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2:10)

 

AC.108

태고인들은 사람을 동산(garden) 비유할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도 강들(rivers) 비유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렇게 비유하기만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불렀는데, 이것이 그들의 말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선지서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때로는 그것들을 그렇게 비유하기도 하고 때로는 실제로 그렇게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when comparing man to agarden,also compared wisdom, and the things relating to wisdom, torivers”; nor did they merely compare them, but actually so called them, for such was their way of speaking. It was the same afterwards in the prophets, who sometimes compared them, and sometimes called them so. As in Isaiah:

 

10주린 자에게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어둠이 낮과 같이 것이며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같을 것이라 (58:10, 11) Thy light shall arise in darkness, and thy thick darkness shall be as the light of day, and thou shalt be like a watered garden, and like an outlet of waters, whose waters lie not (Isa. 58:1011).

 

이는 신앙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다룬 말씀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reating of those who receive faith and love. Again, speaking of the regenerate: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2) 같고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24:6) As the valleys are they planted, as gardens by the rivers side; as lignaloes2 which Jehovah hath planted, as cedar trees beside the waters (Num. 24:6).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Jeremiah:

 

7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17:7, 8) Blessed is the man who trusteth in Jehovah; he shall be as a tree planted by the waters, and that sendeth forth her roots by the river (Jer. 17:78).

 

에스겔에서는 거듭난 사람들을 동산과 나무에 비유하는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렇게 부릅니다. In Ezekiel the regenerate are not compared to a garden and a tree, but are so called: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7 뿌리가 물가에 있으므로 나무가 크고 가지가 길어 모양이 아름다우매 8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하며 잣나무가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어떤 나무도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9내가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시기하였느니라 (31:4, 7-9) The waters made her to grow, the deep of waters uplifted her, the river ran round about her plant, and sent out its channels to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e was made beautiful in her greatness, in the length of her branches, for her root was by many waters. The cedars in the garden of God did not hide her; the fir trees were not like her boughs, and the plane trees were not like her branches, nor was any tree in the garden of God equal to her in her beauty; I have made her beautiful by the multitude of her branches, and all the trees of Eden that were in the garden of God envied her (Ezek. 31:4, 79).

 

구절들에서 분명한 것은, 태고인들이 사람 또는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을 동산(garden) 비유할 그를 적셔 (waters) 강들(rivers) 덧붙였으며, 물과 강들로 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들을 의미했다는 것입니다. From these passages it is evident that when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man, or the things in man, to agarden,they added thewatersandriversby which he might be watered, and by these waters and rivers meant such things as would cause his growth.

 

2. 라틴 tentoria, 텐트(tents), 얼핏 santalos 대한 미스프린트 같음 [편집자 ] The Latin is tentoria, “tents,seemingly a misprint for santalos. [Reviser]

 

해설

AC.108은 앞의 AC.107에서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의미한다고 한 것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보여 줍니다. 태고인들은 사람을 동산에 비유했고, 그 사람을 살아 있게 하고 자라게 하는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물과 강에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단순한 문학적 비유만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태고인들은 실제로 이러한 방식으로 말했으며, 그들의 이러한 말하는 방식이 이후 선지서에도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 설명은 태고교회의 언어가 오늘날의 언어와 상당히 달랐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떤 사람을 동산이나 강가에 심은 나무라고 하면 대개 아름다운 시적 표현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태고인들에게 이러한 자연의 형상들은 사람 안의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동산이라고 하고, 그를 자라게 하는 것을 물과 강이라고 말하는 것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그들이 내적인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동산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은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신앙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다룬다고 합니다. 흑암 가운데 빛이 떠오르고 메마른 상태가 물 댄 동산과 같이 되는 모습은 사람 안에 생명이 공급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산이 스스로를 적시는 것이 아니라 물을 공급받는다는 점입니다. 앞의 AC.107에서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가 지성을 준다고 한 것처럼, 사람 안의 영적 생명도 그 사람 자신을 근원으로 삼아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생명입니다.

 

24:6과 렘17:7-8에서도 같은 모습이 이어집니다. 거듭난 사람은 강가의 동산과 같고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으며, 그 뿌리를 강변에 뻗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인용하는 까닭은 단순히 성경에 동산과 강이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물과 강은 동산과 나무가 자라도록 하는 것들과 관계되며, 속뜻에서는 사람이 거듭나고 그의 내적 생명이 성장하도록 하는 것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물가에 심어진 나무의 모습은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고 계속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에스겔의 말씀에서는 이 점이 더욱 뚜렷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거듭난 사람들이 동산과 나무에 단지 비유되는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불린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물이 나무를 자라게 하고, 강과 수로가 들의 나무들에게 흘러가며, 뿌리가 많은 물가에 있기 때문에 나무가 크고 아름다워집니다. 이것은 AC.107에서 강이 동산을 적시는 것이 지성을 주는 것이라고 한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물과 강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것들을 살아 있게 하고 성장시키는 것들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AC.108에서는 아직 물과 강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세부적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장도 물과 강이 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들을 의미한다고 정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물은 언제나 이것을 의미하고 강은 언제나 저것을 의미한다고 고정하기보다, 현재의 문맥에서 그것들이 사람의 영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과 관계된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바로 앞 AC.103에서 같은 표현의 의미도 현재 무엇을 다루고 있는가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고 했으므로, AC.108의 여러 표상 역시 그 원칙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AC.108은 창2의 에덴동산이 단지 한 장소의 묘사가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생명과 그 성장을 표현하고 있음을 말씀 전체의 언어를 통해 확인해 줍니다. 사람이 동산이라면 그 동산은 물을 받아야 하고, 나무가 자라려면 그 뿌리가 물가에 있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사야와 민수기와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함께 인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말씀의 표현 방식이 창2에만 고립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구절을 관통하는 핵심은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거듭나고 성장한다는 데 있습니다. (AC.108)

 

 

 

AC.109, 창2:10, ‘지혜와 지성은 사람 안에 나타나지만 오직 주님의 것이다’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9지혜와 지성이 사람 안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들은 오직 주님의 것이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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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7, 창2:10,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 -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가 지성을 주다’ (AC.107-109)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창2:10) AC.107‘에덴에서 흘러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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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2:10)

 

AC.107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river out of Eden)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에덴(Eden)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동산을 적신다(to water the garden) 것은 지성을 주는 것이며, 거기서 갈라져 근원이 되었다(thence parted into four heads) 것은 다음에 나오는 강을 통하여 지성을 묘사한 것입니다. Ariver out of Edensignifies wisdom from love, forEdenis love; “to water the gardenis to bestow intelligence; to bethence parted into four headsis a description of intelligence by means of the four rivers, as follows.

 

해설

AC.107은 창2:10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근원이 되었으니를 해설하기 시작합니다. 앞에서는 에덴이 사랑을, 동산이 지성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이제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움직임으로 묘사됩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는 것은 사랑에서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지성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에덴과 동산과 강은 서로 떨어진 세 표상이 아니라 천적 인간 안에서 사랑으로부터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 생명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특히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지혜의 근원이 사랑에 있다는 것은 앞에서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질서와 이어집니다. AC.99에서는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고, AC.105에서는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07에서는 그 사랑에서 지혜가 나온다고 합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는 자기 자신의 지적 능력만으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지혜입니다.

 

이어 동산을 적신다는 것은 지성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동산은 앞의 AC.98AC.100에서 설명된 지성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강이 동산을 적시는 모습은 지성이 스스로 독립하여 생명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통하여 생명을 공급받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자연의 동산이 물을 공급받아 살아나듯이, 이 구절의 속뜻에서는 지성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통하여 살아 있게 됩니다. 다만 이러한 자연적 모습 자체에서 상응의 의미를 임의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의미와 문맥을 따라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지성이 함께 등장한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강을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라고 하고, 그 강이 동산을 적시는 것을 지성을 주는 이라고 구별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AC.107은 아직 지혜와 지성의 차이를 별도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단계에서 두 개념의 관계를 지나치게 세밀하게 규정하기보다,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가 지성을 주는 질서가 제시되고 있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어지는 네 강의 설명을 통하여 이 관계가 더 구체적으로 밝혀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거기서 갈라져 근원이 되었다는 부분도 아직 결론을 앞당겨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이 네 강을 통하여 지성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밝히면서 곧바로 다음과 같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107은 네 강 각각의 의미를 미리 설명하는 번호가 아니라 그 설명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줍니다. 네 강이 지성의 어떤 것들을 나타내는지는 뒤따르는 번호들을 읽으면서 하나씩 확인해야 합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보면 AC.107은 앞의 에덴동산 해설을 한 단계 더 전진시킵니다. 에덴은 사랑이고 동산은 지성이라는 의미를 각각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2:10은 사랑에서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지성을 주는 생명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이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퍼셉션으로 지각한다고 했던 것처럼, 여기에서도 사랑과 지혜와 지성은 인간 자신을 근원으로 삼는 독립된 능력들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질서 있게 받아들여지는 모습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107의 핵심은 에덴동산의 표상들이 이제 서로 관계를 맺으며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서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지성을 주며, 이어 그 지성이 네 강을 통하여 더 자세히 묘사될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아직 네 강의 구체적인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으므로 지금은 그보다 앞서 나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107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가 지성을 주는 질서를 먼저 세우고, 다음 설명을 위한 출발점을 마련합니다. (AC.107)

 

 

 

AC.108, 창2:10, ‘동산과 강 - 사람을 자라게 하는 지혜의 물’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8태고인들은 사람을 ‘동산’(garden)에 비유할 때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도 ‘강들’(rivers)에 비유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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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6, 창2:9, ‘퍼셉션과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 - 그 성격은 뒤에서 밝혀진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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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쪽은 천국에서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나 결혼했지만, 뒤늦게 지상 배우자가 사후 중간 영계에 막 도착할 경우는?

 

 

이 질문은 결코 엉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결혼론과 영계 질서의 핵심을 정확히 찌르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네, 그런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다만 그 만남은 비극도 아니고, 충격도 아니고,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재회가 이루어진 뒤, 각자의 길을 가는 형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장면을 분명히 보았고, 그에 대해 매우 섬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장면을 여러 번 관찰했습니다.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국에 먼저 간 사람은 이미 자기 본질에 맞는 짝을 찾았다

 

천국에서의 혼인은 지상의 법률적 혼인이 아니라 영적 본질(affectional essence)이 맞는 두 존재의 결합입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함께 살았던 부부라도 영적 본질이 전혀 맞지 않았다면, 천국에서 부부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중간 영계에서 정화된 뒤, 자신과 영적으로 가장 잘 맞는 ‘진짜 짝’을 만나 천국적 결혼을 이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예비하신 진짜 짝’이라고 표현합니다.

 

 

이후, 지상 배우자가 죽어 중간 영계에 도착한다

 

이때 중간 영계에 들어온 지상 배우자는 먼저 천국에 올라간 배우자가 ‘다른 천국적 짝’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대부분 처음에는 죽음의 평안 속에서 자신의 새로운 상태, 천사의 안내, 중간 영계의 분위기 등 이런 것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먼저 천국 간 배우자가 중간 영계 배우자를 보러 오는가?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천국에 간 사람은 ‘굳이 내려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둘 사이에는 더 이상 영적 친화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영적 친화성이 없는 존재는 서로에게 끌림이 생기지 않는다.’ 즉, 주님이 그 마음 안에서 집착을 제거하셨기 때문에 억지로 가서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일시적 만남은 허용된다

 

중간 영계에 새로 도착한 지상 배우자가 강하게 보기 원하거나 서로에게 아직 ‘남은 질문’이 있다면, 천사들이 그 만남을 잠시 허용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아주 자세히 이야기합니다. 그 만남은 대부분 다음과 같습니다. 둘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러나 이전처럼 강한 감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서로 ‘, 당신이 오셨군요.’ 정도의 자연스러운 인식이 있습니다. 대립도, 갈등도, 원망도 없습니다. 은근한 감사, 또는 담담한 정서가 흐릅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하게 말합니다. ‘당신도 당신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맞는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헤어집니다.

 

 

그 이별은 슬픔이 아니라 평화에 가깝다

 

스베덴보리는 강조합니다. ‘영계에서의 이별은 지상의 감정적 상실이 아니다. 상태가 맞지 않는 둘은 자연스럽게 헤어진다.’ 즉, 천국에 있던 배우자도 슬퍼하지 않고, 중간 영계에 도착한 배우자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간 영계에서는 이미 지상적 집착(attachment)이나 소유 의식이 천사들에 의해 부드럽게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만남은 억지도, 슬픔도, 미련도, 적대도 없이 단지 ‘아주 조용한 고별’ 같은 이런 정서로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평화로운 결별 장면’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간 영계에 도착한 그 배우자는 어떻게 되는가?

 

그는 자신에게 가장 맞는 영적 상태를 향해 중간 영계에서 정화 과정을 거치며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정화가 충분해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진짜 짝, 즉 자신의 본성에 가장 잘 맞는 이성(異性)을 만나게 됩니다. 그 결합은 지상 결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밝고 평화롭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혼의 진짜 결혼’이라 불렀습니다.

 

 

이런 재회와 결별은 비극이 아니라 질서이다

 

스베덴보리는 결론을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에서의 결혼은 영적 질서이며, 불일치한 둘이 억지로 함께 있는 일이 없다.’ 그리고 또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지상에서의 결혼은 과정이고, 천국에서의 결혼은 본질이다.’ 즉, 지상에서는 의무, 상황, 문화, 정, 책임이 부부를 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영혼의 본질이 같아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말씀처럼 만나더라도 평범하게 헤어지는 경우가 맞습니다

 

네, 목사님 말씀이 정확합니다. 이미 천국에서 다른 짝을 만난 쪽은 한때의 지상 배우자를 따뜻한 기억으로만 바라보며, 중간 영계에 막 도착한 배우자와는 조용히 재회하고, 조용히 인사하고, 조용히 각자의 길을 가는 그런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의 감정적 분위기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별에는 고통이 아니고, 서로의 길을 인정하는 평화가 있다.’

 

 

 

SC.75, ‘지상에서 배우자가 없었던 사람의 천국에서의 결혼은?’

지상에서 배우자가 없었던 사람의 천국 결혼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바로 스베덴보리의 경우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주님이 정해주신 짝을 만나 결혼했겠지요? 목사님, 이 질문은 스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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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3, ‘부부 중 한 사람만 신앙이 깊은 경우, 사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관찰한 수많은 부부의 사후 모습들인데요, 이 주제는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목사님처럼 실제로 목회를 하시는 분에게는 특별히 자주 받는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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