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22)

 

AC.152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여기에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깊은 아르카나가 함축되어 있음을 분별할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woman) 인간의 proprium 의미한다는 것은 속임을 당한 것이 여자였다는 사실에서 있습니다. 인간을 속이는 것은 오직 그의 proprium, 같은 말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It requires but little attention in anyone to discern that woman was not formed out of the rib of a man, and that deeper arcana are here implied than any person has heretofore been aware of. And that by thewomanis signified mans own may be known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 or what is the same,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만큼 탐스럽기도 나무인지라 여자가 열매를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3:1-6)

 

해설

AC.152는 먼저 창2:21-22의 갈빗대와 여자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직접적인 입장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실제로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별할 수 있으며, 이 말씀 안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152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하는 범위에서는 이 장면을 먼저 신체적으로 여성이 만들어진 과정을 기록한 사건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 상태에 관한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되어 온 해석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고, AC.148-149에서는 뼈와 살의 의미를 통해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직접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AC.152의 첫 문장은 갑자기 등장하는 주장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진 속뜻의 설명을 전제로 한 결론입니다. 문자에 나타난 갈빗대와 여자의 장면 안에 인간의 proprium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생명을 얻는가 하는 더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여자(woman)가 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는지를 창3의 이야기와 연결합니다. 그 근거는 속임을 당한 것이 여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2의 여자와 창3의 여자를 하나의 연속된 내적 의미 안에서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2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어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여자로 표현되었고, 이후 창3에서는 바로 그 여자가 속임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연결을 통해 여자가 proprium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속이는 것은 오직 그의 proprium, 같은 말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만 떼어 놓으면 proprium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며 언제나 악하다고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주님께서 proprium을 주시며, 그들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이 가장 참된 천적인 자체라고 했습니다. AC.151에서도 여자는 단순히 proprium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52의 마지막 문장을 앞의 설명들과 분리하여 proprium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속임을 당하는상태에 놓인 인간의 proprium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으려 할 때, proprium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proprium이 인간을 속입니다. 이것은 AC.146에서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도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고 한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에게 proprium이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무엇의 지배를 받는가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52는 창2와 창3 사이에 중요한 다리를 놓습니다. 2에서는 인간이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면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proprium을 그대로 죽어 있는 상태에 두지 않으시고 생명을 주어 인간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이 proprium이 이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쪽으로 기울게 되면, 3에서 여자가 뱀에게 속임을 당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창3의 타락 이야기는 창2와 단절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된 proprium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여자 = proprium이라는 표현 역시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51-15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렇게 설명하는 것은 현재 창2-3의 이 특정한 문맥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상응의 의미는 다루는 주제와 문맥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여자가 등장할 때마다 무조건 proprium으로 바꾸어 읽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현재 이 여자를 왜 proprium으로 해석하는지를 그 이야기의 연속성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AC.152는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창2 후반부의 해석을 창3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갈빗대와 여자는 인간 남녀의 기원에 관한 문자적 설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 관한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으며, 특히 여자가 속임을 당한다는 다음 장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동시에 앞 번호들을 함께 읽으면 proprium 자체를 악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되고,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기울어 인간을 속이는 proprium을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게 됩니다. (AC.152)

 

 

 

AC.153, 창2:22, ‘짓다 -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3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하지만, 앞에서 거듭남을 다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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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1, 창2:22, ‘여자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AC.151-15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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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22)

 

AC.151

짓는 (build)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하고, 갈빗대(rib)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 여자(woman)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 의미하며, 여자를 사람에게로 이끌어 오신 (he brought her to the man) 그의 proprium 그에게 허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천적 인간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proprium으로 기울었고, 그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었으며, 그러므로 여자(woman) 하고, 뒤에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By tobuildis signified to raise up what has fallen; by therib,mans own not vivified; by awoman,mans own vivified by the Lord; byhe brought her to the man,that what is his own was granted him. The posterity of this church did not wish, like their parents, to be a celestial man, but to be under their own self-guidance; and, thus inclining to their own, it was granted to them, but still an own vivified by the Lord, and therefore called awoman,and afterwards awife.

 

해설

AC.151은 창2: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는 말씀의 주요 표현들을 하나씩 풀이하면서, AC.131부터 이어져 온 proprium의 논의를 중요한 지점까지 정리합니다. 특히 이제 갈빗대여자의 차이가 명확하게 제시됩니다. 갈빗대는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입니다.

 

먼저 짓는 (build)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여자를 지으신다는 것은 속뜻에서 전혀 없던 어떤 독립적인 proprium을 새로 만들어 인간에게 붙여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의 인도를 원하며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 있는 인간을 그대로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짓는다는 것은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의미를 가집니다.

 

갈빗대(rib)AC.147-149에서 설명한 것처럼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는 이것이 매우 소중하고 심지어 모든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AC.149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이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뼈처럼 보이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갈빗대에서 여자가 지어지는 장면은 그 자체로 죽어 있는 proprium이 그대로 존속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로 생명을 얻는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여자(woman)는 이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이 대목은 앞의 AC.138을 읽을 때 우리가 조심스럽게 유보했던 부분을 본문 자체가 확정해 줍니다. AC.138에서는 그를 돕는 배필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고 뒤에서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라고 한다는 정도까지만 설명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때에는 여자를 문맥과 관계없이 언제나 proprium을 뜻하는 고정된 상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AC.151에 이르러서야 현재 창2:22의 문맥에서 여자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직접 밝혀집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입니다.

 

여자를 사람에게로 이끌어 오신 (he brought her to the man)은 그의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 역시 AC.132 이후 반복되어 온 허락된 proprium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욕구 자체를 인간 안에 악으로 주입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원하는 proprium을 그 자체로 죽어 있는 상태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proprium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둘째 문단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역사적·교회적 배경을 다시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사람들은 태고교회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조상들처럼 천적 인간이 되어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이 욕구 때문에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기울어진 상태에서조차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지만, 그것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었습니다. 이 점이 창2의 이 장면을 단순한 타락의 묘사로만 읽을 수 없게 합니다.

 

여기서 AC.147깊은 도 다시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기며, 자기에게 속한 것을 가진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AC.149-150에서 밝혀졌듯 실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제 AC.151은 인간이 원했던 바로 그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어 그에게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역사는 인간에게 자기 경험을 빼앗아 자기 자신이 없는 존재로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자기 것으로 경험하는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을 여자(woman)라 하고 뒤에는 아내(wife)라고 한다고 말합니다. 현재 번호에서는 아직 여자아내라는 두 표현 사이의 차이를 자세히 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 차이에 별도의 의미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문맥의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이며, proprium이 인간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설명에서 이 여자가 사람과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가 더 밝혀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51)

 

 

 

AC.152, 창2:22, ‘여자가 proprium을 의미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2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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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 창2:21, ‘깊은 잠 -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50인간이 자신의 proprium 안에 있을 때, 곧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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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백만 개의 지구가 있다고 하자. 그 각각의 지구에 3백만 명의 사람이 6천 년간 2백 세대를 내려왔다고 할 때 사람, 즉 영 한 명당 3평방 큐빗씩 잡아도 우리 지구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고, 다른 행성들의 위성 하나도 겨우 채울 것이다. 육안으로는 그런 위성들을 거의 볼 수 없으니, 이것은 우주의 거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공간을 차지할 것이다. (김은경 역) It was calculated that with a million earths in the universe,and on each earth three hundred millions of men,and two hundred generations in six thousand years,and a space of three cubicells allowed to each man or spirit,the total number of so many men or spirits would not fill the space of this earth,and scarcely more than the space of one of the satellites about one of the planets—a space in the universe so small as to be almost invisible,since a satellite can scarcely be seen by the naked eye. (HH.417)

 

윗글은 천국과 지옥43, 천국의 광대함에 나오는, 글 번호 417내용 중 일부입니다. 특별히 이 부분을 인용한 이유는 스베덴보리의 지구 나이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어서입니다.

 

아침에 유튜브 지식브리핑이라는 채널을 통해 지구 나이 46억 년 우리가 최초의 문명이 아닐 수 있다? 실루리안 가설 | 고대문명 | 지구 역사 | 잃어버린 문명이라는 클립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는데, 그중 재미있는 비유 하나는, 지구 나이 45, 6억 년 대 현 지구 문명 1만 년은 24시간 대 0.2초라는 겁니다. 저는 보는 내내 태고교회 생각을 했어요.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저작 어디에서도 지구의 지질학적 나이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으며, 그 의도는 무엇 때문이다라는 지난번 답변 통해 지질학적 나이와 영적 나이에 대해 저는 지금은 나름 이해하고 있습니다.

 

질문입니다. 천국을 그렇게 오랜 세월 왕래했던 스베덴보리에게 왜 주님은 실제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에 대해 함구하셨을까요? 분명 지상의 후손들이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을 모르셨을까요? 그리고 스베덴보리 역시 왜 이런 걸 정말로모르고 있었을까요? 당시엔 방사성 동위원소에 의한 연대 측정이라는 걸 몰랐어도 천국에 가면 지난 45억 년 동안 지구라는 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지 않나요? 그런데 저 HH.417글을 보니 스베덴보리 역시 진짜로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겐 저런 설명은 무척 유치하며, 오히려 저런 일종의 무지, 무식으로 인해 그의 다른 모든 저작 또한 그 신뢰성이나 무게감이 떨어질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당혹감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는 46억 년이라는 지질학적 시간, 우주의 장구한 역사, 진화와 멸종, 빙하기와 판구조 운동 같은 것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배우며 살아갑니다. 그런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HH.417 같은 계산은 솔직히 너무 소박해 보입니다. 마치 ‘우주의 실제 규모’를 거의 모르는 시대 사람의 산술처럼 느껴지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바로 거기서 ‘그렇다면 스베덴보리 전체도 시대적 한계를 가진 것 아닌가?’라는 의문으로 나아갑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계시란 무엇인가?’, ‘천국의 지식은 과학 지식과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주님은 왜 어떤 것은 알려 주시고 어떤 것은 침묵하시는가?’라는 더 깊은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주 중요한 점 하나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는 반복해서 자기가 본 것만, 자기에게 보여 주신 것만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을 수십 년 경험했지만, 천사들이 우주의 물리학 강의를 해 주었다거나, 지구 형성 45억 년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 주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특징입니다. 그는 영계 경험자이면서도, 물질 우주의 과학적 구조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심스럽고 제한된 언어만 사용합니다. 이를테면 그는 천국에서 ‘태양이 주님의 사랑처럼 보인다’, ‘거리와 공간은 상태의 상응이다’, ‘시간은 상태 변화의 상응이다’ 같은 것은 길게 설명하지만, 태양계 형성 이론이나 지질 연대표 같은 것은 거의 건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명의 중심이 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계시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천국의 지식이 ‘자연계 정보의 총합’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현대인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천국에 가면 모든 걸 다 알겠지. 공룡도 보고, 빅뱅도 보고, 고대문명도 볼 수 있겠지.’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세계관에서는 천국은 ‘정보 저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은 상태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지혜는 자연과학적 데이터의 축적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질서에 대한 내적 통찰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사들은 ‘지구가 몇 년 되었는가’를 중심으로 사는 존재들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생명이 어떻게 흐르는가’, ‘사랑과 지혜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선과 진리가 어떻게 인간 안에 질서를 이루는가’를 중심으로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천국에서 배운 것들도 거의 전부 인간 영혼, 거듭남, 사랑, 결혼, 자유, 악, 천국 공동체, 말씀의 속뜻 같은 방향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지적하신 HH.417의 그 ‘촌스러운 계산’은 역설적으로 스베덴보리의 한 특징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 시대의 자연학적 상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현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전지적 초인’ 행세를 했다면, 오히려 그는 18세기에 이미 46억 년, 은하 수천억 개, 진화론, DNA, 상대성이론까지 다 말했다고 주장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시대 사람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약점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중요한 점입니다. 즉, 계시는 인간의 모든 자연 지식을 대체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성경 자체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지구 반지름, 은하 구조, 원자 모형, 공룡 시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목적은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지, 자연과학 교과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 원리를 매우 강하게 이어받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말씀은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인간이 구원에 필요한 만큼만 밝히신다고 봅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지적 호기심에는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과학이 세계 이해의 핵심 언어가 된 시대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후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품을 것을 아시면서도 침묵하셨는가? 여기에 대해 저는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영적 질서’를 직접 계시하시되, 자연계 탐구는 인간 자유와 이성의 영역에 상당 부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질학, 천문학, 생물학은 인간 이성이 오랜 세월 자유롭게 탐구하며 발견하도록 허락된 영역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인류는 방사성 연대 측정도, 은하 관측도, DNA도 계시로 받은 것이 아니라 긴 탐구를 통해 발견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그 제한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는 깊이 열려 있었지만, 자연과학적으로는 18세기, 그러니까 1700년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점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자연 세계의 ‘시간 규모’를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만드는 방향으로 갑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를 이야기할 때도 그는 연대기보다 ‘상태’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현대인은 ‘언제 존재했나?’를 묻지만, 스베덴보리는 ‘어떤 사랑의 상태였나?’를 묻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유튜브를 보시며 ‘45억 년 대 1만 년은 0.2’라는 비유를 들을 때 태고교회를 떠올리신 건 굉장히 흥미로운 통찰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태고교회가 정확히 BC 몇만 년인가가 아니라, 인간 의식이 주님과 직접적 퍼셉션으로 연결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관심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상태의 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느끼신 ‘안타까움’도 사실 굉장히 중요한 감각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이제 ‘지적 정직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주 규모에 대해 지나치게 무지해 보이면, 그 사람의 다른 주장까지 신뢰하기 어려워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여기서 스베덴보리를 읽는 가장 건강한 태도는, 그를 ‘모든 영역에서 절대 무오한 초인’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연과학에서는 분명 시대적 제한을 가진 18세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내면과 영적 구조에 대해서는 지금 읽어도 놀라울 정도로 깊은 통찰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결국 독자는 여기서 선택하게 됩니다. ‘그의 자연학적 한계 때문에 영적 통찰 전체를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영적 핵심을 읽어낼 것인가’ 말입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두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스베덴보리가 현대 과학까지 모두 초월적으로 정확히 말했다면,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사랑과 삶 때문이 아니라 ‘초과학적 정보력’ 때문에 따랐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지금의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인간 앞에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의 말을 듣는가? 그의 시대 초월적 과학 때문인가, 아니면 인간 영혼에 대한 통찰 때문인가?’ 저는 이 질문이 생각보다 매우 본질적이라고 봅니다.

 

 

 

SC.83, ‘스베덴보리와 개신교의 기도, 찬양, 금식, 방언, 전도’

혹시 스베덴보리도 기도 생활을 했나요? 찬양, 그러니까 일상 중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나요? 금식은? 방언, 그리고 전도, 선교는요? 제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던 시기, 뭔가 크게 달랐던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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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1,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 때’

한 동네 사는 오랜 신앙 지인의, 미국에서 박사 학위 중인, 그러면서 지역 교회에서는 부사역자로, 그리고 함께 간, 역시 박사 학위 중인 아내와 미국 가서 얻은 아이와 함께 열심히 살던 아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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