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2:9)

 

AC.102

나무(tree) 퍼셉션을 의미합니다. 보기에 좋은 나무(tree desirable to behold)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tree good for food) 선에 대한 퍼셉션을 의미합니다. 생명나무(tree of lives)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감각적인 것에서,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Atreesignifies perception; atree desirable to behold,the perception of truth; atree good for food,the perception of good; thetree of lives,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the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

 

해설

AC.102는 창2:9에 나오는 여러 나무의 속뜻을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나무자체는 퍼셉션을 의미하고, ‘보기에 좋은 나무는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에 대한 퍼셉션을 의미합니다. 이어 동산 중앙의 두 나무 가운데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중심에는 천적 인간이 선과 진리를 어디에서 받아들이고 지각하는가 하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먼저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의 AC.96-99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퍼셉션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특별한 직관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와 관계됩니다. AC.99에서는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동산 안의 나무들은 바로 그러한 퍼셉션이 선과 진리에 관계하여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보기에 좋은 나무먹기에 좋은 나무도 단순히 아름답고 먹음직스러운 자연의 나무를 뜻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전자는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후자는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여기서 진리와 선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에서 지성과 사랑이 함께 다루어진 것처럼, 천적 인간은 진리를 단순히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선을 받아들여 삶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동산의 풍성함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보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지각할 수 있는 내적 생명의 풍성함을 나타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사랑과 신앙이라고 병렬적으로만 말하지 않고 신앙이 사랑에서 나온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질서와 일치합니다. 신앙이 먼저 독립적으로 서서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의미하는 생명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신앙의 생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신앙에까지 생명을 주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기억지식 자체를 부정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의 AC.99에서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으므로, 기억지식은 그 자체로 거듭남에 방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어디에서 나오느냐에 있습니다.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이 아니라,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이 축적한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거기에서 신앙을 만들어 내려 할 때 질서가 달라집니다.

 

이 점에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차이는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보다 더 깊습니다. AC.102는 두 경우 모두 신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 신앙의 근원을 다르게 설명합니다. 생명나무에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신앙이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창2의 두 나무를 이해할 때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앎과 신앙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천적 질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먼저이고, 이해와 신앙과 지식은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AC.102는 아직 각각의 나무가 왜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상세히 논증하지 않습니다. 우선 상응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그것을 더 풀어 갈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뒤의 설명을 미리 가져와 결론을 확대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제시한 대조를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동산의 나무들은 퍼셉션을 나타내며, 생명나무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오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으로부터 신앙이 나옵니다. 이 서로 다른 생명의 질서가 앞으로 두 나무에 관한 설명을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AC.102)

 

 

 

AC.103, 창2:9,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은 천적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의

bygrace.kr

 

AC.101, 창2:8, ‘동쪽은 주님 -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1주님이 ‘동쪽’(east)이시라는 것은 말씀에서도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관찰한 수많은 부부의 사후 모습들인데요, 이 주제는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목사님처럼 실제로 목회를 하시는 분에게는 특별히 자주 받는 질문일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았지만, 영계를 왕래하며 수천 쌍의 부부를 관찰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사후 상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때로는 고통스러운, 때로는 감동적인 장면들을 통해 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습니다. ‘영적으로 맞지 않던 부부는 사후에 자동으로 분리되지만, 서로를 사랑했던 부부는 다시 만나 조용한 이별 또는 새로운 결합을 경험한다. 그리고 영적으로 깊이 맞았던 부부는 천국에서도 진짜 부부가 된다.’

 

 

겉으로만 신앙이 있었던 배우자의 경우, 자연스러운 이별

 

스베덴보리가 가장 자주 본 유형입니다. 지상에서는 교회 다니고, 예배 참석하고, 외적 신앙 행위를 하던 배우자가 실제로는 자기애, 명예욕, 세속 욕망, 이기적 동기 속에서 살았던 경우입니다. 이 부부는 지상에서는 서로 생활을 함께하더라도, 내적 삶(affection)은 이미 다른 방향입니다. 그래서 사후에는 중간 영계에서 자연스럽게 서로 멀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들은 누가 끊어놓은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사랑의 흐름이 없다.’ 이 이별은 다툼도 없고, 원망도 없고, 씁쓸함도 없이 아주 조용하게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억지 동거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신앙이 깊고, 다른 쪽은 선한 사람인 경우’, 부드러운 재회와 조용한 결별

 

이 경우는 지상에서 흔히 있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은 신앙이 깊고, 영적 진리를 사랑했는데, 아내는 신앙은 없지만, 선하고 다정하며 양심이 깊은 경우, 혹은 그 반대인 경우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부부를 중간 영계에서 종종 보았습니다. 이럴 경우, 이들은 먼저 서로를 알아보고, 반갑게 재회합니다. 지상에서 서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서로의 상태를 보고, 깊은 감사가 오갑니다. 지상에서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영적 본질(사랑의 종류)의 차이가 드러나며, 결국 서로 다른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이 과정은 대부분 매우 평화롭게, 슬픔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축복하며 헤어진다.’ 이 흐름은 서로의 내적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지, 관계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한쪽은 깊은 영적 삶, 다른 쪽은 신앙과 선이 전혀 없는 경우’, 짧은 만남, 그리고 이별

 

스베덴보리는 이런 유형의 부부에 대해 약간은 안타까운 사례들을 기록합니다. 지상에서는 법적 부부였지만, 감정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살았거나 사실상 각자 따로 삶을 살았던 부부들인데요, 이들은 사후에 잠시 재회하지만, 서로에게 아무런 영적 끌림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묘사합니다. ‘그들의 만남은 의무감이 아닌, 마치 예절 같은 만남이었다.’ 그러고 나서 둘은 각자 자신의 상태에 맞는 길로 자연스럽게 떠납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어서 생기는 이별이 아니라, 사랑의 종류(본질)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사랑했지만, 영적 수준 차이가 컸던 부부’, 감동적인 장면들

 

이 경우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먼저 떠난 배우자의 깊은 영적 삶과 뒤따라온 배우자의 아직 미숙한 상태가 중간 영계에서 서로 비교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은 신앙과 진리의 삶을 깊이 걸었고, 아내는 신앙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 남편을 깊이 애정하고 존중하며 살았던 경우, 또는 그 반대인데요, 이런 경우, 사후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다시 만나 다음과 같은 ‘영적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먼저 상호 감사의 눈물입니다. 지상에서 서로에게 준 사랑과 지지에 대한 감사를 표현합니다. 다음, 영적 차이의 인식인데요, 둘은 서로의 내적 상태 차이를 즉시 느낍니다. 천국 상태의 배우자는 그 상태를 낮추어 상대에게 맞추어 줍니다. 그러나 결국 각자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영적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들의 이별은 아픔이 아니라, 서로의 길을 인정하는 평화였다.’

 

 

영적 친화성이 깊었던 부부’, 천국에서도 진짜 부부가 된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감동적으로 기록한 장면들입니다. 이들은 지상에서 서로를 깊이 존중, 서로를 도우며 성장을 도왔고, 서로의 신앙과 양심의 길을 지지함으로써 마음의 깊은 결합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사후에는 중간 영계에서 잠시 정화 과정을 거친 후, 둘이 천국의 같은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보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시 만나 , 이 사람이 나의 진짜 짝이었구나!’ 하는 환희를 느낀다.’ ‘지상에서는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보지 못했으나, 천국의 빛 속에서는 그 결합이 명백해졌다.’ 이 부부는 천국에서도 실제로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일심동체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에서의 결혼은 영혼의 결합이므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참된 하나이다.’ 지상에서 서로 깊이 맞았던 부부는 천국에서도 진짜 부부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최종 결론, 부부 결합은 지상의 법률이 아니라 영적 본질이 결정한다

 

스베덴보리는 천 명 이상의 부부 사례를 관찰하고 이렇게 결론내립니다.

 

- 영적으로 맞지 않은 부부는 사후에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 사랑은 있었지만, 본질이 다르면 일시적 재회 뒤 조용한 이별이 있다.

 

- 한쪽만 깊은 신앙을 가졌더라도, 선한 자는 천국으로 인도된다.

 

- 천국에서도 부부는 지상의 외적 결혼이 아니라 내적 결합으로 결정된다.

 

- 정말 서로의 영적 본질이 맞는 부부는 천국에서도 영원히 함께 산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에서의 결혼은 주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결합이며, 지상에서는 각자 서로를 돕는 길을 걷는 것이다.’

 

 

 

SC.74, ‘이미 한쪽은 천국에서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나 결혼한 경우’

이미 한쪽은 천국에서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나 결혼했지만, 뒤늦게 지상 배우자가 사후 중간 영계에 막 도착할 경우는? 이 질문은 결코 엉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결혼론과 영계

bygrace.kr

 

SC.72, ‘천국에서의 가족은 어떻게 새롭게 구성되는가?’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탐방하면서 ‘천국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는 가족이 혈연으로 묶여 있지만, 영계에서는 혈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탐방하면서 ‘천국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는 가족이 혈연으로 묶여 있지만, 영계에서는 혈연이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 애정의 본질(사랑의 종류)이 결합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러 차례 관찰하면서 결국 확신한 결론은 이렇습니다. ‘천국의 가족은 지상 혈연을 바탕으로 재편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본질이 서로 맞는 사람들로 새롭게 구성된다.’ 그러나 이것이 지상 가족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고, 더 진정한 방식으로 재구성되는 것입니다. 아래에서 그 실제 모습을 깊이 있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천국에서의 가장 기본 원리, 혈연이 아니라 내적 애정(affection)이 가족을 형성한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 들어갔을 때, 가장 충격을 받은 사실 중 하나가 ‘천국에서 가족은 혈연이 아니라 사랑이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혈연은 자연계의 관계인 반면, 천국은 영적 친화성으로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의 사람들은 자연적 혈연보다, 영적으로 친근한 이들과 더 깊은 결합을 이루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천국에서는 같은 종류의 선을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를 가족으로 여긴다.’ 즉, 천국 공동체란 비슷한 선(善)의 냄새와 색깔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입니다.

 

 

천국의 가족 공동체는 같은 종류의 선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공동체를 ‘향기’와 ‘빛깔’로 묘사했습니다. 예를 들어, 부드럽고 자비심 많은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진리를 추구하는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섬김과 겸손의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아이 같은 순전한 선을 가진 영들의 공동체 등, 이들은 마치 서로 ‘같은 영적 호흡’을 하듯 함께 있을 때 깊은 평화를 느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천국의 가족적 결합’이라 부릅니다.

 

 

지상 가족은 천국에서 새로운 방식의 따뜻한 가족이 된다

 

스베덴보리가 발견한 아름다운 사실 하나는 지상 가족이 천국에서 완전히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상과는 다른 방식의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 성인 자녀는 함께 살지는 않지만, 서로의 공동체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깊은 애정을 나눕니다. 신앙적, 성격적으로 가까웠던 형제자매는 종종 같은 층위의 천국에 있게 되어, 인간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합니다. 부부 중 영적 친화성이 같았던 경우에는 천국에서도 실제 부부로 생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의 가족 관계는 지상에서보다 더 깊고, 더 진실하고, 더 자유롭다.’

 

 

천국의 한 공동체는 영적 친화성이 모여 이루는 가족 같은 사회

 

스베덴보리가 본 천국의 공동체는 단순한 모임이나 이웃이 아니라 ‘가족 같은 영적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 안에는 선배 같은 존재, 동료 같은 존재, 동생처럼 느껴지는 존재, 이웃 같은 존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며, 각자는 자신과 마음이 가장 잘 맞는 사람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가족의 재편성’이라고 부릅니다. 이 가족들은 혈연의 형태는 없지만, 그 깊이는 지상의 가족보다 더 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비난, 질투, 오해, 상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상 가족과의 애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천국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갖는다고 해서 지상의 가족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지상의 가족은 천국에서도 사랑으로 기억되며, 서로의 평안을 기뻐한다.’ 즉, 지상 가족은 천국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기억되는 특별한 인연입니다. 하지만 각자 영적으로 가장 편안한 공동체에 가기 때문에 모두 한 집에 살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상 가족이 천국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기도 한다

 

스베덴보리가 본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지상에서 실제로 영적 친화성이 매우 깊었던 가족이 천국에서도 비슷한 층위의 공동체에 들어가 더 밝고 자유로운 형태의 가족이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둘 다 선을 사랑했다면 천국에서도 실제 부부로 사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와 성인 자녀가 같은 천국 층위에서 자주 교류하기도 하고, 영적으로 깊은 유대를 맺은 형제자매가 같은 공동체 안에서 돕고 지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천국에서 가족은 지상보다 더 온전한 방식으로 보존된다.’

 

 

가장 중요한 핵심, 천국의 가족 공동체는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가장 조화롭게 재구성된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확인한 진리는 이것입니다.

 

- 천국에서는 혈연이 아니라 선(善)의 본질로 가족이 구성된다.

 

- 지상 가족은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유지된다.

 

- 영적으로 친화성이 깊었던 가족은 천국에서도 특별히 가깝다.

 

- 영적 수준이 다르면 서로 왕래는 가능하지만, 함께 살지는 않는다.

 

- 천국 공동체는 서로를 가족처럼 느끼는 새로운 영적 질서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슬픔 없이, 집착 없이, 평화와 기쁨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의 질서 안에서는 어떤 관계도 어그러짐이 없다. 모든 결합은 가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SC.73, ‘부부 중 한 사람만 신앙이 깊은 경우, 사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관찰한 수많은 부부의 사후 모습들인데요, 이 주제는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목사님처럼 실제로 목회를 하시는 분에게는 특별히 자주 받는 질

bygrace.kr

 

SC.71, ‘영계에서 가족끼리 자주, 그리고 드물게 만나는 경우’

영계에서는 누구와 자주 교류하고, 누구와는 특별한 때에만 만나고, 누구와는 거의 만나지 않게 되는가? 이것은 모두 내적 상태(state)에 의해 결정된다고 스베덴보리는 아주 일관되게 기록합니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