 역) It was calculated that with a million earths in the universe,and on each earth three hundred millions of men,and two hundred generations in six thousand years,and a space of three cubicells allowed to each man or spirit,the total number of so many men or spirits would not fill the space of this earth,and scarcely more than the space of one of the satellites about one of the planets—a space in the universe so small as to be almost invisible,since a satellite can scarcely be seen by the naked eye. (HH.417)

 

윗글은 천국과 지옥43, 천국의 광대함에 나오는, 글 번호 417내용 중 일부입니다. 특별히 이 부분을 인용한 이유는 스베덴보리의 지구 나이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어서입니다.

 

아침에 유튜브 지식브리핑이라는 채널을 통해 지구 나이 46억 년 우리가 최초의 문명이 아닐 수 있다? 실루리안 가설 | 고대문명 | 지구 역사 | 잃어버린 문명이라는 클립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는데, 그중 재미있는 비유 하나는, 지구 나이 45, 6억 년 대 현 지구 문명 1만 년은 24시간 대 0.2초라는 겁니다. 저는 보는 내내 태고교회 생각을 했어요.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저작 어디에서도 지구의 지질학적 나이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으며, 그 의도는 무엇 때문이다라는 지난번 답변 통해 지질학적 나이와 영적 나이에 대해 저는 지금은 나름 이해하고 있습니다.

 

질문입니다. 천국을 그렇게 오랜 세월 왕래했던 스베덴보리에게 왜 주님은 실제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에 대해 함구하셨을까요? 분명 지상의 후손들이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을 모르셨을까요? 그리고 스베덴보리 역시 왜 이런 걸 정말로모르고 있었을까요? 당시엔 방사성 동위원소에 의한 연대 측정이라는 걸 몰랐어도 천국에 가면 지난 45억 년 동안 지구라는 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지 않나요? 그런데 저 HH.417글을 보니 스베덴보리 역시 진짜로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겐 저런 설명은 무척 유치하며, 오히려 저런 일종의 무지, 무식으로 인해 그의 다른 모든 저작 또한 그 신뢰성이나 무게감이 떨어질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당혹감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는 46억 년이라는 지질학적 시간, 우주의 장구한 역사, 진화와 멸종, 빙하기와 판구조 운동 같은 것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배우며 살아갑니다. 그런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HH.417 같은 계산은 솔직히 너무 소박해 보입니다. 마치 ‘우주의 실제 규모’를 거의 모르는 시대 사람의 산술처럼 느껴지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바로 거기서 ‘그렇다면 스베덴보리 전체도 시대적 한계를 가진 것 아닌가?’라는 의문으로 나아갑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계시란 무엇인가?’, ‘천국의 지식은 과학 지식과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주님은 왜 어떤 것은 알려 주시고 어떤 것은 침묵하시는가?’라는 더 깊은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주 중요한 점 하나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는 반복해서 자기가 본 것만, 자기에게 보여 주신 것만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을 수십 년 경험했지만, 천사들이 우주의 물리학 강의를 해 주었다거나, 지구 형성 45억 년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 주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특징입니다. 그는 영계 경험자이면서도, 물질 우주의 과학적 구조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심스럽고 제한된 언어만 사용합니다. 이를테면 그는 천국에서 ‘태양이 주님의 사랑처럼 보인다’, ‘거리와 공간은 상태의 상응이다’, ‘시간은 상태 변화의 상응이다’ 같은 것은 길게 설명하지만, 태양계 형성 이론이나 지질 연대표 같은 것은 거의 건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명의 중심이 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계시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천국의 지식이 ‘자연계 정보의 총합’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현대인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천국에 가면 모든 걸 다 알겠지. 공룡도 보고, 빅뱅도 보고, 고대문명도 볼 수 있겠지.’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세계관에서는 천국은 ‘정보 저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은 상태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지혜는 자연과학적 데이터의 축적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질서에 대한 내적 통찰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사들은 ‘지구가 몇 년 되었는가’를 중심으로 사는 존재들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생명이 어떻게 흐르는가’, ‘사랑과 지혜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선과 진리가 어떻게 인간 안에 질서를 이루는가’를 중심으로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천국에서 배운 것들도 거의 전부 인간 영혼, 거듭남, 사랑, 결혼, 자유, 악, 천국 공동체, 말씀의 속뜻 같은 방향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지적하신 HH.417의 그 ‘촌스러운 계산’은 역설적으로 스베덴보리의 한 특징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 시대의 자연학적 상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현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전지적 초인’ 행세를 했다면, 오히려 그는 18세기에 이미 46억 년, 은하 수천억 개, 진화론, DNA, 상대성이론까지 다 말했다고 주장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시대 사람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약점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중요한 점입니다. 즉, 계시는 인간의 모든 자연 지식을 대체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성경 자체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지구 반지름, 은하 구조, 원자 모형, 공룡 시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목적은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지, 자연과학 교과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 원리를 매우 강하게 이어받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말씀은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인간이 구원에 필요한 만큼만 밝히신다고 봅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지적 호기심에는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과학이 세계 이해의 핵심 언어가 된 시대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후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품을 것을 아시면서도 침묵하셨는가? 여기에 대해 저는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영적 질서’를 직접 계시하시되, 자연계 탐구는 인간 자유와 이성의 영역에 상당 부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질학, 천문학, 생물학은 인간 이성이 오랜 세월 자유롭게 탐구하며 발견하도록 허락된 영역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인류는 방사성 연대 측정도, 은하 관측도, DNA도 계시로 받은 것이 아니라 긴 탐구를 통해 발견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그 제한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는 깊이 열려 있었지만, 자연과학적으로는 18세기, 그러니까 1700년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점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자연 세계의 ‘시간 규모’를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만드는 방향으로 갑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를 이야기할 때도 그는 연대기보다 ‘상태’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현대인은 ‘언제 존재했나?’를 묻지만, 스베덴보리는 ‘어떤 사랑의 상태였나?’를 묻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유튜브를 보시며 ‘45억 년 대 1만 년은 0.2’라는 비유를 들을 때 태고교회를 떠올리신 건 굉장히 흥미로운 통찰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태고교회가 정확히 BC 몇만 년인가가 아니라, 인간 의식이 주님과 직접적 퍼셉션으로 연결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관심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상태의 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느끼신 ‘안타까움’도 사실 굉장히 중요한 감각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이제 ‘지적 정직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주 규모에 대해 지나치게 무지해 보이면, 그 사람의 다른 주장까지 신뢰하기 어려워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여기서 스베덴보리를 읽는 가장 건강한 태도는, 그를 ‘모든 영역에서 절대 무오한 초인’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연과학에서는 분명 시대적 제한을 가진 18세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내면과 영적 구조에 대해서는 지금 읽어도 놀라울 정도로 깊은 통찰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결국 독자는 여기서 선택하게 됩니다. ‘그의 자연학적 한계 때문에 영적 통찰 전체를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영적 핵심을 읽어낼 것인가’ 말입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두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스베덴보리가 현대 과학까지 모두 초월적으로 정확히 말했다면,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사랑과 삶 때문이 아니라 ‘초과학적 정보력’ 때문에 따랐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지금의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인간 앞에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의 말을 듣는가? 그의 시대 초월적 과학 때문인가, 아니면 인간 영혼에 대한 통찰 때문인가?’ 저는 이 질문이 생각보다 매우 본질적이라고 봅니다.

 

 

 

SC.83, ‘스베덴보리와 개신교의 기도, 찬양, 금식, 방언, 전도’

혹시 스베덴보리도 기도 생활을 했나요? 찬양, 그러니까 일상 중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나요? 금식은? 방언, 그리고 전도, 선교는요? 제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던 시기, 뭔가 크게 달랐던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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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1,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 때’

한 동네 사는 오랜 신앙 지인의, 미국에서 박사 학위 중인, 그러면서 지역 교회에서는 부사역자로, 그리고 함께 간, 역시 박사 학위 중인 아내와 미국 가서 얻은 아이와 함께 열심히 살던 아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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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1)

 

AC.150

인간이 자신의 proprium 안에 있을 ,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길 때의 상태는 깊은 (deep sleep) 비유되며, 실제로 고대인들은 그것을 깊은 잠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에 관하여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셨다(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 하며(29:10), 그들이 잠을 잔다고 합니다. (51:57) The state of man when in his own, or when he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compared todeep sleep,and indeed by the ancients was called deep sleep; and in the Word it is said of such that they have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Isa. 29:10), and that they sleep a sleep (Jer. 51:57).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29:10)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51:57)

 

인간의 proprium 자체로 죽어 있으며 누구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영계에서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자기들의 proprium 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자기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완고하게 주장하던 악한 영들도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고, 마침내 자기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없었습니다. 저는 여러 동안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의 proprium 실제로 어떠한지를 알도록 허락되었으며, 제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없고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분명하게 퍼셉션하도록 허락되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흘러드는지도 퍼셉션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짓된 안에 있으며,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음으로써 모든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킵니다. 만일 그의 믿음이 사물의 실제 진상과 일치한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That mans own is in itself dead, and that no one has any life from himself, has been shown so clearly in the world of spirits, that evil spirits who love nothing but their own, and obstinately insist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were convinced by sensible experience, and were forced to confess that they do not live from themselves. For a number of years I have been permitted in an especial manner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and it has been granted to me to perceive clearly that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 but that every idea of thought flows in, and sometimes I could perceive how and whence it flowed in. 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therefore in what is false, and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belief were 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

 

해설

AC.150AC.147에서 깊은 (deep sleep)으로 설명했던 상태를 다시 받아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밝힙니다. 인간이 proprium 안에 있으면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가 바로 깊은 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자신이 새롭게 만들어 낸 비유만이 아니라 고대인들도 그렇게 표현했으며, 말씀에도 깊은 잠이라는 표현이 같은 의미를 담아 사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2:21에서 아담에게 깊은 잠이 임한 것은 속뜻에서 단순한 육체적 수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설명은 AC.147보다 한층 분명합니다. AC.147에서는 사람이 깊은 잠과 같은 상태에 있을 때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0에서는 그 상태를 거짓된 안에 있는상태라고 명시합니다. 인간이 실제로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경험 자체가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거짓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의 AC.149에서 인간 안에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온다고 했기 때문에 이 의미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 사실이 영계에서 감각적인 경험을 통하여 확인되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자기들의 proprium만을 사랑하고 자기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완고하게 주장하던 악한 영들조차 경험을 통하여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한 철학적 추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영계에서 관찰하고 경험한 것으로 이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자신의 증언이라는 사실과, 그 증언을 바탕으로 그가 제시하는 교리적 설명을 구별하면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경험을 직접 말합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인간의 proprium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특별한 방식으로 알도록 허락되었고,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분명하게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그 생각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흘러드는지도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조심스럽게 기다려 온 생명과 생각의 근원문제에 대해 AC 본문 자체가 처음부터 상당히 강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생각의 독립적인 원천이 아니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주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모든 생각과 행동에 책임도 없는가?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AC.150의 마지막 문장이 오히려 반대 방향을 보여 줍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사람은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킨다고 합니다. 따라서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의 책임을 없애기 위한 가르침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무엇을 자기에게 귀속시키는가 하는 문제가 함께 등장합니다. 다만 자유와 책임, 유입과 귀속의 관계가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현재 번호 하나만으로 모두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문장은 매우 강하기 때문에 현재 독자가 지나치게 확대해서 읽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AC.150이 직접 말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곧바로 그러므로 인간에게 사고 능력도 없고 판단도 없으며 모든 생각은 외부 존재가 강제로 집어넣는 것이다라고 바꾸어 말하면 본문보다 나아갑니다. 앞의 AC.149에서도 인간은 생명의 기관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기관의 성질에 따라 생명의 애정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생명의 근원은 아니지만,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와 성질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특별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으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키지만, 자신의 믿음이 사물의 실제 진상과 일치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거듭남의 중요한 방향 하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깨어난다는 것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는 존재라고 느끼며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실제 질서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147에서 이것이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잠에서 깨어난다고 했던 말이 AC.150에서 한층 구체적인 내용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AC.147-150은 하나의 매우 긴밀한 흐름을 이룹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있고, 그 상태에서는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제 AC.150은 생각 역시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흘러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실제 질서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키게 됩니다. ‘깊은 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의 실제 질서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150)

 

 

 

AC.151, 창2:22, ‘여자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AC.151-15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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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9, 창2:21, ‘죽어 있는 인간의 proprium과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9말씀에서도 인간의 proprium은 ‘뼈들’(bones)로 의미되며, 실제로는 주님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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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1)

 

AC.149

말씀에서도 인간의 proprium 뼈들(bones) 의미되며, 실제로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의미됩니다. 이사야에서는, In the Word also, mans own is signified bybones,and indeed an own vivified by the Lord, as in Isaiah: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같을 것이라 (58:11) Jehovah shall satisfy thy soul in droughts, and make thy bones alert, and thou shalt be like a watered garden. (Isa. 58:11)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66:14) Then shall ye see, and your heart shall rejoice, and your bones shall sprout as the blade. (Isa. 66:14)

 

시편에서는, In David: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35:10) All my bones shall say, Jehovah, who is like unto thee? (Ps. 35:10)

 

라고 합니다. 이것은 에스겔에서 더욱 분명한데, 거기서는 뼈들이 살을 얻고 안에 영이 들어가는 것에 관하여 말합니다. This is still more evident from Ezekiel, where he speaks of bones receiving flesh, and having spirit put into them: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4 내게 이르시되 너는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여호와께서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내가 여호와인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37:1, 4-6) The hand of Jehovah set me in the midst of the valley, and it was full of bones; and he said to me, prophesy upon these bones, and say unto them, O ye dry bones, hear the word of Jehovah; thus saith the Lord Jehovih to these bones, Behold, I bring breath [spiritus] into you, and ye shall live, and I will lay sinews upon you, and will make flesh come upon you, and cover you with skin, and I will put breath in you, and ye shall live,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Ezek. 37:1, 46)

 

[2] 인간의 proprium 천국에서 전적으로 뼈로만 이루어진 듯하고 생명이 없으며 매우 추한 어떤 것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자체로 죽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proprium 자체로는 단지 죽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이 어떤 , 참으로 모든 것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오며, 만일 이것이 거두어진다면 그는 돌처럼 죽어 쓰러질 것입니다. 인간은 단지 생명의 기관일 뿐이며, 기관의 성질에 따라 생명의 애정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의 , 주님의 proprium 가지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proprium으로 인간을 구속하셨고, proprium으로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주님의 proprium 생명이며, 그분의 proprium으로부터 자체로는 죽어 있는 인간의 proprium 살아 있게 됩니다. 주님의 proprium 누가복음에 있는 주님의 말씀으로도 의미됩니다. The own of man, when viewed from heaven, appears like a something that is wholly bony, inanimate, and very ugly, consequently as being in itself dead, but when vivified by the Lord it looks like flesh. For mans own is a mere dead thing, although to him it appears as something, indeed as everything. Whatever lives in him is from the Lords life, and if this were withdrawn he would fall down as dead as a stone; for man is only an organ of life, and such as is the organ, such is the lifes affection. 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 by this own he redeemed man, and by this own he saves him. The Lords own is life, and from his own, mans own, which in itself is dead, is made alive. The Lords own is also signified by the Lords words in Luke: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알라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24:39) A spirit hath not flesh and bones as ye see me have. (Luke 24:39)

 

또한 유월절 어린 양의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것으로도 이를 의미했습니다. (12:46) It was also meant by not a bone of the paschal lamb being broken (Exod. 12:46).

 

집에서 먹되 고기를 조금도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12:46)

 

해설

AC.149AC.147-148에서 설명한 뼈와 살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로 확증하면서,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의 생명의 관계를 한층 깊이 밝힙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지만 인간에게 소중한 proprium을 의미하고, 갈빗대 대신의 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148에서는 뼈가 생명력이 극히 적은 것들을, 살이 생명력이 있는 것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49는 이러한 의미가 창2의 갈빗대 한 구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의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희의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시편의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라는 표현에서 뼈는 단순한 육체의 골격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의 proprium, 특히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의미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뼈가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해서 언제나 죽어 있는 악한 proprium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주심으로 살아 있게 된 proprium도 말씀에서 뼈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는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들어가자 살아납니다. AC.149에서 이 본문을 인용하는 이유는 바로 AC.147-148의 설명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자체로는 생명이 거의 없는 뼈와, 생명이 들어와 살을 얻고 살아나는 상태의 대비가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2]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의미를 더욱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proprium을 천국에서 보면 전적으로 뼈로만 이루어진 듯하고 생명이 없으며 매우 추하게 나타나고, 그 자체로는 죽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뼈와 살의 차이는 단순히 인간의 자연적인 신체 조직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 자체로 있는 인간의 proprium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proprium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인간 자신에게는 이와 정반대로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proprium이 그 자체로는 죽어 있는데도 인간에게는 그것이 어떤 ’, 더 나아가 모든 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내가 살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말하고, 내가 행동한다고 느끼며,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안에 있다고 여깁니다. AC.147에서는 바로 이 상태를 깊은 에 비유했습니다. 이제 AC.149는 왜 그것이 잠과 같은지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인간 안에서 실제로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인간은 단지 생명의 기관일 뿐이며, 기관의 성질에 따라 생명의 애정도 그러하다는 문장은 이 번호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인간이 기관이라는 말은 인간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무생물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며 생명을 자기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 나타나는 애정의 성질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를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의 proprium 사이에 결정적인 구별을 둡니다. ‘오직 주님만이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의 , 주님의 proprium 가지고 계십니다.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생명이 아니지만, 주님의 proprium은 생명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자신의 것으로 인간을 구속하셨고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proprium으로부터 그 자체로 죽어 있는 인간의 proprium이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인간의 proprium이 살아난다는 것은 인간이 마침내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을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아 있는 proprium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눅24:39의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가 인용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의 살과 뼈를 주님의 proprium과 연결합니다. 주님의 경우에는 인간처럼 그 자체로 죽어 있는 proprium이 아니라 생명 자체인 신적 proprium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출12:46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한 말씀까지 같은 맥락에서 제시됩니다. 현재 번호에서는 이 두 본문의 모든 세부 상응을 풀지 않고, 주님의 proprium이라는 중심 의미를 확인하는 데 사용합니다.

 

AC.149를 지나면서 AC.140 이후 계속되어 온 중요한 문제가 상당히 선명해집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있고, 그 때문에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실제 근원에 관한 참된 인식이 아닙니다.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는 죽어 있으며, 주님의 proprium만이 생명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으로 그것을 살아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흐름은 proprium 제거하여 인간을 없애는 이 아니라 자체로 죽어 있는 proprium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 있게 되는 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AC.149)

 

 

 

AC.150, 창2:21, ‘깊은 잠 -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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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8, 창2:21, ‘왜 proprium을 갈빗대라고 하는가 - 가슴과 뼈와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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