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22)

 

AC.154

악하고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proprium 아니거나 인간의 proprium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란 있을 없습니다. 인간의 proprium 자체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체로는 악과 거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인간의 proprium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보이도록 제시될 , 추한 것은 묘사할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통해 제게 분명해졌습니다. 다만 모습은 proprium 성질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proprium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도록 제시되는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달아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 속한 것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나며,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실제로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을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며,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그들은 가슴을 두른 화환과 머리 위의 관으로 다양하게 단장하고, 다이아몬드 같은 기운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Nothing evil and false is ever possible which is 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This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en the things of mans own are 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they appear so deformed that it is impossible to depict anything more ugly, 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so that he to whom the things of the own are visibly exhibited is struck with horror, and desires to flee from himself as from a devil. But 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 appear beautiful and lovely, with variety according to the life to which the celestial of the Lord can be applied; and indeed 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 appear like boys and girls with most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 variously adorned with garlands of flowers encircling their bosoms, and diadems upon their heads, 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and having 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

 

해설

AC.154는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강한 표현으로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얼마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대조합니다. 첫 문장만 보면 인간의 proprium 자체이며 인간은 악과 거짓일 이라는 선언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번호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후반부에서는 바로 그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154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 두 상태를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며,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0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사람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킨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살려고 할 때, proprium에서는 선과 진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AC.149-150에서 이미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proprium의 악은 단순히 인간이 개별적으로 몇 가지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정도보다 훨씬 근원적인 문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다시 자신의 영계 경험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날 때에는 더 추한 것을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보이며, 그것을 자기 앞에서 보게 된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도망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모습이 모두 똑같다고 하지 않고 proprium 성질에 따라서로 다르게 나타난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proprium은 획일적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그러나AC.154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은 앞의 흉측한 모습과 정반대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여자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던 설명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인간을 proprium 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proprium을 생명 있게 하신다는 지금까지의 흐름이 여기서 다시 확인됩니다.

 

이 때문에 AC.154AC.141과 함께 읽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으며,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은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므로 가장 참된 천적인 자체라고 했습니다. 반면 AC.154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라고 합니다. 두 문장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AC.154 자체가 그 구별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것으로서의 proprium은 악하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언제나 동일한 영적 성질을 가진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proprium인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인지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후반부의 모습들은 이러한 차이를 영계의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의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고,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꽃 화환과 관으로 단장한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에서의 실제 나이나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의 성질입니다. 앞에서는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그 흉측함이 달라진다고 했고, 여기서는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아름다움도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영계에서 외적인 모습이 내적인 생명의 성질을 드러낸다는 설명이 이 대조 안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은 현재 문맥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AC.148에서는 가슴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했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것을 생명 없는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54에서는 체어리티를 부여받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proprium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점차 구체적인 내용을 얻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아직 체어리티와 proprium의 관계에 관한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기보다 이후의 설명을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상태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적인 모습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앞부분의 죽음과 추함, 뒷부분의 생명과 아름다움과 행복은 서로 대응되는 대조를 이룹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proprium 안에 갇혀 있을 때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 있을 때의 차이가 영계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국 AC.154proprium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한쪽으로 단순화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인간의 proprium 자체라는 문장은 분명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동시에 같은 번호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말한다는 사실도 똑같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워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인간의 proprium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살아 있게 하시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이 AC.141에서 시작하여 AC.147-154를 거치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는 proprium의 중요한 아르카나입니다. (AC.154)

 

 

 

AC.155, 창2:22, ‘주님의 신부와 아내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5‘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a rib was built into a woman)는 말씀에는 누구도 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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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3, 창2:22, ‘짓다 -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3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하지만, 앞에서 거듭남을 다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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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22)

 

AC.153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 하지만, 앞에서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여자가 창조되었다(created), 형성되었다(formed), 또는 만들어졌다(made) 하지는 않습니다. 이유는 짓는 (build)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말이 말씀에서 사용되는데, 거기서 짓는 (build) 악들에 관하여, 일으켜 세우는 (raise up) 거짓들에 관하여, 새롭게 하는 (renew) 모두에 관하여 사용됩니다. 이사야에서는, The rib is said to bebuilt into a woman,but it is not said that the woman wascreated,orformed,ormade,as before when treating of regeneration. The reason of this is that tobuildis to raise up that which has fallen; and in this sense it is used in the Word, where tobuildis predicated of evils; toraise up,of falsities; and torenew,of both; as in Isaiah: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61:4) They shall build the wastes of eternity, they shall set up again the ancient desolations, and they shall renew the cities of the waste, 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Isa. 61:4)

 

라고 합니다. 구절과 다른 구절들에서 황폐한 곳들(Wastes) 악들을 의미하고, 무너진 곳들(desolations)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짓는 (build) 전자에 적용되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set up again) 후자에 적용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다른 곳에서도 선지자들에 의해 주의 깊게 지켜지는데,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경우가 그러합니다. Wastesin this and other passages signify evils; desolations,falsities; tobuildis applied to the former, toset up againto the latter, and this distinction is carefully observed in other places by the prophets, as where it is said in Jeremiah: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31:4) Yet still will I build thee, and thou shall be built, O virgin of Israel. (Jer. 31:4)

 

해설

AC.153은 창2:22에서 왜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표현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먼저 주목하는 것은 동사의 선택입니다. 앞에서 인간의 거듭남을 설명할 때에는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표현들이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여자가 그렇게 되었다고 하지 않고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우연한 표현상의 변화로 보지 않고, 현재 다루는 인간의 상태와 관련된 의미 있는 구별로 읽습니다.

 

그 이유는 짓는 (build)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이미 짧게 제시되었지만, AC.153에서 그 근거가 본격적으로 설명됩니다. 지금 다루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천적 인간으로 형성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조상들의 천적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고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따라서 현재 필요한 것은 처음의 창조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넘어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짓다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한 것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갈빗대는 생명을 얻지 못한 proprium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입니다. 따라서 갈빗대를 여자로 짓는 은 인간이 원했던 proprium을 주님께서 그대로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울어진 상태에 있는 것을 일으켜 세워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짓다라는 한 동사가 지금까지의 proprium 논의와 연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말씀의 선지서에서 사용되는 동사들을 더욱 세밀하게 구별합니다. ‘짓는 (build)은 악들에 관하여 사용되고, ‘일으켜 세우는 (raise up)은 거짓들에 관하여 사용되며, ‘새롭게 하는 (renew)은 악과 거짓 모두에 관하여 사용된다고 합니다. 이사야 61장의 황폐한 곳들무너진 곳들을 인용하는 이유도 이 구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황폐한 곳들은 악들을 의미하고 무너진 곳들은 거짓들을 의미하며, 전자에는 짓다, 후자에는 다시 일으켜 세우다가 적용됩니다.

 

여기서는 이 구별을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비슷한 동사들을 우리가 임의로 나누어 각각 다른 속뜻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이 이러한 구별을 주의 깊게지켰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현재 본문에서는 짓다’, ‘일으켜 세우다’, ‘새롭게 하다를 비슷한 뜻의 수사적 반복으로만 보지 않고, 각각 악과 거짓의 회복에 관련된 구별된 표현으로 읽어야 합니다. 동시에 이것을 근거로 말씀에 나오는 모든 동사의 동의어적 차이에 우리가 임의의 상응을 만들어 붙여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는 AC.153이 직접 밝힌 범위가 기준입니다.

 

31:4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라는 말씀은 짓다의 의미를 다시 확증합니다. 이미 무너진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시는 장면에서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따라서 창2:22짓다역시 단순히 무엇인가를 제작한다는 뜻보다, 이미 기울어지고 넘어진 것을 주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다루는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와 잘 맞습니다.

 

AC.153은 또한 창2 후반부를 단순한 proprium 획득으로만 읽지 않게 해 줍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여 proprium으로 기울었다는 것만 본다면 이 과정은 타락의 시작으로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는 표현 안에는 이미 그 상태를 향한 주님의 회복의 역사도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기울어졌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생명 없는 proprium을 생명을 얻은 proprium으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장면에는 인간의 기울어짐과 주님의 회복하시는 역사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다만 짓는 이 악들에 관하여 사용된다는 말을 주님께서 악을 지으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문맥에서 짓는다는 것은 이미 악으로 인해 황폐해지고 넘어진 것을 다시 세우는 데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61:4와 렘31:4의 인용도 바로 그 회복의 문맥입니다. 따라서 이 동사는 악의 발생을 주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 무너진 상태를 다시 일으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갈빗대를 여자로 짓는다는 표현을 이해할 때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점입니다. (AC.153)

 

 

 

AC.154, 창2:22, ‘악 자체인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4악하고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proprium이 아니거나 인간의 proprium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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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2, 창2:22, ‘여자가 proprium을 의미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2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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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22)

 

AC.152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여기에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깊은 아르카나가 함축되어 있음을 분별할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woman) 인간의 proprium 의미한다는 것은 속임을 당한 것이 여자였다는 사실에서 있습니다. 인간을 속이는 것은 오직 그의 proprium, 같은 말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It requires but little attention in anyone to discern that woman was not formed out of the rib of a man, and that deeper arcana are here implied than any person has heretofore been aware of. And that by thewomanis signified mans own may be known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 or what is the same,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만큼 탐스럽기도 나무인지라 여자가 열매를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3:1-6)

 

해설

AC.152는 먼저 창2:21-22의 갈빗대와 여자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직접적인 입장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실제로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별할 수 있으며, 이 말씀 안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152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하는 범위에서는 이 장면을 먼저 신체적으로 여성이 만들어진 과정을 기록한 사건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 상태에 관한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되어 온 해석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고, AC.148-149에서는 뼈와 살의 의미를 통해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직접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AC.152의 첫 문장은 갑자기 등장하는 주장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진 속뜻의 설명을 전제로 한 결론입니다. 문자에 나타난 갈빗대와 여자의 장면 안에 인간의 proprium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생명을 얻는가 하는 더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여자(woman)가 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는지를 창3의 이야기와 연결합니다. 그 근거는 속임을 당한 것이 여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2의 여자와 창3의 여자를 하나의 연속된 내적 의미 안에서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2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어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여자로 표현되었고, 이후 창3에서는 바로 그 여자가 속임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연결을 통해 여자가 proprium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속이는 것은 오직 그의 proprium, 같은 말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만 떼어 놓으면 proprium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며 언제나 악하다고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주님께서 proprium을 주시며, 그들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이 가장 참된 천적인 자체라고 했습니다. AC.151에서도 여자는 단순히 proprium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52의 마지막 문장을 앞의 설명들과 분리하여 proprium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속임을 당하는상태에 놓인 인간의 proprium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으려 할 때, proprium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proprium이 인간을 속입니다. 이것은 AC.146에서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도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고 한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에게 proprium이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무엇의 지배를 받는가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52는 창2와 창3 사이에 중요한 다리를 놓습니다. 2에서는 인간이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면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proprium을 그대로 죽어 있는 상태에 두지 않으시고 생명을 주어 인간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이 proprium이 이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쪽으로 기울게 되면, 3에서 여자가 뱀에게 속임을 당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창3의 타락 이야기는 창2와 단절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된 proprium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여자 = proprium이라는 표현 역시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51-15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렇게 설명하는 것은 현재 창2-3의 이 특정한 문맥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상응의 의미는 다루는 주제와 문맥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여자가 등장할 때마다 무조건 proprium으로 바꾸어 읽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현재 이 여자를 왜 proprium으로 해석하는지를 그 이야기의 연속성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AC.152는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창2 후반부의 해석을 창3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갈빗대와 여자는 인간 남녀의 기원에 관한 문자적 설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 관한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으며, 특히 여자가 속임을 당한다는 다음 장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동시에 앞 번호들을 함께 읽으면 proprium 자체를 악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되고,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기울어 인간을 속이는 proprium을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게 됩니다. (AC.152)

 

 

 

AC.153, 창2:22, ‘짓다 -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3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하지만, 앞에서 거듭남을 다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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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1, 창2:22, ‘여자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AC.151-15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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